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둥에서 북한으로... 그들은 왜 납북자가 됐나? 북한이 선교사를 잡아간 진짜 이유 | KBS 시사기획 창
노동 수용소에서 하루 16시간의 중노동과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을 김정욱 선교사님을 오늘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지켜주시고 동행해 주시옵소서.
주동식 씨의 아침은 찬송가와 기도로 시작된다. 벌써 2년째. 주 씨는 북한에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의 후원자이자 오랜 친구다. 그는 김 선교사가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중국 단둥 지역을 방문한 뒤 김 선교사의 곁을 지켜왔다.
"정말 동물같이 취급받고 있는 그 탈북자들의 삶을 보면서, 어쨌든 우리보다는 더 어려운 그들을 도와야 되겠다, 이제 그런 생각과 열정이 그분에게 있는 것을 제가 보게 되었습니다."
김정욱 선교사가 북한에 억류되기 전, 중국 단둥에서 찍은 수 분량의 미공개 동영상이 있다. 북한 주민들에게 선교를 하고 있다.
"주님, 저는 이 세상에 주님이 오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우리는 복음으로 통일한다. 우리는 지교회를 활성화한다. 저는 평양에서 사는 김입니다. 95년도 수령이 서거한 후 우리나라는 정말로 어려웠습니다. 현재 일반 평백성들은 백 원도 부족하여 생활하기가 힘들지만, 중앙당 집권세들은 달러로 뇌물을 받으며, 심지어 인민병원에서까지 달러가 없으면 병 보기가 지금은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김 선교사와 북한 신도들은 이런 내용으로 기도를 올렸다. 세상의 구원인 십자가. 주 씨에게 이 영상을 전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선교사는 납북됐다.
"총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위에 있다. 북한 지도부에 대하여 극히 원색적인 언어로 모독하고 헐뜯는 행위를 많이 했습니다."
지난 2007년 혼자 단둥으로 간 김정욱 선교사는 교단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선교사는 선교 자금을 마련하고 북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후원을 받아 국수공장을 세웠다.
"배고파하는 형제들한테 먹을 것을 제공한다. 국수를 대단위로 보내면 그들의 식량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국수공장을 계획을 하고..."
단둥에서 대북 선교를 했던 김국기 선교사 역시 같은 처지다. 그에게도 간첩 혐의가 씌워졌다.
"북의 최고 지도부의 위엄을 훼손하고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감행된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음모적인 국가 정치 테러 및 전복 행위라는 데 대하여 양심적으로 인정을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중앙회 소속인 김 선교사는 지난 2003년쯤 중국 단둥으로 갔다.
"방문자들 쉼터라고 얘기하면 좋겠어요. 그런 곳을 임대해서 거기서 기거할 수 있도록 하고, 거기서 한 며칠씩 있다가 가게 하시고 그랬던 거 같아요."
후원자를 찾기 위해 가끔씩 한국을 찾은 그는 동료 목사들에게 대북 선교에 대한 애정을 털어놓곤 했다.
"그러면 틀어주겠지. 그리고 우리가 밥 먹을 때도요, 좀 특이한 음식을 대접하잖아요? 그러면 멈칫해요. 왜 그러냐고 물으면 '아이고, 우리 가서 그 사람들 이거 먹이면 굉장히 좋아할 텐데' 하셨죠."
김 선교사가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사진. 아파트에서 대여섯 명의 북한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중국의 친척 방문으로 왔다가 친척들이 못 살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형편이 못 되니까, 한 달에 우리 돈으로 한 9만 원 정도씩 받고 그러고선 이 신앙 공부를 하는데 참 열심히 하더라고요."
김국기 선교사에 이어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최춘길 씨.
"저는 체포되기 전까지 중국 단둥에 살면서 공화국을 적대하는 국정원 첩자 최춘길입니다."
북한은 최 씨가 국정원 지시를 받고 북한의 위조지폐를 수집하는 등 간첩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최 씨가 단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북한 주민들에게 나눠줄 물품을 후원받기 위해 한국을 몇 차례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세 사람이 북한에 억류되기 전 머물렀던 중국 단둥. 취재진은 이들이 단둥에서 무슨 일을 했고 어쩌다 북한으로 넘어갔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북중 무역의 중심지인 단둥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신의주와 맞닿아 있는 접경도시다.
