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부흥의 역사

[스크랩] 19세기 부흥운동의 특성과 열매 [4]

작성자초대짱|작성시간11.08.22|조회수279 목록 댓글 0
 

4.영국의 부흥

A. 영국의 찰스 스펄전

“그리스도인들은 ‘부흥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어떻게 부흥

을 일으키겠는가?“ - 찰스 스펄전 -

19세기초엽 영국의 기성 교회는 침체해 있었고 많은 성도들은 국교를 떠나 따로 모이고 있었다. 루터, 칼빈, 웨슬러를 통한 부흥이나 이와 유사한 개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엽 대다수의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금 냉냉한 형식주의에 빠져들어 갔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이 일으켰던 전쟁으로 성도들은 성경의 예언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주님의 오심이 가깝다는 진리가 새롭게 주목을 끌게 되었다. 또한 고고학적 발견은 고등비평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점차로 성경의 권위를 회복시켜 갔다. 이에 따라 3대 각성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선교열의 고조, 성경의 대대적 보급, 그리고 이제 말씀드리려는 형제운동의 시작을 들 수 있다.

영국 교회는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과 함께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재위 기간 동안1), 조지 윗필드 이래로 가장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종교(기독교)는 백성에게 권위가 있었다. 사회는 백성들에게 엄격한 도덕과 윤리를 요구했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주권은 높아지고, 성경 말씀의 권위는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행복을 보장했다. 바로 이러한 축복의 물결은 당시 영국의 교회가 전국적으로 부흥한 결과였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찰스 스펄전을 보내 주셨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교 때문에 보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17세의 어린나이에 워터비치에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부터 56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치기까지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목회를 했다. 어린 나이로 목사가 된 2년 후, 80명이 모이던 런던의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New Park Street Church)에 청빙을 받아 런던 목회를 시작했다. 그의 설교 때문에 불어나는 교인을 수용하기 위하여 예배당 창문을 헐어버리고 밖에까지 교인이 앉게 되었다. 얼마 후 교회는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런던의 엑시터 홀(Exeter Hall)을 임대했고, 다시 1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써레이 뮤직 홀(Surrey Music Hall)을 임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런던에서 한 주간에 5번 정도의 설교를 하다가 12번 이상의 설교를 해야만 했다. 그가 얼마나 설교 사역 때문에 전 인생을 바쳤는가함은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읽을 수 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피곤한 군병이 그대의 팔에 기대면서 글을 쓸 때 큰 위안이 되는군. 이번 주에는 열한 번 집회를 인도했고, 다음 주에는 열세 번 집회가 약속되어 있다네. 교회 안에서 설교 횟수가 지난해 282번이었고, 올해도 지금까지 세달 동안 80회 이상이나 된다네. 다음 달에는 30회가 잡혀 있군. 지금 사탄이 활동하고 있지만 주님은 더욱 강하시니 든든한 마음뿐이네.…’

송삼용 목사는 그의 책 ‘영성의 거장들’에서 스펄전의 부흥의 원동력은 먼저 설교자로서 스펄전의 영성으로 보았다. 스펄전의 영성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평생 죄와의 끊임없는 투쟁

  (1)일생을 회개의 삶으로 일관함  (2)성결한 삶을 위해 분투함

둘째, 기도중심의 사역과 삶 (1)조지 뮬러식 기도목회(어린 아이처럼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사역) (2)기도를 일상적인 습관처럼 실천

셋째, 기도목회  기도는 부흥을 가져오는 원동력이다.

넷째,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의 삶.

다섯째, 철저한 말씀연구 스펄전에게 있어서 설교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였다. 청교들은 설교자의 첫 번째 의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청교도 사상과 일치한다.

여섯째, 청교도들로부터의 도전

  (1)칼빈과 청교도 신학과 사상이 담긴 서적들을 수없이 탐독 (2)청교도 신학의 왕자인 존  오웬(John Owen)의 ‘하나님과 친교’가 그의 영성의 핵심이 되었다.  

일곱째, 십자가 정신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순종, 수평적으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정신을 실천하는 소명감은 그가 보여준 사회적 봉사와 섬김은 십자가 정신을 실천하는 소명감으로부터 나왔다.


무엇보다도 스펄전의 강력한 설교는 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나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설교는 영적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영국을 살리는 촉진제와 같았다. 그의 설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함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가진 다음에 싱싱하게 나와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 사람들에게 말하라…그러면 하나님의 진리의 위엄에 압도되어 그의 음성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둘째로, 기도의 진액을 쏟음

그 자신이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고, 또한 성도들에게 기도에 관하여 끊임없이 가르쳤다.

셋째로, 말씀의 엑기스를 쏟아 부음

그는 “목회자 후보생들에게”에서 ‘여러분은 계속해서 청중 앞에 서서 설교하려면 더 위대한 성경학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지식에 관심을 가지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책을 밤낮으로 묵상하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고백처럼 청교도들의 설교관에 입각하여 피를 토하듯 뿜었던 설교가 청중을 살리는 원동력이었다. 다시는 설교할 수 없을 듯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설교하듯이2) 설교했다. 


