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로 들어가라 (창 7:1-12)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120년 동안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 정말 그것은 놀라운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여러분,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것, 이해되지 않는 것, 상식으로 맞지 않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합니다.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정신병자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한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여러분, 왜 믿음이라고 말할까요? 왜 상식과 이성과 합리성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이성적인 것은 누구든지 합니다. 합리적인 것은 누구든지 합니다. 상식적이고 경험적인 것은 누구든지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하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만질 수 없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다는 그 사실을 믿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믿음의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를 바랍니다.
노아는 천신만고 끝에 수많은 비난 소리를 들으면서, 어쩌면 가장 큰 비난 소리는 자기 자신 안에 있었던 회의였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 처음에는 좋아서, 옳아서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비난 소리와 홍수가 내리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기후 속에서 노아가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정말 고독한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7장 1절 시작하겠습니다. 7장 1절,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내가 이 세대에서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은 방주를 다 지은 노아에게 두 번째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가족을 이끌고 방주로 들어가라, 방주로 들어가라." 노아는 처음이나 끝이나 같은 신앙과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처음과 끝이 다릅니다. 처음은 다 잘하지만 끝까지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6장에서 노아에 대한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요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더라.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7장 1절, 방주를 다 짓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노아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하십니다. "네 의로움을 내가 보았노라." 여러분도 나도 그런 말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 앞에서 네 의로움을 내가 보았노라." 그렇게 어렵고 힘들고 비난 소리가 있고 고통이 있을지라도 너는 변하지 않았다, 신실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네 의로움을 내가 보았느니라."
하나님은 왜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하셨을까요? 물론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 곧 물의 심판이 오고 대홍수가 일어나면 아무도 살아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물바다, 죽음의 바다가 되고 온 지구는 다 물로 덮이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주는 피난처요, 방주는 구원의 배인 것입니다. 그 방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방주라 하는 것은 답답한 곳이 아니겠습니까? 밖을 볼 수도 없고 언제 심판이 끝날지도 모르는 그런 정말 기막힌 공간에서 수십 마리의 동물들과 함께 지내야 하니, 거기는 행복한 자리는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처럼, 이 험한 세상에서 당신이 구원받는 비결은 교회를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은, 교회 안에서 사는 것은 어찌 보면 제한이 많고 어떤 때는 답답한 일이 많고 어떤 때는 고통스러운 일이 많지만, 그것이 내가 살길입니다. "방주로 들어가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홍수 심판이 있기 때문에 방주로 들어가라는 뜻보다는 더 깊은 뜻이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좀 알기 위해서는 6장 18절의 말씀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6장 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언약'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심판 중에 노아에게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너는 내가 구원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심판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시는 방법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둘 수가 없기 때문에, 쓰레기와 구더기와 죄악을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일단 정리해야 합니다. 정리하지 않으면 더 이상 갈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리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심판은 멸망을 시키기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을 정말 주기 위하여 잘못된 것을 다 제거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와 네 가정은 내가 구원할 것이다. 구원하는 방법으로서 방주를 너는 만들고, 그 방주 안에 들어가 있으면 너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굉장히 우리가 또 재밌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뭐냐면 심판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기간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야단칠 때 영원히 야단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화가 나서 자식을 야단치지만, 그건 몇 시간, 몇 분 이 정도 야단치지 하루 종일 야단치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실 때 일정한 시간을 주시는데, 그 시간 동안 안에 내가 방주에 들어가서 이 심판을 피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약속을 하겠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배신하고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실한 사람이라도 그 인생에 몇 번은 배신합니다. 몇 번은 거짓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배신하거나 거짓말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요 언약을 체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노아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내가 너와 네 가족은 구원할 것이다. 너는 방주를 만들고 그 방주 안에 들어가면 내 약속은 성취될 것이다."
