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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이사야서의 총론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05|조회수37 목록 댓글 0

이사야서의 총론

 

이사야는 모두 66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별명이 참 많습니다. 이 책은 정말 중요한 책이죠. 먼저 가장 유명한 내용으로는 '메시아 예언서'로 들립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사복음서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사야서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제오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이사야서의 별명이에요. 또 뭐라고 부르는가 하면 '구약의 로마서'라고도 부릅니다.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별명이 '작은 성경'입니다. 왜 이사야서를 작은 성경이라고 부르는지 설명을 드리죠. 이사야서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성경이 모두 66권이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됐든 언제 강의하든 이사야서를 강의할 때는 누구도 빠뜨리지 않고 언급해야 하는 내용이 바로 성경이 66권인 것처럼 이사야도 6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구약이 모두 몇 권이죠? 39권이잖아요. 그리고 신약이 27권이잖아요. 그렇죠? 39, 27, 우리가 흔히 그렇게 쉽게 표현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사야서도 뚜렷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장부터 39장까지, 이게 이사야 제1권이에요. 그다음에 40장부터 66장까지를 이사야 제2권이라고 부릅니다. 이사야 제2권은 다시 둘로 나뉘어집니다. 그 부분은 다음 기에 이사야 제2권을 할 때 자세히 설명해 드리도록 하고, 이번 기에는 우리가 이사야의 제1권에 해당되는 이사야 1장부터 39장을 살펴보게 되겠습니다.

 

우선 왜 그렇게 나누는가 하면 주제가 너무 다릅니다. 1장부터 39장은 주로 심판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40장부터 66장까지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40장부터 66장을 다시 둘로 나누면 40장부터 55장까지를 신학자들은 '제2 이사야'라고 부르고, 56장부터 66장까지를 '제3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1장부터 39장까지를 제1 이사야, 40장부터 55장까지를 제2 이사야, 56장부터 66장까지를 제3 이사야로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요.

 

그러나 크게 보면 둘로 나뉩니다. 1~39장, 그리고 40~66장이지요. 내용상으로 보면 1장부터 39장은 철저하게 죄에다가 초점을 맞춰서, 메시아는 죄를 용납하지 않고 죄를 통치하며 죄를 벌하는 의의 통치자라는 관점으로 죄 문제를 주로 다룹니다. 그래서 이번 기 동안 우리는 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 것입니다.

 

그다음에 40장부터 55장은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이야기, 즉 여호와의 종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사야서는 정말 내용이 심오합니다. 저는 작년, 재작년 한겨울에 이사야서에 빠져서 정말 은혜를 깊이 받았습니다.

 

그다음에 56장부터 66장까지는 새 하늘과 새 땅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말 그대로 종말론이에요. 그래서 1장부터 39장까지는 죄, 40장부터 55장까지는 구원, 그다음 56장부터 66장까지는 종말론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뭐 그런 내용이 주로 집중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퀴즈입니다. 신약에는 구약이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 책은 어느 책일까요? 이렇게 물으면 다 이사야라고 답하시고 싶으시지요? 이사야서는 두 번째입니다.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은 시편입니다. 시편이 가장 많이 인용되어 있고 두 번째가 이사야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연구하려고 해도 이사야서를 연구해야 합니다. 또 시편이 모두 150편으로 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사야는 66장까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 전권에서 시편 다음으로 장수가 많은 책이기도 하지요.

 

신학적 주제도 이 이사야서에 아주 충만합니다. 재림의 문제, 심판의 문제, 안식일 문제, 새 하늘과 새 땅의 문제 등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이사야서이기도 합니다.

 

우리 한국 번역 성경으로는 잘 알 수 없습니다만, 이사야서를 히브리어 본문으로 보면 1장부터 35장까지는 운문입니다. 시의 형태로 쓰여져 있어요. 그다음에 36장부터 39장까지는 다시 내러티브라고 그러지요, 산문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40장부터 66장까지는 다시 운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운문은 시적 형식을 갖췄으니까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같은 형식이고, 산문은 홍길동이 한양에서 태어나서 어쩌고저쩌고 하는 식이지요. 그래서 이사야서는 히브리어 원문을 읽으면 운문, 산문, 운문 요런 형태로 가운데 산문을 끼고 양쪽에 운문이 기록되어 있는 뚜렷한 차이가 나는 그런 책이기도 합니다.

