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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설][스승시리즈] 통야

작성자빛빔|작성시간26.06.19|조회수70 목록 댓글 0

 

출처 : https://m.blog.naver.com/qordb6712/120149515873

여자애는 그 어두운 복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곰팡내 같은 불쾌한 냄새가 벽이나 바닥에 들러붙은 것 같아서 거기를 지날 때는 숨을 멈추게 된다.

그 복도 끝에는 할아버지 방이 있었다.
여자애는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거기서 자고 있다.
다리가 불편하다고 하는데 왜 불편한 건지 몰랐다.

예전에 목수를 했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으니까 분명히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방으로 가니 할아버지는 늘 기뻐하며 이야기를 해주거나 과자를 주거나 때로는 용돈도 주었다.

그걸 엄마에게 들키면 혼나는 건 할아버지였다.

"최근 며느리는 건방져졌어."

그렇게 투덜거리며 풀이 죽고는 그날 밤에는 아프다 아프다 엄살을 부리면서 성이 풀릴 때까지 아빠더러 다리를 주무르도록 시켰다.

'빈정거린다'라는 말을 알게 된 건 그때 엄마가 중얼거린 말을 듣고나서였다.

그날도 여자애는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서 그 안쪽에 있는 장지문에 손을 대었다.

"할아버지."

엉금엉금 기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실내에는 공기가 혼탁해서 밖에 있는 복도보다 불쾌한 냄새가 났다.

방 한가운데 이불이 있다.
여자애가 기억하는 한 거기에 이불이 깔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

여기에 오면 자연스레 어리광 부리는듯이 말하게 된다.
그 어미가 스윽 사라졌다.

희미하게 부풀어오른 이불에서 얼굴이 나와 있다.
그 얼굴에서 평소에 맡는 곰팡내가 아니라 이질적인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침을 삼키면서 다가가니 밀랍처럼 하얀 그러면서도 광택이 없는 얼굴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입가에는 액체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었다.
불쾌한 냄새는 거기서 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한 번 더 불러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무릎이 떨렸다.

할아버지는 잠이 옅어서 늘 누가 방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깨어난다.

토한 게 목에 막힌 줄 알았다.
바로 게워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방 안은 싸늘하고 보이는 곳에는 살아 있는 자의 기척이 전혀 없었다.

이불 끝에서 손이 튀어나와 있지만 주름투성이인 그손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조심스레 만져보았으나 그 차가움에 숨을 집어삼키며 손가락을 뺐다.

마치 바람을 쐰 무를 만지는 것 같았다.

어쩌지. 할아버지가 죽어 버렸어.

여자애는 당황해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어른을 불러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이 떠오르지 못했다.

어쩌지. 어쩌지.

초조해하는 여자애 눈에 키가 낮은 장롱이 들어왔다.
할아버지와 나이가 똑같은 검은 장롱.
그을린 그 나무결을 보니 고동이 빨라지는 걸 깨달았다.

그 장롱 제일 밑 서랍에는 고운 천 주머니가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머니 안에는 커다란 진주가 박힌 반지가 잠들어 있다.

여자애가 지금보다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가 딱 한 번 보여주었다.

"죽은 할머니 유품이지."

그렇게 말하며 겸연쩍은 듯이 웃었다.

할머니가 죽기 얼마 전에 계속 원하던 그 반지를 몰래 사주었다.

손가락에 직접 끼워주니 할머니는 그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범도 어범도 모른단다."

그렇게 말하는 할아버지의 그 짓궂은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딱 한 번 봤지만 여자애는 그 반지가 갖고 싶어서 몇 번이고 달라고 보챘다.

그치만 이것만큼은 안 된다며 할아버지도 양보하지 않았다.

"내가 시집 가도?"

그렇게 묻자 조금 난처한 얼굴로 "시집을 가도."라고 대답한다.

또 보여달라고 말해도 이제 안 된다며 화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몰래 보려고 해도 할아버지가 늘 이 방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었기에 장롱을 훔쳐볼 틈도 없었다.

