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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제12과 - 여호와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엄기호 목사)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5.09.12|조회수45 목록 댓글 0

제12과 - 여호와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엄기호 목사)

https://youtu.be/xvf7_WwLNjc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 에스라인 나무강단에서 제공하는이 안식학교 교과 해설 방송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아, 이제 오늘 벌써 이제 12과입니다.

아, 정말 끝이 보입니다. 그동안 함께 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 여호와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이 모세의 기도문이지요. 아, 여기에 담긴 그 모세의 마음과

또 그 의미를 저희가 이해하고 우리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내용 혹 기억나는지 모르겠습니다. 11과 12과 13과는 세트입니다. 특별히

11과에서 위기가 찾아왔어요. 하나님이 이들과 정말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런데 12과에서 해결이

됩니다. 어떻게 그게 해결될 수 있었고 그리하여 13과에서 성소가

원래대로 프로젝트 계획대로 완성될 수 있었는지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여기 하나 있습니다. 이 점을 오늘 꼭 좀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도 12기 그림 먼저 좀 보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예. 피테르 브뤼헬이 그린 그림입니다.이 농민의 결혼식이라는 그림입니다. 여기서 농민은 뭐 그냥 농사 짓는 사람이 아니라 소작농이라고 하나요?

이렇게 좀 더 가난하고 땅이 없어서 땅을 빌리고 대부분은 또 이렇게 주인에게 돌려주고 조금씩 조금씩

근근히 살아가는 어떤 그런 느낌의 단어입니다.이 결혼식인데 뭐 교회나 뭐 예식장이 아니라 창고 같은 곳에서 합니다. 뭐 금도 좀 난 거 같고요. 뭐 지푸기도 좀 걸려 있습니다. 여기 있는 반찬도 아 정말 단순해 보입니다.

 

결혼식이라고 보기에 좀 그럴 정도로 단순해 보이는데 근데 여러분 이쪽을 보시면 저쪽을 보시면 그래도 사람들이

막 몰려 들어옵니다. 이 따뜻한 교제를 찾아오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이 피테르 브뤼헬이 농민의

화가라고 불리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한기 동안 계속 이분의 그림을 보여 드리고 있지요. 근데 이분이 농민 출신이어서 농민의 화가가라고 불리는게 아니고 그 농민들을 향한 또 어린이들을 향한 또 약자를 향한 따뜻한 시선을 늘 품고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온다고 합니다. 그 사실 농민들은이 그림을 살 만한

능력도 없고 감상할 만한 여유도 없습니다.

 

그 사실이 경제적인 걸 생각하면 농민의 화가로 불리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약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사실 그래서 여기도 보면 여기 검정색고 옷입은 이분 이분이 아마도

피테르 브뤼헬 자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농민들의 옷을 입고 거기 앉아서 그들의 모습을 그냥 자연스럽게 지켜보면서 그걸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인이었던이 피테르 브뤼헬이 농민의 화가로 불리우는 건 단순히 그의 그림 솜씨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인격 때문이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한 열매가 이런 그림을 낳았고 그는 농민의 화가로 불린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번 12과에서 아주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는 성장입니다. 특별히 교과 저자는 모세를 계속해서 성장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종전에 피테르 브뤼헬이 성장한 사람으로서 농민의 화가가 되었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인 삶의 여정 속에 우리도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전형적이고 정말 아름답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모세라는 겁니다.

 

모세가 성장했다는 겁니다. 모세가 성장한 것 이과에서 절정으로 나오는게 뭘까요? 맞습니다.

목요일 소지입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빛날 수 있었을까?

그게 바로 성장의 결정인 거지. 어떻게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럼 그런 질문을 가지고 오늘 교과 내용을 좀 살피면 좋겠습니다.