우리는 구약을 올드 테스타먼트(Old Testament), 신약을 뉴 테스타먼트(New Testament)라고 말합니다. 테스타먼트(Testament)는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노아 당시에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앞으로 인류의 최후에는 불로 심판하십니다. 여러분, 노아 당시에는 노아를 통하여 방주를 통하여 구원을 하셨지만, 앞으로 올 미래의 심판, 불의 심판, 역사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구원을 하여 주십니다. 이 약속은 분명합니다. 이 약속은 신실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앞으로 불의 심판, 역사의 마지막 심판에 누가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노아처럼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이 마지막 불의 심판에서 당신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이 약속은 틀림이 없습니다. 방주가 틀림이 없듯이, 그 대홍수 속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그 방주 속에 보호해서 구원해 주셨던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구원을 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의 심판이 여러분의 생전에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죽는 날이 세상을 끝내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행하십니다. 당신이 병으로 죽든, 당신이 교통사고로 죽든, 당신이 늙어서 죽든, 당신이 죽는 날 하나님의 천사가 여러분에게 나타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약속하신 것을 한 번도 어겨본 일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아멘. 이 역사의 마지막에는 심판이 올 것입니다. 노아가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예수님 앞에 도피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는 것, 이것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하나님께서 방주에 들어가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2절,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하나가 더 나타납니다. 그것은 이제 최후 심판이 바로 눈앞에 다가오기 7일 전에 노아와 그 가족이 방주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6장 19절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 짐승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방주 안으로 들어가도록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2절에 보니까 좀 더 특별한 기록이 하나 나타납니다. 암수 둘을 취하여 방주 안에 들여보내는데 정결한 짐승은 일곱을 넣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통 짐승은 다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을 넣으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암수 일곱씩 넣으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정결한 짐승을 더 번식을 많이 시키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암수 한 쌍만 되면 번식은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재밌는 사실 중에 하나는요, 방주 안에서 1년을 살았는데 죽었다는 기록이 없고 병들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이 다 지켜주고 보호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왜 정결한 짐승은 일곱씩 넣으라고 하셨을까요? 아주 재밌는 뜻이 여기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제사용입니다. 식용이 아닙니다. 방주 안에서도 제사는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방주 안에서 그 수많은 짐승들과 노아와 가족들이 1년 동안 햇빛도 없고 공기도 좋지 않은 그곳에서 생존할 수가 있었을까요? 예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는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방주는 천국이 된 것입니다. 천국이란 어떤 곳입니까? 환경이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요, 예배가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를 위하여 새와 짐승 중에서 일곱 쌍을 제사용으로 특별히 더 집어넣으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제사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하는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여러분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일상적인 경험은 죄의 경험입니다. 세상에 대한 경험입니다. 세상에 대한 경험, 죄에 대한 경험은 비참합니다. 그건 행복하지 않습니다. 세상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간은 공허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내가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습니다. 예배라고 다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예배는 아무리 드린다 하더라도 안 받으십니다. 반면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피의 제사였습니다. 죄인이 드리는 제사는 피의 제사여야 합니다. 피 없이는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산 제사, 참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죄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피로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이죠. 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가인의 후손은 제사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후손들은 계속해서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끈을 끊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멀어질 수도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의 끈은 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계속해서 제사를 통하여 그들은 예배를 드렸죠.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은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죠. 이것이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이 예배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줄을 붙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벨 이후에 노아 때까지 계속해서 이 피의 제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방주라는 대심판, 물의 대심판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생겼어도 예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 때 피난 나왔던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저희들도 그 가족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은 쌀과 먹을 것을 들고 피난 간 것이 아니라 성경책 하나를 들고 피난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피난 도중에도 집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지만 길거리에서 그들은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며, 예배드리는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일주일에 한 번 와서 드리는 예배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매일 새벽마다 와서 제단을 쌓으면 제일 좋습니다. 그렇지 못하시는 분들은 여러분의 집에서 30분 정도라도 하나님과 매일 큐티를 하십시오. 여러분 가족들을 모아놓고 어린아이 때부터 예배를 가르쳐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런 예배 공동체가 바로 가족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방주에서 그들은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피의 제사를 계속 드렸기 때문에 비록 방주라는 제한된 고통스러운 공간이었지만 그것을 천국으로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 그 자리가 천국이 됩니다. 예배를 드리면 그 자리가 하나님이 임하는 자리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여러 가지 행사와 위원회들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예배인 것입니다.
