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본문: 마태복음 19장 16절~22절
[도입: 순종하려는 열심이 빠지기 쉬운 덫]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을 정말 잘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주님의 말씀대로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아보려는 열심을 가진 분들이 결정적으로 오해하는 본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바로 ‘재물이 많은 청년 관원’의 이야기입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고, 계명에 순종하고 싶어 하는 열성적인 그리스도인일수록 이 구절을 읽을 때 가슴이 뜁니다. 그리고 주님의 대답을 너무나 쉽게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본문 16절과 17절의 문답을 보십시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청년이 질문합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 얼마나 선명하고 명확한 대답처럼 보입니까?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해 보입니까? ‘아! 구원을 얻으려면,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하고 계명을 철저히 순종해야 하는구나!’ 행위와 순종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이 문답을 보며 자기의 신앙적 자의식을 고취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것은 본문의 문맥을 완전히 놓친 독법이며, 복음의 가장 근본을 놓쳐버린 치명적인 오해입니다.
[전개 1: 선한 ‘일’이 아니라 선한 ‘이’를 보라]
이 문답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기 바로 직전에 하신 선행 대답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청년의 관심은 온통 ‘무슨 선한 일(What)’에 있었습니다. 자기가 어떤 영웅적인 종교적 행위를 해야 영생을 따낼 수 있을까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대답의 핵심은 단호합니다. “왜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일을 묻지 마라. 선한 존재,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다.”
주님은 지금 청년의 사상적 기초를 뿌리째 흔들고 계십니다. “청년아, 네가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는 방법 같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선한 존재, 죄 없고 의로운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인데, 죄인인 인간이 행하는 도덕적 행위가 어찌 영생을 얻기에 충분하겠느냐? 네가 생각하는 구원의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영생을 얻는 방법이 계명을 지키는 것에 있다고 믿는 것은 성경을 거꾸로 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계명을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격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복음의 절대 선언을 역설적으로 던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개 2: 인간의 도덕적 자의식을 뒤집으시는 주님]
예수님은 이 청년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이 청년은 종교적인 모범생이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았고, 스스로도 ‘내가 이만큼 도덕적이고 선하게 살고 있으니 내 행위는 구원받기에 충분하다’는 단단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청년의 위선과 착각을 깨우치기 위해 역설적인 질문을 이어가십니다.
(마 19: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여기서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께 대한 계명(1~4계명)’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인간관계에 대한 계명(5~10계명)만 나열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람에 대한 계명만 지키면 영생을 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명은 없어도 구원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청년이 인간관계의 계명들을 요약한 핵심, 즉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엄중한 말씀의 포인트를 다 놓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문자적으로 겉모습만 지키면 계명을 지킨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마 19: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내가 어릴 때부터 이 인간관계의 계명들은 완벽하게 다 지켰습니다! 내가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이 청년의 교만과 당당함 앞에 예수님은 마침내 그의 도덕적 가면을 완전히 벗겨버리는 치명적인 말씀을 던지십니다. 네가 진짜 그 계명을 지켰느냐?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진짜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결론: 행위의 파산을 선언하고 구주를 따르라]
만약 청년이 진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계명의 완성자였다면,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기쁘게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는 기쁘게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이 처음부터 선한 ‘일’이 아니라 선한 ‘이’를 말씀하셨는지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신 진짜 의미는 계명을 지켜서 구원받으라는 율법주의적 명령이 아닙니다. “인간 중에 계명을 온전히 지켜서 구원받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인간 행위의 전적인 파산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가 분명히 다 지켰다고 자부했던 이웃 사랑의 계명조차, 자신의 물질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가짜 순종이었음을 주님은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청년에게는 재물이 곧 하나님이었기에, 그는 이미 1계명부터 확연하게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영생은 우리의 순종과 행위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가 행한 선한 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인생은 우주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는 방법론은 복음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원하셨던 진짜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주님, 제 재물을 다 팔아 구제하려 하니 제 마음에 탐욕이 가득하여 도저히 제 힘으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계명을 지켰다고 착각한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만약 청년이 이렇게 자신의 파산을 선언하고 무릎을 꿇었다면, 주님은 그를 안으시고 은혜의 영생을 선물로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기의 ‘선한 일’의 공로를 포기하지 못해 근심하며 복음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의로움, 나의 선한 행위, 내가 이만큼 순종했다는 자의식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선한 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로만 영생을 얻습니다. 나의 선한 ‘일’을 의지하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선한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의 뒤를 겸손히 따르는 진정한 복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