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강상진 목사
마지막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우리 강사님들이 하나님께서 무지개의 빛깔처럼 각 사람의 생애를 통해서 가르쳐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같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생애를 통해서 가르쳐 주신 이 놀라운 기별을 함께 연구하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자,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얼마나 중요한 기별입니까?
주님께서는 지금부터 100년 전에 이 사업을 마치시기 위해 특별한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이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었습니다. 1888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대총회가 열렸을 때, 두 젊은 목사 죤스와 이. 제이. 와그너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대총회 대표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전하였습니다.
"나는 죤스와 와그너가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처지에 있음을 보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록된 말씀대로 그 정탐꾼들을 돌로 치려 했던 것처럼, 그대들은 비웃음과 조롱의 돌을 이 형제들에게 던졌다. 나는 그대들이 알고 있다고 하는 진리를 계획적으로 거절했음을 보았다. 나는 또한 그대들이 이 기별을 받아들였더라면 우리는 그날로부터 2년 후에는 하늘 왕국에 들어갔을 것임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광야로 돌아가서 40년 동안 방황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이 시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올바로 깨닫고 돌아가시면 지금부터 2년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더라도 확실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현실과 영원한 행복에 그렇게도 필요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어떠하심에 대하여 성경의 진리를 스스로 이해하는 자는 100명 가운데 한 사람도 없다." 자, 제가 이 말씀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 8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 세계 건 20억 이상의 인구가 기독교인들인데,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교파가 있고 얼마나 많은 기독교 인구가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재림할 때 이 세상에서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도대체 이 믿음이 뭔가 하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렇게 지체되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해야만 했던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복음 전파를 받은 자들이 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어서 못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현대 이스라엘도 똑같은 역사를 이제 반복하고 있는 것이죠. 그들의 마음은 불평과 반역과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사단의 정신입니다. 품성이 전혀 변화되지도 않았고 거듭나지도 않은 상태죠.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그분의 언약을 그들과 성취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불신과 불평과 반역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가나안 땅으로부터 차단시켰습니다. 똑같은 죄들이 현대 이스라엘이 하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체시켜 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이 이렇게도 더디고 늦고, 하루를 천년처럼, 천년을 하루처럼 이렇게 오래오래 기다리시고 인내하시는 결정적인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살 만큼 준비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가 차지 않았다는 것이죠.
자,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 앞에 내가 본바에 의해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결국 매우 소수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진술했다." 여기 '소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문을 찾아봤더니 'a small number'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수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대로 구원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지정하신 방법이 뭡니까? 이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죠. 행위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지정하신 방법의 말씀입니다.
자,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까?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물은 침례를 상징하죠. 여러분이나 저도 다 침례 받았습니다. 물속에서 우리가 침례 받을 때 또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납니다. 우리 행위나 율법을 지킴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우리가 아무리 예의범절을 잘 지키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교육을 많이 받아 우리 행위로 발버둥 쳐도 우리 본성은 절대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영으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도 영으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죠.
모든 초점은 이제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남은 이 시대에 찾아보기 드문 경험이다. 이것이 교회 안에 그렇게도 많은 혼란이 있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시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화되지 않았으며 거룩하지도 않다. 그들은 침례는 받았지만 산 채로 물속에 매장되었다. 자아가 죽지 않았다." 여기 아주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아가 죽을 때에만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임재하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절대로 예수님은 문 밖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네가 먼저 안에서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갈 것이다" 말씀하셨는데, 이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사단 마귀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단 마귀가 쫓겨나야 그 자리에 예수님이 임재하시게 되는데, 내가 살아 있으니까 예수님이 못 들어오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침례를 받아야 되고, 날마다 거듭나는 자아가 죽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예수님이 우리 속에 임재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산상보훈에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자아가 죽은 사람들은 내가 멸시를 받든지 저주를 받든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고 스트레스를 주고 미워하며 악한 행동을 다 해도 거기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을 발로 차면 일어납니까? 욕을 합니까? 있을 수가 없죠. 그래서 교회에 오는 많은 사람들이 자아가 죽지 않기 때문에 품성이 변화되지 않고 거듭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저도 평생을 목회했지만, 하루라도 조기 은퇴를 해서 내 마음대로 설교하고 좀 편하게 목회하는 장소로 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수없이 하게 됩니다.
