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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우리 딸은 내가 자기 상상 왕자랑 결혼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오늘 그 왕자가 내게 청혼했다

작성자빛빔|작성시간26.06.23|조회수143 목록 댓글 0
엽기 혹은 진실(세상 모든 즐거움이 모이는곳)

출처 :https://cafe.daum.net/subdued20club/RaxJ/100559

레딧 괴담 번역: 우리 딸은 내가 자기 상상 왕자랑 결혼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오늘 그 왕자가 내게 청혼했다. (tistory.com)

 

 

블레이크에게 임신했다고 말하자 그는 백지수표를 주면서 “잘 처리해”라고 말했다. 블레이크는 내가 생각했던 왕자님이 아니었다. 나는 수표를 받았지만 블레이크의 의도대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텍사스의 조용한 마을로 이사와서 딸 사리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삶은 내가 꿈꾸던 동화와는 달랐다. 현실은 봐주는 법이 없다. 로맨스에는 끝이 있고 세상에는 아빠를 모르는 아이도 한다. 모든 게 다 괜찮은 것처럼 행동하긴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삶에는 흔적이 남았다.

 

그렇다 해도 행복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내 실연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사리나가 가장 중요했다. 수 년이 지났고 최선을 다해 싱글맘 생활을 해 나갔다. 돈이 다 떨어져 갔지만 어떻게든 살아갔다.

 

사리나에게는 한 번도 그 애 아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아이에게 알려주기에는 너무 가슴아픈 진실이었다. 그 잔혹한 “왕자”가 나나 사리나의 세계를 망치도록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리나를 지켜줘야 했다. 그건 내 실수였으니까. 사리나는 동화를 믿을 만한 나이였고, 그 외에 복잡한 것은 아직 알 필요가 없었다.

 

그 애가 처음으로 아빠 왕자를 언급했을 때, 나는 사리나의 머리를 말아 주는 중이었다. 사리나는 돌돌 말린 머리 모양을 “공주님 머리”라면서 대단히 좋아했고 나 역시 그 애가 기뻐해서 행복했다. 사리나의 침대에 앉아 길고 검은 머리를 헤어롤러에 감았다. 마지막 롤러까지 끝내자마자 사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니, 사리나?” 사리나가 들어갈 수 있게 이불을 젖히고는 자기 전에 읽어줄 책을 고르러 책장에 가면서 물었다. 인기 있는 책들을 손가락으로 훑고 있는데 사리나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우리 언제 아빠 왕자랑 같이 살 수 있어?” 깜짝 놀라서 그 애를 돌아보았다. 사리나에게 “아빠” 이야기라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입안이 말라붙고 눈이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누구니… 아빠 왕자라니?”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망설임이 묻어 나왔다. 사리나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갈색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당연히 우리 아빠지. 아빠 왕자는 우리랑 같이 자기 성에서 살고 싶대.” 그러면서 옷장을 가리켰다. 성 같은 난간 모양에 문에도 무늬가 새겨진 옷장이었다. 사리나의 공주님풍 방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이기도 했다. 잘 사는 동네 갓길에 버려진 걸 주워 온 물건이었다.

 

“엄마, 왜 아빠랑 같이 안 사는 거야?”

 

언젠가 사리나에게 대답해줘야 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아직은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생각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우리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문제와 대면하는 대신 화제를 바꿔버렸다.

 

“무슨 이야기 읽어 줄까?”

 

사리나의 침울한 표정은 내가 왜 그러는지 다 아는 것만 같았다. 베개로 몸을 던지더니 고집스럽게 팔짱을 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느라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

 

“알라딘은 어떠니?” 하고 물었다. 자스민 공주는 사리나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화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사리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 그냥 자러 가, 엄마. 난 아빠한테 읽어 달라고 할 거니까.”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도 내가 아닌 성 옷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딸의 거절에 마음이 아팠다. 몸을 숙여 이마에 뽀뽀를 해 주었지만 사리나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내 방으로 돌아오자 눈물이 터져 나왔고 마스카라가 베개 위로 번져나갔다. 간신히 진정하고 잠이 들려고 할 때쯤, 사리나의 웃음소리와 앞뒤가 맞지 않는 일방향 대화가 들려왔다.

