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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론

작성자kimpd|작성시간02.04.28|조회수868 목록 댓글 0
< 다큐멘터리 제작 >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다큐멘터리(documentary)라는 말은 1802년에 처음으로 사전에 등장한 비교적 최근 언어이다. '다큐멘터리'가 파생되어 나온 '다큐멘트(document)는 '증거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기록되어져 있는 것'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큐멘트의 어원인 다큐멘텀(documentum)은 중세 말, '권리 또는 특권을 증명하는 행위' 라는 뜻의 무늬멘트(muniment)를 대신해서 사용되었던 말이다. '다큐멘트'는 점차 '권리'라는 추상적인 의미에서 '계약을 보장하는 법적인 권리'라는 뜻으로 점차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후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사회관계가 점점 복잡해지고 자본주의의 발달에 의한 계약관계 및 법적인 관계의 증대로 '다큐멘트'라는 말은 보증서, 특허, 비망록, 요약, 세목, 법원영장 등을 총칭하는 단어로 이용됐다.

다큐멘트의 현대적인 의미는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증거'라는 총체적인 의미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다큐멘트'의 이 같은 의미는 사진기술의 발달과 맥을 같이 한다. 사진은 그 기술이 발명될 당시부터 증거를 보여주는 일종의 '다큐멘트'로 받아들여져 왔다. 다시 말해 사진은 어떤 상황의 진실성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로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다큐멘터리가 사진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다큐멘트를 '사실에 대한 증거'라고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다큐멘터리의 정의와 매우 흡사한 것이다. 즉 사진기술의 발달이 다큐멘터리의 현대적 의미를 구성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진기술은 영화의 발명으로 이어졌는데, 영화는 오늘날 텔레비젼 매체에서 다큐멘터리가 자리를 잡기 이전 단계의 주요 전달매체였던 것이다. 즉 사진기술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기술적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진기술은 다큐멘터리 장르에 개념적 정의와 존재방식 모두를 제공해준 셈이다.

실제로 '다큐멘터리'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1930-1940년대 다큐멘터리 이론의 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영국의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이며 영화이론가였던 존 그리어슨(1898~1972)이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리어슨은 영국 다큐멘터리 장르의 창시자이며 1930년대 영국 다큐멘터리 운동의 중심인물로서 그의 이론들은 아직도 모든 다큐멘터리 이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큐멘터리의 사전적 의미는 '허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거나 거의 사용하지 않고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사실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이나 사실적 영화'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다큐멘터리는 '객관적 사실을 제시해주는 영상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어슨은 다큐멘터리가 반드시 이 같은 객관성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기록필름을 재구성 한 것이 아니며 예술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을 공유하고 있는 장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다큐멘터리를 '내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사실'에 창조적으로 접근해 실체를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TV Program으로서의 Documentary
- 왜 다큐멘타리인가?

; 경계의 모호 상황에서 개념의 정립은 중요한 것!

1. 다큐멘타리의 定義
1) 정의를 위한 요소
· 다큐멘타리는 허구가 아닌 사실을 다루고 있다.
· '창조의 예술'이 아닌 '존재의 예술'로 불린다.
· 시청자에게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느끼고 생각 하고 판단하도록 한다.

2) 여러 정의들
。 플레허티(Robert Flaherty) - 다큐멘타리는 발견과 폭로의 예술이다. 모든 예술은 일종의 탐사다
。 그리어슨(John Grierson) - 다큐멘타리는 사실적인 것의 창조적 해석이다.
。 폴 로차(Paul Rotha) - 다큐멘타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삶을 창조적으로 그리고 사회적 의미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 스포티스우드(Raymond Spottiswoode) - 다큐멘타리는 주제의 접근법에서는 산업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관계를 포함한 인간의 주변 관계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기법적 으로는 내용에 따라 형식을 변화 시키는 것이다.
。 잭 엘리스(Jack Ellis) - 다큐멘타리는 사실적인 것을 기록하여 관객들에게 전달함으로써 가치관에 영향을 끼쳐 행동을 변화 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 1948년 다큐멘타리 연맹회의 - 다큐멘타리란 경제, 문화, 인간관계의 영역에서 인간의 지식과 이해를 넓히고 그 욕구를 자극시켜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이성이나 감성에 호소하기 위해 사실의 촬영과 진지하고 이치에 맞는'재구성'을 통해 사실의 모든 면을 필름에 기록하는 방법을 말한다.

2. 다큐멘타리의 개념과 특징
1) 관찰적 영화와 시네마 베리테
。 관찰적 영화(observational cinema)는 사실성 자체에 대한 규명보다는 전달되는 본질을 위해 제작자들이 대상을 영상화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하며, 또한 명백한 해석이 요구된다는 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는 이미지 자체의 사실성 증대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출연자들에게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촬영하여 직접성, 신빙성, 즉 흥성 을 구축함으로써 실체와 재구성(재현)간의 gap과 왜곡을 없애려는 접근법이다.

2) 재구성
。 다큐멘타리는 현실세계를 사실에 가깝게 보여주려고 하자만 그 속성상 물리적 장치를 통해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 다큐멘타리는 부분적인 모사(模寫)보다는 작품의 총체적인 리얼리티가 논쟁의 주된 대상이 된다.

3. 다큐멘타리의 종류
좁은 의미의 다큐멘타리 - 시사적인 사회문제를 다룬 정보 프로그램
넓은 의미의 다큐멘타리 - 오락보다는 정보나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프로그램으로서, 역사,전기,자연관찰기,여행까지도 포함하는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프로그램

* 힐리어드(Robert Hilliard)는 다큐멘타리를 다음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① 바깥세계에 도전하는 인간 삶의 모습을 탐구하는 다큐멘타리
자연의 장애 요소와 미지의 자연세계에 도전하는 불굴의 인간의지와 숭고함을 담은 것으로 최초의 다큐멘타리인
플레허티의 <Nanook of the North> 이래로 지속되고 있다.
② 사회적 문제와 그 문제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다큐멘타리
시청자로 하여금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깨닫게 함으로써 잘못된 제도와 상황의 적극적 개선을 모색하게 한다.
③ 일상적인 다큐멘타리
사람이나 사건들을 현실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작가의 특별한 시각이나 태도가 포함되지 않은 사실적인 정보만을
전달한다.

* 뉴스 다큐멘타리와 테마 다큐멘타리 - 주제를 해석하는 측면에 따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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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News)다큐멘타리 테마(Theme)다큐멘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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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Record) 예술(Art)
저널리스트 아티스트
실제의 세계 상상의 세계
객관성 주관성
시사적 시(詩)적
객관적시각 주관적시각
생활속의 예술 예술속의 생활
소재에 의한 지배 주제에 의한 지배
직접적 구성 상징적 구성
플롯(plot)의 발견자 플롯(plot)의 창조자
뉴스의 성격 드라마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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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마 다큐멘타리
① 편집물(Compilation) 다큐멘타리
② 전기물(Biographical) 다큐멘타리
③ 드라마물(Dramatic) 다큐멘타리

* <내용의 특성>을 기준으로 한 분류
① 뉴스 다큐멘타리
② 사회적 이슈 다큐멘타리
③ 역사 다큐멘타리
④ 문화 다큐멘타리
⑤ 흥미거리 다큐멘타리
⑥ 자연 다큐멘타리



















BBC의 자체 다큐멘터리에 대한 정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제작과정은 다른 장르의 프로그램과 비슷한 점도 많지만 프로그램의 특성상 좀 더 강조되는 부분이나 전혀 다른 과정이 포함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BBC는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에 대한 세부적인 절차에 대해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놓고 내부교육자료 및 실제 제작절차의 기준 등으로 이용하고 있다.
암튼, BBC에서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이는 이론적인 정의와 달리 구체적인 내용을 지적하고 있어 제작진들의 지침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제작의 전체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다큐멘터리는 사실적인 주제를 심층적으로 조사해야 한다. 단순히 보여주는데 그치지 말고 주제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한다. 또한 주제에 대해 단순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가 좀 더 깊은 사고와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시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다큐멘터리는 스튜디오에서의 토론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다루고자 하는 사실이 존재하는 현장에 카메라를 놓고 직접 사실을 비추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주제를 제시해야 한다.

