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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설]내가 사랑한 환각(스압주의)

작성자빛빔|작성시간26.06.20|조회수95 목록 댓글 0

 

출처 : 스레딕
여성시대 엘프리데 바이스

1 이름 : 이름없음 2019/01/30 17:21:28 ID : 4LgkljAlyJP

이야기를 해보려고. 지금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잊을 수 없던 내가 무척 아프고, 괴로웠던 우울증에 걸렸던 순간에 내가 봤던 환각과 나를 살려주던 환각에 대한 이야기야

2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22:35 ID : 4LgkljAlyJP

언제부터였더라 내가 지독한 우울증으로 차근히 죽음에 가까워졌던게

3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24:11 ID : 4LgkljAlyJP

먼저 내 이야기를 끄집어내자면. 난 초등학생때부터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차근차근이 우울에 좀먹혀 살아갔었어. 지금은 뭐 성인이고, 우울증은 다 나았지만. 몇년전까지만 해도 정말 심각할정도의 우울증이었어

5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26:38 ID : 4LgkljAlyJP

내가 우울증에 걸린 이유에 대해 묻는다면 글쎄. 딱히 말하고 싶지는 않아. 지금은 이렇게 무덤덤하게 써내려갈 수 있지만 그래도 그때 내가 그토록 괴로워했던 이유를 떠올리는건 질색이어서. 그래도 이유를 대충이나마 말하자면 가정폭력과 억압, 학업에 대한 압박, 대인에 대한 공포증, 자아분열 뭐 등등 여러가지가 있었어.

6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27:50 ID : 4LgkljAlyJP

그런 우울증은 내가 깨닫기도 전에. 내가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알기도 전에 초등학교 때부터 나를 집어삼켰고, 난 중학교 1학년때 처음으로 자살에 대한 고민과 시도를 했어.

7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28:14 ID : 4LgkljAlyJP

아주 어두운 이야기라서 미안해. 그래도 이부분을 이야기해야 내가 어쩌다 환각을 보게되었는지 알려줄수있으니까말이야

8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30:00 ID : 4LgkljAlyJP

그때 아마 처음으로 아, 죽어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같아. 왜그렇게 나약했나 약해빠졌나 라고 궁금증이 들수도 비난할 수 있겠지만 글쎄... 만약 너희의 첫번째 기억이 부모가 자신을 때리는 거라면 그때까지 버텨온게 대단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 덜 성장한 몸으로 꿋꿋이 버텨온게 말이야.

11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31:40 ID : 4LgkljAlyJP

어찌되었든 지금 내가 살아있고, 이글을 쓰고 있는걸 보면 다들 알다시피 실패했어. 뭐. 겁이 난거지. 정작 한 3층높이로 올라가서 뛰어내리자 생각을 했어도 결국은 무서워서 실패. 그렇게 몇번을 거듭해서 목을 매달까, 뛰어내릴가 전전긍긍해왔고. 그 사이의 자잘한 사건들과 계속되는 충동으로 인해 우울증의 깊이는 커져만갔어

13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33:37 ID : 4LgkljAlyJP

그리고 뭐 흐르고 흘러~ 시간은 흘러서 어찌 저찌 잘 버텨와서 중학교 3학년. 이때까지도 계속 시도하고 고민하고 그렇게 살아왔어. 그러다가 처음으로 이길수없는 슬픔과 좌절감, 해소할수없는 분노때문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처음으로 자해를 했어. 참... 내스스로니까 나를 비난하자면 너무 충동적이었고 멍청했던 판단이지.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자신을 해치다니. 뭐 그렇다고 남을 해칠수도없겠지만말이야.

15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35:57 ID : 4LgkljAlyJP

정신을 차려보니까 아주 얕게 베이듯이 상처가 남아있었어. 그걸보면서 내가 느꼈던건 왜인지 모를 해소감과 허탈함, 그리고 묘한 쾌감과 슬픔. 그리고 화가 났어. 난 이렇게 내 자신에게 상처를 내도 정말 야트막하게, 되먹지도 못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애매한 상처를 내는구나 하면서 울었던것같아

16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37:14 ID : 4LgkljAlyJP

그게 아마 중학교 3학년 말이었어. 그때 처음 자해를 하고 2달이 흐르고 고1이 되었지.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 자해를 하는 간격이 좁아졌어.

17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38:06 ID : 4LgkljAlyJP

처음에는 아 이건 멍청한 짓이야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었지만. 한달후에 나도 모르게 그걸 했고, 그리고 2주후에 했고. 그리고 뭐 거의 1주일에 1~2번은 했던것같아.

18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39:22 ID : 4LgkljAlyJP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성격에 문제가 있다거나 친구문제 왕따라던지 그런 문제를 겪었던 건 아니야. 오히려 성격이 좋아서 주변에 사람이 끊이질않았지. 하지만 난 그만큼 우울했어. 난 그 많은 사람 중에 단 한명도 믿지를 못했거든.

19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40:40 ID : 4LgkljAlyJP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내가 원하지도 않던 고등학교를 부모님에 의해 강제로 올라가게 되었어. 최악이었지. 부모님은 내가 자해를 하는지 자살을 생각하는지 그 무엇도 알지 못했어.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알수있었을텐데. 조금만. 그게 정말 아쉽더라.

20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43:25 ID : 4LgkljAlyJP

뭐 또 이야기를 하자니 레파토리는 똑같으니까. 1년동안 무지막지한 사건에 휘말려서 더욱 우울해졌답니다~ 왜 그사건에 휘말린건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날 옹호하고 대신 그 사건을 막아주고 위로해줬지만, 난 그때 이미 우울감이 내 귀와 눈을 다 틀어막아버려서 그 어느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채 혼자 남겨진 기분을 겪었어. 조금만 시야를 넓혔다면 난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수있었겠지만. 다들 알잖아? 한번씩 다들 우울하면 내가 사랑하고 즐겁고 나를 위해주는 그 어느것도 생각에 들어오질 못하는거.

21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44:33 ID : 4LgkljAlyJP

그렇게 흘러서 2학년이 되었지. 이때부터야 내가 이야기 할 그 환각에 대한 이야기는

24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46:12 ID : 4LgkljAlyJP

난 이때 드디어 죽을 용기가 나기 시작했어. 처음으로 똑같은 3층 높이의 창문에서 몸을 반쯤 내놓고 밖을 보는데, 아. 이게 이렇게 괜찮았나? 아, 이거 할수있을 것 같아. 잠깐이면 될거같아. 할 수 있어. 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처음으로 우울한 생각을 하며 웃을 수 있게 되었지.

26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47:34 ID : 4LgkljAlyJP

정말 너무 행복했어. 드디어 죽을 수 있구나. 이 빌어먹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 내 꿈 미래 그딴건 필요없으니까 편안함이 있기를. 아무것도 없는 그곳을 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쯤되니 애초에 사람이 피폐했지만 정신이 붕괴가 되기시작하더라

27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48:32 ID : 4LgkljAlyJP

처음은 환청을 듣게 되었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자는데 새벽쯤에 집바깥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나더라고

29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50:14 ID : 4LgkljAlyJP

순간 놀라서 잠에서 깻지. 그리고 소리에 집중을하는데 우리집 거실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들렸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파. 아파요. 그러더니 여자가 깔깔거리며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는 환청이었어. 난 배게로 내 귀를 막으면서 이불속에 기어들어갔어. 무섭다. 무섭다. 저게 대체 뭘까. 뭐지.하면서. 그때는 내가 환청을 듣게 된 것인줄 상상도 못했어

30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52:00 ID : 4LgkljAlyJP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조심스럽게 부모님한테 물었어. 혹시 저녁에 여자 비명소리 듣지 못했냐고. 그랬더니 날 엄청 멍청하다는듯이 보면서 그런 소리를 들었겠냐면서, 그랬으면 이미 경찰까지 왔을거 아니냐 그러더라고. 그래서 난 이때 내가 잠결에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어. 정말 생생했는데 말이야.

31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54:38 ID : 4LgkljAlyJP

그리고 3일이 지났나... 그쯤에 다시 환청을 듣게 되었어. 집에 혼자 있었는데 저녁을 먹고 공부를 하던 중에 핸드폰 문자 알림 소리가 들리더라. 그래서 어 뭐지? 하면서 내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아무것도 오지 않아있었어. 그래서 뭐지 하면서 가만히 앉아있는데. 띵. 띵. 띵띵띵띵띵띵띵- 뭐 그런식으로 알림소리가 엄청나게 울리면서 ,아주 짧은 간격으로 방안을 소리로 매꾸어 버렸어. 난 또 이불속에 기어들어가서 제발 이소리가 멈추기를 빌면서 울고있었지

32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55:46 ID : 4LgkljAlyJP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진정이 되었는지 아무소리도 안들리더라. 그리고 깨달았어. 아 내가 혹시 환청을 듣고있는건가? 하면서 말이야.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하면서 웃고있었던것같아.

34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58:19 ID : 4LgkljAlyJP

그리고 일주일 채 안되어서 난 처음으로 환각을 보게 되었어. 혹시 너희 박제 된 사슴목 알아? 그런식으로 내 얼굴이 내방에 박제되어있더라. 와 씨. 이건 지금 상상해도 무섭다. 그때 그걸 보고 그날 밤은 내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어서 부모님한테 혼났던것같아. 그리고 결심했지. 아 이거 죽어야겠네. 안그래도 죽으려했는데 이건 못견딘다. 존나 무섭네 하면서 말이야. 아 좀 웃긴다 ㅋㅋㅋㅋㅋㅋ

35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7:59:13 ID : 4LgkljAlyJP

그리고 난 내 생일에 죽음을 맞이하자고 계획을 세웠어. 3달의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지.

36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8:01:27 ID : 4LgkljAlyJP

그 후로는 점점 환각이 심해지더니 나 혼자 있을때 뿐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보게 되었어. 학교에서 가만히 내자리에 앉아있는데 복도에 분명 누가 지나갔는데 그게 진짜 사람이 아니라 환각이었고, 잠깐 졸다가 옆을 봤더니 옆자리 애가 랩으로 꽁꽁싸매져있거나 뭐 그런식으로 내 일상생활을 점점 침범해오기 시작했어.

37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8:03:08 ID : 4LgkljAlyJP

그렇게 2달 반정도 남았구나 하면서. 조금만 버티자. 생일선물이 기다리는거야 생일선물이. 하면서 내 생일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날 학교 체육시간에, 난 내가 앞으로도 사랑할, 내가 사랑하게 될, 나를 구원해줄 환각을 마주치게 되었어.

38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8:04:59 ID : 4LgkljAlyJP

그날은 정말 눈이부신 날이었어. 햇볕아래에서 모두가 운동장으로 나가고있었는데 갑자기 문듯 하늘을 보게 되었는데 거대한 노란 독수리같은 형체가 날고있었어. 정말 아름답고 신비로웠어. 아주 높은 하늘위에서 비행하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그 크기가 크다고 느낄수있을정도로 아주 거대했어. 순간 그 독수리가 나를 보고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순식간에 독수리는 저멀리 날아가버렸어.

39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18:06:38 ID : 4LgkljAlyJP

그리고 나는 친구를 붙잡고 물었어. 혹시 방금 노란 독수리를 봤냐고. 그랬더니 응? 아니 전혀? 너가 하늘보길래 나도 봤는데 아무것도 없던데...뭘본거야~ 하면서 웃더라고. 그래서 난 아 내가 착각했나봐 하면서 넘겼지만, 난 환각이었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어. 하지만 이때까지 봐온 환각들과는 다르게 정말 아름답고 애틋해지는 그런 느낌이었어.

46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0:59:56 ID : 4LgkljAlyJP

그 노란 독수리를 보고 몇일이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것과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되었어

47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03:26 ID : 4LgkljAlyJP

그날은 아마 마지막 수학여행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날이었어. 난 당연히 수학여행을 갈 생각은 추호따위도 없었고. 그래서 부모님한테는 몸이 너무 안좋다는 핑계를 대고 안간다고 말하고, 학교 선생님과 왜 수학여행을 가지않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날이었어. 그저 가기 싫다라고 말하기는 그래서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뭐... 우리 학교가 워낙 보수적이라서 학교부장선생님이 따로 저녁에 날 불러서 욕을하면서 학교에 대한 반항이니 뭐라니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더라고. 그래서 정말 죄송하다고, 정말 몸이 따라주질 못한다하고 겨우겨우 그자리를 벗어날수있었어.

48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08:18 ID : 4LgkljAlyJP

그리고 그날 저녁에 자율학습은 몰래 빠져나와서 학교 주변에 서성거리다가 왜 굳이 내가 생일날까지 버텨야할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육교를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났어. '날고싶은거야?' 하는.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까 거대한 노란 독수리가 떡하니 있었어. 너무 놀라고 이렇게 생생한 환각은 처음이라 아무말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었어.

49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09:21 ID : 4LgkljAlyJP

거의 성인 남성의 키는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독수리였어. 그렇게 한참을 응시하다보니 그 독수리가 빤히 나를 바라보다가 훌쩍 날라가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렸어. 그게 두번째 만남이었어.

50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12:22 ID : 4LgkljAlyJP

그게 날라가는 모습을 보니까 갑자기 정신이 확 돌아온 느낌이었어. 저건 대체 뭐지? 왜 다른 환각이나 환청하고 다른거지 하면서 말이야. 그러다보니 감정도 누그러지고 진정이 되니까 일단 돌아가야겠다 라는 생각에, 남은 시간은 대충 바깥에서 떼우다가 집에 돌아갔었어.

51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16:50 ID : 4LgkljAlyJP

그리고 또 일주일정도 흘렀나. 그 사이동안은 거의 같았어. 우울하고 지치고 아무 감흥없는 상태. 그리고 수학여행날이 다가왔고, 학교는 텅비게 되었어. 난 그때 평균적으로 하루에 두시간밖에 자지 못하거나, 잠을 자도 악몽을 꾸거나 꿈을 연속적으로 5-6개를 꾸기때문에. 잠을 오히려 안자려는 상태였어. 그래서 학교에 있을 때 자주 졸고 그랬어. 남아있는 감독 선생님 한분과 텅빈 교실에 나 혼자 앉아서 있는데 밖에 비가 오더라.

53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20:15 ID : 4LgkljAlyJP

비가 자꾸 추적추적내리는데 그걸 구경하느라 시간가는줄 모르겠더라.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는데 어느 순간에 앞을 보니까 감독 선생님은 자리를 뜨고 없더라. 그렇게 또 가만히. 가만히 있는데 어디선가 재잘대는 여자애들 목소리가 들렸어. 또 시작되는건가 싶어서 눈을 감고있는데 막 재잘대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더니 내 귀에대고 '야, 너 다 들었지?' 하는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 눈을 뜨니까 여자애 한명이 소름끼치게 나를 내려다보고있더라.

54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21:46 ID : 4LgkljAlyJP

저것도 다 환청이고 환각이지. 머릿속으로는 이해했지만 그 감정은 정말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몰라. 곧이라도 터질 것 같이 심장은 뛰어대고,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공포감이 장난아니야. 그 상태에서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서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어.

55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24:50 ID : 4LgkljAlyJP

그날은 정말 비가 많이 왔어. 정신없이 뛰어가다 비때문에 넘어졌는데 다리가 떨려서 일어날수가 없는거야. 그래서 겨우 쭈그려 앉아있는데 하필 번개가 치기 시작해서 너무 무서웠어. 안그래도 무섭고 추운데 번개까지 친다는게 말이냐? 그래서 덜덜떨면서 귀를 막고있는데 갑자기 비를 안맞기 시작하는거야. 그래서 뭐지 하고 위를 쳐다보니 거대한 날개가 내 몸으로 떨어지는 비들을 막아주고있었어. 그리고 그 장본인은 그 거대한 노란 독수리였지.

56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26:40 ID : 4LgkljAlyJP

독수리는 가만히 나를 내려보다가 말했어. '...비를 좋아하는거야?' 이쯤되니까 이건 정말 환각인걸까. 현실인걸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더라고. 그렇게 멍하니 독수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으니 독수리는 다시 그대로 날아가버렸어.

57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30:05 ID : 4LgkljAlyJP

축축해진 몸을 이끌고 대충 화장실에 있는 휴지로 닦아내고, 화장실 안에 짱박혀있었어. 그대로 그 감독 선생님은 안돌아올것같기도했고 어차피 그 교실에 다시 들어가기에는 무리인 것 같았어. 그리고 생각했어. 아 앞으로 두달 남았구나하면서. 그리고 그 독수리는 뭘까하는 궁금증이 조금씩 생각의 일부를 차지하기 시작했어.

58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35:30 ID : 4LgkljAlyJP

몇일 후 학교는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아이들로 시끌벅적해졌어. 나보고 왜 같이 안간거냐 아쉽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지만 나야 뭐. 아니 그냥 좀 몸이 안좋아서~ 일정 소화하기에는 무리같았거든 하면서 기분좋은듯 말을 받아넘기고 있었어. 전혀 그런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리고 또 지루한 수업. 똑같은 일상의 반복. 너무 똑같았지.

60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39:32 ID : 4LgkljAlyJP

그날 야자를 끝내고 집에 들어갔는데. 그 날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뺨을 맞았어. 익숙하지만 그래도 이건좀아니잖아. 다짜고짜 때리는게 어디있어. 그래서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돼서 때린 아빠를 올려다보는데 아빠가 하는 말이 너. 선생님한테 연락왔어. 너 왜 수학여행 안간거야. 너때문에 가정에 문제있는 사람으로 오해받았잖아! 하면서 내 머리를 때리시더라고. 저기요. 맞잖아요. 지금 이렇게 때리는데, 이게 문제지 직접행동하면서 자각못하는거에요? 그런 생각과 말이 목울대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겨우 참으면서 서있었어. 어차피 난 약 2달만 견디면 되는거니까.

61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41:12 ID : 4LgkljAlyJP

아마 부모님께 연락이 갔었겠지. 내가 왜 수학여행을 같이 가지 않는지에 대해. 혹시 뭐 문제가 있냐 이런식으로 물어봤을거야. 겉으로는 화목한척, 잘 사는 척 못하면 죽는 사람들이니까 화가 났던 거겠지. 그리고 그날 나는 쫓겨났어. 당장 나가라고. 너같은 애 필요없다고. 실컷 밖에서 반성이나 해보라면서 말이야.

62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42:43 ID : 4LgkljAlyJP

그렇게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입은채로 바깥에 서있는데, 오히려 후련하더라. 지옥같은 집 애초에 들어가기도 싫었으니까. 딴에는 명분이 생겼으니 오늘 하루는 바깥에서 지내도 되겠네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가방을 매고 학교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로 향했어.

64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44:57 ID : 4LgkljAlyJP

그렇게 대충 골목길에 들어가서 바닥 좀 치우고 박스로 바닥을 깔고 벽에 기댄채 앉아있는데, 확실히 밤은 춥더라. 겨우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묻고있는데 갑자기 따뜻한 기분이 들었어. 포근하고 따스한 기운. 그래서 아 혹시 하면서 옆을 보니까 그 거대한 독수리가 또 내옆에서 나를 내려다보고있더라. 이번에는 그 독수리를 빤히 보면서 작게 인사를 건냈어. '안녕' 하고 말이야.

65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47:25 ID : 4LgkljAlyJP

그랬더니 그 독수리도 인사하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다가 흘긋 나를 보더니 자기 날개로 나를 감싸더니 말했어. '...바깥을 좋아하는거야?' 하면서. 처음이었어. 그렇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환각은. 직접 만지는것도 느껴보는 환각은 처음이었어. 그래도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 정말 내가 미친거구나 하면서.

66 이름 : ◆1Ci05Xy5cII 2019/01/30 21:48:09 ID : 4LgkljAlyJP

그렇게 그 독수리가 내준 품에 기댄채 난 잠에 들었어. 그날은 정말 오랜만에 아무 꿈도 꾸지않고, 푹 잠을 잤던 것 같아.

76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4:59:21 ID : 4LgkljAlyJP

내가 깬 건 새벽녘이었어. 조금 추운 느낌에 눈을 떠보니 아침이슬때문에 몸에 물기가 생겼더라. 그리고 옆을 바라보니 아무것도 없었어. 당연한거지. 그도그럴게 그 노란 독수리는 내 환각일뿐인걸. 뭔가 서글픈 느낌이 들었지만 그날만큼은 몸의 피곤한 감각이 덜했어. 대충 자리를 정리하고 난 일찍이 학교를 향했어.

78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02:49 ID : 4LgkljAlyJP

조금이나마 기대를 했어. 혹시 밖에 나가서 안돌아온 날 걱정해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선생님께 연락을 해서, 내가 학교에 있으면 따로 부모님께 연락이 갈까 뭐 그런. 하지만 그딴 일은 역시 없었지. 애초에 내 핸드폰에 어떤 부재중 통화도 메세지도 남겨져 있지 않았으니까. 그날은 그렇게 수업을 받고 학교를 마치고 집을 향했던 것 같아

79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04:13 ID : 4LgkljAlyJP

집에 가기싫어서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어. 애초에 그곳을 집으로 부르는게 마땅한걸까. 오늘 집에 돌아가면 얼마나 혼이 날까 다시 내쫓는게 아닐까, 뭐 그런생각때문에 갑자기 집을 가던 도중에 발이 떨어지지를 않더라.

80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06:30 ID : 4LgkljAlyJP

발을 움직이려해도 안움직였어. 갑자기 앞을 보는데 아주 깜깜한 어둠 속에 나혼자 서있더라. 그리고 귀에서 뭔가 사각거리면서 소근대는 소리들이 가득차서 숨이 막히기 시작했어. 숨이 잘 내쉬어지질 않아서 거칠게 숨을 쉬고 있는데 점점 목이 조이는 기분이었어.

81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09:09 ID : 4LgkljAlyJP

머릿속으로는 또 환청이야 환각이야. 괜찮아괜찮아. 하면서 나를 달래도 컨트롤이 잘 되지를 않았어. 너무 숨이 막혀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정신이 아득해질때 '...쉬이-'하면서 나를 진정시키는 따뜻함이 느껴졌어. 갑자기 숨이 돌아오니 놀라서 더 크게 숨을 들이마쉬면서 컥컥대니까, 계속 그게 쉬쉬 거리면서 나를 다독였어.

84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13:19 ID : 4LgkljAlyJP

조금 진정이 되었을때 앞을 보니까 노랗고 포근한 것이 나를 감싸안고 있더라. 그리고 나도 그걸 붙잡고 꼭 껴안겨 있었고. 독수리였어. 한참을 그렇게 안겨있다가 조금 몸을 뭉그적대니까, 독수리가 나를 조금 떼어내더니 '...이번엔 뭐가 좋았어?' 묻길래 난 그냥 말없이 고개를 저었어. 그리고 독수리에게 물었어. '...넌 뭐야'

85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16:59 ID : 4LgkljAlyJP

독수리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듯 눈을 내리깔고 나를 보다가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하더니, 하늘을 보며 말했어. '...넌 날 환각이라 생각하지. 그렇게 믿고싶으면 그렇게 믿으면 되는거야' 그리고는 나에게서 멀어지더니 날아가려는 듯 했어. 그래서 난 독수리에게 다가가 그 날개를 잡으며 말했어. '가지마' 그렇게 말하니까 독수리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라. 그래서 '오늘은 조금만 같이 있어줘' 이렇게 말하니까 살짝 날갯짓을 하더니 날아가지 않고 나의 앞에 서있었어.

86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20:06 ID : 4LgkljAlyJP

난 이 독수리가 내 환각이든 그 어떤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어. 이 독수리가 내 옆에 있을때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숨을 쉴수있었으니까. 독수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고 나도 한참을 아무말도 않고 독수리의 날개를 잡은채로 서있었어. 그게 다였어. 그날은.

87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22:04 ID : 4LgkljAlyJP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느낄 수 있었어. 따스함과 진정되는 마음. 그리고 내 심장소리와 그 독수리의 부드러운 날개. 그리고 그 독수리의 심장소리를. 그거면 충분했어. 독수리도 나도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서로를 알 수 있었어. 그것으로도 충분했어.

88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25:10 ID : 4LgkljAlyJP

그렇게 한참을 서로를 느끼고 있다가 독수리는 찬찬히 나에게서 자신의 날개를 빼며 말했어. '...이제 돌아가야지' 그 말에 나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어. 어찌되었든 돌아가야했으니까. 내가 이 순간에 머물 수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건 나만이 볼 수있는 환각이고 현실이 아니니까. 현실은 지독스러운 곳이지만, 결국 내가 사는 곳이니까.

89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29:19 ID : 4LgkljAlyJP

이때만큼은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지않았어. 어쩌면, 어쩌면 내가 살아 숨쉬면. 내가 살아 숨쉬고 계속 버틴다면 이때의 아픔을 극복하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그런 미래가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어.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독수리를 보았을때, 이미 독수리는 사라지고 없었어.

