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kQTD-Vj0h0U?list=PLhuKCEBVU7174dvnehSu7SKrwr0t7ZXXM
그리스도 우리의 의 – 곽성길
멀리서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차가 많이 막혔다죠? 저는 좀 돌아오긴 했지만 차가 하나도 안 막혔습니다. 오늘 제가 시간을 맡게 되었는데요. 성경 말씀을 스토리식으로 풀면 좋고 저도 즐겨하는 편이지만, 오늘 드릴 말씀은 스토리가 아니라 교리적인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재미가 없더라도, 우리 마지막 시대에 정말 중요한 기별이라 생각하시고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첫 시간에 '그리스도 우리의 의'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리뷰 앤드 헤랄드》에 있는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음조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라는 말이다."
이번 집회의 총주제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듣기 좋아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가장 감미롭게 들으십니다. 비록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이번 집회에서 서로 나누는 이 말씀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성소 진리, 안식일 기별, 하늘 성소에 관한 진리, 십자가, 조사 심판 같은 것들이 우리 재림교회의 아주 중추적인 기별입니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모든 중심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핵심이고 노른자위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나눌 때 성소 진리도 좋고 안식일 기별도 다 좋지만, 이 기별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진리가 빠지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 진리들을 복음의 곁가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만, 복음의 가장 중심은 아닙니다. 맨 윗줄에 있는 기별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하나의 도구들입니다.
여기 두 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이 문장들을 가만히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말씀"이 있고, 《가려 뽑은 기별》 1권에 보면 "의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문장을 잘 조합해 볼 때 의가 무엇입니까?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이야기를 이 두 문장을 가지고 풀어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에 순종하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의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을 지켜 주셨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하여 율법에 순종하려는 노력이 필요 없다는 의미도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기 위해서 율법에 순종하려는 노력들은 다 무가치하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을 죄인이 율법에 빚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죄인이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들어가는 유일한 조건은 의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는 나 자신이 아니라 외 외부에서 얻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려 뽑은 기별》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이 의는 완전한 품성이고 완전한 의로운 생애입니다. 우리는 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으므로,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는 완전한 품성입니다. "나는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를 한 번도 안 지었다"라고 하시는 분이 계시면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 없으시네요. 다 죄를 지으셨나요? 한 번 이상은 다 지으셨죠? 그렇다면 내가 지금부터 앞으로 율법을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지킨다 할지라도, 그 의를 가지고 율법 앞에 가면 율법이 우리에게 합격이라 할까요, 불합격이라 할까요? 불합격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완전한 품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품성이라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한 번이라도 지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났던 모든 인류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충족시키기에는 실격입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모두 실격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스스로 이룰 수 없습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완전한 의를 이루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를 소유해야 하는데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으로서 이것을 이루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감추인 보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소작농이 발견하고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밭은 성경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보화가 성경 속에 숨겨져 있다는 뜻인데, 이 보화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발견해야 할 보화는 바로 '복음'입니다. 《실물교훈》에 그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니까 세 천사가 날아가는데 영원한 복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세 천사의 기별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입니다. 그러므로 밭에 감추인 보화는 결국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우리가 성경 가운데서 이 보화를 발견했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6절에 영원한 복음을 가졌다고 나옵니다. 이를 밭에 감추인 보화에 적용해 보면 이 세 천사가 바로 우리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일요일 휴업령이 일어날 때, 이 기별을 가진 우리가 온 세상에 큰 능력으로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우리가 전할 기별이 바로 '그리스도 우리의 의'라는 기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기별을 전하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위해 자신의 것을 다 팔아 밭을 산 사람은 이 세 천사의 기별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영원한 복음을 가졌다는 마지막 기별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해하고 깨달아 경험으로 알며, 실제로 그 의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세 천사의 기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 현대 진리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에게 보내신 기별이 바로 그리스도 우리의 의라는 기별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는 영원한 복음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기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이 보화가 감추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이 보화를 얻으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의를 가지려고 했기 때문에, 이 보화를 계속 흙으로 덮어버린 꼴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예수님과 우리가 똑같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육체도 같고 마음도 똑같다는 입장인데, 역사적인 부분이나 QOD(Questions on Doctrine) 논쟁을 여기에서 다 다룰 수는 없으나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성경과 예언의 신이 말하는 예수님과 우리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육체는 같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우리의 몸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졸리고, 배고프고, 맞으면 아프고, 연약한 부분들은 우리와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다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기 때부터 죄를 짓고 동생을 때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그렇게 악한 본성을 가지고 계셨을까요? 이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언의 신에는 예수님이 우리와 본성이 다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분 속에는 단 한 순간도 악한 성향이 없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타락의 오점이나 악한 성향이 있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예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죄로 기울어지는 본성으로 오셨다. 즉, 예수님도 맞으면 속에서 불끈 올라와서 같이 때리고 싶고 분노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고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율법을 지켜서 승리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완전한 생애를 살고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살려고 해보니까 잘 되던가요?