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말씀묵상

이사야 61장 연구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12|조회수40 목록 댓글 0

이사야 61장

 

자, 오늘은 이사야 61장입니다. 61장도 11절로 돼 있고 62장은 12개 절로 되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총론적인 이사야 구조를 생각할 필요가 있지요. 이사야 1장부터 39장까지는 신학자들이 '제1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다음에 이사야 40장부터 55장까지를 '제2 이사야'라 그러고, 56장부터 66장까지를 '제3 이사야'라고 신학자들은 이렇게 부릅니다. 일반적으로는 1장부터 39장을 제1 이사야, 40장부터 66장을 제2 이사야 이렇게 부르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나눠서 40장부터 55장을 제2 이사야, 56장부터 66장을 제3 이사야 이렇게 부릅니다.

 

근데 저는 일부러 그 표현을 의도적으로 계속 피했습니다. 뭐라고 표현했었나요? '이사야 제1부'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한 권이기 때문에 1장부터 39장은 이사야 제1부, 그다음에 40장부터 66장은 이사야 제2부입니다. 이렇게 이사야를 두 개, 세 개로 나눌 수 없다는 의미를 제가 신대원에서 강의할 때는 반드시 시험 문제를 내고, 학생들이 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굉장히 강조해서 이야기합니다만, 여기서는 쉽게 그냥 소프트하게 강조하면서 표현을 드렸지요.

 

이사야 40장부터 66장까지는 다시 구조가 나뉘어지는데, 이사야 40장부터 48장까지는 완전히 위로의 기별이었습니다. 그렇죠? 그다음에 49장부터 55장까지는 이사야 제2부의 제2장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56장부터 66장까지는 이사야 전체의 절정이고 결론입니다. 그야말로 미래의 희망과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비전이지요. 그래서 56장부터 66장까지는 완전히 미래에 관한 비전이에요.

 

이사야 제1부와 이사야 제2부 사이에 대략 150년의 간격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잖아요. 이사야가 앞으로 150년 후에 있을 메시지와 사건에 대해 미리 이야기하면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미리 위로하는 내용이 40장부터 48장까지입니다. 그다음 49장부터 55장까지는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절정인 메시아에 대해 결정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게 49장부터 55장까지잖아요. 그다음에 56장부터 66장까지는 그야말로 미래의 비전, 희망의 비전, 완전히 미래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미래 소망에 관한 기별의 절정을 향해 지금 61장이 나아가고 있는 내용입니다.

 

61장을 보겠습니다. 61장은 뚜렷하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절부터 3절, 4절부터 9절, 그리고 10절부터 11절로 뚜렷하게 나뉘어집니다. 1절부터 3절은 너무너무 유명한 구절이지요. 왜요? 누가복음 4장 18절에 보면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고 안식일에 고향에 가셔서 이제 설교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의 공생애 첫 설교 본문으로 이사야 61장 1절~3절이 인용되었지요. 그래서 너무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 이사야 본문을 보겠습니다.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구약에서 전에는 이 '루아흐'라고 하는 단어를 다 '신'으로 번역했었지요, 한글 개역 성경이요. 근데 이제는 다 '신'을 '영'으로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톨릭 신앙을 하시는 분들에 대해서 다 존중하면서 따뜻하게 표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팩트만 그냥 이야기하면 가톨릭 신앙을 하시는 분들은 성령이라는 표현보다 '성신'이라는 표현에 훨씬 더 집착합니다. 그런데 그분들마저 영으로 바꿨다는 말씀을 먼저 드렸지요. 성령이라는 표현으로 바꿨습니다. 가톨릭도 성신이 아니고 성령이라고 표현을 바꾸었음에도, 우리 가톨릭 신도들이 성신이라는 표현이 너무 익숙한데 왜 성령으로 바꾸느냐고 하기도 합니다. 영어로 Spirit하고 Holy Ghost가 있는데, Holy Ghost는 성신이라고 번역하고 Holy Spirit은 성령이라고 번역하는데, 옛날 성경은 구약은 성신이라고 번역했고 신약은 성령이라고 번역했지요. 그러던 것을 지금은 다 바꾸었습니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영'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래서 우리 재림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 나오는 '예언의 신'이라는 표현도 자체가 예언의 신이 아니고 '예언의 영'이라고 번역돼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니 책을 예언의 영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제발 책은 예언의 신이 아니에요. 책을 보고 자꾸 예언의 신이라 부르지 마세요. 책은 예언의 영, 즉 성령의 선물이지 성령께서 주신 기별이지 책이 예언의 신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나마 그것도 표현할 때는 예언의 신이라고 표현하지 말고 예언의 영이라고 표현해야 돼요. 성경 자체가 그렇게 돼 있잖아요, 그렇죠?