그 할아버지가 죽었다.

두근두근 몸 안에서 소리가 난다.
지금이라면 반지를 볼 수 있다.
봐도 혼나지 않는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멋대로 움직이는 다리가 팔이 손가락이 멈추지 않는다.

숨을 죽이면서 서랍을 열고 집 안에 들리는 소리에 겁내면서 천 주머니를 찾았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주머니를 묶고 있는 천을 푸니 안에서 이것저것 소중해 보이는 것이 들어 있었다.

종이를 헤집으며 찾고 있으니 손가락 끝에 딱딱한 상자가 닿았다.

천천히 그걸 주머니에서 꺼냈다.
양손으로 잡고 뚜껑을 여니 낯익은 반지가 나왔다.
진주 반지였다.

'나쁜 애야. 난 나쁜 애야.'

스스로를 탓하는 자기 목소리가 들린다.

'보기만 할 거야. 보기만 할 거야.'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실은 실은 이럴 생각이었어 하고 주머니에 반지를 넣었다.

빈 상자를 주머니에 돌려놓고 형언할 수 없는 어두운 심정으로 눈을 빛내면서 돌아선 그 순간.

여자애는 "부부"하는 소리를 들었다.
등을 차가운 손으로 어루만진 기분이다.

주머니를 든 채로 고개를 돌리니 거기에는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두근두근 맥동하는 가슴을 누르면서 천천히 이불로 다가간다.

대각선 위로 목을 뻗으면서 그 얼어붙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뒤집어까고 입에서 토사물이 흘러넘친 채로 고통스러운 얼굴이 거기에 달라붙어 있었다.

"부부."

또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목이 살짝 움직인다.

비명을 집어삼킨 여자애 손가락이 경련하듯이 얼굴 옆에서 펼쳐졌다.

주머니가 할아버지 손 옆에 떨어진다.
다리가 자연스레 뒷걸음질을 치며 다다미 위를 미끄러지듯이 이불에서 떨어진 뒤 여자애는 방에서 도망쳤다.

혼란스러운 머리로 어두운 복도를 빠져나와 자기 방으로 뛰어들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이 빙글빙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죽어 있었는데. 죽어 있었는데. 어째서.'

그로부터 방구석에서 웅크린 채로 덜덜 떨었다.
머릿속에서는 그 무시무시한 죽은 얼굴과 '부부'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몇 번이고 되살아나서 그때마다 눈을 꾹 감고 귀를 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정적이 비명으로 깨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아빠 목소리다.
여자애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이어서 "빨리 와줘."라는 성난 목소리가 들린다.
귀를 기울이니 쿵쾅쿵쾅 가족들이 발소리를 내었다.
여자애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자기 방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 코 끝을 스치듯이 행주를 든 어머니가 달려갔다.

이윽고 할아버지 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죽었어?
역시 할아버지는...

왠지 이제야 눈물이 나왔다.
슬프다는 감정이 겨우 온몸을 돌았다.
어기적어기적 일어나서 복도로 나갔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니 할아버지 방에서 아빠가 오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빠가 이불을 붙잡고 엉엉 울고 있었고 오빠나 언니도 허둥대고 있었다.

엄마는 할아버지 입가를 닦으면서 의사를 불러오라고 오빠에게 말했다.

장지문 곁에서 우두커니 선 채로 그 광경을 보던 여자애는 방 어느 부분을 본 순간 굳어졌다.

장롱이 닫혀 있다.

천 주머니를 장롱에 돌려놓기 전에 방에서 도망쳐왔을 텐데.

그대로 내버려두면 자신이 반지를 훔친 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장롱이 지금 눈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할아버지 죽음을 둘러싼 배경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렇지. 천 주머니는?

여자애가 두리번거렸으나 이불 주변에는 떨어져 있지 않았다.

거기에 있는 가족을 보아도 아무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넓은 방은 아니다.
어디에도 없다는 건 금방 알았다.