 

이 이사야서는 역시 우리 번역 성경으로는 살릴 방법이 없는데요, 이사야서에는 발음으로 운을 맞춘 경우가 너무너무 많아요. 문학적 기법이 충만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내 정치적 상황을 놓고 '고민할 것이냐, 기만할 것이냐'라고 말할 때, 고민과 기만은 'ㄱ, ㅁ, ㄴ'의 자음 운이 맞잖아요? 그렇죠? '고민인가 기만인가' 할 때 아주 시적인 표현이 되는데, 히브리 원어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번역을 하면 살릴 방법이 없습니다.

 

이사야서는 과장법도 많고요, 양쪽으로 똑같은 단어를 쓰고 가운데에다가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집어넣은 '교차 대구법'도 나오고 대구법도 나옵니다. 또한 시작하는 문장의 첫 단어와 마지막 끝나는 문장의 첫 단어를 똑같이 끝내서 한 문단이 요렇게 시작하고 요렇게 끝난다는 방식으로 구조를 만드는데, 머리 수(首) 자와 꼬리 미(尾) 자를 써서 이를 '수미상관법'이라고 부릅니다. 요런 방식으로도 성경이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가 번역된 성경을 읽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내용밖에 못 봅니다만 원래 히브리어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좀 알 필요가 있지요.

 

조금 우리는 관심이 덜합니다만, 이제 이런 차이 때문에 앞서 드린 말씀을 다 잊어버리시더라도 내용상 이사야서는 66개 장에서 1권과 2권이 어떻게 다르다고요? 1장부터 39장까지가 심판이고, 40장부터 66장까지가 구원이라 그랬죠. 그 40장부터 66장을 다시 둘로 나누면 40~55장, 56~66장 이렇게 나뉘어진다 그랬죠.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내용이 너무 다르다 보니까,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안 받아들이는 비평 신학자들은 이사야서를 한 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게 두 권 혹은 세 권으로 나뉘어진 책이다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증거가 굉장히 강력합니다. 그 첫 번째 증거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릴게요. 물론 이 내용은 다 뒤집어집니다. 다 함께 어디를 보시는가 하면 이사야 1장 1절을 보시죠.

 

> 이사야 1장 1절

> 유다 왕 우시아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 아모스는 선지자 아모스가 아닙니다. 이사야의 아버지 아모스라고 번역된 이분은 성경에 여기밖에 안 나와요. 히브리어로는 '아모츠(Amoz)'입니다. 선지자 아모스할 때는 끝이 's' 발음인데, 여기는 'z' 발음이에요. 그러니까 구분해야 되는데 우리 성경에는 둘 다 아모스라고 해서 일반적인 성경 독자들이 조금 헷갈리게 생겼죠.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라고 했습니다.

 

다 함께 39장을 보시죠. 이사야 39장은 제1권의 마지막 장이라 그랬잖아요. 이사야 39장 3절부터 보면 선지자 이사야가 나옵니다. 4절에도 이사야가, 5절에도 이사야가, 8절에도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라고 나옵니다. 여러분, 이사야서가 66장인데 이사야라는 직접적인 이름이 나오는 것은 39장 8절로 끝입니다. 40장 이후에는 이사야라는 이름이 다시는 안 나옵니다. 없어요. 아, 그러니 1장부터 39장까지는 이사야가 쓰고, 40장부터는 이사야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 써서 거기다 갖다 붙였다고 비평학자들은 생각하는 거예요.

 

두 번째로, 1장부터 39장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나라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그 나라 이름이 뭔가 하면 우리말 성경에는 '아수르'라고 번역이 되어 있어요. 아수르라고 번역된 요 단어가 1장부터 39장에 집중적으로 나타나요. 무려 마흔다섯 번이나 나타납니다. 그런데 40장 이후에는 딱 한 번밖에 안 나와요. 52장 4절에서 말이죠.

 

자, 또 하나 아주 특징적인 거 하나 찾아보겠습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가 이사야서를 연구하면서 계속 살펴보게 될 터인데 이사야 1장 4절을 보시죠.

 

> 이사야 1장 4절

>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거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라는 표현에 중요 표시를 좀 해 두십시오. 요 표현을 좀 하이라이트해 주십시오. 제가 그렇게 부탁을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이사야 5장 19절을 보시죠.

