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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설][스승시리즈] 꽃

작성자빛빔|작성시간26.06.19|조회수62 목록 댓글 0

 

출처 : https://m.blog.naver.com/qordb6712/120174090194

대학교 2학년 봄이었다.

그날은 토요일 아침부터 친구 집에 모여서 학생답게 마작을 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컨디션이 좋았던 나도 노마크였던 남자에게 국사무쌍을 직격으로 받은 이후로 운이 급격히 떨어져서 시합이 계속될 때마다 부글부글 침몰해갔다.

결국 나 혼자서 연거푸 패배를 거듭하다가 항복을 선언했을 때에는 자정이 지나고 있었다.

"수고했어."

모두 지친 얼굴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도 자전거를 타고 민가 불빛도 듬성듬성한 한적한 대로를 힘없이 걷고 있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벌레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 친구 집에서 마작을 친 후에 늘 이 어둡고 조용한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싫었다.

산속에 있는 것도 아닌데 스쳐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길에서 자전거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 듣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안 좋아진다.

군데군데 흘러나오는 민가 불빛.
그 앞을 지날 때면 그 불빛 너머로는 실은 아무도 없고 그저 마을을 본뜬 모형정원 속에 있는 공허한 구조물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기묘한 상상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그날도 졸음과 그 꺼림칙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속도를 내어 자전거를 몰고 있었다.

선로를 따라 난 길에서 커브를 돌고 산자락에 가까워진 무렵이었다.

갑자기 내장에 묵직한 돌을 넣은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눈앞에서 꺼질 듯이 깜빡거리는 가로등 밑에서 인영이 보였기 때문이다.

차도다.
가드레일 바깥쪽에 뭔가가 서 있다.
이상한 기척.
저도 모르게 전방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사람 모양을 하고 있다. 밤이라고는 하지만 달빛은 있다.

그리고 깜빡거리는 가로등 불빛도 있다.
그런데 그건 여전히 그림자였다.
뚫어지게 보아도 새까맣고 색이 없는 그림자였다.

자신이 인도 즉 가드레일 안쪽을 달리고 있는 걸 확인했다.

저것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길을 지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 인영 옆을 지나갔다.

가드레일 너머에서 새까만 사람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

앞뒤는 분간이 안 간다.
그런데도 그것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불과 1미터 떨어진 거리.
도로 쪽에 있는 팔에 소름이 돋는다.

한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그대로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을 주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나는 전속력으로 그곳을 떠났다.

이상한 기척은 그래도 당분간 목덜미를 따끔거리게 했다.

그 다음날.

나는 스승의 집으로 갔다.
오컬트 스승이다.
이런 이야기를 잘 안다.

어제 체험한 일을 이야기하니 뜻밖에도 관심을 보였다.
체험한 자신은 무섭지만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충격적이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질릴 정도로 그런 체험을 겪어온 스승이라면 이 정도는 흥 하고 코웃음칠 줄 알았다.

그 스승이 몸을 내밀며 귀를 기울인다.
오히려 더 기분 나쁘다.

이야기를 다 들은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유령이 아니야."

"어째서요?"

"유령이라는 것이 죽은 자의 몸에서 벗어난 육체를 가지지 않는 존재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그건 유령이 아니야."

그렇다면 그건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건가.

"아냐, 아냐."

스승이 오른손을 저었다.

"그치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가로등 밑 가드레일 근처에는 늘 꽃이 놓여 있었어요. 땅에 놓인 빈 캔이나 빈 병에 꽃을 꽂아넣어 두었지요. 아, 이런 꽃이었어요."

나는 어질러진 스승의 방 창가에 놓인 자그만 화분을 가리켰다.

노란색 꽃잎 속에 검은 얼룩이 있다.
팬지였나?

"오늘 근처에 사는 친구들에게 물어봤더니 거기 옛날에 교통사고가 일어났대요. 애가 차에 치여서 즉사했다나? 그래서 밤중에 그 사고현장을 지나면 지금도 그 애가 거기에 서 있는 게 보인대요."

마작을 치러 그 친구 집에 갈 때는 늘 꽃이 놓여 있었다.
과자가 놓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오싹했다.

그래도 성불하지 않고 지금도 그 애가 방황하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보내왔던 일상 풍경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사람의 한이 숨어 있었다.

왠지 우울해져서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내 마음이 전혀 안 전해졌는지 스승은 또 "아냐, 아냐." 라고 말하며 왼손을 저었다.

뭐가 아닌데?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아서 조금 열받았다.

"그거 거기지? 교통안전 간판 근처."

아, 그러고 보니 진부한 표어가 적힌 간판이 있었던 것 같다.

스승이 일어나서 화분 속에서 팬지를 뽑더니 부엌에 굴러다니던 빈 캔에 꽂고는 내 앞에 두었다.

"그리고 그 꽃은 이랬지?"

"그랬는데요."

"이거야."

"네?"

"그러니까 이거. 내가 둔 거야."

