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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하나님의 아름다움(시27:4) - 김동혜목사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14|조회수63 목록 댓글 0

 

하나님의 아름다움(27:4) - 김동혜목사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제가 우리 변영기 목사님, 그리고 제 친구이자 함께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계신 영주교회에서 성도님들을 만나 뵐 수 있게 되어 참 반갑고,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영주는 사실 저희에게 특별한 곳입니다. 제 아내의 고향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1년에 한 번씩은 꼭 오고는 합니다. 제 아내가 어린 시절을 영주에서 보냈고, 실제로 성장한 곳은 태백입니다. 처할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는 명절 때마다 이곳에 다녀가고는 했었죠. 그런데 그 당시에는 집안이 불교 분위기여서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내가 영주가 고향이라 1년에 한 번씩 오면서도 영주교회는 한 번도 와보지 못했기에, 늘 영주교회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희와 아주 각별한 사이인 변영기 목사님께서 이 영주교회로 부임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잘됐다 싶어 이번 기회에 방문해 보자고 하여 조금 급하게 오게 되었습니다.

 

변영기 목사님은 저희와 신학을 같이 공부한 동기이기도 하지만, 목회 여정으로는 제 5년 선배님이십니다. 그래서 선배님을 잘 모셔야 하는데요, 변 목사님이 대구에서 사역하실 때 마침 저희 장인, 장모님께서도 대구에 계셨습니다. 저는 그때 막 목회를 시작하느라 바빴던 터라, 변 목사님께 제 아내와 함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저희 장인, 장모님이 교회에 나가실 수 있도록 한번 방문해 달라고 말이죠.

 