90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34:06 ID : 4LgkljAlyJP

그렇게 발걸음을 뗄 수 있었어. 집이라 불리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어. 그리고 집에 들어갔을때 내가 생각했던 그 희망은 순식간에 사라졌지. 날라드는 욕설, 내 가방을 헤집으며 숨겨둔 돈이 있냐며 던져대는 내 책, 더러운 짓거리라도 하냐는 수치스러운 말들. 그래 여기가 현실이었어. 잠깐의 행복이 너무 달콤해서 그딴 희망을 품었던 내가 뭐였던걸까. 폭풍처럼 지나간 상황 후에 난 내방에 들어가, 작은 달력을 바라봤어. 한달하고도 3주일. 내생일까지 카운트 다운,

91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15:37:08 ID : 4LgkljAlyJP

난 더이상 버티고 싶지 않았어. 몇년을 그렇게 견뎌왔고, 죽을 용기도 없었기에 살아왔지만. 이제는 죽을 용기가 생겼으니까. 더이상 살 이유는 없었어. 성인이 되더라도 달라질 건 하나 없을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못할거고, 이 지긋지긋한 혈연을 끊어내지도 못할거니까. 살아갈 용기는 없었고, 죽을용기로 가득했으니까.

106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19:53 ID : 4LgkljAlyJP

잠을 자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어. 독수리와 함께 잠에 들었던 순간처럼 잠을 푹 자는건 불가능했어. 환각인데도 어째서 내 불면증을 쉽게 낫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이제 아무렴 어때. 그 독수리는 그때의 나에게는 신기하고 더 알고싶은 존재는 맞았지만, 결국은 환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그렇기에 그냥 그 한달하고 3주 남짓한 시간동안이라도 좋은 기억이라는 것이 생기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어.

107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23:32 ID : 4LgkljAlyJP

그리고 잠을 설치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학교를 향했어. 그때부터 난 독수리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차있었어. 그 독수리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오늘이면 볼 수 있을까, 일정 기간을 사이를 두고 만날 수 있는걸까. 무슨 조건이라도 있는걸까 하면서. 수업은 그래도 열심히 들었었는데, 전혀 집중이 되질않았어. 뭐 그래도 상관없지. 어차피 죽을건데 라는 생각도 있었고

108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27:31 ID : 4LgkljAlyJP

그리고 그 날은 독수리를 만나지 못했어. 그렇게 다음날도 만나지 못했고.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독수리를 만나게 되었어

110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30:15 ID : 4LgkljAlyJP

그날은 유독 운이 좋지 않던 날이었어. 정신이 팔려서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 못하고 안경이 부러져버렸거든. 뭐 애초에 내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정확히는 교실 안에서 공놀이를 하던 남자애들이 놀고있던 공이 날라와서 나를 맞춘거였어. 하필 콧대부분을 쳐버려서 눈 앞머리부분이 살짝 찢어졌어.

111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33:05 ID : 4LgkljAlyJP

갑자기 날라온 공에 맞은것도 그렇고 아픈 눈도 그렇고, 그런 나를 보고 놀라서 다가오는 친구들도 그렇고, 뭐든 최악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부러져서 널부러진 안경이 제일 최악이었어. 저걸 어떻게 고치지 하면서 말이야. 친구들은 나보고 피가 난다면서 나를 끌고 보건실로 갔고, 보건실에서는 꼬맬정도는 아니지만 흉이 질 정도라고 했어. 그래서 소독도 받고 뭘하긴했지.

113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35:09 ID : 4LgkljAlyJP

그 공을 가지고 놀던 남자애는 나보고 미안하다면서 사과를 하고, 안경 수리비는 꼭 물어주겠다고 엄청나게 사과했어. 그래서 뭐 괜찮다고 다독였던 것 같아. 어차피 그닥 시력이 엄청 나쁜 쪽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 꼴이 난 안경을 들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건. 음, 끔찍했지.

114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38:14 ID : 4LgkljAlyJP

그날 학교가 끝날때까지 이 시간이 제발 멈추기를. 왜 좋은 기억이 생기지 않는걸까. 왜 하필 이 카운트다운 사이에 일들이 터지는걸까. 라며 자책했던 것 같아. 그리고 집에 돌아갔어. 얼굴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인채 '...다녀왔습니다' 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넌 뭐 어떻게 된 애가 똑바로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를 하냐며 욕을 먹었어.

116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39:44 ID : 4LgkljAlyJP

그래서 고개를 계속 숙인채 빠르게 방에 들어갔는데, 그 날 부모님 기분이 하필이면 안좋은 날이었나봐. 엄마가 쫓아들어와서는 너같은 애는 어떻게 되먹은거냐며 나를 잡고 몸을 돌리게 했어. 그리고 들켰지. 다친거 말이야.

117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41:18 ID : 4LgkljAlyJP

난 또 같잖은 욕심을 냈어. 혹시 걱정해주지 않을까해서. 그랬더니 정작 들리는 말은 너 다쳤니? 라는 소리도 아니고 너 안경은 어디에 팔아먹었어! 하며 고함을 지르시더라.

118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43:30 ID : 4LgkljAlyJP

너때문에 깨진 돈이 얼만데. 우리가 너에게 투자한 돈이 얼마인줄아냐. 안경은 어디에 팔아먹었냐. 그런식으로 욕을 들어먹었어. 그 소리를 듣고 아빠까지 방으로 들어와서는 뭐야. 너 일쳤냐? 너한테 줄 돈 이제 없는데 어쩌라고! 하면서 때리기 시작했어. ....저기요. 저 다친건 안보이세요...? 라고 묻고싶었는데 입술을 꾹 물고 최대한 몸을 웅크렸어.

119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45:03 ID : 4LgkljAlyJP

그날은 정말 운이 안좋은 날이었어. 안경도 부러졌고 눈도 다쳤지만, 부모님에게 맞기도 하고. 제대로 막지를 못해서 평소에는 팔이나 어깨쪽에 멍이 들었는데, 그날은 하필 다친쪽 눈을 맞아버렸어.

120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47:31 ID : 4LgkljAlyJP

순간 머리가 아찔해져서 몸이 휘청하더라. 그제서야 자기들도 과했다는 걸 알았는지 쯧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방밖으로 부모님은 나가셨어.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걸까. 대체 왜 나는 첫 기억때부터 맞고 있었고 지금까지 맞는걸까. 난 무엇을 크게 잘못했던걸까. 내가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됐을까. 애초에 돌아간다면 무엇을 바꿔야 내가 이렇게 살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 속을 어지럽혔어

121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49:12 ID : 4LgkljAlyJP

그리고 조금 몸이 괜찮아졌다 싶었을때 몸을 일으키고 시계를 보니까 새벽 3시쯤을 가리키더라. 그대로 학교가방을 챙기고, 자고있는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집 밖으로 나왔어.

122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52:47 ID : 4LgkljAlyJP

역시 새벽은 춥더라. 길거리를 아무 생각없이 막 걷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어. '...아픈걸 좋아해?'

123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2:56:16 ID : 4LgkljAlyJP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었어. 뒤를 돌아보고 싶은데 돌아보고싶지 않았어. 분명 꼴이 엉망진창일테니까. 멍들고 상처난 얼굴을 보이기도 싫었고, 분명 독수리의 모습을 보면 울것같았거든.

126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3:03:32 ID : 4LgkljAlyJP

그렇게 한참을 아무말없이 서있는데 뒤에서 그 목소리가 말했어. '...나 안볼거야?' 그래서 난 겨우 고개를 끄덕였어. 겨우 눈물을 참아서 눈 앞이 흐릿해진 채로 서 있는데 '....그럼 나 갈게.' 하는 소리가 들렸어. 그런거 있잖아. 하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그 자체가 싫은건 아닌거. 정작 독수리가 가겠다고 하니까 너무 서러웠어. 난 며칠간 그 독수리만 떠올리고 왜인지 모르게 그리워하고,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그렇게 얼굴도 안보고 간다하니까. 너무 서러웠어

127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3:08:22 ID : 4LgkljAlyJP

그래서 독수리를 붙잡으려고 뒤를 돌았는데 독수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더라. 눈물이 뚝뚝흘러서 눈물을 닦으려는데 뒤에서 나타난 거대한 날개가 내 얼굴을 덮어주더라. '...우는 걸 좋아하는거야?' 그 소리에 순간 안심이 되어서 처음으로 목놓아서, 어린아이처럼 울었어. 정말 엉엉 울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또 진정이 되더라.

128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3:11:35 ID : 4LgkljAlyJP

겨우 진정한 후에 눈물이 멎으니까 독수리가 날개를 거두고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채로 계속 내 뒤에 서있는게 느껴졌어. '...왜 모습을 안보이는거야' 이렇게 물으니까 '너가 나 안보고싶어하니까' 라고 대답하더라. 그 말이 왜인지 모르게 웃겨서 작게 웃었던 것 같아. 그리고 뒤를 돌아서 독수리를 껴안았어. '...보고싶었어.' 그러니까 독수리는 가만히 나에게 안긴채로 있다가 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더니 다친 내 눈을 날개 끝부분으로 건드리며 쓰다듬었어.

129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3:16:47 ID : 4LgkljAlyJP

그렇게 독수리가 한참을 내 눈을 쓰다듬던 중에 내가 말했어. '...매일 만나면 좋겠어.' 라고. 그랬더니 독수리가 쓰다듬던 날개를 멈추고는 한참을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말했어. '...나도. ...다음에는 더 빨리 만나겠다.' 라고 하고는, 내가 독수리를 안고있던 손을 풀고 그대로 날아갔어. 이번에는 나를 계속 응시하며 한참을 날아오르다가 먼 곳으로 날아갔어.

131 이름 : ◆1Ci05Xy5cII 2019/01/31 23:20:08 ID : 4LgkljAlyJP

이쯤되니까 정말 감각이 생생해서 난 정말 내가 환각을 보는게 아니라 어떤 다른 무언가를 겪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6시쯤 다 되어가고 있더라.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갔구나 하며 학교로 향했어.

141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17:02:03 ID : 4LgkljAlyJP

독수리의 말은 사실이었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난 독수리를 만나게 되었거든. 그것도 내 주변 근처에서 말이야.

142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17:06:25 ID : 4LgkljAlyJP

학교에 갔을 때 대충 학년실에 있는 구급상자에서 안대를 찾아서 대충 멍을 가렸어. 그리고 반 아이들이 안대를 한걸 보더니 왜 그러냐면서 혹시 눈도 상처입었냐면서 물어보더라. 그리고 공가지고 놀던 남자애는 더 쩔쩔매고. 그래서 아니라고 그냥 겹쳐서 눈병까지 걸린 것 뿐이라고 둘러댔어. 친구들이 눈에 대해 물어보니까 어제 일이 떠올라서 왜인지 모르게 눈이 쑤시는 느낌이었어.

143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17:09:30 ID : 4LgkljAlyJP

그리고 또 수업을 듣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창밖을 보니까 저 멀리서 독수리가 건물 옥상에 앉아서 날 바라보고 있더라. 그 모습에 놀라기도 반갑기도 해서 작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어. 그랬더니 독수리가 그걸 본듯 날개로 살짝 인사하듯 휘적이더니 다시 날라가버리더라. 그런식이었어. 정말 빨리 만난거지.

144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17:12:49 ID : 4LgkljAlyJP

그날 하루종일 독수리는 내 주변을 맴돌았어. 수업시간에는 창밖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었고, 체육시간에는 하늘 높은 곳에서 활강하며 날아다녔고. 그런식이었어.

146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17:17:34 ID : 4LgkljAlyJP

그날은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어. 항상 축처지는 기분으로 학교를 마치고 일상을 마무리했는데 독수리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어. 이 순간이 영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147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17:20:42 ID : 4LgkljAlyJP

그날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독수리가 나를 계속 따라오는게 느껴졌어. 그래서 삐져나오는 웃음을 꾹꾹 참으면서 집으로 향하다가 집에 다 왔을 때 쯤에 난 독수리를 불렀어. '저기' 그랬더니 독수리가 멈칫하면서 나를 보더라. 그 모습이 왜인지 귀여워서 웃으니까 갸웃대더라.

148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17:24:42 ID : 4LgkljAlyJP

'...저기 오늘은 고마웠어.' 그렇게 감사인사를 보내니까 독수리가 아무말도 않더라. 그래서 계속 이야기를 했어. '나 정말 너를 만난게 제일 행복한 순간인것 같아. 즐거운 기억이야. 정말 고마워. ...그리고 정말 너말대로 일찍 만나게 되었네' 하면서 웃으니까 독수리가 웃는듯이 몸을 약간 잘게 떨더라. 그러다가 갑자기 독수리는 몸을 굳히더니 '앞으로 항상 만날수 있을 것 같아.' 라고 나에게 말했어. '항상 만난다니 정말 기쁘다' 하고 말하자 독수리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어. 그런데 왜인지모르게 눈빛이 불안정하게 떨리는 듯 했어.

149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17:28:50 ID : 4LgkljAlyJP

그 모습에 뭔가 이상해서 내가 무얼 물어보려고 하는데 독수리가 자신의 거대한 몸을 내 눈높이에 맞춰서 고개를 숙였어. 그리고는 내 어깨에 자신의 목을 비비더니 말했어. '...또보자. 조심히 들어가' 라고. 그 행동에 나는 가만히 서있다가 이내 목을 빼낸 독수리와 눈을 맞췄어. 그게 하루의 마지막 인사였어. 그리고 또다시 찬찬히 날라가 사라지는 독수리를 보고 나는 집에 들어갔어.

150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17:31:56 ID : 4LgkljAlyJP

집 문을 열기 전에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어. 앞으로 한달 하고 약 3주. 더 나빠질 일도 더 좋아질 일도 없으니까. 그 사이에 좋은 기억을 만들자고 하며. 집에 들어갔어

158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0:26:32 ID : 4LgkljAlyJP

집에 들어갔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안 계시더라. 어딜 나가셨는지는 몰라도 아무도 없는 편이 나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긴장이 풀린채로 내방에 들어갔어. 그런데 내방을 들어가보니까, 내 옷들이 다 넝마가 되어서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어. 일부러 누가 가위로 자른듯이 난도질 당한 채로 하나도 멀쩡한게 없더라

159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0:29:37 ID : 4LgkljAlyJP

순간 멍해지더라. 이젠 뭘 어쩌라는걸까.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걸까 하고 말이야. 그래서 그냥 아무생각없이 옷을 골라내기 시작했어. 그나마 덜 찢기고, 덜 상한 옷으로. 그나마 꼬매면 티안나게 입을 만한 걸로. 남은건 면반바지 하나랑 반팔이랑 긴팔티셔츠 몇장이더라. 그리고 나머지 옷들은 대충 쓰레기봉투에 꾸역꾸역 넣어서 바깥의 쓰레기통에 던져놨어.

160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0:33:19 ID : 4LgkljAlyJP

쓰레기통에 옷을 던지고 집에 돌아와보니까 그 사이에 아빠만 돌아와있더라. 순간 놀라서 몸을 크게 움찔했어.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아빠는 아무말도 안하고 안방으로 들어가버렸어. 바로 어제 날 때린 것도, 옷을 다 찢어놓은 것도 아무말 없으셨어. 그 반응이 오히려 더 날 자극시켰어. 무슨 말이라던가 화라던가, 때리던가 그러기라도 할 것이지. 투명인간마냥 무시하는 것 같은 태도가 난 이미 존재하지 않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

162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0:39:00 ID : 4LgkljAlyJP

순간 눈이 돌아갔나봐.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방에서 자해를 하려고 커터칼을 집어들고 있더라. 좋은 기억은 개뿔. 한달하고 3주 그 사이에 난 뭘 어쩌려고 이러는걸까. 발악 한번을 못하고 나를 또 상처입히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어서 시도하려는데 갑자기 독수리가 생각이 나더라. 나에게 그 짧은 만남 속에서도 따스함과 정을 느끼게 해준 독수리가 생각났어. 그래서 커터칼을 다시 거둘수밖에 없었어. 독수리를 다시 만났을때 내가 상처를 입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지않았거든. 좀더 제대로 된 모습으로 예쁜 모습으로 보이고 싶었어.

163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0:42:39 ID : 4LgkljAlyJP

그런 목표 하나가 생기니까 사람이 나간 정신이 확 돌아오더라. 차오르는 감정들을 다듬기 위해서 짧게 심호흡도 하고 교복을 벗고 빨래를 했어. 그리고 내일 입을 교복을 다리고, 찢어져있던 옷을 매꾸고 그렇게 정리를 했어. 내일 또 독수리를 만날 수 있어.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독수리의 날개를 잡아볼까, 한번만 더 안아달라고 해볼까. 그런 생각에 마음 한켠이 따뜻해져갔어.

164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0:46:06 ID : 4LgkljAlyJP

그렇게 정리를 다해갈 쯤에 엄마가 집에 돌아오셨어. 그러더니 내 방에 들어와서 옷을 매꾸는 내 모습을 보더니 '...아주 지랄을 한다. 다시 바깥에 나돌기만 해봐 다리를 부러뜨려줄거니까' 라고 말하셨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어. 이제 그런 말도 익숙해서 싱거워졌고, 그렇게 말해봤자 결국 대충 때리기만 할거니까 말이야. 그 사람들도 나처럼 애매한 사람이니까 라는 생각이었어.

166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0:52:32 ID : 4LgkljAlyJP

그리고 어찌저찌해서 다음날이 왔어. 잘 다려진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매고 집을 아주 일찍이 나와 학교로 향했어. 타박타박 학교로 걸어가는데 역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어. 인기척을 애써 무시하고 또 타박타박걸으니까 뒤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졌어. 천천히 다가오는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바람. 그렇게 길을 걷다가 내가 독수리에게 기대어 잠에 들었다던 골목길 이야기 기억나? 난 그 골목길이 보이자 코너를 돌아서 잽싸게 들어갔어

168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0:57:22 ID : 4LgkljAlyJP

그리고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가 그 인기척의 주인공이 들어오자 달려가 꼭 끌어안았어. '안녕 안녕. 독수리 안녕' 하면서 꼭 끌어안고 얼굴을 부벼댔어. 그랬더니 그 커다란 노란 깃털의 주인공이 빳빳하게 굳어있다가 작게 웃으면서 나를 같이 안아주며 말했어. ' 안녕 안녕. 작은 아이야 안녕' 하면서. 그 말에 내가 똑같이 웃으면서 '나 그래도 다 큰건데. 게다가 작다는 건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닌데' 라고 말을 받아치면서 독수리를 올려다봤어. 그랬더니 독수리는 더 세게 안아주면서 '넌 작아. 정말로.' 하면서 말이야.

169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1:01:09 ID : 4LgkljAlyJP

그 말에 영문을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뭐 상관없다는 생각에, 아이처럼 독수리의 품에 더 파고들었어. 그도 그럴게 난 키가 큰 축에 속하거든. 작다고 전혀 말할수없는데 말이야. 그래도 상관없었어. 정말 독수리가 크기도 했고, 그에 비하면 나는 정말 작아진 기분이었으니까. 그렇게 또 한참을 서로를 안고 있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내가 물었어. '...오늘도 내 옆에 있는거지?' '응. 항상 있어.' 이렇게 바로 대답이 들려왔어. 그런 말 하나가 너무 기분이 좋았어. 행복했어. 내가 사랑을 받는 기분이 들었어.

171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1:05:49 ID : 4LgkljAlyJP

그런 기분에 발끝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어. 뭔가 폐 안쪽에서 따뜻한 것이 꿈질거리고, 그게 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어. 항상 이런 순간이 이어진다면 좋겠는데. 그러면 좋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 순간을 단 1초라도 놓치고 싶지않았어. 그대로 독수리의 목을 끌어안고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말을 하고 골목길을 나갔어. 누군가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는건 정말 오랜만이었어. 거의 처음이라고 느껴졌어. 방긋 웃으면서 손을 흔드니 골목길안의 독수리도 인사하듯 고개를 끄덕였어.

172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1:10:58 ID : 4LgkljAlyJP

그 날 학교를 갔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있었어. 친구들도 나에게 무슨 좋은일이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대답을 했었어. 창밖을 보면 꼭 그 주변에 독수리가 나를 지켜보듯 있었으니까.

174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1:17:31 ID : 4LgkljAlyJP

그런 나날들이었어. 한달하고 3주를 남긴 카운트 다운. 1주 정도를 그런식으로 보냈어.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향하고. 집에 도착하기 직전에 독수리와 짧은 시간을 보내고.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이 날 무시하거나, 가볍게 때리는 정도. 그리고 일찍 집을 벗어나서 학교를 향하고. 그 골목길에서 독수리와 또 짧은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카운트 다운은 한달하고 2주를 남기게 되었어.

175 이름 : ◆1Ci05Xy5cII 2019/02/01 21:22:24 ID : 4LgkljAlyJP

그 일주일간의 짧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독수리와 나는 서로에게 알수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어. (참고로 난 주말에도 학교를 나갔어) 독수리는 나를 부를 때 '작은 아이야' '아이야' 라고 불렀고 나는 대체로 '독수리' '당신' 이렇게 불렀어. 처음에는 서로에게서 알수없는 이끌림과 혼란을 느꼈지만, 이제는 아니었어. 우리는 함께 하는 시간동안 많은 웃음을 흘렸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를 느낄 수 있었고. 서로에게서 온기를 찾았어.

195 이름 : ◆1Ci05Xy5cII 2019/02/02 17:18:51 ID : 4LgkljAlyJP

그 때 사이동안 크게 무슨 사건이 일어나거나 그런 일은 없었어. 딱히 환청을 듣지도 않았고, 환각을 보지 않았어. 그리고 집에 가서 심하게 손찌검을 당하는 일도 없었어. 그저 아침 저녁 독수리와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 거였지. 그리고 한달하고 2주째가 조금 지난 무렵이었나. 그 날 아침에는 부슬비가 내렸어.

197 이름 : ◆1Ci05Xy5cII 2019/02/02 17:22:54 ID : 4LgkljAlyJP

내가 말했었나 모르겠네. 그때의 배경이 되는 날은 늦여름이었어. 더움이 가시고 조금씩 시원해지기 시작하는 그런 늦여름이었어. 그 날 아침도 독수리와 만나기 위해서 일찍이 집을 나섰어. 부슬비가 내리던 그날은 안개가 많이 낀 날이었어. 새벽녘이라서 더 안개가 더 껴있었던 것 같아. 부슬비는 어차피 맞아도 괜찮겠지 라는 생각에 우산도 쓰지않고 밖을 나섰어

198 이름 : ◆1Ci05Xy5cII 2019/02/02 17:26:43 ID : 4LgkljAlyJP

안개 속을 걸으면서 오늘도 내 뒤를 따라오고 있을 독수리를 생각하는데 그날따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항상 왜인지 모르게 뒤에서 느껴지던 기척과 따스함 간질거리는 감정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어. 그런 기분에 불안해져 뒤를 돌아 확인해보려 했지만, 오히려 이 기분이 진짜면 어쩌지. 정말 뒤에 독수리가 없다면 하는 생각에 더욱 초조해져서 뒤도 돌지못하고 항상 독수리와 만나서 이야기하던 골목길로 뛰어갔어.

201 이름 : ◆1Ci05Xy5cII 2019/02/02 17:31:04 ID : 4LgkljAlyJP

그런데 하필 부슬비가 내려서 바닥이 미끄럽고, 안개가 껴서 바닥을 미쳐 살피지 못해서 보도블럭에 미끄러져서 넘어지고 말았어. 그렇게 뛰고있다가 넘어지니까 갈비뼈를 잘못 부딪혔는지 숨이 갑자기 쉬어지질 않더라. 심장이 아팠어. 누가 심장을 붙잡고 으스러뜨리는 기분이었어. 그래도 그것보다, 분명 내가 이렇게 넘어지면 나에게 다가와서 다독여줄 독수리가 없다는게 미칠 것 같았어. 분명 이 모습을 봤으면 다가왔을텐데 이런생각에 말이야

203 이름 : ◆1Ci05Xy5cII 2019/02/02 17:34:14 ID : 4LgkljAlyJP

겨우 몸을 일으켰어. 부슬비에 젖은 바닥에 넘어져서 그런지 애써 항상 다리던 교복이 더러워지고 축축해졌더라. 그리고 무릎도 까져서 피가 났어. 그래도 골목길까지 다시 달리기 시작했어. 골목길 안에는 독수리가 있겠지. 그러겠지. 매일 그랬듯이 그 곳에 있겠지. 그리고 달려서 골목길로 들어가는 코너 앞에서 난 멈췄어.