 

하여튼 여기 이사야 61장 1절에서 "주 여호와의 영"이라고 합니다. 이제 뒤에 보시면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에서 성령이라는 표현들이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에 그 첫 단어가 여호와의 영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라고 하는데, 여기서 이 말을 하는 화자(스피커)가 누구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선지자 이사야겠지요. 예수께서 이 텍스트를 당신에게 적용시키셨기 때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내게' 할 때의 '내'는 메시아가 되겠지요. 그다음에 이 본문을 읽는 독자들이 이 메시지를 자기에게 적용시키고 싶을 때는 '나'가 되겠지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역사적으로는 이사야입니다. 메시아적으로는 주님이시고요.

 

>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일반적으로 사람의 경우라면 내가 기름 부음을 받았더니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했다, 이렇게 말하는게 맞지요. 왜냐하면 기름을 붓는 건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행위니까요. 그것이 영적으로 성취되었을 때 기름을 부었더니, 예를 들어 사무엘이 사울이나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더니 여호완의 신이 임했다, 이게 순서잖아요. 근데 여기서는 기름을 붓는 이가 사람이 아니고 누구예요?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사, 그러니까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임했다는 사실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다는 그 행위는 결과를 먼저 이야기해도 당연할 만큼, 사람은 기름을 부어도 실제로 갖다 기름 부어도 여호와의 영이 안 임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근데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시는 경우는 바로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는 것이 원인과 결과로 바로 일치되니까 결과를 먼저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이 기름 붓는다는 말이 '마샤흐', 즉 메시아예요. 기름을 부으사 이렇게 기름을 부었더니, 그다음에 성령의 감동으로 하게 되는 이게 뭐예요? 이게 메시아의 사역을 제대로 나타내 주는 거지요. 그래서 성령의 선물로 메시아가 하게 된 사역이 첫째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둘째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셋째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이것이 무슨 뜻이에요? 성령의 선물은 결국 은사를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는 거지요. 그게 뭐죠? 상한 자를 고치며, 그러니까 심층 심리 방문이 되었든 치유가 되었든 교육이 되었든, 우리가 믿음의 은사, 치유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등등 에베소서 4장 11절에 보면 목사와 교사, 가르침의 은사와 이 돌봄의 은사는 다 같은 성령께서 주신 거잖아요.

 

그런데 이 모든 걸 다 종합한 한 가지 표현이 뭐예요? 거기 보세요. 내게 기름을 부으사 한 곧 다음에 나오는 문장이 "가난한 자에게요", 가난한 자에게 위에 번호 1이 있죠. 밑에 난외주에 보면 "겸비한 자에게" 이랬습니다. 'the meek', 이게 마음이 가난한 거예요. 말 그대로 구약에서 이미 가난하다는 표현이 사회적 소유 개념을 넘어서서 심령의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는 걸 보게 되지요. 겸비한 자에게 뭐라 그랬습니까?

 

>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 이게 우리 한국말로 번역해 놓으니까 이 단어가 아름다운(형용사), 소식(명사), 전한다(동사) 이렇게 돼 있습니다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이 길게 번역된 요 단어가 히브리어로 보면 동사 하나입니다. '바사르'라는 동사 하나예요. 그게 나중에 신약에 오면서 '유앙겔리온', '유앙겔리조마이' 복음이란 단어로 다 바뀌어서 분명해집니다. 그야말로 동사 자체가 복된 기별을 전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 다 함께 이사야 다른 본문 하나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40장 9절을 보지요. 이사야 40장 9절입니다. 40장 9절에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그랬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 제가 이사야 40장 때 굉장히 강조해서 말씀을 드렸잖아요.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바로 여기 나왔던 같은 표현이죠. 하나 더 보겠습니다. 이사야 52장 7절을 보시죠. 이사야 52장 7절에 보면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 구절이 이사야 40장 9절보다 더 익숙하시지요?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에 인용이 돼 있거든요. 우리 다 함께 로마서 한번 보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5절입니다.

 