 

> 이사야 5장 19절

>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계획은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똑같은 표현이 또 나왔지요? 또 24절을 보시면,

 

> 이사야 5장 24절

>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지금까지만 해도 벌써 세 번 나왔죠. 여러분,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라는 표현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책입니다. 이거는 이사야서의 독특한 특징이에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1장부터 39장 사이와 40장 이하가 차이가 있을까요? 다 함께 40장 이하를 찾아볼까요? 41장 14절입니다.

 

> 이사야 41장 14절

>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아,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라는 표현이 나오기는 했는데 앞에서는 여호와의 심판과 연결되었다면 여기서는 '구속자'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다음 43장 14절을 보면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라고 나옵니다. 대표적인 사례만 몇 가지 보여 드리는 겁니다. 앞으로 공부하면서 살펴보겠지만, 48장 17절에도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고 나옵니다. 어 과연 그렇지요.

 

두 개 더 찾아보십시다. 49장 7절에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라고 나오고, 54장 5절을 보십시오.

 

> 이사야 54장 5절

>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천하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아 그러니까 39장까지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이라는 표현이 주로 심판의 문맥에서 나오고, 40장 이후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이라는 표현이 항상 구속자라는 표현과 같이 쓰이지요. 그 부분이 또 이렇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학자들이 40장 이후는 이사야가 쓸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진짜 이유는 이사야 1장 1절의 역사적 배경 때문입니다. 유다 왕 우시아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라고네 명의 왕 이름이 나오죠. 그러니까 남방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전이거든요. 분명히 이사야가 예언 활동을 한 때가 우시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내 왕에 걸친 시대인데, 다 함께 이사야 45장 1절을 보시죠.

 

> 이사야 45장 1절

>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여기 고레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고레스 왕이 고대 어느 나라 왕이었어요?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왕이거든요. 이게 시대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사야 사역 이후 므낫세를 거쳐 한참 후에 남방 유다가 멸망을 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이 지나서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일한 대로부터 거의 150년 후에 있을 일인데 사람 이름까지 '고레스'라고 미리 언급되어 있으니, 비평학자들은 이거는 아무리 예언이라 해도 사람 이름까지 이렇게 정확하게 예언할 수는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39장까지는 이사야가 직접 예언한 게 맞고, 40장 이후는 한참 지난 후대에 다른 사람이 고레스 시대를 경험한 다음에 이사야라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쓴 책이 틀림없다면서 이사야서를 나누는 거예요. 제 설명에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면 소위 비평적 견해에 이제 빠져 들어가는 겁니다. 신학계에서는 지금 이걸 거의 정설로 설명합니다.

 

자, 맞아요. 이사야서는 1장부터 39장하고 40장부터 66장까지가 내용도 다르고 문체도 다르고 문장 형식도 달라요. 꽤 뚜렷이 다릅니다. 여러분, 그런데 지금부터 집중해서 들으셔야 됩니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런 차이가 언제나 저자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동일한 저자라 할지라도 사용하는 단어가 달라질 수 있고, 동일한 한 사람도 논문도 쓸 수 있고 시도 쓸 수 있습니다. 논문을 쓰다가도 시를 쓸 수 있어요. 더더군다나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20대에 쓰는 문체와 60대에 쓰는 문체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요, 맞죠? 제가 20살에 쓴 글하고 나이 넘어서 쓴 글을 보면 제가 봐도 달라졌습니다.

 

자, 그러면 아까 살펴봤던 그런 비평적 내용들이 과연 어떻게 뒤집어질까? 그것들은 이제 앞으로 하나씩 본문을 연구하며 살펴보도록 하고, 제일 마지막 문제인 고레스 이야기만 한번 짚어 보겠습니다. 다 함께 이사야 46장 10절입니다. 본문 자체 속에서 무슨 말이 있나 한번 찾아보시자고요.

 

> 이사야 46장 10절

>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자체가 본문 안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전해 주시는 예언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여러분 아시죠?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은 메대 바사, 헬라 같은 나라 이름이 다니엘서 8장에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는 경우가 있죠. 고레스라고 하는 사람 이름까지 예언된 이 부분이야말로 이사야 예언의 정확성과 중요성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거기 고레스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해서 우리가 이사야서를 굳이 두 개의 다른 사람이 기록했다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은, 신약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머지 증거들이 뒤집어지는 내용은 우리 본문을 살펴보면서 연구해 가도록 하고, 다 함께 신약 성경에 가서 이사야서를 인용하는 방식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3절입니다.