204 이름 : ◆1Ci05Xy5cII 2019/02/02 17:43:12 ID : 4LgkljAlyJP

그 코너를 돌면 분명 독수리가 있겠지. 분명 그러겠지 라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어쩌면. 정말 독수리가 없다면. 난? 독수리가 없으면. 그럼 난. 어떻게 해야하지. 그런 생각때문에 코너를 돌아 들어가지 못했어. 벽에 기대서 주저 앉는데 더러워진 교복하고 피나는 무릎이 눈에 띄었어. 그리고 대충 가방을 열어서 안에 든 체육복으로 피랑 물기, 그리고 옷에 붙은 이파리나 찌꺼기 같은 것들을 떼어내고 심호흡을 했어. 그리고 코너를 돌아 들어가며 말했어. '...미안, 좀 늦었네' 하고 웃으면서.

207 이름 : ◆1Ci05Xy5cII 2019/02/02 17:49:28 ID : 4LgkljAlyJP

'아, 우산 쓰고 올걸 그랬나봐' '비가 가랑비어도 무시하는게 아닌데' '오늘은 나 물어볼거 있어, 독수리야 넌 잠은 자는거야' 주절주절 말을 내뱉었어. 익숙하게 골목길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면서 웃음을 지었어. '나 좀 추운데, 안아주면 안돼?'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난 혼자 말해댔어

209 이름 : ◆1Ci05Xy5cII 2019/02/02 17:54:50 ID : 4LgkljAlyJP

그 어디에도 독수리는 없었어. 내가 느낀 모든 것, 감정, 온기 그 모든 것이 다 가짜였다는 듯이. 난 눈을 감은채로 독수리가 다가와서 날 안아주기를 바랬어. 아무것도 없는 그 어두운 골목길과 차가운 부슬비와 뿌연 안개가 아닌 노랗고 따스한 독수리의 모습을 보고싶었어. 눈을 감은지 한참이 지나도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어. 난 더 눈을 꼭 감은채 계속 떠오르는 어떠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했어

213 이름 : ◆1Ci05Xy5cII 2019/02/02 18:02:00 ID : 4LgkljAlyJP

애써 그 생각을 지우려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떠올렸어. '독수리도 정말 내가 만들어낸 환각이라면,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거라면.' 생각을 한번 시작하니 겉잡을 수 없이 모든 것이 떠올랐어. '그러고보니 최근들어 독수리를 제외한 환각이나 환청을 보거나 듣지 않았어' '최근 상태가 좋아져서 안보고 안듣는 거라면' '그럼 난 괜찮아진걸까' 그런 생각이 무지막지하게 떠올랐어. '정말? 안보게 된걸까'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눈을 뜰 수 있었어.

214 이름 : ◆1Ci05Xy5cII 2019/02/02 18:05:07 ID : 4LgkljAlyJP

'내 정신이 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일부러 그런 환각을 그려내서 보게 만든거라면' 이런 생각에 갑자기 심장이 아주 강하고 깊게 쿵하고 내려떨어진 기분이 들었어. 그리고 뒤에 이어진 생각은 '...그래도 보고싶은데. 그렇다하더라도 보고싶은데. 난 어떻게 해야하지' '아니야, 독수리는 환각이 아니야' 이런 생각때문에 입밖으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와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어.

215 이름 : ◆1Ci05Xy5cII 2019/02/02 18:06:52 ID : 4LgkljAlyJP

억 으 아, 하면서 이상한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난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어. 그저 머릿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생각에 내 자신이 휩쓸려서 현실의 감각에 집중하지 못했어.

228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16:54:32 ID : 4LgkljAlyJP

내가 떠올려대던 생각에 휩쓸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중에 나를 현실로 이끌게 만든 감각이 있었어. 뭔가가 나를 잡아 끌고 제지하는 감각이었어. 그 감각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대는데 점점 현실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어. 무언가 웅얼대는 소리와 앞에 있는 어떤 형체. 그리고 날 붙잡는 촉각. 그렇게 발버둥을 쳐대다가 그 촉각이 익숙한 것으로 느껴지자 점점 몸부림을 그쳤어. 그리고 웅얼대는 소리에 집중했어.

229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16:59:08 ID : 4LgkljAlyJP

'...야. 아.....' 드문드문 끊기던 음성. 그리고 점점 돌아오는 시야에 익숙한 색의 무언가가 보였어. '..야. 아이야.' 아이라고 끊이없이 부르며 내가 쳐댄 몸부림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날 붙잡고 있던건 독수리였어. 내 팔을 감싸고 있는 건 독수리의 날개였어. 내 앞에 보이는건 노란빛의 독수리의 몸체였어. 정신이 돌아오자 멍하니 서있기만 했어. 뭘까 하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날 어지럽힌 생각들을 떠올리다가 독수리를 바라봤어.

230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17:02:39 ID : 4LgkljAlyJP

독수리를 바라보자 내가 떠올렸던 모든 생각들은 사라졌어. 내 몸부림을 고스란히 받은 듯 흐트러진 깃털들, 그리고 나를 담아내는 독수리의 눈빛이 슬픔과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고있었어. 독수리는 끊임없이 나를 불렀어. 내가 멍한 상태로 서있을때도, 내가 독수리를 바라볼때도. '아이야, 아이야.' 하면서.

232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17:06:49 ID : 4LgkljAlyJP

그 목소리에 모든 긴장이 풀린 것 같았어. 비틀하면서 다리가 무너져내렸어. 그 모습에 독수리가 날 붙잡고 자신에게 기대어 몸을 지탱하게끔 해줬어. '아이야, 작은 아이야.' 하면서 계속해서 나를 부르며, 마치 내가 항상 독수리에게 안겼던 것 처럼 나에게 안겼어. 처음으로 나를 꼭 끌어안으며, 절대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이 꼭 끌어안으며 머리를 파묻었어.

234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17:09:47 ID : 4LgkljAlyJP

날 껴안는 날개와 몸통이 작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독수리는 무엇을 느낀 것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몰라도. 난 독수리가 나에게 그랬듯 부드럽게 다독여줬어. 방금까지만해도 내가 느꼈던 그 두려움과 혼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런 건 겪은 적 없다는 듯이 난 독수리를 다독여주며 말했어.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236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17:13:35 ID : 4LgkljAlyJP

그날 아침은 그렇게 독수리가 나에게 안기고, 난 독수리를 다독였어.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독수리는 나에게서 떨어지며 말했어. '...이제 가야지.' 난 그런 독수리를 바라봤어. 그 눈을 바라봤어. 눈 속에 담고있는 내모습과 미묘하게 달라진 눈빛이 보였어. 하지만 난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것을 생각하는지 알길이 없었어. 그저 나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응.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내고 학교로 향했어.

237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17:17:39 ID : 4LgkljAlyJP

학교 화장실에 있는 손 건조대로 옷을 대충말리고, 넘어져서 생긴 상처를 보건실에서 소독을 했어. 그리고 그날 내내 계속해서 창문 밖을 확인했던 것 같아. 독수리가 보고있을까. 설마 없을까. 하면서 계속 확인했던 것 같아. 그때마다 바깥의 저멀리서, 독수리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239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17:26:00 ID : 4LgkljAlyJP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때 우리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어. 서로가 서로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있다는 걸 느꼈지만, 그걸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어. 분명 입밖으로 그것을 꺼내면 우리의 관계에 무슨 일이 생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집에 다 왔을 쯤 독수리와 나는 평소처럼 행동을하며 하루의 마지막 인사를 끝내고 헤어졌어.

240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17:31:10 ID : 4LgkljAlyJP

우리는 평소처럼 그렇게 지냈어. 그 불안정한 일을 겪고도, 우린 애써 모른척하며 똑같이 행동했어. 그렇게 몇일을 행동했어. 언제나처럼. 아니 서로에게서 더 짙은 따스함을 찾으면서. 아침 저녁의 짧은 시간을. 묘한 삐걱거리는 틈새를 느끼며. 우리는 서로에게 집착했어.

241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17:34:45 ID : 4LgkljAlyJP

서로에게 따스함을 찾기위해 우리는 서로의 몸에 고개를 파묻고, 꼭 끌어안았어. 어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만나면 서로를. 서로의 이름을 계속 부르며. 난 독수리의 품에 갇혀 있는채로, 독수리는 내 몸이 보이지 않게끔, 그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를 꼭 감싼채로. 우린 서로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했어. 평소와 같으면 독수리가 먼저 이제 가야지 하며 말을 하였지만, 독수리는 헤어질 시간에 어떠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242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17:36:22 ID : 4LgkljAlyJP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가야할 시간이지만 애써 무시하며 말없이 더욱 세게 끌어안고, 그 속에 영영 갇히겠다는 듯 품에 파고들며. 그런식이다보니 난 그 몇일간 지각을 했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20분씩은 늦어졌던 것 같아.

247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20:53:11 ID : 4LgkljAlyJP

아마 카운트다운이 한달하고도 일주일이 남겨지기 까지 멀지 않은 날이었어. 하루전쯤. 그쯤이었던 것 같아. 그 날 밤에 책상에 앉아있는데 깜빡 잠에 들었었어. 꿈을 꿨어. 길을 걷고 있었어. 동네의 도로 한복판에 서서 길을 걸었어. 이상한 점은 그 누구도 없었어. 날 항상 죽일듯이 괴롭히는 부모님도, 학교의 지긋지긋한 선생님도, 그누구도 없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둠이 내려 앉더니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 삼켰어.

248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21:00:09 ID : 4LgkljAlyJP

나는 그 어둠을 피해 도망갔어. 무작정 달렸어. 누군가라도 나타나길 바라며. 그리고 순간 저멀리서 독수리가 나타났어. 난 저멀리 서있는 독수리를 보고 소리 질렀어. ' 그런데 독수리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어. 그저 가만히 우두커니 서있었어.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어둠이 나를 삼키기 시작했고, 내몸이 으스러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나는 달려갔가 독수리를 붙잡았어. 독수리에게 무슨 말을 하기위해 고개를 들어 바라봤어. 하지만 독수리의 눈에는 내가 담겨있지않았어. 아무것도 담겨있지않았어. 그리고 나도 독수리도 어둠속으로 사라져갔어.

249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21:04:23 ID : 4LgkljAlyJP

어둠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나는 꿈에서 깨어났어. 순간 몸이 덜컹하면서 깨어났는데 시간은 새벽 3시를 가르키고 있더라. 분명 꿈이었을 뿐인데, 불안함이 내 몸을 감싸는 기분이었어. 혹시 독수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 말이야. 그런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내눈으로 확인해야 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거든. 그래서 그 새벽에 교복으로 갈아입고 밖을 나섰어.

250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21:10:42 ID : 4LgkljAlyJP

집을 나와 밖으로 나서려고 한발을 떼는 순간 거대한 형체가 가볍게 하늘에서 날라들더니 나의 앞을 가로막았어. 푹식한 품에 부딪힌 나는 고개를 들어서 그 형체를 봤어. 그래 독수리. 독수리는 아주 깜깜한 밤 속에서 나를 어루면서 물었어. '...어둠을 좋아하는거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하고 대답했어. 그리고 독수리의 날개를 붙잡고 그 골목길로 이끌었어.

252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21:17:56 ID : 4LgkljAlyJP

우리는 앞에 놓인 서로를 인식하기도 힘든 밤의 골목길안에 서 있었어. 한참을 서로의 손과 날개를 어루만질뿐이었어. 그러다 난 입을 열었어. '...약속하나만 해줘.' 독수리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물었어. '.....무슨 약속' '항상 내 옆에 있겠다는 약속'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갔어 독수리의 날개를 꾹 움켜쥐었어. 독수리는 나의 말에 가만히 아무말도 못한채, 전보다도 더 길게 침묵을 가질 뿐이었어.

254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21:26:52 ID : 4LgkljAlyJP

그 기다란 침묵 속에서 점점 나는 다급해졌어. 왜 대답하지 못하는 걸까. 왜 약속하지 못하는걸까. 우리가 몇일간 지세우던 두려움이 한꺼번에 덮쳐오는 기분이었어. '...약속할게' 독수리는 답했어. 약속한다며. 항상 내 옆에 있어주겠다며. 그리고 나를 들어올려서는 그대로 나의 목에 자신의 부리로 입을 맞췄어. '약속해. 작은 아이야. 약속할게' 나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어. 그 기분에 취해 난 독수리의 얼굴을 끌어안았어.

255 이름 : ◆1Ci05Xy5cII 2019/02/03 21:32:00 ID : 4LgkljAlyJP

어느 순간에 잠에 들었던 걸까.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의 햇살이 나를 반기고 있었어. 골목길의 끝부분에 몸을 구긴채 자고 있어서 그런지 몸이 찌뿌등했어. 그리고 주변을 살폈을 때는 독수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약속을 한 다음날부터 독수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하루종일. 그 다음날도. 그그 다음날도.

264 이름 : ◆1Ci05Xy5cII 2019/02/04 19:52:09 ID : 4LgkljAlyJP

몸을 구부리고 잠에서 깬 다음날. 독수리와의 약속을 나누고 난 다음날. 내 주변에 있는 것은 그저 골목길, 아침햇살. 그것뿐이었어. 독수리를 찾기위해 골목길 주변을 살폈지만 등교를 하는 다른 학생들 밖에 보이지 않았어. 어젯밤에 나눈 약속을, 그렇게 하루가 채 되지않아서 깨트린다는게 이해가 되질 않았어. 어째서, 어째서 라는 생각뿐이었어.

265 이름 : ◆1Ci05Xy5cII 2019/02/04 19:54:00 ID : 4LgkljAlyJP

그래도 난 독수리를 믿었어. 아, 어쩌면 피치못할 사정때문에 어디를 갔다 오는걸거야.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수리가 나타났으니까, 그러니까 오늘 안에 독수리가 나타날거야. 오늘은 화를 내야지. 약속한 다음날부터 이러는게 어디있냐고, 다음에는 어딜갈때 말하고 가라고 해야지. 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학교로 향했어.

267 이름 : ◆1Ci05Xy5cII 2019/02/04 19:59:26 ID : 4LgkljAlyJP

그리고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내내 창문 밖을 바라보며 독수리의 모습을 찾으려고, 그 깃털 한부분이라도 찾으려고 하였지만 그 어느것도 눈에 띄지않았어. 그렇게 점심이 지나고 오후가 되고,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시간에도. 독수리는 모습을 보이지않았어. 하루 온종일 창문 밖을 바라보았지만, 집을 돌아가는 그 순간에도 독수리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 독수리는 내 옆에 없었어.

268 이름 : ◆1Ci05Xy5cII 2019/02/04 20:02:45 ID : 4LgkljAlyJP

난 집에 다다르기 전 항상 독수리와 인사를 나누었던 길 앞에서 멀뚱이 서있었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 그저 독수리가 나타나기를. 짠하고 나타나기를. 날 안아주며 달래주기를 바랬어. 그렇게 1시간을, 2시간을 기다렸지만 독수리는 나타나지 않았어.

270 이름 : ◆1Ci05Xy5cII 2019/02/04 20:07:41 ID : 4LgkljAlyJP

핸드폰을 확인하니, 항상 독수리와 시간을 보내고 들어가던 시간인 11시 50분이 훌쩍지난 새벽 1시 20분이었어. 집에 들어가면 분명히 혼난다는 것을 알았어. 하지만 혼나는게 두렵기보다는, 그저 이대로 독수리가 나타날때까지 기다리는데도 독수리가 나타나지 않을것같은 상황이 지독스러웠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서 집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야 이 씨---아. 하는 욕설과 함께 날라오는 리모컨. 리모컨에 맞아서 머리를 붙잡고 있는데 그대로 아빠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머리채를 잡으셨어.

272 이름 : ◆1Ci05Xy5cII 2019/02/04 20:14:26 ID : 4LgkljAlyJP

너 밖에 나도는 꼴이 가관이다. 밖에 남자라도 쟁여뒀냐? 뭐 다리라도 벌려주냐? 하는 식의 성적인 폭언들을 내뱉었어. 여기에는 자체적으로 수위를 줄이지만 말이야. 어찌 되었든 그 상태로 아빠는 내머리채를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를 쳤어. 그대로 계속 욕을 해대며 나를 발로 걷어찼던걸로 기억해.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저 다음날이 오기를. 다음날은 독수리가 나타나는 날일테니까. 이 시간은 지나가면 그만이야 라는 생각이 막연했어.

273 이름 : ◆1Ci05Xy5cII 2019/02/04 20:19:07 ID : 4LgkljAlyJP

그리고 그날 제풀에 지쳐서 아빠가 방에 들어가고 나는 그대로 씻지도 않고 방에 누운채로 잠에 들었어. 깨어나서 씻고 나갈 채비를 하는데 몸 곳곳에 멍이 들어있더라. 익숙한 멍이지만 그날따라 멍이 더욱 크게 들어보였어. 멍을 조금 만지작대다가 바로 교복으로 갈아입고 새벽녘부터 밖을 나섰어. 골목길을 향해. 한걸음 두걸음. 아무리 걸어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어, 골목길 안에서 등교시간이 늦도록 기다려봤자 어떤 목소리도 노란빛도 보이지 않았어.

274 이름 : ◆1Ci05Xy5cII 2019/02/04 20:25:21 ID : 4LgkljAlyJP

그렇게 3일이 지났어. 항상 지각을 하고, 수업시간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늦게 집에 들어가 얻어맞고. 독수리와 지낸 그 짧은 기간은 내 삶중에서 제일 깊숙히 뿌리박아내려서, 그 틈이 너무 커 나를 비틀리게 만들었어. 독수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지 겨우 3일이 지났지만 난 모든것이 뒤틀렸어. 하지만 독수리에 대한 질책, 원망, 존재에 대한 추리 그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 그저 독수리는 돌아올거야. 약속했으니까. 빨리 돌아올거야. 그럴거야. 하는 생각으로 3일

275 이름 : ◆1Ci05Xy5cII 2019/02/04 20:34:42 ID : 4LgkljAlyJP

3일내내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그날은 아침 일찍이 학교로 향하는데 뒤에서 뚜벅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항상 이시간에 나가지만 뚜벅이는 성인 남성 구두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거든.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게 느껴졌어. 작게 뚜벅이다가 점점 빠르게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 놀라서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뛰어가는데 구두가 내 귓속으로 달려오듯이 커질대로 커져갔어. 겨우 독수리와 만나던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웅크렸어

277 이름 : ◆1Ci05Xy5cII 2019/02/04 20:39:10 ID : 4LgkljAlyJP

그제서야 자각했어. 아 다시 환청을 듣고있구나 하면서. 독수리와 만나던 그 기간동안 환청과 환각을 듣지도 보지도 못해서 잊고있었어. 내가 지내던 현실은 이런 곳이었어. 지옥같은. '독수리야, 독수리야' 겨우 귀를 틀어막고 독수리를 불러댔지만 그 미친듯이 뚜벅여대는 소리가 내 귓속만을 가득 채웠어.

278 이름 : ◆1Ci05Xy5cII 2019/02/04 20:46:03 ID : 4LgkljAlyJP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등교시간은 한참은 지난 오전 10시더라. 이정도면 부모님께 연락이 갔겠구나 라는 생각이 차례로 들었어. 오늘은 그냥 맞는걸로 끝나지 않겠지. 그럼 내일 학교가야하니까 눈에 띄지않는 부위에 맞아야겠네. 머리 뜯기면 아픈데. 환각이 언제 보일지 모르겠다. 아 한달정돈가. 언제 한달을 버티지. 어쩌지. 학교에 가서는 뭐라고 변명할까......독수리, 보고싶다. 생각의 흐름이 결국에는 독수리로 돌아오자 눈물이 눈에 가득 차올랐어. 겨우 그 눈물을 참아냈어. 안돼, 반에 들어가야하는데 티내면 안되잖아. 하면서 학교로 향했어.

296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0:18:42 ID : 4LgkljAlyJP

그렇게 또 이틀이 지났어. 독수리를 못본지 5일이 되었을때.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어.

297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0:21:56 ID : 4LgkljAlyJP

그날은 학교에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나를 따로 부르셨어.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혹시 요새 무슨일이 있는거니? 아니면 가정에 무슨... 이런식으로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라. 아마 평소에는 얌전하게 수업에 집중하던 내가 지각도 하고, 항상 멍때리는 모습때문에 그런 것 같았어. 그리고는 뭐더라.. 너에게 기대가 크다, 혹시 무슨 일이있으면 선생님께 말해주면 도와주겠다 뭐 그런식으로 말했던것같아.

299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0:23:23 ID : 4LgkljAlyJP

거기까지는 괜찮았어. 그냥 네. 네 하면서 대답만 했으니까. 그리고 그날 집에 돌아가니까 엄마가 득달같이 나한테 달려들더라.

300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0:26:45 ID : 4LgkljAlyJP

그날은 지쳐서 독수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집에 들어왔어서 혼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소리 소리를 지르면서 머리를 손으로 내려치더라고. 곰곰히 생각해봤어. 이번에는 뭘 잘못한걸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뒤쪽에서 아빠가 말했어. 어떤 정신머리로 학교를 다니면 담임선생님한테 전화가 오냐고. 그제서야 '아..'하고 입을 뗄수있었어. 아마 담임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을 했던거겠지, 내가 학교에 지각을 하고 수업에도 집중을 못한다고. 그리고 무슨일이 있냐 그런식으로 물었겠지.

301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0:32:11 ID : 4LgkljAlyJP

그 생각을 하고 상황파악이 될때 쯤에 아빠가 내 손목을 잡고 끌고가더니, 그대로 이불을 덮어씌우더니 엄청 강하게 때리셨어. 뭐... 그날은 그렇게 맞았어. 언제나처럼. 아침에 깨어났는데 학교 가방이 없어져서 가방이 없는채로 등교를 했어. 교문 지키는 선생님이 학생이 되어서 본분이나 다름없는 가방도 없냐고 질책했지만 대충 무시하고 반에 들어갔어. 6일째였어.

302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0:35:15 ID : 4LgkljAlyJP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나를 찾으셨어. 그리고 묻더라. 오늘 왜 가방을 안매고 왔냐고. 그 말에 쌤때문이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참았어. 그래 쌤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하고. 나를 달래고, 어제 길을 가다가 넘어졌는데 가방이 찢어지는 바람에 못쓰게 되었다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고, 그자리를 벗어났어. 구토가 치밀었어. 도움은 무슨 도움일까. 하나같이 어른들은 도움이 아닌 나에게 짐을 떠넘기고, 상처를 입히는데.

304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0:37:59 ID : 4LgkljAlyJP

그 날은 집에 돌아가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어.

306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0:41:18 ID : 4LgkljAlyJP

그 인기척에 독수리일까 하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었어. 먼저 말을 걸까, 아니면 말을 걸지말까. 반가운 마음이 한편이지만, 지금은 만나도 기쁘지 않을것같았어. 그렇지만 얼굴을 보면 또 달라질 기분이겠지. 그래서 조금 빠른 걸음으로 항상 독수리와 헤어지던 장소로 향했어. 그리고 그 길에 다다라서 뒤를 돌고 말했어 '...안녕'

308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0:48:49 ID : 4LgkljAlyJP

하지만 뒤를 돌아본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 풍경에 아무말도 못하고, 내가 느낀 인기척은 대체 뭘까 하고 있었는데. 다리부근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게 느껴졌어. 그래서 다리를 봤는데 거기에 지네나 거미 개미 같은 벌레들이 내 몸을 기어올라오고 있었어. 그걸 보고 놀라서 발을 크게 굴렸는데 그것들이 더 빠르게 내 몸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어. 나를 갉아먹듯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309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0:53:20 ID : 4LgkljAlyJP

점점 올라오는 그것들이 미치도록 무서웠어. 손으로 떼어내려고 용써봤지만 이제는 손을 타고 올라오더니 목까지 기어올라왔어. 그 감각과 사각대는 소리가 가득 차서 겨우 고개를 쳐들고 있었어. 누군가 도와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도와줘.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독수리야 도와줘. 제발. 제발' 하고 외쳤지만 그것뿐이었어. 그것들이 얼굴까지 타고 올라와서 나를 갉아먹는 기분이 느껴졌어. 그리고 아마 난 그대로 기절했던 것 같아.

312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1:02:32 ID : 4LgkljAlyJP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길 위에 누워있었어. 그리고 시간을 확인해보니까 아마 짧게 기절했는지 10분 조금 넘게 지나있더라.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쓰러지면서 잘못 넘어졌는지 광대쪽이 아프더라. 몸을 일으키는데 눈물이 났어. 아무도, 또 아무도 도와주지도 봐주지도 않았구나 하면서. 내가 이렇게 힘들고 괴로워도 아무도 몰라주는구나. 내 아픔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게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 나라는 존재를 알아채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이기적인걸까. 그런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어. 단 한명이라도 나를 알아채준다면, 단 한명이라도 나를 보듬어준다면 내가 이 좇같은 카운트 다운을 그만둘 수 있을텐데. 이 지옥같은 일상에서 희망을 붙잡고 겨우라도 살아갈 수 있을텐데.

