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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방

[스크랩] [소설][스승시리즈] 미(未) 5

작성자빛빔|작성시간26.06.20|조회수60 목록 댓글 0

 

출처 : https://m.blog.naver.com/qordb6712/120174098822

[작가 코멘트]
'미' 라는 이상한 제목을 지은 건 진짜 제목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치면 될 것을 어떤 곳에서 제목 예고를 이미 해버린데다 저 나름대로 애착이 깃든 제목이기에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육지책으로 마지막에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제가 좋아하는 영화인 '시끌별 녀석들2'에서 사용한 수법이기도 합니다.

그 명작도 부제가 심각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기에 엔딩에서 처음으로 타이틀 콜이 나오는 연출을 썼지요.

다만 단순히 마지막에 공개한 저랑 달리 시끌별쪽은 그 연출에 이르기까지 복선이나 작법에 필연성이 있어서 정말로 신들린 장면이었습니다.

그럼 '미' 마지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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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시 나가오키는 침공 시 예전 영토에서 모시던 하치만 신사를 이 땅에 권청했습니다. 이건 다른 전국시대 무장들도 주로 했던 일이죠. 그렇게 권청된 와카미야를 섬기는 신사, 와카미야 신사로 명명된 그것은 이 땅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타카하시 나가오키의 야망이 부서진 후에도 계속 남아 현재까지 신앙을 받아왔습니다. 오늘 경내도 둘러보았는데 훌륭하게 만들어 놓았더군요.
하지만 비호자인 타카하시 가문의 원조가 끊겼는데도 불구하고 이만한 격식을 가진 신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주민들의 기부랑 조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야 이 마츠노키는 니시카와정 외곽에 있고 한적해 보입니다만 당시는 상당히 인구가 많았던 것을 이 신사 규모로 추측할 수 있지요.
그렇기에 타카하시 나가오키는 거금을 부어 이 땅에 저수지를 만들려고 한 겁니다. 그러자 기묘한 일이 나타납니다. 그만큼 많던 사람들은 와카미야 신사가 생기기 전에는 대체 뭘 모시고 있었을까요."

헉 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갈 거라고 짐작한 것이리라.

"그 정보는 여태까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메이지 초기 신사 정리 정책 중에서 제신도 알 수 없는 자그만 신사는 차례로 와카미야 신사로 통합되어 갔지요. 그 이름 없는 신들은 지금은 와카미야 신사 경내에 있는 말사에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와카미야 신사를 지탱해온 사람들은 그런 약한 신들을 모시고 있었을까요? 아뇨 아닙니다. 저수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한 번 더 그 의미를 생각해 주세요. 타카하시 나가오키의 야심? 백년대계? 그런 것보다 좀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물입니다. 물이 없었던 거예요.
국내 마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던 기근. 그 원인은 물 부족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논밭은 마르고 작물은 시듭니다. 물을 끌어들일 수로도 강 같은 그 원천이 마르면 무용지물이 되지요. 지금이야 근대 기술인 시굴로 온천을 파낼 수 있지만 이 마츠노키를 안은 산들은 낮고 내린 비를 천천히 안정적으로 지표로 보내는 지질은 아닌 거예요.
지류의 수량이 안정되지 않고 가뭄이 이어지면 물이 없어져 계속 기근이 발생했겠지요. 그렇기에 저수지를 만든 겁니다. 그토록 물이 궁한 사람들이 신에게 빌지 않았을 리가 없어요. 그런 절실한 기도를 받아줄 신이 이 땅에 없을 리가 없단 말이죠."

딸랑...

또 들렸다.

스승은 그 소리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한자가 적힌 종이를 한 번 더 높이 들면서 소리를 높였다.

"비우머리 밑에 口 3개랑 龍이 적힌 이 글자는 '오카미(龗)'라고 읽습니다. 오래된 글자입니다. 과거를 살펴보면 만엽집에 이러한 시가 있지요."