 

> 마태복음 3장 3절

>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 마태복음 3장 3절이 구약 이사야 몇 장 몇 절의 인용인지 찾아보시자고요. 이사야 40장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0장 3절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나옵니다. 이사야 40장부터가 제2 이사야, 이사야 제2권이라 그랬는데, 마치 구약이 39권으로 되어 있고 신약이 27권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이사야 40장이 신약의 마태복음처럼 시작하고 있지요. 그렇죠? 참 재밌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3장 3절은 이사야 40장을 인용하면서 분명히 뭐라고 말했어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40장도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했다는 사실을 아주 똑부러지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2 이사야 같은 말 안 했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3장 4절을 보면, 누가도 똑같이 뭐라고 표현합니까?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하면서 이사야 40장을 인용합니다. 맞죠? 그러니까 이사야 40장도 그냥 이사야서예요. 세상이 지금 다 이사야를 둘로 나누고 셋으로 나누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걸 성경 말씀을 통해 정확하게 확정해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2장 17절을 보시죠.

 

> 마태복음 12장 17~18절

>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여기 "보라 내가 택한 종" 하고 이사야 42장을 인용하기 시작하는데, 이사야 42장을 인용하면서 17절에서 복음서 기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그러니까 이사야 42장도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거라고 마태복음은 아주 선명하게 말해 주고 있는 거예요. 의심의 여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8장 28절부터 보겠습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는 장면인데, 내시가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고 나옵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읽는 것을 깨닫느뇨?" 물었더니 내시가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으랴"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같이 앉자고 하지요. 32절에 읽는 성경 구절이 나옵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여러분, 이게 이사야 몇 장에 나오는 내용입니까? 이사야 53장 7~8절이에요. 우리가 다음 기에 공부하게 될 이사야 제2권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이 이사야 53장을 이야기하면서 분명히 뭐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이사야 53장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에요. 고레스 예언이 전개되는 45장이나 고난받는 종이 나오는 53장이나, 신약 성경은 이사야 1장부터 66장까지 모두가 다 이사야 한 사람이 쓴 책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6절입니다.

 

> 로마서 10장 16절

>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인용한 구약이 바로 이사야 53장 1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사야 53장 1절을 인용하면서 '제2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런 말 안 해요. 그냥 "이사야가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서 전반부와 후반부가 다루는 주제가 다르고 문체가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전체 성경을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했다는 성경적 입장을 신약 성경 기자들은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선명하게 증언했습니다.

 

성경은 아니지만 한 가지 증거를 더 말씀드리죠. 여러분, 1947년에 '무하마드 에디브'라는 한 양치는 소년에 의해 사해 동굴에서 '사해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해 사본은 돈으로 그 가치를 환산할 수가 없을만큼 중요합니다. 양을 치다가 양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무서워서 양 나오라고 돌을 던졌는데, 안에서 뭔가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났어요. 그래서 다음 날 동굴에 들어가 보니까 항아리가 놓여 있고, 그 항아리를 열어 보니 두루마리 성경 사본이 들어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해서 고대 성경 사본들이 무수히 발견되었습니다.

 

제가 40대 때 우리나라에서 사해 사본과 관련된 문서를 가장 많이 읽은 사람 중 하나라고 자부할 만큼 한때 사해 사본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에 갈 때마다 사해 사본 관련 책은 하나도 안 빠뜨리고 다 구입해서 읽었고 요약해 두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책의 전당(Shrine of the Book)'이라고 핵폭탄이나 수소폭탄을 터트려도 안 깨지도록 만들어 놓은 건물이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면 그동안 발견된 사본들이 다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그 발견된 사해 사본 중에 당연히 이사야 사본도 있습니다. 이 사본들은 대략 BC 2세기 경에 남겨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BC 2세기에 유대인들이 동굴 항아리 속에 보관해 두었다가 2천 년 세월이 지나 발견된 그 사본의 성경 내용하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 차이가 없는 거예요! 이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섭리적 보호입니다.