숨이 괴롭다.
여자애가 가슴을 누르면서 등 쪽으로 슬금슬금 올라오는 공포와 싸우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원래대로 돌려놓은 거야?

자신이 방에서 도망친 후에 이불에서 스윽 일어난 할아버지가 천 주머니를 주워서 장롱에 되돌렸다.

여자애는 떨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까까지 슬퍼서 흘린 눈물과 다르다.
주머니 속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감촉이 오갈데 없는 죄책감이 되어서 흘러넘친 거였다.

할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던 할머니 유품인 반지를 훔쳤다.

그렇게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슬퍼졌다.

스승에게 들은 이야기다.

대학교 1학년 겨울이었다.

알바 마치고 돌아가는 길, 추운 하늘 밑을 고개 숙이며 걷고 있으니 밤에 떠오르는 부드러운 빛이 보였다.

제등이다.
주택가 한가운데 커다란 제등을 걸고 그 주변에 몇몇 그림자들이 꿈틀대는 게 보였다.

"통야*로군."
*통야 : 쯔야(通夜, つや)는 밤샘을 의미한다. 일본에서의 장례 절차 중 하나로, 망자의 유해를 지키며 밤을 지새우는 것을 의미한다.

옆을 걷고 있던 여성이 툭 내뱉었다.
카나코 씨라고 아까까지 같은 알바를 하던 동료로 같이 그 집까지 바래다주는 도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제등 표면에 동그리마와 도라지꽃으로 된 문장이 그려져 있다.

그 절제된 노란 빛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픈 감정이 느껴져서 나마저도 숙연해지고 말았다.

그 제등이 걸린 집 문앞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숙덕숙덕 뭐라 말을 나누고 있었다.

으리으리한 집으로 문앞을 지날 때 슬쩍 보았는데 문과 넓은 현관 사이에 돌이 깔려 있고 그 위에 테이블을 놓아두고 있었다.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통야 접수대인가 보다.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접수대에 있는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여성이 "오세요."하고 손짓을 하자 들리지도 않는 거리인데 "아니, 아니에요."라고 변명을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통야 처음 보냐?"

"아뇨."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마지막에 간 통야는 언제 누구 통야였는지 떠올려보려고 했다.

웅성거리는 기척이 멀어져가는 걸 등 뒤로 느끼면서 걷고 있으니 카나코 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돌아보면서 왜 그러냐고 물으려고 하다가 그 눈이 옆에 있는 어둠을 향하고 있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서 시선을 쫓으니 거기에는 불빛이 없는 좁은 골목길이 뻗어 있었다.

통야를 하고 있는 집 주변을 빙 둘러싸는 담과 옆집 울타리에 끼인 자그만 공간이었다.

제등에서 떨어진 곳이라 밤눈으로도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골목을 가로막듯이 나무상자나 대형쓰레기로 보이는 것이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우연히 둘 곳이 없어 곤란한 나머지 일단 놓아둔 걸로도 보이고 여기를 지나지 말라는 암묵적인 의사표시로도 보였다.

그 나무상자 안쪽에 은은한 달빛을 반사하는 것이 보였다.

뭔가 싶어 목을 길게 빼고 있으니 옆에 있던 카나코 씨가 천천히 다가갔다.

낡아빠진 소파가 비스듬히 담에 기대어 서서 길을 막고 있다.

그 앞까지 오니 그 빛은 나무상자 뒤에 숨어 있는 누군가의 눈동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겁먹은 듯이 깜빡이는 빛이 그래도 우리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는 걸 알았는지 조용히 이쪽을 향하고 있다.

"왜 그래?"

카나코 씨가 부른다.
잠시 뒤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애 목소리였다.

"숨어 있어."

"왜?"

그 질문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이 차갑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그 공기를 가르듯이 담 너머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사치코, 어디 갔니. 사치코!"

