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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자를 기뻐하신다 - 유기성 목사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12|조회수52 목록 댓글 0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자를 기뻐하신다 - 유기성 목사

 

https://youtu.be/kMITCJeDFTI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아멘.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많은 때를 우리가 다 지내고 있는데, 주님은 계속해서 "걱정하지 말라, 염려하지 마라, 안달하지 말아라, 조급해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기도하면 동일한 성령의 감동을 받습니다.

 

주님이 이 시간 우리에게 알게 하려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까?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실까?' 어떤 순간에든지 그 생각만 하라는 것입니다.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저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도, 아무것도 없는 절망적인 순간에 있어도 항상 '하나님은 이 순간에는 어떻게 하는 걸 기뻐하실까?' 그 생각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 살면 반드시 하나님이 살리시고, 어려운 것 같은 때가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의 때가 되게 하실 것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마음이 기뻤습니다.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만 생각하면서 가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라고 생각해 보니까, 아, 이게 만만치 않은 주제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만 생각하고 그렇게 살자는 원칙에는 너무나 명확히 동의하시겠지만, 막상 현실의 문제로 들어가면 좀 혼란스럽기도 하고 헷갈리기도 하는 그런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를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내 급한 일, 눈앞에 닥친 어려운 문제들, 그리고 바쁜 일상 속에서 정신없이 살았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경 집회 때 '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향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매 시간 한번 깊이 문제를 다루어 보자' 하고 결심했습니다. 이건 정말 너무너무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이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책을 쓰셨는데 꽤 두꺼운 책입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또 도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주제가 정말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야 될 주제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 시리즈 설교를 하게 된 강력한 동기를 얻게 됐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우선 "하나님은 기쁨이 충만한 분이시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이 정말 옳은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기쁨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기쁨이 없는 하나님,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사실 상상하기 어려운 개념이죠. 만약 하나님께 기쁨이 없으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얼마나 부담이 되겠습니까? 기쁨이 없는 사람과 함께 밥을 같이 먹으면 온종일 스트레스를 받지요.

그런데 너무 기쁜 사람,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차를 마시고 밥을 같이 먹으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그 기쁨의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사실 기쁨이거든요. 우리가 가족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 우리가 같은 교우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내가 기쁨이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아내와 함께 있는 남편, 기쁨이 충만한 남편과 함께 있는 아내, 부모가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있으면 그 자녀들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교우들도 아주 기쁨이 충만한 목사님, 기쁨이 충만한 장로님, 기쁨이 충만한 권사님, 기쁨이 충만한 집사님과 함께 있으면 내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진 것 같은 그런 회복을 얻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기쁨이 충만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거고,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기쁨이 충만할 테니까요.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 주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기쁨이 있으시다고 하셨어요. 어떤 조건이나 일이 있어서 기쁜 게 아니고, 예수님 안에 본질적인 기쁨이 충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만난 사람, 예수님과 함께 무슨 일을 하게 될 때 그 속에 기쁨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쁜 사람을 만나면 기쁘고, 기쁜 일이 생기면 기쁩니다. 항상 조건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본성 안에 기쁨이 있으십니다. 정말 기가 막힌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구원인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 하나님의 슬퍼하심과 애통하심이 나옵니다. 이 연속 설교를 해 갈 때 그 문제도 좀 다루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이 기쁘기만 하신 하나님은 아니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쁨과 진노, 슬픔은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해서도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때때로 하나님이 진노하기도 하시고 슬퍼하기도 하시는 모습이 성경에 나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그 슬픔과 진노하심 그 너머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정 무엇을 기뻐하시는 걸까요? 성경을 보면 가장 눈에 탁 뜨이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실 때, 침례를 받으시고 이제 물 위로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시면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의 가장 큰 조건은 예수님을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때 예수님의 모습이 천상에서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사실 때는 마치 마른 땅에서 자란 식물과 같이 외모가 보잘것없었다고 이사야서에 예언되어 있는데, 변화산상에서 본 예수님은 광채가 나는 천상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변화산의 체험을 했을 때, 빛이 나는 구름이 그들 가운데 덮였고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실 때와 똑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뻐하십니다.

