출처 : https://m.blog.naver.com/qordb6712/120160442735
선생님은 손에 분필을 든 채로 입을 열었다.
"너는 그제께 밤, 먼저 시게 짱과 같이 둘이서 동굴로 들어갔어."
선생님은 칠판에 동굴 그림과 동그라미와 선만으로 된 인간이 두 명을 그린다.
그리고 그 위에 ①이라고 적었다.
"외길인 동굴 안쪽에는 얼굴 뉴도 바위가 있고 스님 미라가 있다고 하는 그 너머로는 갈 수 없어. 둘은 화내기 직전인 얼굴을 본 뒤에 입구로 돌아왔지."
선생님은 갔다 돌아온 화살표를 동굴 안쪽에 그린다.
그리고 그 옆에 '화내기 전' 이라고 썼다.
"그 후 타로 짱이 교대하듯이 혼자서 동굴로 들어갔어."
②라고 적고 또 동그라미와 선만으로 된 인간을 그린다.
"동굴 안에서 비명이 들리고 타로 짱이 뛰쳐나왔어. 그리고 그대로 절벽으로 떨어졌지."
화살표를 동굴 출구에서 그려나가다가 밑으로 꺾었다.
"타로 짱은 얼굴 뉴도가 화냈다고 말했어."
② 화살표가 동굴 안쪽으로 유턴하고 그 옆에 '화낸 후' 라는 글자.
"다음 날 즉 어제 오후 넌 혼자서 한 번 더 동굴로 갔지."
그게 ③이다.
"그때는 제대로 확인했지만 동굴은 틀림없이 외길이었고 숨겨진 길이나 사람이 숨을 곳은 없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안에는 얼굴 뉴도 바위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웃고 있었어."
선생님은 ③ 화살표 끝부분에 '웃는다' 라고 적었다.
그랬다.
얼굴 뉴도는 웃고 있었다.
낮인데도 손전등 빛 없이는 깜깜한 동굴 심층부에서 나는 하얀 얼굴과 마주보았다.
그 광경을 다시 떠올리니 등골이 서늘해진다.
"바위에 얼굴을 그린 도료는 오래된 거라 하루이틀만에 덧그린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분필을 들어올려 '웃는다' 위에 '오래됨' 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화내기 전' 과 '화낸 후' 위에는 '오래됨?' 이라고 물음표를 붙여서 적었다.
선생님은 빙글 돌아서더니 입가를 씩 올렸다.
"그저께 밤에는 가까이서 확인하지 않았지?"
듣고 보니 그랬다.
그치만 정말로 바위가 화내거나 웃을 거라고 당시에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 얼굴 뉴도 바로 밑에 하얀 도료가 묻은 바위가 튀어나와 있었지? 넌 빠진 이빨이라고 생각한 그 바위. 거기에 묻은 도료도 오래된 거였니?"
어? 그러고 보니 그건 확인하지 않았다.
얼굴을 그린 도료랑 똑같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최근 덧그렸을 때 묻은 건지도 몰라."
덧그리다니.
역시 선생님은 얼굴 뉴도의 표정이 바뀐 건 누가 바위에 그림을 덧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어제 네가 확인했을 때 오래된 도료가 묻어 있었어. 그러니 그 전에 덧그리지는 않았을 거야. 게다가 너와 시게 짱이 나온 후에 타로 짱이 홀로 들어가기 전까지 누가 덧그리는 건 불가능하잖니. 입구는 하나밖에 없고 숨을 곳도 없어. 그 입구도 너희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 말대로지만 그럼 왜 얼굴은 화낸 걸까?
"간단해. 산수처럼 쉽지. 그저께 네가 시게 짱과 같이 본 얼굴은 바위에 그려진 게 아니었어."
쾅 얻어맞은 충격이 들었다.
확실히 그때는 얼굴을 가까이서 보지 않았다.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바위에 그려졌다고 말했기에 그냥 그런 줄만 알았다.
그건 그림을 그린 종이 판자를 바위 앞에 둔 건가.
잠깐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왜 표정이 바뀌는 거지?
"여기서 고려해야 하는 건 그저께 낮에 너희가 비밀기지에 모여서 얼굴 뉴도 동굴로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야."
선생님이 짓궂은 얼굴로 나를 시험하듯이 바라본다.
떠올려라.
그때 시게 짱이 나를 동료로 인정해도 되지 않겠냐고 말을 꺼내고 나를 그날 밤 얼굴 뉴도 동굴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리고 모두 무서워서 핑계를 대며 도망쳤다.
그리고 겁쟁이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던 타로 짱이 우물쭈물하다가 시게 짱에게 붙잡혔다.
머릿속이 번뜩였다.
떠오른 생각이 사라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정리했다.
그날 밤.
산속 동굴에는 나와 시게 짱과 타로짱 3명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곳에 밤중에 누가 올 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 3명이 그날 밤 거기에 가는 걸 아는 녀석들이 있다.
무서워서 안 가겠다고 말한 다른 애들이다.
그리고 얼굴 뉴도에 붙은 종이.
알았다! 종이 판자 뒤에 처음부터 숨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동굴로 들어가기 전부터!
그런 곳에 누가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니 생각도 못했다.
그치만 그 녀석들이라면 가능하다.
우리가 올 줄 알았으니까.
'화내기 전' 종이 판자 뒤에 숨어서 나와 시게 짱은 그냥 보내고 그 뒤에 들어온 타로가 오기 전에 하나 더 준비해둔 종이 판자랑 바꾸어서 '화낸 후' 로 만든 것이다.