그 목소리에 움찔하며 나무상자 뒤에서 몸을 움츠리는 기색이 느껴진다.

담 쪽을 쳐다본 카나코 씨가 말한다.

"지금 그거 엄마? 엄마 몰래 숨은 거야?"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니 이윽고 자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무서워."

"무서워? 엄마가?"

고개를 젓는 것 같다.
기다려봐도 대답이 없었다.
카나코 씨는 허리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이런 곳에 계속 있으면 감기 걸려. 지금 통야 하고 있지? 안 가니?"

통야.
그렇구나.
이 애는 통야가 무섭구나.
나는 홀로 납득했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죽은 인간 얼굴을 보거나 그 곁에서 밤을 새우는 풍습을 처음 알았을 때는 까닭도 없이 무서웠다.

어제까지 숨을 쉬던 가족이 이미 움직이지 않는 시체가 되어 버렸다는 그 공포.

이 어린 소녀 마음을 생각하면 왠지 나마저 우울해진다.

"뭐가 무섭니. 알려주지 않을래?"

카나코 씨는 그 자리에 쭈그려앉아서 알려주지 않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 앉았다.
실은 어서 돌아가고 싶었다.
춥다.
좀 더 두껍게 입고 왔으면 좋았을걸 후회가 든다.

이윽고 나무상자 뒤에 숨은 채로 떨리는 목소리로 여자애가 말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그걸 듣고 있으니 문득 딱 떨리던 무릎이 멈추었다.

대신에 몸 안에 좀 더 차가운 것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여자애가 들려준 건 기묘한 이야기였다.

할아버지 죽음을 목격한 그녀가 그걸 가족에게 알리기 전에 할머니 유품이라는 진주 반지를 훔쳤다고 했다.

그때 그녀의 귀는 시체라고 생각했던 할아버지 목에서 '부부'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다.

겁을 먹고 도망친 그녀가 자기 방에 웅크리고 있으니 이윽고 가족들이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걸 알고 소란을 피웠다.

그때 할아버지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원래대로 닫혀 있는 장롱을 보았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진 천 주머니.
마치 죽었을 할아버지가 정리한 것 같다.

이야기를 끝낸 여자애가 숨을 삼키듯이 자그만 소리를 내었다.

오싹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녀 이야기를 들어보니 할아버지 사인은 토사물이 목을 막은 질식사 같다.

그 묘사로 보아 그 시점에서 죽은 건 틀림없다.
그 시체 목에서 소리가 나고 남아 있을 주머니는 사라지고 장롱 서랍은 도로 닫혀 있다.

이 상황에서 도출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서늘한 상상뿐이었다.

가령 할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그녀는 그 눈앞에서 그를 구하려고도 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던 유품 반지를 훔친 셈이 된다.

얼마 후 정말로 숨이 끊어진 할아버지를 보고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을 그녀의 기분을 생각해 보면 가슴이 옥죄어왔다.

그리고 가령 할아버지가 처음부터 죽어 있었다면...

내 주변을 둘러싼 어둠이 한층 더 짙어지는 것 같아서 몰래 숨을 토했다.

스승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생각할지 곁눈질을 했다.

카나코 씨는 이러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마니아로 난 그녀를 스승이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었다.

"그 천 주머니는 결국 장롱 안에 들어가 있었니?"

그 스승이 어둠을 향해 조용히 묻는다.
침묵이 이어졌지만 이윽고 대답이 들렸다.

"응."

"반지는?"

"...나중에 돌려놓았어."

"무서워져서?"

"...응."

"의사 선생님은 할아버지가 뭐 때문에 죽었다고 말했는데?"

"...질식이래."

"사망추정시각... 아니, 죽은 시간은?"

고개를 젓는 기척이 느껴진다.
스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담 너머에서는 그 죽음을 기리는 통야가 진행 중이다.
토해내는 숨이 차갑다.

살아 있었는가, 죽어 있었는가.