방주라는 것은 그렇게 행복한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상에서 살면 죽게 됩니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곧 죽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지 않고 세상에서만 계속 살면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날에 여러분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살다가 이제 곧 물의 심판이 올 때 방주에 들어가는 자만 사는 것처럼, 세상이 좋지만 여기가 오래 살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방주는 답답한 것입니다. 사람이 살기에 부적당한 것입니다. 창문도 하나밖에 없고 수많은 짐승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방주 밖에는 죽음의 바다, 시체들이 떠 있는 곳입니다. 이 방주는 정처 없이 갑니다. 노도 없고 돛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속력을 내거나 멈출 수가 없습니다. 방주의 특징은 나침반이 없습니다. 또 하나 방주의 특징은 언제 이 방주 신세를 면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1년만 참아라" 이런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그냥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했습니다. 마치 IMF 위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가 사업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기가 막힌 것입니다. 거기서 사는 게 방주 생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 답답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과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와 같은데, 마치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과 아주 비슷합니다. 방주에 있는 노아와 그 가족의 운명이란 이 세상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운명과 같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나오면요, 어떤 때는 좀 세상적으로 멋지게 살아보고 싶은 게 다 제한이 됩니다. 한계가 있고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의 눈을 뜨고 다시 보면 그 자리가 천국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방주 안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믿거나 신뢰하지 않는다면 미쳐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밖을 내다볼 수도 없고 이 고난은 언제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방주를 보면 인생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인생을 다 항해하는 것 같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주도하여 살아가지 못합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 같습니다. 그러나 나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고 사업을 하고 공부를 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시집가고 장가 다 가봤지만, 여러분 인생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똑똑하고 잘나서 다 내 길을 가는 것 같아도 결국 가보면 벽입니다. 우리는 병에 들게 됩니다.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업도 공부도 다 자기 뜻대로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미친 사람처럼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살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생은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회로도, 통로도, 출구도 없는 일종의 벽입니다. 절망입니다. 허무를 깨달은 것이 정말 이 본질을 잘 깨달은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 신세와 똑같이 비슷한 것이 갈대상자입니다. 생후 3개월 된 모세를 태우고 갔던 갈대상자, 자기가 운전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속력 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지지 않습니다.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갑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그 모세를 실었던 갈대상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으로 애굽 공주의 손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직접 운전하지 마십시오. 하면 할수록 엉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신비하고 놀라운 길로 여러분의 생애를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운전하고 책임지려고 하면 혼란에 빠지게 되고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고난이 끝날지도 알 수 없으며 노아의 방주가 언제 땅으로 내려갈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창밖이 전혀 보이지 않고 어떻게 보면 죽음의 집같이 느껴지는 그곳은 놀랍게도 예배가 있기 때문에, 제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기 시작을 했고 하나님의 기쁨이 나타나기 시작을 했고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결한 짐승 일곱씩을 집어넣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나는 이렇게 믿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결코 불행한 장소가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불행과 행복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불행과 행복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 자리는 행복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그 자리는 천국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참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도 하나님이 없다면 지옥일 것입니다. 방주는 하나님이 동행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운행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예배가 있었던 곳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집 안에 예배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인생에 예배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온누리교회가 드리는 예배가 가인의 예배가 아니라 아벨의 피의 제사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민족 안에 참 예배가 있다면 우리 민족은 행복한 민족이요 복된 민족이 될 줄로 믿습니다.