우리 언덕 오카미에게 말해서 내리게 할지어다

구름을 부수고 거기에 흩뿌리게 하겠노라

"이 오카미라는 건 물의 신입니다. 미즈하노메 등과 같이 각지에서 사람들의 신앙을 모으고 중요한 역할을 한 수신입니다. 타카오카미라고 부르는 경우는 산의 물을 관장하고 쿠라오카미라고 부르는 경우에는 암거, 즉 땅밑이나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관장하지요.
가뭄이 이어질 때에는 이 신에게 비를 간청합니다. 그때에는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실행했지요. 예를 들어 스모를 열거나 카구라를 추어서 신을 기쁘게 하거나 혹은 성대하게 제사를 열어 마을을 행렬하거나 산에 올라 커다란 불을 지피는 등 다양한 일을 합니다.
물론 고대로부터 기우제 대사은 오카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신사가 기우제를 했지요. 니키(丹貴) 즉 우사(雨師)라고 불리며 요시노강 상류에 진좌한 니우카와카미사나 카모강 상류에 진좌한 키후네 신사를 대표하는 신사들은 조정의 칙봉을 받은 역사가 있습니다. 헤이안 시기에 편찬된 '연희식' 신명장에도 기우 팔십오좌로 불리는 신사가 기록되어 있지요.
또한 신도뿐만 아니라 밀교를 대표하는 불교의례에서도 비를 청하는 청우법 비술이 오랫동안 실행되어 왔습니다. 밀교 사통대법 중 청우경법과 공작명왕경법은 청우법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리고 밀교라고 하면 뭐니뭐니 해도 용왕입니다. 팔대용왕이나 그 권속들은 벼락의 신이자 물의 신이며 그리고 비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용왕 이름을 붙인 산은 국내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며 용왕이 수호하는 산은 서민들 사이에서도 기우제 시 중요한 신앙 대상이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산입니다. 산은 내리는 비를 품 깊숙이 모아 끊임없이 평지로 물을 가져다주는 장치입니다. 용왕산뿐만 아니라 온갖 산은 기우제를 위한 중요 거점인 거예요. 물론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는 마츠노키에 진좌하는 이 여관 뒤쪽 산도."

딸랑...

그 소리에 스승의 목소리가 겹쳐서 신비한 여운을 남긴다.

"옛날에 이 뒷산에는 오카미를 섬기는 신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골짜기 밑에서 발견한 돌은 그 유적이겠지요. 불처럼 농지를 태우는 태양이 계속 내리쬐는 염한(炎旱) 동안 사람들은 오카미에게 빌었습니다. 열심히 비를 애원했던 거죠.
현대 사회에서 결혼과 집 신축 그리고 장례 때밖에 안 보는 제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비가 내리느냐 마느냐로 그 마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진정한 신앙이었지요. 그렇기에 그 신앙을 받아들이는 곳에 있던 신사의 권세가 얼마나 높았을지 추측이 갑니다.
하지만 그 기우제를 관장하던 오카미 신사에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미 아시겠지요. 타카하시 나가오키가 가져온 두 가지 변혁 중 하나. 와카미야 신사 권청입니다."

딸랑...

딸랑...

소리가 커져간다.
정적 속에서 그 소리가 형언할 수 없는 술렁임을 가져오는 것 같았다.

"타카하시 나가오키가 가져온 두 가지 변혁은 실은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저수지가 생겨서 가뭄의 공포가 줄어들고 기우를 위한 신앙은 필요 없어집니다. 그리고 마츠노키 사람들의 신앙을 새로 받아줄 그릇이 와카미야 신사가 된 거지요. 국내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받고 있는 하치만신을 섬기는 신사이니 그 역할은 충분했을 겁니다.
이 두 변혁이 섞여서 효율적으로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잊히고 사라져 버린 것들이 있습니다. 옛날에 이 산에 존재하고 사람들의 신앙을 모으던 오카미 신사 기록이 그리고 그 기억이 사람들 안에 남아 있지 않은 건 과연 운명이었던 걸까요."

딸랑...

딸랑...

딸랑...

스승의 말에 반응하듯이 소리가 커져간다.
모두가 숨을 집어삼키고 금줄을 바라본다.
자세히 보니 사방을 둘러친 그 밧줄 네 모퉁이에 자그만 방울이 달려 있다.

그 방울이 울리고 있었다.

