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맹인에서 벗어나는 법- 이재철목사
오늘 마지막 날은 섬김에 대해서 함께 사색해 보겠습니다.
제가 캐나다 토론토에 갔을 때, 그곳에서 직업이 유치원 선생님인 분으로부터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유치원 아이들에게 풍경 그림을 그리게 하면, 대부분의 아이들 그림 속에 산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근무하는 유치원 아이들뿐만 아니라 토론토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아이들의 풍경 그림에는 산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흥미롭지 않습니까?
토론토가 주도인 캐나다의 온타리오주는 동서 길이가 1,000km, 남북의 길이가 1,000km로, 면적이 우리 남한 땅의 아홉 배나 됩니다. 그런데 그 광활한 땅에 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1,000km를 달려가도 우리가 말하는 야트막한 구릉이나 언덕은 나와도, 100m나 200m 되는 우리가 말하는 산은 단 한 개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토론토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들 가운데 부모를 따라 캐나다의 다른 지방이나 산이 있는 지역을 여행하거나, 혹은 외국에 가서 산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자연을 그리라고 하면 지평선, 강, 호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인식한 것만 어떤 형태로든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식하거나 인지한 것이 뇌 속의 인식의 창고에 저장됩니다. 저장되어 있던 것 중에서 필요에 따라 어떤 형태로 표현되고 표출되는 것입니다. 내가 인식해 본 적도 없는 것, 단 한 번도 인지해 본 적이 없는 것, 그래서 내 뇌 속의 인식의 창고에 인풋(Input)되어 저장된 적이 없는 것은 표현되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예술가들은 존중을 받습니다. 예술가들이 존중받는 이유는 어느 나라나 다 공통적으로 똑같습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남다른 독창성과 창작력 때문입니다. 그들의 독창성과 창작력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문호라 할지라도 모티브가 없으면 소설을 쓰지 못합니다. 신문 기사에서 조그마한 사건 기사를 하나 보았다든가, 어느 선술집에서 술을 먹는데 옆 테이블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든가 하는 뭔가 모티브가 있을 때, 그 조그만 모티브를 토대로 해서 대하소설이 나오고 감동적인 시가 나오는 겁니다. 아무런 모티브가 없는데 위대한 소설가의 머리에서 그냥 소설 이야기가 나온다? 있을 수 없습니다.
화가도 똑같습니다. 세계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 할지라도 인물화를 그릴 때 모델이 없으면 인물화를 그리지 못합니다. 화가는 사람의 우수에 젖은 눈망울, 행복에 겨워하는 미소, 공포에 질린 얼굴 표정을 상상으로는 절대로 그려내지 못합니다. 우수에 젖은 눈망울을 가진 한 여인을 보았을 때 그 눈망울을 캔버스에 그려낼 수 있습니다. 공포에 질린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 얼굴을 그릴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에 겨워하는 미소를 짓는 사람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행복에 겨운 미소는 이럴 것이야'라며 표현해 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대문호도 위대한 화가도 어떤 모티브나 모델이 있어서 그가 인식한 것을 토대로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고 나면,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예술가들의 독창성과 창작력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본 것의 변형력, 적용력, 모방력, 확장력일 뿐 창조력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술가들은 뭔가 본 것, 인식한 것을 변용하고 적용하고 확장하는 거거든요.
그에 반해서 창조력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화가가 모델이 없으면 인물을 못 그리는 것처럼, 그들에게는 창조력이 없는 것입니다. 소설가도 똑같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독창성과 창작력을 우리는 감히 넘볼 수 없기에 위대한 문호로 존중하고 존경할 뿐, 그들이 가진 능력이 창조력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게 됩니다.
여러분, 유럽 여행을 하신 분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유럽에 가면 곳곳에 2,000년도 더 전인 옛날 그리스 도시 국가 시대 때부터 만들어진 신상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어떻게 2,000년 전에 사람이 손으로 이렇게 신상을 만들었을까?' 다 당대의 예술가들이 만든 것이죠. 그냥 살아 있습니다. 아니, 살아 있는 사람보다 여자는 더 예쁘고 남자는 더 멋져요. 정말 그 당대의 예술가들은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신상들이 아무리 뛰어나 보인다 할지라도, 그 신상들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편 115편 4절에서 7절입니다.