셋째, 다큐멘터리는 창조적이어야 한다. 이런 창조적 의무는 기획자나 연출자가 최종적인 책임을 진다. 그런 점에서 기획자와 연출자는 작가나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의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창조적 임무의 완수를 위해 기획자, 연출자, 작가간의 공조체제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연출자는 뉴스나 시사프로그램 연출자와 달리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제작에 임해야 한다. 한 사람의 다큐멘터리 연출자가 1년에 제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통상 50분짜리 다큐멘터리 두 편 정도면 적당하다. 이는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사전조사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며 편집에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큐멘터리의 기획자나 연출자는 그 프로그램이 제작되는 동안에는 프로그램 주제에 관한 한 BBC내에서 최고의 권위자가 되어야 한다.

다섯째, 다큐멘터리는 매거진 프로그램형식의 짧은 프로그램에서부터 몇 시간짜리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주제도 폭이 넓어 현재의 사건을 다룰 수도 있고,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다룰 수도 있으며 미래의 발전을 예측하는 프로그램도 제작할 수 있다.
여섯째, 다큐멘터리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견이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허구적 사실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일곱째, 다큐멘터리 연출자는 다큐멘터리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한 시청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영화적 기법이나 저널리스트적인 접근, 나아가 드라마 기법까지 채용할 수 있다.
빌 니콜스(Bill Nichols)의 다큐멘터리 양식

1. 양식(mode)이란 무엇인가
빌 니콜스는 다큐멘터리에 관한 연구가 드문 현실에서 꾸준히 다큐멘터리에 관한 여러 연구를 진행해 왔고 그 성과로서 다큐멘터리에서 양식을 정리해 냈다. 그는 각각의 양식을 단순한 기교나 기법상의 변화로 사고하기 보다는 각각의 양식이 처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속에서 그 양식의 출현동기와 특성을 짚어내면서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양식의 발전과정을 통해 사고해냈다. 그러면서 각 양식이 돌출적인 출현을 한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 연관을 맺으며 출현했다는 점과 그 양식을 탄생하게 한 동력을 이전의 양식과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찾아내려 했다.
유사한 주제나 구조적 관심사를 지닌 일군의 영화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장르(genre)가 있다. 그리고 양식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용어로 극영화에서는 스타일(style)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니콜스는 mode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극영화의 여러 장르들이 각각의 장르적 요소들 특히 관습(convention)의 복제 변형적 양상을 통해 장르특성을 구축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른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표현 양식 즉 상대적으로 주도적인 표현 방식이 없다. 극영화와 비교해 볼 때 훨씬 넓고 다양한 표현 방식의 범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주도적인 표현방식이 없다는 것은 그동안에 다큐멘터리가 극영화처럼 장르 내부적인 컨벤션을 구축하는데 실패를 했다는 말임과 동시에 또한 앞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많이 남기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니콜스는 양식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즉 여러 다양한 영화들에서 광범위한 공통성으로 자리를 잡은 일정한 관습을 양식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에 대한 니콜스의 논의는 단순히 기법이나 표현의 관습만으로 사고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가는 영화작가의 철학,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태도, 그리고 주제를 구축하는 방식 등이 포괄된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어질 양식에 대한 논의가 편의상 기법적 특성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 할지라도 양식이 단순히 기법이나 표현의 관습만을 의마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고가 항상 근저에 깔려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2. 니콜스의 양식연구 과정
1979년 : 「이데올로기와 이미지(Ideology and Image)」에서 서술(address)에 의해 두가지 양식으로 분류 ; 직접 서술(해설 영화)와 간접 서술(관찰 영화)
이 분류의 기준은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등장인물(영화밖에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인물)에 의해서 인가 혹은 해설자(나레이터, 영화작가의 관점을 대신해서 전지적이고 전능한 다큐멘터리 자체의 관점을 드러내는 인물)에 의해서인가이다.
1985년 : 「다큐멘터리의 목소리(The voice of Documentary)」라는 논문에서 서술이 아닌 목소리(voice)를 기준으로해서 네가지 분류로 다시 정리
; 직접서술, 간접서술, 인터뷰 지향(interview-oriented), 성찰(reflexive)
"다큐멘터리 진보에 있어서 형식들간의 쟁점은 목소리의 문제에 집중되어졌다. 목소리는 양식보다는 좀더 좁은 의미의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작품 (text)의 사회적 시각,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상영되고 있는 실체를 어떻게 조직하고 있는지를 전달해 주는 것이다"
(위의 논문)

1991년 : 「재연된 현실(Representing Reality)」에서 네가지 양식으로 분류
; 설명, 관찰, 상호작용, 성찰(expository, obsevational, interaction, reflexive)
네가지 양식의 변천의 동력을 "네가지 양식은 서로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새로운 형식이 앞선 형식의 한계와 제약으로부터 비롯되고, 다큐멘터리 사실주의의 표현과 가능성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라고 설명하며 사회, 역사적 배경의 변화에서 찾아낸다

1995년 : 「흔들리는 경계(Blurred Bounddaries)」에서 다섯 번째 양식 정리
; 수행양식(performative mode)
그가 제기하던 기준과 그려낸 패러다임은 조금씩 변했지만 그 문제의식의 저변에는 늘 일관되게 다큐멘터리의 발전의 동력에 대한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하나 하나의 양식이라는 접근 방법은 그저 시간의 뒤안으로 사라져 버리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목표와 관련해 형식이라는 틀을 통한 지속적 변천으로 남겨지면서 다큐멘터리 발전의 동력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다

3. 양식연구의 의의와 한계
의의 1. 다큐멘터리를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라는 낮은 단계의 지위에서 구해내 나름대로의 미학적 가치를 가지고있는 예술장르로서의 질을 제공했다.
2.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기술할 때 해명할 수 없는 발전의 동력을 찾아내기에도 용이하다. 작품내부의 표현방식을 찾아내 그 표현 양식을 낳았던 이데올로기적 배경, 그리고 그양식을 통한 성장과 발전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한계 1.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개별적이고 산별적인 실험과 노력을 통한 발전이었다 (D.C와 C.V를 제외).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일정한 양식의 틀에 끼워 맞추다 보면 몇가지 문제점이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당시의 시각이 아니라 후에 규정된 양식의 시각, 다시말해서 현대의 시각으로 당시의 작품을 제단하고자하는 실수를 할 수 가 있다.
2. 양식을 기법만으로 사고함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형식주의이다. 특히 양식은 기법만의 문제가 아니다.
양식은 단순한 기법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일정한 제작 관행과 영화작가의 세계관, 그리고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기법, 그렇게 제작된 작품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대상인 관객과의 관계속에서 상호연관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사고되어져야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 양식이 다른 양식보다 우월하다거나 하는 식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각각의 양식이 독특한 나름의 존재 맥락이 있고 그 맥락에 준한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사고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4. 니콜스의 양식분류
1) 해설적 양식(Commentary Mode)
· 관객을 향한 직접적인 해설에 의해 구성
· 화면밖에 있는 전지적 시점의 해설자는 영화작가의 사고방식에 의해 설정된 주제를 전달하는 권위적 존재
· 해설자(해설)는 영화의 구성에 있어 기본 동력
· 화면은 해설자가 관객을 설득하거나 설명하는 내용을 보여주기 위해 예시영상 (images of illustration)만 만들어진다
·논리적 인과관계에 의한 편집
·사운드의 경우 화면밖 해설이 영화의 중심만이 아니라 사운드의 중심이 된다. 그래서 현장음과 효과음, 효과음악등이 영화가 가지는 논리를 위해 종속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즉 등장인물들의 대화, 주변의 소리, 우연히 주어진 여러 가지 현장음들 중에서 해설이 가지는 전달 혹은 설득이라는 목표에 부합되는 것만이 사운드로 사용된다
·인터뷰의 사용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인터뷰의 내용 역시 작품 자체의 논리에 부합되는 것만 취사선택한다.
·나레이션은 해설양식을 특징짓는 가장 커다란 요소이지만 나레이션 자체의 유무로 양식을 규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중요한 기준은 나레이션의 유무가 아니라 나레이션의 태도이며 관점이다. 해설적 양식의 나레이션이 전지적 시점이고 정보의 전달과 설 명에 치중한다면 성찰양식의 나레이션은 작가의 개인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내용으로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장점 - 해설자체에 관객이 이미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 익숙함으로인해 관객의 수용이 용이
단점 - 권위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측면인데, 관객의 지위를 수동적인 수용자의 입장에 위치 시킨다.
예) TV뉴스, PD수첩등 대부분의 TV다큐멘터리, 칠레전투, 왜 우리는 싸우는가(Why We Fight?)시리즈

