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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가장 위대한 문답: 마태복음 16장 주해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05|조회수55 목록 댓글 0

가장 위대한 문답: 마태복음 16장 주해

 

마태복음 16장 1절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신약 역사를 조금만 알면 16장 1절의 이 표현이 대단히 특이한 경우라고 하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절대로 함께 어떤 일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앙숙 중의 앙숙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적대 세력이었지요.

 

당시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식민 지배 시대에 반(反)로마 정신을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 지배에서부터 유대의 정신을 회복하여 독립운동을 하듯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나름대로 세속에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하는 종교적 정체성이 아주 강력한 집단이었습니다. 바리새(Pharisee)라는 말 자체가 '분리'라는 단어에서 왔지요.

 

반면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사독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로서,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대로 부활을 믿지 않는 굉장히 자유주의적이면서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입장을 추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식민 지배의 중심 세력이었던 로마와 가깝게 지내며 그들의 후원을 힘입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서로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굉장히 심했던 두 정치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16장 1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라고 표현합니다. 이 한 문장을 딱 대할 때, 소위 정치 세계에서 말하는 "적의 적은 아군이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철저하게 두 앙숙 정치 집단이 각각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그들이 동맹을 맺어서 지금 찾아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라고 합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당시의 배경을 알면, 정치적 앙숙 집단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 모든 차이를 넘어 다만 공동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예수를 공경에 빠뜨리기 위해 결탁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시험하여"라고 하는 요 단어는 마태복음 4장에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이후 광야에 나갔을 때, 사탄이 시험할 때 썼던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예수를 시험한 것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시험이 같은 맥락 속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공통된 단어로 그대로 묘사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시험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표적'이란 단어가 나왔는데, 표적이란 단어 앞에 수식하는 표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냥 표적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동정녀에게 탄생하셨을 때 목자들이나 동방박사들이 찾아왔던 이야기들, 또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사건은 완전하게 공개된, 아주 대중적이고 명백한 사건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고 침례 요한이 증거했으며, 가나의 혼인잔치 표적을 시작으로 이미 수많은 표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다 안 받아들이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전제로 한 걸까요? '네가 진짜 메시아라면 갈멜산의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사건이라든지, 여호수아 때처럼 태양이 멈추고 움직이지 않는 종류의 기적을 보여라. 그리하여 네가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하늘에서 증명하는 표적을 보여라'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지상에서의 표적이 아니라 하늘 만나 같은 표적, 엘리야나 여호수아 같은 표적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그들의 정치적 접근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 2절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합니다. 요즘도 시골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도 어릴 때 시골에서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내일은 날이 좋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 비가 오겠다고 분별합니다. 당시 팔레스틴에서도 실제로 농사와 관련해서 날씨 분별을 거의 습관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날씨는 자꾸 분별하려고 하면서, 3절에 하시는 대답이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기 "시대의 표적"이라는 말이 과연 무엇을 뜻하기 위해 주님께서 이런 표현을 하셨을까요? 시대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카이로스(Kairos)'인데, 진행되는 연대기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는 조금 다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기회와 타이밍의 시간입니다.

 

유대인들은 연대기적인 시간 속에서 메시아가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정치적 메시아가 언제 우리를 로마에서 구원해 주실까'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메시아가 눈앞에 와 계시는데, 바로 메시아가 와 있는 이 시대의 표적을 구하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이죠.

 

그러면서 주님은 곧바로 이어서 그렇게 표적을 구하는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두 단어로 정의하십니다. 4절입니다. 그냥 악한 세대라고 해도 되는데, 여기 "음란한 세대"라고 표현했습니다. 악하다는 말은 외적인 불의를 나타내는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음란이라는 단어는 내적인 도덕적 부패를 가리킵니다. 외적으로 악하고 내적으로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는 것이죠.

 

그러고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십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히브리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니까 요나에 대해 잘 알던 사람들입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 밤낮을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 말이죠. 주님께서 다른 설명 없이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셨을 때,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앞에 보여주는 기적이 없으니까 의아해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무엇을 가르치는 표적이었는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나타내 주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요구에 대해서 지금 현실적인 증명을 하지 않으시고, 앞으로 당신이 하실 구속 사업의 미래의 증거를 언급하시는 것으로 대답을 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의심으로 묻는 청중들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구속 사역 과정으로 대답하셨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4장에서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던 사탄의 시험과 똑같은 맥락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증명해 보여라" 하는 마귀의 시험과 같은 것이지요.

