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3장 연구
이사야의 강조가 63장까지 오면, 사실 이사야 60장을 건너가면요, 거의 절정으로 향해 가면서 산 꼭대기에 올라가는 느낌이 듭니다. 클라이막스로 향해 갈 때 가슴이 막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지요.
제가 사실 이 성경 강좌 때 저 자신을 굉장히 쿨다운(Cool-down) 시켜서 조용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평상시의 저를 아시는 분들은 오늘 제 본모습이 나오는구나 싶으실 겁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 한 명도 딴짓을 하거나 저와 눈을 맞추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초집중하도록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 수업을 하니까, 드디어 이제 제 본색이 나오는 것이죠. 이사야의 이 부분에 이르니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인 63장에 이어 다음 주에 다룰 64장, 65장, 66장은 그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는 주님의 마무리 기별이기 때문입니다.
이 클라이막스에 들어오니 본문만 봐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전망을 내다보고 그 시대에 기별을 선포했던 선지자의 심정이 어땠을까 싶습니다. 쓰러져 가고 좌절한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는 백성들에게 회복을 제시해 주는 선지자의 심령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때 그 좌절의 역사 현장에서 이 기별을 전했던 이사야의 벅찬 감격을 잃고 살 때가 많습니다. 건조하게 보면서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무심하게 넘어가 버리곤 하지요. 하지만 한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역사적 현실의 조망이 그대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이되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실적 기별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산다고 생각하면, 말씀을 나누고 가르칠 때 가슴속에서 은혜가 참을 수 없이 차오릅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학문적으로 조각조각 나누어 분석합니다. 하지만 지금 히브리 대학에 가서 이사야서를 공부해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텍스트로만 봐 버리면 공부가 당황스럽고 건조해집니다. 공부는 해야겠고 뭔 뜻인지는 모르겠으니 그냥 인상 쓰면서 생각은 끊고 눈으로만 읽게 되지요. 그럴 때는 참 평이하고 쉬운 언어로 본문을 다시 읽어보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어쨌든 이사야는 성경 물질 통틀어서 스케일이 가장 광범위한 책입니다. 문학적 표현도 그렇고 사용하는 단어의 개수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압도적입니다.
그 스케일을 기억하시면서, 아까 말씀드린 광고 내용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중간에 다른 집회 일정 때문에 부득이하게 휴강해야 하는 날들이 있어서 여러분과의 수업 횟수를 정확히 채우기 위해 6월 28일에 시편 강좌를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새 강좌를 시작하는데요, 진짜 주변에 꼭 권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오실 수 있게 안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편도 괜찮고 요한복음도 괜찮습니다. 여건이 되시는 분들은 두 강좌 다 들으셔도 좋고, 한 강좌만 하실 수 있는 분들은 그대로 등록하셔서 동행할 수 있도록 선물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소개해 주신 분들에게는 다음 기회에 저도 감사의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연말에는 예레미야 강좌와 또 다른 강좌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9월에 목요일 강좌가 회복되어 기쁨으로 새롭게 참여하시면서 말씀을 대축하시듯 계속 이어가게 되면 큰 기쁨이 있겠지요.
본문 63장 1절입니다.
>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이 말을 하시는 분이 누구일까요? 이사야 자신일 수도 있지만, 선지자 개인에게 성취되기에는 내용이 너무나 큽니다. 이 63장 1절의 화자는 메시아 자신입니다.
미리 구조를 말씀드리면, 이사야 63장은 모두 19개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단은 뚜렷하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절부터 6절, 그다음 7절부터 14절, 그리고 15절부터 마지막 절까지입니다. 사실 이사야 63장 15절에서 기도가 시작되는데 이 기도는 64장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 부분은 이따가 말씀드리도록 하고, 먼저 63장 1절부터 6절 본문을 보면 이것이 철저한 메시아적 예언임이 드러납니다.
먼저 메시아가 말씀하십니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우선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에돔과 보스라를 알아야 합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가 세운 나라와 민족을 뜻합니다. 보스라는 에돔 남쪽에 있던 핵심 도시의 이름입니다. 즉 에돔과 보스라는 모두 에돔 전체를 가리키는 대구적 표현입니다. 마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나란히 표현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지요.