그 덕분에 장인, 장모님이 그때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처할머니께서도 함께 계셨는데, 처할머니는 사실 하나님을 전혀 믿을 것 같지 않던 분이었습니다. 제 아내조차도 할머니를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할머니께서 저희 장모님에게 시집살이를 워낙 고되게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절에 가면 스님이 처할머니를 보고 이리 와서 엎드리라고 한 뒤 엉덩이를 팍팍 때릴 정도였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며느리 시집살이를 이렇게 고되게 시키냐, 나쁜 짓 좀 그만하라"고 한 것이죠. 절에 갈 때마다 매번 그러셨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할머니는 변하지 않으셨고 장모님을 참 많이 힘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장인, 장모님이 변 목사님 교회에 나가시니, 혼자 집에 계실 수 없었던 처할머니께서도 어쩔 수 없이 교회를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막상 교회에 가니 장인, 장모님은 설교 시간에 졸기도 하셨는데, 정작 처할머니께서는 설교를 아주 집중해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큰 찔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께 "나 같은 사람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목사님께서는 당연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답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할머니께서는 침례도 받으시고 완전히 삶이 바뀌셨습니다. 그 이후로는 장모님께도 아주 따뜻하고 조용하게 대하시며 정말 모범적인 삶을 사시다가 2년 뒤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것을 보며 참 이런 기적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늘 장인, 장모님과 처할머니를 정성껏 돌봐주신 변 목사님과 사모님께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각별하게 생각하는 목사님의 교회에 기쁜 마음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반갑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저는 그냥 손님으로 편하게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영주가 서울에서 그리 가까운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 안식일에는 너무 먼 영주 대신 가까운 다른 친구 목사님 교회에 가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9월 이번 안식일은 우리 교회 성만찬 예식이야"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아, 하나님께서 영주교회로 가라고 하시는구나' 깨닫고 변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왔으면 설교를 해야지" 하시는 바람에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어제도 대학교회에서 설교를 하느라 말씀을 깊이 준비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제가 전하기 좋아하는 구원론에 관한 말씀이 몇 가지 있어서 자료를 다 챙겨왔습니다. 제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른 누구보다 구원론을 많이 공부하고 묵상해 왔습니다. 구원론을 바탕으로 묵상집을 출간하기도 했을 만큼 구원에 대한 관심이 큽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여러분께 구원에 관한 유인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사실 목사님께 처음에 전달해 드린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주교회에 와서 이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또 언제 전할 수 있을까 싶어 오늘 다 나누려고 합니다. 시간은 철저히 엄수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나는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으십니까? 어떻습니까? 이게 참 쉬운 질문이 아닙니다. 대개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때 가봐야 아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문제는 분명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관심 있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구원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구원에 더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관심이 많으실까요? 네, 당연히 많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싶어 하시는 마음은 그 어떤 누구보다 우리 하나님이 가장 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을 생각하시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관심을 두시는 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와 '사귀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마음을 빼앗겨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와 깊이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십니다. 여러분, 구원은 단순히 천국이라는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소만 바뀐다고 해서 진정한 구원이 될까요? 아담과 하와가 원래 있던 곳이 바로 에덴동산, 즉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과 헤어지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이처럼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엘렌 화잇의 정로의 계단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고 싶어 하셔서 하늘에 들여보내 주셨지만, 정작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그곳에 가면 "여기 분위기는 나랑 맞지 않아, 너무 힘들어,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시편 27편 4절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여러분, 이 고백이 이미 구원입니다. 다윗은 이 시를 통해 자신이 이미 삶 속에서 구원을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하늘에 가면 그곳에는 가장 크고 높으신 분인 하나님이 계십니다. 보통 세상에서 큰 어른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마냥 편합니까, 아니면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에 부담이 생깁니까? 대개는 부담스럽고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제 연구실 바로 옆방에 유명하신 남대극 목사님이 계십니다. 제 스승님이시기도 한데, 바로 옆방에 계셔도 늘 조심스럽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끔 점심 식사를 같이할 때도 항상 행동이 조심스러워집니다. 어른을 모시는 일은 이처럼 긴장과 부담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만약 하늘나라가 그런 부담스러운 공간이라면 결코 편안한 곳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셔야 하는 무서운 어른으로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시는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친구가 되면 참 편합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이들로 다윗과 요나단을 꼽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짧게 잡아도 15살에서 많게는 20살까지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나이 차이가 그 정도 나면 삼촌 뻘인데 친구가 되기 쉽지 않지요.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너무나 사랑하여 자신의 왕위와 지위,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윗과 동등한 위치에 섰습니다. 서열과 자격을 내려놓고 편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기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입니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사이였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된 다윗은 성전에 거하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것이 평생의 유일한 소원이라고 고백합니다. 성도 여러분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십니까? 하나님이 정말 좋으신 분으로 느껴지십니까? 내가 어떤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야단치기보다 "괜찮다"라며 품어주시는 편안한 분으로 다하오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가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분이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인간의 본질을 두고 흔히 '전적 타락'을 이야기합니다. 신학적으로 전적 타락이 맞지만, 현실 속 우리의 모습은 완전한 악마 같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원래는 죄로 인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전적 타락의 상태가 되어야 마땅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재적 은혜(미리 주어지는 은혜)'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즉각 용서의 길을 마련해 주셔서 온전한 파멸로 치닫지 않도록 붙드셨습니다. 그 은혜 덕분에 인간은 여전히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나무의 이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상태가 될 것임을 암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으니 마땅히 악한 존재가 되어 그날로 죽어야 했고, 더 이상 선한 성품이 남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유예하셨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인간에게 선을 택할 수 있는 은혜의 기회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의 상태는 악하면서도 완전히 악하지 않고, 여전히 선을 갈망하고 사랑하는 양면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바로 '이중성을 가진 존재', 쉽게 말해 '위선자'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위선자요 이중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보며 "저 사람 참 위선적이다"라고 비판할 수 없는 이유는 나 역시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양면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는 경건해 보여도 돌아서면 다른 모습을 보이곤 하지요. 인간의 연약한 이중성을 이해하고 나면 비로소 타인의 행동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더 이상 비판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나도 그런 사람인데" 하는 겸손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이중적이고 흠 많은 우리를 그대로 품어주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 온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히브리어로 '아름다움'은 '토브(Tob)'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선함'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가면 바로 그 하나님의 선하심이 온전히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 시대의 성전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그저 천막으로 된 성소였습니다. 외관상으로는 전혀 아름다울 것이 없었습니다. 번제단, 떡상, 촛대, 법궤 같은 기물들이 놓여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바라본 아름다움은 성소 안의 어디에 깃들어 있었을까요? 바로 중심축이 되는 두 곳, '번제단'과 십계명이 들어있는 '법궤'에 있었습니다.

 

번제단에서는 우리를 위해 대신 희생당하실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하는 희생 제물이 드려졌습니다. 다윗은 시편 27편 4절의 고백 바로 앞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왔으나 나의 대적들, 원수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이 세상은 살기 위해 서로를 짓밟고 치열하게 싸우는 생존경쟁의 전쟁터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가면 세상의 법칙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곳에는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곳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헌신과 희생, 사랑이 가득한 그 모습이 바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며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소서"라고 기도했을 때, 영광이라는 말은 '풍성함', '가장 많이 가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많이 가지고 계십니까? 땅이나 집, 재산은 여러분의 소유일 뿐 여러분 자신의 본질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무엇이 가장 풍성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의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선한 것' 역시 '토브', 즉 선함 자체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온전한 선하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외적인 얼굴 대신 당신의 풍성한 선하심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외형적인 모습을 넘어 주님의 선하심을 닮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구원의 열쇠가 무엇인지 오랜 시간 깊이 묵상해 왔습니다. 만약 구원이라는 것이 마지막 재림의 날에 이르러서야 합격 여부를 알 수 있는 도박 같은 것이라면,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은 늘 불안하고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 명확해야 나 자신도 흔들림 없이 준비할 수 있고, 이웃에게도 분명하게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누어 드린 유인물의 글씨가 다소 작지만 돋보기를 활용해 꼼꼼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한 장에 많은 내용을 담다 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구원을 갈망하겠습니까?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풍족한 부자들은 이 세상이 즐겁고 부족함이 없기에 구원을 크게 갈망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난이란 물질적인 결핍뿐만 아니라 질병의 고통, 억압,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모든 연약한 상태를 뜻합니다. 삶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는 이들이 구원을 간절히 부르짖기에,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첫머리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 행동을 채점하여 플러스, 마이너스 점수를 매긴 뒤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공포일 뿐, 구원의 기쁨은 전혀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구원은 그런 기계적인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섣불리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의 부족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구원받았다가 나중에 내 허물이 드러나 취소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것이죠. 하지만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데서 옵니다.