 

만약 사해 사본을 보니까 이사야서는 1장부터 39장밖에 없고 40장 이하는 아예 없었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교회를 놀렸겠습니까? 그런데 거기 보니까 사본이 다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해 사본을 남겨둔 공동체를 '쿰란 커뮤니티'라고 말하는데, 그 쿰란 공동체는 이사야서를 그냥 한 권의 책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BC 2세기에 이사야서를 제1 이사야, 제2 이사야로 구분한 흔적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사야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용이 다르고 주제가 다르다는 사실은 신학적으로 그 기별의 깊은 의미를 찾아가야 할 내용이지, 다른 저자가 쓴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번 기에 1장부터 39장의 심판 기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다음 기에 40장부터 66장의 구원 기별을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연구해 볼 만하겠습니까? 이사야서는 아주 풍부하고 깊은 책입니다.

 

다 함께 이사야 1장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 이사야 1장 1절

> 유다 왕 우시아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사야는 유다의 멸망 직전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해서 증언한 선지자인데, 실제로 있는 역사적 상황 속에 살면서 그 시대 상황에 기별을 주었을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먼 미래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함께 보여 주는 것이죠. 1절 마지막 단어가 뭐죠?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여기 '계시'라는 단어가 중요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하존(Chazon)'입니다. '본 계시라' 할 때 '보다'라는 동사도 '하사(Chaza)'이고 명사도 '하존'입니다. 발음이 똑같지요.

 

우리 한국말에도 "나 꿈 꾸었어"라고 말하잖아요? 꿈이라는 명사와 꾸었다라는 동사는 같은 족속의 단어인데, 이런 것을 '동족 목적어' 표현이라고 합니다. 강조하는 뜻이에요. 내가 본 꿈, 내가 본 계시라는 뜻입니다. 계시가 무엇이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시선하고는 다르게,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세상과 이 시대는 이런 의미가 있다고 하나님의 시선을 선지자를 통해 알려 주는 것이 계시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만 보면 이 시대는 이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달리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 어떻게 보이는가를 알게 해 주는 것이 계시입니다. 이사야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기르게 될 것입니다. 이 원기가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사야 1장은 모두 31개 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1절 서론을 빼고 2~9절, 10~20절, 21~31절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나누어지는 기준은 문맥의 전환입니다. 2절을 보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고 경청을 환기시키며 첫 기별이 시작되죠. 그러다가 10절을 보면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며 또다시 경청에 대한 환기를 시킵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가"라며 새로운 관심을 촉구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2절부터 9절까지는 '사회적 상황'이고, 10절부터 20절까지는 '종교적 상황'이며, 21절부터는 다시 '사회적 상황'의 죄를 다룹니다. 종교와 실생활의 상관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지가 선명해지죠.

 

1장 2절입니다.

 

> 이사야 1장 2절

>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 표현은 사람들이 하도 안 들으니까 하시는 표현입니다. 하늘과 땅을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는 증인으로 소환하는 의인법이자 강조 기법이에요. 이거는 사실 고대에 언약을 체결할 때 형식 요건 중 하나였습니다.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정복해서 신하 나라(봉신국)로 삼는 '종주권 계약'을 맺을 때,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항상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을 소환해서 증인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증인을 소환하시는 것입니다. 이 형식이 이사야서가 기록되기 오래전에 성경에 이미 나왔습니다. 어디 나왔는가 하면 신명기 30장 19절입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신명기 32장 1절에서도 모세가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모세가 유언 설교하면서 시작했던 똑같은 형식으로 예언의 기별을 시작하는 것이죠.

 

3절입니다.

 

> 이사야 1장 3절

>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혹시 어릴 때 소 키워 보신 분 계세요? 저는 어릴 때 학교 다녀온 다음에 등치 큰 소를 끈 하나 매고 끌고 다녔는데, 왼쪽으로 줄을 당기면 왼쪽으로 가고 소들이 기가 막히게 조종이 돼요. 소들이 초등학생 애인데도 자기 주인인 걸 알아요. 지금 이사야 3장 속에서 하는 얘기는 한마디로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아'라는 말입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이죠. 성경에는 버러지 같은 인간이라는 표현까지 다 나옵니다. 옛날 개혁한글 성경에 벌레를 버러지라고 번역해서 "지렁이(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라고 나오잖아요.