어쩌면 동그란 종이 판자 양면에 얼굴을 그려넣고 휙 뒤집은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위에 그려졌을 얼굴이 화내고 있자 놀란 타로 짱이 비명을 지른다.
우리가 다친 타로 짱을 업고 산을 내려간 후에 종이 판자 채로 철수한다...
제기랄 누가 이런 장난을 한 거야.
타카 짱인가 토시 보인가 유스케인가 그게 아니면 캇 칭인가.
어쩌면 두 명 아니 그 비밀기지에 있던 사람 전부일지도 모른다.
비겁한 놈들이다.
쳐죽여주겠어.
시게 짱에게 일러바쳐서 둘이서 복수해줄 테다.
내가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것을 선생님은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갑자기 안색을 싹 바꾸었다.
"잠깐만. 지금 뭐라 말했니?"
늘 자상한 얼굴을 하던 선생님의 뺨이 굳는 걸 알 수 있다.
눈을 부릅 뜨고 흰자위가 커진다.
눈썹이 올라간다.
그 말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대답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그런 폭발 직전인 확인 절차였다.
"뭐라고 말했니."
그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 저기, 그."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나는 다리가 떨렸다.
이제부터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담임 선생님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 시간이 제일 싫었다.
뭔가 나쁜 짓을 해서 혼나는 건 항상 있는 일이지만 화내기 전에 쌓이는 시간.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나는 제일 무서웠다.
왜일까.
쳐죽여주겠다는 말을 쓴 게 잘못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나도 깨닫지 못한 실수를 저지른 걸까.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다 아는 척 '친절한 선생님' 이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기뻐했던 것이 바보 같다.
대체 뭐가 선생님을 화나게 한 걸까.
그런 걸 이윽고 쌓인 분노가 폭발하길 기다리며 생각하면서 그 노려보는 무시무시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꼭 감고 말았다.
"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나 해?"
화를 눌러 참는 것 같은 목소리가 스윽 다가온다.
아, 뺨 맞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나는 뺨에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쭈욱 볼살이 좌우로 늘어난다.
내가 놀라 눈을 뜨니 눈앞에서 씩 웃는 선생님의 부드러운 얼굴이 있었다.
"미안해. 화낼 줄 알았니?"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앞머리를 짧게 자른 그 얼굴은 늘씬한 목 위에 귀엽게 올려져서 나보다 훨씬 연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아주 조금 연상인 여자애처럼 보였다.
그 탓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혼날 줄 알고 긴장했던 탓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네가 착각을 하고 있으니까 알기 쉽도록 알려주려고 한 것뿐이야."
선생님은 잘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스윽 내게서 떨어지고 교단으로 돌아갔다.
"너와 시게 짱이 처음에 본 얼굴 뉴도는 바위에 그려진 게 아니었지만 네가 생각한 것 같은 종이 판자는 아니었어. 종이 판자가 진짜 얼굴 뉴도 앞에 있었다면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겠지. 거기에 누가 숨어서 타로 짱이 오기 전에 종이 판자를 바꾸면 눈 깜짝 할 사이에 얼굴 뉴도는 화난 얼굴이 돼. 그치만 잘 생각해 보렴. 어떻게 그 사람은 나중에 타로 짱이 오는 걸 알았겠니?"
깜짝 놀랐다.
그랬다. 타로 짱은 갑자기 겁을 먹고 우리가 들어간 후에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억지로 시게 짱이 데리고 간다면 셋이서 '화내기 전' 얼굴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앞에서 종이 판자를 들키지 않고 바꾸는 건 불가능하고 우리가 그냥 돌아가 버리면 모처럼 세운 계획도 헛수고가 된다.
시게 짱도 타로 짱도 아마 다른 애들도 한 번은 얼굴 뉴도를 보았을 테니 처음부터 화난 얼굴을 준비했다면 처음에 본 순간 "얼굴 뉴도가 바뀌었다. 으악!" 하고 놀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네. 게다가 네가 본 하얀 이빨 같은 바위가 중요한 힌트가 되지."
선생님이 천천히 검지를 세웠다.
"도료가 묻은 바위가 얼굴 뉴도 바로 밑에 있었잖니."
아, 그렇구나.
"그러니 빠진 이빨이라고 생각했겠지. 그것도 그저께와 어제 두 번이나 보고서도 똑같다고 생각했어. 그렇다는 건 도료가 묻은 바위와 얼굴 뉴도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는 거야. 여기까지 말하면 알겠니? 즉, 얼굴 뉴도 바위 앞에 종이 판자를 만들어서 그 사이에 사람이 숨었다면 반드시 그 바로 밑에 있는 도료가 묻은 바위도 가려질 테니까..."
그러니 종이 판자 트릭은 아니다.
그런 결론이 선생님 입에서 술술 나온다.
그것 자체는 납득했지만 전혀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쓸데없이 기분 나빠졌다.
그렇다면 얼굴 뉴도는 역시 멋대로 화내거나 웃는 거잖아.
내가 투덜거리니 선생님이 우후 웃었다.
"그렇단다."
에엥. 맥이 빠졌다.
그럴 수가.
"정확히 말하자면 얼굴 뉴도는 멋대로 화내지만 멋대로 웃지는 않았지."
왠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면서 선생님은 분필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칠판에 그려진 '화내기 전' 글자 뒤에 '?' 를 적어넣는다.
선생님은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까 내가 화낼 것 같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즐거워진다.
