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열차통학] ♡문태성 감동 논픽션《구리아들》연재 - 3♡

작성자榮鹿 문태성|작성시간24.01.23|조회수25 목록 댓글 0

[추억의 열차통학]

♡문태성 감동 논픽션《구리아들》연재 - 3♡

 

강원도 산골 마을은 늦게 깨이기도 했겠지만, 자녀들도 많고 생활이 넉넉한 집이 드물었으므로 중학교에 진학한 제아의 친구들이 많지 못했다. 30여 리 떨어진 읍내의 중학교는 열차통학과 자취를 하였다.

 

이른 아침 새터 마을에서 거의 한 마장쯤 떨어진 연당역까지 가는 길은 두 갈래다. 보통 때는 신작로로 다니지만, 시간이 빠듯하면 산모퉁이로 난 철길 위를 걸어간다. 기차가 온다는 신호기가 내려져 있는 것이 보이면 뛰어야 한다. 통학차는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물차의 맨 뒤에 객차 하나를 매단 것으로 제천에서 출발하여 송학-입석-쌍용-연당을 거쳐 영월로 간다.

 

학생들은 객차를 ‘사람차’라고 부르고, 바로 앞의 빨간차는 ‘차장칸’이라고 불렀는데, 객차는 고등학생·중 3·여학생이 주로 타고, 중 1·2년생은 차장칸이나 화물칸에 태워지기가 일쑤였다. 열차는 터널 둘과 청령포, 동강 철교를 지나 영월까지 10여분 걸리지만, 역에서 학교까지는 또 한 참을 걸어야 했다. 읍내까지는 버스가 다니지만 차비가 비싸므로 한 달에 460원 하는 기차를 탄다.

 

집안이 좀 나은 아이들은 쌀 댓 말 정도에 하숙을 하고, 친척집에 얹혀 신세를 지기도 한다. 자취를 하는 학생도 있었는데 그럴만한 형편이 안 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열차통학을 했었다. 그 때의 월세 자취방은 한 달에 1천원, 쌀 한말은 7백원 정도로 기억된다.

 

열차를 놓치면 지각은 물론이고, 그냥 결석을 하거나 ‘땡 까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미 열차가 홈에서 출발했더라도, 역무원의 제지를 무릅쓰고라도 뛰어가 열차에 매달려야 했다. 중학생이 달리는 열차를 타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럴 땐 선배들이 손을 잡아 주거나, 마음씨 좋은 기관사는 기차를 천천히 운전해 도와주는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 시간이 남으면 영월역 앞마당이나 찐빵집, 만화가게에서 시간을 때운다. 공부를 잘 할 풍토도 까닭도 없었다. 어쩌다 열차를 놓치는 날에는 할 수 없이 하루를 자야 한다. 부랑인들이 많았던 대합실보다는 친구집 신세를 져야 했다.

 

어떤 때는 역구내에 정차해 있는 석탄차의 차장칸에 숨어 타다 차장에게 들키기도 하지만, 차장은 오히려 내릴 걱정을 해준다. 다행히 연당역에서 기차끼리 교행으로 설 때도 있지만, 무정차 통과할 때에는 가파른 고갯길인 돌고개에서 기차가 서행할 때 뛰어 내려야 한다.

 

물론 다치는 때도 있지만, 차장은 잘 내리라고 도와주는 편이었다. 토요일은 학교가 일찍 파하면 친구들과 철길을 따라서 걸어서 집으로 오는 때가 많았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의 긴 철교를 건너 터널까지 빠지면 남면 광천리다.

 

이어진 각한재의 칠공구 터널은 7백 미터가 넘는데다 S자 형이어서 터널에 들어가면 눈 뜬 장님이었다. 기차가 한 대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들어가지만, 터널 안에서 기차를 만나기도 한다. 대피소를 못 찾은 친구들은 엎드려야 한다. 교복이 까맣게 되고 얼굴이 엉망이지만 그래도 그런 게 좋았던 때였다. 통학반장은 중 3 형들이 맡았는데 열차에서 미리 뛰어내리거나, 먼저 타는 후배들이 있는 날은 모두가 '줄빳다'를 맞아야 했다.

 

사용기간이 지난 ‘패스(PASS)’를 눈감아 주던 개찰원, 학생들을 내 자식처럼 돌봐 주던 기관사와 차장, 하룻밤을 기꺼이 재워 주던 친구의 부모, 기차 시간에 맞게 청소하지 말고 먼저 통학생은 가라던 선생님, 달리는 차에 손을 내밀어 잡아 주던 선배 이런 분들이 그립다.

 

그 분들은 모두 마음이 푸근한 인간미 넘치던 분들이었다. 지금 같이 각박한 세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보살펴 주고 밀어주고 도움 주는 미덕이 필요하다. 인구가 급감하고 곳곳마다 중학교가 들어선 지금, 한적하기만 한 고향역의 40여 년 전 활기차고 정겹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자취 제아는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연당에서 영월까지 열차 통학을 접고 읍내에서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하였다. 중 2학년이지만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숯불 다리미질도 하였다.

 

당시에는 책상이 귀하던 때여서 밥상이 곧 책상이었다. 담장 너머에 있는 집안의 뒤뜰에 책상 하나가 비를 맞고 있었다. 그 집 안주인에게 빌리러 갔더니 기꺼이 빌려주셨다. 나중에 안 일인데 그 책상 주인은 지역에서 총선에도 출마한 적이 있는 중앙대 정외과 출신 원성희씨(전 대한중석 사장)였다. 겨울에는 불을 안 때고 지내야 하는 때가 있었다. 아마 고1말쯤이다.

 

아버지께서 어렵게 보내준 연탄 값을 대학생에게 과외공부를 위해 불을 안 때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과외선생님은 반두한 형(당시 건국대 학생)이었는데 친구들과 새벽 5시에 모여 영·수 공부를 배웠다. 추운 겨울을 나는 방법은 비닐을 뒤집어쓰고 공부하고, 잠잘 대는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었다.

 

추우니 잠도 안 와서 공부도 잘 되거니와 의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밥은 곤로불에 해 먹고 학교에 갔다가 저녁에 오면 다시 공부하다 자고, 새벽에 공부를 배우러 갔다. 그 때 형에게 배운 친구들은 다 잘 되었다. 주국영(이학박사, 춘천교대 교수), 김홍규(증권사 이사), 이기수(국민일보 기자, 전 한국과학기자협회장), 김성희(한국전자통신연구소 연구원), 김양수(공학박사, 건설교통부) 등 학동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공한 친구들이다.

 

제아는 읍내에서의 자취기간 5년 동안 연탄가스 중독으로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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