예. 사실요 제목이 답인 거 같아. 여호와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기 기억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가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선포하시며 그분이 어떤 분인지 그의 품성을 스스로 계시하셨습니다. 아, 이거 위대한 계시의 장면입니다. 모세가 왜 그렇게 얼굴이 빛날 수 있었을까?이 이 구절을 모세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그 내용들을 살피겠습니다. 오늘 계속 나누고 싶은 질문은 이런 겁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마치 모세가 방금 전에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또 경험했던 것처럼 그래서 빛이 날 정도로 성장한 것처럼 오늘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속에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가? 오늘은이 질문을 나누고 싶습니다. 교과책에 보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교과서 교과책 서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는 대로 자신을 내어 맡긴다면 성장의 각 단계마다 우리는 뭐 할 수 있다고요? 완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성장의 각 단계가 완전합니다. 꼭이 끝이 돼야지 완전한게 아니고 각 단계마다 완전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이 그렇지 않나요? 각 단계마다 그들은 완전 속에 성장하는 겁니다. 부모의 사랑 속에 그들은 완전한 존재로 인정되고 그

대접을 받으며 성장하는 겁니다. 그게 자녀의 행복입니다.

 

여기 계속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역에서 완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성장 단계에서 그러할 수 있다. 완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성장은 행복입니다. 불완전해서

완전하게 되기 위하여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 안에서 우리는 매 단계마다 완전합니다. 근데 그 완전은

계속 성장하는 아주 역동적인 완전인 겁니다.

 

아, 이 은혜가 참 감사합니다. 시대 소망의 한 구절을 제가 좀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아마 예전에도 나눴던 거 같은데요. 그와 같이 나도 하늘에서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각 성장할 때마다 하늘에서 그대의 대표자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완전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분 우리의 대표자이시죠. 그래서 침례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 침례도 받으셨어요.

 

시험도 당하셨습니다. 모든 인생의 매 발걸음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대표자입니다.

 

“그와 같이 나도 하늘에서 그대의 대표자가 될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대의 결함이 있는 품성을 보지 아니하시고 나의 온전함(my perfection)으로 옷 입은 것을 보신다.”(소망, 357)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분이 우리의 대표자가 될 때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대의 결함 있는 품성을 보지 않고 뭐라 그랬지요? 나의 온전함. 영어로는 my perfection입니다. 나의 완전함입니다. 나의 완전함으로 옷입은 그대를 보신다. 매 단계마다 성장할 때 우리가 완전하게 인정되고 그렇게 대접받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함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은 나의 대표자이십니다. 우리 어린아이들도

우리들도 우리 각자의 대표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들도 각 사람을 그렇게 완전하게 여겨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그 행복 누려야 하겠지. 여러분, 우리 예수님 참 좋으신 분아닌가요? 이런 리더 밑에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자기가 이룬 걸 다 우리 걸로 인정하면서 그렇게 대우해 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장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 그 임재와 인도하심 속에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이제 일요일입니다. 만남의 회막.

여러분 저희가 지난과에서 어떤 위기가 발생했었는지 봤습니다. 배도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지만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완고하게 고집을 피우던 그 배도한 사람들은 또 심판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일 이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약속한 그 땅에 그 땅으로 올라가라. 여러분, 그런데 여기에 이제 어떤 위기가 등장합니다. 여러분, 그걸 느끼시면 좋겠습니다. 가라고는 하셨는데 어떤 위기가 있었을까? 2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내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 거기 있는 사람들 쫓아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라는 거예요.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3절에 나옵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그 땅에 들어가게는 하겠는데 여러분

여기 문제가 뭐지요?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이 같이 가지

못하시는 겁니다. 어, 여러분,이 위기 상황을 아시겠나요? 이게 문제인 겁니다.

하나님이 같이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여기 왜 그런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든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라.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제 다시는 배도하지 않는 백성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에요. 또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상 그들을 진멸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못 가신다는 겁니다. 이게 배도 사건 이후에 등 나타나고 있는 위기요 문제입니다. 그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이스라엘 백성들 슬퍼합니다.

그리고 단정하지 않지요. 그때 하나님이 5절에 또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목이든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 이르면 너희를

진멸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상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장신구를 떼어내라.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가 직면하게

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했고 이제 우리도 살펴보게 되는

겁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합니다. 그 장소가 일요일 소지

 

제목인 만남의 회막입니다.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날 때도 있었지만 여기 보는 것처럼 한 회막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이 회막은 나중에 지어질 성막과 다른 겁니다. 여기 보면 진밖에 쳐서 멀리 떠나게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진 가운데 있던 성막과는 분명히 다른 겁니다.이

회막에서 모세가 중보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모세와의 대화 속에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이때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지요.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 얼마나 가까운지를 보여 주는 겁니다. 아,

이런 중보자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오늘 우리에게도 하늘 성소에 아, 중보자가