압록강 건너로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신의주. 북한 군인들과 체제 선전 문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단둥에서 북쪽으로 약 20여 km 정도 떨어진 곳, 북한의 의주군과 접해 있다. 밑에 철조망 넘어 50여m 앞이 의주군이다. 북한 군인이 농로를 따라 걷고 있다.
"이 시내만 지나면 북한이에요?"
"그래요, 네."
접경 지역에서 중국 상인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다양한 북한 기념품 등을 팔고 있다.
단둥 한인들 사이에서는 김정욱 선교사가 이곳 의주나 신의주를 거쳐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넘어온 남녀 두 명의 간첩이 김 선교사를 유인해 납치해 갔다는 것이다.
"소문이 좀 커요. 자기가 공부를 시켜가지고 사람을 대면서 '그 사람이 보고 싶어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유인하기 더 좋을 것이다. 그런 케이스로 한 사람은 시기해서 지인이 오고 있었고, 한 사람은 여자가 직접 건너와서 만나가지고 대화를 하고 부부처럼 행동해서 들어가자고 하니, 김 선교사가 그 말을 지인한테 한 거지요."
대북 선교사들은 소문이 나면 신변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점조직 형태로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문이 나면 명단에 올라오고 그러니까 알려지지도 않고, 저 사람 이름이 뭔지도 내가 솔직히 이렇게 같이 앉아서 지금 이야기하지만 선생님 본명을 제가 모릅니다. 이렇게 현재는 참 친근하게 하지만 본명은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야만이 안전을 지킬 수가 있고..."
선교사들이 많아야 서너 명의 북한 주민들과 숙식을 하며 선교 활동을 하는 것도 신분 노출을 최대한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김 선교사는 달랐다. 교회 여러 곳을 운영하며 적극적으로 대북 선교를 했다. 그러다 보니 곧 소문이 돌았고 신분이 노출돼 북한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북한 보위부의 지령을 받고 김 선교사를 해치기 위해 접근했었다는 한 북한 여성은 나중에 마음을 바꿔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탈북자들을 색출해 내고 길을 막으며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을 탄압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단둥 시내 중심부, 중국 내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북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북한 주민들은 주로 중국 동포들이 운영하는 여관이나 아파트에 세를 얻어 임시로 생활한다. 김 선교사는 이곳에 있는 5층짜리 아파트에서 세를 얻어 이런 북한 주민들과 함께 지냈다. 중국인들 중에서는 여전히 김 선교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구체적으론 모르겠고, 아마 그를 보러 왔던 것 같아요."
아파트 주변은 아침마다 재래시장이 서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번화한 지역. 김 선교사는 이곳에서 식재료를 구입하곤 했다. 그가 시내 중심부를 선교 거점으로 삼은 건 북한 사람들과 더 많은 접촉을 쉽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북한 보위부에 행적이 쉽게 노출됐을 거란 얘기가 흘러나온다.
"단둥이라는 곳이 북한의 관계자들이 제일 많이 나와 있는 곳인데, 그 번화한 아파트에 탈북자 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이 제 입장에서는 제일 좀 의문이 가는 그런 부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들은 전부 그 외곽에서 탈북자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이렇게 그냥 돌보고 마는데, 그분이 운영하는 그 쉼터는 가보니까 한 20명 정도가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어요."
취재진은 김 선교사가 운영했다던 국수 공장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가 북한에 억류된 지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공장 주변도 많이 변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두 시간여를 돌아다닌 끝에 어렵사리 국수 공장을 찾았다. 단둥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의약품 보관 창고로 변해 있었다. 중국인 사장은 김 선교사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김정욱 선교사는 북한에 억류되기 1년 전부터 이 공장에서 국수를 만들어 북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여기저기서 힘들게 후원받은 돈 1억 여 원으로 공장을 설립했다.
"국수를 대단위로 보내면 그들의 식량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국수공장을 계획을 하고 한국이나 아니면 그 밖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네이션을 받아서 공장을 설립을 하고..."
중국 동포들을 고용해 뽑은 국수는 모두 북한 주민들에게 나눠졌다. 김 선교사는 1년에 서너 차례 한국을 드나들며 후원 물품을 모으곤 했다. 역시 대부분 북한 주민들에게 나눠졌다.