이제부터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그건 연기지만 너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혼날 것 같아서 눈을 감고 체념했었지."
부끄러워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제부터 화낸다는 건 이미 화났다는 거야."
그야 그렇다.
어른이 화낼 때는 대개 패턴이 정해져 있으니까.
눈꼬리가 올라가고 우리 대답할 수 없는 걸 추궁하고 화를 내거나 때린다.
진심으로 화내기 전에 이제부터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다.
어라?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다.
선생님은 키득키득 웃은 후 장난스레 내 쪽으로 돌아섰다.
"네가 처음에 본 '화내기 전' 얼굴. 그건 실은 '화내는 얼굴' 이 아니었니?"
머리를 쾅 얻어맞은 것 같았다.
화내기 전이라는 건 화내고 있다는 것.
그렇다. 화를 참고 있다는 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폭발하기 전인지 후인지일 뿐이다.
"그치만 이상해. 타로 짱도 전에 한 번 봤을 텐데 얼굴이 화를 냈다고 말하며 도망쳤는걸."
"그러네. 그러니 그때 타로 짱이 본 건 전에 본 얼굴과 달랐던 게 확실해. 타로 짱이 전에 봤던 얼굴은 네가 어제 혼자서 봤던 진짜 얼굴 뉴도 얼굴이었을 거야. 웃고 있는 얼굴이 이번에는 화를 내고 있었는걸. 그야 깜짝 놀랄 만도 하지."
어? 어떻게 된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선생님이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말했잖니. 네가 처음에 본 얼굴은 바위에 그려진 게 아니었다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뒤에 숨을 수 있는 판자에 그려진 것도 아니었어. 하얀 도료가 묻은 바위가 있었으니 다른 장소도 아니야.... 아마도 두꺼운 종이를 얼굴 뉴도 바위에 붙이고 그 위에 하얀 도료로 다른 얼굴을 그린 거지. 웃고 있는 얼굴 위에 화난 얼굴을."
그 바로 밑에 뾰족한 바위게 도료가 묻은 건 그때겠지.
선생님은 내 눈을 보면서 확인하듯히 천천히 말한다.
확실히 그거라면 거의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니까 빠진 이처럼 보이는 하얀 바위 위치도 바뀌지 않는다.
그치만 그래서는 사람도 숨을 수 없게 된다.
"누가 숨어 있을 필요는 없단다. 얼굴이 멋대로 바뀐 거니까. '화내기 전' 에서 '화낸 후' 로. 아까 말했듯이 '화내기 전' 얼굴과 '화낸 후' 얼굴은 똑같아. 다만 그걸 보고 있던 인간의 심리가 달랐을 뿐이지."
점점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그치만 그럴 수가.
그렇다면.
"네가 처음 그 얼굴을 보았을 때,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물고 서슬퍼렇게 노려보았지. 그 표정에 놀랐지? 아까 내가 그런 얼굴을 했을 때 넌 혼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얼굴 뉴도 때는 그 얼굴이 화내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자, 이유가 뭘까?"
그 답은 알고 있다.
지금 떠올렸다.
그때 말을.
비명을 지를 것 같은 내게 용기를 준 그 말.
'다행이다. 아직 화나지 않았어.'
시게 짱이다.
내 옆에서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시게 짱이 이 얼굴 뉴도 사건 범인이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모든 게 이어졌다.
선생님은 조용한 어조로 그걸 도와주었다.
"처음부터 시게 짱이 장난 칠 계획이었던 거야. 그것도 실은 겁쟁이인데 입만 산 타로 짱을 표적으로 삼았지. 내가 비밀기지에 있었을 때를 떠올려보라고 했던 건 얼굴 뉴도를 그날 밤에 보러 가자고 말한 게 시게 짱이라는 걸 떠올리라는 거였어. 너는 이상한 착각을 해 버린 모양이지만."
나는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봄철에 얼굴 뉴도 소문을 듣고 보러 간 악동들은 동굴 안에서 웃고 있는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장난을 좋아하는데다 손재주도 좋은 시게 짱이 그 얼굴을 화나게 하려고 종이를 붙여서 그 위에 페인트 같은 걸로 얼굴을 그렸다.
그 준비가 끝난 후에 신입인 나를 데리고 간다는 명목으로 모두에게 제안했다.
표적은 건방진 타로 짱이었으니까 다른 겁쟁이들은 도망쳐도 상관없다.
오히려 다 같이 가면 모두 이상하게 겁이 없어져서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알아차릴 가능성도 있었으니 더 잘 된 셈이다.
세 명이서 동굴에 도착했을 때 타로 짱이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버텼다.
억지로 끌고가는 수도 있었으나 거기서 시게 짱은 묘안을 떠올렸다.
웃고 있는 얼굴을 보지 않은 나를 데리고 먼저 간 뒤 타로 짱은 나중에 가게 만드는 것이다.
승낙한 타로 짱을 남겨두고 동굴로 들어간 시게 짱은 화내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보고 놀라는 내게 "다행이다, 아직 화나지 않았어." 라고 말하며 안심시켰다.
그렇게 말하면 그런 얼굴로 보이니까.
당연히 나는 전에 시게 짱이 봤던 얼굴 그대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속대로 나중에 들어간 타로 짱에겐 그야말로 웃고 있었을 얼굴이 화난 얼굴로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였는데 설마 동굴에서 뛰쳐나와 절벽에서 떨어질 정도로 타로 짱이 겁이 많을 줄은 몰랐다.