>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옛날 그리스에 위대한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 예술가가 의뢰를 받고 신상을 만듭니다. 그 신상의 얼굴에 눈을 붙여 줘요. 왜 눈을 붙여 줍니까? 자기가 세상을 볼 수 있거든요. 자기가 세상을 아예 처음부터 눈이 자기 얼굴에 없어서 세상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면 신상을 만들 수도 없겠지만, 신상을 만들어도 눈을 붙여 주지 못할 겁니다. 이 예술가는 이렇게 염원하면서 신상의 얼굴에 눈을 붙여 주는 겁니다. '신이지요, 내가 당신 얼굴에 눈을 붙여 드립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붙여드리는 이 눈으로 나를 굽어 살펴 주소서.'
귀를 붙여 줘요. '신이시여, 내가 작은 소리로 신음하듯 기도해도 이 귀로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입을 붙여 줘요. '내가 당신 앞에 기도할 때마다 당신이 이 입을 열어서 나에게 응답해 주소서.' 그렇게 만든 예술 작품인 신상은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신상은 못 봅니다. 눈이 있는데 못 봐요. 귀가 있는데 듣지 못합니다. 입이 있는데 말하지 못해요. 사람하고 똑같이 생겼는데 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합니까? 그 신상을 만든 사람은 말하고 보고 들어 달라고 만들었는데 왜 못 보고 말을 못 하는 걸까요? 그 신상을 사람하고 똑같이, 아니 사람보다 더 멋지게 만든 그 능력은 위대한 창작력과 독창력일 뿐, 창조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만든 신상이 아무리 사람처럼 보여도 그저 돌덩이거나 나무덩이에 불과한 겁니다. 볼 수 없어요. 그 예술가에게는 그 나무 덩어리, 그 금속 덩어리로 하여금 자기를 보게 만들 창조력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중앙 건물 1층 전시실 제일 맞은편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그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가운데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얼굴 없는 여신상이 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루브르 박물관에서 누구든지 1층을 보고 2층으로 가려면 그쪽으로 얼굴을 돌려야 되는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그 신상이 그냥 한눈에 들어옵니다. 덩어리에 날개가 달려 있고, 발굴할 때 얼굴이 없었기 때문에 얼굴만 없는 여신상인데, 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여신이 마치 하늘로 비상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그 여신상 아래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에게해의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굴해낸 니케입니다. '니케'는 헬라어로 승리의 여신이라는 말입니다. 이 니케라는 헬라어가 로마 신화에 가면 '빅토리아'가 됩니다. 그리고 영어로 바뀌면 '나이키'예요. 우리가 신고 있는 운동화가 그 니케입니다. 승리의 여신 신발을 신고 우리가 걸어 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굴해낸 니케, 당시에 여신상 니케가 여러 군데 있었거든요.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그 니케는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굴한 니케라고 '사모트라케의 니케'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바로 그 니케가 사모트라케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2,000년 전에 바울도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 니케를 보았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할 때 드로아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그날 밤에 에게해 건너편에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이 보였습니다.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를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그것이 성령의 뜻이자 지시라고 믿고, 그다음 날 배를 타고 마케도니아, 오늘날 그리스의 발칸 반도로 넘어가서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유럽에 발을 딛습니다. 그 장면을 증거하는 사도행전 16장 11절이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트라케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바울이 드로아에서 배를 탔는데, 바울이 탄 배가 사모트라케에 가서 하룻밤 정박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 다시 배를 타고 네압볼리, 발칸 반도로 갔습니다. 당시에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 여신상이 바로 사모트라케의 부두 언덕 위에서 부두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기록이에요.
그래서 누구든지 부두에 가서 배를 타려고 하면 이 여신상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언덕 위에서 이렇게 날개를 펴고 내려다보니까요. 그러니까 배를 타는 상인들은 누구든지 배를 타기 전에 여신에게 기원을 했습니다. 항해의 안전, 그리고 자기 비즈니스의 번영을 위해서 기원했습니다. 전투에 나가는 군인들은 그 니케, 승리의 여신에게 승리를 기원했습니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리면서 그 위에 있는 사모트라케 여신에게 감사 기원을 했습니다.
바울도 이때 드로아에서 사모트라케에 내려서 배에서 땅으로 발을 디디면서 그 사모트라케 여신 니케를 보았습니다. 마치 비상할 듯이, 날아오를 듯한 그 예술적인 여신상을 보고 함께 가던 다른 모든 배의 승객들이 다 이렇게 빈다고 해서 바울도 그 여신상을 향해서 빌었겠습니까?