313 이름 : ◆1Ci05Xy5cII 2019/02/06 21:04:55 ID : 4LgkljAlyJP

독수리는 그래도. 독수리는 나를 봐준거라고 생각했는데. 약속은 무슨. 단 하루도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는데. 그런 생각에 더 펑펑 울었어. 그렇게 울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어. '.....아이야.' 독수리였어.

324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2:48:15 ID : 4LgkljAlyJP

익숙한 목소리.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독수리인걸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어. 틀림없이 독수리일걸 알았어. 그럼에도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어. 어째서 지금일까. 어째서 내가 괴로워하던 순간에는 나타나지 않고, 그 후에서야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까 하는 생각에.

325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2:54:48 ID : 4LgkljAlyJP

'아이야.' 독수리가 한번 더 나를 불렀어. 그 목소리에 움찔해서 가만히 서있었어. '...아이야.' 세번째. 독수리가 나를 세번째 불렀을 때 나는 결심할 수 있었어. 드디어 용기가 났어. 또 한번의 용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용기. 그리고 독수리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겠다는, 그 진실을 물어볼 용기. 나는 몸을 돌려 독수리를 마주보았어. 어두운 길목에서 바라본 독수리의 모습. 항상 봐왔던 어둠 속의 그 모습이지만, 어디인가 어둡게 느껴졌어.

327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3:00:21 ID : 4LgkljAlyJP

독수리는 나를 바라봤어. 그 거대한 몸체의 그림자가 나를 가렸어. 독수리는 슬픈듯 눈을 찌푸리며 나에게 다가와 말했어. '...아이야. 아이야. 피가 나. 작은아이야. 피가 나.' 아마 아프게 느껴지던 광대 부위가 실제로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에서 피가 나는 거였나봐. 독수리는 나에게 자신의 날개를 뻗어 내 얼굴을 감싸려고 했지만, 난 그 날개를 잡고 끌어내렸어.

328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3:06:01 ID : 4LgkljAlyJP

나는 고개를 들어 독수리를 바라봤어. 독수리는 그런 내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내 시선에 맞추어 고개를 숙여줬어. 독수리의 시선에 내 시선이 담기자 독수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어. 괴롭다는 듯이. 눈을 감아 나를 회피했어. 난 독수리에게 물었어. '...항상 옆에 있는다며. 옆에 있겠다며. ...약속이라며. 왜....왜 사라진거야?'

329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3:09:02 ID : 4LgkljAlyJP

독수리는 나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눈을 떴어. 그리고 나를 바라봤어. 그리고 나에게서 떨어지려는 듯 뒤로 물러섰어. 난 독수리가 더이상 피할 수 없도록 날개를 꼭 붙잡고, 우리가 항상 기피했던. 두려워했던 그것에 대한 질문을 했어. '...솔직히 말해줘. 당신의 정체가 뭔지.'

330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3:14:26 ID : 4LgkljAlyJP

독수리는 아무말도 하지않았어. 계속되는 침묵에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어. 나는 독수리를 한참을 응시하다가 다그치듯 물었어. '...말해줘. ...말해, 제발' 그 말에 결국 독수리는 힘겹게 입을 움직였어. 아주 서서히. 물에 잠기듯이 고요하게, 독수리는 흘리듯이 말을 했어. '...난. 아이야. 난...아이, 너가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해야 볼 수 있어. ...난 너의 환각이야.' '.....환각이라고?' 독수리의 대답에 나는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어. 결국 내가 생각했던 그것이 맞았구나.하고.

332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3:22:04 ID : 4LgkljAlyJP

'...지금 너 입으로 환각이라고 한거야?' 화가 겉잡을 수 없이 가득 차올랐어. 마치 지금까지 억눌려왔던 내 감정들과, 뭉개진 내 자신들이 한꺼번에 몰아쳐 거대한 불을 이루듯이. '와, 나 진짜 단단히 미쳤나보다. 그럼 뭐야. 다 내 망상이라고...? 내가 너를 원해서 상상하고 소설쓰고 그려낸. 뭐 그런 망상이라고?' 몰아붙이듯이 쏟아지는 날선 말들에 독수리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어. 난 잡고 있던 독수리의 날개를 더욱 꽉 움켜쥐었어

333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3:25:21 ID : 4LgkljAlyJP

'하, 어이가 없어서. 진짜. 정말 어이없어.' 갑자기 웃음이 흘러나왔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리자 독수리는 꽉움켜쥔 내손을 맞잡으며, 무겁게 붙어있던 입을 떼고 말을 이었어. '...그건 아니야. 절반 정도만. 너의 환-' '무슨 개소리야.' 난 나를 맞잡던 독수리의 날개를 떨어트리며, 말을 끊었어. '대체 뭐가 진실이야. 절반정도만 내가 보는 환각이고 망상이면 넌 뭔데'

334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3:33:21 ID : 4LgkljAlyJP

'...나도 몰라. 아이, 너를 만나기 이전에도 난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나를 직접적으로 보고 만진건 너가 처음이었어' 독수리의 말에, 난 뒤로 한발짝 물러나며 말했어. '...와. 진짜....나 진짜 미쳤나보네' 독수리는 그런 나에게 한발짝 다가오며 말을 이었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줄다리기는 그 줄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서로를 무너뜨렸어. '아이야. ...난 너가 나를 본 그날부터, 너의 주변을 항상 맴돌았어. 너가 날 다시 볼 수 있을까봐. 그런 호기심과 기대로. ...그리고 머지않아 넌 나를 볼 수 있었지.'

335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3:37:01 ID : 4LgkljAlyJP

혼란스러웠어. 어디부터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내가 만들어낸 망상일까. 무엇을 믿어야하는걸까. 난 어디까지 미쳐있는걸까.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어. '와 진짜 미친년. 미쳤네. 죽기 전이라고 망상까지 해대네.' 난 독수리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을 쳐댔어. ' ...그런데 조건이 있는 것 같았어. ...아이, 너가 날 보기 위해서는. 너가 어떠한 감정을 느껴야만-' '씨발! 닥쳐! 닥쳐! 넌 내가 만든 망상이잖아. 그럼 내말을 들어. 환각이면 환각답게 결국에는 꺼지라고!' 난 귀를 틀어막고 계속 뒷걸음질을 쳐대다, 길의 벽에 부딪혔어.

336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3:45:58 ID : 4LgkljAlyJP

나의 날선 말에도 독수리는 말을 계속했어. '...그리고 최근에, 너는 그 감정을 느끼지 못했어. 내가, ....내가 너의 옆에 있어도, 넌 나를 보지 못했다.' 독수리는 괴롭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었어. 독수리는 나에게 다가오며 말을 이었어. '약속을..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아이, 너가 그 감정을 강하게 느낄 때를 기다렸어. ...강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내가 너의 옆에 오래 머물 수 있으니까. 너와의 시간을 보낼 수 있으-' 그 말에 난 고개를 들고 독수리를 바라봤어. '...잠시만. 그러면. 그럼, 내가. 그 감정을 강하게 느끼지 않았어도. 내 앞에. 내 앞에 넌, 보일 수 있었다는거야....?'

337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3:54:44 ID : 4LgkljAlyJP

갑자기 드러난 진실이 무엇보다 크게 다가와 내 머릿속을 하얗게 질리게 만들었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피가 거꾸로 치솟는듯, 소름끼치는 기분에 넋을 놓고 독수리를 바라보았어. 독수리는 나에게 다가오다가 그자리에 우뚝 서있었어. 그 모습이 정말 소름끼치고, 구역질이 치밀어올라 헛구역질을 했어. ' ...넌 일부러, 내 앞에 안나타났던거였네...?' '...' '그렇지? 맞지?' 내 물음에 독수리는 자신의 몸을 크게 움츠리며 날개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자 했어.

338 이름 : ◆1Ci05Xy5cII 2019/02/07 23:59:44 ID : 4LgkljAlyJP

'...그럼 내가 계속 너를 찾던 것도, 내가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도 넌 나를 그저 쳐다보고 있었던 거네...?' 처참했어. '그게, 아이야, 난 그게 아니라-' 처참하고 처참해.'...넌 날 소중히 여겨주는 줄 알았어. 넌 날 내 모든 모습을 아껴주는 줄 알았어. 난 우리가 서로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모든것이 처참하게 무너졌어. 파도에 가볍게 무너져내리는 모래성과 같았어. 독수리는 날개로 완전히 자신의 얼굴을 감싼채 몸을 두렵듯이 떨어댔어. '...나는-' '...나는- 너가 환각이든 내 망상이든 그 어떤 것이든 난 필요없어.... 너가 어떤 존재든, 난 괜찮아. 방금 내가 화를 내면서도, 난.... 결국 너를 받아들이겠지 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넌. 넌.'

339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00:02:05 ID : 4LgkljAlyJP

'나는. 그저 너와' 독수리에게 느껴지는 감각이 어느때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어. 그 떨림도, 독수리의 기척도. 모든것이 현실마냥. 그 이전보다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어. 어둠속에 부서지는 노란빛이 더욱 생동감 있게 느껴졌고, 독수리의 깃털의 부드러운 질감이 마치 직접 닿아있기라도 한듯 느껴졌어. '넌 날 배신한거야' 그 이전의 어느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독수리가 느껴졌어.

341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00:09:40 ID : 4LgkljAlyJP

'...그래, 성공했네. 너가 원하는대로 내가 널 볼 수 있게 되었네. 난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 너를 계속 보게 될거야. 내가 느낀 감정은. 절망이었어. 그 전에도 지금도. 그런데 어쩌지? ... 난 앞으로 너 안볼거야.' 난 벽에서 떨어져 집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어. 얼굴을 감싼채 몸을 깊게 떨고 있는, 독수리의 아래로 자국난 물방울의 자국을 뒤로 한채. 계속 터져나와 시야를 가리는 울음과, 목울대에 갇혀 비명을 질러대는 벅찬 울음소리를 겨우 참으며. 그날 우리는 헤어졌어. 약 한달. 내 생일까지 남은 한달의 기간. 시간은 그 어떤 것에 눈길을 주지도 않으며 흘러갔어.

349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16:28:11 ID : 4LgkljAlyJP

늦여름. 여름의 끝자락은 너무 길었어. 어쩌면 내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기에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라. 겨우 2시간을 잠들고 깬 새벽. 항상 밖을 나서던 시간인 새벽과도 차이가 나는 시간. 이제 더이상 일찍 밖으로 나서지 않아도 되는 생각에 떠진 눈을 억지로 감고 잠에 들려고 노력했어.

350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16:30:52 ID : 4LgkljAlyJP

독수리를 마주치는 것이 괴로울지, 이 집 안에 있는 것이 괴로울지. 답은 내려지지 않았어. 어느쪽이나 괴롭다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눈을 떠보니 새벽 6시를 가르키고 있더라. 애매한 시간이지. 내가 독수리를 만나기 위해 나섰던 시간보다는 넘어서 있고, 등교를 하기에는 조금 빠른 시간이고. 그래서 느릿하게 씻고, 가방을 챙겨서 학교로 향하기 시작했어.

352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16:34:29 ID : 4LgkljAlyJP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어. 어느때보다 강렬하게. 틀림없이 독수리일거지만. 난 묵묵히 땅을 보며 걸음을 옮겼어. 새벽의 차가움과 뒤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무겁게 한발씩 발을 옮겼어.

353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16:36:51 ID : 4LgkljAlyJP

길을 걸으며, 항상 독수리와 이 길을 지나쳐 왔던 기억들이 새록이 떠올랐어. 항상 아침마다 빠르게 골목길까지 걸어가 독수리와 정답게 나누었던 기억들이, 어느날 밤의 기억이. 그리고 어느 순간에 독수리와 항상 머무르던 골목길 앞까지 다다라있었어.

354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16:38:27 ID : 4LgkljAlyJP

순간 시선이 골목길 안쪽으로 옮겨졌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어. 난 발걸음을 다시 옮겨서 학교로 향했어.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한채, 나에게 전해지는 괴로움과 슬픔의 감정을 무시한채. 난 학교로 들어갔어.

357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16:43:16 ID : 4LgkljAlyJP

학교에 들어서서 정신을 놓고 있으니 어느샌가 친구들이 등교를 마치고 수업이 시작되고 있었어. 언제나와 같았어. 수업. 쉬는시간. 수업. 가끔 찾아오는 체육시간. 점심시간. 그런식이었어. 평소와도 똑같이 행동하며 즐거운듯 웃음을 지으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어. 창밖으로 느껴지는 시선과 기척을 무시하면서. 체육시간에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독수리의 기운을 무시하면서. 그렇게 저녁까지.

358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16:49:37 ID : 4LgkljAlyJP

학교를 마치고 집까지 걸어가면서도 느껴지는 기척에 나는 그자리에 우뚝 섰어. '...언제까지 따라올건데' 나의 물음에 그 기척의 주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그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채 서있었어. 바닥을 바라보니 독수리의 그림자가 나의 발에 아른히 닿아있었어. 난 두발짝 더 앞으로 나서며 말했어. '그림자도 닿지마. 기분나쁘니까'

360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16:56:06 ID : 4LgkljAlyJP

난 계속 앞으로 나아갔어. 바닥에 있던 독수리의 그림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어. 그저 내가 나아가는 만큼 멀어질 뿐이었어.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왔어. 아주 강하고 깊숙하게 아파왔어. 내가 뱉은 말이 나에게 돌아와, 날 해치는 듯이. 그 통증이 기분나쁘고, 아려와서 눈물이 차올랐어. 통증때문에 운것뿐이야. 그런 생각으로 난 빠르게 집으로 향했어.

361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17:04:44 ID : 4LgkljAlyJP

이런 패턴의 일상이 일주일하고 반정도 지나갔어. 독수리는 나에게 가까이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항상 내주위를 맴돌았고, 난 그걸 철저히 무시하며 일상을 보냈어. 집에 돌아가면 가끔 부모님께 폭언을 듣거나 맞거나 그런 식이고.

362 이름 : ◆1Ci05Xy5cII 2019/02/08 17:06:20 ID : 4LgkljAlyJP

조금 다른게 있었다면 한두번 환청때문에 길에서 귀를 틀어막고 서있으면, 독수리가 다가오는게 느껴졌지만 내가 다가오지말라고 소리지른 정도려나. 그정도였어. 딱 그정도. 독수리를 무시한지 일주일하고 반.

375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16:04:27 ID : 4LgkljAlyJP

카운트 다운이 2주하고 반 남았던 시기였어. 그날도 학교를 마치고 저녁 늦게 집을 향할 때였어.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무시하면서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그 소름끼치는 사각대는 소리가.

377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16:07:21 ID : 4LgkljAlyJP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길을 걸었어. 그랬더니 조금 더 크게 사각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리에서 뭔가 기어오르는 게 느껴졌어. 제발..제발 이라고 속으로 빌면서 눈을 질끈감고 계속 발걸음을 재촉했어. 그래도 점점 올라오는 스멀거림과 커져가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어. 그리고 참다못해 눈을 살짝 떴을때 내 상체를 뒤덮는 징그러운 벌레들을 보게 되었어.

379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16:12:07 ID : 4LgkljAlyJP

점점 차오르는 벌레와 미친듯이 귀로 파고드는 사각거리는 소리때문에 난 환상을 보고 있다는 것도 알지만, 손으로 내 신체를 잡아 뜯으며 발버둥을 쳤어. '...제발 제발. 제발' 그 기분은 겪지 않으면 모를거야. 그 징그럽고 소름끼치는 것들이 온 몸을 기어다니면서, 내 살을 갉아먹는 기분을 느낀다는게. 그리고 그게 가짜인 것을 알면서도 절대 가짜로 치부할 수 없는 그기분을.

381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16:15:26 ID : 4LgkljAlyJP

어느새 목까지 차오른 벌레들과 소리에 겨우 끅끅거리면서 고개를 쳐들고 있었어. 입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벌레의 기분에 죽을 맛이었어. 뭐 항상 죽을 맛이긴 했지만. 다리가 비틀하면서 정신이 아찔해지는게 느껴졌을 때, 따뜻한 무언가가 나를 감싸안는게 느껴졌어. 쉬-쉬하면서 조용히 속삭이는 음성이 들렸어. 사각대는 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나를 타고 오르는 벌레들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어. 익숙하고 따뜻한 감촉, 그리고 목소리만이 남아있었어.

382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16:25:23 ID : 4LgkljAlyJP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에 눈을 깜빡이니 익숙한 노란색이 보였어. 쉬-쉬하며 나를 안고 다독이는 독수리의 모습이 보였어. 몇일 만에 독수리와 나는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고있었어. 독수리의 모습은 변해있었어. 털에는 윤기가 사라져 모래의 퍼석함이 느껴졌고, 수척해진듯 나를 안고있는 날개의 뼈대가 그대로 느껴졌어. 독수리의 눈의 주변은 발갛게 변해 있었어. 털을 따라 눈물자국이 생겼는지, 노란 털이 빨갛게 물들어있기도 했어. 그리고 나를 안고, 나를 보는 와중에도 그 눈물자국을 따라 눈물이 툭툭하고 떨어지고있었어.

384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16:32:26 ID : 4LgkljAlyJP

그 모습에 나는 심장이 아려왔어. 그리고 원망스러웠어. '...그때도 이렇게. 도와줬으면 됐었잖아.. 그때도.' 그 말을 내뱉으며 난 독수리를 바라봤어. '...미안해. 아이야. 미안해..' 독수리는 하염없이 미안하다고 말을 했어. 그 모습이 미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고마웠어. 그 알수없는 기분에 눈물이 차올랐어. '...도와주지. 도와줘야지. 도와줬어야지...' 하며 난 독수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댔어. 그런 내 발길질과 때려대는 행동에도 독수리는 그저 미안하다며 나를 계속 끌어안았어. 그 끌어안는 날개가 너무 약해진 것이 느껴져서 난 발버둥을 그만두고 울 수 밖에 없었어.

386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16:43:49 ID : 4LgkljAlyJP

난 그날 독수리에게 느꼈던 모든 원망과 슬픔 분노를 다 쏟아내었어. '...왜 그랬어..! 너가 나한테 그러면..안되잖아..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이러면서... 지금은 글로 써서 이렇지만 현실에서는 가관이었지. 울면서 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다들 알지..? 그런거였어 ㅋㅋㅋㅋㅋㅋ 독수리는 그런 나를 계속 달래면서 '...아이야.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 다시는. 다시는 안그럴게. 미안해' 하면서.

388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16:52:46 ID : 4LgkljAlyJP

그날 우리는 화해라고 해야할까.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어. 펑펑울고난 이후에 어색한 기분으로 독수리에게서 떨어지니까, 독수리가 먼저 내 손을 잡으면서 '...가야지' 하면서 날 이끌었어. 그리고 집 앞에서 '...내일 보자.' 하면서 인사를 건내었고, 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집에 들어갔어.

394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20:07:23 ID : 4LgkljAlyJP

조금 자고 깨어나니 시계는 아주 이른 새벽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어. 뭐 항상 그랬지만. 찌뿌등한 몸을 일으키고 나갈 채비를 했어. 근 몇일처럼 행동했다면 한두시간을 조금 느릿하게 보내다가 학교로 향했겠지만, 이제는 괜찮겠다는 생각이었어. 대충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긴 채 밖으로 나섰어. 언제나 처럼 차가운 새벽 공기였지만,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조금 더 나와 가까워있다는게 느껴졌어.

395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20:12:23 ID : 4LgkljAlyJP

차근이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이동에 따라 조금씩 따라오는 인기척때문에 조금 해보고 싶은게 생겼어. 아주 천천히 걸어보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냅다 달려봤어. 그랬더니 뒤의 인기척이 나를 따라 천천히 다가오다가, 놀란듯이 황급히 따라붙기 위해 쫓아오는게 느껴졌어. 그것때문에 조금 웃음이 나와서 얼굴에 번지는 웃음을 막을 수 가 없었어. 그리고 어느샌가 도착한 골목길 앞에서 나는 가만히 서있었어.

396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20:17:01 ID : 4LgkljAlyJP

들어갈까 말까 고민을 하고있는데 골목길 안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내 손목을 잡고, 그 안으로 끌어당겼어. 그 힘때문에 골목길 안으로 들어서니까 독수리가 내 손목을 잡고 내려다 보고 있었어. 난 고개를 들어서 독수리와 시선을 맞췄어. 독수리의 눈에 내가 담기자, 독수리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내 양손을 붙잡고 끌어당겼어. 난 독수리의 힘에 몸을 맡기고 그 품에 안기며 말했어. '...왜이리 말랐어.' 하고 고개를 들고, 독수리의 얼굴에 손을 뻗었어.

397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20:26:20 ID : 4LgkljAlyJP

독수리는 내가 편하게 손을 뻗을 수 있게 고개를 살짝 수그려줬어. 그 얼굴에 남아있는 발간 눈물자국과, 푸석해진 깃털들을 만지자, 독수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내게 말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다시는. 미안해. 미안... 아이야. 미안..' 독수리가 자신의 얼굴을 내 손에 부비며 말했어. 난 그런 독수리를 말없이 만져주며, 가만히 그 품에 안겨있었어. 그리고 시간은 또 빠르게 흘러갔어. 골목길 바깥에서 아이들의 발소리와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

398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20:32:14 ID : 4LgkljAlyJP

'...이제 가야지' 독수리는 자신의 품에서 나를 떨어트리며 말했어. '...오늘도 잘 다녀오고, 항상 옆에 있을거니까. 아이야, 잘다녀오렴.' 독수리는 자신의 부리를 내 머리 옆에 가져다대었다가 떨어졌어. 안정되는 기분이었어. 이렇게 평화로워도 될까, 이렇게 안정되고 심장이 두근대는 하루를 지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 작게 웃음을 지으며 독수리에게 인사했어. '다녀오겠습니다.'

401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20:40:24 ID : 4LgkljAlyJP

그 때 한 3일을 그렇게 지냈던 것 같아. 이제 서로 걸리는게 없기도 했고, 불안함도 사라졌으니까 말이야. 처음에 같이 지냈던 시간들처럼.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그때쯤에 작은 소원하나가 생겼어. 독수리와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보고 싶다는 소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었어. 부모님 두분 다 말없이 여행을 가셨거든. 매년 가셨지만, 이번에는 여름에 가는거였나봐. 집에 돌아와보니 부모님 모두 안계시더라. 캐리어나 뭐 그런것도 사라져있고. 그래서 아 또 여행가셨구나 했어.

403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20:43:42 ID : 4LgkljAlyJP

그래서 이때가 기회구나 했거든. 카운트 다운이 2주정도 남았을 때. 다음날 나는 바로 계획을 실행했어.

405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20:49:49 ID : 4LgkljAlyJP

다음날 새벽. 난 가방에 저번에 남은 멀쩡한 사복 몇개를 챙겼어. 흰 반팔 티셔츠랑 면 반바지, 그리고 겉옷. 그리고 담요 한개를 가방에 쑤셔넣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가방을 매고 밖으로 나섰어. 그날은 정말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던 것 같아. 제일 의욕넘치는 하루였어. 빠르게 골목길까지 달려들어가서 독수리에게 덤벼들듯 뛰쳐들었어. 그랬더니 독수리는 허둥거리며 내몸을 받아내느라 바빴어. 그 충격때문에 독수리의 몸이 기우뚱하며 뒤로 넘어갔고 난 그위에 쓰러지듯 몸이 포개졌어.

406 이름 : ◆1Ci05Xy5cII 2019/02/10 20:54:55 ID : 4LgkljAlyJP

'..아, 아이야?' 독수리는 놀란듯 내 몸을 날개로 감싸고는 나를 바라봤어. 난 그런 독수리를 보면서 한바탕 웃어댔어. 오늘 어떤 시간을 보낼지 모르겠지 하는 생각에 기분이 몽실거리면서 부풀어오르는 기분이었어. 그런 내 기분도 독수리에게 전해졌는지 독수리도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으려했지만, 나는 몸을 일으키고 흘러내리는 가방을 제대로 매면서 독수리를 내려다봤어. '..다녀올게!' 일부러 몸을 빠르게 일으켜서 학교로 향했어. 항상 헤어지던 시간보다 빨랐지만 나는 학교를 향해 빠르게 골목길을 나갔어. 독수리는 갑자기 내가 달려들어 넘어지고, 내가 갑자기 웃더니, 한시간이나 일찍이 학교로 나서는 상황을 이해못하고 벙져있다가 '...다,다녀와. 아이야...'하고 나를 배웅했어.