계십니다. 그런데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표현을 정말 얼굴을 모세가 볼 수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20절에 보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고 하나님이 또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그 가까운 관계를 이렇게 대면하여 친구처럼 이야기했다라고 표현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제 월요일 제목입니다. 일단 그 위기 상황 속에서 도무지 백성

하나님과 백성이 함께할 수 없는 그 위기 상황 속에서 중보자가 있다는

것이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보자 인간의 중보자이지만 모세가 어떤 모습과 이야기를 하는지

저희가 지금 계속 보겠습니다. 여러분 교과책에 저자가 강조하는 건

모세가 성장한 겁니다. 그래서 월요일 서지 보면 첫 문장입니다.

 

모세는 주님 안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모세가 성장했습니다.

그 성장의 모습을 좀 저희가 볼 텐데요. 이런 경험을 했다고 교과책이

설명합니다. 월요일 제목이 주님을 알게 하소서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이미 긴 세월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졌어요. 미디안 광야에서도 계시를 보며 성경도 기록했습니다. 출애굽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도 봤어요.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 모세가 여러분이 33장의

시점에서 뭐라고 기도하는 거지요? 주님을 알게 하소서. 이게

뭐 이미 다 안 거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교과책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느 날 그 만남의 장막 아까 월요일에 일요일에 봤던 내용입니다.

그 만남의 장막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던 중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그렇게

대면하여 이야기하던 중 가까이 이야기한 겁니다. 모세는 갑자기

자신이 뭐를 깨달았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기도했어요? 13절. 주의 길을 내게 보여주사 내가 주를

알게 하시기를 기도했다. 여러분, 그러니까 모세가 긴 시간 하나님을

정말 깊이깊이 알아왔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성장, 결정은 얼굴에

빛이 나는 그 순간입니다. 그 성장의 과정 속에 모세에게 주어진 아주 중요한 깨달음이 무엇이었나요? 내가 하나님을 모르는구나.이 이 깨달음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깊이 더 깊이 알고 싶은 갈망이 모세에게 생긴

것입니다.이 교과 방송을 듣는 많은 분들이 아마 오랜 시간 우리 신앙 안에서 생활해

오신 분들이라고 여겨집니다. 혹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서도 이런 모세와

같은 경험이 있었는지요?

 

아, 그렇다면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그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혹에게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이 경험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10년, 20년, 30년 교회 다니고 성경 공부하고

오랜 시간 지나왔지만 아, 내가 하나님을 모르는구나. 아,이 경험,이 고백과 깨달음이 오늘 우리의 경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때 더 깊은 만남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새로운 책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계속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주님을 알면 알수록 자신이 그분을 오히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달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은혜가 모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는데 저는이 성경절이 좀 생각이 났습니다. 계시록 21장 6절이지요.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생명수 생물을 목마른 자에게 갑없이

주겠다. 여러분 갑없이 생명수를 주시는데 누구에게 주신다고 하지요? 맞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갑없이 주시는 겁니다. 모세가 갑자기 목말라진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모르는구나. 내가 하나님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목마음이 생겼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더 깊은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 준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성장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이 은혜가 필요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화요일에 계속해서 모세의 기도를 좀 보겠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는 내용들이 계속 나오는데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함께 가 달라는 겁니다. 예. 아까 위기 상황 보셨었지요.

야, 난 너희들 가운데 못 갈 텐데 너희들 가라. 모세가 하나님 안 됩니다. 하나님 반드시 함께 가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지 않으시면 차라리 우리 올려보내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모세의 마음 아시겠지요?

하나님이 반드시 임재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였고요.

 

두 번째는 그런 과정 속에서 모세가 기도한 건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때 드린 기도가 주의

영광을 보여주소서라는 기도인 겁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니까

모세의 마음에 두 가지 소원이 있다고 보시면 좋겠어요. 백성들과 함께 가 주십시오.

 

두 번째는 그 자신이 하나님을 깊이 알고 싶은 열망이 생긴 겁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오늘 저희도 아 이러면 참 좋겠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제 모세에게이 기도에 대한 응답을 주시는

거지요. 우리 재림교회 주석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세상의 어떤 능력도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에서 우러나는 지식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니까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만큼 큰 선물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여러 선물들이 있지만 하나님 그분이 가장 큰 선물임을 저희는 믿습니다. 그걸 사모하는 겁니다.