"아뇨. 운명이라는 경솔한 말로 논해도 좋을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타카하시 나가오키는 그저 선의로 저수지를 만든 건지도 모릅니다. 통치자로서 필요했기에 만든 거겠지요. 그리고 와카미야 신사로 주민들 신앙도 통일하고 이 땅에 새로운 지배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당연히 오래 전부터 있었던 오카미 신사는 거슬렸겠지요.
직접적으로 힘으로 눌러버린 건지 아니면 사고를 가장한 건지 목을 조르듯이 서서히 외부에서부터 하나하나 무너뜨려나갔던 건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오카미 신사가 존속하지 못할 만큼 구체적으로 배제했을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철저하게 예전에 그 신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타카하시 가문은 2대로 멸망했기에 그 목표는 완성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전만큼 기우제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신사 교대를 자연스럽게 유도해 사람들 기억 속에서 옅어지게 한 겁니다. 혹은 어쩌면 제가 상상한 것보다도 그 교대는 계속 은밀하게 이루어진 건지도 모르죠.
아무튼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소멸한 원인이 타카하시 가문 그리고 와카미야 신사라는 건 틀림없습니다. 그 원한이 원념이 산 속에 깊이 새겨져 높은 곳에서 흐르는 강이 되어 혹은 지저에서 흐르는 어두운 물이 되어 언젠가 떠내려가 버린 걸까요."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방울이 금줄이 흔들린다.

공기가 찌르는 것처럼 차갑다.
토해내는 입김이 하얗다.
모두 얼굴이 굳은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변을 보고 있다.

"오카미 신사가 와카미야 신사에게 빼앗긴 건 신앙을 주는 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기우제를 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던 것을 빼앗겼습니다.
기우제에는 다양한 의식이 있지요. 예를 들어 불상이나 신체(神體)에 물을 뿌리는 행위 샘이나 못을 전부 바꾸는 미즈카에. 짚 등을 산정에서 태우는 쿠모아부리. 기우제 가면이라고 불리는 가면을 쓰거나 특별한 거울을 가지고 오거나 수많은 되를 일제히 씻는 백되씻기나 동물 사체나 분뇨 등 부정한 걸 신이 거주하는 곳에 던져서 분노를 유발해 비를 내리게 하는 의식도 있었지요.
그 중에서도 전국에 널리 분포한 풍습이 이 땅에도 있었지요. '달은 어디 있느냐 종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 채로 있도다'라는 바쇼의 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에치젠 츠루가 카네가사키에 가라앉은 종 전설을 읊은 겁니다. 치쿠젠 카네가사키 종도 유명한데 이러한 종 가라앉히기 전설 배경에는 해저에 사는 용신이 종을 좋아하기 때문에 종을 실은 배를 가라앉아 끌어올릴 수 없다는 설화가 있지요.
이렇듯이 용신이 좋아하는 종을 못이나 여울에 담그는 걸로 기쁘게 하여 비를 내려 달라고 비는 의식이 고대로부터 전해져 왔습니다. 이 마츠노키에서는 그 종 담그기가 어느 늪지에서 이루어졌지요. 종이 있었던 곳은 물론 기우제를 담당한 오카미 신사였습니다. 그리고 종 담그기가 실행되던 늪지는 종(鐘)을 담그기 위한 못 즉 쇼가부치(鐘ヶ淵)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카네가부치라고도 했지요.
이 종은 그렇게 가뭄 때마다 늪에 담기기 위해서 물에 닿는 밑부분이 몇 겹이나 겹쳐 녹이 생겼습니다. 카즈오 씨 당신 생가인 와카미야 신사에 있는 종이 그렇지요. 그 종은 원래 오카미 신사에 있었던 겁니다.
이름이 지워지고 빼앗긴 기우제 상징은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저수지가 완성되고 종을 담그는 일이 없어진 후 카네가부치도 그 이름을 바꾸었지요. 비슷한 이름인 카메가부치(亀ヶ淵)로. 이건 아마도 타카하시 나가오키가 바꾼 게 아닐까 싶어요. 이마하마를 나가하마로 바꾼 하시바 히데요시도 그러하듯이 전국시대 무장은 자주 이렇게 지명을 바꾸었지요. 亀는 어떻게 읽어도 쇼로 읽지 않습니다. 틀렸던 건 글자 쪽이었던 거예요."

딸랑...

방울 소리를 들리면서 나는 떠올렸다.
나가노 교수랑 통화할 때 여주인이 어쨌느냐고 묻는 내게 스승은 말했다.

범인이라고.

틀렸던 건 글자 쪽이었다.

'여주인(오카미)'이 아니라 '龗(오카미)'.

신의 이름.
혹은 신사 이름.
스승이 말했던 건 그쪽이었던 것이다.