>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신약 성경에서 복음이라고 번역되는 바로 그 '유앙겔리온'의 복음을 전한다는 언어로 인용된 구절이 바로 이사야 52장에 나오는 이 표현인데, 그 똑같은 표현이 지금 이사야 61장에서 40장을 건너 52장을 건너 이제 이사야 61장에 표현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이 이사야 61장 1절은 이사야가 하게 되는 역사적 사역이 여호와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셔서 그에게 성령의 능력이 임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한 결론이 뭐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건데,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게 뭐예요? 그것을 세 가지로 설명했지요.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고, 이게 복음 전도라는 것, 복음 선교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교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해요. 교리는 뼈대니까 정말 중요해요. 근데 여러분, 우리는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거든요. 교리도 복음이 돼야 하거든요. 근데 복음이 없이 교리만 가지고 있으면 기독교 사상을 가질 수는 있지만 복음의 사람이 아닐 수 있거든요. 이건 교파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마찬가지예요. 가지고 있는 교단의 교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뼈대를 만들기 때문에 정말 중요해요. 근데 그 교단의 교리가 사상으로만 머물러 가지고 복음의 정신을 상실하고 예수의 인격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면 교조주의처럼 차가운 사람이 돼 버리는 거지요. 네가 옳고 너는 틀렸고 하는 이것만 남아 있고 사랑이 다 사라져 버리는 상황이 되잖아요. 여기 이사야 61장은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그다음에 복음 선교가 결국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설명해 주는 거지요. 사람을 낫게 하고 사람을 자유하게 하고 사람을 풀어주게 되는 사역, 이것이 예수께서 메시아 사역에서 말씀하신 거지요.

 

2절입니다.

 

>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여기 이사야 61장 2절의 본문에는 분명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이 나란히 이어져 있지요. 다 함께 누가복음 4장에서 이 본문을 인용했던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부터 보죠.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누가복음 4장 19절에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 부분이 이사야 61장 2절의 인용인데, 우리가 조금 전에 이사야 61장에서 본 것처럼 61장 2절은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까지 이어져 있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이사야 61장 1절~2절을 인용하시면서 은혜의 해에서 끊으시고 보복의 날로 이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대단히 의도적인 인용이십니다. 왜 예수께서 첫 공생애 설교를 하시면서 보복의 날까지 인용하지 않으시고 은혜의 해에서 인용을 그치셨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초림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사역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종말일 때, 재림 때 이루어져야 할 일이기 때문에 보복의 날에 관한 것은 주님께서 이사야 61장 1절~2절을 인용하시면서 정확하게 본문을 당신의 사역에 맞추어 적용하고 있음을 보게 되지요, 여러분.

 

그래서 예수께서 성경을 접속사 하나에서 끊으실 만큼 정확하게 하시는 것처럼, 단어 하나가 어떻게 같은지 다른지, 접속사가 뭔지 전치사가 뭔지 이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보는 게 정말 중요해요. 저는 이게 평생 선생의 습관이 되다 보니까 이거를 제 아내와의 대화 속에 자꾸 적용해 가지고 제 아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제가 알아요. "간다" 그런 것과 "가고 있다", "하겠다", "가고 있는 거야", "간 거야", "갈 거야" 등 표현을 정확하게 하라고 제가 이렇게 하니까 "아 좀 알아서 들으세요" 하죠. 여러분, 제가 심지어 우리 신학생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씀 사역자는 말씀을 정확하게 해부해 주고 백성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그 말씀을 두고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수술하는 의사들을 보세요. 외과 의사들이 수술할 때 대충 해 가지고 합니까? 여기도 피가 나고 저기도 피가 나는데 대충 이렇게 하고 막 합니까? 정확하게 하잖아요. 우리는 말씀으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잃기도 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보는 게 정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학도들보다 신학도들이 공부를 더 많이 하고 더 잘해야 해요. 약간 과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저는 다시 생각해봐도 그 말이 맞아요. 신학도들은 의학도들보다 더 열심히, 더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저를 조금 무서워합니다.

 

자, 예수께서 그렇게 정확하게 인용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했고요. 3절로 갑니다. 그래서 이제 3절에서 지금 이사야 61장과 62장은 계속해서 미래의 메시아를 통해 주어질 역사를 보여줍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사야를 통해 주어질 바벨론 귀환의 사역을, 메시아적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질 미래의 영광을, 종말론적으로 보면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게 될 그 소망을 삼중으로 계속 보여주고 있는데, 3절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이 화관은 뭡니까? 꽃 면류관이잖아요. 화관을 주어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고, 다시 말해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근심 대신에 찬송의 옷을 주셨네라는 노래도 있죠. 정 대장님 이 노래 알아요? 노래 몰라요? 나보다 모르네. 젊은이라서 하기야 한 10년, 5년 전 노래는 오히려 또 모르더라고요, 우리가 더 잘 알고. 그래서 메시아 시대에 결국은 슬픔의 상황이, 재가 화관으로, 슬픔이 기쁨의 기름으로, 그다음에 근심이 찬송의 옷으로 바뀌는 메시아 세계에 대한 약속이 주어지지요.

 

4절부터입니다. 4절.

 

> "그들은 오래 황폐되었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이것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음이 선명하지요.

 

> "옛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이사야 58장 12절에 나왔던 그 내용이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지요. 아직 150년 전입니다, 여러분. 이사야가 이 말을 하고 있는 때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예루살렘이 황폐해 있고 성전이 무너졌던 그 상태를 배경으로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이사야의 기별을 듣고 돌아오게 될 하나님의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을 중건할 것이고, 메시아적으로 말하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진리를 메시아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교회가 온전히 회복할 것이다라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거지요.