 

그들의 상태를 선지자는 4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 이사야 1장 4절

>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도대체 누구한테 태어났길래 이렇게 속을 썩이느냐는 말입니다. 여기 '부패한 자식'이라 그랬는데, 이 '부패한'이라는 단어가 그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첫 번째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샤하트(Shachat)'인데 이 단어가 언제 쓰였는가 하면 창세기 6장 11절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라고 할 때 쓰였습니다. 노아 홍수 전의 상태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32장 7절에서 모세가 시내산 위에 있을 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하실 때도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에스겔 28장 17절에서 두로 왕(사탄)의 타락 과정을 이야기하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라"고 할 때 '더럽혔다'는 말이 바로 이 '샤하트'입니다. 그러니까 행위가 부패했다는 말은 홍수 전 사람들 같고, 금송아지 우상숭배 할 때 같고, 사탄의 타락 상태와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라고 했는데, 여기서 '버리다' 혹은 '만홀히 여기다'로 번역된 단어는 민수기 14장 11절에서 10명의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이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라고 하신 '나아츠(Naats, 멸시하다)'라는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여호와를 완전히 멸시하고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가 5절부터 나옵니다.

 

> 이사야 1장 5~6절

>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람의 죄악된 행위가 환경까지 다 어지럽게 만들어서 땅은 황폐했고 성읍은 불탔고 토지는 이방인에게 삼켜졌습니다. 8절에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라며 숨이 막히도록 쪼여오다가 9절에서 숨구멍을 열어줍니다.

 

> 이사야 1장 9절

>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여기 '생존자'라고 번역된 단어가 구약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남은 자'라는 히브리어 '샤리드(Sharid)'입니다. 생존자가 희망입니다. 소돔 고모라처럼 완전히 멸망할 뻔했는데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셨다는 것이죠.

 

이어서 10절부터 문단이 바뀝니다. 선지자는 대상을 향해 은유법으로 직격합니다.

 

> 이사야 1장 10절

>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당시 유다 사람들을 향해 소돔과 고모라라고 부르며 직격하는데, 10절부터 20절의 내용은 전부 다 '종교 행위'의 타락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 이사야 1장 11절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종교의 본질은 다 사라지고 종교의 형식만 철저하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안식일에 교회 나와서 대예배를 드리고 찬송은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은 "나 그거 못 견디겠어" 하시는 형국이지요. 12절에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종교 행위가 얼마나 마당만 밟는 헛된 일인지를 지적하십니다.

 

13절에서는 지금까지 했던 말을 명사로 딱 압축해서 표현하지요.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여기 '헛된'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우(Shaw)'인데 '텅 빈'이라는 뜻입니다. 11절에서는 제물이 '무수한(라브, 큰/많은)' 제물이라 그랬는데, 13절에서는 '텅 빈 제물'이라고 하십니다. 겉으로는 엄청나게 많이 가져왔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텅 비어 있다는 하나님의 심정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지요.

 

이어서 절기에 대해서도 언급하십니다.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제7일 안식일이 됐든 특별한 종교 집회가 됐든 다 소용없다는 것이죠. 1장 2절에서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할 때, '거역하다'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죄를 가리키는 가장 무거운 단어인 '파샤(Pasha, 반역하다)'에서 온 말입니다. 이 죄는 성소를 더럽히는 죄이며, 유다 백성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했음을 신랄하게 제시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4절에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시고, 15절에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하십니다. 예배를 싫어하고 기도를 안 듣겠다고 하십니다. 요약하면, 기도가 삶의 변화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자꾸 변화되지 않는 삶을 보충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내용이 16절에 나옵니다.

 

> 이사야 1장 16절

>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스스로 씻고, 깨끗하게 하고, 버리고, 그치라는네 가지 동사가 나왔죠. 긍정적인 동사 두 개, 부정적인 동사 두 개입니다. 소극적으로는 그치고 버리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씻고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예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묘사하는 것이 17절입니다.

 

> 이사야 1장 17절

>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기에 세 부류의 이웃이 언급됩니다. '학대받는 자, 고아, 과부'입니다. 이 부류는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도와주고 염두에 두어야 할 대상들이었습니다. 신명기 10장 18절에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라고 했지요.