 

“아빠… 왜… 성… 언제… 엄마…”

 

잠에서 깨자 사리나가 활짝 웃으면서 손을 등 뒤로 숨기고서 서 있었다. “엄마 잘 잤어?” 사리나가 굉장히 쾌활하게 말했다. 나도 잘 잤냐고 인사하면서 졸린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젖히고 사리나를 안아 주러 일어났다.

 

하지만 손에 뭔가 차갑고 축축한 것이 닿았다. 반사적으로 물러나 사리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리나가 멋쩍게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작은 보라색 꽃 한 웅큼이었다. 차가운 진흙 덩어리가 아직도 뿌리에 매달려 있었다.

 

“아빠가 주는 선물이야!” 사리나가 자랑스럽게 말하며 내게 꽃을 내밀었다. 삐죽삐죽하고 축축하고 무슨 종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사리나가 누군가의 정원에서 파온 것 같았다.

 

“우리 딸, 엄마가 일어나기 전에 어디 나갔다 왔니?” 내가 물었다.

 

“내가 아니야, 왕자님이야.” 사리나가 즉시 정정했다. “엄마 힘 내라고. 슬퍼 보여서.”

 

“그렇구나.” 그렇지 않았다. “그래, 다른 사람 정원에 들어가기 전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왕자님에게 알려 주렴. 그리고 걱정하지 않게 내게도 미리 말해 주면 좋겠구나.” 사리나가 하는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간밤에 있었던 일로 죄책감이 느껴져서 차마 그 애의 거짓말을 추궁할 수가 없었다.

 

“응!” 사리나가 즉시 대답했다. 꽃을 받아들어 살펴보니 모양이 썩 좋지 않았다. 질척거리고 가엾을 정도로 작은 꽃들이었다. 부엌 창에서 바람에 말리기로 하고, 사리나에게 씻고 오라고 했다. 우리 딸은 팔목까지 진흙 투성이였던 것이다! 사리나는 내가 와플을 만드는 동안 씻고 왔고, 아침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진흙에서 벗어난 사리나의 머리를 말아 주었다.

 

“꽃 마음에 들어?” 사리나가 내가 시럽을 뿌리는 와플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와플의 모든 사각 무늬를 시럽으로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애였다.

 

“물론이지, 우리 딸. 네가 준 선물이니 당연히 특별하지.” 꽃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딸이 보내 준 그 제스처가 고마웠다. 아이들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 줄 필요는 없으니까.

 

사리나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그럴 거랬어! 이제 아빠랑 같이 사는 거지?” 사래가 걸릴 뻔 했다. 포크를 내려 놓고 사리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언젠가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겠지, 준비가 되었든 아니든.

 

“우리 딸, 미안해. 우린 여기 살아야 해. 여기가 우리 집이잖니. 아빠한테 갈 수는 없어.”

 

“왜?” 말문이 막혔다. 다른 부모들처럼 나도 왜라는 질문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그 짧은 단어는 절망과 공포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래도 어쨌거나 최선을 다 해서 대답을 쥐어짰다.

 

“엄마가 아빠랑 결혼을 안 해서 그래.” 단순하게 정리하기로 했다. 우리 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단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사리나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그럼 아빠랑 결혼하면 되겠네.” 그 아이가 보기엔 간단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결혼하자고 한 적이 없는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우리 딸. 우리 필요한 거 여기 다 있잖니. 엄마한텐 사리나가 있고, 사리나한텐 엄마가 있잖아.”

 

“아빠가 결혼하자고 하기만 하면 돼?” 그 희망찬 시선에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 의사를 대단히 분명하게 밝혔다. 이 수 년 간 한 번도 그에게 연락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하고 답했다. 아니라고 말하는 건 너무 가혹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지금 이대로가 좋구나.”

 

“아빠가 아빠는 이미 결혼하고 싶대.” 사리나가 우겼다. “벌써 선물도 줬대.” 뱃속에서 불쾌감이 꿈틀거렸다. 그 애는 순수하게 주장하는 것뿐이겠지만, 그 상상력이 무언가 불편했다. 어린 여자애들이 자기 상상 왕자랑 엄마가 결혼하기를 꿈꾸는 게 흔한 일일까?