B. 미국의 드와이트 무디(1871년10월 미국 뉴욕)

1855년 4월 21일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wight Lyman Moody,1837-1899)3) 그가 출석하던 교회의 교회학교 교사 에드워트 킴볼이 전해주는 복음을 듣고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4) 그는 미국과 영국의 강력한 복음주의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 되었다. 무디가 섬기던 교회에는 무디를 위해서 기도하던 두 명의 여성도가 있었다. 그들은 무디가 성령에 충만하기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했다. 무디의 심령은 더욱더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는 1871년 10월에 발생한 시카고 대화제로 폐허가 된 교회와 고아원을 위한 구제헌금을 모금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했을 때에 하나님과 대면하는 일을 겪게 되었다. 후에 그는 다음의 글을 남겼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나에게 충만케 하시기를 위해서 매 순간마다 울부짖었다. 음...! 내가 뉴욕시내에 체류하던 어떤 날이었다. 오, 그 날!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일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았었는데... 그것은 언급하기에는 너무 신성한 경험이다. 바울은 14년 동안이나 결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분을 나타내주셨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였기에 그분의 손길이 내 위에 머물기를 위해서 간구했다. 나는 다시 말씀을 증거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설교말씀들은 별다르지 않았다. 나는 어떠한 새로운 진리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백 명의 영혼들이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온 세상을 위한 복된 경험을 등지고 내가 처했던 과거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저울 위에 미세한 티끌일 뿐이다.” (Moody 1900,149)

그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에 헨리 발리(Henry Varley)로부터 “온 인류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헌신된 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실 것을 목격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D.L 무디는 자신이 바로 그 인물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무디는 열정을 가지고 영미 청소년들을 구원하고 제자화하기 위해서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YMCA)를 설립하는 일을 진행했다. 영국의 침례교 목사였던 보이드(R.Boyd)는 무디가 말씀을 증거하고 있던 집회 장소에 가서 보고 느낀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런던의 YMCA 빅토리아홀에 들어갔을 때에 그 모임이 화염에 둘러싸인 것을 목격했습니다. 청소년들은 방언과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무디가 그 오후시간에 말씀을 선포한 일 외에 한 것이 없습니다.” (Hyatt 1997,141)

하나님의 성령은 무디의 사역 가운데서 회심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역설하도록 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했다. 무디의 사역은 그의 현숙한 아내 유그노 에마 레벨은 그의 사역에 동력을 제공했고, 1870년에 유명한  음악가 생키(Ira D.Sankey)를 만나 전도사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음성을 지닌 젊은 공무원 생키와의 만남은 무디의 사역을 완전히 바꾸었다. 생키의 찬양을 통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연 회중은 3R, 곧 죄로 인한 타락(Ruin by Sin),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구속(Redemption by Christ), 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ion by the Holy Spirit)으로 대변되는 무디의 선명한 메시지를 듣고 회개와 구원의 은총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무디의 사역으로 인해 회심한 무수한 영혼들 중에는 그 유명한 캠브리지 세븐이 있는데, 그들 중에는 캠브리지 대학교 학생들과 국가대표 운동 선수들과 국제적 크리켓 선수였던 C.T.스터드도 포함된다. 그들은 결국 해외 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5)         

복음의 열정에 불타던 무디는 두 차례 영국에 전도 여행을 떠났다. 조직도, 자금도 준비되지 않은 채 영국 리버플에 도착한 무디와 생키는 은혜로운 찬양과 서민적이면서도 강력한 복음 메시지를 통해 리버풀, 요크, 뉴캐슬, 런던에 이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완전히 변화시켰다. 무디의 집회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했고 그의 설교는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 영국인이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알겠다는 매우 뜨거운 열정을 느끼지 않고는 결코 무디의 설교를 들을 수 없었다” 무디와 생키로 인해 버밍엄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그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회중에게 옮아붙는 듯했다. 평이하면서도 결단을 촉구하는 무디의 메시지는 수많은 영혼을 깊은 잠에서 깨웠다.

무엇보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디의 선명한 메시지를 듣고 해외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82년 11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열린 무디의 집회는 학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수많은 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세계 선교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7명의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생이 화려한 장래를 뒤로 하고 중국 선교를 자원한 것도 이때였다.

무디 부흥의 영향은 참으로 놀라웠다. 무디는 무디성경학교와 마운트 헐몬 학교를 통해 수많은 그리스도의 일꾼을 양성하고, 존 모트와 로버트 윌더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의 가슴에 해외 선교의 불을 지폈다.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역시 무디 부흥의 산물이었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디의 설교를 듣고 해외 선교를 자원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미국은 영국을 앞지르고 해외 선교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900년 4000명에 불과했던 미국 선교사 수는 4반세기가 지난 1925년에는 1만4000명으로 급증,영국을 훨씬 앞질렀다. 무디의 부흥은 세계 근대 선교를 앞당겼다. 무디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에 불타 5대양 6대주로 달려갔다. 그중에 아시아는 선망의 선교지였고, 조선은 가장 선호하는 나라였다. 돌이켜볼 때 무디 부흥의 가장 큰 수혜자는 조선이었다.6)

1967년 무디는 부인의 건강 때문에 영국을 여행하면서 스펄전, 뮐러, 무어 하우스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해에 시카고 Y.M.C.A 회관인 파웰 홀(Farwell Hall)을 봉헌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영국의 소년 설교가인 무어하우스와 함께 시카고에서 순회집회를 72회나 하였다. 무디는 1873년에서 1875년에 이르는 어간에 3차 영국 전도여행을 하면서 영국 교회에 커다란 부흥을 일으켰다. 또한 무디는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톤 등지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1879년 여자신학교를 세웠으며 그후 수양관 건립, 마운트헬몬 학교 건립, 1889년에는 무디성서학교를 세워 많은 전도자를 배출하였다.

무디는 수차례 영국 전도여행을 하였는데, 미국 부흥 운동에 박차를 가해 미국의 3차 부흥운동(1857-1915)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편찬 사업에도 열심을 내어 잡지를 발간하였으며, 시카고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여 성서와 찬송가 등 경건서적을 출판, 널리 배포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1899년 12월 22일 노스필드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였다.7)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문화와 설교연구원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