 

제가 중학생 시절 미션스쿨에 다닐 때, 채플 시간마다 성적에 따라 배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85점 이상은 파란 배지, 90점 이상은 우등생을 상징하는 빨간 배지를 주어 선배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습니다. 저는 중학교 내내 아쉽게 점수가 모자라 파란 배지 한번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 드디어 받을 만한 점수가 되었을 때는 안타깝게도 그 제도가 폐지되어 결국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배지를 받지 못한 대다수의 학생은 실패자이고 버림받은 존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성적과 조건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외적인 조건과 전혀 상관이 없기에 우리 모두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고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 말씀을 보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놓치는 중요한 구절이 바로 17절에 나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우리는 믿음만을 강조하지만, 그 믿음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제자리걸음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가 흐릿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믿음은 절반짜리 신앙이자 절뚝발이 신앙과 같습니다. 다리를 절며 걸으면 삶이 고달프듯, 의를 모르는 신앙생활은 기쁨이 없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핵심이 바로 이 '의(정의, 공의)'입니다.

 

유인물 중간에 마태복음 12장 17~21절과 이사야 42장 1~4절을 대조해 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메시아 예언인 이사야 말씀에서 가장 강조하는 구절은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다름 아닌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사야 1장 27절에도 "정의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정의'라는 말 대신 '심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이는 히브리어 '미시파트(Mishpat)'가 정의와 심판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뒤집으면 곧 심판이 됩니다.

 

우리는 심판이라는 말을 들으면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공의를 바로 세우고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옹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악인과 사기꾼이 가득한데 재판관이 뇌물을 받고 무죄를 선언한다면 그 사회는 희망이 무너집니다. 심판이 없다면 악인들만 쾌재를 부를 것이며, 하나님 역시 악과 타협하는 부패한 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를 처벌의 대상으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로 바라보십니다. "말 안 들으니 벌을 주겠다"라며 눈을 부릅뜨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 벌을 일곱 배나 더 내리겠다고 엄히 말씀하신 구절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읽어보면 이는 실제로 잔인하게 벌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가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겁을 주어서라도 회개하고 돌이키게 만들려는 사랑의 표현, 즉 '사랑의 으름장'인 것입니다.

 

구원의 가장 아름다운 본보기로 '야곱'의 이야기를 나누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야곱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신실한 이삭의 아들이었지만, 스스로 고백했듯 평생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가 왜 그토록 고생을 해야 했을까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의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제 입장에서 형 에서를 보며 '형은 구원받지 못할 사람, 하나님께 버림받은 가치 없는 사람'이라 확정 짓고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얄팍한 꾀를 내어 형이 배고플 때를 틈타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냉정히 말해 야곱은 천륜을 어긴 자이며, 죽어 마땅한 인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오해했던 우리 인간의 정나라한 모습입니다.

 

이 일로 형의 분노를 사서 고향을 떠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갖은 속임수와 고초를 겪으며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얍복나루에 이르렀을 때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형 에서가 다가온다는 소식에 야곱은 절망했습니다. 가족을 먼저 다 보내고 홀로 남은 한밤중에 야곱은 어떤 존재와 밤새도록 처절한 씨름을 시작합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야곱은 그 얍복나루의 환난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뿌리 깊은 죄와 마주하며 씨름했습니다. 그의 진짜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형 에서를 가볍게 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긴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에서를 단 한 번도 버리신 적이 없는데, 야곱 스스로 형을 정죄하고 버렸던 것입니다. 자신의 참혹한 죄와 위선을 깨달은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 철저히 낮아졌습니다.

