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의 계단
황금빛 계단 위에 한 여인이 서 있다. 붉은 비단이 층층이 흘러내리고 금실로 수놓은 문양은 마치 오래된 왕조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하다. 머리 위에 얹힌 화려한 관은 권위를 말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오히려 따뜻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황후를 떠올리지만, 나는 그 모습 속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본다.
계단은 언제나 위와 아래를 연결한다. 오르는 사람도 있고 내려오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정상에 서기 위해 오르고, 누구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 내려온다. 계단은 목적지를 향해 이어지는 길이지만 동시에 삶의 흔적이 새겨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녀가 서 있는 계단도 그러하다. 반짝이는 황금빛은 화려해 보이지만 그 빛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숨어 있다. 한 사람의 미소가 아름다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다림이 있었을까. 한 사람의 눈빛이 깊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렀을까.
우리는 종종 결과만 본다. 활짝 핀 꽃을 보며 감탄하지만 그 꽃이 견뎌 낸 겨울은 보지 못한다. 푸르게 우거진 나무를 보며 감동하지만 그 나무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 시간은 잊고 산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성공은 보이지만 그 뒤에 숨은 외로움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웃음은 보이지만 그 사람이 견뎌 낸 아픔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삶은 계단과 닮았다.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쌓인다. 때로는 미끄러지고 때로는 숨이 차오르지만 우리는 다시 난간을 붙잡고 다음 계단을 오른다. 뒤돌아보면 그 한 걸음들이 모여 어느새 긴 세월이 되어 있다.
어린 시절에는 빨리 정상에 가고 싶었다. 높은 곳에 오르면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알게 된다. 행복은 꼭 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행복은 오르는 과정 속에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배우는 인내 속에 있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용기 속에 있으며, 함께 걷는 사람의 손을 잡아 주는 따뜻함 속에 있다.
황후의 계단은 화려하다. 그러나 진정 아름다운 것은 계단이 아니다. 그 계단을 걸어온 사람의 시간이다. 젊은 날의 꿈도 있었을 것이다. 가슴 뛰는 사랑도 있었을 것이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날도 있었고,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다시 웃음을 찾았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이 모여 지금의 얼굴을 만든다. 그래서 중년의 미소는 아름답다. 그 미소 안에는 수많은 계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봄의 설렘과 여름의 열정, 가을의 성숙함과 겨울의 인내가 함께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젊음은 꽃처럼 화려하지만 세월이 빚어 낸 미소는 꽃보다 깊은 향기를 남긴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다. 황후란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끝까지 품어 낸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이 주는 시련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상처를 품은 채 다시 일어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황후일 것이다.
황금빛 계단은 언젠가 빛을 잃을지 모른다. 화려한 옷도 세월 앞에서는 낡아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품격은 사라지지 않는다. 선한 마음과 따뜻한 미소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얼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머무는 것임을 그녀는 말없이 보여 주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계단 위에 서 있다. 마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듯, 그리고 앞으로의 길을 바라보듯. 눈부신 황금빛 속에서도 그녀의 미소가 더욱 빛나는 이유는 화려한 장식 때문이 아니다. 수많은 날을 견디고 걸어온 삶의 무게가 그 미소 속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계단 위에 서 있는 황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가정을 지키며, 누군가는 꿈을 지키며, 또 누군가는 사랑을 지키며 자신의 계단을 오른다. 비록 왕관은 쓰지 않았을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세월만으로도 충분히 존귀하다.
오늘도 삶은 한 계단씩 우리를 앞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계단 끝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가장 빛나는 것은 황금빛 궁전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고 걸어온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을. 그 깨달음이야말로 황후의 계단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