"김정욱 선교사가 저희한테 가장 많이 요구했던 게 결핵 예방약, 그다음 비타민, 그리고 방부제, 그다음 옷, 비누라든가 생활용품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칫솔 같은 것도 몇백 개, 몇천 개씩 요구해서 저희가 인천항에서 실어다 주면, 중국 쪽을 배로 다니는 사람들한테 적은 돈을 주고 여러 번 분산시켜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또 다른 납북자 김국기 선교사는 선교 활동 외에도 단둥 쪽 한인 사업자들과 많이 교류한 것으로 현지인들은 기억한다.
"김국기 씨 같은 경우는 이쪽에 있는 일반인들과, 선교 영역이 아닌 일반인들과의 관계를 많이 했고 그런 사업자들과의 관계를 많이 했어요."
김 선교사는 이른바 종교 장사꾼들의 꼬임에 빠져 북한으로 유인되어 납치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퍼져 있다. 종교 장사꾼이란 종교 모임에 참여한 뒤 북한으로 돌아간 주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사진이나 비디오로 찍어 선교사들에게 파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하고 북한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요. 근데 그분들은 북한에 가서 지정된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 비디오 찍고 사진을 찍고 그리고 중국으로 가지고 와요. 근데 대신 가지고 오는 비용이 비싼 거죠. 비디오 하나에 얼마, 사진 한 장에 얼마 그렇게 쳐야 돼요."
북한 내부를 몰래 촬영하다 보위부에 붙잡힌 종교 장사꾼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평소 알고 지내던 김국기 선교사를 유인해 납치해 갔다는 것이다.
김 선교사가 억류되기 전 한국에 있는 후원자에게 보낸 선교 활동 보고 동영상. 북한의 한 도시에서 장마당이 열렸다. 상인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북한 농산물과 중국 식료품 등을 팔고 있다.
"강내(옥수수) 얼마나? 강내 얼마야?"
"800, 800."
"세 킬로에?"
"응."
북한 장마당의 모습을 담은 5분 분량의 이 영상을 몰래 촬영한 사람 역시 종교 장사꾼이다.
김 선교사의 기자회견장에서 북한이 공개한 영상. 누군가 김 선교사에게 봉투를 건네주는 것을 멀리서 몰래 촬영했다.
"14년 9월 경제 사업권으로 우리나라에 입국하였던 괴뢰 정보원의 핵심 간첩 김국기는 대동강 유버드에서 우리의 중대 국가 비밀 자료를 넘겨받다가 국가 안전 보위 기관에 의해 현장에서 적발 체포되었습니다."
봉투를 건네는 사람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김 선교사에게 접근한 이른바 종교 장사꾼으로 추정된다. 단둥 현지 선교사들은 두 선교사 모두 북한이 주장하는 간첩 활동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접속하는 북한 사람들은 다 먹고살기에 바쁜 사람들인데 국가에 대해서 뭐 알아도 얼마나 알겠어요. 심지어 어떤 분들은 그냥 말만 할 줄 알고 글씨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국가의 정보를 우리한테 팔고, 그리고 또 어떻게 그 간첩 행위를 한다는 게 제 생각에는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단둥에 있다가 북한에 의해 억류된 최춘길 씨에 대해선 현지에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
"최춘길 씨 같은 경우는 우리 선교사 세계에서 거의 모르고 있어요. 물어보니까 누구도,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다만 그가 후원 물품을 모으기 위해 한국에 가끔씩 다녀갔다는 증언이 나왔다.
"제가 탈북자 관련 일을 한다고 하니까 그때 거기서 대화도 좀 나누고... 단둥에서 제가 그때 김정욱 선교사 얘기도 하니까 모르시더라고요."
단둥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차로 30분 걸리는 동강시. 강을 사이에 둔 바로 100여m 전방이 북한 신의주 지역이다. 북한 쪽에서는 농사 준비가 한창이다. 북중 경계 지역이니 조심하라는 중국 정부가 세운 경고 표지판만 아니라면 여느 농촌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철조망 건너 압록강 하류는 수심도 얕아 보이고 너비도 50m가 안 됐다.
