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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한옥의 멋, 낙숫물 떨어지다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9|조회수15 목록 댓글 0

한옥의 멋, 낙숫물 떨어지다

밤이 내린 한옥은 낮과는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마당은 고요하고 처마 끝에는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멈춘 자리에는 시간의 숨결만 남아 있다. 그 적막 속에서 문득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한 방울의 소리다.

똑.

짧고 가벼운 소리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붙든다. 그 소리는 어둠을 깨우지도 않고 침묵을 무너뜨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고요를 더욱 깊게 만든다. 한옥은 그렇게 작은 소리 하나까지 품어내는 공간이다. 돌담 아래 놓인 시루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수없이 많은 구멍이 뚫린 낡은 시루는 이제 밥을 짓지 않는다. 하지만 세월을 담은 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릴 적 아궁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풍경이 문득 떠오른다. 쌀이 익어가는 냄새와 장독대 너머로 스며들던 저녁 햇살, 그리고 마루 끝에 앉아 부채질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하게 되살아난다.

한옥은 기억을 저장하는 집이다. 콘크리트 건물은 공간을 만들지만 한옥은 이야기를 만든다. 대청마루의 결마다 사람들의 웃음이 배어 있고, 기둥마다 세월의 손때가 남아 있다. 문지방은 수많은 발걸음을 기억하고, 처마는 비와 바람을 견뎌낸 시간을 품고 있다. 방 안으로 들어서면 오래된 나무 냄새가 먼저 맞아준다. 서까래와 기둥은 반듯하지 않다. 휘어진 나무는 휘어진 그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저마다의 상처와 굴곡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것이 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세월이 만든 무늬가 되어 삶의 깊이를 더한다.

장롱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나뭇결 사이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숨어 있다. 누군가의 혼수가 들어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비단옷과 편지가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비어 있어도 그 속에는 여전히 삶의 온기가 남아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한옥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희미한 등불 아래 마당은 검은 비단처럼 고요하고, 담장 너머 바람은 낮은 목소리로 지나간다. 처마 끝에서는 다시 낙숫물이 떨어진다.

똑.

또 한 방울이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속 먼지들이 하나둘 가라앉는다. 세상은 점점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낙숫물은 서두르지 않는다. 한 방울이 떨어지고 또 한 방울이 이어질 뿐이다. 그 단순한 반복 속에 삶의 이치가 숨어 있는 듯하다. 사람도 그렇다. 우리는 늘 빨리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높이 올라야 하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인지 모른다. 낙숫물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해 흐르면서도 자신의 길을 잃지 않는다.

한옥은 그런 겸손을 가르쳐 준다. 높은 빌딩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지만 한옥은 땅과 함께 숨 쉰다. 기둥은 땅에 기대고 처마는 하늘을 품는다. 자연을 이기려 하지 않고 자연 속에 스스로를 맡긴다. 그래서 한옥에는 편안함이 있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 욕심을 덜어낸 여백의 미학이 살아 있다. 문득 마루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빛은 처마 끝에 걸리고 달빛은 마당에 내려앉는다. 오래전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도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기쁜 날도 있었고 슬픈 날도 있었겠지만 그 모든 시간은 지금 이 공간의 일부가 되어 있다. 낙숫물이 다시 떨어진다.

똑.

그 소리는 마치 세월이 건네는 인사 같다. 바쁘게 살아온 오늘을 잠시 내려놓고 쉬어 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한옥은 침묵으로 이야기하고, 낙숫물은 고요로 노래한다. 그래서 한옥의 멋은 화려함에 있지 않다. 오래된 나무가 품은 시간, 마당을 스치는 바람, 처마 끝에 맺혔다 떨어지는 물방울 속에 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것들, 그것이 한옥의 아름다움이다. 오늘도 밤은 깊어가고 처마 끝에서는 낙숫물이 떨어진다. 한 방울의 물이 돌을 뚫듯, 한옥의 고요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소리 속에서 잊고 지냈던 느림과 여유, 그리고 삶의 따뜻한 결을 다시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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