자, 우리가 어떻게 거듭납니까? 어떻게 구원을 받지요?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랬습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다 자기는 믿는다고 합니다. 안 믿는다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손을 들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진정 거듭났느냐고, 거듭난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하면 좀 우물쭈물합니다. '진짜 내가 거듭났나 안 났나?' 하는 것이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나는 10년 전에 거듭났기 때문에 확실히 구원을 받아놓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어떤 장로님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문제가 보통 많은 게 아닙니다. 본인도 알고 있고 다른 사람도 다 압니다. 정말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더 문제가 많은데도, 본인은 10년 전에 거듭났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거는 아니죠. 여러분, 10년 전에 거듭났다고 무조건 구원받습니까?
옛날 사울 왕도 그랬습니다. 사울 왕이 처음 왕으로 취임할 때 거듭났지요. 분명히 예언자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타락해서 엔돌의 무당에게 가서 물어보고, 악령에게 완전히 사로잡혔죠. 여러분, 거듭나는 것도 매일 거듭나는 훈련을 하셔야 됩니다. 매일 눈을 뜨면 우리 인생은 하루밖에 없습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딱 눈을 뜨면 '오늘 잘 때까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 하루밖에 없다', 그렇게 결심하고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했는데, 이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똑같은 말씀을 민수기 21장 9절에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뱀은 사단 마귀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장대 위에 달려 있는 그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죠. 우리 대신 죄가 되신 예수님,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단 마귀처럼 죄가 되셔서 모세가 만들어 놓은 장대 위에 구리뱀으로 달려 계십니다. 누구든지 독사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여기에 무조건 순종해야죠, 쳐다보면 산다고 하니까. 얼마나 단순한 기별입니까?
이 놋뱀을 쳐다보면 어떤 일이 일어나죠? 독사에 물려서 다 죽어가던 어린아이들부터 어른까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지시하신 장대 위의 구리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비록 힘없이 죽어가는 자들일지라도 딱 한 번만 쳐다보는 순간에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방법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여러분, 구원받는 게 그렇게 힘듭니까? 너무나 간단한 것이죠. 저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구원받기는 너무너무 쉽고, 멸망당하기는 오히려 거의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상의 강도도 바로 죽기 전에 구원받고, 삼손도 그렇게 타락한 삶을 살았는데도 마지막에 구원을 받습니다. 또 므낫세 같은 왕, 얼마나 악한 왕입니까?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사야 선지자를 나무 통속에 넣어 톱으로 켜서 죽인 그 악한 므낫세 왕도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므낫세 왕이나 삼손, 십자가 상의 강도보다 훨씬 더 착한 사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뭐 그런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니 구원받기는 너무나 쉬운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죄를 지시고 돌아가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아멘.
그래서 요한일서 1장 9절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 죄를 자복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리뷰 앤드 헤랄드》에 그 말씀이 기록되어 있죠. 우리 죄를 자복하는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무조건 없는 것으로 다 없애 버리십니다. 나는 아직 변화도 안 되었는데, 하나님 앞에 우리를 완전히 예수님처럼 변화되었다고 소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의 핵심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루를 지내는 동안에 양심적으로 '아,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내가 말에 실수를 했다', '내가 행동을 잘못했다'라는 죄책감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는 순간에, 그냥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내가 잘못했다고 자복하면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없던 일로 그냥 봐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히 용서받고 예수님처럼 변화된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죠. 이것이 핵심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이 너무나 단순한 기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너무너무 편해요. 저도 하루 살다 보면 죄를 지을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고, 말을 잘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기별을 알기 때문에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께서는 어제 지은 죄를 다 도말하시고 없애 버리십니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던 것처럼 다시 새로 시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러니 아침에 새로 다시 시작하니까 너무나 행복하죠.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분의 말씀 가운데 주어진 그분의 생애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라" 그랬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요한계시록 끝까지 모든 성경 말씀의 단어 하나하나, 구절구절마다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품성, 예수님의 생애를 발견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니, 뱀에게 속고 물린 자마다 쳐다보면 살 수 있습니다. 쳐다보면 사는 것입니다. 누구를 쳐다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쳐다보는 것이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십자가에서 비치는 빛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줍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 죄를 위해서 내 대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나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신 저 희생의 사랑이 우리 눈앞에, 우리 머릿속에 딱 떠오릅니다. 이 사랑을 깨닫기만 하면 자석처럼 이끌려서 십자가 밑으로 오게 되고, 회개가 저절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만일 우리가 이 이끄심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를 회개하는 가운데 십자가 밑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그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심령에 새로운 생명을 지어 준다. 사상과 욕망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을 하게 된다." 이것이 거듭나게 되는 것이죠.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으로 우리 본성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본성이 됩니다.