"얼 수는 있죠. 보다시피 지금 강물도 없고 물도 없고, 그냥 철조망 두 개만 넘어오면 중국이에요. 감시는 저기 카메라로 감시를 해요. 저 앞하고 뒤에 다 카메라가 있어요."
지난 5월 북한에서 한 20대 청년이 미국 CNN 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뉴욕대에 재학 중인 한국인 주원문 씨. 북한은 주 씨가 불법 입국했다며 강제로 억류했다. 중국 여행 중이던 주 씨가 북한에 들어간 경위에 대해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주 씨의 기자회견 직후, 중국 언론은 주 씨가 이곳 동강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주원문 학생도 여기서 무슨 활동을 하다가 간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 학생이 체류했던 것은 모르지만은, 중국 신문에 보도되기를 거쳐서 들어갔다고 합니다."
우리 국민 네 사람의 북한 억류 소식이 전해진 이후, 단둥에서의 대북 선교 활동과 한인촌의 생활은 극도로 위축되어 있다. 단둥 시내의 한 아파트. 취재진은 어렵게 가정 교회에서 예배를 하는 현장을 찾았다. 중국 동포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가정교회다. 중국 정부가 인정하는 교회 외에 비공식적 기관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은 모두 불법이다. 하지만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일주일에 한 번씩 비밀리에 모여 종교 활동을 한다.
최근까지 단둥에 체류 중인 북한 사람들도 종교 활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억류된 이후 발길이 끊겼다. 선교사들조차 북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리고 있다. 그들 중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 있을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북한 분들도 함부로 만나지 않고요, 그리고 만나도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만나요. 중간에서 한족 한 명을 고용을 해서 '이 사람 괜찮다' 그러면, 그리고 조선족 한 명을 보내고 대화를 하고 그다음에 안전하다 그러면 만나요."
대북 선교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 한인들이 운영하는 조그만 식당이나 잡화점들은 북한 보위부의 감시망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면서 바짝 긴장해 있다.
"중국 정부에서도 저쪽에서 그렇게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 업소에는 아는 사람은 가지 않을 것이고, 또 그런 업소들이 어떤 북한에서 온 사람들 출입을 자주 하는 그런 업소들이거든요."
대북 선교 활동에는 납치뿐만 아니라 죽음의 위험도 찾아온다. 지난 2012년 5월 중국 연변의 한적한 교회에서 승용차가 마주 오던 버스와 정면으로 부딪쳐 승용차 운전자가 숨졌다. 숨진 사람은 10년 넘게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해온 강호빈 선교사. 중국 당국은 강 선교사의 운전 실수가 사고의 원인이었다고 밝히면서도, 버스 운전기사의 신원 등 구체적인 사고 내용은 가족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시신을 잘 안 내주었고, 시신을 내주는 조건으로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하는 것을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그 시신이 이쪽으로 인도가 됐습니다."
숨진 강 선교사는 선교 활동 중 공안에 여러 차례 체포됐던 전력이 있었다.
"중국 공안이 교회를 급습해 사람들을 체포해 갔고 성경책과 자동차를 압수당하고 벌금을 물었습니다. 취조실 문을 열면 정면에서 눈을 뜰 수도 없는 불빛이 이렇게 쏟아져 들어오고, 그리고 방음벽처럼 까맣게 녹음실처럼 방음 설치가 돼 있는 곳인데 거기 딱 앉으면 앞에 취조관이 한 1m 정도 가슴팍 높이 되는 높은 위치에 앉아서 취조를 하죠."
교통사고로 숨지기 1년 전에도 강 선교사는 죽음의 고비를 넘겼었다. 연변 시내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마치고 나온 뒤 주차된 자신의 차로 가다 독침 테러를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운동을 하고 이제 트렁크에다가 가방을 넣으려고 트렁크 문을 열고 넣으려고 하는 순간에 누가 뒤에서 덮친 거예요. 근데 그때 오른쪽 옆구리에 어떤 충격이 가해지는 거를 느꼈대요. 짧은 그 몇 분의 시간 안에 이제 발아래부터 마비가 되어오면서 그대로 이제 실신을 했죠."