무서워진 시게 짱은 자기 장난이라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다음 날 몰래 정리하러 갔다.
내가 웃고 있는 얼굴을 본 건 그 뒤였다.
그러고 보니 시게 짱은 나보다 먼저 집을 나갔다.
손전등이 안 보였던 건 그것 때문이었나.
이럴 수가.
시게 짱이 전부 시게 짱이 저지른 일이었나.
나는 멍해져서 설명을 들었다.
"웃고 있는 얼굴 도료가 오래된 걸로 보아 화난 쪽이 종이인 건 틀림없어. 그리고 그 종이를 보고 저번과 같다고 말한 시게 짱이 그 트릭을 알고 있었던 것도 틀림없지. 혹시 봄에 본 얼굴도 이미 종이가 붙어 있었다면 똑같은 얼굴을 본 게 돼. 타로 짱이 보여준 과도한 반응을 설명할 수 없어. 나머지는 조금만 추리해 보면 쉽지."
선생님은 칠판에 점 세 개를 탁 탁 탁 찍었다.
"그, 래, 서. 범인은 시게 짱. 이 점 세 개 마크인 ∴는 나중에 배울 기호야."
분필을 슬쩍 놓고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그 기호도 분필을 놓는 손가락도 눈썹 위에 정돈된 머리카락도 그때 내겐 전부 다 멋있어 보였다.
넋이 나간 나를 보고 선생님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태양은 천천히 높이 오르고 교실로 뻗어오는 햇빛은 책상이나 나무바닥에서 조금씩 늘어났다.
그 후 나는 산수 수업을 했다.
똑같은 문제인데 가르쳐주는 사람이 다르니 이렇게나 즐거워지는 게 이상했다.
열심히 문제를 푸는 내 옆에서 선생님은 학을 접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모이면 일어서서 창가에 걸린 천 마리 학에 또 동료를 늘려주었다.
그걸 계속 반복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 여름방학 학교 학생들이 감기가 나아서 둘만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도 그리고 아침이 낮을 지나 오후가 되듯이 여름도 언제가 끝나고 내가 여기를 떠날 날이 오는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선생님과 만나서 며칠째인지 세어본 적도 없었다.
그 매일은 둥실둥실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언제부터 다른 아이들이 감기에 걸린 건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선생님이 때때로 보여주는 멍하고도 슬픈 표정도 그 안쪽에 숨어 있는 것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계속 문제를 풀었다.
역사를 배웠다.
여름 속에 있었다.
"참 잘했어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선생님이 내 답안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벌써 낮이다.
여름방학 학교 시간도 끝났다.
나는 돌아갈 채비를 하면서 물어보았다.
"선생님 화난 척하는 거 엄청 잘하네."
진심이었다.
다가올 때 틀림없이 맞을 줄 알았으니까.
그걸 들은 선생님은 아하 웃었다.
무척이나 즐거운 듯이.
"고마워. 놀래서 미안해. 그치만 박진감 넘치는 연기여야 했었거든. 녹슬었는 줄 알았지만 나는 이래 봬도 연기자를 지망..."
꾹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한순간 굳어지고 꿀꺽 침을 삼킨 후 선생님은 눈을 내리깐 채 소리없이 웃었다.
바람이 불어가는 드높은 하늘 아래에서 잠깐 내 앞에 드러났던 선생님의 꿈은 천천히 닫혔다.
그것은 너무나도 섬세하고 아름다웠지만 하염없이 바라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콜록 콜록.
기침 소리가 들렸다.
먼 곳에서 들린 것 같았다.
그치만 눈앞에서 선생님이 입을 막고 있다.
무척이나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도."
단순히 목을 푸는 게 아니었다.
잠시 후 선생님은 또 콜록 콜록
기침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안. 나도 감기에 걸린 모양이야. 옮기면 안 되니까 내일부터 쉬도록 하자."
그럴 수가.
그건 싫어.
감기 같은 건 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쉬자는 말은 하지 말아줘.
그런 말을 하는 나를 말리며 선생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안 돼. 나쁜 감기야. 나으면 꼭 세계사를 마저 가르쳐줄게."
조르는 나를 선생님이 달래듯이 어깨에 손을 두었다.
"오늘은 너도 안색이 안 좋아. 너도 좀 쉬는 게 좋겠다."
그렇지 않다고 벌떡 일어서다가 무릎이 탁 꺾였다.
역시 아침부터 컨디션이 안 좋다.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분했다.
이제 두 번 다시 선생님과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또 콜록거리면서 선생님은 내 눈을 보았다.
"네가 처음으로 동굴에 들어갔을 때 이상한 환상을 보았지? 붉은 옷자락이 팔랑거리는 것을."
끝났을 사건을 갑자기 꺼내서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다는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 텐데 전혀 상관없는 붉은 옷자락 환상이라니 이상하다고 넌 생각했지."
그랬다. 왜 붉은 옷자락인 걸까.
그치만 동굴 안에는 숨을 곳도 없고 아무도 없었으니 그냥 환상이었을 게 틀림없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선생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마을에는 젊었을 때 죽은 여자애에겐 하얀 소복이 아니라 붉은 옷을 입히고 기린단다. 그 애가 시집 가기 위해 모아둔 돈으로 남은 부모가 마지막 축복을 해주는 거야. 칙칙한 삼베옷을 입히는 건 너무 불쌍하니까.
