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눈/강미영-
12월 첫날 한 바가지의 눈을 먹는다 온 몸에 담을 수 없는 눈을 담는다 하루 종일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눈이 나를 쫓아와서 자꾸 밟는다 그날 밤 몸에 불을 껐다 하이얀 어둠이다 눈 때문
에 어둠을 만난다 눈이 나를 가지고 달아난다 온몸이 하얗게 그을린다 몸속의 눈들이 불씨되어
타오르다가 동동 발 구르고 소리 지른다 진흙탕에 쳐 박혀서 깔깔거린다 두 무릎 사이로 눈이 녹
으면서 나를 깔아뭉갠다 휘휘 젖는다 구정물 속에 허우적거린다 체온이 오르면서 모든 뼈마디
가 삭는다 몸 속 눈이 녹아 흘러내린다 녹아내린 물을 단숨에 나는 마신다
<2>-프롤로그/강미영-
꽃잎들이 저마다 어딘가로 떠난다 여러 갈래 바람으로 멀어져 간다 비늘처럼 눈만 희뜩이는 벚
꽃도 연분홍 저고리로 웃어댄다 낭창낭창 휜 목련가지 뿌리치고 봄이 간다 봄밤이 흰 속치마 뒤
집어쓰고 간다 속치마 속으로 연초록 다리가 굵어진다 구두에 밟히는 꽃잎이 없다 봄이 간다 봄
날이 간다
<3>-시계/강미영-
새벽 세시가 되면 시계 소리는 나를 끌고 간다
나는 그를 따라 나간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매달려서 잠을 잔다
쭉 찢은 불면 속에서
나는 남루한 노예가 되기도 하고
우아한 귀족이 되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나는
너무 바늘 끝처럼 예민하다고 한다
시계추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귀머거리로 피아노협주곡을 만들었다지만
나는 소리 때문에 하얀 백지 위에 춤을 추기로 한다
한밤중에 홀로 깨어 있으면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서 검은 반음으로
내 머리 속에 발자국을 남긴다
때로는 달이 제 몸을 깎듯이
소리들은 내 머릿속의 커다란 집을 허문다
관객 없는 춤을 관람하기 위해서
그 가슴속에 전류를 끈다
잠깐, 소리들이 비틀거린다
지금은 어둠이다
붉은 눈이 춤을 추며 간다
<4>-2월 렌즈/강미영-
국립대학 휴게실 유리창 밖
텅 빈 겨울이
호수 바닥으로 녹아 내리고 있다
기나긴 팽창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무렵
어슴푸레한 웅덩이 속에
봄 햇살의 헛발질이 시작된다
덧니 난 듯,
호수 주변의 원색 쓰레기통이
뽑지 않은 사랑니로 욱신거린다
겨울이 어깨를 반쯤 내리면서
씁쓸한 액을 게워내다 보니
곰삭은 날이 없다
창가에 서서
하늘과 호수 사이 깊숙한 오후를 마신다
회색 하늘은
동전으로 달아올랐던
종이컵의 체온을 구겨버리고
바람은 옷깃을 세우며
나뭇가지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온 몸에 한기를 느끼는 교정 한켠
이곳은 공사 중,
덜그럭 지나는 커다란 공사차량
오래된 겨울을
어둠 속으로 자꾸만 쏟아내고 있다
<<강미영 시인 약력>>
*서울에서 출생.
*2004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시와 세계』 편집장 역임.
*시집 『Y는 느티나무』(시와세계,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