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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시편 36편 주해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15|조회수27 목록 댓글 0

 

시편 36편 주해

 

“[1]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2]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4]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5]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8]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10]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11]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12]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시 36:)

 

먼저 36편입니다. 시편 36편은 보시는 대로 12개의 짧은 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2개의 짧은 절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시의 주제와 흐름을 보면, 뚜렷하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먼저 1절부터 4절을 보면 악인의 죄에 대한 고발이 나옵니다. 그다음 5절부터 9절까지는 악인의 죄가 아주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찬양입니다. 사실 죄가 이렇게 많으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가?'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입장에서는 고민이 되잖아요. 그런데 악인의 죄가 넘쳐흐른다고 이야기하는 중에, 시인은 천지간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넘친다는 찬양을 다시 합니다. 그리고 9절부터 12절에서 이 시인의 결론적인 신앙 고백이 다시 언급됩니다.

 

자, 그런 큰 이해를 가지고 우선 표제어를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37편을 보시면 '다윗의 시' 이렇게 되어 있지요. 또 35편을 보셔도 '다윗의 시'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36편은 조금 특이합니다. 그냥 '다윗의 시'라고 안 되어 있고,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표제어 자체가 다른 일반적인 표현하고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다윗을 수식하고 설명해 줘요. 그냥 다윗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 다윗'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종'은 사회적 신분을 표현하는 단어이지요. 종은 자유를 박탈당한 신분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하나님의 종' 혹은 '여호와의 종'이라는 수식이 붙게 되면, 그것은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자유를 의미하지요. "너희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로마서에 나오는 표현이지요? 우리가 세상의 것들에 속박되는 종의 삶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지요.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자율', 남에게 강제로 우리의 의지를 박탈당하고 지배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타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의 지배에서 벗어난 다음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선택하기 때문에, 그런 삶을 '신율(Theonomy)'이라고 부릅니다. 율법할 때 그 '율(律)' 자를 써서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타율의 삶에서 자율의 삶으로 가는 게 아니고, 타율의 삶에서 신율의 삶으로 간다고 표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을 가리켜 여호와의 종이라 부르고,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말씀 사역을 하는 이들을 '하나님의 종'이라 할 때, 그것은 결코 비하하는 표현이 아니잖아요. 주어가 하나님이 되면 절대로 비하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설교하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주의 종이 이 말씀을 선포할 때"라고 하지, '종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뜻이 절대로 아니잖아요. 그런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다음 이 시는 용도가 아주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는 시입니다. 보면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가 다 노래이지만, 36편은 그 용도까지 설명되어 있어요. '인도자'가 뭡니까? 소위 컨덕터(Conductor), 좀 고상하고 멋지게 표현하면 마에스트로(Maestro) 같은 아주 위대한 지휘자를 따라서 부르는 찬양곡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 36편은 이것을 하나의 찬양곡으로 만들어서 실제로 찬양을 해 보는 시입니다. 저는 워낙 음악의 문외한이라,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 처음 나가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무슨 똑같은 노래를 네 가지로 부르냐' 하면서 말이지요. 교회에 나가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음악 하시는 분들은 소리만 들으면 음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이렇듯 36편은 저자에 대한 독특한 소개와 용도가 표제어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1절부터 4절을 보겠습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첫 절부터 어렵지요? 죄가 어떻게 이릅니까? 죄는 사물이고 인격이 없는데 말이지요.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이라고 되어 있는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도 사실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르기를'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동사 단어는 늘 성경에서 하나님을 주어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36편 1절은 죄가 주어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인이 그 마음속으로 자기 죄에 대해 생각하기를'이라는 의미라고 성경 학자들이 풀어서 설명해 줍니다. 즉, '악인은 그 죄에 대해 그의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그의 눈에는, 저 악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라는 뜻인 거지요.

 

우리가 시편 14편 유명한 시 잘 알지요? 한번 가보시죠. 시편 14편 1절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여기 36편 1절에 와서 보면, 어리석은 자와 비교할 때 악인은—이때 죄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페샤(Pesha)'인데 구약성경에서 가장 의도적이고 나쁜 차원의 죄를 뜻합니다—이 페샤를 짓는 자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고 합니다. 눈빛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게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은 시편 14편 1절과 비교해 봤을 때, 시편 14편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존재적 무신론자'라면, 36편 1절에서 말하는 악인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존재'인 거지요. '하나님이 계시든 말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보고?'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 부정이라는 이론적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차원으로 나아간 아주 의도적인 죄를 범하는 죄인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제가 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이런저런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저는 굳이 믿는다면 제 주먹을 믿고 삽니다"라고 하더군요. 나이도 몇 살밖에 안 된 형제가 말이지요. 그래서 제 마음속으로 '참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참 용감하다 싶기도 하다' 하면서 대화를 이어갔지요.

 

자, 그런데 반대로 이 사람과 반대되는 경우를 한번 볼까요? 시편 31편 19절을 보시죠.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봤던 구절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그러니까 주를 두려워하는 빛이 없는 자의 반대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주께 피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시편 1편부터 41편까지가 시편 제1권이잖아요. 시편 제1권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주께 피하는 자', '여호와께 피하는 자', '하나님께 피하는 자'입니다. '피한다'는 단어는 제가 시편 11편과 14편을 주해할 때 말씀드렸었죠. 몇 번 반복되어 나왔던 '하사(Chasah)'라고 하는 히브리어 동사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의 궁극적인 의미를 보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인 거지요.