 

예수께서 메시아이신데, 예수께서 자기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무언가를 행하시는 순간 오히려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메시아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이적을 행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권을 가진 분이십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적을 행하십니다.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신성을 행하고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것은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없다"고 하신 대답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진짜 모든 표적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행하시는 게 메시아의 일인데, 진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게 무엇인가요? 빌립이 "아버지를 내게 보여 주소서"라고 할 때 예수께서 대답하셨잖아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니와." 주님은 이적을 행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도 이적을 행하시고 우리 주님도 이적을 행하시는데, 그것은 다 구원을 위해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지 "나 이런 사람이야, 똑바로 이거 보고 나 좀 알아줘" 하려고 이적을 행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적의 성격과 목적이 선명합니다.

 

신성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이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적은 품성을 보여 주시는 품성의 계시입니다. 모세가 출애굽기 33장에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했을 때 모세가 원했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외형적 현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얼굴을 보면 살지 못한다" 하시고 바위 틈에 숨기신 후 등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출애굽기 34장 6~7절에서 진짜 하나님의 계시, 진짜 표적을 보여 주시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공의와 사랑이 통합된 분이신지를 나타내 주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큰 접근법을 잃어버리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신을 능력으로만 만나려고 하거나 지적으로만 만나려고 합니다. 주님은 구원하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시지만, 자기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적을 행치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 주시는 이적을 행하십니다.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니와"라고 대답하실 때는 지금까지의 사역을 통해 주님의 품성을 보여 주셨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진짜 우리가 경험하는 최고의 기적은 눈앞에 천사의 모습이 보이는 이런 이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적은 정말 하나님과 상관없고 내 뜻대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마음의 변화를 겪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순간입니다. 신앙을 떠나서 살던 사람이 하나님 안으로 돌아와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는 이 심령의 변화가 가장 큰 기적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구속 사역에서의 요나의 표적,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전제로 하는 구원 사역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대답하신 것이지요.

 

사실 마태복음 16장 4절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주님의 감정 표현이 있었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8장 12절을 보면, 말씀하시기 직전에 주님께서 보이시는 감정 표현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8장 11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절에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라고 마가는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이 질문을 받으셨을 때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만큼 주님이 이 질문 앞에서 괴로우셨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다 보여 주셨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끝까지 표적을 구하는 그 심정 앞에서 주님은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이 건너편이 어디에서 어디로 건너간 것일까요? 15장 마지막 39절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셨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지금 16장 1절부터 4절은 마가단 지경에서 있었던 이야기이지요. 마가단이라고 지명을 말씀드려도 머릿속에 그림이 잘 안 떠오르실 텐데, 이 마가단 지경의 건너편은 베세다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마가단에서 베세다 쪽으로 가시는 상황입니다. 사실 16장 1~4절 사건과 5~6절 사건은 바로 이어지는 사건 같지만, 그 사이에는 대략 몇 달의 시간 차이가 존재합니다.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이야기가 나오고 바로 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이 나오니까 바로 이어지는 사건으로 묘사되죠. 마태는 시간순보다는 주제별로 정리하는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누룩에 대한 병행 구조를 미리 찾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에 보면 같은 주제가 나옵니다.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을 때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하셨습니다. 누룩을 외식이라고 이미 설명해 주셨지요.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와서 16장 6절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시니, 7절에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합니다. 마가단 지방에서 베세다로 건너오면서 배를 타고 오는 사이에 충분히 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먹는 떡에 쓰는 누룩은 별로 질이 안 좋은가 보다'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수준이 너무나 현실적이지요.

 

따라서 8절에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나 무리들에게 말씀하실 때 믿음과 관련하여 두 가지 표현을 쓰십니다. 첫 번째 경우는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두 번째는 마태복음 17장 17절처럼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하십니다. 제자들을 향해서는 믿음이 없다고 표현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라오기는 오는데 아직도 수준이 너무 현실적인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면서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십니다. 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이며, 떡 일곱 개로 4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지난번 공부할 때 강조해 드렸듯이 오병이어 때 남은 것을 담은 것은 '바구니'이고, 칠병이어 때 담은 것은 '광주리'입니다. 15장 37절에 보면 광주리에 담았다고 나옵니다. 바구니와 광주리가 다르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바구니는 손으로 들고 다니는 작은 것이고, 광주리는 사람이 들어갈 수도 있을 만큼 큰 곡식을 담는 통을 말합니다.