즉...

"꺄악."

느닷없이 비명이 터졌다.
카에데가 입가를 막으며 소리쳤다.

그 시선 끝에는 흐릿한 인영이 있다.
그 희박한 몸에 윤곽이 생기기 시작한다.
카리기누, 에보시, 하카마.
신주 차림을 하고 있다.
얼굴은 없다.
흐릿한 게 아니라 창백하고 밋밋한 살점이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공간에서 튀어나왔다.

그림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넷.
아직 더 있다.
아직도.

"으악."

카즈오도 소리친다.
여주인도 히로코 씨도 소리친다.
칸스케 씨도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아 거품을 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나도 그 이상한 광경에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그게 이 세상 존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고 무엇보다 그 나타나는 방식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금줄 안에서 나타났다.
사악한 걸 퇴치하기 위한 경계 그 안쪽에.

가깝다.
고작 5제곱미터밖에 안 되는 공간 속에 우리 6명과 꺼림칙한 그림자들이 드글거린다.

도망칠 곳이 없다.

아침에 현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랑 접촉했을 때 느꼈던 감각이 떠오른다.

모든 생기가 빨릴 것 같은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가운데 스승이 일갈했다.

"허둥대지 마."

그 기백에 압도되듯이 비명이 그쳤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그 바늘은 결계야. 그것도 즉물적인 결계. 밟으면 아프다는 걸 아는 자라면 넘을 수 없어."

늠름한 목소리가 방에 퍼진다.
말투가 바뀌었다.

신주 그림자는 금줄 안을 떠돌았지만 우리랑 접촉하지 않았다.

모두 바늘 원 밖을 소리도 없이 떠다니며 걸어다닌다.

"반대로 말하자면 금줄은 그들에겐 결계가 아냐. 아니, 자신들이 지내는 '안쪽'이지. 그들은 속된 말로 일컫는 악령이 아냐. 어떤 진실을 고하기 위해서 나타난 조령(祖霊)이지. 예전에 신직에 몸담은 자들이다. 오히려 그 존재는 신과 가까워. 그러니 직접 인간과 접촉하지 못할 정도로 희박한 영체인 그들은 신역인 금줄 안에서야말로 힘을 얻어 출현하지." 

이것이 오늘 밤 이 자리에 그들이 나타날 거라고 내가 확신한 첫 번째 요인이다.

스승이 소리치는 그 앞을 신주 유령이 왕래한다.

춥다.
뺨에 바람이 느껴진다.
차가운 공기가 그들이 움직이면서 대류를 일으키고 있다.

"이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위험하니 짧게 설명하지. 그들은 오카미 신사의 궁사들이다. 4백년 이상도 전에 말이지. 와카미야 신사 당대 궁사인 이시자카 쇼이치가 아무리 액막이를 해도 소용이 없었던 건 유파가 다르다는 하찮은 이유 때문이 아냐. 오카미 시사 궁사들에겐 와카미야 신사는 침략자다. 자신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지워버린 장본인이라고. 화를 돋우면 돋울지언정 쫓아낼 수는 없겠지.
무엇보다 그들은 악의를 가지고 이승에 나타난 게 아니야. 토카노 숙박객이나 종업원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걸 보면 그걸 알 수 있지. 하고 싶었던 건 오직 하나 경고다. 악한 것, 사악한 것이 토카노에 들어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나타난 거야."

내 눈앞에 얼굴이 있었다.

눈도 코도 아무것도 없는 얼굴이 고작 20센티 거리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심장이 옥죄어온다.