지금은 더는 하고 있지 않아. 아주 먼 옛날 풍습이었거든. 그리고 그 동굴이 있는 산은 죽은 자의 혼이 떠도는 곳이라고 두려워하고 있던 곳이었어. 등신불이 된 스님은 그걸 달래기 위해 입산했다고 해."
왠지 기분이 묘하다.
내가 본 건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던 걸까.
"아니, 환상이야. 이미 이 세상에는 없지. 그치만 넌 그걸 봤어."
선생님 눈이 빨려들어갈 것처럼 깊이 가라앉은 빛이 내 눈을 바라본다.
"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이상한 것이 보이는 거야. 이제부터도 계속. 그건 분명히 네 인생을 괴롭히겠지."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부드럽고, 요염하게.
"그래도 부디 눈을 감지 마렴. 예쁜 옷을 봐주어서 기뻤다, 그런 자그만 마음이 구원받지 못한 혼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리고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눈물이 흘러넘친다.
"잘 가렴."
선생님이 말했다.
"잘 가."
나도 그렇게 말했다.
비틀거리면서 교실을 나와서 복도를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가서 신발장에서 신발을 갈아신었다.
그리고 교정을 나와서 잠시 걸은 후 돌아보았다.
2층 교실 창문에는 선생님이 있다.
만났을 때 봤던 그 미소로.
그 옆에는 천 마리 학이 흔들리고 있다.
천 마리까지는 안 되겠지만 잔뜩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든다.
그리고 만나고 난 뒤 한 번도 선생님이 학교 밖으로 나가지 않은 걸 떠올렸다.
쨍쨍 햇빛은 내리쬐는데 낡은 기와지붕만이 유난히 색이 바래 보였다.
비탈길을 내려가니 점점 학교가 보이지 않게 된다.
나는 손을 내리고 논두렁길을 지나 숲으로 갔다.
친주의 숲은 평소보다 어둡고 습했다.
캄캄하고 밤 그 자체인 것 같은 나무가 만든 아치를 빠져나와 검은 흙길을 밟아나갔다.
머리가 띵하다.
기분이 나쁘다.
신사 참배길 앞을 지났다.
늘 그냥 지나치는데 어째선지 비틀거리며 들어가 버렸다.
새가 우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10엔짜리 동전을 새전함에 던져넣었다.
딸랑 소리가 났다.
나는 손을 모았다.
선생님의 감기가 나을 수 있도록.
모두의 감기가 나을 수 있도록.
그리고 참배길로 돌아갔다.
토리이를 지났다.
그러고 보니 전에 왔을 때는 이 밑으로 지나가지 않았었다.
무언가가 머릿속을 달린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아니, 아니다.
멈췄던 시간이 지금 움직인 것이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싸매고 숲을 빠져나와 어떻게 돌아온 건지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다음에 정신이 들고 보니 향나무가 보이는 마당에 접한 방 안에 있었고 나는 이불 속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끙끙대었다.
열이 나서 나는 이틀간 몸져누웠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애매해졌다.
다양한 것들이 폭풍처럼 달려지나갔다.
이마 위에 올린 미지근해진 수건을 때때로 누가 갈아주었다.
외할머니나 욧 짱이었을 것이다.
기침은 그다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콧물은 유난히 많이 나왔다.
코를 푼 휴지를 방 안에다 어질러 놓으며 나는 후후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열이 내린 사흘째 아침 눈을 뜬 내 옆에서 시게 짱이 앉아 있었다.
"거의 열이 내렸어."
그렇게 말하며 수건을 집어든다.
누운 채로 불평하는 내게 몇 마디 응수하고 그후로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밖은 날씨가 좋은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이 마을에 있는 동안 비 같은 건 거의 내리지 않았다.
문득 밭에 있는 작물은 괜찮은지 걱정이 되었다.
이윽고 시게 짱은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바꾼 건 자신이라고 말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놀란 얼굴.
전부 선생님이 추리한 대로다.
어떤 실패에도 주눅들지 않는 시게 짱이 그토록 기운이 없었던 건 자기 때문에 친구가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도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시게 짱이 사건 다음 날 얼굴 뉴도 위에 붙인 또 다른 얼굴을 때어낸 후에 홀로 옆마을 병원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타로 짱 병문안을 위해서다.
병원 침대에 축 누워 있는 타로 짱은 물로 시게 짱 짓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화내지 않고 묘하게 겸연쩍은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타로 짱은 자신이 겁을 먹고 꽁무니 빠져라 도망친 걸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시게 짱은 어른들이 추궁해도 입을 다물고 그냥 혼났던 것이다.
나는 시게 짱이 더 혼나는 게 두려워서 자기가 벌인 일이라는 걸 숨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책임을 지는 게 두목이 아니냐고 실망하고 있었는데 시게 짱은 타로 짱을 배려해서 처음부터 모든 걸 입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시게 짱은 훌륭한 두목이었다.
장난만 좀 안 친다면 좋을 텐데.
"선생님이라는 건 누구야?"
갑자기 시게 짱이 그렇게 물었다.
내가 헛소리로 중얼거린 모양이다.
아뿔싸 싶었다.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그러고 보니 열이 났을 때 선생님과 만난 것 같았다.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그치만 여기에 있는 것 같아서 선생님에게 말을 건 건지도 모른다.
아아, 시게 짱은 영악하니 쓸데없는 변명은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나는 포기하고 친주의 숲 너머에 있는 마을과 그곳에 있던 학교를 말했다.
스스로도 몰래 숨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나 선생님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구나.