2) 관찰적 양식(Observational Mode) = Direct Cinema
· 니콜스는 D.C와 C.V의 혼용으로부터 정확한 개념을 정립해 내기 위해 두 개념 모두를 피하고 대신에 관찰과 상호작용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 단순한 관찰자의 위치에 카메라와 작가가 머무는 것을 선호(어떤 언급이나 개입없이 한 사건을 따라 그대로 기록하는 것, 보이스 오버 해설, 관찰된 영상과 화면 이외의 음악, 자막이나 연출된 재현 그리고 인터뷰조차 기피한다)
· 촬영은 사건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long take가 주를 이룬다.
· 공간적 통일성을 기준으로 편집. 따라서 관객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되고 대부분이 현재 시제이다.
· 영화를 구성하는 어떤 기법과 표현들(촛점이 흐리다거나 소리가 잘 안들린다거나 움직이는 피사체를 선명하게 잡지 못했다거나 하는 상태)은 역설적으로 영화의 현재 시점을 강화하도록 작용 (칠레전투에서의 카메라맨의 죽음의 순간)
· 예술적인 표현에서 역사적인 폭로로 중점이 이동
· 1960년대 초반 핸드 헬드 카메라와 포터블 레코더의 등장으로 가능
· 비개입, 무의도가 절대가치이며 객관성의 미학으로 귀결
단점 - 부재지향은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제거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그들의 존재가 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역설이 성립되어 관찰자는 사건의 총체성을 관찰할 힘을 부여 받으면서 전지전능해진다. 결국 부재지향이란 전지전능이 된다. 따라서 관찰 영화 가 제공하는 객관성은 해설영화가 제공하는 권위에 의해 주어지는 진실에서 보다 진보한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된다.(전지전능한 관찰자) 프레임밖에 이미 실재하고 있는현실이 영화에서 배재된 것 역시 객관성의 신화에 대한 도전이다. 결국 객관성의 이면에는 객관을 가장한 주관이 존재하게 된다.
이후 TV매체와 만나면서 극영화처럼 기승전결을 갖춘 꼴로 구성하게 된다. 초기의 롱 테이크는 거의 없어졌고 컷어웨이, 의사연결쇼트, 180도 원칙에 준한 반응 쇼트 등의 사용
이 양식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다큐멘터리의 기본 정신과 일맥상통한다는 신념을 심어주며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예) 오가와 신스께, 프레드릭 와이즈만(high school, Near Death), 세일즈맨, 영상인류학, 카나다 필름 제작소, 리콕(Leacock),

3) 상호작용적 양식(Interactive Mode) = Cinema Verite
·동시녹음 장비의 개발로 인해 가능성을 제공받았다(영화작가의 목소리가 영화에 직접 등장)
·영화작가의 개입에 의한, 작가와 출연자 사이의 상호작용이 주된 구성방식
→ 출연자와 작가가 서로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가 영화속에서 드러난다. 서로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영화 속의 작가와 출연자뿐만이 아니라 관객에게도 남겨진 과제
·이것이 보편타당한 진실이다라고 주장하는 대신에 이것은 이 작품 과정에서 이렇게 발전된 나의 견해이다라고 주장
·출연자의 진술 이미지나 대화의 교환, 그리고 시범적 영상을 보여준다
·편집은 해설을 쓰지 않는 대신 개개인의 관점사이의 논리적 일관성이나 차별성을 보여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영화작가와 출연자 사이의 주고 받은 대화나 인터뷰들 중에서 주제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찾아지도록 만들어진다
·증언(회고), 자료화면 등을 통해 과거와 과거가 현재에 끼친 영향까지도 언급할 수 있다.
→ 관찰양식이 현재시제라면 상호작용적 양식은 과거, 현재, 완료시제까지도 포함. 이것은 다큐멘터리의 표현영역을 넓혀주었으며 역사적 사건과 그것에 대한 평가까지로 영역을 확장
·인터뷰를 중시 ; 영화작가와 대상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에 의해 발전되어가는 논리의 과정에 대한 증거로 여겨진다. 따라서 인터뷰가 길어지기도 하며 인터뷰를 이용한 논리구축을 시도한다
장점 - 인터뷰는 권위를 분산시킨다. 다양한 인물의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는 것과 자료화면의 병치는 능동적으로 사고하도록 유도한다.
단점 - ·인터뷰의 문제 즉 크레타인의 역설(인터뷰하는 사람의 인터뷰 내용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의 여부가 문제인데, 인물의 목소리와 영화 자체의 목소리 사이의 틈이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
·인터뷰가 가진 윤리적 의문 - 권력분배의 불균등함에서 비롯되는 계층적 담론의 형태 즉 회견자와 피회견자의 계층적 질서로 권력이 분배됨으로써 오는 윤리적인 문제가 존재
예) 에밀 드 안토니오(베트남, 돼지의 해), 어느 여름의 연대기, 54일 그여름의 기록,
누가 빈센트친을 죽였는가?,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4) 자기성찰적 양식(Self-reflexive Mode)
· 기원 -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
· 내용 그 자체에 대해 언급하기보다는 표현과정자체에 대한 언급 즉 내용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에 대한 질문이며 해답이다
· 이전의 양식이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취했던 기술들을 일부러 방해하고, 드러내면서 사용
· 소재나 주제를 기록하는 과정과 텍스트, 영화작가, 관객 사이의 관계까지도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다.
· 접근방식이나 형식 자체가 주제이거나 주제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 두드러진 특징은 영화제작과정을 드러내 기존의 영화적 장치(메카니즘, 기술)가 가졌던 효과 들을 깨뜨리려 한다.
즉 관객이 보는 것은 사실(현실)자체가 아니고 사실의 일부일 뿐이며 영화일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소격효과, 소외효과)의 수용 - 영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사고하며 성찰할 수 있는 관객을 기대한다)
→ 따라서 사용되는 기법들은 패러디, 허구의 사용, 작가의 개입(목소리, 직접등장)등
· 작가의 주관(자의식)이 다른 어떤 양식보다 뚜렷하다
단점 -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이론적이 되어서 관객들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다른 양식의 작품들이 가지는 효과를 깨고 새로운 효과를 내고자 하는 의도가 관객들에게 외면당할 수도 있다.
·감독의 주관이나 주장이 너무나 명백하고 두드러지기 때문에 자칫하면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떨어질 아이러니한 함정을 가지고 있다.
예) 그녀의 이름은 베트남(Surname Viet, Given Name Nam), 로저와 나(Roger and Me) 머나먼 폴란드(Far From Poland)


5) 수행 양식(Performotive Mode)

· 지시대상의 객관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기존의 리얼리즘 전반에 대한 의문을 제기
→ 기존의 리얼리즘이 대상을 객관화시켜 강조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수행양 식은 스스로를 지시대상화함으로써 즉 객관화와 주관화의 개념을 뒤집어 버림으로써 새로운 자신만의 특질을 산출해낸다.
· 기존의 다큐멘터리가 공통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가지던 목표인 어떤 논쟁을 설득 해내고 발전시켜 내는 것에서 벗어난다.
· 아직도 진행중인 연구로서 검증받은 측면이 부족하다

설명, 관찰, 상호작용 양식은 양식의 기술적 특징이나 기법들을 서술하였는데, 성찰양식과 수행양식은 그 양식을 둘러싼 철학적 배경이나 고민에 더 큰 관심을 집중한다. 따라서 앞의 세가지 양식과 같은 범주의 개념인가에 대한 혼란을 일으킬 여지가 존재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니콜스는 어떤 언급도 없다.