 

지금 모세가 그걸 위해 기도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싶은 겁니다. 그 모세의 두 가지 마음이

여기 다 담겨 있는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많이 알면 알수록 그는 더욱 많이 알기를 갈망한다 그랬어요. 오늘 우리 안에이 갈망이 있다면 오늘 우리도 성장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근데 만약에 이런 갈망이 내 안에 없다 그러면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맞다면 우리의 신앙의 연수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우리 안에 이 갈망이 살아 있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갈망에 응답하실 것이 틀림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하나오니 주의 영광을 보여 주소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기에 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직접 보여줄 수는 없으셨어요. 그래서 여기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것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그 하나님의 선한 품성이 그분의 영광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주의 영광을 보여 주소서. 선한 것을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이 곧 그분의 품성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기 그분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그 선한 품성이 이름에 담겼는데 그 선한 품성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여기 19절.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게 우리 하나님의 선한 품성입니다.

그러 여기에 어떤 하나님의 품성이 담겨 있을까요?

그러 저희가 이걸 잘못 이해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은 누군가에는 은혜를 베푸셔.

그러나 누군가에겐 은혜를 안 베푸셔. 나처럼 계속 하나님 속이고

불순종하는 나에게는 이런 은혜가 해당되지 않을 거야. 뭐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럼 은혜를 베풀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뭐

베풀지 않으시는 건가?이 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이 강조된 것처럼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초점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절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누구에겐 은혜를 베풀고 누구에겐 은혜를 안 베푸고 이런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이 이 구절은 사실 똑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푼다. 반복입니다.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 이것도 반복입니다.이 똑같은 형태가 출애굽기 3장 14절에 여호와의 이름을 소개하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한 그 구조와 사실

똑같다고 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걸 설명드릴 때 나는 곧 나다라는 번역이 있다는

걸 설명드렸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같은 동사가 두 번 반복되는 거예요. I am that

I am. 나는 존재한다. 나는 존재한다. 뭐 이렇게 반복됩니다. 그까 똑같은 말이

두 번 반복돼서 사실상 어떤 정보가 별로 없는 겁니다.

 

요것도 같은 구조라 그래요. 같은 말이 반복되는 겁니다.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푼다. 예. 그래서 이게 여호와의 특성인 겁니다.

 

그럼 이게 무슨 뜻인가? 여러분, 조금 전에 배도 사건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금 모세가 그 배도 사건을 이 초한 위기 속에서 기도하는 거죠. 하나님 함께 가 주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그분의 선한 품성을 선포하신

겁니다. 그게 이겁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도무지 은혜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그니까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 베푸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는 그 품성이 여기 강조된 겁니다. 그분은 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인 거예요. 그게 여호와라는 이름에 담긴 그 뜻이라는 겁니다. 그분은 늘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긍휼이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분. 그분이 여호와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위기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이제 화요일입니다. 이제 제가 앞서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여러분이 위기가 이스라엘의 배도를 초래해서 초래된 하나님이 야, 이들과

끝까지 함께 하실 수 있을까? 이런 위기가 어떻게 해결되는가? 그들이 뭘

했기 때문에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근거로 그 문제를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해결하시는 겁니다. 그래서이 구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그 선한 품성 때문에 그 선한 품성을 근거로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겁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고 깊어질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회개나 우리의 선한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는 근거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이걸 알 때 그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반응하며 우리가 마음을 그분께 드리게 되고 우리의 생각과 삶의 변화가 점점 더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행위가 근거가 아니라는 것. 오로지 하나님의 품성이 근거가 된다는 걸 여러분이 꼭 좀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아 이제 수요일 내용으로 가겠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다시 한번 선언됩니다. 그 내용입니다. 근데 여기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하나가 있습니다. 여기 교과책에 설명합니다. 이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다시 올라갑니다. 출애굽기 34장이지요. 근데 그때가 시내산에 올라간게 몇 번째냐면 일곱 번째입니다. 여러분 교과책에 보시면 다른 여섯 번이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초읽기 34장은 일곱 번째입니다. 그리고이 일곱 번째 올라갔을 때 얼굴에 빛이 난 겁니다. 여러분, 그래서 저희가 아, 모세가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졌기 때문에 얼굴에 빛이 닿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앞서서 여섯 번이나 이미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졌어요. 다섯 번째 때는 40일, 40이 아하도 머물면서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모세의 얼굴에는 빛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두 돌비를 받아서 내려올 때도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모세는 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도를 보고요. 여러분, 그러므로 이건 참 저희가 생각해 볼 아주 중요한 주제 같아요.