그렇다면 메시아가 왜 에돔과 보스라에서 오실까요? 거기를 다녀오시는 길이라는 뜻인데, 무슨 의미겠습니까?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면, 이사야 63장 전반부는 하나님의 **심판 개념**을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원수들, 궁극적으로는 사탄을 따르는 무리들을 다 이기시고 물리치신 것입니다. 에돔과 보스라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시는 분이기에 큰 능력이 있는 분이며, 그분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 즉 언약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그분은 곧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1절 하단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라고 선포하십니다. 공의와 구원이 병행되고 있습니다. 앞서 이사야 61장과 62장에서도 계속 말씀드렸던 패턴이지요. 하나님은 죄를 이기는 심판의 능력과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능력을 동시에 가지신 분입니다. 언약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이번에는 선지자가 메시아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백성들을 대신해 메시아를 향해 묻습니다.
>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이때의 화자는 선지자입니다. 에돔과 보스라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메시아를 보며 왜 옷이 붉게 물들었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3절에서 메시아가 대답하십니다.
>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포도즙틀을 밟으면 포도가 터지면서 붉은 즙이 사방으로 튀지요. 이것은 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원수를 갚는 날이 곧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속(구원)의 날이었습니다.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죄인을 사랑해 오셨지만, 죄 자체는 반드시 제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포도즙틀을 밟는 이 준엄한 심판의 사역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기에 메시아가 홀로 감당하십니다.
5절을 보면,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즉 메시아께서 전적으로 홀로 감당하시는 구원이자 심판 사역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6절에서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선혈이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라고 이 사역을 마무리하십니다.
이 이사야 63장 1절~6절의 묘사는 요한계시록 19장과 20장의 마지막 심판 및 아마겟돈 전쟁의 조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바벨론 포로라는 절망적인 역사적 상황을 눈앞에 두고 있던 유다 백성들을 향해, 이사야는 성령의 영감으로 이 위대한 종말론적 승리의 전망을 미리 내다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메시아의 희생으로 구원하시고 죄를 궁극적으로 처리하시는 심판의 비전입니다.
7절입니다. 이제 7절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신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헤세드, Hesed)을 회상하며 설명합니다. 원수에 대한 심판과 자기 백성에 대한 구원이라는 주제가 다시 반복됩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은총, 찬송, 사랑, 자비라는 단어가 계속 이어집니다. 여기서 '자비' 혹은 '사랑'으로 번역된 핵심 단어가 바로 '헤세드(Hesed)'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로,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을 뜻합니다.
8절을 봅니다.
>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이 표현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결정적으로 나타내 줍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깊은 사랑을 표현할 때 "내 사람", "내 여자" 하며 소유격으로 나타내지 않습니까? 예전에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들이 엄마를 무시하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 내 여자 함부로 힘들게 하지 마"라고 말하는 재밌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소유의 개념으로 묘사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을 향해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출애굽 때 "이 백성은 내 백성이라" 하셨던 그 언약의 선포가 여기서 재현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실제로 거짓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늘 거짓을 행하고 배반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메시아가 어떻게 하셨는지 9절을 보십시오.
>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환난을 던져두고 방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환난에 직접 동참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49장부터 55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메시아의 희생과 헌신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말씀의 진짜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힘든 멍에를 새로 얹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메고 있는 이 사랑과 고난의 멍에를 너희가 와서 나와 함께 나란히 지자"는 초청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나르듯 안아주셨습니다. 10절입니다. "그러나"로 문맥이 전환됩니다.
>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성령을 근심하게 하다'라는 표현이 신약 에베소서 4장 30절에도 똑같이 나오지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최고의 은혜를 누렸던 백성들이 도리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고, 결국 하나님은 대적이 되셔서 친히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징계로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시 은혜의 방향으로 돌이키십니다. 11절입니다.
>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백성들이 비로소 모세의 때, 즉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해 내고 회개하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우리를 치셨지만, 옛날 홍해를 가르시고 인도하셨던 신실하신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가?"
12절~13절에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라며 백성들이 탄원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이 출애굽 때 언약을 맺어주신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 회개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론이 14절에 나옵니다.
