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우리들의 이야기

초롱꽃 불빛 아래, 번뇌를 내려놓은 미소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6|조회수13 목록 댓글 0

초롱꽃 불빛 아래, 번뇌를 내려놓은 미소

여름이 짙어지는 길목, 숲의 숨결이 머무는 그늘진 자리마다 하얀 초롱꽃이 무리 지어 피어났습니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태양을 향해 자신의 색을 과시하는 여느 꽃들과 달리, 초롱꽃은 수줍은 듯 아래를 향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의 어두운 발길을 비춰주기 위해 밤새워 등불을 매달아 놓은 듯, 그 순백의 빛깔은 짙은 녹음 속에서 유난히 맑고 단아합니다.

꽃잎 속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상을 향해 함부로 입을 열지 않겠다는 묵언의 다짐이 엿보입니다. 바람이 불면 작은 종소리라도 딸랑이며 울릴 것 같지만, 초롱꽃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며 제 안의 향기를 조용히 다스릴 뿐입니다.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오히려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그 겸손한 자태는, 가시 돋친 말과 허세로 무장한 채 숨 가쁘게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 곁, 짙푸른 잎사귀들이 내어준 포근한 품속에는 작은 동자승이 앉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은 듯, 혹은 애초에 근심이란 것을 가져본 적 없다는 듯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입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와 입가에 번진 티 없는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단단하게 뭉쳐있던 마음 한구석이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동자승의 목과 어깨에는 제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염주가 걸려 있습니다. 속세의 인간들이라면 그 묵직한 구슬 하나하나에 재물과 명예, 욕망과 미련을 꾹꾹 눌러 담아 무겁게 짊어지고 다녔을 테지요. 하지만 동자승에게 그 염주는 더 이상 짊어져야 할 번뇌의 무게가 아닌 듯합니다. 그저 바람이 스치면 스치는 대로, 햇살이 머물면 머무는 대로 둥글게 깎여나간 평상심(平常心)의 징표일 뿐입니다.

초롱꽃과 동자승, 이 둘은 묘하게도 서로를 쏙 빼닮아 있습니다. 아래를 향해 피어나는 꽃의 겸손함은 욕심을 비워낸 동자승의 마음을 닮았고, 세상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는 동자승의 미소는 숲 속을 밝히는 초롱꽃의 맑은 빛을 닮았습니다. 초롱꽃이 거친 마음의 길을 밝히는 조용한 등불이라면, 동자승은 그 길 위에서 행여나 길을 잃지 말라고 건네는 따뜻한 위안입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쥐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갑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 어깨의 짐을 기꺼이 늘려갑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춰 섰을 때, 우리는 종종 길을 잃고 깊은 공허함에 빠지곤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왔는지, 나의 진짜 미소는 어느 길목에 두고 왔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말입니다.

풀잎 사이로 가만히 몸을 낮추어 봅니다. 동자승의 시선이 닿는 곳, 초롱꽃이 비추는 땅의 가장 낮은 곳을 응시해 봅니다. 그곳에는 화려한 영광이나 대단한 성취는 없지만, 생명을 품어 안는 흙의 온기와 이름 모를 들풀들의 평화로운 숨쉬기가 있습니다. 비로소 깨닫습니다. 진짜 행복은 아등바등 까치발을 들어야 간신히 닿을 수 있는 아득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키를 한껏 낮추었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발밑의 평안에 있다는 것을요.

초롱꽃이 들려주는 침묵의 위로를 듣습니다. 동자승이 건네는 무소유의 넉넉한 미소를 마음에 담습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은 산사에 흐르는 계곡물에 씻긴 듯 개운해집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나를 짓누르던 크고 작은 욕심의 염주들을 가만히 내려놓고 싶어 집니다. 그리고 스쳐 가는 인연들에게, 심지어 상처받은 나 자신에게조차 다정하게 웃어줄 수 있는 저 동자승의 해맑은 얼굴을 기꺼이 닮아보고 싶습니다.

어느새 풋풋한 여름 바람이 지나가며 나뭇잎을 흔듭니다. 초롱꽃의 하얀 등불이 살랑이고, 동자승의 미소 위로 일렁이는 햇살이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가득 채우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충분히 아름답고 눈부신 숲속의 한때입니다. 내 마음속 가장 깊고 고요한 곳에도 지지 않는 초롱꽃 한 송이 피워두고,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웃을 수 있는 동자승 하나를 가만히 모셔두어야겠습니다. 삶의 무게가 버거워 걸음이 무거워질 때마다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