**** 한국 다큐멘타리의 약사

'다큐멘타리는 진실을 보여주는 마음의 창입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 말은 다큐멘타리라는 이름의 영상물을 다른 영상물과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명확한 지침일 것이다. 우리가 주변 생활에서 발생되는 사건들과의 지속적인 관계속에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끼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사건을 사실적으로 분석, 취재, 기록한 것을 다큐멘타리라 부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다큐멘타리 영상물은 TV 방송용으로 제작된 것들과 독립 영화 진영에서 제작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쉽사리 살아있는 진실의 기록들을 접할 수 없는 사회 현실속에 이 두 영역에서 추구하는 다큐멘타리는 주제나 다루는 소재면에서 서로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는 제도권속에 파묻힌 다큐멘타리가 아니라,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내용성을 담고 있는 독립 다큐멘타리의 흐름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 글속에서 다루는 진실의 영상물들은 독립 영화 진영에서 제작되어 대·내외적으로 발표되고 어느정도 인정을 받은 이른바 문제작(?) 중심으로 작품들을 선정하였다.

깊지도 않은 다큐멘타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덤벼들자니 자칫 다큐멘타리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에게 실망감을 안겨다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지금의 부족함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좀더 완성된 연구의 성과물로 거듭 태어날 것으로 확신하고 이제 지난 시간들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초창기 다큐멘타리로는 82년의 극단 연우무대의 <판놀이 아리랑>을 다큐멘타리 영화 형식으로 제작한 것을 비롯해서 84년 전남 구례에서 있었던 농민들의 수세 현물 납부 투쟁을 영화화한 <수리세>등이 '서울 영화 집단'에서 제작되었다. 이후에 다큐멘타리는 87년 이후에 물량과 질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이런 변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물질적 요인을 들자면 비디오 매체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기동성, 기술적인 용이함, 다량 복제 가능성을 특징으로 하는 비디오 매체의 출현은 87년 6월 항쟁, 7·8·9월 노동자 대투쟁과 맞물리어 이 시대의 제작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민중, 노동 운동의 중심에서 그 사건들을 기록하여 자료로 남기기 시작했고 그 자료의 결과물들이 다큐멘타리로 양산되어 87년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을 다룬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민족 영화 연구소)와 6월 항쟁을 다룬 <민중이 주인되는 그날까지>(대학 영화 연합)가 제작되었다.

이어 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정부는 도시 미관을 새롭게 조성한다는 명목아래 서울시내의 빈민 밀집 지역에 대한 철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주 대책 없는 강제적인 철거는 당연히 철거민들에게 반발을 사게 되었고, 아울러 땅값, 집값의 폭등으로 인해 심각한 주거 문제의 고통을 겪게 되는 도시 빈민들의 이야기가 다큐멘타리로 제작되었다. <상계동 올림픽>(김동원)은 강제로 삶의 자리를 빼앗긴 상계동 철거민들의 힘겨운 투쟁 과정을 그린 것으로서, 이 작품은 철거민이 직접 촬영과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다큐멘타리의 새로운 제작 전형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아울러 <벼랑에 선 도시빈민>(김동원)은 300만명으로 추산되는 도시 빈민들이 형성되는 과정과 이들의 긍지에 몰린 삶의 사회적 이유를 여러 인터뷰를 통해 말해 주는 작품이며, 분당, 홍은동, 신대방동의 재개발 사업 현장을 기록한 <삷의 자리, 투쟁의 자리>(서울 영상 집단)와 최근에 제작된 <봉천동 이야기>(푸른영상)는 봉천동 철거 지역 주민들의 갈등과 화합을 통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려는 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한편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의 의식 수준의 고양과 노동 운동의 폭이 확대되는 것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노동조합이 결성되게 된다. 이러한 폭팔적인 노동 운동의 성장에 힘입어 89년 4월 '노동자 뉴스 제작단'이 만들어지고 이 단체는 89년부터 95년에 이르기까지 뉴스릴 형태의 <노동자 뉴스>를 20호까지 제작한다. 뉴스는 기획에서 배급까지 노동운동 대중 조직과의 결합을 통해서 작업하는 방식을 선택했고 초기의 뉴스는 종합매거진 형태로 보도, 특집, 강좌등의 코너로 구성되었다. <노동자 뉴스> 6·7호에서는 전노협의 건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17·18호에서는 전노협이후 전국적인 노동 운동 단체로 등장하게 된 민주 노총의 건설 과정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이외의 '노동자 뉴스 제작단'의 작품으로는 전노협의 건설부터 민주 노총으로의 재탄생까지의 과정을 다룬 <노동해방 그날에>, 병역특레 노동자인 조수원씨의 죽음과 그 후의 모습들을 담은 야마가타 영화제 초청작픔인 <해고자>등이 있다. 그밖에 노동운동을 다룬 작품으로는 단위노조에 대한 내용인 <깡순이-슈어프로덕츠>(민족 영화 연구소)와 91년 '다큐멘타리 작가회의'에 의해서 제작된 <전열><옥포만에 메아리칠 우리들의 노래를 위하여>등이 있다.

90년대 들어 동구 사회주의 사회 붕괴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쇠퇴가 시작되면서 문민정부의 출범과 다양한 시민 운동의 부상, 뉴 미디어의 등장으로 다큐멘타리 진영에서도 내용적인 다각화의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즉, 이전의 노동문제, 도시빈민문제, 농촌문제를 소재로 제작되던 것들이 이제는 여성, 통일, 교육, 산업재해, 환경으로 그 영역을 확대한 것이다.

