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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주홍빛 그리움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05|조회수18 목록 댓글 0

주홍빛 그리움

여름의 초입, 눈부신 햇살이 대지 위로 쏟아져 내릴 때면 어김없이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붉은 얼굴들이 있습니다. 초록이 짙어지는 신록의 계절 속에서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주홍빛의 향연, 바로 능소화입니다. 봄날의 꽃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가벼운 이별을 고할 때, 능소화는 뜨거운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자신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기다립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덩굴은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손짓 같습니다. 옛사람들은 이 꽃을 두고 '구중궁궐에서 임금을 기다리다 지쳐 죽은 궁녀 소화의 넋'이라 부르기도 했고, 함부로 꺾어 넘볼 수 없는 기품이 있다 하여 '양반꽃'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오래된 전설이나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흙담과 돌담을 타고 오르며 무리지어 피어난 능소화의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그 속에 담긴 깊은 그리움과 생명력을 단숨에 느낄 수 있습니다.

따사로운 여름빛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흙돌담길, 그 위를 무성하게 덮어 내린 능소화 덩굴 아래에 한 여인이 서 있습니다. 여인은 마치 오래된 벗의 손을 맞잡듯, 하늘에서부터 늘어진 능소화의 초록빛 줄기를 두 손으로 소중히 품어 안고 있습니다.

단정한 검은색 원피스와 자연스럽게 머리를 감싼 잿빛 수건은 붉게 타오르는 능소화의 주홍빛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오히려 그 화려함을 더욱 깊고 우아하게 받쳐줍니다. 여인의 얼굴에 번진 환한 미소는 능소화의 만개한 꽃잎을 고스란히 닮아 있습니다. 눈가에 머문 부드러운 주름과 붉게 물들인 입술, 그리고 카메라 너머를 향한 평온하고도 온화한 시선은 단순한 찰나의 기록을 넘어 긴 세월을 인내하고 마침내 피어난 삶의 여유를 보여줍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자연의 순리라지만, 그 꽃을 알아보고 곁에 서서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는 것은 삶을 사랑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사진 속 여인은 능소화의 붉은 열정을 가슴에 품고, 지난 시간의 희로애락을 모두 긍정하는 듯한 아름다운 표정으로 섰습니다. 그 미소 앞에서는 여름날의 찌는 듯한 무더위도, 삶의 고단함도 잠시 길을 잃고 멈추어 설 것만 같습니다.

능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꽃이 피어날 때보다 질 때의 모습에 더욱 깊은 여운을 느낍니다. 벚꽃처럼 잎새 하나하나를 바람에 날려 보내며 스러지지 않고, 목련처럼 검게 시들어가는 모습을 남기지도 않습니다. 능소화는 꽃이 가장 붉고 아름다운 순간, 그 모양 그대로를 유지한 채 툭, 하고 땅으로 몸을 던집니다.

처연할 정도로 단호한 그 낙화의 순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습니다. 가장 찬란할 때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 상처 입거나 시들기 전에 스스로 끝을 맺는 결연함. 흙바닥에 떨어져서도 여전히 주홍빛 나팔 모양을 잃지 않는 떨어진 능소화들을 보며, 우리는 삶을 어떻게 맺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소리 없는 철학을 배웁니다.

돌담길에도 며칠 뒤면 붉은 꽃송이들이 하나둘 내려앉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는 이의 마음은 결코 슬프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땅에 떨어진 꽃송이조차 또 다른 풍경이 되어 누군가의 발걸음을 빛내줄 테니까요. 여인이 쥐고 있는 저 덩굴 끝에서 피어난 꽃들도, 훗날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그 기품을 잃지 않을 붉은 생명들입니다.

능소화의 또 다른 이름은 '금등화(金藤花)'입니다. 황금빛 덩굴꽃이라는 뜻이지요. 이 꽃은 스스로의 힘으로 서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 기대어 자라납니다. 하지만 그 기대음은 결코 나약함이 아닙니다. 벽이 있으면 벽을 타고 오르고, 나무가 있으면 나무를 감싸 안으며 기어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는 지독한 생명력의 발현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빛을 향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는 능소화의 덩굴은, 때로는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훔치다가도, 다시금 서로의 손을 잡고

여인이 덩굴을 부드럽게 감싸 쥔 손길에서도 그러한 다정함과 연대의 온기가 느껴집니다. 자연과 사람, 식물과 인간이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는 찰나의 기적이 저 작은 손끝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계절은 돌고 돌아 어김없이 다시 여름을 맞이합니다. 누군가에게 이 덥고 습한 계절은 그저 피하고 싶은 시간일지 모르나, 담장 밑을 서성이는 이들에게는 주홍빛 위로를 건네받는 황홀한 시간입니다. 여름날의 오후, 낡은 돌담을 따라 걷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치는 붉은 능소화. 그리고 그 꽃그늘 아래서 사진 속 여인처럼 환하고 티 없는 미소를 지어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그 순간만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완벽한 한 편의 시가 될 것입니다.

꽃은 지기 위해 피어나고, 여름은 떠나기 위해 머뭅니다. 짧아서 더욱 눈부신 이 계절, 내 마음속 낡은 담장 위에도 붉디붉은 능소화 한 송이 피워 올려 봅니다. 뜨겁게 사랑하고, 미련 없이 내려놓으며, 삶의 매 순간을 저 꽃처럼 온전하고 눈부시게 마주하기를 다짐하면서. 능소화가 속삭이는 주홍빛 연가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참으로 찬란한 능소화 필 무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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