4절, 5절을 보십시오. 시작, 지금부터 7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여러분, 그 많은 짐승이 노아 방주로 들어가는 날짜는 7일입니다. 7일 동안이 모든 짐승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렇게 많은 짐승들이 어떻게 7일 안에 그 방주 안에 다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4절에 보면 '7일 동안'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적의 7일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도 기적의 7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5절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그 많은 동물들을 어떻게 노아의 방주에 다 집어넣을 수가 있었을까?' 세상 사람들은 자연 법칙에 의하여 사고를 합니다. 이성과 합리성에 의하여 사고를 합니다. 이 법칙의 원리에 따르면 이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미 떼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개미 떼는 줄을 지어 갑니다. 기러기 떼를 본 일이 있습니까? 하늘을 나는 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같이 갑니다. 벌 떼를 본 일이 있습니까? 꿀을 먹기 위하여 꽃을 찾아갔던 벌은 그 자리로 돌아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둘씩 들어오라 그랬는데 세 마리가 오면 어떡하나? 한 마리 내보낼 수도 없고, 만약에 노아가 이 동물을 잡으러 다녔더라면 이게 가능했겠습니까? 이거 한 놈 잡아오면 한 놈 도망가고, 또 한 놈 잡아오면 한 마리가 또 도망가고, 겨우 두 마리 붙여 놓으면 싸울 것이고 이걸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나 재밌는 말은 8장 1절에 아주 재밌는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여기서 '기억한다'는 뜻은 생각해 준다는 것이고, 관리한다는 것이며, 보호하고 통치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뿐만 아니라 그 배 안에 있는 모든 동물들에게 직접 간섭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 동물을 찾으러 간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노아 앞으로 둘씩 둘씩 짝을 지어서 질서 있게 개미 떼같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동물들이 갈등 없이 배에 들어가는 시간이 7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갈등할 게 없어요. 저는 만약에 동물을 잡아왔다 하더라도 몸집이 큰 놈,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 등 여러 종류가 있을 텐데,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이 한쪽으로 몰리면 어떡하겠어요? 하나님께서 다 순서와 무게나 크기나 전부 성격에 따라서 그 배의 칸칸마다 이 동물들이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다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는 땀을 뻘뻘 흘린 것이 아니라 "할렐루야" 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바로 이것이 노아가 방주에서 살았던 삶의 기적이자 시작이었습니다.
나는 모든 동물들이 이 방주 안으로 다 자기가 알아서 이렇게 들어가서 음식을 먹고 난 다음에, 거기는 햇빛이 없고 공기 유통이 잘 안 되며 온도가 아마 추웠을 것입니다. 공기가 나쁘고 산소가 부족하고 햇빛이 없고 온도가 떨어지면 동물은 동면을 합니다. 그 칸으로 다 들어가자마자 하품을 한번 하고 기지개를 한번 켜고, 그다음에 눈이 스르르 감기며 잠이 든 것입니다, 1년 동안. 그래서 먹을 것도 없고 배설할 것도 없으니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의 삶입니다. 이게 영적 삶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월급 받고 살아가는 거 얼마나 힘들어요? 사업하는 거 얼마나 힘들어요? 여러분, 내가 율법적으로 살면 살수록 힘든 것입니다. 병이 들지요, 병원에 가야지요, 결혼시켜야지요, 결혼해서 제대로 살아주면 또 얼마나 좋겠어요? 제대로 못 살지요, 그거 달래줘야지요, 죽을 때까지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되면, 여러분이 인생의 항해사가 되면 여러분이 잘 갈 것 같아도, 남보다 더 훌륭한 것 같아도 고난과 고통이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거 아무리 돈을 벌어봐도 다 사라집니다. 남에게 사기 쳐서 번 돈은 다 사기당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가족을 지켜주시고 여러분의 기업을 지켜주시면, 이렇게 놀라운 축복의 삶이 노아의 방주에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우리 온누리교회에서 합니다. 우리 온누리교회 교인들이 요즘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에는 '우리 온누리교회 교인 한 100명 정도 모인다' 이런 마음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편안하면 만 명이 모여도 100명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싸우면 100명도 만 명처럼 느껴집니다. 복잡하면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싸우면 이 가정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정이 편안하면 천국 같습니다. 이렇게 목회하면 10만 명도 할 것 같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사람 많고 교인 많은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을 내가 "당신이 이거 하시오, 당신이 이거 하시오" 시켰더라면 아마 제 건강이 또 상했을 것입니다.