오늘 새벽에 춘양에서 오신 우리 김승물 장로님 집에서 가져온 고양이가 없어졌습니다. 깜짝 놀라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식당 주인과 장로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어제 밤에 야영하시고 오늘 아침에 가신 분들 책임자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해서 "고양이 안 내놓으면 경찰에 신고합니다"라고 했더니, 한 사람 한 사람 다 조사를 해서 고양이를 다시 갖다 놓았어요. 저 나무 밑에 있습니다.
저도 중국에서 대총회 선교사로 몇 년 있었는데, 이런 환경에 사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하는 것이 대부분 습관으로 되어 있어서 양심의 가책을 전혀 안 받습니다. 아침에 고양이를 가져간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러시아에서 오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임재하시면 죄책감을 느낍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내가 말에 실수를 했다", "내가 행동을 너무 잘못했다"는 것을 금방 압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임재하시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니까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죄를 자복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런데 왜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통해 구원받는 사람이 그렇게도 적고, 교회 안에는 왜 이렇게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셋째 천사의 기별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이 진실로 셋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대답했다." 예, 셋째 천사의 기별이 바로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입니다. 자, 이걸 보십시오. 똑같습니다.
"나는 세 단계로 되어 있는 첫째, 둘째, 셋째 천사의 기별을 보았다. 나와 함께한 천사가 말했다. 이 기별들의 1획이라도 더하거나 빼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 기별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영어 본문에 보시면 'very vita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이 셋째 천사의 기별을 깨닫는 것이 영생입니다. 모든 영혼들의 운명은 이 기별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선교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라고 교리를 가르치는 그런 세 천사의 기별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구원을 받을 것인지 멸망을 당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개인적으로 적용되는 세 천사의 기별을 우리 선지자께서 《초기문집》 258페이지에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 천사의 기별 가운데 있는 완전한 진리의 연결을 보고, 순서대로 즐거이 받아들여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하늘 성소로 들어갔다." 여기 '순서대로'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순서입니까? 첫째 천사의 기별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이 첫째 천사의 기별 속에서는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안식일 기별도 나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라는 말씀도 나오는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나오는 늦은비 성령이 온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태우는 그 마지막 성령의 운동이 바로 하나님의 품성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천사의 기별, 곧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그다음 둘째 천사의 기별은 "바벨론에서 나오라", 즉 모든 죄로부터 철저하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다음 셋째 천사의 기별이 뭡니까?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 안식일을 지키라." 이것은 참된 회개의 증거입니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들은 모든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무조건 순종을 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이 영원한 복음입니다. 이것은 창세로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구원받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통과해야 할 법칙처럼, 구원받는 구속의 과학을 세 천사의 기별 속에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순서대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회개가 나오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은 단순한 반성이나 뉘우침이지, 회개는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에게만 회개가 나옵니다. 그래서 셋째 천사의 기별이 영원한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회개가 나오고, 회개한 사람이 순종으로 말씀을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으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켜야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회개가 자연스럽게 나오니까 죄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쉽고 자연스러워집니다. 마치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처럼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죠.