이사야가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할 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사야 42장 1절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시면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은 본체이신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보시는 것이기도 하죠.

그러면 이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보자' 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실 때 그렇게 기뻐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라며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누구든지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표현하지요. 이 일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하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 마음속 궁금한 문제 하나가 풀립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 부족함이 없으시고 공의로우시며 온전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가 많고, 살아보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실망시켜 드립니다. 욕심도 많고 이기적이며, 말할 수 없이 초라해서 정말 지옥의 자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사랑하시고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너무나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스바냐 3장 17절이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견딜 수 없이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그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며 격려와 소망이 됩니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주저함이 생깁니다. 잘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죠. 믿으라고는 하지만 내가 나를 볼 때도 너무 실망스럽고 모자란데, 하나님이 나를 기뻐서 견딜 수 없어 하신다니 이게 정말 잘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우리를 보실 때 우리 자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되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면서 우리를 그렇게 기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대단하게 하지 않아도,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영접했다면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너무너무 기쁘게 할 수 있겠구나'라는 서광이 비칩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계시고, 지금 영상으로 이 집회에 참여하신 분들, 여러분이 하나님을 특별히 기쁘게 하는 일을 당장 하지 못했어도, 혹은 지난 한 주간 동안 무슨 그런 선한 일을 한 적이 없어도, 여러분의 존재가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대할 때, 그 아이들이 특별히 나에게 뭘 잘해주거나 세상에서 두드러지게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해도 내 아이니까 그 존재 자체가 부모에게는 기쁨이지 않습니까? 잘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은 "아니에요, 나에게는 원수예요"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아이가 어디 가서 다치거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부모의 마음은 달라집니다. 자녀 때문에 속상하고 실망하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이 간절해서 그런 것이지, 자녀는 부모에게 존재 자체가 기쁨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3절에 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큰 기적도 행하며 그렇게 놀라운 사역을 했던 많은 주의 종들이 실제로 주님 앞에 갔을 때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무서운 말을 들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고 그런 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말과, 예수님이 하신 이 경고의 말씀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예수님을 대충 믿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사와 이적도 행하고 귀신도 쫓아냈던 분들, 요즘으로 말하면 정말 유명한 목사님들이나 큰 능력을 행하는 은사자들인데, 이런 분들이 주님 앞에 갔을 때 모른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는다면 평범한 교인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나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길 수 있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리 큰 역사를 행하는 사람이라도 그 마음에 진짜 예수님이 거하시는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진정 거하시는 사람인데 어떻게 모른다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진짜 마음에 거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은사를 받아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큰 역사를 행할 수 있다는 이 점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우리가 반드시 스스로 시험해보고 점검해보고 확증하라고 강력하게 권했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반드시 확증해야 합니다. 내가 교회에서 무슨 중직을 맡았다거나, 또는 어떤 은사가 있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거예요. 진짜 중요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가'를 시험해보고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정말 그러한지 반드시 확증해야 합니다. 막연하게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이 분명하지 않으면 버림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사와 이적을 행했던 엄청난 사역자들도 결국은 예수님이 그 마음에 중심에 계신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확실히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보잘것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중요한 거죠. 반대로 예수님은 그 마음에 계시지 않는데 겉으로는 너무나 잘생기고, 실력도 좋고, 배경도 좋고, 재주도 많으며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래도 우리 하나님 눈에 보시기에는 정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제가 집회를 가서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계십니까?" 그러면 다 "아멘!" 하십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은 하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대답은 잘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라고 말은 그렇게 해요. 근데 중요한 것은 이제 '확정'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내가 고백은 하지만, 그것이 귀로 들어서 관념적으로 아는 것일 뿐 실제가 아닌 안타까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분들의 말이나 행동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마음에 정말 계신 것을 믿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혼자 있을 때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예수님이 정말 마음에 계신 것을 진짜 믿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가 없고 그렇게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계신 사람이라는 증거가 삶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게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코로나19와 같은 여러 불확실한 문제들이 많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겹쳐 있지만, 이런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진짜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풍문으로 들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는 그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온전히 모시고 사는 것보다 더 하나님 앞에서 잘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예수님이 내 마음에 거하시는 것을 믿으며, 그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무슨 말이든지 행동이든지 조심하며 살면, 우리는 그냥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1678년 영국의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라는 분이 소책자를 하나 펴냈는데, 제목이 《인간의 영혼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가 당시에 영국의 기독교인들 중에 진짜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게 안타까워서 쓴 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인가,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루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통 신앙이나 교리를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예수 믿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또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 즉 예배에 빠짐없이 참여하거나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행동을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황홀하고 뜨거운 감정적인 체험을 본질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스쿠걸 목사님은 그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그건 핵심이 아닙니다. 정통 교리를 아는 것,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 아주 뜨거운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조금 더 선하고 단정하며 도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친히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안에는 세상이 감당 못 할 생명과 권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이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지상의 책이 요한 웨슬리 형제를 거듭나게 만들었고, 조지 화이트필드가 회심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웨슬리 목사님은 하나님이 자기 안에 임하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본인도 목사였으며 선교사였습니다. 굉장히 많은 구제 활동을 했고 성경 연구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늘 성경을 읽으며 살았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자기 영혼 안에 진짜 들어와 계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걸 명확하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종교인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 책을 읽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 이 말을 하도 흔하게 들으니까 오히려 영적 무감각에 빠져 있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도대체 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도 모를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예수님이 거하신다는 것을 정말 믿게 되면서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대부흥을 일으키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안에 거하시는 것을 진짜 믿게 되면 사람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그렇게 안 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데 어떻게 옛날처럼 똑같이 죄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지금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그 증거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확실한 흔적이 있습니까? 하다못해 여러분의 표정을 보고 누군가가 "당신은 좀 특별해 보입니다. 당신 얼굴 표정을 보니까 마음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의 말과 행동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라는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소리를 자주 들으십니까?