어느 쪽이든 여자애에겐 구원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 애가 통야에 참석하지 못하고 여기서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 걸 생각하면 무척이나 슬퍼진다.

틀림없이 할아버지가 죽은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한 짓이 그녀를 이제부터도 가혹하게 채찍질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내 머릿속에서 한줄기 빛이 스쳤다.
그래, 할아버지가 돌려놓은 거야.
천 주머니를 장롱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래. 손녀의 도둑질을 없었던 걸로 치부하기 위해서.

다른 가족이 알지 못하도록 할아버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어 손녀를 감쌌다.

아니면 이미 숨이 끊기고도 그 시체가...

그 광경을 상상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거짓말이든 뭐든 나는 이 상상에 걸 수밖에 없었다.
이것밖에 눈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여자애를 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기 말야."

입을 열려던 나를 스승이 한손으로 제지했다.
닥치고 있으라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다.
곤혹스러워하는 나를 뒷전으로 스승은 딱 한 마디 나무상자 너머로 던졌다.

"아빠가 이렇게 말했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빨리 와줘.' 라고."

"응."

"너는 그 후에 귀를 기울였어. 그렇지?"

"응."

"한 번 더 물을게. 아빠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빨리 와줘.' 라고 그것만 말했지?"

"...응."

스승은 뭔가 각오를 한 듯이 한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럼 엄마는 왜 행주를 가지고 간 거야?"

아. 입을 딱 벌린 순간 입술 끝이 찢어졌다.

그렇다. 모친은 행주를 가지고 가서 토사물을 닦았다.
하지만 부친은 할아버지가 죽었으니 빨리 오라고밖에 말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식사 중이 아니었다.
그저 죽었다는 말만 듣고 왜 행주가 필요할 거라는 걸 알았을까.

모친도 할아버지가 죽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그런데도 여자애처럼 그걸 말하지 않았다.
부친이 알고 부를 때까지.

"네가 방에서 도망친 후에 다음으로 방으로 들어온 건 엄마였어."

스승이 담담히 말했다.

모친의 눈에 들어온 건 토사물로 목이 막혀 죽은 할아버지였다.

놀라서 이불로 다가온 그녀는 할아버지 손 옆에 굴러가는 천 주머니를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안을 보고 있었는지 주머니 입은 열려 있다.

모친은 목소리를 듣는다.
마음속 어둡고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를.

주머니 안을 들여다본다.
중요해 보이는 게 많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종이 종류....
지폐.

그녀는 그걸 빼내고 딱 하나 열려 있는 서랍을 발견한다.

천 주머니를 묶고 서랍에 그걸 돌려놓는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남겨두고 방을 나온다.
다른 사람이랑 마주치면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소리치면 된다.

하지만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그럼 그걸로 됐다.
제일 처음 시체를 발견한 게 아니라면 의심받을 필요도 없으니까.

걸핏하면 자신에게 빈정대고 심술을 부리는 할아버지가 계속 있었던 방이다.

설령 중요한 게 없어졌다고 해도 그 눈이 번뜩이고 있는 동안에는 훔칠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죽기라도 하지 않는 한...

"할아버지 목에서 소리가 난 건 배에서 발생한 가스가 낸 소리야."

스승이 막힘없이 말했다.

"네 할아버지는 되살아난 것도 죽은 채로 움직인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말을 끊는다.
스승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

나는 추위로 양 어깨를 감싸면서 희미한 위화감을 느꼈다.

스승이 말한 진실.
그것은 그녀가 제시한 추리일 뿐 결코 무엇 하나 확증은 없었다.

나는 아까 말하려고 했던 진실을 한 번 더 꺼내어 비교해 보았다.

비교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스승이 밝힌 진실은 난폭하지만 논리적으로 청자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명백히 빠진 점이 있다.
그건 그 할아버지 통야에 나갈 수 없는 어린 여자애에게 더 필요한 것이다.

"왜 그런 박정한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슬퍼졌다.
내게만 나중에 몰래 알려주면 되었을 텐데.
왜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 굳이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자기 모친이 저지른 악독한 짓을.