438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16:30:29 ID : 84HzV9eHCi9

학교에 도착하고 아침조회시간이 될때까지 조용히 기다렸어. 그리고 아침조회시간이 되어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종소리가 난 후에 1교시가 시작되기 전 쉬는시간에 난 학년실로 향했어. 담임선생님의 자리로 가 선생님 앞에 섰어. '...저 선생님.. 제가 몸이...좋지않아서...조퇴해도 될까요..?' 최대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반쯤 감긴 눈. 그리고 흐릿한 초점의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봤어. 선생님은 그런 내 상태를 보더니 괜찮냐며 어디가 아프냐, 병원에 가야되지 않겠냐 물었어.

441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16:34:07 ID : 84HzV9eHCi9

나는 병원에 가서 진찰받아야겠다고 말하고, 오늘 하루는 쉬어야 될것같다며. 정말 죄송하다고 힘빠지는 목소리로 말했어.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흔쾌하게 얼른 집에 돌아가라고 조퇴하라고, 무리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당연히 뻥이지. 아플리가 없잖아. 이래뵈도 독감걸려도 학교다니는 사람인데 말이야. 조퇴도 지금껏 한번 하지 않았던 애가 찾아와서 조퇴시켜달라해서 그런것 같아. 부모님께 연락 안해도 되겠냐 물어서 괜찮다고 하고 그대로 학교 밖으로 나갈때까지 몸을 축 늘어뜨리고 걸었어.

442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16:38:37 ID : 84HzV9eHCi9

그리고 학교 밖으로 나왔을 때 주변을 살폈어. 확실히 평일에 등교시간을 한참 지난 시간의 학교 앞에는 사람 한명 지나가지 않더라고. 가끔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지만 아주 가끔, 학교에서 동떨어진 건널목쯤에 보이기만 하고 말이야. 그상태로 나는 가방을 단단히 매고 축 늘어뜨린 몸을 제대로 세우고, 빠르게 골목길을 향해 달려갔어.

443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16:43:24 ID : 84HzV9eHCi9

골목길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외쳤어. '독수리야..!' 독수리는 하늘에서 골목길 안으로 훌쩍 내려오더니 나에게 다가왔어. '무슨일이야? 원래 이시간에 끝나지 않잖아. 아이야 혹시 무슨 일이..' '아니, 없으니까 우리 놀러가자' 나는 독수리의 말을 끊으며 방긋 웃었어. 아직 해가 중천에 떠오르지도 않았지만, 따스함이 가득한 오전. 처음으로 밝은 골목길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했어.

444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16:47:56 ID : 84HzV9eHCi9

'...놀..러?' 독수리는 고개를 살짝 갸웃이며 나에게 물었어. 나는 그런 독수리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 '나 사람없는 좋은 곳 알고 있거든' 독수리는 그런 나의 말에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갸웃였어. '그냥 따라와. 알겠지?' 나는 그 말을 독수리에게 전하고 골목길 밖으로 발을 내딛었어.

445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16:54:19 ID : 84HzV9eHCi9

길을 나서고 가까운 매점 화장실에 들러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었어. 대낮에 학교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눈에 띄는 것은 물론, 혹시 우리 학교의 관계자나 다른 학부모님이 보시면 안되니까 말이야. 가벼운 흰반팔티와 반바지로 갈아입었어. 이렇게 사복을 입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하는 생각에 옷자락을 만지작대다가 매점밖으로 나왔어.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건 아주 가까이에 느껴지는 인기척과 따뜻한 기운. 익숙한 기운이지만 그날은 늦은 여름날의 향기와 어우러져서,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대고 기분이 몽롱해지는 향수를 불러일으켜.

449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17:02:36 ID : 84HzV9eHCi9

한참을 걸었어. 내가 가는 곳은 내가 사는 마을의 외곽부근에 위치해있었으니까. 끝자락의 여름이라고 해도 대낮의 태양은 이글거렸고, 그 열기에 조금 지쳐서 발걸음이 무거워졌어. 그때 뒤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졌어. '...고마워.' 나는 빙긋웃으며 그 바람의 주인에게 감사를 건냈지. 그렇게 2시간 정도를 걸었나. 내가 가고자 했던 곳에 도착했어.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지만 그때의 고요함을 간직하는 그곳에 도착했어.

450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17:07:46 ID : 84HzV9eHCi9

아주 낡다못해 잊혀져버린 놀이터. 그리고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이 슨 경고 안내문.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넓은 풀밭. 음. 풀밭이라해야하나... 들판이라기에는 작고 도심의 외곽에 놓여있어서 그 주변에는 커다란 나무들도 많이 놓여있거든.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놓여있는 그 장소의 모습은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보다 더욱 낡고, 풀이 많이 자라났지만 여전히 아스라히 퍼지는 고요함을 가지고 있었어.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쉬고는, 곧 무너질 것 같은 낡은 플라스틱재질로 된 미끄럼틀에 내 가방을 올려놨어.

451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17:12:43 ID : 84HzV9eHCi9

'....' 어느새 내 옆에 나란히 서있던 독수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어때? 괜찮지?' 난 독수리에게 이곳을 보여주며 물었어. 독수리는 고개를 찬찬히 돌리면서 주위를 살폈어. 그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 둘뿐이네.' 하며 낮게 웃음을 내뱉었어. 그 말이 왜인지 너무 웃기고 행복해서 나도 웃음을 내뱉으며, 독수리의 목을 끌어안았어.

452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17:20:08 ID : 84HzV9eHCi9

'아, 잠깐만.' 난 독수리에게서 살짝 떨어져서 가방의 안쪽에 보관해둔 작은 락앤락 통을 꺼냈어. 항상 학교 야자시간때 배고플때마다 당근이나 오이같은걸 락앤락 통에 보관해두고 꺼내먹었거든. 그날은 점심 저녁까지 해결할 용도로 집에서 작은 주먹밥을 싸왔었거든. 그 락앤락 통을 챙기고, 담요도 챙긴 다음에 풀밭의 한가운데로 향했어. 그리고 담요를 깔고 그 위에 앉으며 내 옆을 손으로 탁탁치며 독수리에게 말했어. '자 여기 앉아'

461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21:32:08 ID : 83BfdSE3zVg

나의 그런 행동에 독수리는 살짝 어이없는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피식 바람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옆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는 듯한 자세를 취했어.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나봐. 독수리는 내 표정을 보고는 머쓱해하며 자신의 날개로 자신의 얼굴을 덮다가 눈을 끔뻑이더니 내 얼굴을 가려버렸어. 그 행동도 너무 귀여워서 내가 까르륵하고 웃으니까 그제서야 자기도 막 웃더라.

463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21:38:39 ID : 6pcFii02oIM

난 락앤락 통을 달칵하고 열고는 주먹밥 한개를 꺼내들었어. 그리고 조금 먹다가 따가운 시선에 옆을 보니까, 뭔가를 먹는 내 모습이 신기한지 뚫어져라 독수리가 보고 있더라. '...먹어볼래?' 하면서 그 주먹밥을 독수리에게 내밀려고 했어. 그리고 순간 정적이 찾아왔어. 아, 맞다. 환각. ...잊고 있었지. 순간의 행복에 젖어서 잊고 있었던거야. 순간 독수리가 환각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주먹밥을 내밀던 손이 주춤했어. 독수리를 보는 내 시선이 불안정하게 떨렸고, 나를 담아내던 독수리의 눈동자에도 갑작스러운 적막함이 담겼어.

466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21:45:38 ID : Be2Gk05TPbj

'...나중에. 지금은..배부르네.' 독수리는 애써 나에게 대답했어. 나는 팔을 거두고 다시 주먹밥을 내 입에 가져다댔어. 어떤 맛으로 먹는지, 왜 먹는지 까먹은채 그냥 묵묵히 주먹밥을 꾸역꾸역 먹었던 것 같아. 찾아온 어색한 정적에 독수리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나에게 물었어. '...아이야. 넌 어쩌다 이곳을 알게 되었니.' 그 물음에 나는 먹던 행동을 멈칫하고 고개를 앞을 응시했어. 넓은 풀밭. 따갑지않은 햇살.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어. '...4년전이야.'

468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21:53:58 ID : ba1cr9eFeNy

4년 전. 내가 더 어리고, 내 자신을 스스로 무너뜨리기 이전 중학교 2학년. 그때 처음으로 집에서 쫓겨났던 날이었어. 그때는 쫓겨나자마자 울고불고 난리였지. 죄송하다고 제발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쫓겨난 이유는 뭐였는지 기억은 안나. 어찌되었든 그때 영영 그 집 안으로 못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무서웠지. 정말 너무 무서워서 문 앞에서 울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라. 그래서 드디어 용서해주셨구나.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는데 아빠가 고개만 내밀고 시끄럽다고 어딘가로 가버리라는거야.

472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22:10:49 ID : r9bfQtumnyL

그 때 그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고 정말 정처없이 걸었던 걸로 기억해. 그때도 이맘때처럼 늦여름의 날이었는데 저녁이 되기 전인 늦은 오후여서 바깥이 적당히 밝았던걸로 기억해.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가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까 저녁 어스름이 깔려서 어둑해졌더라. 그리고 내가 있던 곳이 여기였어. 그때도 낡은 놀이터에 넓은 풀밭. 아무도 없어서 그 광경에 한참을 넋이 나간채 보고 있다가 기분이 상쾌해졌던걸로 기억해.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어.

473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22:13:36 ID : yMrwFilyFdB

'잊고있다가 어제 이 곳이 떠올랐어. 그 날 이후로 한번 더 이곳에 오고싶다, 오고싶다 생각만 했는데. 드디어 오게 되었네.' 하고 말을 마쳤어.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독수리에게 말해서 머쓱해진 기분에 대충 먹다가 만 주먹밥을 락앤락 통에 집어넣고는, 낡다 못해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는 놀이터를 바라봤어.

474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22:18:43 ID : 1zPa8mGmslv

독수리가 나를 내려다 보는게 느껴졌어. 그러다 시선을 돌려 하염없이 풀밭을 응시하는게 느껴졌어. 나도 고개를 돌려 그 풍경을 말없이 한참을 바라봤어. 그런 조용한 시간에 어느 순간 깜빡 졸았나봐. 어느 순간에 '..아이야. 아이야. 작은 아이야, 저것봐.' 하는 소리가 들렸어.

475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22:23:10 ID : Dz9ilzRwmmq

눈을 조금 끔뻑거리다가, 찌뿌등한 허리와 목때문에 이리저리 몸을 비틀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어. 방금까지 봤던 풍경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노란 갈대 밭 같은 광경이 눈앞에 놓여있었어.

476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22:27:24 ID : ffbvbjtbdA6

순간 상황파악이 안되어서 어리둥절한채로 계속 눈만 감았다 떴다 하면서 풍경을 바라봤어. 여름의 해가 저물면서 타오르는 듯한 태양의 햇빛이 풀밭을 내리쬐면서, 그 빛때문에 풀 색이 노랗게 익어 보였던 거였어. 기다랗게 자란 풀들이 갈대마냥 황금빛으로 변한채로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태양이 물결치는 것처럼 보였어. 그 아름다운 모습에 정신을 못차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어. '...작은 아이야, 좋아?'

477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22:36:04 ID : ba1cr9eFeNy

그제서야 독수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데 태양의 빛과 색에 독수리의 모습이 반짝이며 녹아들고 있었어. 마치 태양으로 빚어진 존재인 것 처럼 아름답고 황홀하게, 타오르는 불꽃마냥. 그 모습을 눈에 한참을 담아내다가 나는 대답했어. '...좋아해.' 그말에 독수리는 나를 바라보고는 빙긋이 웃는 듯 하더니 말했어. '나도 좋아해.' 우리는 굳이 무슨 말을 하지 않았어. 우리가 나눈 이말이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 대화인지 우리는 서로에게 묻지도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어. 그저 서로의 손을, 날개를 붙잡은 채로.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눈 앞에 놓인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아냈어.

478 이름 : ◆1Ci05Xy5cII 2019/02/17 22:40:08 ID : eMlyK42JQqY

일단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할게. 절반 이상을 이야기했네. 이 이야기를 시작한지도 2주가 넘었구나. 이야기를 항상 들어줘서 고마워. 앞으로의 이야기도 잘 부탁해. 내일은 오후 5시가량에 올것같아. 물어볼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도 좋아.

483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17:33:25 ID : alinU2IMrzh

어느덧 저녁어스름이 가라앉은 저녁이 찾아왔어. 주변에 가로등 하나 설치 되지 않아서, 풀밭은 달빛과 저 멀리 떨어진 도로에 다니고 있는 차량의 헤드라이트의 불빛만으로 시야를 구분해야 했어. 조금 추운 감이 있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방에 넣어뒀던 겉옷을 가지러 미끄럼틀로 향했어. 그 행동에 독수리도 자리에 일어서서 나를 쫄래쫄래 따라왔어.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풀밭에 깔아뒀던 담요를 다시 챙겨들고 미끄럼틀로 향했어.

485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17:40:35 ID : alinU2IMrzh

겉옷을 대충 걸치고 가방을 풀이 자라난 모래바닥에 툭하고 던져놓았어. 그리고 멀뚱거리면서 미끄럼틀 출구 부분에 앉아서 독수리를 바라봤어. 그 모습에 독수리가 갸웃이다가 '...아이야, 안가?' 이렇게 묻더라. 그물음에 나는 빙긋 웃으면서 '오늘은 독수리랑 자려고' 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독수리가 당황한듯이 몸을 살짝 움찔하더니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더라. '...어?' '이리와봐' 내가 팔을 활짝 벌리고 손을 까딱이면서 안기라는 듯 제스쳐를 취하니까, 안절부절하다가 독수리가 조금씩 나에게 다가왔어.

486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17:47:04 ID : alinU2IMrzh

그 모습에 내가 빨리 오라고 더 팔을 활짝 벌리니까 독수리가 한숨을 내쉬면서 바닥을 보다가, 나를 보다가, 머뭇거리다가 날개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더라. '무슨 생각하는건지 몰라도 왜이리 부끄러워 하는건데.' 하면서 내가 일부러 입을 삐죽이면서 말했어. '아,아니. 작은 아이야. 아니야. 내가 뭔 생각을 해.' 그 말에 독수리는 화들짝 놀라면서 나를 보면서 말했어. 겨우겨우 내 앞 가까이에 왔을때, 난 독수리의 목을 끌어안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어.

488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17:54:27 ID : alinU2IMrzh

'어..어어..어어어...' 내가 독수리의 목을 끌어당기자, 독수리는 자신의 힘으로 버티려는 듯 몸을 꼿꼿이 세우고 나와 눈을 맞췄어. 그 행동에 나는 오기가 생겨서 그대로 몸에 힘을 다 푼채 뒤로 넘어지는 행동을 취했어. 그랬더니 그제야 독수리가 황급히 자신의 날개로 내 몸을 감싸고, 나와 몸이 포개진 채로 미끄럼틀 안쪽으로 넘어갔어. 그 상태로 독수리가 나를 내려다 보자 내가 독수리의 목을 힘껏 끌어안으면서 '하하, 성공이네' 라고 말했어. 그리고는 독수리의 부리 아래쪽 목에 얼굴을 부비적 거렸어.

489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18:01:47 ID : alinU2IMrzh

그 행동에 독수리가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담요를 끌어당겨서, 나를 한쪽 날개로 감싼 상태로 다른 날개로 내 몸하고 자신의 몸에 덮었어. '...안 춥겠어? ...정말 안들어가도 되는거야?' 독수리는 나긋한 목소리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어. 그 목소리와 눈빛에 나를 걱정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행복함이 발끝부터 차올라 몸을 따뜻이 만드는 기분이었어. '...괜찮아. 오늘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독수리의 부리를 만지작 댔어.

490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18:13:26 ID : alinU2IMrzh

그 행동에 물끄럼이 독수리가 나를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웃음을 짓더니, 부리를 내 목에 문지르며 말했어. '이 순간이 영원하면 좋겠어' '...나도.' 낡아서 곧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놀이터의 미끄럼틀 안이지만, 제대로 된 것 하나 없는 이상한 상황이지만 우리 둘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했으니까. 난 행복을 느끼고 있었어. 죽고싶다는 감정이 아닌 이대로 독수리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과 간절함을 느끼고 있었어.

491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18:20:37 ID : alinU2IMrzh

살고 싶다는 감정과 죽고싶다는 감정. 독수리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살고싶다는 감정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어. 내가 죽는다면, 독수리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와 별개로 살아있기에, 독수리를 만났고. 살아있기에, 독수리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이렇게 내가 살아 숨쉬면서 독수리와 행복한 나날을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렇게 버티다보면, 이런 행복한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기적처럼 독수리가 환각이 아닌 진실로 다가온다면. 그런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되었어. 그 전까지는 한번도 미래에 대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질 못했는데 말이야.

497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22:08:58 ID : alinU2IMrzh

'...아이야, 넌. ...죽음을 좋아하니?' '.....글쎄' 독수리는 나에게 물었어. 직접적으로 죽음에 대하여.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어. 독수리는 내가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을, 죽음을 향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그날에서야 독수리는 나에게 그것에 대해 물어본거야. '...좋아하는걸까.'

499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22:18:35 ID : alinU2IMrzh

'아이야. 작은 아이야. 너는 너무 작아서, 작고 연약해서, 조금이라도 세게 안으면 으스러질까봐 나는 무서워. 나는 두려워. 너를 잃는게 너무 두려워.' 좁디 좁은 미끄럼틀 안 속에서 독수리는 나를 날개로 감싼 채로 말했어. 그 목소리가 미끄럼틀 안을 가득 채워서 마치 내가 독수리의 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나는 시선을 살짝 올려서 독수리를 바라봤어. 독수리는 아주 건조하고도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어.

504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22:25:12 ID : alinU2IMrzh

독수리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묵직하게 입을 떼내며 말을 이었어. '...작은 아이야. 아이야......너가 날 보지 못했어. 부슬비가 내리던 날. 난 그날도 너의 뒤를 따라 걸었어. 그리고 갑자기 아이야, 너가 달리기 시작했어. 당황스러웠어. 장난을 치는걸까. 그런생각에 빠르게 쫓아갔어. 그리고 너가 넘어졌어. 놀라서 너를 끌어안았지만. 넌 나를 보지 못했어. 나를 느끼지 못했어. 아이야, 난 두려웠어. 처음으로 무서웠어. 내가 다시 혼자가 되는 감정이 무서웠어. 그것보다 너가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는걸까 무서웠어. 작은 아이야, 넌 나에게 아주 커다란 존재가 되어버렸어. 그 어떤 것보다도 너무 커다란 존재가 되어버렸어.'

508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22:41:54 ID : alinU2IMrzh

나는 그말을 듣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어. 독수리의 시점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으니까. 독수리가 느꼈던 그 감정이 어땠을지 이해가 갔으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독수리를 꽉 끌어안았어. '...어때. 이러면 안 으스러질거야. 나를 느낄 수 있잖아. 그럼 괜찮지..?' 그 말에 독수리는 나를 천천히 끌어안았어. 작은 미끄럼틀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품에서 서로의 심장박동을 느꼈어. 쿵 쿵 소리를 내는 그 아름다운 소리가 화음을 이루는 듯이.

509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22:49:28 ID : alinU2IMrzh

'...항상 너를 만날 시간을 기다렸어. 잠이란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너가 잠에 빠지는 순간에도 너를 지켜봤어. 그 잠이라는 것에 빠지면 나도 너를 볼 수 있을까 싶었어. 잠에 들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어. 그저 해가 떠오르길. 아침이 돌아와 너와의 시간이 돌아와 같이 있는 시간이 되기를.' 독수리는 조용히 나에게 속삭였어. 독수리의 일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나였어. 항상 독수리는 나의 일상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독수리가 나와의 시간을 제외하고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던거야. 어쩌면 나와 더 오랜 시간을 지내고 싶어했던 독수리의 행동보다 이기적인건 내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

510 이름 : ◆1Ci05Xy5cII 2019/02/18 23:04:04 ID : alinU2IMrzh

'.....있지, 독수리야. 너 이름이 뭐야?' 단 한번도 서로에게 묻지 않았던 제일 간단한 질문. 어째서 지금인지, 어째서 지금까지 질문을 해오지 않았던 건지 몰라.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이름을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독수리에게도 이름이 있을까, 없는걸까 라는 생각에 독수리의 심박소리를 느끼며 물었어. '...내 이름은 수선화야.' 수선화. 노란 꽃의 이름. 그 이름을 들으니 정말 잘 어울린다는 것밖에 느껴지지 않았어. 어째서 독수리의 이름이 꽃의 이름인지, 어째서 그 이름인지 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어. 그만큼 독수리에게는 수선화라는 이름이 잘어울렸으니까. '...아이야, 너의 이름은 무엇이니'

520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15:27:51 ID : alinU2IMrzh

'내 이름은 --야.' 내 이름을 가르쳐주자 독수리는 나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어. '--, --.' 내 이름을 나긋이 부르면서, 감미롭게 속삭이면서. 이름이 불린다는 기분이 색다르게 느껴졌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름이 불린다는 것이 이토록 기분이 좋고, 부끄러우면서도 더 불려지고 싶은 기분인지 처음 알았어. 간질간질한 기분이 다시 느껴졌어. 나는 숨을 내뱉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더 불러줘. 독수리야. 수선화야.' 하면서, 독수리의 목에 입을 가져다대며 말했어.

522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15:33:42 ID : alinU2IMrzh

'잠 자보자.' 난 독수리에게 속삭였어.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하는지...' '걱정마.' 나는 독수리를 토닥이며 어색하지만 작게 노래를 불렀어. 자장가 말이야. '잘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양도 ...다들 자는데.....달님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을 보내는 이 한밤 잘 자라 우리 아가 ....잘 자거라' 작게 부르는 노래와 독수리를 토닥이는 손길에 정작 내가 졸려서, 눈이 점점 처지기 시작했어. 서로의 온기의 따스함과 이 기분때문에. 끝까지 독수리를 보며 자장가를 부르는데 독수리의 눈이 처음에는 끔뻑이더니, 점점 감기는게 보였어. 그리고 우리는 잠에 들었어.

523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15:37:48 ID : alinU2IMrzh

어느 순간에 눈을 가물거리면서 떠보니 새벽이 되었는지, 바깥의 하늘이 동이트려는 서늘한 하늘이 되어있었어. 나는 작게 꿈지럭대면서 고개를 들어보니 독수리가 고르게 숨을 내쉬면서 잠을 자고 있었어. 그 모습에 독수리의 얼굴주변의 깃털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어. '...잘자네.' 이런게 엄마가 된 기분일까. 하는 생각에 웃음이 흘러나왔어. '...왜 웃는거야.' 독수리가 슬쩍 눈을 떠서 나를 보고 있었어.

526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15:47:48 ID : alinU2IMrzh

'그냥 귀여워서' 하고 양손으로 독수리의 얼굴을 감싸니까 독수리는 살짝 어이없다는듯이 나를 보며 말했어. '...그거 그렇게 작은 아이, 너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처음으로 잔 소감은?' 내가 묻자 독수리는 살짝 고개를 치켜올렸어. 아마 기지개를 피는 행위랑 비슷한 것 같았어. '...음. 신기하고. 따뜻해. ...좋은 감각이었어. ...고마워, 아이야.' '...있지, 어떻게 하면 이렇게 평생 지낼 수 있을까.' 나는 비비적대며 독수리에게 물었어. '...글쎄. 그래도 아이야, 어떤 순간이 와도 난 이순간을 잊지 못할거야.' 그 말에 나는 독수리를 올려봤어.

528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15:51:26 ID : alinU2IMrzh

묘한 눈빛. 묘한 기시감. 이전에도 이상하다 느꼈던 느낌. 독수리는 언제나 앞을 먼저 내다보고 그것을 알고있는 기분이 들었어. 하지만 그런건 다 내 착각이겠지. 환각인데 그것이 가능하다면, 환각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일거니까 말이야. 난 그 눈빛을 보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어. '나도. 절대로, 이 순간을 잊지 못할거야.' 우리는 조금 더 그렇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다가 몸을 일으켰어. 짐을 대충 추리고 새벽녘의 거리를 걸어서 나는 학교로 향했어. 도착할때쯤에는 항상 혼자 등교하던 이른 시각이 되어있었고, 독수리와 인사를 나눈 후 나는 학교로 가 교복으로 갈아입고 수업을 기다렸어.

529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15:54:43 ID : alinU2IMrzh

생일까지 카운트 다운 2주. 난 살고 싶었어.

534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21:11:24 ID : alinU2IMrzh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처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는 사뭇 다른 살고싶다는 감정이 너무 낯설었어. 언제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갔는데 막상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무엇을 해야되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어. 독수리와의 미래. 행복한 순간, 그 감정을 더 느끼고 싶었지만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무엇을 행동할지 생각을 하게 되었어.