예수님을 진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진짜 믿게 되었을 때, 가족들, 친척들, 직장 동료들, 주변 사람들이 모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깜쪽같이 모르게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흘러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너무 잘 아는 말씀이지만 다 함께 마음에 새기며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그저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 수준으로 표현하지 않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목적은 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뿐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진짜 믿는 사람의 실제 고백입니다.

그냥 지식으로만 들어서 아는 사람에게는 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참 이상하고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자기 고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짜 내 안에 오셨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믿게 되면, 당연히 이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데 어떻게 내 멋대로 내가 산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 내 안에 사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데 "나는 죽었다"고 하니 참 모순처럼 느껴지죠? 내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고,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이 육체는 이제 내 자아가 아니라 내 안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동하는 것뿐입니다. 이 고백이 명확한 사람은 예수님을 진짜 마음에 영접한 사람이며,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그 사람 안에 예수님이 진짜 생명으로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일 중에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을 굉장히 힘들고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죽는 게 제일 힘들다"고 하시고, 어떤 권사님은 "아유, 이제는 안 죽으려고요. 주님 뜻대로 죽어봤는데 나만 손해 보더라고요. 이제부터는 내 권리 찾고 안 죽으렵니다" 하십니다. 정말 십자가의 신비를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복인지,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를 진정 모르니까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책은 제가 쓴 책 중의 거의 첫 번째 책입니다. 그 책을 쓰고 꽤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고, 대만과 중국에도 번역이 되어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출간 과정에서 책 제목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어 제목 그대로 번역하면 한자로 '아사야소생(我死耶蘇生, 나는 죽고 예수는 산다)'이 되는데, 중국 출판사의 편집 위원들이 극구 반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제목으로 책이 나오면 서점에 진열되어 있어도 주변에 사람이 가질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제목이 불길하다는 것이죠. "아니, 저 책은 무슨 공동묘지 같은 냄새가 나냐, 가까이만 가도 내가 죽을 것 같다"라며 너무 끔찍한 제목이라 책이 안 팔리는 건 고사하고 독자들이 기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목을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뉘앙스로 바꾸어 출간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음이 참 씁쓸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그 위대한 십자가의 진리와 복음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한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불신자들만 그런 게 아니고, 기독교 서적을 사는 기독교인들조차도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는 말을 너무 힘들고 부담스러운 것으로 여겨 싫어한다는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처음 책을 출간할 때도 똑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무슨 제목을 붙이면 좋겠냐고 물어와서 제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고 제안했더니, 첫 번째 반응이 "그렇게 하면 책 안 팔립니다!"였습니다. 절대 안 팔린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우리 기독교 출판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던 책이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쓴 《긍정의 힘》 같은 종류였습니다. "긍정의 힘",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밝고 긍정적인 제목이 대세였는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제목은 너무 어둡고 부정적이며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어 책을 집어 들지도 않을 것이라는 우려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영혼에 있어서 십자가 복음보다 더 영광스럽고 놀라운 제목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큰 축복도 없고 그보다 더 강력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기에, 저는 "안 팔려도 좋으니 이 제목으로 갑시다"라고 고집하여 책이 나왔습니다. 감사하게도 참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습니다. 제목을 바꿨으면 더 팔렸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영혼들에게 읽혔습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진리를 잘 모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시는 것만으로도 온 우주가 떠나갈 듯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 내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내 안에 사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내 삶의 핸들을 주님께 넘겨드린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아마 기쁨을 이기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실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삽니다"라는 이 고백과 설교를 외롭게 해오면서,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아,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기쁨이셨구나!'