자랑하고 싶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게 짱을 보니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직 열이 있는 모양이네."
시게 짱은 친주의 숲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른 자라면서 내게 수건을 던지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여우에 홀린 기분으로 왜 시게 짱이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건지 답답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누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서 나는 눈을 떴다.
장지문을 닫고 이불 옆에 온 건 외할아버지였다.
"친주의 숲 너머로 간 게냐."
외할아버지가 물었다.
시게 짱한테 들은 모양이다.
"응."
내가 입을 삐죽이니 험악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양반다리를 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그 마을은 외할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무시무시한 병이 돌아서 모두 털썩털썩 죽고 말았다고 한다.
남은 사람들도 마을을 버리고 흩어지고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건물만 썩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실제로 그 마을에 갔고 실제로 선생님도 만났고 실제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 그 숲 너머에 있는 공간에는 목가적인 산간 마을이 존재했지만 선생님 말고 다른 사람과 만나지 못한 걸 그제야 깨달았다.
교사 옆에 있는 집에 있다고 하는 선생님의 모친도 나 말고 4명 더 있다던 여름방학 학교 학생도 결국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치만 정말로 그런 버려진 마을이라면 왜 선생님은 그런 곳에서 혼자 있었던 걸까.
그리고 왜 거짓말을 한 걸까.
모르겠다.
생각하고 있으니 또 열이 날 것 같았다.
"그 병은 뭐야?"
겨우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외할아버지가 복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결핵이다."
결핵.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옛날 드라마에서 요양소에 들어간 여성이 기침을 하는 게 떠오른다.
"폐결핵이라고 진찰할 수 있는 의사가 당시 없었어."
감기가 유행한대.
감기가 유행이라니.
기침이다.
기침.
선생님도 기침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영문도 모르는 채 나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반복했다.
외할아버지가 그런 내게서 눈을 돌리고 일어났다.
방에 나가려고 장지문에 손을 대면서 생각난 듯이 말했다.
"우리가 얼굴 뉴도님의 화난 얼굴을 본 것도 그때였지."
이제 가지 말 거라.
탁. 장지문이 닫혔다.
영문을 모르겠다.
아니,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알고 있다.
다만 알고 싶지 않았다.
나 자신이.
머리를 감싸쥐고 있으니 잠시 후 또 장지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죽을 쟁반에 얹고 외할머니가 들어왔다.
나는 외할머니에게 달려들듯이 말했다.
"그치만 선생님은 알고 있었어. 커다란 향나무가 마당에 있는 집이라고 말한 것만으로도 시게 짱 집이라고..."
외할머니는 아이를 어르듯이 내 손을 잡고는 쟁반을 머리맡에 둔 뒤 뭐든지 알고 있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외할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매우 장난을 좋아하는 악동으로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고 한다.
이름은 시게하루.
손자인 시게 짱의 이름은 그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어렸을 적부터 이 집 마당에 있는 향나무는 커다란 가지를 지붕까지 뻗쳤다.
"역시 씌었구나*. 불쌍한 것. 불쌍한 것. 씌어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일본어로 '피곤해서 지치다'와 '귀신에 씌다'라는 말은 둘 다 츠카레타(つかれた)라고 쓴다. 중편에서 외할머니가 "지친 거 아니니." 라고 물었던 건 실은 "귀신에 씐 거 아니니." 라고 물었던 것.
외할머니는 "엣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할아버지처럼 방을 나갔다.
씌었다? 내가?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뒤죽바죽 섞여서 덜덜 몸이 떨린다.
그리고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내 감기는 단순한 감기였다.
전염성이 무서운 병이 아니었다.
완전히 몸이 나은 뒤에도 나는 그다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집에 틀어박혀서 숙제를 끝내고 공민관에 있는 도서실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시게 짱이나 병원에서 돌아온 타로 짱이 놀러 가자고 해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골판지 상자로 만든 슈퍼카에 타고 노는 애들을 보고 있으면 모두 너무나도 못 만든 게 참을 수 없었고 난 멋있는 페라리를 만들어서 참전했다.
그저 부딪치면 노는 것뿐이지만 애들이 페라리의 눈부신 차체가 두려워 도망치는 것이 기분 좋았다.
마지막에는 시게 짱과 일대일 대결을 벌이고 결국 져버렸다.
시게 짱 차체에는 '판보르기니 카운터 어택' 이라고 매직이라고 적혀 있었다.
역시 못 당해내겠다.
그런 식으로 내가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지만 친주의 숲은 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가 더 이상 가지 말라고 했고 선생님도 오면 안 된다고 말했던 걸 변명으로 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도 여름은 끝난다.
내게도 돌아갈 진짜 집이 있고 학교가 있다.
이대로 계속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매듭은 지어야 한다.
나는 의외로 성실한 애였던 건지도 모른다.
슬슬 시게 짱 집을 떠날 때가 다가오자 나는 홀로 친주의 숲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귀가 따가운 매미 소리. 어두운 그늘 밑을 묵묵히 걸어갔다.
신사 참배길을 뒤로 하고 안쪽으로 나아갔다.
비는 거의 내리지 않기에 부드러운 흙이 묻은 발자국이 더럽게 남아 있는 게 눈에 띈다.
모두 내 발자국 같았다.
나는 그걸 보면서 떠올렸다.
그날 처음 이 숲을 빠져나갔을 때 신사보다 더 안쪽에는 누구의 발자국도 없었다.
잘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선생님이 말한 듯이 우리 마을과 숲 너머 마을이 오가려면 이 친주의 숲을 지나야 한다.