536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21:13:04 ID : alinU2IMrzh

그리고 몇일 지나지 않아서 부모님께서 집으로 돌아오셨어.

537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21:17:16 ID : alinU2IMrzh

그 몇일간 나는 살고싶다는 감정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어. 어쩌면, 어쩌면 나도 행복함을 바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런 행복이 계속 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말이야. 착각이었어. 크나큰 착각. 내가 놓인 현실과 배경, 그리고 혈육. 그게 있는 상태로는 난 절대 행복해질 수 없었어. 난 아직도 환각과 환청을 보고 듣고 있었고, 독수리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 벗어날 수 있는 거였어. 독수리가 또 어느날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면 난 무너지고 말겠지.

538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21:20:53 ID : alinU2IMrzh

계속 지속되는 가정폭력. 그리고 어른이 되어도 난 벗어날 수 없으니까. 딱히 모아둔 돈도 부모님이 나에게 투자해줄 돈도 없으니까. 난 결국 이집에 묶일 수 밖에 없겠지. 어른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을 현실인거야. 이 굴레와 사슬 속에서 난 빠져나올 수 없겠지. 그런 생각에 도달하자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카운트 다운은 일주일 하고도 반이 남은 상황이었어. 하지만 전과 달랐다면 아주 가까스로, 가느다란 희망을 붙잡고 있었어.

539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21:25:11 ID : alinU2IMrzh

어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서 이 모든 상황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동화같은 바램. 그런 내 바램을 독수리도 느꼈겠지. 그 날은 일주일이 되기 하루 전 날이었어. 그 날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의 전날.

541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21:35:56 ID : alinU2IMrzh

일주일이 되기 하루 전날. 그날 학교를 마치고 어느때처럼 집에 들어가기전, 집 앞 어두운 길에서 독수리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어찌되었든 흘러가는 카운트 다운은 코 앞으로 다가와있었으니까. 그때 쯤의 내감정은... 막상 똑같지는 않았어. 전혀 아무렇지 않았던 처음. 내일이 오구나. 내일이 왔구나. 시간이 흘렀구나. 이제 곧 끝이 보이는구나. 그런 생각이 아니라, 죽게 된다면 독수리와 영원할 수 있다는 생각과 죽으면 독수리를 다시는 보지 못하는 그런 끝이 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543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21:40:38 ID : alinU2IMrzh

그런 갈팡질팡한 마음에 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고 싶다. 아니 죽고싶어. 죽어야 해. 하지만 독수리는 어쩌지 하는 생각에 독수리를 바라본채 멍하니 서있었어. 독수리는 나에게 말을 걸었어. '...아이야...........용기를. 내보는게....어떨까?' 그 말이 무슨말인지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독수리를 바라봤어. '....아이야, 난 사실 어쩌면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른단다.' 침착한 독수리의 말과 눈빛이 나를 올곧게 바라봤어.

544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21:46:26 ID : alinU2IMrzh

'...어쩌면. 어쩌면. 너가 지금 원하는 것 만큼이나, 멋진 미래가. ...그런 미래가 이루어질지 몰라.' '...' '...그러니, 그들에게. 한마디라도. 한마디라도... 그런 용기를 내보는게 어떨까. 어쩌면 말이야, 그들도 너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너의 고통을 알게 되면. 그들도 반성하지 않을까. ...그러니 아이야, 그 숫자세기를 그만둬줘.' 독수리는 언제부터 나의 카운트 다운을 알고 있었을까. 내가 고통받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런 의문과 동시에 어쩌면 부모님이, 독수리의 말대로. 죄책감을 가진다면... 이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채웠어.

547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21:55:36 ID : alinU2IMrzh

'...내가. 말한다고... 달라질까. ...정말 그들이. 반성할까.' '...해보자. 아이야, 작은 아이야. 해보자....숫자세기가 끝이 다가오는 순간 전에, 그정도는 해봐도 괜찮을거야. 더 나빠질건 없어. 그러니까 해보자.' '...' 더 나빠질건 없다. 그 말이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었어. 그래, 정말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내가 느꼈던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그들이 알아채고.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면. 아니 못 느낀다고 해도, 조금 더 맞는다고 해도 언제나와 같으니. 똑같은 현실이니까. 그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기적처럼 그들이 반성하고. 구원된다면.

548 이름 : ◆1Ci05Xy5cII 2019/02/19 21:56:14 ID : alinU2IMrzh

...정말 더 나빠질건 없던걸까?

562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6:33:43 ID : alinU2IMrzh

난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어. 일주일이 되던 그날. 아침에 눈을뜨고, 반듯한 교복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고 집을 나섰어. 그날은 집을 나서며 '...다녀오겠습니다.' 하면서.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을 인사를 건내며 학교로 향했어.

563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6:47:35 ID : alinU2IMrzh

학교에 도착하기 전 골목길에서 독수리에게 말했어. 오늘 용기를 내볼거라고. 너의 말을 믿어보겠다고. 그리고 독수리는 말없이 날 꼭 안으며 응원해줬어. 그리고 평소와 같이 학교를 나서서 수업을 들었어. 그날은 날씨가 아주 우중충한 날이었어. 곧이라도 비가 올것같은 날. 수업도중에 창밖을 바라보자 우중충한 하늘 가운데 활공하는 독수리의 모습이 보였어. 햇빛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독수리의 깃색은 퍼석한 잿빛을 머금고 있었어. 그 모든게 내게 일어날 일을 암시하고 있던 거였는데. 난 알지 못했어.

565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6:58:46 ID : alinU2IMrzh

그 날은 학교를 마칠 즈음에 바람이 차게 불고 있었어. 비가 오기 전의 냄새를 가득 머금은 바깥의 공기. 그 냄새를 맡으며 난 발을 디뎠어. 처음으로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날. 그렇게 걸음을 한발 한발 디디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꼭 오늘이어야 할까. 아니 오늘이어야 해. 하지만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마지막 날에 한다면. 그때는 이미 늦을거야. 그렇지만 무서워. 이런식으로 생각을 이어오던 중 고개를 드니 이미 집 앞에 다다라 있었어.

566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7:14:39 ID : alinU2IMrzh

심호흡을 하고 서 있으니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나와. ...그리고 난 항상 너의 편이야.' 독수리의 말. 하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어. 일부러. 지금 돌아본다면 분명 그 품에 안겨서 어리광을 피우고 싶을거니까. 그래서 나는 돌아보지 않고 독수리에게 말했어. '...내일 보자' 아무 일도 없을거니까. 라고 생각하며. 그날의 마무리 인사를 건내고 나는 집으로 들어갔어.

567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7:33:15 ID : alinU2IMrzh

집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뿐 이내 바로 무관심을 바뀌었어.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두고 심호흡을 하다가 이내 방밖으로 나왔어. 거실에서 대충 쉬고 있는 아빠와 티비를 보고 있는 엄마. 내가 방에 나와서 그 사람들을 보자 그들은 뭘보냐는 듯이 나를 빤히 바라봤어.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과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입을 떼었어. '...할 말이. 있어요.'

570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7:44:15 ID : alinU2IMrzh

'너 무슨 할말을 그렇게 분위기 잡냐? 뭐. 빨리 말해. 집중안되니까.' 아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엄마는 티비를 다시 쳐다보며 나에게 말했어. 정말. 이사람들이 변할 수 있을까. 정말 죄책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난 입을 열었어. '...저 힘들어요. ...정말 힘들어요. ...죽고싶어요.'

572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7:55:10 ID : alinU2IMrzh

죽고 싶다. 드디어 내뱉은 말. 그 어렸을 때부터 생각하고 심장 깊숙히 박아넣으며, 입밖으로는 차마 내뱉지 못했던 그말. 난 그말을. 그 말을 하게끔 만든 당사자들 앞에서 내뱉었어. '...' 그 사람들은 내가 그 말을 하자 나를 빤히 쳐다봤어. 그 시선이 또 처음으로 느끼는 오묘한 시선이어서 나는 더 용기를 내어서 말했어. '...저 힘들어요. ...정말. 어렸을때부터. 죽고 싶었어요. ...진짜 진짜. 참았어요. 정말 참고 또 참았는데, 진짜 이제는 안될 것 같아요. 정말 죽고싶어요. ...나 사랑받고 싶어요. 정말로. 진짜 사랑받고 싶어요, 엄마 아빠. ...나 좀. 사랑해주시면 안될까요?' 중간까지 말을 할때부터 아마 울컥했던걸로 기억해. 이런식으로 이야기했던 것도 기억나. 응. 정말 생생하게 기억나.

574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8:07:02 ID : alinU2IMrzh

'...' 들리지 않는 말소리. 나는 집의 바닥만을 내려다 보고 있었어. 그리고. '...너. 미쳤니?'

575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8:17:59 ID : alinU2IMrzh

순간 내 귀를 의심했어. 고개를 겨우 들어서 그 사람들을 쳐다봤어. 아. 또 그 눈. 날 혐오하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그 눈. '너, 지금 뭐하자는거야? 지금 죽겠다고 시위하는거니?' 티비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웃음소리와 예능인들의 재치있는 말소리. 그리고 그걸 한꺼번에 가라앉히는 잔인한 말. 엄마는 죽고싶다는 자식의 앞에서 그렇게 말했어. '...미친새끼. 너 지금 어디 어른 앞에서 그딴 소리를 입에 담아!' 익숙한 고함소리. 아빠의 목소리.

578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8:35:33 ID : alinU2IMrzh

그쯤되니까 허탈하더라. 와. 내가 뭘 기대한거지.하면서. '너 이새끼야, 이리와. 이리와!' 순간 아빠가 득달같이 나에게 달려들어서 내 멱살을 잡았어. '이 개같은 *이 낳아주고 키워준 성의도 모르고 감히 대들어? 그래, 너가 원하는대로 죽여줄게 이 ****야.' 구겨지는 교복. 튿어지는 단추. 그리고 아빠의 힘에 의해서 나는 부엌으로 끌려갔어. '너같은 *은 정신 못 차린다. 자, 또 대들어봐. 대들어봐!' 그대로 내 얼굴을 싱크대에 집어넣는데 순간적으로 가슴이 싱트대에 부딪혀서 숨을 못쉬고 있었어. 그리고 서걱. 서걱서걱. 무언가 잘리는소리. 그리고 내 시야에 싱크대와 검고 가느다란 것들이 떨어지기 시작했어.

582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8:51:29 ID : alinU2IMrzh

머리카락. '너같은건 머리가, 좀 잘려봐야. 정신을 차리든가하지. 어떻게 혼을내도 정신을 못차리냐. 짐승**도 아니고.' 계속해서 서걱대며 떨어지는 머리카락에 나는 발버둥을 쳐댔어. '...놔!...놔! 놔! 놓으라고!' 머리가 눌린채로 나는 팔을 계속 휘적대면서 어떻게서든 빠져나가려고 했어. 그리고 겨우 아빠의 얼굴을 밀쳐서 싱크대에서 빠져나왔어. 뭐..이미 내 머리카락은 귀부분에서 조금 남아 달랑대고 있었지만 말이야.

584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9:01:51 ID : alinU2IMrzh

'어디서 어른한테 반말이야?' '쟤 정신 못차렸어. 더때려.' 아빠는 발을 쿵쾅거리며 나에게 다가왔어. 그런 모습을 보며 엄마는 아무것도 안하며 말을 거들면서, 더하라고 재촉을 했어. 지겨웠어. 너무 지겹고, 웃음이 났어. 조금 웃음이 터져서 웃어대면서 나는 말했어. '...그럼 내가 우울증에 걸리고, 자해를 하고, 자살시도를 중학교도 되지않은 나이부터 생각하고.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보고, 고통받고 상처받고 잠도 한숨도 제대로 못자는게 누구때문인데?' '이 년이 미쳐가지고! 어디서 대들어! 그럼 우리 때문이냐?' '그럼 내탓이라고?' 나는 소리를 버럭 내지르며 물었어. 그제서야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어.

586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9:22:12 ID : alinU2IMrzh

'너가 미친게 너탓이지 그럼 누구탓이야!' 엄마의 목소리. '저 년 잡아. 오늘 한번 진짜 죽기직전까지 맞아봐야지. 그래야 아~ 죽는게 이렇게 무섭고 아픈거구나! 그런거구나! 부모님께 감사히 살아야지 이럴거야!' 엄마는 나에게 성큼 다가오더니 그대로 내뺨을 후려쳤어. '사악한년. 못된 년. 몸이나 구르고 다니는 년.' 계속 뺨을 얻어맞다가 그 손을 낚아채고 하지말라고 소리치려는데 뒤에서 내몸에 가해지는 충격때문에, 손을 놓치고 그대로 앞으로 구르고 말았어.

587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9:29:26 ID : alinU2IMrzh

아빠가 발로 나를 걷어찬거였어. '...빠따가져와. 이런 **' 겨우 몸을 추스르고 손을 바닥에 짚고 일어서려는데 어깨너머로 아빠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어. 순간 저건 피해야된다는 생각에 몸을 겨우 뒤집으니까, 그 간발의 차로 방망이가 지나가더라. '야이**아 어디서 피하고 난리야' 아빠는 주먹으로 내 머리를 몇번 내려쳤어. 순간 핑하면서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아빠가 다시 방망이를 휘두르려는게 보였어. 벗어나야해. 진짜 죽는다. 진짜로. 이사람들 손에. 그 생각으로 악착같이 몸을 덤벼서 엄마를 넘어뜨렸어. 엄마가 악 소리를 내면서 뒤로 넘어졌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 현관문을 향해 뛰어갔어. '이 ***이!' 순간 뒤에서 아빠가 휘두르는 방망이를 못피하고 허벅지를 맞아서 크게 몸이 뒤흔들렸어. 못걷겠다 싶을 정도의 고통이 다리 군데군데 퍼져나갔어. 하지만 나는 움직였어. 이 사람들 손에서 죽기는 싫었으니까. 정말 죽기 싫었으니까.

588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9:46:55 ID : alinU2IMrzh

겨우 그 집같지도 않은 그 곳을 뛰쳐나와서 정신없이 달렸던 것 같아. 뒤에 들리는 고함소리와 나를 붙잡으려는 손이 계속 느껴져서. 그런 기분이 들어서.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는데 뒤에서 계속 말소리가 들렸어. '...!' '.........야!'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땀과 눈물이 얼굴을 뒤덮은 상태로 나는 소리를 질렀어. '싫어. 싫어! 싫다고! 놔! 놔!' '아이야!' 독수리였어. 나를 부르던건.

590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19:58:58 ID : alinU2IMrzh

독수리를 보자 그제야 도망쳐야된다는 생각이 가라앉고 잊고 있던 감각들이 돌아왔어. 고통, 축축함, 그리고 절망. 내 얼굴을 뒤덮고 있던건 땀과 눈물만이 아니었어. 바깥은 이미 비가 많이 내리면서 바닥에는 웅덩이가 고여있었어. 그리고 그 웅덩이를 바라보는데 내 발은 맨발이더라. 아마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신발도 잊고 달렸던거겠지. 그리고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을 손으로 문지르자 빨간것이 묻어나왔어. 그제야 느껴졌어. 다리에서 느껴지는 지독스러운 고통,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타는듯한 열. 그리고 머리와 입 안쪽, 코 턱 뺨. 얼굴 전체에서 느껴지는 얼얼함. 피가 어디서부터 흘러나왔는지 몰라도 눈의 시야에도 빨간 것이 보였으니까. 아마 머리도, 코도. 비릿함이 느껴지는 입안쪽도. 다. ....뭐 그랬어.

591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20:16:00 ID : alinU2IMrzh

입 안쪽에 무언가 이물감이 느껴져서 혀를 겨우 움직여서 빼내보니까 앞니가 부러져서 그 조각들이 입안에 있던거더라. 참담했어. 대체 무얼 바란걸까. 나는 무얼 바랬던 걸까. 주변을 둘러보니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의 쓰레기장이더라. '...아이야. 아이야. ....아이..' '.....아파.' 아프다. 너무 아프다. 발을 내딛는 감각이 아팠고. 숨을 쉬는 감각이 아팠고. 말을 하는 감각이 아팠고. 눈을 움직이는 것조차 아팠어. '...너무 아파.'

594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20:24:24 ID : alinU2IMrzh

'...아이야, 위험하니까. 다른곳으로. 어딘가로' '왜 그랬어?' 난 입을 움직였어. 그리고 물었어. '왜. 왜 나한테 용기를 내보라고 한거야?' 입안쪽을 움직일때마다 날카로운 이빨이 시려오고, 비릿한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갔지만 상관없었어. '내가 이렇게 될걸 알고 있었어? 혹시 또 이런 감정을 느끼길 바란거야' 아무것도 믿을 것은 없었어. 정말 하나도. '아이야, 절대 그럴리 없어. 그럴리 없잖아. 난 그저' 독수리가 나에게 다가왔어. '...최악이야.'

597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20:30:57 ID : alinU2IMrzh

'더 나빠졌어. 지옥에서 그 바닥으로. 지옥중의 지옥으로. 나락 중의 나락으로 떨어졌어. 고통스러워. 죽을것같아. 아파. 이게 뭐야? 더. 더. 더 더 더 더 더. 더 나쁜 기억을 안게 되었잖아. 좋은 기억도 모자른 판에 이게뭐야? 더 나쁜 기억을 떠안게 되었어. 이게 뭐야? 이게뭐냐고! 왜. 왜그랬어? 왜 나보고 그걸 해보라고 했던거야 왜?' 말을 할때마다 부어오른 안쪽 볼살이 씹어져서 피가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게 느껴졌어. 타고흐르는게 피인지 빗물인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된 상태로 난 독수리에게 쏘아 붙였어. '이게 뭐야...이게 뭐냐고오!'

600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20:37:51 ID : alinU2IMrzh

고개를 들고 독수리를 봤어. 분명 독수리가 나에게 무어라 말하고 다가오는게 보였지만 정확히 들리지도 보이지 않았어. 내 시선은 오로지 쓰레기통 옆에 놓여있는 소주병에 꽂혀있었어.

603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20:48:14 ID : alinU2IMrzh

나는 그 병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 병에 다가갔어. 그리고 그 병을 잡고 쓰레기통의 면부분에 내리쳤어. 목부분만 뎅겅하고 남은 병의 단면이 꽤나 깔끔했지만, 무척 날카로워 보였어. '...아이야, 지금. 뭐하는...거야?' 독수리의 물음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어. 난 이제 지쳤으니까. 난 결심했으니까. 난 그걸로 내 손목을 그었어.

604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20:53:41 ID : alinU2IMrzh

순간 빨간 줄이 생기는듯하더니 그 틈이 벌어져 피가 한꺼번에 주륵하고 흘러내렸어. 예상보다 더 서늘한 감각이었어. '아이야!' 독수리는 나에게 달려들어 그 날카로운 유리병 조각을 쳐냈어. 그것에 의해 독수리도 상처가 난듯 날개의 한쪽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어. '...왜. 왜...왜.' 독수리는 크게 충격을 받은듯한 눈이었어. 아. 괴롭다. 내가 이런 지옥에 살아있는 감각보다도 너를 다치게 한게, 너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게. 너무 괴롭다. 그런 생각에 나는 독수리를 무시한채 길을 계속 걸었어.

605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21:05:26 ID : alinU2IMrzh

뒤에서 나를 쫓아오는 독수리의 기운과 나를 붙잡으려는 날개의 감각. 그 모든게 있었지만 난 계속해서 걸었어. 그리고 나는 도달했어. 내가 오려고 한 곳에.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한 가운데에.

607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21:18:48 ID : alinU2IMrzh

'...왜. 왜...어째서 인거야. 아이야.' '...괜찮아. 이제 희망은 없으니까 말이야.' '...나는.'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강은 아주 까맸어. 그 바닥은 없다는 듯. 애초부터 바닥은 없다는 듯이. 비가내려 더욱 사납게 출렁이는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어. 난. 저 강의 어디까지 가라앉을까. 지금의 나처럼, 바닥 끝까지 가라앉을까?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난 고개를 돌려 독수리를 바라봤어. 그리고 물었어.'...독수리야 한가지만 말해줘.' '...' ' ...난 다시 널 볼 수 있어?' '...' '볼수있어...?' 빗소리에 묻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독수리는 그저 나를 멀거니 쳐다보며 비를 맞았어. 그 비가 얼굴과 눈을 타고 흘러 턱 아래로 똑, 똑 하며 떨어지고 있었어.

608 이름 : ◆1Ci05Xy5cII 2019/02/20 21:20:20 ID : alinU2IMrzh

'......볼 수. 있어...' 독수리의 대답을 듣고 나는 방긋이 웃으며 말했어. '...다행이다. 그럼.' 난간에 다리를 올리고 그것에 걸터 앉고는. ' 다시보자.' 내 생일의 일주일을 채 남기지 않고. 여름의 끝이 오기 전에, 여름의 비가 멎기도 전에. 난 끝을 선택했어.

617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15:40:47 ID : alinU2IMrzh

누가 그랬더라. 죽는 순간에 주마등이 보인다고. 그거 정말 개뻥이더라. 몸이 순간적으로 떨어질때 느껴지는건, 그냥 아무것도 없는. 중력에 의해서 빠르게 낙하하는 느낌, 그리고 순간적으로 드는 공포감. 그리고 하얗게 질려가는 머릿속이였어. 그 짧은 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판단하는건 못하더라. 그리고 순간 큰 충격과 함께 빠르게 차가운 물속으로 빨려드는 느낌. 그 느낌은 갑자기 전신을 집어삼키는 파도처럼 정신이 아득해지고 내가 겪는 모든 것에 대해 분간이 가지 못했어. 눈을 뜬 상태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시야. 그리고 손과 발을 내저으면 느껴지는 차가운 부유감. 그리고 결국 코와 입으로 몰아닥치는 물은 꽤나 괴롭더라. 너무 괴로워서 이 물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어. 꼴사납게 발버둥을 치다가 점점 힘이 빠지는게 느껴졌고, 그리고 난 정신을 잃었어.

618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15:42:45 ID : alinU2IMrzh

마지막으로 들렸던 물소리가 누군가가 풍덩하고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린 듯 하고, 물 밑으로 가라앉는 나에게 다가와 나를 꼭 끌어안는 그 익숙한 따스함을 느끼면서. 나와 함께 가라앉는 그것의 감각에 지독한 슬픔을, 괴로움을 느끼면서.

619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15:52:06 ID : alinU2IMrzh

그리고 난 눈을 떴어. 항상 그랬듯. 매일을 맞이하듯. 난 눈을 떴어. 현실이 아닌 곳에서.

620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15:55:35 ID : alinU2IMrzh

내가 눈을 뜬 곳은 거대한 바다의 위였어. 그곳에 발을 딛고 그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에 서있었어. 잘려나간 머리카락은 그 전의 모습으로 남아있었고, 몸 어디 한군데라도 아프거나 상처를 입은 곳도 없었어. 그리고 내 손목의 상처도. 난 멀쩡했어. 입고있는 옷도 내가 입고있던 망가진 교복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입었던 사복인 흰티셔츠에 면바지. 죽은걸까하는 생각에 손을 움직이며 발을 조심히 들어 살짝히 바다에 가져다 댔어. 찰박이는 그 물의 감촉이 시원하게 내 발에 느껴졌어. 이곳은 어디일까 라는 생각이 들때쯤 익숙한 기운이 뒤에서 느껴졌어.

621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16:09:52 ID : alinU2IMrzh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어. '...정말 다시 만났네.' 나는 뒤를 돌아서 인사를 건냈어. '안녕, 좋은 아침' 차마 독수리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그 발만을 내려다 봤어. 그리고 그 발이 점차 나에게 향해 오는게 느껴졌어. '...좋은. 아침.' 내 앞에 우뚝 서있는 독수리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어. 그 얼굴을 차마 잊을 수 없어. 절대로. 한번도 보지 못한 그 표정이 독수리가 느끼던 그 감정들을 다 담아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어.

624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16:27:46 ID : alinU2IMrzh

'...그래서. 음. 나...죽은건가?'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독수리에게 물었어. 그도 그럴게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가능할리도 없고, 내가 다리위에서 몸을 던진걸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야. '...' 독수리는 아무말없이 그저 시선을 돌릴뿐이었어. 그 행동에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뭐 상관없었어. 이런 시간이 지난다면 영원히 독수리랑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테니까. '...우리 놀러가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독수리의 목을 감싸며 말했어. '이제 나 한가하니까 괜찮잖아. 응?'

