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두가지 종류 | 이재철 목사 핵심설교
분명한 사실은 오늘 하루에도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생이 마감되었다는 것입니다. 생이 마감되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모두 소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까지 주어진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일 아침을 맞아서 눈을 뜨고 우리가 내일 아침에도 살아 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계속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생을 명하신 분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시간의 길이만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시간이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주어진 시간을 무엇인가와 끊임없이 바꾸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루를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을 무엇인가와 바꾸는 것입니다. 평생을 학문과 자기 시간을 바꾸는 사람은 학자가 됩니다. 상업과 자기 시간을 바꾸는 사람은 사업가가 됩니다. 도박과 자기 시간을 바꾸는 사람은 도박꾼이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때우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과 자기의 시간을 바꾸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엇과 바꾸어 왔습니까? 그 결과가 오늘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엇과 바꾸려고 하십니까? 바로 그 결과가 여러분의 내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매일 내가 무엇과 내 시간을 바꾸는지를 생각하고 살아가지 아니하면, 언젠가 내 인생에서 시간이 소진되는 순간, 내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는 순간 그 사람이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아침에 동쪽에서 뜬 해는 질 때까지 그 빛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젊은 시절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이 끝나는 시점이 될수록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처럼 수없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저희 마을은 저녁 노을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습니다. 제가 낙향해서 노을 사진을 얼마나 많이 찍었는지 모릅니다. 마당에서 일을 하다가, 책상에 앉아서 책을 보다가 갑자기 분홍색 빛이 붉게 비쳐 들어와서 하늘을 보면 온 하늘이 불타듯 붉습니다. 얼마나 노을이 아름다운지 우리 지역을 '단노을'이라고 부릅니다. 달아오르는 노을이라는 말입니다. 참 아름답죠. 여러분, 사람들의 일생의 마지막이 단노을로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왜 그게 쉽게 되지 않을까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자식들 다 키우고 은퇴하고 나면 자기 취미 생활에 올인합니다. 취미 생활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취미 생활의 공통점은 자기만족, 자기 유익만을 위한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서 죽을 때까지 취미 생활에만 올인하면 거기에는 다른 사람이 개입할 틈이 없습니다. 서울에는 은퇴한 남자들이 누리는 취미 생활이 많습니다. 색소폰 배우기, 서예 배우기 등이 있고 골프는 기본입니다. 저희 집에 찾아오시는 남자분들한테 제가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밤이라도 색소폰 불다가 코끝에서 호흡이 끝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말을 못 합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여러분, 겨울 나무의 위용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차를 타고 오면서 보면 나무의 잎은 다 떨어졌습니다. 나무의 잎은 그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탄소동화작용을 하는 중요한 기능도 하지만, 그 나무를 아름답게 장식해 주는 옷 역할도 합니다. 여름에 잎이 무성할 때 모든 나무는 다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런데 겨울이 되어서 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앙상한 가지들만 남습니다. 잎이 다 떨어졌는데도 상하지 않고 가지만 남은 채 우람하게 위용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어떤 나무인지 아십니까? 느티나무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단 한 번도 생명의 유실수를 결실해 본 적이 없는 나무입니다.
