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구구/고영민-
비둘기가 울 때마다 비둘기가 생겨난다
비둘기는 아주 오래된 동네
텅 빈 동네
학교를 빠져나와 공중화장실에서
긴 복대를 풀어놓고
숨죽인 채 쌍둥이 사내애를 낳고 있는
여고생
빈 유모차를 밀며 공중화장실 옆을 지나는
할머니 머리 위
비둘기는 비둘기를 참을 수 없다
밀려오는 요의(尿意)처럼
누군가는 비둘기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비둘기가 비둘기에게 물을 붓는다
비둘기는 꺼질 리가 없다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비둘기가 연신
비둘기를 뱉어낸다
<2>-개가 사라진 쪽/고영민-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불붙은 개는 저쪽에서 달려올 테지
댓잎이 나오는 지금쯤
어린 장어는 강에 오르고
열세 명이나 들어가던 늙은 팽나무엔 연초록 새잎이 돋고
발목에 가락지를 채워 보낸 새는
다시 돌아오고
누가 개에게 불을 붙였나
달려도 달려도 불은 떨어지지 않고 개는
무작정 또, 달리고
나는 언제부터 지루해졌을까
차량정비소로 뛰어든 개는
결국 건물 한 동을 홀라당 다 태울 텐데
그사이 봄은 여름에게 저녁은
밤에게 몸을 내어주고
개가 전속력으로
개로부터 빠져나가는 저녁
아무리 도망쳐도 너를 위한 몸은 없다고
모든 그림자는 가장 길게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데
나는 우두커니
개가 사라진 쪽을
<3>-라일락 그녀/고영민-
멍이 잘 드는 여자가
슬쩍 부딪쳐도 쉬이 멍이 드는 여
자가,
술 취하면 혀 고부라진 소리로
베사메 무초를 잘 부르던 여자가
겨드랑이에선 늘 리라꽃 향기가 나는 여자가
가끔 아들한테도 얻어터지는 여자가
눈두덩, 팔, 다리 이곳저곳 멍이
든 여자가
온종일 누워 얼굴에 계란을 굴
리는 여자가
부부싸움을 하고 홧김에 불을 지른 여자가
거실에 수북이 옷가지를 쌓
아놓고 너 죽고 나
죽자고 불을 붙인 여자가 연기가 치솟자 덜
컥 겁이 나 집밖으로 쫓겨나
온 여자가
축대 위 맨발로 서서 제 집이 활활 타
는 것을 동동, 울면서 쳐다보
고 있는 여자가
<4>-구더기/고영민-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혼신의 힘으로 부엌 쪽 창문을 향해
기어갔다
사람들은 얼마 전부터
그녀의 집 창문을 통해 자꾸만
1층 주차장에 구더기가
떨어진다고 했다
<<고영민 시인 약력>>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악어』『공손한 손』『사슴공원에서』『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