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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멈춰선 기차역, 문학의 숲으로 피어나다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3|조회수24 목록 댓글 0

멈춰선 기차역, 문학의 숲으로 피어나다

기차는 더 이상 서지 않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쉼 없이 이어지는 곳. 대한민국 철도 역사상 최초로 인물의 이름을 딴 기차역.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옛 김유정역은 단순히 쓰임을 다한 폐역(廢驛)이라는 단어로 묶어두기에는 너무도 짙고 풍성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공간이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던 맑은 날, 나는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도심의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소설가 김유정의 숨결이 켜켜이 배어 있는 그곳으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역사 주변으로 너르게 조성된 ‘유정이야기숲’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솟아 있는 커다란 깃털 펜 모양의 조형물이었다. 하얀 깃털과 매끄러운 펜촉이 파란 하늘, 그리고 짙푸른 산등성이를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허공을 원고지 삼아,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조형물 아래 다소곳이 적힌 "추억을 만들어요, 낭만을 이야기해요!"라는 다정한 문구는 방문객의 마음을 한결 부드럽게 무장 해제시켰다. 이곳은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봄·봄』과 『동백꽃』을 남긴 김유정 작가의 향토적이면서도 해학적인 감성이 공간 구석구석에 짙게 스며들어 있었다. 문학이 머무는 이 조용한 숲속을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나 역시 1930년대 어느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 좋은 몽상에 빠져들었다.

숲길을 따라 조금 더 걷다 보니 마주친 옛 기찻길 옆에는, 짙은 파란색 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커다란 은빛 물뿌리개를 든 채 서 있는 귀여운 역장님 인형이 보였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무심한 듯하면서도 따뜻한 온기가 묻어나는 표정을 지은 역장님은, 덜컹거리던 기차가 영영 떠나버린 빈자리에 아름다운 꽃과 푸른 나무를 가꾸며 이 소중한 공간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든든한 파수꾼 같았다. 그의 정성스러운 발길과 손길이 닿는 곳마다, 멈춰버린 차가운 쇳덩어리의 시간 대신 새롭고 따스한 생명이 움트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더 이상 기차가 달리지 않는 녹슨 철길 위로는 선명한 노란색 프레임의 포토존이 액자처럼 세워져 있었다. 그 위로 적힌 "오늘도 기다립니다.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이라는 한 줄의 문장은, 가벼운 나들이의 들뜬 마음에 묘한 먹먹함과 짙은 여운을 툭 던져놓았다. 프레임의 기둥 한편에는 지팡이를 짚고 선 사람과 그 곁을 지키는 작은 강아지의 실루엣 조형물이 그림자처럼 세워져 있었고, 누군가 잠시 세워둔 듯한 자전거 한 대가 그 아련한 풍경 속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오래된 철길 위에 가만히 서서 저 멀리 아득하게 뻗어 나간 두 가닥의 선로를 바라보며 저마다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그리움의 대상을 떠올렸으리라. 한때 만남과 이별의 교차점이었던 기찻길은 이제 끝을 알 수 없는 아련한 기다림과 서정적인 낭만의 공간으로 완벽하게 변모해 있었다.

과거의 상념에서 빠져나와 발걸음을 조금 더 옮기니, 생기 넘치는 푸른 잔디밭 위로 단란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사슴 가족 조형물이 나타났다. 뒤편으로 슬며시 열려 있는 샛노란 색의 문 조형물, 그리고 싱그러운 나무들이 겹겹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동화책 삽화 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진짜 깊은 숲속에 들어온 듯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사방을 포근하게 둘러싼 짙은 녹음은 잿빛 도심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지쳤던 눈과 마음을 투명하고 맑게 씻어주는 천연 치료제와 같았다. 자연의 싱그러움과 문학의 깊이, 그리고 아기자기한 예술이 아무런 경계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이 공간은, 목적지를 향해 늘 바쁘게만 흘러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숨을 고르고 느리게 걷는 법을 가만히 가르쳐주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걸음은 옛 김유정역 역사(驛舍)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연한 노란색으로 칠해진 외벽에 주황색 기와지붕을 다소곳이 얹은 아담하고 소박한 단층 건물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진한 아날로그 감성을 물씬 풍겨냈다. '김유정역'이라고 적힌 파란색 직사각형 간판 위로 선명하게 남아있는 코레일의 마크는, 이곳이 그저 꾸며진 세트장이 아니라 한때 수많은 사람들의 벅찬 만남과 아쉬운 헤어짐이 수없이 교차했던 진짜 기차역이었음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반쯤 열린 하늘색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당장이라도 빳빳한 제복을 입은 역무원이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하며 목적지가 적힌 종이 승차권을 경쾌하게 끊어줄 것만 같은 따스한 온기가 건물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나절 남짓 머물렀던 옛 김유정역에서의 시간은, 마치 낡은 나무 서랍장 깊숙한 곳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빛바랜 일기장을 조심스레 꺼내어 읽는 것과 같이 애틋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시선을 빼앗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들로 가득 찬 번잡한 세상 속에서, 이곳은 그저 소박하고 진정성 있는 이야기의 힘만으로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육중한 기차의 날카로운 경적 소리 대신 맑은 새소리와 나뭇잎이 바람에 사각이며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매캐한 매연과 먼지 대신 향긋하고 싱그러운 풀내음이 코끝을 가득 채우는 곳. 나는 아쉬움을 남긴 채 옛 철길과 작은 역사를 뒤로하고 돌아서며 가만히 생각했다. 육중한 쇳덩이의 기차는 영원히 멈춰 섰을지언정,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롭게 피어난 서정적인 낭만과 따뜻한 문학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영원히 멈추지 않고 시간의 선로 위를 달릴 것이라고 말이다.

신남역이라는 옛 이름을 벗고 한국 문학의 거장 이름을 입은 옛 김유정역. 이곳은 단순한 간이역의 흔적을 넘어, 우리 모두의 메마른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던 문학적 감수성을 톡톡 두드려 일깨워주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다정한 마음의 정거장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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