병원에서 가까스로 의식을 찾은 강 선교사는 평소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면서 마주친 적이 있던 북한 사람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사람이라는 걸 이렇게 뒤에서 탁 치면서 스쳐 가는데 옆얼굴을 봤죠. 그 사람을 봤기 때문에 북한 사람인 걸 알았죠."
강 선교사의 옆구리에서는 독침 자국이 발견됐다고 한다.
"오른쪽 독침 자국이요. 그래서 이제 오른쪽으로 이렇게 몸을 들춰봤더니 오른쪽 담낭 부근에 피자국이 있고, 이렇게 목이 벌레 물린 것처럼 작은 자국이 있더라고요."
강 선교사는 중국을 방문한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과 생필품을 10여 년 이상 나눠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도 좀 잘 먹고 잘 살고 또 안정되고 평안하고 또 교육도 제대로 좀 받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통일 이후를 우리가 내다보고 미리 좀 그 수준을 맞추고 한 형제자매로서의 하나 되는 이런 운동이지, 이게 뭐 전쟁이라든지 스파이라든지 간첩이라든지 체제 전복이라든지 이건 기독교 사상하고 맞지 않습니다."
지난 2013년 이후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우리 국민은 두 명의 선교사를 포함해 모두 네 명. 주원문 씨를 제외하고 모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선교사라고 하는 그 타이틀 하나만 갖고도 파급 효과가 큽니다. 내부적으로는 종교의 제한을 두는 그런 것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국제사회에도 파급 효과가 크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선교사들을 잡아서 그들을 억류하는 그런 형태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원문 씨는 지난 14일 최초 기자회견 뒤 두 달여 만에 집으로 빨리 돌아고 싶다고 외신을 통해 밝혔다.
어머니 기일을 앞두고 최선득 씨가 산소에 가기 위해 둘째 동생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 동생이 남한에 있고 이 지역에 있으면 같이 산소 가서 엄마 기일도 얼마 안 남았으니 풀도 좀 뽑아주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최 씨는 지난해 2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에서 넷째 동생 영철 씨를 만났다. 동생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품에서 꺼내 정성스레 어머니 산소에 올린다.
"엄마, 아버지, 전번에 이산가족 만나러 가서 동생 사진을 찍었어요. 같이 찍은 사진 엄마, 아버지 보여드릴게요. 우리 영철이..."
"지금부터 30년 전 찍은 사진하고 이거 작년 2월달에 찍은 사진이에요. 많이 틀리죠? 아버지, 엄마 보세요. 말해도 대답이 없으시네."
영철 씨는 지난 1974년 백령도 부근에서 홍어잡이를 하던 중 북한 함선에 의해 동료들과 함께 납북됐다. 형제는 40여 년 만인 지난해 이산가족 상봉 때야 만났다.
"옛날에 학교 다닐 적에 아버지한테 혼난 얘기, 부모님한테 혼난 얘기... 어려서 그렇게 혼난 기억은 안 잊어버려요. 마음에 두고 있다가 이거 40년 만에 이렇게 만나니까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사흘간의 짧은 만남. 그로부터 1년 반이 흘렀지만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세월이 야속할 뿐이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가 명절 때 다른 가족들, 다른 형제들은 다 오는데 그 사람 유독 하나 안 와요. 그래서 그런 때가 제일 좀 보고 싶고..."
최우길 씨가 찾은 곳은 집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바닷가. 남북 관계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올 때면 북에 남아 있는 동료 선원들 생각에 가슴 한쪽이 저려온다.
"나는 실제 이렇게 한국에 나와서, 고향을 나와가지고 가족들 만나서 이렇게 지금은 잘 지내고 있지만은, 현재까지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고통이 대단할 겁니다. 진짜 그 사람들 안타깝습니다."
최 씨 역시 납북 선원이었다. 지난 1975년 1월 오징어잡이 배 천왕호의 사무장으로 일하다 조업 도중 동료 선원들과 함께 납북됐다. 최 씨는 북한에서 30년 넘게 협동농장에서 일을 하며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남한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농장에서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해야죠. 나무 하러 가라면 나무 하러 가야 되고, 옥수수밭에 김매라면 김매고, 논에 가서 뭐 하라면 논에 가서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해야죠. 안 하면 안 되죠. 그러니 살기 위해서 노력은 했어요. 자나 깨나 고향 생각이지. 아들 눈에 선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지울 수 없었던 최 씨에게 지난 2007년 기회가 찾아왔다. 남측 가족과 탈북 단체로부터 돈을 받은 브로커가 최 씨에게 접근해 탈북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돈 몇 천 달러 가져왔는데 그게 나를 빼내려고 하는구나 알았지. 브로커가 '내가 내일 나가겠는데 최 씨 어디 어디 딱 몇 시까지 와 있어라' 하고 장소를 딱 알려줬단 말이야."