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스바냐 말씀처럼 하나님이 나를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게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너무나 기뻐하시는데, 내가 죽고 예수님이 내 생명이 되시어 살아가니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내 안의 예수님 때문에 견딜 수 없이 기뻐하시는구나!'라는 비밀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드리는 자체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어릴 때는 그저 주일에 교회 마당을 밟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부 때는 수련회에 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사해주셨다는 대속의 진리를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때도 엄청난 감격이었습니다. 내 추악한 죄가 다 용서받았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은혜였습니다. 제가 학생 때 그 복음을 듣고 '아, 이 놀라운 복음을 평생 전할 수만 있다면 목사라는 직업도 참 괜찮겠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것은 죄 사함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단지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죄만 사해주려고 죽으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지 않고,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으로 살면서 주님과 매일매일 친밀하게 동행하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여기까지 가는 것이 십자가의 완전한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바로 그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당당하게 승리하며 사는 것을 보고 싶으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실제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삽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자아(자신)가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성도의 삶에 놀라운 기적과 역사를 나타내지 못하실까요? 역사를 안 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기회를 안 드려서 못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아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숨 쉬며 주인의 자리를 꿰차고 있으니까요.

흔히들 "저 사람은 자아가 강하다"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자아가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아가 죽었느냐 안 죽었느냐'의 차이입니다. 성격이 약하고 우유부단한 자아도 주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은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적으로도 유약하고 의지도 약하며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그 사람 속에서도 주님은 역사하지 못하십니다. 자아는 강약의 문제가 아니라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었는가에 대한 사활의 문제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주님은 그 인생 속에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져 난리가 났어도 예수님이 그냥 손님으로 계실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며 예수님을 그 잔치 집의 주인의 자리로 올려드렸을 때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그것을 떠다 주었을 때 물이 최고의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을 선택할 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나 자신이 죽고 내 안의 예수님이 일하시게 하는 게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여러분, 정말 입술로 고백하고 또 고백하십시오. 가족들을 만나든, 친구를 만나든, 교우들을 만나든 '나는 죽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내 생명이십니다'라고 선포하십시오.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흐뭇해하시겠습니까.

저는 목회자가 되고 나서도 좌절감이 아주 심했습니다. 늘 '나는 왜 이렇게 능력도 없고 신실하지도 못할까' 하며 제 자신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이 내 새로운 생명이 되셨다는 이 온전한 복음을 진리로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 한계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는데 성경을 보니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나를 죽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죽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미 죽어버렸으니까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었고, 이제는 내 안에서 예수님이 내 생명으로 일하신다고 하니 말할 수 없이 자유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쁜 복음을 교인들에게 설교하기가 처음에는 참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론은 너무나 명확한데 내 삶에 실제적인 '확증'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쥐어짜고 찾아봐도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맞는데, 내가 실제로 온전히 죽고 예수로 사는가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설교를 떳떳하게 할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제 예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확증의 날을 주셨습니다. 교인들로부터 제가 전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온 교회가 저를 무섭게 오해하는 대형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억울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목사는 억울하다고 강단에서 다 해명할 수도 없습니다. 목사가 해명을 하려고 입을 열면 결국 진짜 잘못한 누군가의 허물을 공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세워주어야 할 목사가, 교인의 잘못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입이 있어도 말도 못 하고 해명도 못 하며, 그렇다고 그 무거운 오해의 짐을 혼자 다 감당해 내기도 힘들어 정말 가슴이 터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 말씀이 제 영혼을 강타했습니다. '아! 내가 이미 죽었다는 이 복음을 지금 붙잡아야 하는구나!'