625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16:41:43 ID : alinU2IMrzh

'...그래. 가자. 가자, 아이야.' 독수리는 먼 곳을 멍하니 응시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나에게 숙여 다정하게 말했어. '좋은 기억을. 좋은 추억을 쌓으러 가자.' 그리고 순간적으로 독수리가 나를 등에 태우는 듯하더니 크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어. 발이 붕뜨는 기분에 순간 놀라서 눈을 질끈감았어. 바람이 몸을 감싸고, 바람을 가로지르는 거친 소리가 귀를 때리는 듯해서 독수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어. '아이야, 눈떠봐.' 독수리가 나에게 말을 걸자 그제야 나는 눈을 슬금하고 떠냈어.

626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16:54:57 ID : alinU2IMrzh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어. 어느정도로 높이 올라왔는지 몰라도 아래에 보이는 구름하고 따스한 태양이 하늘을 가득매우고 있었어. 바람도 멈춘듯이 사락거리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지나치고 있었어. '...어때?' 독수리는 고개만 살짝돌려 나에게 물었어. '...항상 이런걸 보고 있었던거야?' '...음. 항상은 아니지만.' '...이쁘다.' 반짝거리며 부서지는 햇빛도, 따스한 바람의 냄새도, 독수리의 단단한 근육의 감촉도 너무나 행복했어. '...정말 행복해. 이럴줄 알았으면...일찍 죽을걸 그랬나봐' 나는 작게 웃음지으며 그 순간을 만끽했어.

635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1:23:57 ID : alinU2IMrzh

아마 일주일 정도. 그렇게 우리는 여행을 다녔어.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고, 숲을, 바다를, 도시를 다니면서. 그곳에서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주 한가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밤이 찾아오면 서로를 끌어안고 잠에드는 생활을 했어. 너무 평안했어. 아무 생각도 걱정없이 생활하고. 더이상 죽고싶다는 생각을 안하는게 참 신기했어. 그 날은 숲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 되었을 때였어.

636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1:26:35 ID : alinU2IMrzh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옆에 고단히 자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을 내려보다가 그 위에 엎어지면서 몸을 뒹굴거리고 있었어. 독수리는 살짝 끄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자신의 날개를 쭉 뻗어 나를 감싸 끌어당겼어. 그렇게 품에 갇힌 형태로 독수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독수리가 눈을 지그시 뜨더라. '...잘잤니?' 나는 대답없이 빙긋 웃으며 독수리의 부리에 입을 맞췄어. 행복하다. 행복하다. 너무 행복해. 그리고 사랑스럽다.

637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1:31:04 ID : alinU2IMrzh

내 입맞춤에 잠이 깬듯 독수리의 눈이 커졌어. 그 모습을 보고있으니 입꼬리가 올라가더라. 그래서 한번더 부리에 입을 맞췄어. '정말 좋아해' 아침해가 나무들 사이로 이리저리 비쳐와서 몽롱한 기분이 들었어. 그 빛이 독수리의 깃털과 내 얼굴을 비춰서 눈이 부셨어. '정말. 정말로 좋아해' 나는 한번 더 고백하며 독수리의 머리에 내 머리를 포갰어. '...나도 좋아해. 정말로. 정말. 모든 것을 버릴정도로 널 좋아해' 독수리는 나의 고백에 대답해주며, 나의 목에 부리를 가져다댔어. 마치 입맞춤을 하듯이.

638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1:43:31 ID : alinU2IMrzh

그 기분이 너무 간지러워서 웃음을 내뱉으니까 독수리도 푸스스 웃으며 내 어깨와 쇄골 주변에 부리를 문질러댔어. '그만그만, 간지러 흐하' 너무 간질간질한 기분은 몸에서 느껴지는게 아니라 감정에서도 느껴졌어. 아 진짜 너무 행복하다. 그런 생각에 나는 독수리의 머리를 붙잡고 다리로 독수리의 몸통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어. '...아 정말. 정말 행복해. 진심으로' 그말에 독수리는 살짝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더니 내 배에 고개를 턱하고 올리더니. 자신의 날개로 날 붙잡고 고개를 묻더니 숨을 양껏 마시고내쉬어댔어. '...있지, 아이야. 오늘. 오늘.. 보여줄 곳이 있어.'

641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1:56:29 ID : alinU2IMrzh

'음, 뭔데?'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이며 독수리에게 물었어. '...내가 사랑하는 장소야.' '뭐. 독수리가 사랑하는 장소면 나도 사랑할거니까. 문제 없어.' 나는 비실이 웃음을 흘리며 독수리의 머리를 만지작거렸어. '그래서 언제가게?' '...조금 있다가. 조금만 더. 조금만...' 독수리는 언제갈거냐는 나의 물음에 어리광을 피우듯 내 배에 고개를 묻고 숨을 고르내쉬기를 반복했어.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우리는 몸을 일으켜, 숲 주위를 돌아다녔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일은 어디를 갈건지. 앞으로 어디를 돌아다녀볼건지. 어디에 집을 마련해볼지. 우리 이제 사귀는거냐며 내가 장난치듯 물으니까 헛기침을 하며 '아, 더..덥네' 하면서 도망치는 독수리도. 그걸 쫓는 나도. 정말 시덥지 않은걸로 행복했어.

643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2:06:05 ID : alinU2IMrzh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햇빛이 붉게 물들 쯤이었어. 독수리는 나와 숲을 걷다가 순간 몸을 멈췄어. 나는 그런 독수리를 보고 물었어. '왜그래?' '...아이야, 이제. 갈까..?' 독수리는 설핏 웃는듯이 하더니 내게 자신의 날개를 내밀었어. 난 그 날개를 익숙한듯이 웃으며 잡았어. '응. 가자.' '...잠깐만 눈 감고 있어봐. 내가 눈 뜨라고 할때까지.' 난 독수리의 목을 끌어안고 눈을 꼭 감았어. 시간이 오래 흐르지 않아 시원한 바람이 내 머리를 어지럽히는게 느껴졌어. '...자, 눈 떠봐.'

644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2:11:34 ID : alinU2IMrzh

내가 슬그머니 눈을 떴을때는 내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숲의 모습이 아닌, 어떤 절벽. 바다가 보이는 풀이 자라난 절벽 위에 서있었어. 석양이 바다를 물들여서, 그 바다가 아주 반짝여댔어. 아주 예쁜색으로 물든 바다가 눈을 어지럽혔어. 또 너무 아름다운 광경에 취해서 정신이 아득해졌어. '..와. 이쁘다.' 그렇게 멍하니 석양이 물든 바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독수리에게 신난 목소리로 말했어. '이거야? 이거 보여주려고 한거야? 정말 이뻐! 진짜 진짜 좋아! 독수리 최고야!...왜. 그래...?' 신이 나서 독수리에게 마구 말을 내뱉다가, 순간 나를 보는 독수리의 눈에 슬픔이 감돌고 있어서 나는 말을 멈췄어.

645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2:16:46 ID : alinU2IMrzh

'응. 이거 보여주려고 했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모습이야. 정말 반짝거리네.' 독수리는 나의 모습을 그 큰 눈동자에 담아내다가 입을 다물었어. 사아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노란빛의 풀들이. 뒤에서 마구 반짝이는 바다가. 타오르는 태양이. 그 소리가. 그 광경이.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었어. 나는 무언가를 느끼고 입을 떼서 말했어. '아아~.. 좀. 피곤하다. 우리 낮잠자러 갈' '...아이야.생일 축하해.' 순간 몸을 멈칫하고 독수리를 바라봤어. 그만. 이상한 기분이 온몸을 집어 삼켰어. 그만해. '...아 생일? 이제 상관없잖아~ 나. 나 진짜진짜 피곤해. 응? 가자 독수리야' '...아이야. 정말로. ....정말로 생일축하해. 내가, 너에게 줄 생일 선물은..... 너가 많이, 정말 많이 싫어할거야.'

650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2:20:56 ID : alinU2IMrzh

독수리의 눈에서 타오르는 듯한 석양을 담은 눈물이 떨어졌어. 방울지며. 끊임없이. 그 눈물이 떨어졌어. 난 아무말도 하지 못했어. 그저 그런 독수리의 모습을 눈에 담아내며 서있었어.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거겠지. '...우리 약속 하나 하자. 다시는, 다시는 우리 만나지 말자.' 독수리는 내게 말했어. 눈물을 계속해서 떨구며. 그러면서도 나의 모습을 자신의 눈에 담아내며.'...다시. 다시 만나지 말자. ....너가 날 만난다는 건 너가 그만큼 날고 싶어하고, 비를 좋아하고. ... 추워하고, 물 속에 잠기고 싶은거고,... 아프고 슬퍼하는거잖아. 그러니까, 우리 만나지 말자.' 힘겹게 내뱉어지는 말이, 그말 속의 고통이 너무나 생생했어. 눈앞이 눈물로 흐려져서 독수리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어.

652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2:24:12 ID : alinU2IMrzh

'보고싶을거야, 그리울거야, 다시 너를 안아보고 싶을거야. 정말로. 정말로 그리울거야. ... 그래도 우리 만나지 말자.' 눈물때문에 뿌얘진 시야가 독수리의 모습을 계속 흐뜨려놨어. '다시 만나지말자.'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 괴로움이 느껴지는데도 난 단한마디도 하지 못했어. 아 안되는데. 독수리를 마주봐야하는데. '안녕 안녕 작은 아이야 안녕' 저 인사에 나도 인사를 건내야하는데. '안녕 안녕' 독수리의 눈물을 닦아줘야하는데. '안녕 --아' 독수리의 이름을 불러야하는데. 그 모습을 눈에 다 담아내야 하는데. "사랑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655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2:27:57 ID : alinU2IMrzh

내 시야를 뿌옇게 흐리던 눈물이 떨어졌지만 난 독수리의 모습을 볼 수 없었어. 내가 눈을 뜬 곳은. 내 시야를 가득 채운건 하얀 천장이었어.

656 이름 : ◆1Ci05Xy5cII 2019/02/21 22:31:47 ID : alinU2IMrzh

난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느끼는 감각들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어.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운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진 듯한 그 가슴이. 아직도 쿵쾅대며 뛰어대는 그 심장박동이 너무 괴로워서 계속 울어댔어. 아이처럼. 엉엉거리며. 그 예전에 독수리에게 안겨 울었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아려오는 통증과 현실에. 소리를 끅끅거리며. 입에 담지 못할 그 이름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울부짖었어. '안녕 안녕 독수리 안녕' '안녕 수선화야' 그렇게 우리는 영영 이별을 고했어.

680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5:42:58 ID : 5gi3ClBatum

내가 일어난 곳은 병실이었어. 약 일주일간 의식불명 상태였다더라. 내가 구조된건 기적이었다고 했어. 정말 기막힌 우연의 연속이 만들어낸 기적. 그 날 그 다리를 지나치던건 나 혼자가 아니었대.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려고 하는데, 맨발에 피투성이인 나를 봤대. 그리고 혼자 무어라 말하며 휘정대더니 다리를 넘어서서 몸을 던지는걸 목격했대. 그래서 바로 119에 신고를 했고. 그날은 하필 비도 오고 강의 수위가 높아져서 가망이 없다 생각하고 인명구조선이라 해야하나.. 그걸 띄웠는데 내가 다리 기둥쯤에 그물에 엉켜서 떠밀려있었대. 그래서 바로 구조가 가능했고. 구조는 했지만 심한 저체온증하고 과다출혈로 생사를 오락가락했다나봐

681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5:45:50 ID : 5gi3ClBatum

그리고 바로 입원을 했는데 부모님뿐만이 아니라 학교측에도 연락이 갔다더라. 확실히 교복을 입고있었으니까 그랬던거겠지. 연락을 받은 학교측은 놀라서 바로 학교내에서 선생님들끼리 회의가 일어나고, 내 부모는 병원에 와서 쩔쩔맸다고 하더라. 내가 입은 상처와 요근래의 내 행동에 대해 수상하게 생각했던 담임선생님이 의사선생님께 상처에 대해 따로 물으셨나봐. 그래서 가정폭력과 자해, 우울증 뭐 그런게 다 밝혀졌어.

682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5:48:17 ID : 5gi3ClBatum

그걸 알게 된 담임선생님은 놀라서 자신이 실수한것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죄책감을 가졌다고 했어. 그리고 부모님 몰래 나의 보호자가 될 사람은 없는지, 다른 혈연에 대해 알아보고자 다방면으로 도움을 구했다고 했어. 그리고 삼촌하고 연락이 닿게 되었어.

683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5:55:08 ID : 5gi3ClBatum

삼촌은 연락을 받자마자 병원에 한달음에 달려오셨다고 했어.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봤었다더라. 아빠가 연끊고 잠적하기 전에 말이야. 항상 궁금했다하더라. 근데 연락할 수단도 방법도 없어서 알지 못했고, 이번 사건의 경위를 듣게 되고 바로 달려와서 아빠와 치고박고 병원에서 싸웠다더라. 남의 눈치 시선 상관없이 말이야. 어떻게 자기 자식을 때릴 수 있냐고, 하다못해 자기랑 연을 끊었으면 자기가 가진 가족은 책임져야되는거 아니냐고. 이런 여린애 때릴데가 어디있냐면서, 지속적인 폭력을 하냐면서. 그때 병원관계자 사람들이 제지해서야 그 난동이 멈춰질 수 있었대.

684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5:58:24 ID : 5gi3ClBatum

내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내가 회복하고 한두달이 지나서쯤이었어. 이 이야기를 들었을때 펑펑 울었어. 나를 위해 이렇게 나서주는 사람이 있구나. 날 도와준 사람은 내 가까이에 존재하구나 하면서. 나 혼자 이 지옥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이 지옥에서 나를 벗어나게끔 모두가 도와줬구나 하면서 말이야. 너무 고마웠어. 선생님도 삼촌도, 나를 발견하고 신고한 사람도. 구해준 구급대원도 의사도. 그리고 이런 감사함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끔 해준, 나를 살려준 독수리도.

685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03:25 ID : 5gi3ClBatum

내가 깨어났을때는 내 옆에 있었던 건 삼촌이었어. 난 누군지 모르고 그냥 독수리때문에 울고있었는데, 그런 내 손을 붙잡고 괜찮다면서 이제 모든게 괜찮을거라고 말해줬어. 내가 깨어나고 3일쯤이 되었을때 나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어. 그 사이에는 누군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어.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686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08:37 ID : 5gi3ClBatum

일반 병실로 옮겨지고 나서 난 내 옆에 있던 그 사람이 내 삼촌이라는 걸 알게되었어. 알게 된 경위는 좀 다른 일때문이었어. 병실에 들이닥친 부모님이 쌍욕을 하면서 너때문에 우리가 나쁜사람들 되었다고, 이동네에 어떻게 사냐면서 나한테 달려드는걸 삼촌이 막으면서 싸웠는데 그때 오가는 대화를 듣고 알게되었어. 저사람이 내 삼촌이라는 걸. 그리고나서 병원 관계자에 의해 부모님은 다시 끌려나갔고. 그 하루 후에는 담임선생님하고 학교의 선생님 몇분이 내 병실로 찾아왔어. 많이 조심스러워하며 이야기하시더라. 몸은 진정되었냐면서. 괜찮냐고. 담임 선생님은 괜찮냐고 내게 물으시다가 엄청 우시더라. 미안하다고. 일찍 알아채지를 못했다고. 자기때문에 아픈 일은 없었냐고.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이 당황스럽기도 신기하기도 했어. 나로인해 우는 사람이 있구나하고.

688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16:45 ID : 5gi3ClBatum

학교 측에서는 내가 보호받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이미 경찰측에도 연락이 갈 예정이라고 하더라. 그리고 삼촌이 나에게 말했어. 자기랑 가자고. 여기같은 지옥이 아니라 평범하고, 행복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자기가 불편하다면 방을 얻어주겠다고 하셨어. 그 말에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어. 내가 정말 그런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는건가 싶어서 의심스러웠어.

689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24:39 ID : 5gi3ClBatum

그리고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어. 내가 쓰러져있는 동안 왠만한 치료는 끝나있었더라. 다리에 금이가서 깁스도 되어있었고, 여기저기 자잘하게 상처부위가 꼬매져 있었고. 한 한달정도 병원신세를 졌던것같아. 그 사이에 일도 많았어. 경찰 조사때문에 한두번 경찰이 찾아오기도 하고, 학교측 사람이었나...보험사? 그런 사람도 찾아왔었고. 학교 친구들 몇명이 울면서 찾아오기도 했고. 그리고 내 부모는... 경찰에 사건 접수된다고 하니까 삼촌한테 빌면서 그냥 쟤 데리고 가라고, 경찰에 넘기지는 말아달라고 하면서. 법정까지 갈 돈도 없다고. 앞으로 조용히 살거니까 날 데려가든 뭘하든 상관없다고 했다더라.

693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30:18 ID : 5gi3ClBatum

그리고 내가 퇴원하기 전에 삼촌이 다 수속절차는 다 처리했더라. 학교측에 자퇴처리도. 내 짐정리도. 뭐..짐정리할 것도 없었지만. 그 사이동안 내 부모라는 사람들은 코빼기도 비치질않았어. 사과 한마디도. 그런 비슷한 것 하나도. 그렇게 나는 퇴원을 하고, 삼촌을 따라갔어. 내 지옥이었던 그 곳을 떠나서, 나와 독수리와의 슬픈 추억이 깃든 그곳을 떠나서.

694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37:19 ID : 5gi3ClBatum

난 삼촌의 집으로 갔어. 숙모도 있더라. 처음이었어. 가족이 있다는게 정말 신기했어. 숙모는 내가 오자 꼭 안아주면서 많이 고생했다고 오늘부터 잘지내보자고 하더라.

695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41:24 ID : 5gi3ClBatum

처음에는 정말 어색하고 눈치가 많이 보였어. 내가 뭐라고 이사람들이 이렇게 나서서 도와주는걸까. 난 뭘해야할까. 이집에서 내가 무얼해야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정말 너무 어정쩡했어. 설거지를 하려고하면 하지말라고 하시고. 빨래라도 하려면 하지말라고 하고. 내가 할건 하나 없어서 그게 너무 눈치보이고 무섭더라. 왜지. 왜.. 이런 생각밖에 안들어서 혼란스러웠어. 그리고 나를 밖으로 데려나가서 핸드폰도 새로 사주고, 옷도 사주고, 생필품 하나하나 다 사주시는데 아무말 없이 다 받는데 너무너무 죄스럽더라. 내가 이사람들까지 지옥으로 끌어당긴게 아닐까 싶어서.

696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46:04 ID : 5gi3ClBatum

계속 감사하다고 받는데 내가 눈치보는걸 알아채셨나봐. 내가 그곳에 지낸지 일주일쯤 되었을때 삼촌이 나를 불러서 이야기했어. 그렇게 눈치보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여기서 잘지내면 된다고. 널 일찍이 찾았어야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미안하다고. 이 일상에 적응이 될때까지 도와줄테니까 가끔 밖에도 다녀오고, 책도 읽고, 컴퓨터도 하고 쉬라고. 그게 영 싫다하면 조금만 우리를 도우면 된다고. 상차리는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정도만 하면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꼭 끌어안아주시면서 잘 버텼다고 말하시는데, 그 모습이 독수리와 겹쳐보여서. 왜인지 독수리가 이 모든 것을 알고 나를 살려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눈물이 나더라.

698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50:57 ID : 5gi3ClBatum

그 날 이후로 그 생활에 적응하고자 노력했어. 밖에 나가서 산책도 해보고, 책도 읽어보고. 평범하게 컴퓨터도 해보고. 그렇게 지냈어. 점차 적응이 되어갈때쯤에 나는 삼촌에게 부탁했어.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고등학교를 자퇴했으니 검정고시를 따고 알바를 병행하면서 다른 자격증 시험을 보겠다고. 삼촌은 굳이 안그래도 된다고 너가 원한다면 배우고싶은걸 배우게 해줄수도, 대학교에 진학시켜줄수있다고 했지만. 난 그런것까지 받을정도로 낯이 두껍지 못했어. 그래서 결국 삼촌은 손을 들었지.

699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55:31 ID : 5gi3ClBatum

그렇게 몇달정도 공부를 하고 친 검정고시에서 고득점의 결과를 내었어. 그때는 내가 19살. 사실상 고3이어야했지만. 뭐...어찌되었든 그때쯤에는 삼촌과 숙모와 같이 사는 것에 적응이 완벽하게 되어서. 외식도 하고, 놀러도 가고 그런식으로 마치 가족처럼. 평범한 가정처럼 지냈어. 그 1년간 나는 가까운 곳에서 알바를 병행하면서 자격증 관련 공부를 꾸준히 해서 총 4개의 자격증을 따내었어. 그리고 남은 돈은 내 앞으로 통장을 만들어서 저축도 하고.

700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57:51 ID : 5gi3ClBatum

그 동안 독수리를 잊어갔냐고? 아니. 전혀. 처음에는 독수리에 대한 생각과 그리움때문에 일주일에 다섯번정도는 울었어. 하지만 어느 순간에 생각해보니 독수리가 바란 내모습은 이런 모습이 아닐텐데, 독수리는 항상 나를 보고 있을텐데. 이런 모습을 보고 괴로워할거라는 생각에 눈물을 그쳤어. 강하고 굳세게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 1년을 열심히 산이유기도 하지.

701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6:58:40 ID : 5gi3ClBatum

그대신 나에겐 습관이 생겼어. 혼자 있지만 그 누구도 듣지 않지만, 혼자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과 감정들을 말해. 그리고 인사를 건내. 내일보자 하고. 그러면 왜인지 모를 따뜻한 바람이 나에게 불어오는 기분이 들거든.

703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7:01:20 ID : 5gi3ClBatum

그 후로 성인이 되었을 때. 큰회사는 아니지만 자격증을 가지고 난 인턴으로 취직을 할 수 있게 되었어. 거기서 열심히 일한 덕분에 정직원이 될수도 있었고.

704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7:04:21 ID : 5gi3ClBatum

그렇게 3년정도를 열심히 일했어.삼촌과 지내다가 어느정도 돈이 모여서 방을 하나 구해서 그곳으로 이사도 갔어. 그리고 내가 지냈던 그곳을 갔어. 독수리와의 추억을 기리기 위해. 그 골목길을, 그 집 앞을. 그리고 그 낡은 놀이터를.

705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7:06:21 ID : 5gi3ClBatum

노을이 지는 낡은 놀이터에 있다보면 그 부드럽게 움직이는 풀들이 독수리의 존재를 보여주는 듯 하니까. 심장이 아파오지만 그만큼 행복하니까. 행복해서 독수리를 보지 못하지만, 그렇기에 약속을 지키는 것이니까.

706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7:07:22 ID : 5gi3ClBatum

3년동안 그 놀이터를 무너뜨리고 새 놀이터를 짓고, 그 풀밭에 다른 운동기구와 같은 것들이 자리를 잡아 사람들의 왕래가 생겨 더이상 나만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그날의 기억을 난 가지고 있으니까.

707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17:09:13 ID : 5gi3ClBatum

그리고 어느날은 인터넷으로 이탈리아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는데 아주 익숙한 장소를 발견했어. 독수리가 나에게 보여줬던 그장소를.

715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1:22:45 ID : 5gi3ClBatum

순간 눈을 의심했어. 정말 실존하는 곳인지도 몰랐는데, 그곳이 실존하는거라면. 그런거라면 난 어떻게 이 장소를 아는 것일까. 그렇다면 독수리는 환각이 아닌 다른 존재이지 않을까 하며말이야. 그리고 위성지도로 그 주변으로 숲이 존재하는지도 살펴봤더니, 정말 있더라. 숲. 그때의 기분은 말로 이룰수없어. 불규칙적으로 요동치는 심장박동때문에 손끝까지 떨리는 그때는.

716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1:26:45 ID : 5gi3ClBatum

나는 바로 결심했어. 그곳에 가야한다고. 그곳에 가서 내눈으로 직접 확인해야한다고. 그래서 그 다음날 바로 회사에 가서 물었어. 일주일정도 일을 쉴수없냐고. 물론 회사측에서 무슨일이 있는거냐며 묻기도 하고, 난처한 상황이었지만. 어찌저찌 잘 타협해서 내가 쓸수있는 모든 휴가와 일주일은 무급으로 처리하기로 하고 짐을 싸서 당장에 이탈리아로 향했어.

718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1:31:31 ID : 5gi3ClBatum

그곳의 정확한 명칭은 말하지 못하지만 서쪽 해안의 남이탈리아에 위치해있어. 그리고 그 주변에 탑이라할까... 돌로이루어진 작은 탑? 같은 것이 존재해. 그리고 절벽같이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형태로 되어있고, 내려가면 해안가를 따라 거닐 수 있어. 이정도로 설명하지 못하는건 이해해줘.