"이 지방 오랜 지지(地誌)에 마츠노키에 있던, 오카미를 섬기는 신사가 기록되어 있었지. 이름은 나무목변에 母를 쓰는 '토가노(栂野)' 신사. 이 땅에 있는 오카미 신사의 정식 명칭은 토가노 신사야. 알겠냐. 토가노다. 이건 우연이 아냐. 이 온천 여관 토카노를 연 토카노 가문은 이방인이 아니었어. 유서 깊은 토가노 신사 궁사 일족과 이어지는 어엿한 혈족이지.
다만 신흥 와카미야 신사에 사람들을 빼앗긴 궁사 일족은 몰락해 버리고 말았어. 이윽고 다른 지방으로 달아났지. 그 후로 어떤 변천을 거친 건지 이름을 바꾸고 오사카에서 목재 도매상을 하여 제법 재산을 쌓았어. 그리고 여주인의 할아버지인 카메키치 씨 대에 금의환향을 한 거야.
물론 여관을 세울 곳으로 고른 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인 이 산기슭 옛날에 토가노 신사가 있었던 산이다. 지금 이 여관 주차장에는 이 땅을 사서 공사를 할 때에 장소를 옮긴 사당이 있지. 그 신체인 돌에는 다 지워져가던 글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어. 토카노의 이름을 걸고 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지키겠다고. 신사가 사라지고 궁사 일족이 떠난 후 계속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돌이야. 지금은 역할을 다하고 잠들어 있지. 그리고 그 역할은 새로운 토카노 가문이 이어받았다. 할아버지인 카메키치 씨는 그 지워진 역사를 몰래 전해듣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다음 세대로는 이어지지 않았어. 어쩌면 자기 아들인 2대에겐 전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3대인 치요코 씨에겐 전승되지 않았어. 그건 이 땅에 새 출발을 시작한 새로운 세대에게 그 멍에를 씌우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 때는 메이지 신사 정리를 지나 와카미야 신사는 여전히 건재하고 이제 토가노 신사 부흥도 현실적으로 더는 이룰 수 없게 되었어. 그저 그 산기슭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조상들 영을 달래고 그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거라고 여겼던 건지도 모르지.
여주인 당신이 어렸을 적에 본 대사(大蛇)는 뱀이 아니야. 용이지. 오카미 신사에는 수호자인 용을 본뜬 게 많이 놓여 있어. 그리고 토가노 신사에는 나무로 조각된 용이 있었지. 궁사 일족이 쫓겨나고 황폐해진 신사 유적이 몇 번이고 산사태에 묻혀서 신체인 용이 그 산 어딘가에 잠들어 있어. 그것이 그 날 밤 호우 때문에 흙과 함께 지류까지 내려와 탁류로 떠내려간 거야. 당신이 본 건 팔다리가 진흙탕 속에 있던 거대한 용의 몸통이었어."

여주인이 목숨이 빠져나갈 것처럼 깊은 숨을 내쉰다.
얼굴이 창백하고 양손은 그 뺨을 만질 듯 말 듯하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어쩌면 당신 할아버지는 그때 토가노 신사를 다시 부흥시키는 걸 단념하고 당신 대에서는 이 땅에서 조용히 살아갈 수 있도록 진실을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갈 각오를 한 건지도 모르지."

여주인은 얼굴을 가리고 오열했다.
여주인의 복잡한 심정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련해졌다.

"그리고 이 땅으로 돌아온 자손들을 보살피던 궁사 조령은 악한 자가 침입한 걸 눈치채고 경고를 보냈어. 그게 봄철부터 시작된 유령 사건이야. 모두 떠올려봐. 나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 유령과 조우한 이야기를 들었어. 그 중에서 한 명 오직 한 명만 다른 사람과 상황이 달랐지. 누군지 알겠어?"

깨닫고 보니 술렁거리던 기척이 내 주변에서 떨어졌다.
그 신주 유령들은 어느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사람만이 습격을 받았어."

깜짝 놀랐다.

설마 나...?
왠지 모르겠지만 눈앞이 깜깜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스승은 내 표정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너는 그냥 지나가던 길에 있었던 것뿐이야. 아케무츠가 시작되었으니까 나가려고 했던 거지. 그 진행 방향에 운 나쁘게도 네가 앉아 있었던 거고."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해당되는 인물은 한 사람밖에 없지 않은가.

"히익."

울음이 섞인 비명이 들렸다.
카즈오다.
카즈오가 신음을 흘리면서 눈앞에 있는 공간을 손으로 뿌리치는 시늉을 했다.

그 주변에 수많은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마치 몰려들듯이.

"너뿐이야. 쫓긴 건."