그래서 서재에서 울며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처음으로 제 입을 열어 진심 어린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유기성이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제 안의 억울해하고 분노하는 자아는 죽었습니다." 그 고백을 열 번쯤 반복해서 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성령께서 제 영혼에 신비한 영적 죽음의 평안을 임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죽고 나니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향한 오해와 비난, 그것 때문에 속상하고 억울했던 지옥 같던 마음이 눈 녹치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방에서 화살을 쏘아대도 죽은 시체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죽으니 상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기성이는 죽었으니 이제 제 안에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십시오. 자아가 죽었어도 이 육체는 살아있으니, 이제부터는 제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데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 주님의 마음이 영혼들을 향해 애통해하시는 눈물의 마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우리를 보시면서 너무 안타까워하시고 애통해하시는 그 목자의 심정이 제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그때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진짜 십자가에서 죽는 게 맞구나! 이렇게 죽었다고 고백하고, 죽었다고 선포하며 주님께 권리를 이양하는 것이구나!' 자리에 누워서도 "유기성이는 죽었다"고 계속 고백해 보았습니다. 정말 참 놀랍게도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 예수님이 내 유일한 생명이시라는 사실이 실제 현실로 느껴졌습니다. "주님, 저는 완전히 주님께 제 자신을 드렸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지만 오직 주님이 저를 통해 하고 싶으신 일만 하십시오"라고 고백하니 인생이 말할 수 없이 가벼워졌습니다.

사실 목회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큽니다. 어려운 교우들의 사정이 한두 가정도 아니고, 교회 안에는 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연속해서 터집니다.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고 때로는 두려워 도망치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죽었다'고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니까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비로소 제 부끄러운 실체를 직시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예수님보다 '내 목회'를 더 중요하게 우상으로 생각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내 목회를 도와주시는 조력자 정도로 여겼던 것입니다. 설교도 잘하게 해주시고, 교회도 빨리 부흥시켜 주시는 도구로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지, 예수님 자체가 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내 성공적인 목회가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사건을 통과하면서 제 인생의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목회는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이고, 나는 그냥 주님께 제 몸을 드린 도구일 뿐이구나. 내게 있어서 진짜 유일하게 중요한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 비로소 제 신앙의 질서가 똑바로 잡혔습니다. 예수님이 제 모든 것의 중심이 되시고 주님이 친히 일하시니, 저는 그저 주님 손에 붙들려 목회를 편안하게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나고 기쁘고 평안한지 모릅니다. 주님이 대장이시니 나는 그냥 뒤에서 따라만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는데 예수님이 그 일의 총책임자이시고 조장이시며 여러분은 그냥 지시대로 따라만 간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우리 교회에 부목사님들이 많으신데, 가끔 불안불안하실 것입니다. 담임목사인 저 사람이 좀 미덥지가 못해서 "진짜 저 사람 믿고 따라가도 되나?" 싶으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근데 만약 우리 부목사님들의 진짜 담임목사님이 완벽하신 예수님이시라면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시겠습니까? 그런 행복한 부목사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건 이후 제 심정이 꼭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과 교회의 진짜 담임목사로 앞서 가시고 나는 그냥 뒤따라갈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게 와서 쉼을 얻으라"고 하셨구나 하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무슨 위기가 닥치거나 억울하고 답답한 문제가 생기면 즉시 "나는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그때 서재에서 주님이 주셨던 그 십자가의 평안의 방으로 바로 들어갑니다. 문제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답답해하거나 속상해하는 일이 없어집니다. 주님이 어쨌든 책임지고 헤쳐 나가실 테니 나는 그냥 주님 발자국만 밟고 가면 된다는 배짱이 생깁니다.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하게 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 이렇게 주님께 맡기고 신뢰하는 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구나!'라는 것을 압니다. 나를 통해서 내 안의 주님이 마음껏 일하실 수 있도록 나를 비워드리는 것, 예수님을 보시며 기뻐하셨던 그 하나님의 하늘의 기쁨이 주님과 연합된 나에게도 그대로 부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정말 중요한 이 십자가의 진리를 생명 가치로 붙잡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고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최고의 효도입니다. 그리고 진짜 그 믿음으로 살기 위해 날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나는 이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내 인생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꼬인 가족 문제도 주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권리를 이양해 드리면 됩니다. 내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렇게 해야 되겠다, 저렇게 뜯어고쳐야 되겠다" 하는 내 고집과 자아를 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나는 오직 예수님의 부드러운 도구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여러분의 가정에서 남편이나 아내에게, 부모님이나 자녀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갑니다. 주님이 내 입을 통해 말하게 하시는 대로 말하고, 주님이 행동하게 하시는 대로 행동하며, 미래의 모든 걱정과 염려는 주님께 다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고 너무너무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의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회의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직 살든지 죽든지 주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저희가 그동안 봉사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늘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나를 향한 스포트라이트를 은연중에 갈망해 왔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그래서 그 모든 종교적인 열심이 온전히 하나님을 위한 섬김이나 봉사가 아니라, 결국 내 자아를 증명하고 나 자신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음을 이 밤에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눈을 주신 하나님께서 나의 안팎을 언제나 불꽃 같은 눈으로 보고 계시고, 우리에게 귀를 주신 하나님께서 나의 신음 소리까지 언제나 듣고 계심을 평생 잊지 않게 해주시기만을 간절히 간구합니다.