제가 어제 교회 와서 보니까 아버지학교를 합니다. 그런데 지하 2층 콘서트홀에서 하더라고요. 그래서 "왜 여기서 하느냐고, 한동홀이나 두란노홀에서 하지 그랬냐"고 했더니 "아, 목사님 뭘 모르시네요. 토요일 날은 방이 없어요. 저희 교회에 빈 공간이 하나도 없어요. 월화수목금토일 우리 교회는 온종일 돌아갑니다"라고 하더군요. 여러분, 이걸 내가 "너는 한동홀에서 해라, 너는 두란노홀에서 해라" 다 시켰더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알아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다 알아서 너는 이 방에 가고 나는 저 방에 가고, 청소를 하고 안내를 하고 봉사를 하니까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게 노아의 방주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질러야 가정이 겨우 조용해지는 가정이 있을 수도 있고요, 어떤 집안에는 아무 소리도 안 지르는데 물 흐르듯이 만사가 잘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게 방주였습니다. 방주는 은혜의 장소였습니다. 축복의 장소였습니다. 환경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나쁜 환경, 어려운 환경이 아무리 있을지라도, 창밖을 1년 동안 내다보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천국이 되었음을 나는 믿습니다. 예배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억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함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동물들은 찬양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의 자녀들을 여러분이 키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자녀를 키워 주셔야 합니다. 교회에 가자고 그렇게 끌고 와도 안 오던 자녀가, 그래서 아버지 옆에 찡그리고 앉아 있다가 졸다가 갈 수도 있지만, 돌보지 않아도 새벽부터 나와서 눈물 흘리고 은혜받는 자녀가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방주의 삶입니다. 이 방주의 삶이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노아가 동물을 잡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노아 앞으로 스스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돈을 쫓아다니지 마세요. 돈은 잡힐 것 같으면서 안 잡히는 게 돈입니다. 돈이 여러분을 찾아오게 만드세요. 동물들이 노아에게 찾아왔듯이, 여러분이 돈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여러분을 쫓아오고, 사업이 여러분을 쫓아오고, 축복이 여러분을 쫓아오게 하십시오. 이것이 노아의 삶입니다. 은혜의 삶이요, 축복의 삶인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은 모든 게 다 힘이 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모든 게 다 쉽습니다. 그리고 차고 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넉넉히 이기리로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방주는 바로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이 교회입니다. 동부이촌동에 있는 이 교회, 이것이 별 볼 일 없는 것 같지만 여기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봉사를 하고 기쁨을 누리며, 새 힘을 얻고 세상을 향해 다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게 은혜의 삶입니다. 이상하게 은혜의 삶은 주는 것입니다. 자꾸 주는데 하나님은 더 주십니다. 세상의 삶은 빼앗는 것입니다. 내 것을 움켜쥘 뿐만 아니라 남의 주머니에 있는 것도 빼앗고, 남의 입속에 들어가는 음식도 빼앗아서 먹는 게 세상입니다. 피곤합니다. 외롭습니다. 고독하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방주 안으로 들어와라, 은혜 안으로 들어와라, 교회 안으로 들어와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라. 네 삶에 놀라운 기적이 시작될 것이다." 하십니다.