>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여호와의 영, 즉 성령께서 다시 역사하십니다. 가축들이 풀이 풍성한 골짜기로 내려가 편히 쉬는 것처럼, 시편 23편의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의 모습처럼 백성들을 다시 안식으로 이끄십니다. 주님이 이와 같이 백성들을 인도하셔서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영화롭게 하다'라는 것은 신학적 용어로 '영화(Glorification)'를 뜻합니다. 조직신학에서는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를 복잡하게 다루지만 실상 본질은 심플합니다. 칭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화는 내 공로입니까? 아닙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주님께서 나를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계속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칭의는 '순간적 성화'요, 성화는 '계속적인 칭의'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인도의 최종 도달지가 바로 '영화'입니다.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찬양할 공로는 단 0.1%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죄를 짓고 쓰러졌다가 돌아서서 "우리 하나님 어디 계시냐" 하고 손을 뻗었을 뿐이고, 그 손을 잡고 채워주신 분은 온전히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14절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을지라도 주님께 돌아갔더니 우리를 편히 쉬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실한 은총을 노래한 선지자는 15절부터 간절한 중보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 "주여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처소에서 보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
이어서 16절에 구약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앙 고백이 나옵니다.
> "주는 우리 아버지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이사야 49장에서도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셨는데, 16절은 그보다 더 강력한 표현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혈통적 근간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은 이미 죽어 우리를 모르고, 야곱(이스라엘)은 우리를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은 영원한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구속자"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민족적 정체성을 초월하는 위대한 신앙의 선포입니다.
17절입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이 표현은 하나님이 실제로 죄를 짓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 그냥 내버려 두셨음을 기도 중에 탄식하며 표현한 것입니다. 출애굽 때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버려두셨던 것처럼, "왜 우리를 포기하시고 내버려 두셨습니까? 이제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라며 간절히 회개하며 중보합니다.
18절~19절에서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원수가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성소의 파괴와 무너진 현실을 아뢰며 기도를 이어갑니다.
이 간절한 기도는 63장 15절에서 시작되어 64장 1절("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과연 이 기도는 어디까지 이어질까요? 이사야 선지자가 영광스러운 미래를 전망해 주는 마지막 계시의 절정 속에서 백성들을 대신해 드리는 이 처절하고도 장엄한 기도가 어디까지 향해 가는지,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영광스러운 마지막 비전이 무엇인지, 이사야의 대단원인 64장, 65장, 66장의 말씀은 다음 주 마지막 시간에 함께 살펴보며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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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기 전에, 최근에 저희 가정에서 경험한 작은 돌봄과 생명의 이야기를 하나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 헵시바와 쁄라의 회복을 묵상하던 중 저희 집 현관문에 깃털이 다 빠지고 땅에 떨어져 죽어가는 아기 새 한 마리가 흘러 들어왔습니다. 집사람이 불쌍하다고 거두어 보관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힘들어했습니다. 지렁이를 갖다주어도 안 먹고 쌀을 빻아주어도 안 먹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제 집사람이 날달걀을 깨서 먹여보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우리 장로님이 강원도에서 방사해서 기르신 귀한 유정란을 보내주신 게 있어서, 그 계란을 깨서 조금씩 먹였습니다. 눈도 못 뜨고 걷지도 못한 채 죽어가던 새가 그 달걀을 받아먹더니 조금씩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베란다 창가에 두었는데, 사람이 창문 앞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알아보고 "짹짹"거립니다. 문을 열고 나가도 "짹짹"하며 반깁니다. 강아지 키우는 것보다 더 살갑게 우리가 나가기만 하면 입을 벌립니다. 생명을 보호하고 길러낸다는 게 참 묘한 행복을 줍니다. 제 손 위에 올려놓고 키우고 있는데, 영국의 시인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의 시 구절이 생각납니다. "둥지에서 떨어진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들어 둥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리라." 참새 한 마리, 울새 한 마리 작은 생명을 다시 살렸다는 사실이 참 귀합니다. 먹이를 주려고 다가가면 입을 벌리는 녀석을 보며, 언제 날개에 힘이 나서 자연으로 날려 보낼까 하는 것이 요즘 저희 부부가 현관문을 드나들며 누리는 큰 행복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언약 백성을 이와 같이 대하십니다. 땅에 떨어져 깃털이 다 빠진 채 죽어가는 자식 같은 백성들에게, 당신이 직접 고난과 환난을 당해 가시면서까지 먹이시고 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벌리고 "짹짹"거리며 살아나는 모습을 보실 때,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행복해하시겠습니까?