스승이 험악한 얼굴로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다.
나무상자 너머로 숨을 죽이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때 담 너머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사치코!"

아까 들렸던 여성 목소리다.
저도 모르게 난 목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졌다.

"사치코. 어디에 간 거니. 이렇게 바쁠 때에 너도 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우드득우드득 목뼈가 울리는 소리가 난다.

길을 막고 있는 소파 너머.
조잡하게 쌓여 있는 나무상자 그늘에 몰래 숨어 있는 자그만 기척.

나는 이 애가 사치코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럼 이 애는 누구지?

또 여성의 목소리가 울린다.

"자자, 빨리 가서 할머니 얼굴 보렴. 곱게 해놓았으니까 무섭지 않단다."

......

할머니?

죽은 할아버지가 아니었어?

나무상자 너머로 뭔가가 있다.
희미하게 얼굴만 보인다.
빛이 반사된 게 아니다.
달은 구름에 가려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둠에 그런 색이 칠해진 듯이 창백하고 밀랍 같은 광택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이윽고 일그러지듯이 꿈틀거리더니 끝에서부터 점점 옅어졌다.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그건 노파의 얼굴이 되어서 뭐라고 말하듯이 입을 열고는──

사라졌다.

이제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데스마스크처럼 그 마지막 얼굴이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스승이 어깨를 쳐서 정신이 들었다.

"이제 없어. 사라졌어."

스승이 일어나서 관심이 식은 듯이 좁은 골목을 등진다.
그리고 그제야 추운 듯이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뭐 요컨대."

쭈그린다.

"요리토모 공 어렸을 때 백골이야."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머리가 컸는데 어느 스님이 두개골을 보고 이것이 요리토모의 두개골이라고 하자 손님이 요리토모의 두개골이라면 좀 더 커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박했고 이건 요리토모의 어렸을 때의 두개골이라고 둘러댄 게 이 말의 유래가 되었으며 누구든지 유년시절이 있다는 말로 쓰인다.

뻗는다.

"죽은 녀석이 죽을 때 모습으로 나온다는 보장은 없지."

쭈그린다.

"어울리는 곳에는 어울리는 모습으로 나타나. 그녀 자신의 통야에 어울리는 건 그 어렸을 적 모습이었어."

뻗는다.

"왜냐고? 계속 마음에 걸렸으니까. 오래 전에 자기 할아버지가 죽을 때 일어난 일이. 그게 자기가 죽을 때 떠올랐어. 몸은 화장되고 관 속에 묻혀도 혼은 이런 곳에 숨어 있지. 통야에 참가할 수 없었어. 그때 일어난 사건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 계속."

그렇구나. 그래서 스승은 말했다.
그 배려심 없는 진실을.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저 애도 며느리에게 시달린 모양이네."

그렇게 중얼거리고 골목을 나왔다.

"어째서요?"

"그야 목소리를 들은 순간에 겁먹었잖아."

아, 그렇구나. 사치코라는 여자애를 찾는 모친 목소리다.
그걸 들었을 때 반응을 보고 나는 나무상자 너머에 있는 여자애가 사치코라고 착각했다.

스승은 담을 슬쩍 보고선 왔던 길로 되돌아와 제등이 두 개 늘어선 문 앞까지 왔다.

"저기."

문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성에게 말을 건다.

"무슨 일이지?"

"이곳 할머니 돌아가셨지요?"

"아, 내 숙모야. 정말로 느닷없이 가버리셔서 깜짝 놀라 비행기 타고 왔지."

"할머님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스승이 들은 그 이름을 입속으로 외웠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발길을 돌리자 불러세운다.

"어라? 얼굴 보고 안 가니? 통야 하고 있는데."

스승이 고개를 젓는다.

"잠시 얘기를 나눴을 뿐인걸요."

스승은 미소를 지은 후에 내게 돌아가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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