야음을 틈타 브로커를 따라서 북중 국경을 넘었다. 이곳에서 기다리던 남한의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32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국민으로 다시 받아주신 데 대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전체 국민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밟은 지 8년.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됐지만 많은 동료들은 고향을 그리다 눈을 감았다.
"선원 같은 배 한 대여섯 명 정도는 내가 왔다 갔다 하며 만났어요. 결혼식 할 때도 가고, 영감들이 환갑한다고 연락이 오면 환갑잔치에도 가고, 사망했으면 사망한 데도 가고 다녔는데... 일부 사람들은 주소도 모르고 그렇지요."
북한은 납치한 사람들을 이용 목적에 따라서 교육시키고 활용했다.
"학생 애들은 그 초대소에서 집중적으로 어린 애들을 교육시켜 가지고 대남 기구에 활용하고, 어민들은 주로 노동에 투입하거나, 또 거기서도 젊은 친구들은 평양으로 끌고 가고, 자기네가 필요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죠."
우리가 함께 지냈던 교정이고 하얗게 또 다른 친구들은 모두 다 그대로 있네. 가수의 노래엔 납북된 고등학교 동창 재환이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
미국 MIT 공대 박사 과정 재학 중이던 이재환 씨는 지난 1987년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다 납북됐다. 사건 직후 북한은 이 씨가 자진 월북했다고 주장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자기 부서마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납치가 60년대, 70년대 굉장히 성행을 했고, 그다음 남파 가족들이 또 학생들을 이렇게 끌고 가면 다른 부서에서도 성과를 올려야 하니까 경쟁적으로 이렇게 끌고 간 거 같아요."
국가정보원은 지난 1999년 이 씨가 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혀 정치범 수용소에 있다고 발표했다. 이 씨 관련 소식은 2년 뒤 다시 전해졌다.
"지난 87년 오스트리아에서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알려진 유학생 이재환 씨가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2001년 제3차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이 씨에 대한 생사 확인 요청을 받은 북한은 이 씨가 숨졌다고만 짧게 발표했다.
"납북자가 한 500명 정도 되는데 그중에서 가장 체제 선전으로 써먹을 수 있는 팩트가 우리 이재환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MIT 수재 이런 사람이 자진 월북했다고 선전하는 거죠."
납북자들은 북한 체제 옹호와 남한에 대한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어 왔다. 휴전 협정 이후 선원과 학생 등 3,800여 명이 납북됐고, 이 가운데 아직 500명 이상이 북한에 억류 중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은 여전히 휴전 이후 납북된 사람들에 대해 '의거 입북'이라며 강제로 끌고 가거나 억류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법적인 근거는 불법 월경자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체포할 권한과 권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국경을 넘어서 누군가 오면 우리 정부가 체포하죠. 그 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국외 추방하는 것이 국제적인 협약입니다. 근데 문제는 북한이 그렇게 불법 월경한 사람들에 대해서 본국으로 송환하지 않고 억류하고 있는 것은 그것은 또 다른 범죄 행위이지요."
우리 정부와 납북자 단체는 북한에 억류 중인 이들의 생사 확인과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저런 범죄 행위는 용서를 절대 해서는 안 돼요. 분명히 사과를 받고, 그다음에 우리가 하자는 대로 북한한테 요구를 해서 그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하지만 경색된 남북 관계 속에서 납북자 문제는 뒤로 밀려나 있다. 우리 정부는 국제 사회와 공조해 납북자 송환에 힘을 쏟고 있다고 되풀이해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휴전선 넘어 끌려간 납북의 역사는 한국 전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북으로 끌려가 고통 속에 살다 삶을 마쳤다. 납치와 억류를 볼모로 한 비인도적인 역사는 언제 끝날 것인가. 분단 70년, 한반도의 인권 상황을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