719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1:35:21 ID : 5gi3ClBatum

무작정 가다보니까 그곳까지 갈수있는 교통수단이 없어서 엄청 헤매었어. 겨우 물어물어 택시도 타고, 현지인의 도움도 받고 해서 도착했던걸로 기억해. 그리고 도착했을 때는 독수리와 내가 헤어졌을 무렵처럼, 붉게 물들어 져물어가는 석양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어.

720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1:36:43 ID : 5gi3ClBatum

그 광경을 현실에서 직접 목격하니 사람이 멍해지더라. 그렇게 한참을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쯤에서 돌아가야겠거니 하는 마음에 몸을 돌렸어. 그리고 그곳에는 독수리가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723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1:40:26 ID : 5gi3ClBatum

거의 4년만에 다시 만난 독수리는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어. 그 아름다운 깃털도, 따스한 기운도, 나를 온전히 비춰주는 그 빛나는 눈동자도. 모두, 그대로였어. 순간 숨을 멈추고 독수리를 바라봤어. 내가 그때 마지막까지 담아내지 못했던 그 모습을 담아내려는 듯이.

724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1:43:08 ID : 5gi3ClBatum

내가 눈을 깜빡이면 그 모습이 사라질까 차마 깜빡이지 못하던 눈을 조심스레 깜빡였어. 그래도 독수리는 그 자리에 있었어.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따스한 미소를 눈에 가득 담아내고. 난 겨우 입을 움직여 말을 걸었어. '...오랜만. ..이네.'

726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1:49:08 ID : 5gi3ClBatum

독수리는 살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어. '..응.항상 이야기하는거 듣고있었어.열심히 잘컸다. 작은 아이. ...이젠 작은 아이가 아닌가.' 푸스스하고 웃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어. '그럼 오랜만은 아니려나.' '그러지.' '...그래도 난, 오랜만인데.' 난 말을 이으며 독수리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어. 그 어느것 하나 놓치지 않고 보겠다는 마음으로. '...그래도 오랜만에 본 넌 역시 아름답구나.' 난 작게 미소를 지으며 독수리에 말했어.

729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1:54:51 ID : 5gi3ClBatum

'너도 항상. 아이, 넌 어느 순간에서도 아름다웠어. 정말로. ...몇번이나 더 반했는지 몰라' '하하, 그게뭐야' 난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어. 내 웃음에 독수리도 웃음이 터진듯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며 웃어댔어.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리는 웃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봤어. 아무말없이. 고요해진 공기와 가라앉는 노을을 느끼며. 우리는 그저 말없이 서로를 느꼈어.

730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2:00:24 ID : 5gi3ClBatum

느껴졌어. 다시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는걸. 하지만 그때처럼은 아니었어. 그때하지 못했던 인사를, 눈에 담아내는 것을 온전히 해낼거니까. '...안녕 수선화' 나의 인사에 독수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떠내더니 말했어. '...안녕, 작은아이야.' '...잘가.' '잘가,__아.' 완벽한 작별인사였어. 서로를 마주하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나누는 완벽한 인사. 어쩌면 이것을 위해 난 여기까지 온것이겠지.

732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2:05:46 ID : 5gi3ClBatum

노을 빛에 독수리는 녹아내렸어. 황홀한 노란빛. 마치 독수리가 태양인 듯, 태양이 독수리인듯 그 노을 빛으로 녹아들어 내 앞에는 노을의 빛만이 남겨져 있었어. 오랜만에 본 독수리에게 느낀 감정은 기쁨도 행복도 아니었어. 오히려 지독한 슬픔과 그리움, 애틋함, 미안함이었어. 난 그것을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어. 밝게 웃음을 지으며 뒤로 몸을 돌리고 걸어나갔어. 분명 독수리가 보고 있을테니까. 독수리에게 좋은 모습, 더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까. 난 밝은 웃음을 지으며 발을 디뎠어.

733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2:07:28 ID : 5gi3ClBatum

난 독수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웃는 법을 배웠어. 웃을만한 일이 없어도 저절로 미소를 띄우는, 그런. 그런 자연스러움을 알수있게되었어.

736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2:08:46 ID : 5gi3ClBatum

내가 느낀 제일 커다랗고, 겉잡을 수 없던 행복. 더이상 겪지 못할 제일 아름다운 행복은 나에게 그만한 아픔이 되어 돌아왔어. 하지만 내가 독수리를 볼 일은 없어. 난 독수리와의 기억으로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갈거니까. 아픔보다 그 기억의 행복과 사랑이 커다라니까. 잠을 자면 꿈 속에서 만날거고, 눈을 뜨면 현실에서 같이 있을거니까. 독수리. 수선화는 나와 함께하니까.

739 이름 : ◆1Ci05Xy5cII 2019/02/23 22:13:03 ID : 5gi3ClBatum

이야기는 끝이야. 내가 해줄수 이야기 말이야. 그 후로 독수리를 보지 못했어. 꿈속에서 한두번은 만났지만 현실에서는 만나지 못했어. 지금도 나는 독수리를 만날 순간이 오지않을까 하며 잘 지내고 있어.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 딱히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 그도그럴게 독수리를 사랑하는데 누가 눈에 들어오겠어ㅋㅋㅋㅋㅋㅋㅋ 이상이야. 이상. 내가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환각. 수선화의 이야기였어.

(해피엔딩 결말을 원하는 사람은 여기까지 봤으면 좋겠어... 개인적인 의견이자 사족이야.)

757 이름 : ◆1Ci05Xy5cII 2019/02/27 01:48:06 ID : alinU2IMrzh

미안. 사실 거짓말했어. 그 후로 독수리 두번 더봤어. 현실에서. 해피엔딩으로 남고싶었어. 그래서 거짓말한거야. 이탈리아에 간건 벌써 2년전의 일이야. 난 벌써 26살이야.

760 이름 : ◆1Ci05Xy5cII 2019/02/27 13:19:54 ID : alinU2IMrzh

나 처리할건있다 한거 퇴사처리하는거였다고 했잖아. 모아둔 돈으로 여행다니려고. 이탈리아가서 다시 독수리보려고 그런거였어. 남은 시간이나마 더 많이 보고싶어서.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이 이야기를 시작한것도 그런 이유였어. 너무 횡설수설이네. 1년이래. 지금은 8개월.

764 이름 : ◆1Ci05Xy5cII 2019/02/27 21:36:26 ID : alinU2IMrzh

이거 읽는 너희는 꼭 행복하고, 행복해질 일만 있기를. 불행속에서 최대한 행복이 많이 찾아오기를 바래. 꼭.

770 이름 : ◆i4GlhhxQq47 2019/02/28 03:50:19 ID : alinU2IMrzh

정말 못된것같아. 해피엔딩으로 남을 수 있는데도 그걸 망쳤네. 나 아파. 엄청 많이 아파. 하루하루 버티는중이야. 심적으로도 무너지고도 있지만, 신체는 이미 무너져버렸어.

775 이름 : ◆1Ci05Xy5cII 2019/02/28 14:08:48 ID : alinU2IMrzh

손 쓸 수가 없대. 이런 경우가 진짜 극소수의 경우인데, 어린 나이때부터 진행된 것 같대. 그렇대. 응. 그렇대. 나보고 그렇다고 했어.

778 이름 : ◆1Ci05Xy5cII 2019/02/28 14:16:26 ID : alinU2IMrzh

가족력인 것 같대. 정말 극소수 중의 소수의 경우래. 그러지 않고서는 말이 안된다더라. 난 이 상황자체가 말이 안되는데 그런 말을 하더라. 췌장암 3기 시한부 판정받았어. 작년 10월 무렵에.

783 이름 : ◆1Ci05Xy5cII 2019/02/28 19:17:25 ID : alinU2IMrzh

하나도 도움 안되는 가족이야. 진짜. 도움이 안되다 못해 어떻게 나한테 이런 병까지 주는걸까. 그래도 8개월 안돼서 독수리랑 영원히 같이 지낼수있겠다. 좀 훗날의 이야기가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네.

786 이름 : ◆1Ci05Xy5cII 2019/02/28 20:47:49 ID : alinU2IMrzh

아직도 꿈같아. 내가 죽는다는게. 정말 꿈같아. 남은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까 하는 생각이 아직도 뭐가뭔지 이해가 안돼. 근데 나 그렇게 불행하진 않아. 독수리가 안보이거든. 그정도로 불행하진 않아. 그래서 내가 보러가려고.

791 이름 : ◆1Ci05Xy5cII 2019/03/03 00:59:25 ID : alinU2IMrzh

잠이 안온다. 살이 빠졌다. 허리가 아파. 배도 아파.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모두 고마워. 나중에 괜찮은 시간이 오면 후에 독수리 본 이야기 풀도록 할게. 고마워. 안녕.

797 이름 : ◆1Ci05Xy5cII 2019/03/10 15:44:10 ID : alinU2IMrzh

안녕. 난 그 공터에 다녀왔어. 이제는 관리가 잘되어서 풀도 깔끔하게 베어있고, 새로운 놀이터도 지어져있지만. 내 소중한 장소니까 말이야. 자주는 못와도, 꼭 한번씩은 다녀가. 해질녘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운데 그사진은 못찍었네. 다음에는 그날의 느낌을 담은 사진을 가져오도록 할게. 난 잘지내고 있어.

816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16:25:25 ID : alinU2IMrzh

너희가 남겨준 모든 글들 다 읽었어. 정말 고마워.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최근 근황을 말하자면 심적으로는 많이 진정되고 있어. 차근차근 내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어. 간혹 내가 왜 죽어야하는지에 대해 화가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요새는 정말 괜찮아. 몸은 꾸준히 병원 다니면서 진통제랑 약들 처방받아서 먹고있어. 치료를 진행하자고 말하기도 하는데 난 거부했어. 어차피 조금 수명을 늘리는거, 남은 시간은 내 스스로 정리를 하며 지내고 싶었거든. 더 살고자 발악하는 느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817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16:27:30 ID : alinU2IMrzh

음. 내가 말했지? 독수리와 작별을 하고 난 이후로, 두번 더 마주했다고. 그럼 그이야기를 풀어주도록할게. 지금 당장은 말고. 오늘 저녁이나 내일. 내일이 아니면 그 다음날. 그렇게 이야기해보도록 할게.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821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0:05:46 ID : alinU2IMrzh

곧 이야기를 시작할게. 이 두번의 만남은 정말 우연. 우연으로 마주친 순간이었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지. 이 두 시점은 내가 시한부를 선고받기 전의 이야기야.

823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0:12:31 ID : alinU2IMrzh

첫번째는 24살 겨울날이었어. 그 날도 열심히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어.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날은 눈이 펑펑은 아니어도 사뿐히 내리는 그런 조용함을 가진 날이었어.

824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0:17:40 ID : alinU2IMrzh

독수리를 못본지 1년하고 조금 지났던 시기였을거야. 응. 딱 그정도. 나 회사생활 엄청 열심히 했어. 정말 사람이 매달릴게 일밖에 없다는게 뭔지 알았어. 그래도 나만 그런건가봐. 회사내에서 직장 동료분이라 해야하나. 나보다 4살 정도 많으신 분이 계셨거든. 엄청 친절하신 분이셨어. 평소에도 나한테 친절히 인사를 건내주셨고, 자잘하게 간식도 사주시고. 그런저런 날 잘챙겨주시는 분이셨어.

825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0:27:22 ID : alinU2IMrzh

그 날은 점심쉬는시간에 회사 옥상정원이라 해야하나.. 거기에 올라가서 눈 내리는거 보면서 쉬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 분이 들어오시더라. 그래서 가볍게 인사를 나눴지. '어. 안녕하세요. 쉬러 나오신거에요?' '아, 어. 음. 커피, 마실래?' 하면서 따뜻한 커피를 건내시더라. 그래서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서 둘이 눈 내리는걸 보고 있는데 그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 '...혹시 남자친구 있어?' 난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봤지. '아, 아니. 그렇게 놀라지말고. 그냥.' '아. 아니요. 없어요' '아, 그래...?' 정적이 감돌았지. 그렇게 눈내리는걸 보면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가 나에게 묻더라. '혹시...난 괜찮을까?' 하시면서.

826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0:32:21 ID : alinU2IMrzh

'아, 어...' '아니. 뭐...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 내 마음 강요할 생각도 없고. 그냥 생각해주고 대답해줘. 조금 난처했나....' '아, 아니요. 조금 놀랐어요.' '거절해도 평소처럼 지내면 되니까. 미안해. 나먼저 들어갈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엄청 당황스러웠지. 이게 뭐지 하면서. 그리고 그 분은 먼저 옥상에서 나가셨어. 나야 뭐. 별 생각 없었어. 당연히 거절이니까. 난 그 분께 연애 감정의 무엇도 들지 않았고, 내가 사랑할건 독수리 하나 뿐이었으니까.

827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0:34:31 ID : alinU2IMrzh

그러면서 어떻게 둘러둘러 거절을 할까 고민을 하면서, 눈 내리는걸 쳐다보고만 있었어. 어떻게 보면 내가 여짓거리를 준게 아닐까 하면서 말이야. 확실히 다른 사람 눈에는 소위 말하는 썸이라는 것처럼 보인게 아닐까하면서. 그런 생각에 미간이 찡그려졌어.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어. '또 미간 찌푸리네. 미간 풀어.' 하면서.

831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0:48:21 ID : alinU2IMrzh

난 순간 눈을 끔뻑이다가 뒤를 돌아봤어. 옥상 구조가 계단식 처럼 되어있거든. 설명은 부족하지만. 어찌되었건 독수리는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면서 빙긋 웃고 있었어. 눈 내리는 풍경 속에 놓인 독수리의 모습이 너무 그림같아서. 한참을 말없이 그걸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벙긋였어. '와...너 진짜 예쁘다' 고작 1년이 넘도록 보지 못하고, 꺼낸 첫말이 예쁘다라니. 정말 멍청했어.

832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0:51:45 ID : alinU2IMrzh

독수리는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살짝 눈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봤어. 그러다 그 낮게 안쪽에서 긁어내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말했어. '그래서 거절하려고?' '당연하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나는 대답했어. 포근한 느낌의 눈이 사뿐이 떨어지는 옥상에서. 여름의 기운은 온데간데 없이, 정반대되는 이 상황이. 여름이 아닌 겨울 속에 우리가 존재했어.

833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0:56:56 ID : alinU2IMrzh

'왜?' '그야 내가 사랑하는건 너 하나 뿐이니까' 부끄럼없었지. 직설적으로 내뱉은 사랑고백. 정말 로맨틱하지가 않았어. 나도 알아. 물론 독수리도 알았지. '...아이. 너 진짜... 안 부끄러워? 정말 로맨틱하지가 않네.' '그런걸 따질 때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해서' 확실히 그렇잖아. 서로의 마음도 이미 알고 있고. 이미 서로를 사랑하는걸 이렇게 느끼는걸. 독수리는 내 말에 어안이 벙벙했는지 입을 살짝 벌리다가, 입을 다물고는 날개를 살짝 털었어.

834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1:08:19 ID : alinU2IMrzh

그 모습을 보다가 내가 물었어. '추워?' '아니. 그냥 조금 차가울뿐이야.' '그건 처음 알았네' '...있지, 그때 있잖아.' '그때?' '나 물에 빠졌을때.' '아, 그때.' 아주 덤덤하게 말했지. 이제 다 괜찮은 일이 되었으니까. 응. 그랬으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었어. '그때 나를 물에 건진건 너였어?' '...글쎄.' 독수리는 아리송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어. 그냥 묵묵히 웃음을 지으며 눈이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 봤어. '...글쎄. 음. 글쎄네.' '...' '아. 그래도 이건 대답해줄수있어.' '뭔데?' '나 물 싫어해.' '그게뭐야-' 물을 싫어한다는 독수리의 말에 난 작게 웃음을 터뜨렸어.

836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1:15:00 ID : alinU2IMrzh

독수리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살짝이 날갯짓을 하더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어. 오랜만에. 정말 얼마나 오랜만에 서로를 이렇게 마주보는지. 그렇게 서로의 눈에 눈을 맞추며 말없이 서있었어. '...아이야, 조금만 더 주위를 살피렴. 좋은 사람은 항상 가까이에 있어.' '...' '방금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야.' '...' '그러니까 이제, 현실에서-' '됐어. 그런거면 됐어. 언제 또 만날지도 모르는데, 하필 하는 이야기가 그거래.' 나는 독수리의 말을 무시하고 옥상 난간에 팔을 걸치고 건물 아래 길을 내려다봤어.

837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1:26:29 ID : alinU2IMrzh

'...있지. 또 볼 수 있을까.' '...글쎄' '...맨날 다 아는 것 같은데, 대답은 다 안해주네.' '...' '알고는 있어? '응' 정말 의미없는 대화였지. 오랜만에 만났으면 그에 맞게 뭐라고 더 밝고, 애틋하게 시간을 보내는거였는데 말이야. 우리는 전혀 그러지 않았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가 옆에 있는걸 느꼈는걸. 항상 일상처럼 서로를 느껴왔는걸. 그래서 그랬어. '...눈 예쁘다.' '예쁘네' '...물이 왜 싫어?' '이유는 너도 잘 알잖아' '아, 그것때문이었어?' 하고 나는 고개를 돌려서 독수리가 있는 곳을 바라봤어. 그리고 그곳에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냥 눈이 내리고 있었어. 하늘에서 소복히 떨어지는 눈. 부드러운 눈. 솜털같은 하얀 눈. 그 자리에는 눈이 조금 쌓여있었어.

838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1:27:55 ID : alinU2IMrzh

그 눈을 한참 쳐다봤던 것 같아. 그리고 얼마 안지나서 난 옥상을 내려갔어. 그게 다야. 그게 다였어.

839 이름 : ◆1Ci05Xy5cII 2019/03/11 21:28:10 ID : alinU2IMrzh

그게 첫번째 만남

858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6:33:24 ID : alinU2IMrzh

내가 독수리를 두번째로 마주한건. 그 다음해 여름의 끝. 내 생일날 볼 수 있었어. 그날은 항상 아프다고 생각하던 배가 유달리 아픈 날이었어. 허리는 물론이고, 배가 찢어질듯이 아파서 회사에서도 걱정을 받았었고. 일찍이 집으로 돌아갔어. 삼촌과 숙모에게 생일 축하를 받으며 저녁을 먹기는 했지만, 그 날 내가 아팠다는 걸 알리지 않았어. 원래 자주 아팠으니까 그저 그러려니 넘겼을 뿐인거지. 조금만 더 일찍 병원에서 검진 받았다면 조금 나았으려나.

861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6:37:48 ID : alinU2IMrzh

어찌되었건 선물로 받은 케이크를 들고 난 내집으로 돌아갔어.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집은 내가 자취하는 곳이야. 그날 저녁에 케이크를 들고 집 현관을 지나서 탁자에 케잌을 올려두고, 창가에 가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창밖의 공기를 쐬고있다고 나는 입을 떼며 말을 했어. '...있지, 오늘은 꽤 괜찮은 날이었어. 항상 내 생일이 다가오면 나는 기억못해도 다른 사람들은 기억해주거든. 그래서 깜짝 놀래키듯 생일 축하도 받았고. 그리고 선물도 받았어. 오늘 저녁 엄청 맛있는거 먹었다? 너도 알잖아, 우리 삼촌. 삼촌이 저녁 사주셨어.'

862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6:42:02 ID : alinU2IMrzh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를 받았어. 나 단거 엄청 좋아하는 거 알지? 저번에도 말했잖아. 케이크는 왜인지 모르게 다른 케이크는 별로고, 생크림 케이크만 찾게 되는거 있지? 그래서 오늘 받은거 엄청 아껴먹으려고. 근데 사실.. 요새 살이 엄청 빠진거 있지. 하긴 잘 안먹기도 하지만... 왜이리 요새 살이 빠지는지 모르겠어. 게다가 배도 자주 아프고. 배가 아픈거 빼고는 정말정말 좋은 하루였어.' 그렇게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다가 나는 한참을 입을 다물었어. '...오늘도 너를 못본다는것도 제외하고 말이야.'

865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6:57:28 ID : alinU2IMrzh

'...생일 축하해' 익숙한 목소리가 내 위쪽에서 들려왔어. 난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어. 그리고 어두운 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독수리가 있었어. 날갯짓을 조용히 하며, 그렇게 어둠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어. '...와. 올해는 운이 좋네.' '그러게말이야.' '...이렇게 보는게 또 얼마만이래.' '그러게.' '...' 무미건조한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했어. 더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어. 서로 알고있었지. 이렇게 다시 마주하는 기적같은 순간이 언제 또 올까하며, 서로의 눈을 맞추고 하염없이 담아두는 것이 답인 것인마냥. 그러다 나는 다시 입을 떼었어.

866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7:08:07 ID : alinU2IMrzh

'...이렇게 마주하는것도 기준이 있는걸까.' '...글쎄. ...기적의 한 순간이겠지.' '...' '기적은 나도 알지 못하는걸' '그렇구나' 살짝이 불어온 밤의 바람이 늦여름의 향기를 불러일으켰어. 이런 늦여름의 밤은 그때로 돌아간듯하니까. 어두운 골목길에서 정답게 나눴던 순간이 아른거렸어. 언제 이렇게 나는 자란걸까. 하는 생각에 난 가슴께에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어. '...생각난다.' '그치' 우리는 그 짧은 말을 내뱉고 작게 웃음을 내뱉었어.

869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7:14:18 ID : alinU2IMrzh

그렇게 한참을 독수리는 자신의 눈에 나를 담아내고는 서서히 내려와 나와 시선을 똑같이 맞추었어. 그리고는 눈을 지그시 감아내더니 내 목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부리로 문질러댔어. '뭐야, 이거 오랜만이라 낯간지러운데' 하며 내가 살짝 웃음을 흘리며 한손으로 독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그렇게 머리를 쓰다듬는데 독수리의 몸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어. 이전에도 느꼈었던 그 떨림. 나는 움직이던 손을 멈칫하고는 가만히 서 있었어. 그러다가 양팔을 움직여서 독수리를 살짝 끌어안으며 말했어. '...괜찮아. 정말 괜찮아.' '...' '...어떤 순간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나 정말 괜찮아.'

870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7:21:20 ID : alinU2IMrzh

'아이야, 아이야.' 독수리는 고개를 박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어. '괜찮아. 다 괜찮아.' 난 알고있었어. 독수리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건 무언가 나에게 일어난다는 거겠지. 그게 무엇이든 안좋은 쪽으로. 그 일을 겪는건 온전히 나였지만, 그 슬픔과 고통을 겪을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어. 그래서 독수리를 다독이며 말했어. '괜찮아. 정말로. ...어떤 일이 닥쳐와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가 나를 사랑할 그 일은 흩어지지 않을거니까' '...너는. 너는 아이야, 넌.' 독수리는 한참을 주억거리다가, 겨우 내뱉는 울음에 찬 목소리로 말했어.

871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7:40:54 ID : alinU2IMrzh

'약속을 지키지 못해' 서서히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맞춘 독수리가 말했어. 그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털을 젖히고, 부리를 적셨어. 그 와중에도 나를 그 눈에 담아내면서. 그 지독스러운 슬픔과 좌절이 담긴 눈동자에 내 모습을 담아내고는. 독수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 그리고 순간 바람이 불더니 내 머리카락이 내 시야를 흐뜨렸어. 그리고 독수리의 모습은 사라졌어.

872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7:43:03 ID : alinU2IMrzh

그게 두번째 만남이었어. 나 이때 머릿속이 정말 엉망진창이었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대체 또 어떤 일을 겪게 되는걸까 하고. 그래서 더욱이 조심히 행동했어. 삼촌가족한테도 조심하라고 하기도 했고. 직장에서 사귄 친구한테도. 그렇게 여러사람에게 신신당부를 했어. 그런데 내 몸에 점점퍼지던 암을 예상할 수는 없었지.

873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7:44:01 ID : alinU2IMrzh

독수리는 모든걸 알고있었던거야. 모든걸. 그리고 그 해 겨울 난 시한부 판정을 받았어.

876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7:45:28 ID : alinU2IMrzh

그리고 현재. 나는 독수리를 보고있어.

883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17:51:32 ID : alinU2IMrzh

모든건 정해진 운명이었어. 이 이야기는 긴 이야기가 될 것같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나중에 보자.

892 이름 : ◆1Ci05Xy5cII 2019/03/13 22:51:11 ID : alinU2IMrzh

내가 조금 더 말솜씨가 좋았다면 좋겠다. 그랬다면 더 좋은 이야기로 더 좋은 기억으로 너희에게 남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고마워. 이런 어색한 말투의 내 이야기를 좋아해주고 기억에 머물게 해줘서. 정말 미안한데 더 부탁할 수 있을까. 나랑 이야기해줘. 뭐든 좋으니까. 더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현실에서는 그럴 용기가 없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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