이것이 세 천사 기별의 핵심입니다. 이 세 천사의 기별을 내 개인에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셋째 천사의 기별을 받아들인 자들 중—셋째 천사의 기별이 뭡니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죠—안식일을 지키는 우리 재림 신자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전에 전했던 두 천사의 기별을 경험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주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토요일이 안식일이니까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품성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거듭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날짜만 보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죠. 그 전에 전했던 두 천사의 기별을 체험하지 못하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안식일만 지킨다고 구원받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 세 천사의 기별과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똑같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이것은 회개한 사람들에게 입혀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이것은 성령을 통해 성경의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식별력을 가지라는 설명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은 진리가 아니고 안식일이 진리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약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는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나 세 천사의 기별,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전부 똑같은 공통적인 핵심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때에 선지자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기 때문에 품성이 예수님처럼 변화되어 늦은비를 받고 죄를 짓지 않는 한 백성으로 탄생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지성소에서 중보 사업을 마치고 나오셔서 재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하늘의 백성들이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는, 품성이 변화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으니까 예수님이 지성소에서 나오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나오시면 여전히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기다리시며 1844년 윌리엄 밀러의 재림 운동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지성소에서 나오시지 못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을 만큼 준비된 백성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을 받아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한 백성이 탄생하면 예수님은 더 이상 지성소에서 중보하실 필요가 없으므로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이름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수많은 기독교 교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재림을 준비시키는 재림 운동(Movement) 단체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교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택하신 남은 자손입니다. 그래서 이 높은 표준에 올라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죠. 그냥 또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는 반복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품성으로 매일 성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베드로의 여덟 가지 계단에 나오는 마지막 계단이 뭡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입니다. 여러분은 이 계단 중에 어느 단계에서 성화되어 가고 있는지 스스로 체크해 보셔야 합니다. 절제가 뭡니까? 우리가 화가 날 때 참는 것이 절제입니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내 감정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감정 조절이 바로 '절제'의 계단입니다. 이 계단을 통과한 사람이 '인내'의 단계로 가며, 아무리 나를 괴롭히고 욕하고 핍박해도 참게 됩니다. 《대쟁투》에 나오는 모라비안 교도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보여준 장면을 보십시오. 거듭난 사람은 어떤 환난과 핍박을 받아도 반항이 없습니다. 욕하지 않고 싸우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내라고 하는 사랑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의 품성 가운데 제일 중요한 품성이 인내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처음부터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오래 참지 못하고 화를 쉽게 내는 사람들은 그 속에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도 오래 참고 끝날 때도 모든 것을 견디는 것, 사랑의 핵심은 오래 참는 인내입니다. 이 계단을 통과해야 '경건'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이 반사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여덟 가지 계단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며, 청년들에게 이 계단을 가르쳐 주라고 선지자가 말씀하셨습니다.
팔복에도 똑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다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애통하는 단계를 거쳐 고난과 시련을 통해 '온유'라고 하는 예수님의 품성이 나타납니다. 온유가 뭡니까? 상대방이 나를 아무리 핍박하고 괴롭히고 스트레스를 주어도 거기에 내가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팔복의 제일 마지막 계단이 뭡니까? "너희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이 바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국가적인 일요일 휴업령 때 나타나는 마지막 환난의 경험입니다. 똑같습니다.
세 천사의 기별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저 높은 하늘나라를 향해서 매일 한 계단씩 성화시키고 있습니다. 이 계단을 통과하지 않고 늦은비를 받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필요한 단계를 거치지 않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말라." 그래서 매 단계를 견디고 참는 사람들이 참된 권면에 순종하기 위하여 대가가 어떠하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극복할 때 늦은비 성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기들의 심판의 때를 모르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현대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시대의 징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종말 전에 우리가 무엇을 경험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 아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많은 영적인 축복을 받는 것은 이 구속의 과학을 배우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재림이 있기 전에 날마다 이른비 성령을 받아야 하고 늦은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늦은비를 받아야 하나님의 인을 받으며 이 사람들이 하늘로 들어갑니다. 그 전에 우리는 이 과정을 경험해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가 훈련하고 연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과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시험과 연단받을 은혜의 시기를 허락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마지막 계단을 통과하고 늦은비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마지막 긍휼의 기별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 기별이 첫째 천사의 기별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첫째 천사의 기별도 깨닫지 못하고 날마다의 일상생활 속에 연습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죠.
