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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숙댁 이야기

작성자오스카쉰들러|작성시간24.08.22|조회수29 목록 댓글 0

○당숙댁 이야기○

당숙께선 해방 이후 일본에서
능금나무 묘목을 들여와
12000평 밭에 묘목을 심어 많은 소득으로
재종 형님을 청구대학(현,영남대학교)까지
마치게 했다.
이후 교사가 되어서
영덕에 있는 중학교 교사로 부임해
6개월 정도 지났을까 학생을 체벌하다
뺨을 때린것이 그만 고막이 파열되어
짧은 교직 생활을 마쳐야했다.
시골치곤 부유해서인지
당숙의 여섯 자매는
대부분 부유한 집안에 출가하여
그런대로 잘살고 있다고한다.
70년대 초기에 이곳도
부동산 열풍이 불어
당숙께서도 연로한지라
편하게 살고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토지를 높은값에 팔게되어
대구로 이사 하기전
당숙모는 우리집에 오셔서 하신 말씀은
"형님 이자만 뜯어 먹고 살아도 평생 돈을 다 못쓴다고 하네요."
그렇게 말씀 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자랑할만도 하지만
우리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상대의 마음을 헤아렸으면 좋았겠다.
12000평 판돈이 그렇게 많은줄 몰랐다.
큰 여관과 목욕탕을 구입해
운영한 당숙집이 부자였지만
우리집과는 그렇게 사이가 좋지도 않았고
문중에도 당숙은 출입하지 않았으며
아버지께선 문중일을 도맡아 하셨다.
재종 형님께선 딸하나 낳고
몇번 자궁외 임신하여 자식을 못보자
딸아이가 열살이 넘어서
당숙은 빼어난 외모의 여성을
씨받이로 받아드려서 가까운곳에
재종 형님과 살게했다.
1년이 지났을까 간절했던 당숙부가
바랐던 손자를 낳았다.
빼어난 미모의 엄마와
재종 형님의 외모를 이어 받아서인지
정말 잘 생긴 손자는 당숙의 행복 그 자체였다.
시댁에 살고있는
재종 형수의 속은 얼마나 상했을까
짐작이 가지만 당숙의 행복에 묻혔다.
그러나
당숙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대문짝만하게 실린 신문 기사로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든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자식을 죽이고 엄마는 자살하고
당시 1980년대 초에
대구 수성구에 일어난 사건으로
당숙의 가세는 대구로 떠난지
20년도 안된 기간에 기울기 시작해
결국 비행기 소리 시끄러운
불로동에 전셋집으로 전전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재종 형님께서 위독하다는 소식에
어머니와 우리 4형제는 불로동 집을 찾아갔다.
재종 형님은 당뇨로 황달이 오고
병석에 누워 계셨고
당숙모와 재종 형수는 옆에 지키고 있었다.
잠시 잠깐 시간이 흐르고
당숙모는 당시 우리집에
소흘히 한것도 알고 있었고
가끔씩 둘째 형님이 당숙모를 찾아
용돈준 사실을 당숙모는
이야기하고 뉘우치며 고마워했다.
한달후 재종 형님은 세상을 떠났다.
그 많은 재산은 어디로 갔을까?
부유함은
대를 이어서 지속될줄만 알았지만
그 대도 끊어지고 재물도 바닥났다.
아마도 모자 자살 사건
무마의 비용이 아닐까 추정할뿐이다.
사촌이 없는 내겐
가장 가까운 혈족이고
여섯 자매중 막내는 나와 동창인데
여섯자매는 어디에 사는지도 잘 몰랐다.
지난해 우연찮게
읍내 철물점에 들러 알게된
5살많은 다섯번째 누나를 만났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했듯이
우리집과 3km 가까이에 살고있었다.
한번은 자형과 누나를 모시고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
지난 가을에 누나를 태우고 우리산에서
아내와 나와 셋이서
유년 시절의 기억들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올해는 너무 바빠서
누나한테 기별하지 못했는데
가을쯤 시간되면 또 모시고 가서
성장기에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늙어가고 싶다.
능금 농사로 부유하게 살았던
12000평 그 땅엔
삼성 라이온스 경산 볼파크는
2군 선수들로 활기가 넘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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