 

뭐, 아빠가 없는 애들은 그럴 수도 있지.

 

“우리 딸, 아빠는 프러포즈를 안 했어요.” 갑자기 지쳐버렸다. 방으로 돌아가서 이불 속에 숨고 싶었다. 더 이상 질문에 답해 줄 여력이 없었다. 조금도. 사리나도 눈치챘는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사리나가 노는 소리를 들으며 홀로 식탁에서 시럽을 닦아냈다.

 

나중에 사리나를 살펴보러 올라갔더니, 어둠 속에 서서 성 옷장에 노크를 하고 있었다 똑 똑 똑. 그러고는 반응을 기다리는 듯 멈추었다. 당연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사리나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수줍게 웃었다.

 

“낮에는 잔다고 했어.” 사리나가 설명했다. “그치만 좋은 소식을 전해주고 싶어서.” 아빠 왕자 이야기구나 하고 짐작했다.

 

“무슨 좋은 소식?”

 

사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도 옷장 문을 열심히 쳐다봐서 내 말을 듣지 못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방 불을 켜자 사리나가 깜짝 놀랐다.

 

“안 돼! 아빠는 불 싫어한단 말이야.” 사리나에게 어울려 주기로 하고 불을 다시 껐다. 하지만 사리나가 상상하는 왕자 성향이 좀 걱정이 되긴 했다. 어둠을 좋아하는 왕자라니 그게 뭐람? 하지만 사리나는 아빠가 자고 있다고 다시 설명했다. 그 나이대 애들 논리에는 도무지 반박할 수가 없다. 그냥 수긍하는 수밖에. 부모로서 논쟁할지 말지를 잘 판단해야 한다.

 

사리나는 혼자 놀게 내버려 둔 채, 부엌 식탁에 앉아 대금 계획을 짜고 가계부를 작성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생활이어서 어떻게 대금을 지불할지 전략을 잘 짜는 것이 중요했다. 늦게라도 낼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왕자님이 정말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사람이 있기만 하다면.

 

사리나는 계속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점심 먹으러 오라고 부르러 갔더니 아직도 캄캄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공주님 드레스 중 한 벌로 갈아입은 채였다. 민트색 새틴과 튤에 플라스틱 왕관, 리본 장식 지팡이까지 쥐고 있었다. 사리나의 신하들이 방 여기저기 흩어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부분 바비 인형이었지만 봉제 인형도 몇 마리 있었다. 평소라면 딱히 이상할 것 없을 장면이었지만… 커튼도 닫고 불도 끄고 저러는 걸 보니 뭔가 좀 기묘했다.

 

“우리 딸, 방이 어두운데, 불 안 켜도 정말 괜찮니?” 방 안에 빛이라고는 복도에서 비어져나오는 불빛뿐이었다. 네모난 노란 등불이 사리나의 자그만 몸 위로 흘러갔다. 사리나가 나를 노려보았다. 이 놀이에 푹 빠져 있었던 게 틀림 없었다.  

 

“불은 필요 없어,” 사리나가 말했다. “내 방에서 먹어도 돼? 아직 노는 중이란 말이야.”

 

“그래. 와서 가져가렴. 다 먹고 나서 그릇 씻어 두는 거 잊지 말고.” 평소에 사리나는 좀 더 활발한 아이였다. 온 집 안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계속 관심을 달라고 요구하곤 했다. 좀 불안하면서도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안도가 되었다. 저 놀이에 푹 빠져 있는 동안에는 딸에게 방해받지 않고 이런 저런 잡일들을 처리하고 집안도 좀 정돈해 둘 수 있을 것이다.

 

사리나가 그릇을 쥐고서 부엌으로 오더니 갑자기 멈춰섰다. 짙은 눈동자로 잠시 식탁을 노려보더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꽃은 어딨어? 엄마 마음에 든다며.”

 

“말리는 중이란다, 공주님.” 창문을 가리키면서 미소지었다. “좀 젖어 있더라고.”

 

“아.” 사리나는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에 그릇을 쥔 채로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째서인지 울고 싶어졌다. 식탁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꽃을 다시 가지러 갔다. 싱크대로 가져와서 보니 줄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꽃들을 조심스레 하나하나 떼어내서 들러붙은 진흙 덩어리를 씻어냈다.