카즈오를 보면서 스승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노천탕에서 조우했을 때 너는 다가오는 유령한테서 간신히 달아났다고 말했지? 왜 너만 그런 꼴을 당했을까? 내가 대신 대답해주랴? 와카미야 젊은 도련님. 나도 처음에는 그저 네가 이 토가노 신사 원수의 자손이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서 그런 줄 알았어. 하지만 새로운 토카노 가문은 와카미야 신사를 모시게 되었고 과거의 멍에로부터 풀려난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어. 달갑지는 않지만 아무리 조령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와카미야 신사를 적대할까 의문이 들었지.
그 수수께끼가 풀린 건 카페에서였어. 오늘 낮에 니시카와정 카페에서 우리랑 만났지? 넌 그때 여자를 끼고 있었어. 그리고 곤란한 얼굴로 여동생이라고 소개했지. 여기서 본 걸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도 말했었나? 그 후에 여동생과 싸웠다는 핑계로 네가 카에데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걸 안 우리는 그대로 속아넘어갈 뻔했지.
하지만 말야. 그 카페에는 오토바이가 한 대밖에 없었어. 너 분명히 말했지? 버스 정류장이 머니까 우리 가족은 모두 오토바이를 탄다고. 카페 앞에 세워진 오토바이는 본 적이 있었어. 네 오토바이야. 그럼 여동생은 어떻게 왔을까? 2인승? 하지만 헬멧은 핸들에 하나밖에 걸려 있지 않았어. 다른 하나는 좌석 밑에 있는 헬멧 홀더에 있었을까? 하지만 네 오토바이는 헬멧을 2개나 수납할 수 있는 차종이야. 왜 오토바이를 내린 후에 둘이 헬멧을 벗었는데 한쪽만 일부러 좌석 밑에 넣었을까? 둘 중 하나는 헬멧을 안 썼다? 아니. 아는 사람들이 많은 시골 마을을 달리는데 그런 쓸데없는 위험을 무릅쓸 리가 없지.
헬멧은 처음부터 하나밖에 없었어. 그저 넌 거기서 만나기로 했을 뿐이야. 니시카와정에 사는 여자랑. 그 여자는 여동생인 미도리가 아냐. 얼굴을 모르는 우리라면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냐. 상당히 낙천적이구만? 아까 여관에서 전화가 걸려왔어. 카에데 있냐고. 이름을 물어보니 미도리라더라. 거 참 이상하지. 데이트 약속 시간으로부터 2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어. 카페에서 오빠랑 작전을 짠 게 정말로 미도리라면 카에데가 여관에 없을 것 정도는 당연히 알 테지.
별 거 아냐. 간단히 생각하며 돼. 떳떳하지 못한 사이인 여자랑 밀회하다가 들켰을 때 쓰는 변명 그 첫 번째. '여동생입니다' ...그치? 바보 같지? 너 카에데에게 홀딱 빠진 척 하고 뭘 꾸민 거야."

스승의 말에 모두 귀를 의심하듯이 입을 딱 벌렸다.
당사자인 카즈오만은 자신을 둘러싼 유령 무리에 겁을 먹어서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바쁘신 모양이니 대신 말해주지. 네가 차남이라서야. 전통 깊은 와카미야 신사는 신직 대학원생인 장난 오사무가 뒤를 잇는 게 사실상 정해졌어. 넌 자신이 언젠가 집에서 쫓겨날 거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지. 그때까지 직업을 찾아야 해. 그런데 소꿉친구였던 카에데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기 대학에 들어가 상당히 예뻐졌어. 이야 참 좋지 않냐. 생가는 여관을 경영하고 있는데 뒤를 이을 사람이 없어. 사위로 들어가면 여관은 언젠가 자기 손으로 들어오지. 장래는 평안하고 아내는 예뻐. 장모인 여주인도 도와주시고. 최고네. 사랑하는 건 다른 여자라도 들키지만 않으면 돼. 밖에서 여자 한둘 꼬셔오는 것도 남자의 능력이지. 그치?"

카에데가 눈이 거의 뒤집혀서 스승과 카즈오를 교대로 보고 있다.

"네가 이 집에 빈번히 드나들기 시작한 건 카에데가 단기 대학생이 된 후라고 들었어. 아까 내가 기억해 달라던 시기는 9개월부터 10개월이다. 무슨 숫자였지? 유령 소동이 시작되고나서 지금까지 시기였지. 그건 네가 사악한 야망을 품고서 토카노에 찾아온 시기랑 일치한다고. 이제 알겠지? 오카미 신사 즉 토가노 신사 궁사 유령이 여관에 나타나게 된 것은 사심을 숨긴 채 침입해온 이시자카 카즈오라는 이물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어. 이게 오늘 밤 이 자리에 그들이 나타날 거라고 내가 확신했던 두 번째 요인이다. 그 장본인이 미끼로 여기에 있으니까."