그렇다면 친주의 숲에는 발자국이 잔뜩 남아 있어야 했다.
관청도 우체국도 숲 너머 이쪽밖에 없으니까.
그런 당연한 것도 모르는 채 나는 알게 모르게 이 세계 뒤쪽에 발을 들였던 걸까.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걸어나가 어두운 나무 아치를 빠져나가니 푸른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졌다.
똑같다.
녹색 논두렁길. 밭.
개구리 울음소리.
하늘을 가르는 제비 날개 궤적.
눈앞에 있는 광경에 한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이윽고 깨달았다.
논두렁길에 잡초가 무성했던 것.
밭에도 잡초가 자라나 있는 것.
개구리 울음소리는 계속 작게 들렸던 것.
산속 중턱에 보이는 민가는 지붕에 구멍이 뚫려서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던 것.
그리고 전봇대도 전선도 보이지 않았던 것.
나는 비틀비틀 논두렁길을 걸어갔다.
엉켜오는 풀을 밟으면서 비탈길 앞에 도착했다.
완만하게 이어진 높은 곳을 올려다보니 그 너머에는 낡은 기와지붕이 있다.
땀을 훔치면서 나는 비탈길을 오른다.
도중에 돌아서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없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제비 그림자뿐이다.
군데군데 하얀 꽃이 피어 있다.
나는 공터에 도착했다.
교정이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교정이라는 걸 안 그곳은 지금은 교정이라고 말해도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썩은 나무판자가 흩어져서 어질러진 공터였다.
그리고 그 너머.
내가 매일 올려다본 교사는 검게 변색되어 추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벽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깨진 나무조각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왼쪽 밑 자그만 집이 있던 곳은 불에 탄 것 같은 흔적과 기와 잔해가 있을 뿐이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의미하는 게 뭔지 생각할 여지도 없이 비틀비틀 몽유병처럼 현관 입구로 빨려들어갔다.
안은 더욱 처참해서 그을음과 구멍과 나무조각 천지다.
신발장 잔해를 지나 신발을 신은 채로 복도로 들어갔다.
거미줄을 치우면서 계단을 올라가니 빠각 소리가 나면서 밑이 빠질 것 같았다.
바로 발을 빼고 괜찮아 보이는 곳을 몇 번이고 체중을 실어 확인한 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다.
너덜너덜한 벽에 손을 짚어서 손바닥이 새까매지면서도 겨우 2층으로 올라간 후 나는 두리번거렸다.
6학년이라고 적힌 하얀 판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썩어빠진 나무바닥과 벽이 만들어내는 잿빛 복도가 뻗어 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언젠가 선생님이 손짓을 하며 환영한 교실로 들어갔다.
그 순간 머리가 흔들렸다.
5개 있고 선생님이 하나 더 가져와서 전부 6개가 된 책상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나무 잔해가 교실 구석에 무작위로 쌓아올려져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대체 뭐야. 이건.
그래, 종이다.
진짜 위에 붙인 가짜 그림 종이.
잘 만들어 놓았다.
이거라면 모두 속일 수 있다.
외할아버지도, 시게 짱도, 나도.
그리고 이제부터 그건 멋대로 바뀔 것이다.
진짜 교실에는 선생님이 있고 내가 모르는 머나먼 나라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문득 창밖을 보았다.
종이학이 잔뜩 걸려 있던 창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발을 끌면서 거기로 다가갔다.
선생님이 계속 턱을 괴고 있던 창가에 나도 섰다.
창틀은 썩은 듯이 뒤틀려 있어서 도저히 팔을 괼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는 선생님이 늘 멀어져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때 선생님은 늘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몇 번이고 선생님을 불러서 그녀가 겨우 눈치챘을 때 팍 하고 세계가 튀었다.
그 순간 나와 선생님의 세계가 이어진 것이다.
선생님은 늘 하얀 꽃무늬 옷을 입고 있었다.
청결한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늘 같은 옷이었던 것 같았다.
버려진 교사 안에서 선생님의 시간은 멈춰 있었던 걸까.
언젠가 드물게 비를 내렸을 적에는 친주의 숲을 빠져나오면 맑아졌다.
이슬비였으니까 잠깐 이상하게 여기고 끝냈지만 설령 폭풍이 와도 그 숲 너머는 계속 맑았을지도 모른다.
맴맴 매미가 울고 있다.
왠지 공허했다.
다른 세계의 기척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 내겐 안 보인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우두커니 선 채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보고 있던 걸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시야에 공터 구석이 들어온다.
선생님은 늘 그곳을 보고 있었다.
똑같은 곳을.
저기에 뭔가 있는 걸까?
나는 서둘러 교실을 나왔다.
삐걱삐걱 복도가 불길한 소리를 냈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계단을 반쯤 부수듯이 달려내려가 공터로 갔다.
폐촌의 산을 휙휙 피하면서 그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나무 밑둥으로 다가갔다.
옛날에 화단이 있었을까.
검은 흙이 쌓여 있는 일각이었다.
그 흙 위에 나무판이 하나 꽂혀 있다.
그건 마치 묘비 같아서 가슴이 철렁했다.
판에는 뭔가 적혀 있었으나 비 때문에 지워진 건지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나무조각을 주워서 흙을 파기 시작했다.
바로 위에 뜬 태양이 내 그림자를 땅에 지지고 있다.
뚝뚝 떨어지는 땀을 흙이 빨아들인다.