바울이 후에 아테네에 갔을 때 사도행전 17장 1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바울이 아테네를 갔더니 사모트라케처럼 부두에 여신상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마다 집집마다 신상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걸 보고 바울이 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돌, 나무, 금속을 가져다 놓고 듣는다, 본다며 사람들이 속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바울이 볼 때에는 그 사모트라케 여신 그것도 그저 대리석 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목이 떨어져서 지금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에베소에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아르테미스 신전 안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있었습니다.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피라미드와 함께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그 큰 아르테미스 신전의 여신에게 참배하기 위해서 매일 동서남북에서 수없이 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왔습니다. 참배객들이 많이 찾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을 위해 숙박업을 하는 사람이 있고, 밥을 파는 식당업을 하는 사람이 있고, 기념품을 파는 사람이 있죠. 그 신전에서 사제들과 신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여사제들만 1,500명이 있었던 걸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에 살고 있는 시민들 가운데 대부분의 생계가 그 아르테미스 신전하고 직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그 아르테미스 신전을 가리키면서 한 말이 사도행전 19장 26절에 나옵니다.
>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들이 아니다."
여러분, 지금 저거 참배하러 왔지 저거 누가 만들었습니까? 사람이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떻게 신이겠습니까? 그게 어떻게 너희들 말을 듣고 보겠습니까? 에베소 사람들이 가만히 두겠습니까? 당연히 죽이려고 하죠. 바울은 목숨을 걸고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정교한데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돌덩이에 불과한가? 그것을 만든 사람들에게 독창성과 창작력만 있었을 뿐, 창조력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시편 94편 8절입니다.
>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백성들 중에 무지한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백성들 중에 무지한 사람들아, 너희가 언제 지혜로워질래? 자, 여기에 무지가 있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무지한 너희들이 언제 지혜로워질 것인가, 그 분기점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생각하라."
여러분들이 아무리 학력이 깊어도, 여러분이 아무리 지성인이라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은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너희들 한번 생각해 봐라.
히브리어 동사 '빈(Bin)'은 건성으로 아니면 스쳐 지나가듯이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아닙니다. '너희들 숙고해 봐라, 깊이 생각해 봐라, 사색해 봐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것, QT를 하는 것 전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 18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여러분, 이 짧은 한 구절 속에서 여러분들께서는 어떤 단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생각하건대(로기조마이)'입니다. 내가 지금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파요, 고통스럽습니다. 매일매일 눈뜨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판으로 내게 다가올 미래의 날들은 오늘 내가 당하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날들이 될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 생각하는 사람만 압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제물이 되어 돌아가셨는데, 주께서 나를 버리시려고 지금 이 아픔 속에 몰아넣으셨을까?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기까지 돌아가신 분이시라면, 이 과정을 통해 내게 불필요한 모든 군더더기를 다 빼내게 하시고 영적으로 더 강건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지금 나를 빚고 계신다,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거예요. 여기에서 '생각하건대'라는 단어도 그냥 생각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숙고하는 것, 사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인이 된 일본의 그 유명한 작가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평생 병자로 살지 않았습니까? 젊은 나이에 폐결핵에 걸려서 환자로 살다가, 그 폐결핵이 척추 카리에스로 이어져서 7년 동안을 꼼짝 못하고 누워 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일어난 다음에는 죽을 때까지 여러 암에 걸렸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일평생 병자로 살았으면 짜증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생각하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의 병상 기도가 유명합니다.
> "병들지 않고는 드릴 수 없는 기도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는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아, 나는 병들지 않고는 인간이 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분은 일평생 병자로 살았지만 숙고하는(로기조마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생각하건대 내 육체는 지금 이렇게 병 속에서 고통스러워하지만, 이 병을 통해 주님께서 주실 미래의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라.' 그의 주옥같은 모든 문학 작품은 모두 병 속에서 나왔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여사가 건강한 여인이었으면 그냥 건강한 일본 여성으로 살다 생을 끝마쳤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8절에서 30절을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카타만다노).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여기서 '카타만다노'는 숙고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심사숙고해 봐라'라는 뜻입니다. "얘들아, 저 들판에 지금 백합화와 들풀이 어떻게 자라는지 심사숙고 한번 해 봐라."
여러분, 우리가 같이 교회에 다니고 교회에 앉아 있다고 해서 절대로 믿음이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 보시기에 큰 믿음이 있고, 좁쌀만큼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 분기점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아니하면 매일매일 '뭘 먹을까? 뭘 입을까?' 염려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 나를 영원히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고깃덩어리 육체를 위해서 염려하고 안달하다가 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주님께서 지금 '카타만다노', 심사숙고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는 지금 주님께서 무엇을 생각하라고 특정해서 말씀하시는 걸까요? 본문을 다시 봅니다. 시편 94편 8절에서 9절입니다.