우리 마을이 500년 된 마을인데, 500년 전에 우리 산간 지방으로 들어와서 우리 마을에 첫 번째 산 사람이 심은 것으로 알려진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500년 된 느티나무입니다. 지금 잎이 다 떨어졌는데도 그 위용은 대단합니다. 어른 몇 사람이 두 팔을 벌려야 그 둘레에 닿을 수 있습니다. 500년을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단 한 개의 생명의 열매도 맺어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 나무는 500년이 지나도 그렇게 웅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평생 감을 생산하고, 평생 포도를 생산하고, 평생 사과를 생산한 유실수들은 잎이 떨어지면 어떤지 아십니까? 나뭇가지들이 뒤틀려 있습니다. 앙상함 그 자체입니다. 세상에 뿌리를 내린 이후 자기를 위해서 산 적이 없거든요. 남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제가 고창에 살 때 저희 사랑채 뒤에 큰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나무 중간이 썩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썩는 부분을 도려내고 시멘트로 메우면 될까, 아니면 이걸 베야 될까 고민하다가 저하고 나이가 비슷한 동네 어른한테 물었습니다. "와서 우리 집 감나무 좀 봐 주세요. 이거 어떻게 하는 게 좋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거 우리 어릴 때 다 올라가서 놀던 감나무예요. 이거 100년 됐습니다. 유실수는 100년 되면 수명이 다한 것입니다. 이거 베야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남을 위해서 열매를 맺어 주지 않는 느티나무는 500년을 살고도 아직도 늠름한데, 남에게 자기 진액을 다 빼어 준 유실수는 100년을 못 넘기고 썩어 없어집니다. 그래서 군청에 신청해서 그 나무를 베었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도 저희 집에는 감나무 두 그루가 아직 더 있습니다. 100년은 안 된 나무죠. 잎이 다 떨어져서 앙상하게 뒤틀린 그 감나무를 보면요, 꼭 무엇과 같은가 하면 옛날 우리 어머니들의 밀가루 반죽처럼 축 처진 젖무덤처럼 보입니다. 옛날에는 형제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때 분가가 흔했습니까? 우리 어머니들은 7형제, 8형제, 9형제를 전부 자기 젖을 먹여서 키우셨습니다. 자기를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의 젖은 밀가루 반죽처럼 처진 젖무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축 처진 젖무덤이 보기 싫은 것이 아니라 숭고하고 거룩해 보였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주님, 그 주님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자기만을 위해서 500년이 지나도 위용을 자랑하는 느티나무이겠습니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다 주고 뒤틀릴 대로 뒤틀린 유실수이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자기를 다 내어주고 뒤틀린 유실수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삶의 모습을 사람의 지체에 비유한다면 무엇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형제들을 키운다고 당신 몸을 돌보지 못해서 밀가루 반죽처럼 축 처진 옛날 우리 어머니들의 젖무덤에 비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울의 고낵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입니다.
>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지금 이 고백은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행한 고백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옛날 유대인들은 제사의 목적에 따라서 제사를 다섯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완전히 의탁하는 '번제', 희생과 봉사를 의미하는 '소제', 다 같이 잔치를 벌이는 '화목제', 내가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제', 내가 누군가의 물건에 손해를 끼쳤을 때 그 물건을 보상하기 위해 드리는 '속건제' 이렇게 목적에 따라서 다섯 가지 제사로 나뉘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를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서 또 네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제물을 불에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화제', 제물을 하나님 앞에 높이 들어 올려서 드리는 것을 '거제', 제물을 제단 앞에서 흔들어서 드리는 것을 '요제', 그리고 피와 포도주처럼 액체를 제단에 부어 드리는 제사를 '전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인생을 전제로 표현했습니다. 컵에 물이 있는데 제가 이 물을 쭉 부으면 얼마 남았는지 보이는 것처럼, 모래시계처럼 바울은 자기 시간을 하나님 앞에 다 부어 드리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인생은 시간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바쳐 드리고 이제 지상의 시간이 끝나가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인생은 생존 경쟁이라고 하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싸움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싸움이라고 다 동일한 싸움이 아닙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사람을 짓밟고 불의마저 불사하는 불의한 싸움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선한 싸움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유익을 위해 느티나무처럼 불의한 싸움을 싸운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도구로 살기 위해서 자기의 마지막 진액까지 뽑아내는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인생길을 걷습니다. 대개 욕망의 길을 걷습니다. 여러분, 욕망은 물거품과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세수대야에 손을 넣어서 막 흔들어 보세요. 물거품들이 막 일어납니다. 하지만 물거품 속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물거품은 펑펑 터져서 다 없어집니다. 물거품 같은 욕망의 길을 달리는 것은 물거품처럼 자기 인생을 소진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욕망의 길을 걸으면서 태산 같은 재산을 모았다 할지라도 나는 못 가져갑니다. 그것 때문에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만 원수처럼 싸우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 욕망의 길을 달리지 않았습니다. 소명의 길을 달려갔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의 길, 그 길을 완주하기 위해서 바울은 자기 생을 걸었습니다.
