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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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튜닝 김두영(카페지기) 작성시간10.01.24 그보다 더 큰 실수는 그당시 우리가 일본에게 먹혔다는 것이겠죠.
힘이 없었으니 내 나라 내 궁궐에 낭인들이 난입해서 시해를 하게 만든 것입니다.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친중파로 나뉘어 서로 헐뜯고 싸우면서
각자 자신의 이득만 챙기려 했던 자들이 득시글 거렸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고, 시대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했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화도 그렇게 지키는 것입니다. -
작성자 복대곰(김대영) 작성시간10.01.24 죠슈번 말씀이시군요. 일본 개화의 쌍두마차가 사쓰마번과 그 죠슈번이죠. 바짝 뒤쫓는 도사번이구요.
명성황후도 죽어서 미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개화에 그토록이나 적극적이어서 부국강병을 꾀했다면 왜 당시 자신의 권력기반이었던 민씨척족들의 부정부패엔 눈감았을까요. 급진개화파를 청군으로 박멸하고 그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러시아를 끌어들여 견제합니다. 그 때문에 개화정책은 일관성 없이 협력 상대가 일본, 청, 러시아로 교체되어 그나마 가진 역량도 소모되었습니다. 임오군란 전까진 일본인 교관이 별기군 양성했고, 청군 진주 후엔 위안스카이의 입김으로 기존 2영이 4영 체제로 전환됐죠. -
작성자 복대곰(김대영) 작성시간10.01.24 아관파천 후엔 러시아 교관이 파견되었구요. 열강의 세력균형을 위한 고육지책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일관성이 힘인 정책이 우왕좌왕하니 세력균형 구도가 붕괴될 때 손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무너진 겁니다. 자 이런 결과로 봤을 때 명성황후가 진정 부국강병을 꿈꾸던 조선의 국모였을까요. 대원군은 개항을 늦추면서 서양식 함선을 구매하려 했습니다. 국방력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했고 그 성과는 병인, 신미양요로 일정 부분 증명됐죠. 개항불가론자들이었던 위정척사파들은 성급한 개항이 경제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허게될지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이항로의 상소에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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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대곰(김대영) 작성시간10.01.24 자신의 아들이 세자가 되길 원해 아이를 낳은 후궁들을 교묘히 제거하고 핍박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살아생전엔 그녀의 척족정치를 비판했던 유생들이 을미사변 후 의병을 일으킨 것은 저간의 사정이야 어찌됐건 유교적 가르침에 의하면 국모는 곧 만백성의 어머니요 부모의 원수는 불구대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백성들 사이에 퍼져있었던 친일감정을 일거에 증폭시킬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기도 했기에 .. 사후에 이전의 모든 공과완 상관없이 항일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죠. 죽은 사람 들춰내서 따지기 싫어하는 민족성 때문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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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대곰(김대영) 작성시간10.01.24 안중근 의사도 우리에겐 독립투사, 일본에겐 테러리스트라죠. 낭인이라 하지만 그중엔 차관급도 있었고 신문기자, 저술가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후일 장관이 된 이도 있을만큼 소위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당시 러시아의 압박으로 청일전쟁에서 획득한 요동반도까지 도로 뱉어내야 했던 조국의 위기를 타개한다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일부나마 동참했던 대원군 외에 일부 관리들은 일본에 이용당했다고 할 수 밖에 없겠지만, 상술한 바와 같은 명성황후의 정책에 반대하는 나름대로의 정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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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Cien[허재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0.01.24 긴 이야기 너무 잘 읽었습니다.
슬쩍 이럴수도 있겠다 라고 올린 글인데 자세한 설명, 너무 감사합니다.
새삼 제가 갖고 있는 지식의 깊이가 얼마나 얕은지도 깨닫게 됏네요 ^^;;;
임기 초기에 대통령이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가르치자는 얘길 꺼내는
정부이니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한다느니 없앤다느니 하는 X소리가
나올 법도 하지요....
그렇잖아도 요즘 아이들 티비 드라마에 나오는 드라마 아니면
당최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은 알아도
김종서, 강감찬은 잘 모르는 세대가 되가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