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속에서 한 번씩 죄된 본성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도 우리처럼 속에서 꿈틀거리는 악한 본성이 있었는데 성령의 은혜로 이기신 것이라면,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완전히 똑같다면, 왜 예수님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고 승리하셨는데 이 세상에 살다 간 수백억의 인구 중에는 예수님처럼 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까요? 왜 그렇게 완전하게 죄를 안 짓고 승리한 사람이 없을까요? 예수님이 우리의 모본이라면 상식적으로 예수님과 같은 분이 적어도 한 사람은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마저 우리와 똑같이 정욕으로 꿈틀거리는 본성이 있었다면, 왜 예수님은 완전하게 승리하셨는데 우리는 안 될까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완전히 죄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설교하려면, 자기 자신부터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분 중에 죄를 전혀 안 지은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자기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그렇게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본이시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계명을 지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고 예수님처럼 완전한 의로운 생애를 산 사람이 역사상 한 명이라도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그런 의미에서의 모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가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면, 그 뜻은 예수님께서 내가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의가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내가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격퇴시켜 버리는 기별이 바로 '그리스도 우리의 의'입니다.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고 도와주시면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시는 의 외에, 어떤 수단과 방법과 하늘의 충만한 도움으로도 완전하게 계명을 지켜 온전한 의를 이룬 인생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이룬 사람이 인류 중에 있어야 하는데,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으나 어떤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영적으로 적용해 볼 때 이 강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강도가 성령일까요? 성령 하나님이 사람을 때리고 강도 짓을 할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강도가 율법일까요? 율법이 우리를 때리는 것입니까? 물론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물리적으로 때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이 자신이 강도를 만나서 지금 거의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첫걸음은 내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강도의 역할을 하신다는 뜻은 우리를 때리신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고 거반 죽어가고 있다는 처참한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율법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돌에 써서 새긴 율법의 직분은 정죄의 직분, 즉 죽음의 직분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과 의가 없어서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의식을 준수하고, 교리를 지키고, 성소 봉사를 하고, 계명을 지키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비유에서 이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고, 교리를 수호하고, 성소 봉사를 하고, 헌금을 내고, 선교를 하는 행위들이 다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치료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가 바로 '그리스도 우리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발린말을 하도록 기별자를 보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심령을 공의의 화살로 찌르십니다. 찌르면 아픕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아파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찌르셔서 마음을 아프게 하시고, 우리가 강도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십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의가 없어서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강도의 직분을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리를 치료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캐내어 우리의 소유로 삼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와서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만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강도 만나 죽어가고 있는 상태임을 깨닫게 하셔서, 생명과 의가 되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면 나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면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그런 일입니까? 그분은 내 안에 오셔서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분이 완전히 이루신 의를 내 마음에 주입해 주시는 분입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가 너를 도와줄 테니 우리 한번 계명대로 살아보자"라며 힘을 주시는 분일까요? 가령 내 배우자가 기분 나쁜 소리를 해서 성질이 나고 때려주고 싶을 때, 예수님께서 "사랑하기 힘들지? 내가 도와줄게" 하셔서 나를 도와 사랑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까? 물론 아주 틀린 의미는 아닐지라도,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통해 율법을 지키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나 밖에서 완전히 이루신 의를 나에게 주입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또 다른 의를 이루셔야 한다면, 2천 년 전에 그분이 33년 동안 의로운 생애를 사시고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완전한 의는 도대체 무엇이 됩니까? 그 의 외에 내가 왜 내 안에서 또 다른 의를 이루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의는 내 안에서 어떤 계명을 지켜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완전히 이루신 그 의를 선물로 내 안에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개념을 정확하게 잡고 있어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의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온전한 사랑으로 거룩하고 완전한 생애를 사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영원히 포기하신 그 완전한 사랑을 통해 보이신 의를 뜻합니다. 그 의 외에 내가 또 다른 의를 이루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환난의 때를 견디기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며, 회개한 죄인에게 의를 전가시켜 주시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 재림교인들이 일요일 휴업령에 대한 설교 영상을 올리면 조회수가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기별은 조회수가 그리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사실은, 그 환난의 때에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의'라는 점입니다. 그때를 견디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그분이 회개한 죄인에게 의를 전가시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 아들이 이번에 이틀 동안 군대 휴가를 나왔다 갔습니다. 군악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가면서 저에게 용돈을 좀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 핸드폰을 꺼내서 토스로 돈을 조금 송금해 주었습니다. 그 돈은 본래 누구의 돈입니까? 제 통장에 있던 제 돈입니다. 제 돈을 핸드폰을 꺼내 아들 통장으로 전가시켜 준 것입니다. 입금을 딱 해주는 순간 그 돈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아들의 것이 됩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아빠 돈이 내 돈이 된 것입니다. 제가 아이에게 돈을 전가시켜 준 것이죠.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계명을 지켜 의를 이루신다는 주장을 이 비유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아들에게 가서 "너 돈 벌어야 하는데 힘이 없지? 내가 도와줄 테니 저 공사판에 가서 같이 일을 하자"라고 하며 일을 하도록 돕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사장에서 일을 해 돈을 받았다면 그 돈은 누구의 돈입니까? 제가 돕기는 했지만 일은 아들이 했으니 아들의 돈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철저하게 우리의 행위나 의로운 행실, 선행 같은 것들이 배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통해 의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나 밖에서 나와 아무 상관없이 완전하게 이루신 그 의를 나에게 전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우리의 의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도와 율법을 지키게 하시는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 정가는 제가 아들 통장에 제 돈을 입금해 준 것과 똑같습니다. 그 돈은 본래 아들의 노력과 아무 상관이 없는, 완전히 제 돈이었는데 그것을 선물로 그냥 준 것입니다.