> "백성 중에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QT 하면서, 말씀 공부 하면서, 경건 훈련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숙고하고 사색해야 되지만, 오늘 주님께서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너희들 심사숙고해 보아라' 하고 던져 주신 명제는 이것입니다. '너희 눈을 지어 준 내가 너희를 못 보겠니? 너희에게 귀를 만들어 준 내가 너희 말을 못 듣겠니?'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자, 아까 예술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술가들이 만드는 신상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염원을 담아서 신상을 만들었음에도 신상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돌조각, 나무조각, 쇠붙이에 불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술가에게는 독창성과 창작력만 있었을 뿐, 창조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모든 것이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술가처럼 하나님께서 모델로 삼을 대상이 없었습니다. 옛날 그리스의 예술가들이 여신상을 만든다고 하면, 그 시대에 정말 아름다운 여인을 앉혀 놓고 그 여인을 모델 삼아 여신상을 만드는 거거든요. 우람한 근육의 남신상을 만든다면 당대에 우람한 근육을 가진 전사 남자를 한 명 세워 놓고 보고 조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모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만드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참조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빚으셨습니다. 진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눈을 만들어 주십니다. '너희들 이 눈으로 나를 보라. 나도 네 눈 속을 들여다볼게. 우리 서로 이 눈으로 소통하고 사랑하자.' 귀를 붙여 주십니다. '내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아라.' 입을 붙여 주십니다. '이 입으로 나에게 말하거라. 내가 언제나 들어주마.'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눈을 붙여 주시고 귀를 붙여 주시고 입을 붙여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예술가가 신상을 만드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다음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다 빚으시고, 그 인간의 코에 생기를 후 하고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 순간에 흙이었던 인간이 진짜 보는 겁니다. 진짜 듣는 거예요. 진짜 말하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해졌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창작력과 독창력이 아니라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흙을 빚어서 당신을 보게 하시고, 말하게 하시고, 걷게 하시고, 움직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보고 듣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보는 것을 절대시합니다. "내가 봤단 말이야! 내가 그 사람 그렇게 말하는 거 들었단 말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듣게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절대시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멀리 있는 것 못 보죠, 눈앞에 붙어 있는 것 못 보죠, 내 등 뒤 못 보지요. 우리가 지금 이 강당 안에 앉아 있으면 강당 밖을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내 몸속에서 암세포가 나를 죽이고 있어도 우리는 못 봅니다. 태양처럼 너무 밝은 것도 못 보고 캄캄한 어둠도 못 봅니다. 너무 커도 못 보고 세균처럼 작아도 못 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절대적인 것 같지만, 실은 보지 못하는 게 더 많습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내가 들었단 말이야!"라며 들은 것을 절대시합니다. 그러나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귀는 인간의 청력이 포착할 수 있는 가청 주파수 대역의 소리만 듣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파장을 넘어서는 소리는, 예를 들어 내 옆에서 대포가 터지는 아주 큰 진동과 소리가 나도 우리는 아무 소리가 안 들리는 것과 똑같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파장 이하의 소리를 못 듣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지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게 하시고 듣게 하셨지만, 우리는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데는 한계가 있고 듣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도 장애를 받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디에 있어도, 어제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십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만 바른 섬김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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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핵심 요약 정리
* **인식의 한계와 표현:** 사람은 오직 자기가 인지하고 경험한 것(인식의 창고에 저장된 것)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 산을 본 적 없는 토론토 아이들의 그림에는 산이 없음)
* **창작력(예술가)과 창조력(하나님):** 인간 예술가의 뛰어난 독창성은 본 것을 변형·확장하는 '창작력'일 뿐,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력'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신상(우상)은 눈과 귀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 **신앙의 성숙은 '생각(사색)'하는 것:**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분기점은 깊이 생각하고 숙고(사색)하는 데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깨닫고(바울, 미우라 아야코), 일상의 염려를 내려놓고 신뢰하는 것(백합화의 비유) 모두 깊은 사색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 **귀를 지으신 이의 통찰과 섬김:** 인간은 시공간의 한계 속에서 제한적으로 보고 듣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눈과 귀를 만드신 분이기에 장애 없이 우리를 온전히 보고 들으십니다.
* **결론:** 하나님께서 나를 개별적으로 항상 지켜보고 계시며 내 음성을 듣고 계신다는 이 절대적인 사실을 '깊이 사색하여 아는 자'만이 진정한 '바른 섬김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