 

갑자기 짤랑 하는 금속음이 들렸다. 무언가 진흙 속에서 싱크대로 떨어졌다… 반지? 진흙 투성이에 변색된 반지였다. 반지를 집어 흐르는 물에 씻었다. 보석은 어딘가로 사라졌고 섬세하게 세공된 테는 살짝 휘어 있었다. 조금만 손보면 훨씬 아름다워질 것 같았다.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값비싼 것인지 어떤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에겐 중요한 물건일 것 같았다. 나중에 주인을 찾아 줄 생각으로 잃어버리지 않게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꼈다. 불현듯 아침 식사 중에 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꼭 프러포즈 받은 것 같네.” 그 우연의 일치에 웃음이 배어나왔다. 물론 사리나가 뿌리에 반지가 얽힌 꽃들을 가져왔을 것이다. 꽃은 식탁 꽃병에 꽂아 두었다. 장식품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몰골이었다. 물은 주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축축했으니까. 아무래도 사리나의 왕자님은 늪지에 사는 모양이었다.

 

사리나는 저녁때까지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집은 말끔해졌고 잡일도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사리나를 부르러 가니 방문은 닫혀 있었고 불도 꺼진 상태였다.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 보니 사리나가 성 모양 옷장에 서 있었다. 양쪽 문을 활짝 열고서 사리나는 몸을 기울여 옷장 안을 엿보고 있었다.

 

불을 켜자 사리나가 나를 노려보았다. “불 꺼, 엄마!” 하지만 불을 끄지 않았다. 사리나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서 저녁 먹게 씻으렴. 지금 당장.” 사리나가 움직이지 않자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사리나가 팔짱을 꼈다. “둘…” 사리나가 발을 쿵쿵거리더니, 셋을 세기도 전에 쏜살같이 뛰어나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옷장 문이 열린 채여서 문을 닫으러 다가갔다. 축축한 카펫이 슬리퍼 바닥에 들러붙으면서 걸을 때마다 철벅철벅 소리가 났다. 옷장에 가까이 다가서니 무언가가 보였다. 왕관 같은 금발에 물망초같은 눈을 한 창백한 얼굴이었다.

 

“블레이크?”

 

하지만 내 전남친이 우리 딸 옷장에 웅크리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리나의 공주 드레스들과 플라스틱 보석밖에. 그 얼굴은 발견하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내 가슴에 희미한 통증만을 남기고서. 옷장 문을 닫고 오랫동안 조용히 서 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저녁 식사를 그릇으로 덜었다. 어떻게 부엌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사리나는 포크로 국수를 이리저리 찔러대기만 할 뿐 먹지는 않았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일부가 어딘가로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엄마?” 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드니 사리나의 웃는 표정이 보였다. 화가 다 풀렸구나 하고 안심하면서 나도 미소를 지어주었다.

 

“왜 그러니, 우리 딸?”

 

“그 반지 끼고 있네.” 손을 내려다 보고서야 오른손에 끼고 있던 그 애처로운 물체가 생각이 났다.

 

“아, 그냥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낀 거야.” 내가 답했다. “주인을 찾아줘야 하는데 그 전에 잃어버리면 안 되잖니.”

 

사리나가 키득거렸다. “엄마가 주인이잖아, 무슨 소리야!”

 

“그냥 잠깐 보관하고 있는 것뿐이야.” 사리나의 검은 머리를 헝클어주려고 손을 뻗었다. 축축히 젖어 있는 머리에 멈칫했다.

 

“머리는 어쩌다 젖었니?” 내가 물었다. 사리나는 의자 위에서 몸을 쪼그리고선 다시 음식을 이리저리 휘젓기 시작했다. “카펫도 다 젖어 있던데.” 조용히,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딸은 계속 고개를 숙인 채였다.

 

“왜 그런지 알려주련?” 사리나는 그릇을 밀어내더니 식탁에서 일어나 달려나갔다. 잠시 후 방 문을 쾅 닫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팔에 파묻고서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거의 손도 대지 않은 밥그릇을 가져가 설거지를 했다. 부엌 정돈을 마치고서 사리나의 젖은 카펫을 닦으려고 싱크대 밑에서 다 해진 수건을 꺼냈다.