 

참 종교와 참 신앙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약자들에게 구현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끼리 모여서 교제하는 코이노니아(Koinonia)는 교회의 중요한 기능이지만, 거기에만 몰두해 있으면 종교적 사교 클럽에 불과합니다. 예배드리고 교제한 후에는 세상을 위해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성경적 의미의 정의와 공의는 나보다 작은 자, 나보다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나 재정적으로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꾸 사회적 관계에서 위만 쳐다보고, 더 배운 사람, 더 가진 사람들과만 사귀는 것을 좋아하니까 기독교회가 국민들 사이에서 호감도를 잃고 사회적 영향력이 극도로 축소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신명기에서 요구하시는 진정한 종교적 의미를 구현해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들으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생각이 나서 영적으로 마음이 많이 무겁고 부끄러웠습니다.

 

숨이 막히는 책망의 분위기 속에서 18절에서 다시 한번 확 숨구멍을 열어 주십니다. 그 유명한 이사야 1장 18절입니다.

 

> 이사야 1장 18절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10절부터 17절까지 읽으면서 숨 막히는 경험을 해야 18절에 대한 통렬한 감격이 생깁니다. 강렬한 호소 끝에 은혜로운 초청이 있습니다. 여기 '서로 변론하자'는 말은 말싸움하자는 뜻이 아니고 "이야기 좀 하자, 대화 좀 해 보자, 나하고 같이 의논 좀 해 보자"라는 하나님의 달래시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16절에서는 분명히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고 의무를 이야기했는데, 18절에서는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선물로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이 정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다윗의 회개시인 시편 51편 7절을 보면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씻김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하는 '스스로 씻으라'는 말은 '내게 스스로 나아오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가야 하나님에 의해 씻김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서도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성취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사야 1장 18절을 읽을 때 요한계시록 7장 14절의 개념과 반드시 연관시켜서 이해해야 합니다. 주홍 같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지는 것은 오직 어린 양의 피로 씻어서 정결케 하시는 능력의 역사입니다.

 

이 개념을 상실하고 도덕적 완성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씻을수록 교만해지고 깨끗해질수록 목이 뻣뻣해져서 사람이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이사야 2장으로 넘어가면 인간들의 교만을 지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2장 11절부터 보면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라고 나옵니다. 11절부터 17절까지 계속 반복되는 표현이 교만, 거만, 자만, 높음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의 뿌리는 '시방진 것', 즉 교만입니다.

 

그중에 제일 나쁜 교만이 뭔지 아세요? 종교적 교만입니다. 영어로 'Holier-than-you spirit(내가 너보다 더 거룩해 정신)'이라고 합니다. 이거는 못 말리는 병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그 교만의 이야기를 다 지적한 다음에 이사야 2장 22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외우기 쉬운 성경절이죠.

 

> 이사야 2장 22절

>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인간의 호흡은 히브리어로 '네샤마(Neshamah)'인데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때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숨 떨어지면 꽝인데 뭐 그렇게 교만하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차이는 자기가 교만해질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상담심리학이나 불교에서도 '알아차림(Mindfulness)'이라는 개념이 중요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알아차림이 성령의 감동으로 가능합니다.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고 낮아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 2:3~5)을 품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과 2장의 메시지의 핵심은 부패로 시작해서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도덕적, 영적 부패의 근원이 교만이라는 단어로 압축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영적 상태와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영적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사야는 정말 높고 넓고 깊은 책입니다. 이번 기 동안 1장부터 39장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적 영역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이사야 첫 시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첫날이니까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정말 작은 성경이라고 불리는 깊고 넓은 책 이사야서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방 유다가 끝을 향해 가는 그 어두운 시기에, 세상에는 절망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계시를 허락해 주셔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기 시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사야서 연구를 통해 우리 시대를 넘어 하나님의 나라까지 내다볼 줄 아는 마음을 갖게 해 주시옵소서.

 

사람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심정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이 말씀 연구 시간에 주의 은혜가 함께 해 주시옵소서. 함께 참여한 소중한 성도님들을 지켜 주시고, 한 주 동안도 그들의 출입을 주님께서 동행해 주시다가 다음 주 이 시간 다시 반갑게 만나 말씀 안에서 서로 교제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감사하며 이사야의 주인이신 거룩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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