먼저 '여성'을 소재로 접근한 작품으로는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매매춘 관광의 실태를 취재한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푸른영상), 유일하게 극장 상영이 허가되었던 정신대 할머님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록한 <낮은 목소리 Ⅰ,Ⅱ>(보임)와 사회속에서 가족의 의미를 짚어 본 <결혼, 가족, 그리고 나><결혼전 이야기>(푸른영상)등이 제작되었다. 또한 발전 논리속에 파묻혀 버려 등한시 되었던 환경 문제를 거론한 <하느님 보시기 참 좋았다>(푸른영상), 산업 발전속에서 양산되었던 산업 재해와 그 피해자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는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직업병 실태와 작업병 인정을 위한 긴 투쟁과정을 2년동안 기록한 <원진별곡>(푸른영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임수경씨와 문익환 목사의 방북 이후 통일에 대한 관심이 중폭되고, 문민정부 출범 이후 오히려 강화된 학생운동과 노동, 시민 운동의 억압 속에서 많은 양심수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상황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현대 정공 노동자들의 싸움을 기록한 <54일, 그 여름의 기록>(서울 영상 집단), 민가협 어머님들의 활동을 통해 이 땅의 양심수들의 실태를 짚어본 <어머님의 보라빛 수건>,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삶에 대한 모습을 기록한 <분단을 넘어선 사람들><풀은 풀끼리 늙어도 푸르다>, 문익환 목사의 89년 방북을 다룬 <하나가 되는건 더욱 커지는 일이다>가 '푸른영상'에 의해 이 시기에 제작된 다큐멘타리들이다. 또한, 교육부의 지방 소규모 분교의 폐교 정책에 맞서 두밀리 어린이들과 마을 주민들이 학교를 지키기 위한 노력들을 보여준 <두밀리 새로운 학교가 열린다>, 파고다 공원 부랑자의 삶과 내면의 모습을 보여주고,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장애인들이 준비하는 한 편의 아름다운 연극의 과정을 기록한 3부 연작인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Ⅰ,Ⅱ,Ⅲ>(박기복)의 제작은 90년대의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잘 그려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96년 12월 26일 안기부법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되면서 민주 노총을 중심으로 87년 6월항쟁
이후 노동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종교계, 문화계까지 참여한 전국민적인 총파업이 3단계까지 강도를 높여 가며 전국을 몰아쳤다. 97년 초의 이 뜨거운 총파업의 열기를 기록하기 위해 '노동자 뉴스 제작단'은 <총파업 투쟁속보>를 두 차례에 걸쳐 제작하였다. <총파업 투쟁속보>는 단지 기록 영화의 차원을 뛰어 넘어 총파업의 내용을 전국의 노동자와 국민들에게 직접 전달하려는 살아 있는 진실의 소리였다. 이 다큐멘타리는 제 27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많은 호응속에 상영되어 우리 사회의 현실을 국제적으로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다큐멘타리를 통하여 지난 역사를 다시금 살펴 보게 되면서 87년 6월 항쟁이후 10주년이 되는 97년에는 국민적인 관심속에 10년전의 민주화 운동을 기록하고, 새롭게 고찰하는 작품들인 <명성, 그 6일간의 기록>(푸른영상), 연세대생 이한열군의 죽음과 그와 함께 6월 항쟁의 전개 과정을 기록한 <솔아, 푸르른 솔아>(6월 민주항쟁 10주년 사업 범국민 추진 위원회)가 제작되었으며, 다른 역사 다큐멘타리로는 제주도 4·3항쟁을 되짚어 보며 발굴, 취재, 기록한 부산 '하늬영상'의 <레드 헌트>가 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독립 영화 진영의 현실적 모습을 돌아보고, 독립 영화의 역사를 기록한 <변방에서 중심으로>가 '서울영상집단'에 의해 제작되어 제 2회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위와 같이 작품의 급속한 향상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 다큐멘타리는 각종 탄압과 검열이라는 제도적 울타리에 막혀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제작, 배급에까지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의 상황이다. 어렵게 제작된 다큐멘타리는 검열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법 영상물'로 낙인 찍히게 되고, 극장 상영은 고사하고 비디오 유통 마저도 힘든 형편이다. 대학내에서나 진보적 대중 공간에서의 상영을 통한 극소수의 관객과의 만남으로는 배급에 대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 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권력과 자본이라는 주류 이데올로기의 검열 아래서 진실을 찾기 위한 다큐멘타리의 싸움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또한, 검열의 요소를 충족하여 제작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 96년 10월 4일 헌법재판소에서 영화 사전 심의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부분에 걸쳐 개선 되야 할 숙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탄생 100년과 더불어 다큐멘타리 탄생도 이제 100년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 어느 순간 100년이라는 역사를 기록하게 될 한국 다큐멘타리의 자리 매김속에 점점 더 진실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다큐멘타리의 역할이 중요시 될 것 같다. 많은 변화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타리를 아껴주는 관객이 있고, 정열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제작자들이 있는 한 진실의 창은 결코 닫히지 않을 것이다. 음지에서 양지로 자리 옮김을 하고 있는 한국 다큐멘타리의 미래를 기대한다.

※ 이 글을 쓰면서 참고로 삼았던 글들입니다.
1.『변방에서 중심으로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 서울영상집단, 1996. 12. 5
2.『다큐멘타리, 진실을 선동하는 영상언어』, 진보저널, 95. 2. 15
3.『Solidarity with Korea』, 키노, 1997. 4
일본의 다큐멘터리 영화(1954~1999) - 사토 타다오(일본영화학교 교장)

하니 스스무(羽仁進) 감독이 1954년 발표한 『교실의 아이들』은 문부성 후원으로 교실에서 학생을 효율적으로 지도하는 교사와 그렇지 못한 교사의 차이점을 비교, 조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다. 권위적인 교사는 학생을 강압적으로 끌고 가지만 현명한 교사는 학생 스스로가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간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 대부분은 카메라를 숨겨놓고 촬영한 것으로 오해했다.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너무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쳤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것을 의식해 행동이 굳어지게 마련이다. 또한 영화 촬영은 조명과 녹음의 규모가 큰데다 일반인들이 카메라를 대할 기회가 적었던 시대였기에 『교실의 아이들』에서 거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아이들을 보면 카메라를 어딘가에 숨겨놓고 찍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연스럽게 카메라의 위치를 바꿔가며 어린 학생들의 표정이나 행동을 정확하게 담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그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은 처음 하루 이틀 동안은 교실에 들어온 카메라를 의식했지만 나중에는 카메라를 무시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이 작품은 영화에 새로운 표현 기법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촬영한다는 것은 필름 감광도에 따른 조명과 동시 녹음상의 어려움도 있고 당시는 카메라가 대물렌즈와 화인더로 구분돼 있어서 촬영상의 기술적인 문제들 때문에 반드시 연출을 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55년에 다큐멘터리로 각종 상을 수상한 이와나미(岩波) 영화사의 『한 엄마의 기록』이 있다. 1930년대 이후 사회파의 베테랑였던 이와사 우지히사(岩佐氏壽)가 각본을 쓰고, 교고쿠 타카히데(京極高英)가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나가노(長野)의 농가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 새로운 농촌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춘 뛰어난 사회계몽 영화였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농가 문제를 담아내기 위해 몇 집의 농가 사람들을 모아 연출한 것이었다.

기록영화 감독인 구와다 시게루(桑野茂)는 이 영화는 기록영화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기존의 기록영화인들은 그 정도의 픽션은 허용해도 무방하다고 여겼다. 『교실의 아이들』은 기존 상식에 안주하지 않고 사실성을 추구하는 방법을 모색했던 작품이다.

하니 스스무 감독은 계속해서 후속 편으로『그림을 그리는 아이들(1956)』을 발표했고 전작의 호평에 이어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영화관에서 상영되어 크게 주목받았다. 그는 그것과 관련된 일련의 논문을 써서 일본 누벨바그의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56년에 발표한 장편 『살아서 잘됐다』는 다큐멘타리가 극장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다큐멘타리의 매력을 다시금 펜들에게 불러 일으켜 준 걸작이었다. 이작품은 나가사키에서 원폭피해를 당한 몇 명의 생존자들의 생활을 간단한 터치로 서정성 있게 그린 것이다. 미군정하의 점령기간중에는 피폭자들과의 접촉을 엄격하게 제한했었기 때문에 매스컴에서조차 잊혀졌었던 그들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형 배급회사에서 외면했기 때문에 감독이 직접 필름을 들고 소규모 영화관을 찾아다니며 상영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이러한 것을 자주영화라고 부르게 되었고, 대형 영화사에서 취급해 주지 않는 이러한 작품들은 제작자 스스로 상영할 장소를 찾아 다니는 운동을 하게 하였다.

1954년 이와나미 영화사의 다카무라 타게시 감독의 장편 기록영화 『사쿠마 댐-제1부』가 이례적으로 영화관에서 상영됐다. 이 영화는 대기업 건설회사의 거대한 댐건설 공사를 기록한 영화다. 당시까지 일본을 빈곤한 패전국이라고 생각했던 관객들은 큰 장비를 쉴새 없이 투입하여 위세당당하게 진행하는 공사의 장대함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때부터 다큐멘타리 영화 제작회사의 주된 일은 대기업의 거대한 프로젝트의 진행과정을 담은 기념사진이라든지, 신입사원의 연수교재로 활용하기 위한 영화, 이른바 산업영화의 제작이었다. 그러한 것들은 경영의 어려움을 견디며 사회 계몽적인 다큐멘타리를 제작해 온 수많은 소규모 프로덕션에 경제적인 안정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은 제작이 완성되면 회사에 납품했기 때문에 『사쿠마 댐』 이후에는 일반 관객들이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1948년에 점령군은 16mm 영사기 1,300대를 일본 사회교육기관에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그것을 사용하여 각 지방의 이동 영화반은 마을을 돌며 “영화교실”을 열었는데, 주로 민주주의 계몽을 위한 미국의 교육영화나 일본의 과학영화 등을 상영했다. 이 활동으로 학교와 사회교육활동에 영화를 교재로써 활용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많은 프로덕션에서 이러한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장편 기록영화는 영화관에서의 상영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TV가 보급되면서 집에서 각종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게 되자 기록영화는 영화관에서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기록영화 제작회사는 주로 기업 PR 영화, 기념 영화, 사회교육 영화 등을 제작하여 일반 관객, 그 기업의 사원이나 고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사회교육 영화는 지방 자치단체인 사회교육기관 등에서 구입해 마을회관 등에서 상영되긴 했지만 일반 관객과의 연결 고리는 여전히 미약했다.