머리가 멍해졌다.

"어디부터 얘기를 할까. 뭐, 귀찮으니 간략하게 말하자면 내가 벌인 짓이야."

어안이벙벙해하는 날 무시하고 스승이 계속 말했다.

"원래는 내 스승이 진행하던 연구였어. 아무런 특징도 없는 부근에 꽃을 놔두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연구지. 물론 교통사고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고 죽은 애도 없어. 꽃이 시들면 또 새 꽃을 놓으러 가. 계속. 누가 놓아두는지 들키지 않도록 사람이 없는 밤을 골라서. 그러면 그날 놔둔 적이 없는 꽃이 놓여 있어. 다른 사람도 놓아둔 거지."

스승이 기쁜 듯이 말한다.
기분 나빠지지만 귀를 막을 수 없는 기묘한 이야기다.

빈 캔 안에 든 팬지 꽃잎을 집으면서 스승이 계속 말했다.

"가드레일 밑에 놓아둔 꽃을 보고 합장하는 사람도 나타났어. 과자를 놔두는 사람도 있었지. 한 달, 두 달 정도라면 거기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쯤은 사람들도 알 거야.
하지만 그게 몇 년 동안 계속되면 기억이 애매해져. 저 꽃은 언제부터 놓여 있었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사고가 일어났을지도 몰라. 저기서 사고가 일어났나?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물어봐. 몇 년 지나면 주민들도 바뀌지. 이사해온 이후 가드레일 밑에 꽃을 볼 때마다 사고가 있었다고 지레짐작한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해.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스승이 음색을 바꾸며 연기한다.

기분 나쁘다.
그 목소리가 아니다.
사람 마음을 조종하는 것 같은 그 무례함이 기분 나쁘다.

"사람들 마음속에서 망자가 생겨났어. 사람은 꽃을 바치고 손을 모으고 기도해. 망자에게 명복을. 영혼에 안식을. 그렇게 태어난 망자는 사람의 말에서 말로 감염해. 가드레일 근처에서 차에 치인 아이로 변해 버려. 어쩌면 그건 노파일지도 모르고 혹은 임부일지도 모르지. 원래 형태가 없는 그건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어. 의사소통을 매개로 한 흉내쟁이는 정보전달 과정에서 변이해. 있지도 않은 괴담이 생겨나는 건 시간 문제지."

그저 꽃을 둔 것뿐이다.
길가에 그저 꽃을.

단지 그것만으로.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기가 몸 안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10년이야. 내 스승이 마을 곳곳에 꽃을 둔 것은."

스승이 씩 웃었다.

마을에 꽃을 심자는 운동은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그거랑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거였다.

마을 곳곳?

뒤늦게 그 뜻을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스승의 아파트에는 방뿐만 아니라 현관 밖에도 화분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줄곧 이 사람의 별난 취미라고 생각했었다.

마을 곳곳에 그런 꽃을 두고 있었던 건가.
그리고 그 꽃 앞에서 솟아나듯이 이름 없는 망자들이...

"유령이라는 것이 죽은 자의 몸에서 벗어난, 육체를 가지지 않는 존재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어제 네가 본 그건 유령이 아니야. 죽은 자의 몸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망자로서 존재한 거니까. 그리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명복을 빌어도 성불을 원해도 이루어질 수 없어. 망자조차 아닌 그것은 사람들이 명복을 비는 걸로, 성불을 원하는 걸로, 그리고 경외하는 걸로 계속 존재하는 거야."

이야기하면서 황홀한 얼굴을 하는 이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다.

새삼 그걸 깨달았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계속 감염하는 바이러스.

보이지 않는 그 존재를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거였다.

감염이 사람의 마음에 환상을 싹틔운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도 그건 들어오고 있다.

하지만.

"이상해요."

나는 겨우 말을 쥐어짜내었다.

"뭐가?"

"그 가드레일 근처에 꽃이 놓여 있다는 걸 떠올린 건 지나간 후였어요. 게다가 거기서 교통사고가 있었다는, 아이의 영이 방황하고 있다는 얘기를 친구한테 들은 건 오늘이었어요."

"그래서?"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그런 얘기 못 들었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존재하지도 않는 걸 어떻게 볼 수 있냐고요! 그건 대체 뭔가요?"

스스로 말해놓고 오싹해졌다.

나는 감염되지 않았다.
있지도 않은 사고 소문을 아무한테도 들은 적이 없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때 "꽃이 있구나."하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거기서 누가 죽은 게 아닐까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다.

연상해 보면 자연스레 도달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관심은 없었다.

그저 시야에 들어온 풍경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런 내 앞에 어째서 그런 정체를 알 수 없는 게 나타나는 걸까.

인간심리를 이용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환상(망자)이 마치...

마치 인간의 마음속에서 스며나와서 홀로 걸어다니는 것 같지 않은가.

내가 보는 앞에서 스승은 팬지 줄기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연구를 계속할 가치가 있는 거야."

그리고 조용히 꽃을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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