그러므로.

그렇게 말하면서 스승은 카즈오를 가리켰다.

"복잡괴기한 이 사건 신직이 아닌 내게 액을 쫓아내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쫓아내 주마."

나 가 라.

천천히 한 음절씩 스승이 그렇게 선언했다.
그 짧은 말에는 일절 거스를 수 없는 울림이 담겨 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카즈오는 자신을 만지려는 영체들의 손을 좁은 원 안에서 필사적으로 피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나갈게!"

"약속은 지켜라."

스승은 그렇게 말하더니 바늘 결계를 넘어서 검은 그림자들 손을 지나 품에서 가위를 꺼내더니 금줄 일부를 끊었다.

그 잘린 부분 끝이 땅에 닿은 순간 신주 유령들이 싹 사라졌다.

그토록 농밀했던 기척도 소멸했다.
그때 귀울림이 쇄도한 것 같았다.

"원이 끊어지면 닫힌 세계는 끝나. 신역을 잃고 한 번 흩어진 영체가 다른 알고리즘으로 다시 응집해서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리겠지. 나가려면 지금이다."

웅크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카즈오가 스승의 말을 듣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아우성을 지르면서 방을 뛰쳐나갔다.

우리는 모두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저 멍하니.
악몽에서 막 깨어난 듯이.
스승만이 후련한 얼굴을 하고서 웃었다.

"이걸로 끝났군."

천장에서 실로 매달려 일부가 끊어진 금줄과 바늘투성이인 바닥.

그 바늘이 만든 원 안에 갇힌 인간들.
그런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있다.

하지만 아까까지 거기에 존재하던 이계는 똑같은 형태를 한 조금 기묘한 일상으로 변했다.

그 모든 걸 조종한 장본인은 배가 고픈 건지 오른손으로 위장을 누른다.

그리고 뒷손을 짚고 주저앉은 칸스케 씨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아 눈이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하는 가랑비는 어느샌가 눈으로 바뀌었다.

이미 시각은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새삼 스승이 배정받은 1층 제일 비싼 방에 와 있었다.

그리고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을 마시고 있다.

터무니없는 결말로 막이 내린 이 사건도 일단 해결된 걸로 간주되었다.

이 방은 그 보상인 셈이다.
여주인은 몇 번이고 스승에게 머리를 숙였다.
정말로 감사하다며.
카즈오 건뿐만 아니라 다양한 근심이 씻겨내려간 표정이었다.

대를 거듭해도 이 지역에서 이방인으로 취급받고 거기에 체념해 버린 자신과 결별한 얼굴이었다.

"이제부터도 긍지를 가지고 여기서 살아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주인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칸스케 씨도 찾아왔다.
늦은 저녁은 별로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첫날인 어제만큼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그 후에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우리에게 몇 번이고 정성껏 술안주를 만들어와서 잠자코 두고 갔다.

무뚝뚝한 그가 저 나름대로 보이는 성의 혹은 사죄이리라.

카에데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그 방에서 도망치듯이 나가 버렸다.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클지 상상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그것도 언젠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일까.
다만 그 순수한 애가 행복해지기를 빌었다.

마지막으로 히로코 씨가 우리 방으로 왔다.
미안한 얼굴을 하고서 꼼지락거렸다.

"카즈오의 여벽을 알고 있었지?"

스승이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살짝 죄책감을 덜어낸 얼굴을 했다.

"그런 마을 안에 있는 카페에서 다른 여자랑 만나다니 너무 어설퍼.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야. 어차피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겠지."

아무래도 카즈오가 여벽이 안 좋다는 건 은근히 유명한 모양이다.

적어도 히로코 씨처럼 정보통인 여성들은.
히로코 씨도 카에데에게 그걸 전할지 망설였던 것 같다.
하지만 카즈오도 언젠가 카에데의 좋은 점을 깨닫고 마음을 바꾸어 진지하게 사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젊은 그 싹을 짓밟는 걸 주저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치만 설마 그게 이런 소동을 초래하게 될 줄이야."

히로코 씨는 시무룩해하면서도 마지막에는 얼굴을 모아 씩 웃었다.

"꼭 다시 와줘."

그렇게 손을 흔들고 방을 나갔다.