 

우리는 중보자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야곱의 씨름은 '내가 얼마나 뼈속 깊은 죄인인가'를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중성은 보지 못하면서 타인의 위선은 참지 못하고 비난하곤 합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나같이 추악한 인간이 과연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처절한 영적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은혜를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완전히 거듭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새사람이 된 야곱의 눈에는 이제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습니다. 그렇게 두렵고 미웠던 형 에서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에게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담아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리고 형을 향해 "나의 주(My Lord)"라고 부르며 자신을 극진히 낮추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위장 쇼가 아니라, 중심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존경과 사랑이었습니다. 형 역시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이며 구원받아야 할 영혼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은 나 중심의 이기적인 사랑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정의와 공의는 내 사랑의 지평이 넓어져서 '모든 사람이 나만큼이나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정의를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진정한 구원이 시작됩니다.

 

야곱이 거듭난 이후에 그의 가정 평탄하고 행복하기만 했습니까? 오히려 그 전보다 훨씬 더 참혹한 일들이 연이어 터졌습니다. 딸 디나가 부끄러운 일을 당했고, 아들들은 잔인한 학살을 저질렀으며, 큰아들은 윤리를 저버리는 비행을 저질렀습니다. 집안이 완전히 쑥대밭이 된 것입니다. 보통의 가정이라면 이미 풍비박산이 났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굳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죄 많은 아들들의 모습 속에서 과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우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이미 얍복나루에서 겪었기에, 야곱은 거칠게 아들들을 정죄하거나 책망하는 대신 깊이 동정하고 품어주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다 이해한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듯 너희도 용서하셨다"라는 묵묵한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변화된 성품과 눈물 어린 사랑이 결국 자식들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주동했던 포악한 유다가, 훗날 이집트 총리 앞에서 막내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내가 대신 종이 되겠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고결한 인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의 결실로 야곱의 열두 아들은 모두 구원을 얻었고, 하늘 새 예루살렘 성벽의 열두 기초석에 그들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구원을 삶 속에서 이미 생생하게 경험했기에, 거듭난 이후에 닥쳐온 수많은 환난 중에서도 믿음이 꺾이기는커녕 날마다 더 깊이 자라났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맛보게 된다면, 도리어 믿음에서 떠나는 것이 더 불가능해집니다.

 

성도 여러분, 삶의 자리에서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야곱의 씨름'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안의 위선과 교만을 꺾고 하나님의 의와 선하심을 온전히 이해할 때, 우리는 구원의 확신 속에서 매일 성화되는 행복한 신앙을 구가할 수 있습니다. 영주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 구원의 감격을 날마다 누리시며 신앙 안에서 늘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하늘에 계신 저희들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 여기 모인 주의 성도들 위에 풍성한 복을 내려주셔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밝히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비록 흠 많고 부족할지라도 언제나 용납하시고 품으시며 거룩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머지않아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의 그날에, 우리 영주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기쁨으로 하늘 왕을 뜻 깊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매일의 삶을 등불처럼 지켜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옵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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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5PQDkGDqVzk?t=4984

 

 

[강연 내용 핵심 요약 정리]

 

1. 사귀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관계로서의 구원)

구원은 단순히 '천국'이라는 장소의 이동이나 마지막 날에 합격·불합격 점수를 받는 기계적인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우리를 자격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과 허물없이 속마음을 터놓는 '인격적인 친구로 사귀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주님의 선하심(아름다움)을 성소에서 매일 사모하는 삶 자체가 이미 시작된 구원입니다.

 

 

2. 인간의 본질과 선재적 은혜 (이중성 이해)

인간은 죄로 인해 완전히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나, 심판을 유예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두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선과 악을 모두 아는 상태(이중적인 존재)'로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연약한 위선자이자 이중 인격자임을 겸손히 인정할 때, 타인을 비판하지 않고 깊이 이해하며 품을 수 있는 참된 신앙의 시선이 열립니다.

 

 

3.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미시파트: 정의와 심판)

믿음이 자라지 않고 제자리에 머무는 이유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정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정의(심판)는 악인을 처벌하는 무서운 개념을 넘어, '모든 영혼이 나만큼이나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확대된 사랑'을 뜻합니다.

 

 

4. 야곱의 씨름이 주는 영적 교훈 (거듭남과 가정의 회복)

야곱은 제 생각으로 형 에서를 무가치하게 정죄하고 인간적인 속임수로 축복을 가로채며 험악한 세월을 자초했습니다. 그러나 얍복나루에서 자신의 깊은 위선과 마주하는 처절한 영적 씨름을 통해 하나님의 조건 없는 용서를 경험했습니다.

거듭난 야곱은 자신을 낮추어 형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소중히 대했습니다. 이후 가정에 수많은 환난이 닥쳤을 때도 정죄 대신 동정과 사랑으로 자녀들을 품었으며, 이 변화된 성품이 결국 열두 아들을 모두 회개시키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영적 기적을 이루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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