내가 잘 사는 행복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려내는 행복,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헵시바(Hephzibah, 나의 기쁨이 네게 있다)'라 하시고 '쁄라(Beulah, 결혼한 자)'라 노래하시는 구원의 본질입니다. 요즘 저는 이 작은 아기 새를 살려가면서 그 사랑을 소박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가 우리에게 주는 기별은 심판 이면의 위대한 구원의 메시지이며 역사의 조망입니다. 그 시대에 가슴 벅차게 이 숨결을 전해 주었던 이사야의 심정 그대로, 우리는 살아있는 목소리로 오늘날 이사야를 읽어야 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될지,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온갖 세상의 정보와 지식이 우리를 어둡게 할지라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침내 성취하실 회복의 비전을 내다보며, 오늘도 희망을 품고 소망 안에서 힘있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여호와의 영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 이사야의 기별을 펼쳐서, 이 시대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함께 읽어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본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허무하고 헛되고 허전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무도 선명하게 역사가 이대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영감으로 기록해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이것이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이사야에게 주신 기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그 말씀의 궁극적 의미를 직접 음성으로 선포하시고 우리 삶에 적용해 풀어 주셨으니,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며 진정한 소망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약속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구원의 기쁨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동기가 되게 하시고, 영적인 힘이 되게 하시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와 근원이 되도록 감동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참여한 소중한 분들의 영과 육의 삶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사야 63장의 본문 속에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우리를 푸른 목초지와 편안한 길로 인도하시고 영원하게 하셔서 마침내 온전한 구원의 안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다음 주 마지막 강좌인 64장, 65장, 66장의 가슴 벅찬 최종 비전을 기대하며, 한 주 동안도 모든 주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옵시기를 바라오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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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사야 63장 핵심 요약정리
이사야 63장은 죄를 멸하시는 메시아의 준엄한 **심판 사역**과, 당신의 백성을 조건 없이 살리시는 신실한 언약적 사랑(헤세드)을 병행하여 보여주는 거룩한 복음의 선포입니다.
### 1.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시는 메시아 (1~6절)
* **심판과 구원의 동시 실현:**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힌 원수의 대명사인 '에돔'과 '보스라'에서 승리하고 붉은 옷을 입은 채 큰 능력으로 돌아오십니다. 원수를 파멸시키는 메시아의 붉은 옷은 죄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기 백성에게는 완전한 '구원'과 '공의'의 성취를 뜻합니다.
* **독자적인 구속 사역:** 만민 가운데 메시아와 함께 이 심판의 짐을 지거나 도울 자가 없었기에, 주님은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시며 전적인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으로 구원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심판으로 이어짐)
### 2.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 헤세드 (7~14절)
* **환난에 동참하시는 아버지 (7~9절):** 하나님은 자녀들이 배반할지라도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Hesed)'에 근거하여 "나의 백성"이라 불러주십니다. 특히 백성들을 고난 속에 방치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 직접 동참'하셔서 품에 안고 구원하시는 고난받는 메시아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 **성령의 인도와 안식 (10~14절):** 백성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므로 징계를 받았으나, 출애굽의 언약을 기억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은 여호와의 영(성령)을 통해 가축을 푸른 골짜기로 인도하듯 그들을 다시 편안한 안식으로 인도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구원의 여정(칭의·성화·영화)은 오직 주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 3. 언약에 근거한 선지자의 중보 기도 (15~19절)
*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선지자는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소의 현실을 두고 백성들을 대신해 간절한 회개와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 혈통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야곱(이스라엘)은 죽어서 우리를 모른 척할지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은 옛적부터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이자 '구속자'이심을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로운 성령이 다시 임하시기를 탄원합니다. 이 기도는 64장의 간구로 장엄하게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