아들이 저에게 왜 돈을 달라고 했을까요? 돈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제가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은 바로 '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이며 무한한 가치가 있는 하늘의 재화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저를 믿고, 제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아니까 돈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의를 가장 주시고 싶어 하시는 줄 알기 때문에 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의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십니다. 아버지의 돈을 아들의 계정에 넣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율법에 순종함으로 의를 이룰 수 없기에, 나 대신 누군가가 그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서 이룬 의를 선물로 받아 내 것으로 삼는 것,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계셨지만 믿음과 성령으로 죄를 이기고 완전하게 계명을 지키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서 온전하게 계명을 지킬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 그리스도의 의를 짓밟는 것입니다. 그것을 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대신 이루어 놓으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어떤 선행도, 의로운 행위도 다 배설물처럼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명을 안 지켜도 된다는 말입니까? 예언의 신의 말씀처럼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계명과 일치된 삶으로 가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길로 가느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본이 되시므로 우리도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서 의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며 내 힘으로 계명을 지키려 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길로는 결코 목적지에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이루신 그 의를 믿음으로 얻어 내 것으로 삼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율법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는 자기 굴복과 자복, 그리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명을 지켜서 의에 이르러 보려고 했던 사람들이 바로 과거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의의 법을 쫓아갔지만 결국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말하듯, 의의 법을 쫓아간 이스라엘이 법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어떠한 선행과 의로운 행위, 거룩하고 지극한 선행, 기도와 말씀 연구, 헌금과 선교, 율법 준수, 심지어 타인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것 자체는 의가 아닙니다. 구원을 얻는 조건에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은 다 배설물과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선한 일들이 우리 삶에 결과로 나타나기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했을 때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일 뿐입니다. 왜 이 좋은 행위들이 의 자체가 되지 못할까요? 타락한 인생들의 더러운 통로를 통해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무가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완전하고 거룩한 생애, 그분이 보이신 품성, 그리고 십자가의 무한한 희생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순결한 품성의 흰 옷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피조물들의 공로가 전혀 쓸데없다는 것을 놀라움으로 식별할 수 있는 하늘의 안약이 필요하다."
우리가 공로를 세운다 한들 하나님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는 데 있어서 우리의 모든 공로는 전혀 쓸데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나의 어떠한 선행과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 이루신 완전한 생애와 십자가의 무한한 희생을 통해 성취하신 완전한 사랑, 그 외에는 어떠한 것도 의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의가 되십니다. 우리는 이 의를 믿음으로 받아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의인으로 여김을 받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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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요약 정리]
1. 복음의 중심 주제: 그리스도 우리의 의
성소 진리, 안식일, 조사 심판 등은 재림교회의 중요한 기별이자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심을 가르쳐 주는 도구임. 그러나 이 모든 기별 가운데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핵심 진리가 빠지면 그것은 참된 복음이 아님.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술에서 듣기 가장 좋아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음조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그리스도의 의'임.
2. 의의 정의와 인간의 전적 무능력
의란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자 완전한 품성을 의미함.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려면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번의 죄도 없어야 하므로, 타락한 모든 인류는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없는 '실격자'이며 자력으로 의에 이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함.
따라서 인간이 의로워지기 위해 행하는 모든 인간적 노력과 행위는 구원의 조건에 있어서 무가치하며 배설물과 같음.
3. 예수님의 인성과 올바른 모본의 이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타락한 육체(연약함, 배고픔 등)를 지니셨으나, 마음의 본성은 우리와 달라 그분 속에는 단 한 순간도 악한 성향이나 오점이 없었음.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죄로 기울어지는 본성을 가졌으나 승리했으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율법을 지켜 승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길(율법주의)이며 그리스도의 의를 짓밟는 것임. 예수님은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의를 대신 이루어 주신 분임.
4. 의의 전가(선물)와 성령의 진짜 역할
구원의 의는 내 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켜서 점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 2천 년 전 예수님이 밖에서 나와 상관없이 완전히 이루신 의를 전가(통장 입금처럼 값없이 계정에 넣어 주심)받아 선물로 소유하는 것임.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성령과 율법)는 우리를 상처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로 인해 거반 죽은 상태임을 깨닫게 하여 의의 필요성을 느끼게 함. 제사장과 레위인(형식적 교리 준수, 성소 봉사, 헌금 등)은 우리를 치료할 수 없으며, 오직 사마리아인(그리스도)이 부어주시는 포도주(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를 구원함.
인간의 선행과 율법 준수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를 믿음으로 소유했을 때 흘러나오는 당연한 '결과'이자 '열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