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독설(毒舌)
욥기 8장 1절 ~ 8장 22절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찌기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엘리바스에 이어 빌닷이 나서서 욥을 공박하고 있습니다. 욥이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은 그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고통 속에 빠진 욥에게 그의 말은 또 다른 비수가 될 뿐이었습니다. 욥이 겪고 있는 이 고난은 죄의 결과라기보다는 사단의 제안에 하나님의 결심으로 이루어진 허락된 범위 안에서의 고난(욥기 1, 2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현장에서 가족으로부터, 종들로부터, 모든 지인(知人)들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있는 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교훈적인 충고보다는 고통의 나눔과 따뜻한 동지적 연대(連帶)였습니다.
위로자의 목소리(4-6절)
참 답답한 일입니다. 자녀를 잃고 깊은 시름에 빠져 있으며, 아내도 그를 버렸고, 거기에다가 몸은 병들어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사람에게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4절)’라고 공박하는 말이라니요.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와 크게 달랐습니다. 창녀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던 한 여인이 다시 길거리로 끌려나와 많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을 때 하신 말씀은 오늘 다시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진정한 위로는 아픔을 함께하는 것이요, 고통을 내 것으로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악담을 해라, 악담을…(11-15절)
엘리바스에 이어지는 빌닷의 말은 그의 의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義)의 절대적 기준은 곧 자기의 의가 되어 선한 방향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연약할 대로 연약해져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비수가 되어 칼춤을 추고 있습니다. 실제로 도움이 되기보다는 더욱 깊이 상처를 새기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의(義)라 생각되어 잣대로 삼기도 하지만 어느새 그 잣대는 자기의 의(義)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도 노를 발하셨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 아니겠습니까? 자신도 지지 못할 짐을 약한 이에게 지우는 자들, 빌닷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또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삶 속으로
1.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같이 가자고 하고 있지는 않나요?
2. 비록 지금 힘들지만 내가 가진 소망은 무엇인가요?
욥기 8장 1절 ~ 8장 22절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찌기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엘리바스에 이어 빌닷이 나서서 욥을 공박하고 있습니다. 욥이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은 그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고통 속에 빠진 욥에게 그의 말은 또 다른 비수가 될 뿐이었습니다. 욥이 겪고 있는 이 고난은 죄의 결과라기보다는 사단의 제안에 하나님의 결심으로 이루어진 허락된 범위 안에서의 고난(욥기 1, 2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현장에서 가족으로부터, 종들로부터, 모든 지인(知人)들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있는 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교훈적인 충고보다는 고통의 나눔과 따뜻한 동지적 연대(連帶)였습니다.
위로자의 목소리(4-6절)
참 답답한 일입니다. 자녀를 잃고 깊은 시름에 빠져 있으며, 아내도 그를 버렸고, 거기에다가 몸은 병들어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사람에게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4절)’라고 공박하는 말이라니요.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와 크게 달랐습니다. 창녀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던 한 여인이 다시 길거리로 끌려나와 많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을 때 하신 말씀은 오늘 다시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진정한 위로는 아픔을 함께하는 것이요, 고통을 내 것으로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악담을 해라, 악담을…(11-15절)
엘리바스에 이어지는 빌닷의 말은 그의 의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義)의 절대적 기준은 곧 자기의 의가 되어 선한 방향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연약할 대로 연약해져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비수가 되어 칼춤을 추고 있습니다. 실제로 도움이 되기보다는 더욱 깊이 상처를 새기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의(義)라 생각되어 잣대로 삼기도 하지만 어느새 그 잣대는 자기의 의(義)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도 노를 발하셨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 아니겠습니까? 자신도 지지 못할 짐을 약한 이에게 지우는 자들, 빌닷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또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삶 속으로
1.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같이 가자고 하고 있지는 않나요?
2. 비록 지금 힘들지만 내가 가진 소망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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