오늘날에도 장대 위에 들린 뱀을 통해서 니고데모가 배웠던 그 같은 진리를 배워야 할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에 의존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쳐다보고 그가 오직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부름을 받을 때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하고 외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품성의 변화를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루려는 그들의 과오를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품성 변화는 내 속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성령에 의해서만 일어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날 예수님과 상담을 하고 난 뒤에 너무나 위대한 생명의 진리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전에는 흐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었으나 이제 그 말씀의 뜻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외적인 생애에 적용되는 율법의 조문에 대한 문자적인 순종은, 그것이 아무리 엄격하게 지켜진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하늘 왕국에 들어가게 하는 자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해야 된다" 하는 율법적인 조항들을 철저하게 문자적으로 다 지킨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고 그것이 속죄입니다. 우리가 변화되는 것도 성령으로 변화됩니다.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사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거듭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본성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우리 품성이 예수님처럼 변화되는 것임을 거듭거듭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받습니까? 온종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으면 성령이 마치 땅을 적시는 늦은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눈뜰 때부터 잘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 살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눈만 뜨면 식물들은 빛을 받기 위해서 태양을 향합니다. 자연스럽게 빛을 바라보고 성장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죠. 저희 집에 토마토를 심어 놓았는데 지금 한참 크고 있습니다. 이 토마토가 빛을 받고 성장합니다. 빛으로 온 산천초목들이 자라며 날이 새면 빛을 찾고 빛을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려면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루 종일 바라보셔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의 성품은 그와 같이 된다. 그분을 바라보는 자는 거울에 비친 그리스도의 품성을 보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방법과 뜻에서 그리스도의 방법과 뜻으로, 그분의 품성의 사랑으로 매일같이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변화된다." 저는 이 원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딱 눈을 떠서 새벽 기도가 끝나자마자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합니다. 《치료봉사》를 보고, 이번에는 《시대의 소망》과 《산상보훈》을 보며 계속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자세히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부터 말구유에서 갈바리 십자가까지 그분의 생애를 명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데, 매 순간마다 거울에 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내 마음속에 사진처럼 나타납니다.
그분의 친절하시고 공손하시며 온유하고 관대하신 그 사랑이 우리 생애 속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요한일서 3장 2절에 우리가 하늘에 가면 그분과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분의 모습 그대로 내가 변화된 것을 볼 것이라는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고린도전서 13장을 외우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당신의 백성들의 주의를 고린도전서 13장으로 돌이키도록 요구하십니다. 이 장을 날마다 읽고 심령 속에 그 교훈을 명심하십시오.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은 하늘나라에서 태어난 것임을 배우십시오. 그것 없이는 다른 모든 자격들이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해설이 《교회증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힌트를 얻고 고린도전서 13장을 묵상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서부터 갈바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유년 시절에 동네 친구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멸시를 당했을 때도 반항하지 않고 오래 참으셨던 장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며 배은망덕하게 행동했음에도 그 제자에 대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 그 장면들이 머릿속에 계속 스쳐 지나갑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 눈을 고정시키기만 하면, 그 영혼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아질 때까지 쉬지 않습니다. 아멘.
이것이 구속의 과학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우리 눈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이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늘에 들어가는 자격과 적합성은 그리스도의 의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뭡니까? 예수님의 품성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올바른 품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또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분의 율법을 순종하려고 노력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요구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생활의 의무들을 이행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종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지 않고 구원받기 위해서 억지로 행하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옛날 유대인들이 했던 율법주의, 곧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려는 다른 복음이며 결코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멸망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영혼들의 멸망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중요한 행위를 수행하여 구원받는 방식을 고집하지만 여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 자신의 행위로 천국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자는 온전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행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기심으로 부패한 죄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한 것만을 받으십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임재하시면 예수님께서 내 본성을 거듭나게 하시고 변화시켜서 율법에 자연스럽게 순종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유전적인 경건성에 매우 독선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부심이 거짓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믿음을 율법주의라고 하며 행위에 기인합니다. 