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끈질기게 웅크린/한성희-
물길 끊겨 뱃가죽 훤히 드러난 동강의 자갈 바닥
씨암탉만 한 돌멩이 하나가 막 산란하고 있다
휘어진 등으로 무수히 내리꽂히는 햇살을 받아내는
반질반질한 등어리, 슬며시 들춰본다
구석으로 몰린 물구덩이에서 파닥거리는
여남은 마리 물고기와 개구리들
단단한 돌멩이 하나가 날개와 지느러미를 접고
뙤약볕 아래서 강을 품고 있다
수천 길 직립의 절벽에서 떨어져 나와
수만 갈래의 물길에 몸 뒤집다가
거친 물살에 몸 낮추고
강바닥이 훤해지기를 기다렸다니
제 체온으로 강의 명줄을 잇고 있다니
마른 강바닥에 끈질기게 웅크린 돌을
함부로 들춰볼 일, 아니다
둥근 등이 단호하게 땡볕을 튕겨내고 있다
<2>-플러그/한성희-
검은 전선 플러그를 콘크리트 벽에 꽂은 뒤에야 겨우 숨 쉬는 노인을 알고 있다는 사실, 벽에게서
듣는다
여름휴가 떠나기 전 집안을 살피다가 거실 벽에 두 눈 박고 있는 티브이 플러그를 발견한다
종일 수인(囚人) 곁에서 웅웅거리며 바깥세상 얘기를 들려주고 한 번도 날 선 시선 던지지 않는
낡은 티브이, 검버섯 손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넘기는 검은 줄을 생각하면 쉽사리 저 명줄을 뽑는
일, 아니다
플러그를 뽑는다는 것은 탯줄을 잘라내는 불충(不忠)한 짓 당신 이름 석 자도 놓쳐 버린 엄니의
당산나무 뿌리를 끊어내는 일
엄니는 내 몸 어딘가에 들숨 날숨의 구멍을 뚫어놓고 시리게 꺾이는 뼈마디 소리 흘러들어 가는
플러그를 악착같이 붙들고 있는 것이다
난, 플러그 가는 뿌리 끝을 붙잡고 다시 한 번, 벽 쪽으로 힘껏 밀어본다 핑, 강한 전류가 심장을
관통한다
<3>-뜬 숟가락/한성희-
노인복지요양원 휠체어에 웅크린
오래된 자물통 입이
숟가락을 뻘쭘하게 쳐다보고 있다
반쯤 벌어진 입술 속으로
애써 숟가락을 들이미는 사람
의자에 앉은 또 한 사람은
막무가내 허방을 뱉어내고 있다
무슨 말인가 열심히 씹어서
입안에 가득 넣어 주고는
미음 그릇 곁에서 흔들리는 저물녘
저 검은 입속으로
더 떠 넣을 수 있는 것이
도무지 없을 것 같아
단호한 입가를 맴도는
허공의 숟가락질
어떤 허기가,
지금까지 먹인 밥보다 강건한 것일까
기울어진 햇살만으로도
이승의 한 끼를 때울 수 있다니
허공에 뜬 숟가락
<4>-할복장(割腹場)*/한성희-
칼바람이 빙판 개울을 긁으며 들어선다
칼끝에 부딪힌 햇살 한줄기 튕겨 나가며
통통한 물고기 배를 스윽 지난다
한 번의 칼질에 와르르 쏟아지는 겨울 바다
핏빛 파도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출렁거린다
더운 입김 훅훅 뿜어대는 방수복차림의 인부들
코를 틀어막은 채
가끔 창자를 새들에게 던진다
처절한 생존의 시그널을 알리는 듯
갈매기 떼 끼룩거리며
생득(生得)의 조문에 열중한다
피 묻은 얼음판 부리로 쪼아
종일 핏물이 물길을 트는 할복장
쉽게 도려낼 수 없는
뱃속의 울음을 송두리째 꺼내 놓고서야
그해 겨울이 빠져나가는데
바다의 뱃가죽을 들쑤시며 터뜨리는 창고 지붕에
눈 매서운 갈매기 한 마리 외다리로 서 있다
* 물고기의 배를 따는 곳
<5>-안식각*/한성희-
검은 상자에 주먹이 잡힌 건장한 사내들
몸을 앞으로 쏟으며 상자의 수평을 잡는다
붉은 천이 덮인 한 생, 흰 장갑을 붙들고서야
버스의 짐칸에 실려 떠난다
콘크리트 언덕을 내려가는 장례행렬 뒤로
리어카의 바닥을 질질 끌며 한 노인이
비탈진 길을 엎어지듯 껴안고 굴러간다
경사진 땅에서 몸의 중심을 잡아 보지만
척추를 세우지 못하고 기울어진다
아침이면 재개발현장 굴착기 관절을 꺾어 땅거죽을 낮추고
밤이 되면 덤프트럭들 개미처럼 흙덩이를 퍼올리고
품고 있는 도시의 각을 낮추려는 저 몸짓들
각이 기울수록 생은 찌그러지고 비틀리며 흩어진다
누구일까?
시간의 날카로운 각에 찔리면서
칠성판으로 수평을 잡은 사람
삶의 안식각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듯
두 다리 곧게 뻗을 것이다
담벼락을 낮은 포복으로 오르는 담쟁이덩굴
각을 세운 벼랑에서 자세가 곧다
* 흙이나 모래 따위를 쌓아 올릴 때 안정을 이루는 경사각
<<한성희 시인 약력>>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졸업.
*2009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 『푸른숲우체국장』(현대시학, 2015).
*현재 『포엠포엠』 작가회 회장, 문학마루 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