 

여기 지금 두 개의 사건이 서로 다른 사건이라고 하는 사실이 예수님에 의해 다시 선명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만 주로 기억하는데 성경은 이처럼 선명하게 두 개의 이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천 명을 먹이고 남은 바구니와 4천 명을 먹이고 남은 광주리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주님께서 두 개의 다른 단어로 선명하게 구분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렇게 먹이고 바구니와 광주리를 남겼는데, 너희는 아직도 먹는 것을 걱정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개념을 하나 파악해야 합니다. 정말 교훈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들으면 반드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예수께서도 전제하고 계신 것이지요. 가르침과 교훈은 귀로 듣고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아도 마음에 누룩처럼 남습니다. 아까 누가복음에서는 누룩을 '외식(위선)'이라고 했고,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의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위선자로 만드는 교훈, 마음을 변화시키는 교훈이 아니라 외식하게 만드는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이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목회자들도 우리의 신앙을 성찰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것이 정직하고 솔직한 모습인 것이지, 외식하게 만드는 교훈에 속아 겉만 꾸미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수께서는 마음의 진실과 정직의 교훈을 끊임없이 말씀하시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즉 그들의 교훈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무언가를 들으면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고, 그 영향이 삶과 판단을 일치시켜 주지 않고 분리시키면서 위선자로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성찰해야 할 모습입니다.

 

13절입니다. 이제 두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이 되지요. 마태복음 16장 13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이어지는 이 사건은 신약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름하여 '참 위대한 문답'이라고 이야기하고, '가장 큰 질문'이라고 표현합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종종 질문을 던지십니다. 저는 어느 날 복음서를 읽다가 예수께서 결정적인 교훈을 주고자 하실 때는 그냥 설명하지 않으시고 질문을 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께서 베데스다에서 병자를 만나서 이미 병이 오랜 줄 아시고도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또 베드로를 완전히 회복시키실 때도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한 걸 이미 다 아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심으로 베드로의 마음을 콕 찍어 확고하게 해 주셨습니다.

 

중요한 질문이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 언급됩니다. 가장 위대한 문답이자 그야말로 피할 수 없도록 하신 질문입니다.

 

> 마태복음 16장 13절

>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신약의 배경을 알면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특별한 지리적 뉘앙스를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지명은 두 사람의 이름을 합쳐서 만들어 놓은 지명이기 때문입니다. 뒤의 '가이사랴'는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 시저(Caesar)의 이름에서 온 단어이고, 앞의 '빌립보'는 헤롯 대왕의 아들인 분봉왕 빌립의 이름입니다. 분봉왕 빌립이 자기가 지배하던 지역을 로마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 황제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고, 거기에 자기 이름 빌립을 덧붙여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부른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디베료 황제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 바다라고 부른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빌립보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 우상숭배 신전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바알을 숭배하던 중심지였고 시저를 숭배하는 황제 신전까지 만들어져 있던 장소였습니다. 제자들과 예수께서 바로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오셨다는 사실은, 우상숭배가 가장 노출되기 쉬운 장소에서 진정으로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배경이 됩니다. 바로 그 장소에서 예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르치실 때는 끊임없이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인자'라는 칭호는 예수님의 자칭호(Self-designation)입니다. 반면 예수를 믿는 청중들이 예수를 향해 말할 때는 단 한 번도 인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침내 도마도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지요. 예수는 사람들에게 나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낮추어 말씀하시고, 메시아를 보는 사람들은 그분을 믿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자칭호와 우리들의 신앙 고백이 이렇게 철저하게 구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가 말씀 사역을 할 때에도, 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만날 때에도 예수님의 이 태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자기를 소개할 때는 철저하게 눈높이를 맞추어 "인자"라고 자기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를 경험하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성 고백을 하도록 이끌어 내신 것이죠.

 

주님이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절에 보면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더이다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을 헐뜯는 나쁜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마태복음 12장 24절 같은 곳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향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며 귀신 들린 자라고 비난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험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말하는 것만 전해 드립니다. 침례 요한이 부활했다고 생각하거나, 말라기 4장에 예언된 마지막 선지자 엘리야라고 생각하거나, 유다 멸망의 때에 눈물로 호소했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 중 하나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게 보고 있다는 전함인 동시에, 제자들 역시 아직 주님의 정확한 신성적 아이덴티티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음을 반증해 줍니다.

 

15절에 예수님께서 콕 집어 다시 물으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구절은 헬라어로 읽으면 '휘메이스(Hymeis)'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너희, 바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굉장히 강조된 표현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의 모습을 보고 부활한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이죠.

 

이때 언제나 일 순위로 나서는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16절입니다.

 

> 마태복음 16장 16절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3절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인자"라고 하셨는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대답합니다. 인자라는 자칭호에 대한 완벽한 신앙 고백의 응답이 이루어졌습니다. 메시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같은 시대에 같이 먼지 나는 길을 걸으면서 같이 밥 먹고 같이 땀 흘리고 같이 잠자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혹되면 오늘 이 시대에도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에 그런 교주가 공식적으로 40명이 넘습니다. 한국만큼 그런 교주가 많은 나라가 없어요. 미혹의 세력들입니다. 오직 예수님께만 해야 할 신앙 고백을 인간에게 돌리는 것이지요.

