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가벼운 소멸을 위하여/박현솔-
횡단보도 앞, 남자가 신호등 앞에 서 있다. 깡마른 몸의 지퍼를 열고 튕겨나올 것 같은 뼈들. 뼈
마디와 마디 사이로 개울물이 흐른다. 검은 송사리떼가 물주름을 물고 간다. 남자의 몸에서 세포
분열을 하는 종양 덩어리들. 점점이 박힌 그것들이
개울가의 징검다리 같다. 때로 물이 불어 생의 너머로 건너갈 수 없는 날도 많았겠지. 그런 날
엔 수술 동의서 앞에서 만지작거리던 도장을 물 위에 무수히 찍어 보냈겠지. 신호등이
푸른색이다. 등줄기를 따라 갈기를 휘날리며 솟구치는 현기증. 남자가 휘청거린다. 직립해 있
던 뼈들이 함께 휘청인다. 넘어진 그림자가 스프링처럼 일어서고, 정지된 시간 속으로 나뭇잎들
흘러간다. 건너편
신호등은 두터운 여백을 숨기고 있다. 경계의 이쪽과 저쪽 사이, 흐름과 멈춤 사이, 핏물이 번
진 혀를 내밀고 서 있는 신호등. 그가 횡단보도의 주름을 지우며 걸어간다. 휘청휘청 출구 없는
여백 속으로 그가, 서서히 잠긴다.
<2>-호텔 캘리포니아/박현솔-
오랜 습관처럼 발밑에 누운 잔디를 쓸어본다. 손바닥이 지나간 자리마다 물빛이 번진다. 잊혀
진 기억 속의 문장들을 내 손바닥이 읽는다. 손바닥 사이로 길이 갈라지고, 지문이 물결쳐간 곳
에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성곽이 있다.
한때 사람들은 태양을 건져 올리기 위해 낚싯대를 썼다. 해변의 끝까지 파도를 밀고 온 것은 이
국의 태양이 아니었다. 섬마을의 비릿한 바람이었다. 갈매기들 멀리 북반구로 날아간 뒤 커다란
빗장이 질러진 곳, 고풍스런 샹들리에, 금제 나이프, 포크들이 정지된 시간 속에 잠들어버린 곳,
검은 장막이 풍경을 닫아버린 곳, 가끔은 거센 파도가 이는 수평선처럼 느슨해지기도 하는 호텔
캘리포니아. 꿈을 잃어버린 밤이 오래 이어졌다. 바닷바람은 몸을 조금씩 베어 물고, 헐거워진
뼈마디에서 녹슨 시간이 떨어져나가는 소리 들린다. 별들도 잠든 밤이면 샹들리에 불빛이 밤하
늘을 환히 비추고, 나비넥타이를 맨 귀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왈츠를 추는 호텔 캘리포
니아.
거대한 성곽이 무너지고 퇴화된 그 자리를 바람이 쓸고 있다. 기억 속으로 날려 보낸 풍장의 내
력을, 잊혀지지 않는 호텔 캘리포니아 전설을.
<3>-꿈, 아틀라스의 하늘/박현솔-
여전히 우주는 내 몸을 짓누르고 있다
아니, 내 몸이 우주를 떠받치고 있다
선 채로 잠이 들고 또 그렇게 잠에서 깨어나면
꿈을 마저 짊어지지 못한
한쪽 어깨가 욱신거리며 아파 온다
언제인가부터 끝이 뾰족해진 신경의 뿌리들이
내 몸을 찌르기 시작한다
불안할 때마다 입 속에 털어 넣는 알약들
프록틴, 끝이 날카로워져 가는 신경에 저항하며
나는 오래 버텨왔다, 밤마다 쏘아 올린 것들은
하늘 끝에서 별이 된다, 나를 구원하는 별들
나무의 뿌리가 물줄기 쪽으로 길을 내듯
납작 눌린 내 신경의 뿌리들도 회복되어야 한다
먹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꿈의 별들이
틈새 사이로 제 속을 보이기 시작한다
솔기 밖으로 삐쳐 나온 실밥들을 보고 있다
까맣게 죽어버린 신경의 뿌리들을 뽑아낸다
<4>-안개의 발바닥은 왜 검은가/박현솔-
강가에 어스름이 밀려올 무렵
사람들이 흘려보낸 물소리가 안개가 되어 흐르네
그 안개 속, 도시의 잊혀진 이야기가
물비늘로 밀려와 강기슭에 쌓여가네
검은 근육질의 강 속에 토사물이 함께 흐르고
낡은 슬리퍼 한 짝을 삼켰다가 뱉으며
도시의 검은 부유물들을 울컥울컥 토해놓는 강물과
그것들을 가만히 감싸안는 안개가 물의 유목을 몰고
강의 하류쪽으로 흘러가네
긴 도시의 강을 업고 온 안개의 발바닥이 너덜거리고
미세한 혈관들이 터져 얽혀 있던 길들이 쏟아지네
안개의 발 밑 평온해 보이는 강물 속에
먼 곳에서 흘러든 부음들이 하나 둘 젖은 몸을 뒤척이고
사람들의 검은 울음이 불씨를 숨긴 채 꺼져가네
나는 안개에 떠밀려온 깊은 물소리를 듣고 있네
오래 전 강가를 떠돌던 사람들에게
물소리 외피를 벗겨 물결의 안부를 띄우네
누군가 던져 넣은 슬픔 속으로
안개의 발이 빠지는 것을 보았네
안개의 검은 발바닥을 보았네
<5>-뱀이 지나간 자리/박현솔-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앉히고 불을 켠다. 컴컴한 불구멍에서 파란 불꽃이 치솟는다. 내 안,
구석진 곳에 숨어있던 뱀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기어 나온다. 불꽃이 냄비에 얼굴을 부비는 동
안, 징그러운 몸뚱이를 말아 올린 뱀이 내 안에서 똬리를 푼다.
냄비 뚜껑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냄비 뚜껑 사이로 벌건 국물이 베어 나온다. 느리게 몸 속을
유영하던 뱀이 빠른 속도로 몸을 뒤틀기 시작한다. 냄비 뚜껑이 들썩임을 멈추지 않는다. 내 청
춘은 달궈진 양은냄비 같은 것이었다. 끌어 오르는 순간 넘쳐버리는, 넘친 국물이 내 안의 바닥
을 얼룩지게 하던,
가스레인지 바닥에 벌건 흉터를 만들고서야 불꽃을 줄인다. 파란 불꽃이 냄비의 아랫도리를 은
근하게 쓸어준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나는 늘 적당한 불꽃을 맞추지 못했다. 아직 뜨거운 냄
비 속에서 뱀이 제 꽃잎들을 뭉개고 있다. 꽃잎들이 소리 없이 짓이겨진다. 내 몸을 달구던 마지
막 불을 끈다. 불꽃이 냄비를 잊고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힘이 다한 뱀이 바닥에 드러눕는다. 내
안 오래 뜸들인 어둠 속으로 뱀이 사라져간다.
<<박현솔 시인 약력>>
*1971년 제주에서 출생.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아주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2001년 《현대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달의 영토』(문학사상사, 2006).
*2005년 한국문예진흥기금 수혜.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이며 아주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