 

그가 어떻게 합니까? 2절에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라" 우리 신약성경 마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숨긴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 이 아기는 자기 죄악을—여기서 죄악은 '아온(Avon)'입니다. 아주 중한 죄악이나 허물이지요. 죄악이라고 번역된 것은 대개 '아온'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죄를 짓는 악 자체보다, '내가 죄를 지어도 전혀 상관이 없고 드러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 오만함이 더 악하다는 말이지요. 시인이 지금 묘사하려고 하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1절과 2절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악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세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이라고 했습니다. 죄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단계에서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단계로 조금 더 발전하지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이제는 아예 구체적인 계획과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4절에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서고' 할 때 '선다'는 표현을 보니까 시편 1편 1절이 생각나지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할 때의 그 '선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 1절에서 말하는 복 있는 자와 정반대되는 행동이 바로 36편 4절에 나오는 악인의 행동이지요.

 

정리하면, 36편 1절부터 4절은 악인들의 모습을 점층적으로 보여줍니다. 1~2절은 마음속의 생각, 3절은 말, 4절은 행동으로 아주 점층적으로 나타나고 있잖아요. 자, 이렇게 악인들의 의도와 계획이 점층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이 되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찰 수 있지요. 그런데 시인은 5절부터 9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5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저 유명한 '헤세드(Hesed)'입니다—"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에무나(Emunah)'라는 단어인데요—"공중에 사무쳤도다" 그랬습니다. 여기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진실하심이 공중에 있다는 것은 다 하늘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6절을 미리 보시죠.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땅의 육지는 지상과 물, 바다와 땅으로 되어 있으니까, 5절과 6절을 하나로 묶어서 보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하늘에 넘치고, 하나님의 의와 심판이 지상에 넘친다는 말이지요. 세상에 죄가 가득하고 악인들이 머릿속으로, 말로, 행동으로 아무리 악을 넘쳐내도,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은 하늘에 넘치고 하나님의 의와 공의는 지상에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6절에 '주의 심판'이라 그랬잖아요. 주의 의를 뜻하는 단어는 '체데크(Tsedek)'이고, 심판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미슈파트(Mishpat)'입니다. 미슈파트는 거의 다 '공의'라고 번역되지요. 체데크는 흔히 '정의'라고 번역되고요. 그래서 여기 6절은 '심판'이라고 번역되기보다는 '공의'라고 번역되는 게 훨씬 더 좋겠습니다. "주의 의는 산과 같고 주의 공의는 바다와 같다" 즉, 죄가 넘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와 공의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전히 악인들의 넘치는 악한 생각과 행위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의와 공의와 인자와 진실이 천지간에 넘친다는 고백을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7절, 그러면서 유명한 구절이 나오지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우리가 흔히 "주는 나의 보배"라는 고백을 많이 하잖아요?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제가 노래나 그림을 참 잘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노래를 잘 못해서 그냥 부르면 별 감동이 없고, 그림도 어릴 때부터 잘 못 그렸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가르치면서 선만 갖다 대면 멋진 그림이 되던 천재 화가처럼 척척척 그려가며 가르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제가 그런 얘기를 수업 시간에 했더니 학생들이 "교수님이 노래도 잘하시고 그림까지 잘 그리시면 저희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이런 구절을 만나면 노래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7절,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주 날개 밑 즐겁도다'라는 찬미가 있듯이, 이것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품는 것과 같은 은유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도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라고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악이 세상을 뒤덮은 것 같아도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가 여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그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모습을 시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읽으면서 진짜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되는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복된가 하는 심정이 다시 한번 저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8절,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여기서 '살진 것'이란 아주 귀하고 풍성한 것을 뜻합니다—"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여러분, 8절에 나오는 '복락'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에덴(Eden)'입니다. 에덴이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기쁨(Joy)', 그것도 '복된 기쁨'입니다. 그것을 고유명사로 쓰면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이 되는 것이지요. 에덴동산이란 곧 '기쁨의 정원(The garden of joy)'입니다. 여기 36편 8절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주께서 주의 에덴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라고 선언하며, 에덴동산의 생명의 강물을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9절,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요한복음 8장 12절을 보시죠. 예수께서 이 말씀을 직접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시편 36편 9절에서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고 할 때 보는 빛은 무슨 빛입니까? 요한복음 8장 12절의 말씀처럼 바로 '생명의 빛'인 거지요. 9절의 첫 단어인 '생명'과 끝 단어인 '빛'을 연결하면 '생명의 빛'이 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의 말씀이 그대로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 것을 보게 됩니다.

 

10절부터 12절은 악인으로 시작했던 이 시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마무리되는 부분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기도하는 것이지요.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고백과 기도가 이어집니다. 36편은 1~4절 악인의 의도, 5~9절 하나님의 인자에 대한 여전한 찬양, 10~12절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를 섬기는 자들에게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함께 나타납니다.

 

그런데 12절을 자세히 읽으셔야 합니다. 11절에서 교만한 자의 발이 이르지 못하게 하고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뒤, 12절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라고 합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10절과 11절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인자하심과 공의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의 발이 이르지 못하게 하며, 악인들의 손이 쫓아내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거기'라고 하는 말은 어떤 특정 장소를 말하기보다, 10절과 11절에서 드린 시인의 기도, 즉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기도가 성취되는 자리이자 그 기도가 응답되는 순간을 의미하지요. 한마디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 시인의 기도가 응답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악인들의 계획이 어그러지고 넘어지고 부서지게 된다는 사실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시편 36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악이 아무리 흥황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의와 공의는 세상에서 여전히 통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그분의 날개 아래에서 보호와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공의와 의가 베풀어달라고 기도하고, 결국 그 기도의 응답으로 악인들은 '거기서' 오히려 넘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종합해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시인의 기도는 악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늘 생각하고 묵상해야 하는 중요한 주제를 전달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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