이 시간 머리 숙인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 어디에서나 소리 없는 '안드레'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빛도 없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것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묵묵하게 십자가 길을 걷는 안드레가 되게 해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오직 주님만 홀로 주인 되시는 참된 주님의 교회가 되게 하시고, 이 땅에 우리의 모임이 있음으로 인해 무너진 이 땅의 수많은 교회들이 주님의 생명으로 다시 소생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생명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 핵심 요약 정리

하나님의 본질인 '기쁨': 하나님은 조건이나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기쁨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성도(부모, 목회자)와 함께 있을 때 주변이 살아나듯,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성도에게는 구원이자 영원한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온 우주에서 가장 기뻐하시는 대상은 오직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죄 많고 허물투성이인 우리가 하나님께 최고의 기쁨이 되는 유일한 비결은,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뿐입니다.

외식(나팔 부는 사역)의 위험성: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던 대단한 사역자들도 주님께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마 7:21~23). 사람의 박수와 스포트라이트를 구하는 자는 자아가 살아있는 자이며, 진짜 중요한 것은 내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살아 숨 쉬고 계시는가(고후 13:5)를 날마다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는 일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생명': 정통 교리를 머리로 아는 것이나 도덕적인 선행, 일시적인 감정적 체험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예수 그리스도)이 친히 들어오셔서 연합되는 것입니다(헨리 스쿠걸의 진리).

 

십자가의 종착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 십자가의 목적은 단지 죄 용서(구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옛 자아는 주님과 함께 완벽히 죽고 이제는 내 안의 예수님이 내 삶의 진짜 주인이 되시어 동행하는 것입니다(갈 2:20). 자아(강한 자아든 약한 자아든)가 죽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 인생에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한 확증과 진정한 자유: 강연자는 억울한 오해와 목회의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내 힘을 빼고 "나는 죽었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했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십자가의 절대적인 평안과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내 목회의 성공이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주님이 대장 되시어 앞서가시고 나는 양처럼 따라갈 때 인생의 참된 쉼이 임합니다.

결론: 나의 고집과 염려를 십자가에 못 박고 가정과 일터에서 오직 주님의 부드러운 '도구'가 되어 순종할 때, 하나님은 내 안의 예수님을 바라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놀라운 축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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