"믿음을 지켰으니" 여러분, 믿음은 지키는 것입니다. 사력을 다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려는 의지와 행동과 실천이 수반되지 않을 때, 믿음은 여러분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관념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런 믿음은 여러분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을 내가 지킬 때 그 믿음은 나의 삶으로 승화됩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나의 믿음을 지켰다"고 할 때 바울이 헬라어 동사 '테레오'라는 동사를 썼습니다. 테레오는 '테로스', 즉 파수꾼이라는 명사에서 나온 동사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파수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성을 지닌 인간입니다. 내가 나를 파수하지 않으면, 나를 지키지 않으면 어제까지 내 믿음이 하늘처럼 높았을지라도 오늘 땅 밑으로 꺼집니다. 바울은 죽을 때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자기 믿음에 대해서 파수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완주하고 믿음을 지킨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삶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맞바꾼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시간을 그와 같은 삶과 맞바꾼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삶으로써 자신을 통해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어디를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다 복음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영접하는데, 어떤 사람은 돌을 들고 바울을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영접하고,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지 않고 오히려 나를 박해하는가?' 그것이 질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입니다.
>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데 주님께서 그 사람들 가운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 주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인지 바울은 미리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미리 알았다면 그 사람들의 주소록을 만들어서 그 집들만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박해받을 일도 없고, 감옥에 투옥당할 일도 없고, 매 맞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을 때까지 지중해 세계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주님께서 선택하신 한 사람, 그 사람이 나를 통해 복음을 영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서 27절입니다.
>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왜 이렇게 살았습니까? 왜 이렇게 수많은 위험을 맞닥뜨리고, 왜 춥고 배고픈 그 고생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단 한 사람에게라도 주님의 생명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의 이 모습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자기만 아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아니라 땅에 뿌리를 박으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사람들에게 모든 생명의 열매를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유실수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지체에 비유한다면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당신 몸을 돌보지 못해 밀가루 반죽처럼 축 처졌던 옛 어머니의 젖무덤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8절입니다.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의 시간을 몽땅 바꾼 사람, 아름들이 느티나무가 아니라 비틀어진 유실수로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씌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주님께서 먼저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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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핵심 요약 정리
인생은 시간의 소진: 인생이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의 길이만큼 사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언가와 끊임없이 '맞바꾸는 과정'이며, 그 결과가 현재와 미래의 내 모습이 됩니다.
아름다운 석양(노을)의 삶: 인생의 마지막은 서쪽 하늘을 붉게 감동시키는 석양처럼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은퇴 후 타인이 개입할 틈이 없는 개인의 '취미 생활(자기만족)'에만 올인하며 시간을 소진하곤 합니다.
느티나무와 유실수(예수님과 어머니의 사랑):
느티나무: 500년을 살며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지만 타인을 위한 생명의 열매를 맺은 적이 없는 나무(자기중심적 삶).
유실수: 남을 위해 모든 진액을 쏟아내어 열매를 맺느라 100년도 못 가 가지가 뒤틀리고 썩어가는 나무(헌신과 섬김의 삶).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자녀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아 처져버린 어머니의 젖무덤은 자기 몸을 다 내어준 '유실수'의 삶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제(奠祭)적 삶: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단에 액체를 모두 부어 드리는 '전제'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과 진액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부어 드렸음을 고백합니다.
선한 싸움과 믿음의 파수꾼: 바울은 개인의 욕망(물거품)이 아닌 주님이 주신 소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파수꾼(테레오)'이 되어 치열하게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소명과 영광의 면류관: 바울이 온갖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지중해를 누빈 이유는,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받을 한 사람'에게 생명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내어주는 유실수의 삶을 산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