기록 영화를 통해 사회적인 발언을 하려는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각 사회단체나 영화동호회 등의 협력을 얻어 시민회관 등에서 상영하여 수익을 얻는 자주상영(自主上映) 방식을 택했다. 그러한 영향으로 몇몇 기록영화 단체는 전에 없던 명확한 사상적 입장을 획득하여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TV 다큐멘터리가 발전해 나가는 것과는 다르게 실행 곤란한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한 가지는 장기 취재다. TV는 대량의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제작, 방송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에 많은 시간을 투입할 수는 없었다. 또한 변화해 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제작자들은 꾸준히 신선한 재료를 찾아야만 했다.

또 하나는 반체제적인 주제에 대해 방영하기가 곤란하다는 점이다.
1960년대의 기록영화 작가들 중에는 TV 다큐멘터리의 이러한 두 가지 약점을 보완해서 기록 영화를 만들자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오가와 신스케(小川神介) 감독과 쓰치모토 노리아키(土本典昭)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는 TV에서 볼 수 없었던 훌륭한 작품이었다.

쓰치모토 노리아키 감독이 만든 다큐멘타리를 제작하기 위해 구마모토현의 미나마타에 가서 미나마타병에 대하여 단편을 만들었지만 크게 호응받지 못했다. 이유는 피해자들을 촬영하러 갔지만 표면적인 것 밖에는 찍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제 3자의 무책임한 취재에 오히려 반발을 했다.

그는 6년 후인 1971년에 미나마타에 장기 로케를 감행하여 환자들(쓰치모토는 그렇게 부른다.)과 마음을 연 접근을 시도하면서 2시간 51분 짜리 장편 『미나마타-환자들과 그 세계』를 발표했다. 이것은 미나마타병의 발생과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당사자들의 노력, 환자들의 처참함, 그리고 그 공해를 일으킨 질소에 대한 규탄과 법적대응을 리얼하게 담은 작품이다. 쓰치모토감독과 그 스텝들은 철저하게 환자들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질소 문제를 유발시킨 회사측의 변명과 환자들의 투쟁은 별개로 보려는 그 지방 사정에는 거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 작품은 그런 환자들을 대변하려는 마음이 필름에 녹아들었고, 절망을 뛰어넘으려는 환자들의 모습에서 존경, 사랑, 신뢰를 통한 인간의 존엄성을 제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느끼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측의 변명이나 그 지방 사정의 의견은 무의미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은 그 절망을 견뎌나가는 환자들의 모습을 통해 사회에 고발하는 영화로 소위 객관적 보도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감독의 신앙고백에 더 가깝다.

계속해서 쓰치모토 감독은 미나마타병에 대한 영화를 찍고 있다. 환자들의 투쟁을 고백하는 영화, 미나마타병의 피해를 경고하는 영화, 미나마타병을 병리학적으로 연구하는 학술자료 영화, 미나마타병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화가들의 영화 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런 사회비판적인 작품들은 사회운동 범위를 뛰어넘는다고 볼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재판 투쟁처럼 당면한 목적이 달성되면 끝나는 것과는 달리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환자들의 고통과 그것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1968년부터 오가와 신스케 감독과 그의 프로덕션 사람들은 지바(千葉)현 나리타(成田)의 산리즈카(三里塚)라는 마을에 들어가 동경 신공항건설 반대운동을 하고 있는 농민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그 과정을 기록한 장편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농민들이 동료로 받아들이기 전까지 카메라를 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투쟁의 주체인 농민들은 일시적 폭력으로 몰고 가려는 운동권 학생들과 진실을 대변해 주지 않는 취재 기자들에게는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과 같은 공감대를 형성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산리즈카 시리즈』의 일련의 작품은 투쟁기록에서부터 마을의 민속기록까지 인간 생활의 뿌리를 탐구하게 만들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극영화를 만들 때 만들려고 하는 작품의 소재나 모델에 대해서 사전에 철저히 조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조사해서 얻은 결론들이 실제로 맞는지를 다시 조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과정 자체를 영화로 만드는 게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기록영화『인간증발(1967)』이나 『일본전후사-마담 옹보루의 생활(1970)』은 이렇게 해서 탄생됐다. 계속해서 그는 TV브라운관을 통해 『미(未)귀환병을 쫓아(1971)』시작으로 동남아시아에서 부대로 귀대하지 못하고 그곳에 남아 처참하게 생활하고 있는 일본군들에 대한 시리즈를 만들었다.

『인간증발』에서 배우 쓰유구치 시게루에게 인터뷰를 맡겼으나 그 이후 작품에서는 항상 감독자신이 인터뷰를 했다. 찾고 있는 모델이 쉽게 발견되지 않을 경우에는 모델을 찾아 헤메는 자신의 모습을 찍기도 했다. 이와 같은 작품에서는 모델이 되는 사람들은 물론, 그 인물을 찾기 위해 애쓰는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도 흥미있는 존재이다.

자기 자신의 품격도 잊은 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모델이 누굴까라는 호기심으로 관객의 기대를 높이며 관심의 향방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시도는 종래의 사회자나 내레이터가 대본이나 해설을 그대로 읽는 것에서는 얻을 수 없는 생생한 효과를 가져다 준다. 그가 다큐멘터리에서 찾아낸 모델들은 사회 밑바닥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살아가는 서민이 대부분이고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대와 찬사의 마음은 극영화에 깊은 감명을 준다.

하라 카즈오 감독은 『안녕CP(1973)』란 작품에서는 감독이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카메라를 향해 감독에게 격한 분노와 비판을 퍼붓는 인물을 찍음으로써 감독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어느 뇌성마비 신체장애자 단체를 찍은 것이다. 그들은 신체장애자라고 해서 세상에 모습을 감추고 살아가는 것은 차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차라리 극단적으로 부자유스런 몸을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자는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감독은 그들을 거리로 데리고 나가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계속 찍어댔다. 그런데 리더격 인물의 부인 역시 신체장애자인데 남편의 주장에 반대하고 영화 취재도 거부했다. 하라 카즈오 감독은 그녀에게 거절당하면서도 바짝 다가가서 촬영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녀가 퍼붓는 비판과 욕설을 모두 녹음했다. 그리고 처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분 분투하는 리더의 모습도 찍었다. 만약 거기서 굴복해서 촬영을 멈췄다면 그도 신체장애자를 추하다고 무시하는 부류와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 감독과 카메라맨이 등장인물로부터 비판과 욕설을 듣는 중요한 상대역이 됐다.


하라 카즈오 감독은 1947년에 『극(極)사적 에로스 연가 (1947)』를 제작했다. 일종의 사적(私的)영화로 하라 감독이 자기를 버리고 간 여성을 쫓아다니며 촬영을 했다. 여성 해방운동에 젖어 나름대로의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한 여성의 행동에서 강인한 인상을 느낄 수 있다. 세상에는 타인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는 것만으로 즐거워하고, 그 자체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구성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연기 없는 장편 기록영화를 찍을 수 있는 것이다.

1975년 야나가와 타케오 감독의 『조각하는 무나카타 시코』는 판화가 무나타카 시코의 판화제작 과정을 찍은 작품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미술영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미술영화 이상으로 이 영화에 활력을 주는 것은 주인공 무나타카 시코라는 인물의 독특한 면이다. 항상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붓과 조각칼을 사용하면서 쉴새없이 떠들고 있는 그 사람. 그가 내뱉는 말은 어떤 해설보다도 논리 정연하며 작품의 모티브와 화가로서의 신조를 전하고 있다.

1981년의 무라야마 에이지 감독의 『87세의 청춘 이치카와 후사에를 말한다』도 이치카와 후사에라는 아주 드문 여성운동가이며 정치가인 그녀가 운동과 관계된 자신의 생애를 젊은 후계자들에게 들려주는 좌담회를 찍은 작품이다. 사진이나 그림을 보조적인 영상으로써 사용하고 있지만 훌륭하게 그녀의 캐릭터와 충실한 내용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영화다.