 

5절.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지금은 이방에 잡혀갔지만 오히려 역사적으로 회복된다는 얘기고, 메시아적으로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성할 것이라고 하는 말이지요.

 

6절. 그래서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이들이 돌아왔을 때 마침내 부름을 받게 되는 관계, 그 호칭이 뭔가 하면 6절에

 

>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여러분, 여기서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는 개념이 이미 예언적으로 이사야 61장 6절에서 유대 백성들 모두에게 제사장 개념으로 확대되고 있는 걸 보게 되지요. 원래는 아론 지파, 아론 계열이 제사장이에요. 근데 여기 6절은 뭐라 그러죠?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유대 백성들이 다 이방을 향해 제사장 된다는 거지요. 그다음 사람들이 너희를 뭐라고 불러요?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여러분, 여기 이사야 61장 6절은 중요한 개념을 설명해 줍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제사장인데,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뭐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봉사자다,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죠. 그래서 제사장은 봉사자다라고 하는 개념이 여기 병행되어 나타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봉사자다라고 하는 성경적 개념이 너무 선명하게 구약에서 나타나 있는 구절이 이사야 61장 6절입니다. 역시 우리가 목회자 혹은 이 신약적, 현대적 개념의 제사장 사역을 준비하는 신학도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개념이죠. 제사장은 봉사자다라고 하는 표현이 문맥 속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다음에 7절 보면 7절에서 다시 3절의 '대신' 개념이 나타납니다. 7절.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력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이게 똑같은 말입니다. 몫으로 하나님께서 선물 주신다는 개념, 배나 주신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메시아 나라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는 겁니다. 재 대신에 화관을, 슬픔 대신에 기쁨을, 근심 대신에 찬송을, 수치 대신에 배의 보상을, 능력 대신에 하나님이 주시는 몫으로 채워주시는 이 개념들이 심지어 62장까지 반복됩니다. 이렇게 해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다시 약속을 주시죠.

 

8절.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고" 했습니다. 저 뒤에서 똑같은 개념이 나오는데요, 미리 읽겠습니다. 10절을 보면

 

>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니"

 

여기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이 또 병행되고 있지요. 하나님의 구원은 공의의 실현입니다. 여러분, 정의는 '쯔다카'이고 공의는 '미슈파트'라는 중요한 단어인데, 이사야서의 이 쯔다카 혹은 쯔데카라고 하는 단어와 미슈파트라는 단어는 수도 없이 공의와 정의로 반복되는 표현이잖아요.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 정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쯔다카를 사랑하시죠. 여기서 뭐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그냥 봐주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구원은 그냥 "알았어, 알았어, 그냥 봐줄게" 하고 다 그냥 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정의와 공의가 다 구현되는 거거든요. 그 정의와 공의를 문자 그대로 구현하면 우리는 다 죽어야 돼요. 다 죽어야 되는데, 그 정의와 공의가 구현되는 방식이 바로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나요? 메시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잖아요. 그 내용이 49장부터 55장에 명백히 다 설명되고 있는 것처럼, 메시아의 희생을 통해 정의와 공의가 구현됐고, 그래서 그것이 구원의 옷이고 공의의 겉옷이다라고 여기 미래의 희망의 나라, 즉 메시아의 나라를 묘사하면서 61장에서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보게 되지요.

 

10절에서 잠깐 좀 더 볼 게 있습니다. 바로 그 관계를 뭘로 묘사하는가 보세요. 10절 하단에 무슨 이야기가 나와요?

 

>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결혼 비유로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을 입게 되는 그 기쁨을 묘사합니다. 남자가 사모를 쓰고 여자가 신랑을 위해 준비한 보석으로 단장한 그 순간, 결혼 잔치의 아름다움으로 이 영광을 묘사하잖아요. 지금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뭐라고 표현해야 돼요? 옛날에는 족두리 쓰고 연지곤지 찍고 이렇게 했지만, 지금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랑은 연미복을 입고 이런 식으로 현대식으로 표현해야 되겠지요. 왜 제가 이 결혼식 이야기를 하느냐면, 이게 62장에 또 반복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11절.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 이번에는 뭐와 뭐를 병행시켰어요? 공의와 찬송을 그랬습니다. 찬송은 '테힐라'인데 이 '테힐라'의 복수형 '테힐림'이 시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구원과 공의와 찬송이라고 하는 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다 드리게 되는 그 시편의 노래,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결국 공의와 찬송으로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찬송의 기쁨으로, 열매로 백성들에게 구원을 주신다라고 하는 것이 61장이 메시아 나라를 묘사하는 것인데요, 이 내용이 62장으로 이어집니다. 보시죠.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