이런 시골 반드시 나가 주겠어.
그렇게 말했던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의외로 이곳 생활이 마음에 든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조수라는 건 좀 더 사건에 뛰어들어서 실마리가 보일 때까지 돌아다니는 역할이 아니었던가.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스승이 해결해버렸다.

흥신소에서 받는 적은 알바비로는 절대로 못 묵는 여관에서 이틀이나 숙박하고 거의 관광만 한 것 같다.

면목이 없다.
게다가 이런 크리스마스에 스승이랑 둘이서.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렇다. 오늘은 25일이었다.
잊을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창밖에서 내리는 눈도 징글벨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풍경이 아닌가.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그렇게 중얼거리자 잔을 한 손에 쥔 스승이 새빨개진 얼굴로 커튼을 열어젖힌 창밖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크리스마스라는 건 24일 일몰부터 시작해서 25일 일몰로 끝나는 거야. 말 안 했어?"

그랬었나? 그럼 지금은 이미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시간은 아니라는 건가.

왠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오늘밤 쿠레무츠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었듯이 크리스마스랑 그렇지 않은 시간의 틈새를 넘고 있었던 걸까.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장지뱀이라고 했었지요."

여주인이 어렸을 적에 체험한 이야기를 들은 후였다.
그건 다리가 있는지 아닌지 차이가 있는 것뿐이고 뱀은 다른 생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말했었나?"

스승은 풀어진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다.
취기가 돌아 기분이 좋아보였다.

"말했어요."

나도 자기가 한 말에 별로 집착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그렇게 말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용했다.
시골 밤이다.
도시에서는 이렇게 조용하지 못하리라.

그저 소리도 없이 깊은 어둠 속에서 눈만이 내린다.

멀리서.
가까이서.
그저 창문을 향한 얼굴만이 가깝다.

우리는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그 이름도 없는 밤 풍경을 언제까지고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냄새가 가진 기억이라는 건 참 신기한 법이다.

완전히 잊고 있던 과거가 뜻하지 않은 우연으로 그리운 냄새를 맡아 선명하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나는 그 사람이 없어진 방에서 홀로 부엌에 서서 상쾌한 냄새를 풍기는 비누를 그저 쥐고 있다.

모든 게 찬란했던 그 무렵 기억이 담담히 흘러가 사라졌다.

손에 닿지 않는 과거라는 서랍 속에 처박혀 있었으리라.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게 손등을 미끄러지듯이 떨어진다.

추억의 잔재가 내 눈시울을 자극한다.
하지만 거기서 물은 흐르지 않았다.

'너 강해졌구나.'

언젠가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병원 시트가 유난히 새하얗다.

'이제 눈이 보이지 않아. 시계를 봐줄래?'

기억 재생을 멈추었다.

강해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대답했었나?

이미 잊어버렸다.

수도꼭지를 잠갔다.
물이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는데 멈추는 건 순식간이다.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나는 한 번 더 비누를 쥐었다.
수도꼭지를 비틀어 비누를 양손으로 다시 쥐었다.
물이 흘러내릴 때까지 나는 양손을 비볐다.
그 사람이 그러했듯이.

그 짧은 시간.

슬쩍 곁눈질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내겐 기도처럼 보였다.

세계 곳곳엔 기우제 풍습이 있었다.
그 방법은 다양했다.
하지만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
그건 기도다.
기도가 언젠가 대지에 비를 내리게 한다.

그 동안 사람은 신 혹은 자연 그 자체와 하나가 되어서 통할 리 없는 마음을 통하게 한다.

기우제 풍습이 있다면 기우제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오카미를 모시는 신사 수호자들처럼.
그러한 기우사를 영어로는 레인 메이커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말은 동시에 세 치 혀만으로 거금을 벌어들이는 변호사를 뜻하기도 한다.

나는 비누를 비볐다.

다양한 속임수와 아주 조금 숨겨진 진실을 조종해서 짧은 생애를 질주해온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기우제는 내릴 만할 때 하는 법이야.'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턱을 괴면서 슬쩍 웃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 사람답다고 생각했다.

옅은 벽으로 둘러싸인 방 밖에서 차가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덜덜덜 구멍이 뚫린 듯이 배기음 소리를 내면서.

눈을 내리깔고 나는 비누를 비빈다.

기도하듯이.

상쾌한 냄새가 코 안에 퍼진다.

이윽고 수도꼭지에서는...


'레인메이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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