 

방 문은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서 열었더니 사리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볼까지 끌어올려 놓고 있었다. 불은 꺼져 있었고 옷장 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눈을 꽉 감은 딸은 분명 뭔가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자는 체 하느라 사리나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생겼다.

 

“자기 전에 동화책 안 읽어줘도 되니?” 바닥에 수건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불그스름한 갈색 얼룩이 수건에 퍼져나갔다. 시커먼 녹 같았다. 냄새도 고약했다. 곰팡이에 썩어가는 악취가 났다. “… 내일 카펫 세탁기를 빌려야겠다. 앞으로는 진흙 매달고 오지 말려무나. 씻기가 힘들어요.” 최선을 다해 화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 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엉망이 된 방을 카펫용 세제와 점점 더 더러워지는 수건으로 최대한 닦아냈다. 카펫에 진흙이 좀 묻었다고 해서 폭발해 버리면 안 되는데, 바로 옆에 잠든 딸을 두고 이러고 있자니… 나약해졌다. 왜 이렇게 만사가 어려운지. 전부 너무 힘들었다. 난 나쁜 엄마였다. 나약하고 엉터리고 혼자였다. 전부 괜찮은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엄마.” 사리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랐다. “엄마가 행복했음 좋겠어. 늘 슬퍼 보이는걸.” 고개를 들었다. 사리나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내 뒤 쪽, 옷장을 바라보면서. 옷장은 여전히 열려 있었지만, 우리 쪽을 엿보는 전남친 유령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엄마도 알지, 우리 딸. 미안해. 엄마도 애쓰고 있단다.”

 

“엄마, 반지 그 손에 끼는 거 아니야.” 사리나가 베개 위로 다시 털썩 누워 담요를 코까지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사리나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일어나서 사리나의 이마에 뽀뽀했다.

 

“잘 자렴.” 목이 조여왔지만 사리나의 방에서 무너져 내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좀 쉬어야 했다. 그냥 지쳐서 그런 것 뿐일 것이다. 옷장 문을 닫으려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문이 닫히지 않았다.

 

“그냥 열어 놔. 아빠 왕자는 나 자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해.”

 

반박하기도 지쳤기에 그대로 두고 나가서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진흙 악취가 떨어지질 않았다. 제일 향이 강한 비누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샤워를 끝내고 깨끗한 수건 한 장만 걸치고서 사리나의 방을 지나쳐 내 방으로 가던 찰나였다. 잠깐 사리나 방을 들여다 보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가 보였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옷장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사리나의 작은 손이 그것에 닿은 순간, 굉음과 함께 사리나가 옷장으로 순식간에 끌려들어갔다.

 

“사리나!”

 

방으로 뛰어들었지만 옷장 문이 닫혀 버렸다. 손잡이를 붙잡자 쥐죽은 듯한 침묵에 소름이 끼쳤다. 딸의 대답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리나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간신히 옷장 문을 열어 엿보았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사리나의 공주옷들 마저 사라져 버렸다.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노를 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빌어 보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 좁은 공간 안을 기어다니고 그 안에서 문을 닫아 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딸 옷장 속에 살던 왕자가 그 애를 훔쳐가 버렸다. 잠을 자는 대신 젖은 카펫 위에 몸을 말고서 무슨 일이라도 터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고… 이 이야기를 쓰러 앉았다. 우리가 실종된 걸 곧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뭔가 말 못할 짓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반지를 잘못된 손에 끼고 있었다. 사리나가 왕자에게 잡혀 가기 전 그렇게 말했다. 왕자가 내 대답을 기다리느라 조바심이 난 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내게 청혼하지 않았는가. 우린 그의 성에서 다 같이 살 것이다. 사리나가 성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사리나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 노래를 들으니 모든 의심이 사라진다.

 

그 피부 뼈처럼 희고

그 입술 피처럼 붉고

막대 그리고 진흙

왕좌 위에 앉지

 

아빠 왕자는 엄마를 사랑해

아빠 왕자는 나를 사랑해

…나도 엄마를 사랑할 거야

우리 가족이 되는 거야

​ 

 

우리를 찾지 말기를.

 

굳이 찾고 싶다면… 옷장을 살펴봐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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