신도 카네토 감독은 그의 스승 故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인생에 대하여 친구들과 관계자의 인터뷰를 정리해 『어느 영화감독의 생애(1975)』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그들은 미조구치 겐지가 얼마나 엄청난 일 귀신이었나를 말하고 스캔들까지도 다루고 있다. 미조구치 겐지에게 철저하게 키워진 신도 카네토 감독은 그의 엄격함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자신감 있고 박력 있는 구성으로 정리해 냈다.

신도 카네토 감독은 이 작품을 ‘개인판’이라고 명하므로써 사적인 감각에 의존해서 만든 영화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 남자의 일면을 제시한 이 작품은 대중들에게는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높은 점수를 얻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미(未) 귀환병을 찾아서』라는 시리즈에서 리포터로 전면으로 나서면서 매력적인 존재가됐던 것처럼 오가와 신스케 감독도『산리즈카 헤타 부락(1973)』에서 감독 자신이 붙임성 있는 캐릭터로 마을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다. 마을 노인에서부터 마을 친척관계에 이르기까지 마을의 역사를 배우고 농가 주부들로부터 마을의 연중행사에 대해서도 배운다. 일반인들에게는 흥미없는 일일지 모르는 것들도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관심을 보이는 감독이 직접 인터뷰를 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답변과 표정이 모두 진지하다. 그렇게 해서 그 의미의 중요성을 관객들에게 부각시켰다.

오가와 신스케 감독과 프러덕션 사람들은 『산리즈카 시리즈』를 농민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촬영한 경험에서 농민을 이해하기 위해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농사에 대한 기록영화를 만들기 위해 야마카타(山形)현 가이노야마(山上)시의 마키노(牧野)라는 농촌에 들어가 살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농사의 기본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먼저 양잠을 노트에 적어가며 배운 그 과정을 8mm필름으로 촬영한 후 다시 16mm필름으로 확대해서 약 2시간 짜리 작품으로 공개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록영화 『미카노 이야기;양잠편(1976)』은 단순한 그들의 일기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하고 있는 농민을 옆에서 관찰한 영화가 아니라 일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의 농민들을 찍었다는 것이다. 거기서 농민은 자신감을 갖고 일을 가르치며 즐거워하는 선생님으로 표현되고 있다.

기록영화를 제작할 때 어디에 가서 거기서 뭔가를 기록하는 것보다도 차라리 모델이 되는 사람들에게 생활의 활력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또 한 사람, 가수면서 배우인 미야기 마리코가 제작 감독한 『자귀나무의 시(1974)』와 그 시리즈 작품 『자귀나무 시가 들린다(1976)』, 『무지개가 걸터앉은 아이들(1980)』, 『헬로우 키즈! 힘내라 얘들아(1986)』등에서 그런 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

지체부자유 아동이 학교에 다니기 힘들다고 해서 의무교육을 면제받는다는 점에서 착안해 미야기 마리코는 스스로 지체부자유 아동 양호시설인 ‘자귀나무 학원’을 설립해 지체부자유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장애아동들과 자신과 직원들의 하루 하루의 생활과 학습을 그린 기록 영화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장애자들의 생활을 담은 많은 다큐멘타리가 그랬던 것처럼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밝게 살아나가는 장애아들의 건강한 모습을 담았다. 하지만 장애아의 신상과 환경과 교육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고쳐지지 않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장애아들의 꿈과 회망을 감미롭게 그렸고 사소한것이라도 그들이 즐거워하는 순간이라면 그것을 열심히 필름에 담아 알리려고 했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미야기 마리코는 이 작품을 제3자의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교육의 한 가지 수단으로써 만들었던 것이다.

장애아들이 영화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것 자체가 애들에게 있어서 꿈이요, 또 자기들이 출현한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것은 그 아이들에게 있어서 꿈의 실현인 것이다. 그게 바로 아이들의 축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의 얼굴은 모두 밝다. 심신 장애아들에게 밝고 행복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그녀가 생각한 독특한 교육방법이며 거기에 찬동하여 아이들에게 기쁨의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그녀의 관객인 것이다.

기록영화를 만드는 목적이 그저 어떤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뿐만 아리라 하나의 사회적 문제를 제기해 그것을 보완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는 사상이 미야기 마리코의 『자귀나무의 시』시리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다큐멘타리의 사상을 가장 예리하게 추적한 것이 미나마타병의 문제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쓰치모토 노리아키 감독과 그 스텝이다.

미나마타병 문제는 그의 영화 『미나마타-환자들 세계(1971)』를 통해 실제 환자들이 소송에서 승소한 후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하면서 세간의 화제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쿠마모토(能本)현의 시라누히(不知火)해 일대의 오염으로 피해는 더욱 심각하게 확산되어 갔고 더 큰 문제는 그것이 금방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또 지방자치단체나 정부가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쓰치모토 노리아키 감독은 그러한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피해를 조사해서 장편 기록영화 『시라누히 해(1975)』를 만들었다

이제까지 다큐멘타리는 사건의 뒷북을 치는 것이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진상을 파헤져 사람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1986년에 공개된 이와나미(岩波) 영화사의 하네다 스미코(羽田澄子) 감독의 『치매노인의 세계』는 학술적 연구 가치가 높은 영화로 앞서가는 간호와 요양 시설을 갖춘 어느 병원에서 생활하는 이른바 치매 노인의 간호 방법을 담은 영화다. 편집하기 전, 촬영된 노인들의 가족들을 찾아가 양해를 구했고 아쉽게도 양해를 얻지 못한 노인들의 장면은 전부 잘라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일본은 세계 최장수국이 되었고 거기에 따라 ‘누가 노인들을 돌볼까’ 라는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영화나 TV 드라마, TV 다큐멘터리로 치매노인을 다룬 작품이 늘어났으며 만약 치매노인이 있는 가정은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가정자체가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작품은 그러한 우려에 대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는 자주상영(自主上映)이나 사회교육기관을 통한 상영으로 제한적인 관객들만 접할 수 있었지만 이 작품은 동경 이와나미 홀에서 장기 상영되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 더 나가 이 작품은 전국에서 상영되었으며 하네다 스미코 감독은 각 상영 장소를 찾아다니며 관객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중 가장 많이 나온 질문이 그런 간호를 해주는 병원이 어디냐는 것이었다.

그 병원은 실재 존재하지만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고, 또 감독은 처음부터 그 병원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병원을 밝히지 않았다. 하네다 스미코 감독은 정부나 지방 자치단체가 앞장서서 이러한 시스템을 추진해나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무런액션도취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네다 감독은 프로듀서인 에도 미쓰루(工藤充)와 함께 기후(岐阜)현의 이케다초(池田町)로 가서 그곳 마을 사람들과 합의해 그러한 노인 간호 시스템을 확립하자고 결의하고, 그 일을 추진해서 1년 동안 얼마만큼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라는 테마를 가지고 『치매노인의 세계』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안심하고 늙기 위하여(1990)』를 제작했다. 결과적으로 마을의 행정적 노력은 그다지 진척을 보이지 못했지만 노력하는 과정에서 노인 간호에 필요한 유익한 자세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작품 역시 이와나미 홀에서 장기 상영되면서 지방 시민들이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하여 각지의 지방 단체나 시민 모임에 빌려주기도 했다. 또한 복지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용 자료로써 배포하기도 했다.

민족문화 영상연구회를 주재하는 히메다 타다요시(姬田忠義) 감독은 1970년대 이후 민속학적 입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활발히 추진해나가고 있다.