그는 형식과 의식을 신뢰했습니다. 율법을 위한 그의 잘못된 열정은 그를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켰으며 그 열정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볼 때 아무런 흠이 없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6절에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믿지 아니할 때 알지 못하고 그렇게 행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복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주 주의하셔야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임재하심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사람이 자기 능력의 최선을 다해 십계명을 순종할 때,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그 영혼의 허물을 덮기 위하여 입혀주시는 바가 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때문에 거듭나게 되어서 예수님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시는 그러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십계명을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이 진짜 율법을 순종하는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의 우물가에 찾아온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보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배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내가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를 분명히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율법을 지키기 전에 먼저 반드시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 법관이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계명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등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하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시면 하겠습니까? 저는 할 자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중요하니까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욥도 재산이 다 없어지고 자식들이 다 죽고 양 떼도 다 없어졌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나는 태어날 때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왔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 다 하나님의 재산이니,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재산은 내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 둘째 아들이 제 설교를 듣고 와서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하나님께서 하늘 기록책에 기록해 놓으셨다가 네 배나 갚아 주신다"는 말씀을 듣고는 저에게 "아버지, 우리 집에 있는 재산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다 나누어 줍시다. 네 배나 돌아온다고 하니까요"라고 했습니다. 참 단순한 믿음이죠. 부자 법관도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 법관의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며 구원이 없습니다. 하늘의 기록책에 그들이 부족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인내에 있어서, 오래 참음에 있어서, 자제에 있어서, 겸손과 온유에 있어서 부족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하늘의 덕성들이 부족할 때 하늘의 문들은 그들에게 분명히 닫혀질 것입니다. 인내, 오래 참음, 자제, 겸손, 온유는 팔복과 고린도전서 13장, 그리고 베드로의 여덟 가지 계단에 모두 나오는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 없이는 생명이 없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서 이제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 하늘에 들어갑니까? 마지막 나팔이 울리고 거대한 군대가 영원한 승리의 소리로 나올 때까지, 모든 잠자는 성도들은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며 하나님께 그 이름이 알려진 귀중한 보석으로 간수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죽은 자들로부터 이끌어냄을 받는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이 내 속에 나타난 사람들만 하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것을 보고 "내가 생명을 보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생명을 눈으로 보았고 내 손으로 만져 보았고 피부로 느꼈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이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품성을 본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죽을 때까지 사도 요한이 단상에만 올라가면 설교한 내용이 전부 이것이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사도 바울도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품성을 닮아 구원에 이르시기를 바라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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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요약 정리]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중요성과 지체된 재림**
* 1888년 미니애폴리스 대총회 때 전해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은 구원의 핵심 지정 방식이나, 백성들의 불신과 불평, 자아의 미거듭남으로 인해 가나안 입성이 지체된 고대 이스라엘처럼 현대 교회도 재림의 지체를 겪고 있음.
* 구원받는 자의 수가 적은 이유는 방법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정하신 방법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따르지 않고 인간의 행위를 의지하기 때문임.
2. **참된 거듭남과 자아의 죽음**
*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문자적 율법 준수가 아닌 오직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함.
* 침례를 받았어도 자아가 살아 있으면 예수님이 마음에 임재하실 수 없음.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은 외부의 어떤 핍박, 멸시, 스트레스에도 악으로 반응하지 않고 온유함과 인내를 유지함. 죄책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다는 증거이며, 이때 즉시 자복하면 온전한 용서와 의롭다 하심을 얻음.
3. **구속의 과학: 그리스도를 바라봄**
* 성경의 모든 구절(창세기~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 광야의 놋뱀을 쳐다본 자들이 살았던 것처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바라볼 때 참된 회개와 새로운 생명이 생김.
* 식물이 태양 빛을 향해 자라듯, 성도 역시 날마다 매 순간 빛 되신 예수님의 생애를 명상하고 그분께 시선을 고정(고린도전서 13장 묵상 등)해야 함. 이때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럽게 품성의 변화(성화)가 일어남.
4. **세 천사의 기별과 품성의 변화(하늘 입성의 조건)**
* 첫째(하나님의 품성과 영광을 드러냄), 둘째(죄로부터의 철저한 회개), 셋째(안식일 순종 및 참된 회개의 증거) 천사의 기별은 라오디게아 기별(금, 흰 옷, 안약)과 일맥상통하며 단계적인 성화의 과정을 보여줌.
* 베드로의 8단계 계단(절제, 인내, 경건, 사랑 등)과 팔복의 과정을 거치며 예수님의 품성을 반사하는 백성이 나타날 때, 예수님은 지성소 중보를 마치고 재림하심. 하늘나라는 외적인 교리 준수(단순한 토요일 예배 참석)가 아니라, 내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결부되어 예수의 성품(인내, 온유, 겸손)에 참여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