이제 6절부터 9절까지 보겠습니다. 시작,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여러분, 7일 동안의 이 기적의 현장을 노아는 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배 안으로 모든 것이 다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칙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기적과 축복인 것입니다.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낸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인간의 모든 조건으로는 살 수 없는 광야의 삶을 만나를 먹고 샘물을 마시며,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성막을 가지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40년 동안을 기적처럼 살았던 축복이 여기에 있는 것이며, 여러분이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질병이 있고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런 은혜의 삶을 예비하시고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모든 일들이 다 이제 약속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아마 그 마지막 7일 동안은 두 가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기적과 흥분이 있었음과 동시에, 이 7일 동안 홍수의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노아에게 그런 염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의심이 없을까요? 두려움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믿고 나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게 안 되면 어떡하나?' 그러면서도 또 한쪽으로는 그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전혀 아무 징조가 없음과 동시에 엄청난 기적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룻밤을 자면 '그래, 하나님의 기적이 있어.' 하다가도, 그다음 날 자면 '아니야, 안 될지도 몰라. 내가 미친 거 아닌가? 내가 미친 거 아닌가? 내가 지금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이 항상 마음에 이런 갈등이 있습니다. 두 마음의 갈등입니다. '내가 선교사로 정말 과연 잘 왔나? 내가 서울에 있었으면 좋은 직업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이냐?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이 길을 계속 가야 되는 것이냐?' 그러다가 그다음 날 한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옵니다. "아멘, 할렐루야! 맞아, 내가 잘 왔지." 그러다가 그다음 날 가면 먹을 게 없습니다. '아니야...' 여러분, 이 갈등은 정상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갈등이 없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의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이런 갈등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등은 있지만 마지막 선택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아니야, 그래도 이 길이 맞아. 그래, 홍수가 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이 길을 갈 거야. 홍수가 없을지라도..."
7일 동안 아무 징조가 없었습니다. 아무 징조가 없었습니다. 그날 날이 흐려진다든지 구름이 몰려온다든지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갔을 때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아, 이게 다 총리대신이 될 각본이다." 이렇게 한마디만 해줬어도 "아멘, 아멘" 이랬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없어요. 신앙은 고독한 것입니다. 신앙은 외로운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증거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판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머리가 두 무릎 사이에 들어가도록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끝나고 사환을 부릅니다. "너 빨리 저기 가서 지중해 저 끝에 구름이 있나 좀 보아라." 이 말은요, 엘리야가 고민했다는 얘기입니다. 의심 없이 믿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거 비 안 오면 어떡하나' 한 것입니다. 가보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엘리야는 머리가 더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기도하고 "또 가보아라." 해도 없습니다. 다섯 번째 가보라 해도 없고, 여섯 번째 가보라 그래도 없습니다. 비 올 기색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구름 한 조각 없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목사라고 의심이 없을까요? 고민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고민이 없는 게 아닙니다. 갈등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넘고 일어설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것뿐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기도하고 또 가보라고 말합니다. 그때 사환은 이런 보고를 합니다. "엘리야여, 저 끝에 손바닥만 한 구름이 떴습니다." 그 손바닥만 한 구름은 3년 반 동안 비 오지 않았던 그곳에 폭우를 내리는 징조였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리고성을 열세 바퀴 돌 때 천둥이 좀 치고 벽돌이 한두 장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거 기대하지 마세요. 사막을 걷는 것 같고 모래를 씹는 것 같고, 그러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게 믿음입니다.
10절 읽어 주십시오. 7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할렐루야! 하루아침에, 한순간에 하늘에 먹구름이 쌓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적이 오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러한 삶이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국 인생은 믿음의 싸움입니다. 합리적으로 가느냐, 상식적으로 가느냐, 자연 법칙으로 가느냐,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고독하고 외롭지만 믿음의 삶을 계속 살아내느냐의 싸움입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여러분, 이렇게 날짜가 구체적으로 쓰인 것을 보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이야기처럼 대충 이르지 않았습니다.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다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를 신화라고 말할까요? 자연 법칙과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해석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을 사람들이 왜 못 믿을까요?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이 말을 왜 못 믿을까요? 인간은 자기의 지성과 지식, 합리성과 자연 법칙이라는 상식으로만 그것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어찌 인간이 다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드디어 7일 후에 비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고 그랬습니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올 것이니,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님을 섬기십시오.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우주의 종말이 여러분의 생전에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러분 각자가 죽는 날이 있습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아처럼 방주를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명령하신 그 명령에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생명줄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준비하십시오. 자나 깨나 하나님 중심으로 사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어리석고 방자한 생각을 다 버리게 하시고, 믿음으로 가다가 흔들리고 의심하는 그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