『에치고 오쿠미오모테(越後 奧三面)』는 니가타(新潟)현의 미오모테가와(三面川)강의 댐 건설로 수몰될 오지 마을의 일년간의 농사, 사냥, 채집, 생활용구 제작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나 연중행사 등을 필름에 담아 설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극(劇)적인 순간이나 구성, 등장인물의 인간미라는 특별한 상황에 중점을 두지 않고 일지처럼 담담하게 그리고 필요한 것만을 골라 설명한 영화다. 잊혀져 가는 생활 지혜와 그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아가면서 삶에 애착을 갖는 모습에서 앞으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배울 가치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탐구해 나가는 제작진의 제작 방법 자체가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잃어가는 농민들의 생활 지혜와 그들의 생활에대한 애착이야말로, 이후에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불가결한 것이 되기 위한 신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민족문화 영상연구소는 직접 영화를 기획, 제작하기도 하고 향토의 생활과 전통을 영상으로 보전하고 싶어하는 지방 자치단체나 마을 등의 지원을 받아 제작하기도 한다. 지방단체 등의 지원을 받은 작품은 상업적인 면을 배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극(劇)적인 강조를 전혀 고려치 않고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통상의 다큐멘터리가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반해 미야기 마리코의 『자귀나무의 시(1974)』나 쓰치모토의 『시라누히 海(1976)』등에서처럼 감독이 직접 나서서 뭔가의 이슈를 내세워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영화로 제작할 수 있다는 주장들도 있다.

그러한 주장에 동의해서 영화를 만드는 작가로는 『안녕CP(1972)』와 『극(極)사적 에로스연가(1974)』를 제작한 하라 카즈오(原一男)감독이 있다. 하라 카츠오 감독이 극단적인 방법을 이용해 사람을 경악시켰던 작품이 『가고 가는 신군(神軍)(1998)』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오쿠자키 겐조(62세)라는 남자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뉴기니아 전선에 참전했었던 그는 자신을 단 한 명의 신군 평등병(神軍 平等兵)이라고 자칭하면서 지금까지도 천황을 위시해 당시 부대 상관과 전우에게 전쟁 책임을 추궁한다.

오쿠자키 겐조는 뉴기니아 전선에서 전쟁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탈영병이란 죄목으로 총살된 전우에 대한사건의 진상을 파헤펴 간다. 그는 그 과정에서 폭력도 불사했으며 그로인해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다큐멘타리가 그 상식 밖의 난폭한 행동을 통해 벌어지는 현장을 촬영했다는 점에서 다큐멘타리의 규율을 어겼다고 작품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분명하게 제시한 것은 뉴기니아 전선에 있었던 일부 일본 병사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인육을 먹었을 정도로 처참했다는 사실과 일본인들이 애써 감추고 있던 천황의 전쟁책임을 모두에게 환기시켰다는 점이다.

일본영화학교 학생였던 테라다 야스노리가 졸업작품으로 만든 다큐멘타리 『MY WIFE IS PHIL-LIPINO(1992)』는 동경에서 개최한 국제 학생영화제에서 입상해 받은 상금으로 만든 후속편을 합쳐 ‘아내는 필리핀 여자(1993)’라는 제목으로 1993년에 국제 학생영화제에 출품했다. 이 작품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동경 어느 술집에서 호스티스를 하고 있는 테레사라는 필리핀 여성과 결혼한 감독 자신의 사생활을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이 가족들의 절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골인하는 데까지가 제1부의 주제다. 제2부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아내이면서 엄마인 테레사가 자식 교육은 뒷전이고, 마닐라에 있는 그녀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주기 위해 호스티스 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일본인 남편인 즉 감독 자신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었다.

이것은 감독 자신의 사적인 부부생활을 담은 일종의 사적 영화라고 해도 좋지만 거기에는 아시아와 일본의 관계를 위해 구체적이고 현실감있는 차원에서 취급해야 할 많은 문제가 제시되어 있다. 두 사람의 결말이 과연 어떤 방법으로 내려질지가 어떤 서스펜스 영화보다도 강한 서스펜스를 자아내고 있다.

야스유키 감독과 김덕철(金德哲) 감독이 공동으로 제작한 다큐멘타리 『도강(渡江)(1994)』은 고지(高知)현의 고교생들이 예전에 자신들의 땅에 강제 연행돼 온 한국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서클활동에서 한·일관계의 역사를 공부해 간다는 내용이다. 고등학생들이 직접 한국을 방문해서 종군 위안부의 고발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최근 영화에서는 볼 수없었던 젊은이들의 순수함을 엿볼 수 있다.

시게노 요시야(茂野良彌)의 『아버지 없는 시대』는 1997년 일본 영화학교의 졸업 작품으로 비디오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만하임 하이델베르크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과 국제 비평가 연맹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상을 받았으며 이것을 더 보완하여 극장판(1999)으로 제작해서 상영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기획자이면서 주인공인 무라이시 마사야(22세)는 유년기에 부모의 이혼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고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바이섹슈얼(양성애자)인 그가 마음의 상처를 잊기 위한 방법으로 칼로 자해를 하지만 그도 그러한 행동에 대해 항상 고민을 한다. 그런 그에게 이혼한 부모와 새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가를 묻는 형식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 바로 시게노 요시야다.

처음 그들의 기획은 부모의 행동이 자식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가를 파헤쳐 그것을 비판을 할 생각였다. 하지만 스탭들이 만나 본 그의 부모들은 모두 선량한 어른들였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좋은 부모가 아니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것을 뉘우치고 있었고 그래서 자식의 당돌한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변해 준다.

무라이시 마사야는 촬영후 자살할 생각으로 거침없이 내뱉는 자신의 물음에 가식없이 답변해 주는 부모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어렸을 때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복잡한 심경을 하나하나 이해해 나간다. 세 명의 부모와 무라이시 사이에 응어리는 풀리고 어느덧 따뜻한 대화가 진행된다.

무라이시 마사야는 이 영화를 마음의 상처를 자기 스스로 치료하는 자가진단 영화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영화가 완성되면 자살할 생각였지만 영화가 완성됐을 땐 그 마음은 사라졌다고 했다. 영화가 이런 효능을 가진다는 것은 학생의 실습작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극한 상황의 사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에서 부모와 자식간에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보편적인 문제를 영화로 만들어 일반 관객에게 호응을 받았다는 것은 큰 발견이었다.

지바 시게키 감독의 『사랑의 철도(1999)』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 나라현의 나라에서 호주와 일본의 화해를 위해 노력한 호주의 토니 글린 신부(1926~ 1994)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전쟁 중에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해 태국과 미얀마를 잇는 타이맨 철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이 호주 포로병들에게 저지른 잔혹 행위와 그에 따른 호주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확실하게 담았다. 그리고 오래된 필름이 인터뷰를 통해 호주인들이 갖고 있는 증오심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해 갔는지에 대해서도 보여 주었다. 또 일부분은 드라마로 제작하여 진실을 담은 감동적인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40여년간 나라에서 활동했던 토니 글린 신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나라의 시장을 비롯해 많은 시민들이 중심이 돼서 모금한 제작비로 만든 이 영화는 현재 일본과 호주의 카톨릭 조직등이 주축이 돼서 각지에서 상영되고 있다.



카메라 작업을 하다가 보면 단순히 찍는 다는 일 이외에 무었인가를 만든다는 마음가짐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이는 무언가를 찍는다는 행위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상위의 개념으로 자신이 촬영하고 있는, 이러한 시퀀스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완성 되어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촬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부분에서 카메라맨은 항상 감독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전체를 보고 그 과정 중에 지금 촬영하고 있는 부분이 어떻게 쓰일지, 어떻게 연결을 하면 좋을 지를 판단 하여야만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과정없이 단순히 촬영에만 임하다 보면 구성이 없는 평이한 내용밖에는 건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한 시퀀스라 하더라도 어느 부분에 힘을 줄 것이고, 어느 부분을 여유롭게 풀어 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체적인 속에서 지금 촬영하고 있는 부분의 목적이 명료하게 판단 되어야만 그림에 옮길 수 있는 문제이다.

이제 다큐멘터리 분야에 있어서는 카메듀서라든가 VJ등의 시스템이 도입되어 서로간의 영역이 차츰 허물어져 가고 있는 추세이다. 때문에 카메라맨은 단순한 촬영자가 아닌 목적과 구성을 이해하는 촬영감독의 입장이 되어 촬영하는 능력을 키워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감독의 역활과 임무등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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