 

이 구절에 나타난 단어 하나하나는 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을 하자 예수께서 들으시고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마태복음 16장 17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서 '바(Bar)'라는 말은 아람어로 히브리어의 '벤(Ben, 아들)'에 해당합니다. 베냐민이 '오른손의 아들'인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요나'는 선지자 요나를 뜻하며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요나'라는 말은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몬'은 듣는다는 뜻의 '쉐마'에서 온 이름입니다. "바요나 시몬아"라는 호칭은 철저하게 베드로 그 자신의 혈통적이고 육신적인 태생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예수께서 왜 베드로라는 이름 대신 이 이름을 부르셨을까요? 이미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로 바꿔 주셨으면서 왜 위대한 고백을 하는 순간에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을까요? 이것을 이해해야 그다음 18절이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 혹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시는 아주 독특한 경우가 또 한 번 나옵니다. 바로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다음에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만났을 때입니다. 그때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즉, "너의 원래 본질이 무엇인지 기억해라. 네 원래 근본은 바요나 시몬이다"라고 환기시켜 주시는 호칭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이 위대한 신앙 고백은 인간 시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게 해 주신 신적 역사라는 사실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비로소 당신이 바꿔 준 이름을 부르십니다. 18절입니다.

 

> 마태복음 16장 18~19절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권한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엄청난 권한을 주시며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하십니다.

 

여기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할 때 이 반석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기독교 역사에는 이 반석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존재합니다.

 

1. 반석을 '베드로 개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 (가톨릭 교회의 입장)

2. 반석을 '베드로가 한 신앙 고백'이라고 보는 견해 (개신교회의 일반적인 입장)

3.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견해 (재림교회의 입장)

 

우리는 본문의 증거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18절에 "너는 베드로라" 할 때 베드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페트로스(Petros)'입니다. 조그만 돌멩이나 파편을 뜻합니다. 그런데 바로 뒤이어 "내가 이 반석 위에"라고 할 때 이 반석은 페트로스가 아니라 '페트라(Petra)'입니다. 거대한 암반이나 바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단어가 다릅니다. "너는 페트로스(작은 돌)라, 그러나 내가 이 페트라(거대한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하신 것입니다.

 

이 바위가 과연 누구인지는 본문 문맥과 베드로 자신의 고백에 잘 나타납니다. 이 사건 직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22~23절을 미리 읽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니,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십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하셨던 책망 중에 가장 가혹한 책망을 바로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만약 이 교회의 반석이 베드로라는 인간 개인이라면, 교회는 사탄의 책망을 들은 인간 위에 세워진 꼴이 됩니다.

 

또한 사도행전 10장 25~26절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가 들어올 때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려고 하자, 베드로가 일어서라 하며 뭐라고 합니까?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며 경배 받기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베드로가 교회의 수위권을 가졌고 교황은 베드로의 후예로서 천국 열쇠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교황의 권위를 절대화합니다. 이탈리아 로마의 베드로 동상 발을 수많은 사람들이 만져서 발이 닳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베드로 자신은 경배 받기를 거절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베드로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에게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베드로가 교회의 절대적인 기초가 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한 '신앙 고백' 자체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대단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 자체는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너무나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베드로가 훗날 기록한 베드로전서 2장 4절을 보면 직접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베드로 스스로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증언합니다. 또한 바울도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교회의 근본 터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풀면 풀리리라" 하신 이 말씀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교황의 교서가 진리의 기준이 된다는 교황무오설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매고 푸는 권한이 베드로 개인에게만 주어졌을까요? 마태복음 18장 18절을 보면 똑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 마태복음 18장 18절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여기서는 베드로 한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에게" 즉 제자들과 그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교회 전체'에게 주시는 권한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16장에서는 주님이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고 계셨기 때문에 베드로를 지칭해서 하신 말씀이지, 천국 열쇠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베드로 개인이나 특정 교황이 독점하고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성경 본문을 통해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13~20절의 이 위대한 문답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예수님을 누구로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안식일만 아무리 잘 지켜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기독교적인 구원은 없습니다. 안식일 사상이나 기독교적 윤리 사상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예수를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개인적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일 뿐이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예수를 사랑하며 예수를 고백하는 백성들입니다.

 

마지막으로 21절이 중요합니다. 21절만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 마태복음 16장 21절

>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여기 "이 때로부터"라는 표현은 사역의 엄청난 터닝 포인트를 가르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의 이 문답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문답 이전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이 확실한 신앙 고백의 고개를 넘은 이후부터 비로소 십자가를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길은 어디서부터 비롯됩니까?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올바르게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진짜 십자가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십자가를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점이 바로 이 위대한 문답의 고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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