파낸 흙이 주변에 쌓여가는 가운데 나무조각 끝에 뭔가 부딪친 감촉이 느껴졌다.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흙을 파냈다.
손가락 끝에 닿은 건 상상했던 하얀 뼈가 아니었다.
너덜너덜해진 종이봉투가 흙 사이로 나타난 것이다.
집어올려서 흙을 털어낸 순간 밑부분이 뚫려서 검은 내용물이 땅에 떨어졌다.
그건 종이접기였다.
종이학이었다.
쭈글쭈글해지거나 납작해지거나 흙에 파묻혀 색이 바랜 학이었다.
그때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폐허 같은 교정에 나는 서 있다.
환상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이제 보이지 않게 된 걸까.
하지만 나는 상상했다.
거기에 있는 걸 상상했다.
내 옆에 선생님이 서 있다.
투명해진 상태로 서 있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다.
난처한 것처럼 쑥스러운 것처럼ㅈ자상한 얼굴로.
바람이 얼굴에 불어오고 그건 사라졌다.
아름답게.
흔적도 없이.
눈물이 나와서 흐릿해진 시야로 손을 보았다.
천 마리는 아니었지만 다 끊어져가는 실에 매달린 수많은 학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속에서 나는 이상한 걸 발견했다.
그건 못나게 접은 학으로 몸은 기울어지고 얼굴은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딱 한 부분만은 멋있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손을 높게 치켜들어 그 학의 전투기처럼 끝이 뾰족하게 세워진 날개를 하늘과 겹쳤다.
끝부분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여름이 끝나는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슬쩍 사전을 덮었다.
어렸을 적 기억이 꿈처럼 흘러넘쳐서 사라졌다.
사전을 책장에 되돌리고 자신이 대학 도서관에 있다는 걸 겨우 떠올렸다.
부드러운 바닥이 다양한 소리를 흡수해서 주변은 유난히 조용했다.
잠시동안 눈을 감고 천천히 대학생인 자신으로 돌아왔다.
문득 시게 짱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상당히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여전히 두목으로 지내고 있었을까.
얼굴 뉴도도 계속 웃고 있을까.
그 안쪽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밀실 속에 있다던 등신불은 지금도 산속을 헤매는 망자들의 혼을 달래고 있을까.
그때를 떠올려 보면 기묘한 점이 몇 가지 더 있었다.
선생님 연대를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가는 학력이 이상한 것이다.
아마도 고등여학교에서 고등여자사범학교나 여대라는 이름의 사립대학으로 간 것 같지만 그 당시 내가 생각하던 고등학교와 대학이라는 말이 통했던 것이 이상하다.
그밖에도 시대적인 상식이 다르기에 맞물리지 않은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대화가 유난히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어쩌면 그때 나눈 대화조차도 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저 짧은 순간, 공허한 세계 경계에서 혼이 접촉하고 겹쳐서 소리를 낸 건지도 모른다.
그 초등학교 마지막 여름방학이 끝나고 신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산수 성적이 쑥 올라서 담임 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물론 나중에 세계사를 배울 때에는 싹 다 잊어버렸지만.
훗, 웃음이 흘러나온다.
책장에 꽂아넣은 사전 등표지를 바라보았다.
문득 눈에 들어온 항목 덕분에 오랫동안에 묻혀왔던 마지막 수수께끼가 허무하게 풀렸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한때의 추억 저편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결핵] 학명 tuverculosis
결핵균으로 발생하는 전염병.
호흡기관이나 림프 조직, 관절이나 피부 등 발병하는 기관이 다양하다.
개중에서도 대표적인 폐결핵은 일본에서 고대로부터 고핵이라고 불렸다.
확진자도 많고 불치병이라 두려워했다.
... 중략 ...
의사가 사용하는 약칭인 TB(학명에서 따옴)가 민간에도 퍼져서 은어로서 테베라고 불리기도...
그날 교실에서 테베(テーベ)를 테베(テーバイ)로 고쳐적은 선생님의 무거운 등이 어제 일처럼 눈꺼풀 뒤에서 떠올랐다.
그때 선생님은 자신이 환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환상을 보고 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 후로 몇 번 다른 해에 친주의 숲을 지나 그 폐촌으로 간 적이 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선생님과 만날 수 없었다.
또 만나고 싶냐고 물으면 지금은 주저하게 된다.
선생님이 말한 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 있을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너무나도 끝없는 악의가 이 세상에 가득 차 있었으니까.
중학교 3학년 무렵, 그 폐촌이 허물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규모 공사로 큰 길을 생기는 모양이다.
그 버려진 마을을 집어삼키고서.
내가 그 자리에 다시 묻은 종이학들도 다시 나와서 좀 더 깊이 묻히려나.
나는 그 너덜너덜한 종이학 중에서 파묻히듯이 종이 한 장이 섞여 있던 걸 떠올렸다.
그것은 어디선가 본 필체로 시처럼 적혀 있던 편지였다.
나는 그것만 들고 돌아가서 이윽고 그 종이로 종이학을 접었다.
집으로 돌아간 후 당분간 내 방 창가에 매달려서 흔들거렸지만 어느샌가 어디론가 가 버렸다.
어린 시절 기억이 모인 저 세상 어디론가로.
찾던 책을 발견해서 대출한 뒤 옆구리에 끼고 도서관을 나왔다.
얼굴을 벨 것 같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한겨울이었다.
완전히 여름인 것 같았는데.
나는 쓴웃음을 짓고 코트 자락을 여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