도대체 왜 모세는 일곱 번째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왔을 때 얼굴에 빛이 났을까? 여러분 제가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도 뭐 이제도 더 묵상하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왜 모세는 앞선 여섯 번에는 왜 빛이 안 나고 일곱 번째 갔다 왔을 때 얼굴에 광체가 났을까? 저희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이 한번 답을 찾아보시고 또 속

혹은 교과 교과 시간에 대화를 나눠 보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근데 여기서 저희가 기억해야 될게 있습니다. 여기 34장 1절에 보면 이제 모세가 일곱 번째 올라갈

때 하나님이 뭐라 그러셨지요? 네가 깨뜨린 그 돌판 준비해서 오라

그랬어요. 그 같은 돌판을 이제 처음 다듬어서 오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이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즉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걸 말씀했습니다. 놀라운 은혜가 강조되었어요. 그러나

그 은혜가 강조되었다고 해서 율법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뭐라

그러셨어요? 야, 내가 다시 써 줄테니까 돌판 가져와 그러신 거예요.

 

여전히 율법은 변함없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 이걸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을

없애는게 아닙니다. 분명합니다. 오히려 그 율법을 다시 주는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오늘 저희들의 삶에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저희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다시금 저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새겨 줄 것입니다. 율법을 약화시키는게 아니고 역설적으로 그 율법을 다시 새겨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율법을 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백성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이것도 아울러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아, 그때 모세가 이제 홀로 올라오라

그러셨지요. 그때 하나님이 시내산 가운데 강림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그 선포가 위대한 계시입니다. 배도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품성을 하나님이 스스로 선언하시는 겁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모세는 저희는 지금 이걸 굉장히 듣지만 모세는 이것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여정 속에서 특별히 그 배도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품성에 분이신는 걸 깊이깊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자격 없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은혜를 모세가 깊이 깨달았을 때 얼굴에 광체가 나는 거

같아. 아울러 율법의 빛도 같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저는이

경험이 계시록 14장 12절의 경험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이 이 믿음이라는 단어는 피스티스인데 그것은 신실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 그 번역 자체가 가능합니다. 여기 있는게 저는 그

예수 피스티스 신실함이 두 가지를 함께 모세가 깊이 경험했을 때 얼굴에 빛이 난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더 많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계속 소개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위대한 계시입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3사대까지 보응하시겠다고 이야기합니다.이 구절 구절 하나하나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시고 특별히 계12절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여겨워집니다.

여러분이 품성의 계시 가운데 모세가 이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데 주는 우리와 뭐 해 달라고요? 동행하옵소서.

그럼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던 그 배도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동행은 하나님의 품성을 근거로 이루어집니다. 이걸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근거로 모세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반응하여 동행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빳빳한 백성이라는 것 고백하지.이 이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나님께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이 지점을 여러분이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목요일입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 제가 계속 사실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모세의 성장의 절정입니다. 아, 하나님 깊은 대면을 가졌는데 피부에 광채가 나는 걸 깨닫지 못했어요. 근데 왜 하필 일곱째에 갔다 왔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여러분이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기 교과책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성품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열었을 때 모세는 비로소 변화되었고 그의 얼굴이 빛났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직접적으로 안게 아니라 자신을 열어서 하나님의 그 은혜가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그때 모세가 변화되었고 빛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앞선 만남과는 질적으로 깊은 어떤 다름 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도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분을 우리 삶에 주님, 주님과 왕으로 모실 때에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 속에서 저희도 하나님의 품성을 더 깊이 경험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더욱 사모하는 저희들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 아, 여러분. 예, 이번과에서도 에, 지난과 똑같이이 찬양 한번 불러 보시면 좋겠습니다.

 

찬미가 439장 애굽의 죄악 속에서 애굽의 죄악 속에 오려 오래 묻혀

살았으나 유월절 양의 피로 나를 구원하셨으니 메마른 사막에서 나를 인도하옵소서.

내 생명 다하도록 구름기둥 따르리다.

 

하나님의 품성을 근거로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가 오늘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이 선물 받으시고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가며 교제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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