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현대의 방주 이주용장로
https://youtu.be/SbvSSt9zyPM?list=PLhuKCEBVU7174dvnehSu7SKrwr0t7ZXXM
우리 재림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집회장에서 여러분을 만나 뵙게 돼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지금은 예배가 끝날 시간인데, 여러분 체력이 되십니까? 제가 준비한 주제를 충분히 해도 되겠습니까? 끝날 시간인데 지금 이제 시작한다는 게 조금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특별히 또 이렇게 기회를 마련하셨으니 조금 인내하셔서,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제가 준비한 제목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이것은 현대의 방주요 현대의 기별'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다 같이 읽어 볼까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가운데서 잃어버린 영혼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니라."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안 되는 이유를 좀 생각해 보셨나요? '품성 변화가 왜 이렇게 내 안에서 되지 않을까?' 하고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 재림 교인이라면 다 생각해 보셨겠죠. 그 이유는 바로 성경의 중심 주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맞습니까? 성경의 중심 주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라 그랬는데, 성경의 중심 주제가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마귀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뀌는 공식입니다. 수학에서 공식이 중요하지요. 공식을 모르면 문제를 풀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법칙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고는 우리의 품성이 0.1%도 바뀔 수 없습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는 품성이 바뀌었다고 착각을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가장 의미심장한 말씀이자 예언이 어떤 말씀이냐 하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위 본문에서 재림 교인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단어가 어떤 단어일까요? "그러하리라", "이와 같으리라"입니다. 굉장히 무시무시한 단어입니다. 어느 때와 같겠다는 것입니까? 노아의 때와 같이, 즉 노아의 때와 재림의 때는 같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노아의 때의 사건은 현대인들의 거울입니다. 거울은 무슨 역할을 하지요? 나의 현재 모습과 현주소를 정확하게 인식시킵니다. 노아의 때에 그들이 왜 멸망을 받았고 또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아의 때와 재림의 때가 똑같으니, 너희들이 노아의 때에 왜 그들이 멸망을 받았고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그것을 잘 연구해서 너희들도 방주를 지으라는 소리입니다.
노아의 때 멸망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맞죠? 왜 그들이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홍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산불이 나서 죽을 뻔했습니다. 불구덩이에서 겨우 나왔습니다. 제 아내와 한 1분만 늦었으면 아마 그 안에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연기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았는데, 한 200m 내려오니까 길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우리가 뭐 했는지 아십니까? 저는 400만 원어치 거름을 밭에다 뿌리고 씨앗을 잔뜩 준비해 놓았고, 바로 옆에 사는 저희 누님은 몇십 만 원어치 나무를 사다가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다 탔어요. 38년 동안 일구어 놓은 게 하루 저녁에 싹 타 버렸습니다. 제가 산불이 어떤 것인지 미리 알았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산불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3일 전부터 의성에서부터 불이 오기 시작했는데, '설마 우리 집까지 오겠나'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집은 산에서 한 100m쯤 떨어져 있었거든요. 제가 산불이 무서운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다 멸할 때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산불이 나서 우리 집이 다 탈 때까지 저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참, 산불이니 이만하기 다행이지요.
이것이 마지막 때에 이를 창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지막에는 홍수 대신 창수가 납니다. 지금 산불 난 것은 물리적인 사건이지만, 품성적인 창수가 올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이번에 땅만 놔두고 전 재산이 다 탔습니다. 수습을 해 보니까 피해가 굉장히 큽니다. 진짜 '억' 소리가 납니다. 제가 38년 동안 일구어 놓은 것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재산을 잃었을지라도, '노아처럼 방주는 지어야 하겠다', '머지않아 창수가 올 것인데 방주에 들어가야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왜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느냐 하면 홍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홍수는 그들이 처음 겪는 사건이라 알 수 없었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산불도 저에게는 처음 경험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다음에도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제는 집 짓는 것부터 달라질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 불에 안 타는 자재로 짓고 싶습니다. 홍수에 대한 확신과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은 방주를 지은 자에게만 주어지는데, 방주를 지은 자들은 100% 들어갔고 100% 살게 되었습니다. 맞죠? 반면 방주를 안 지은 자는 100% 안 들어갔고 100%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멸망의 원인은 홍수 자체가 아니라 '방주를 짓지 않아서'입니다.
성경은 "너는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하며, 자기 방주는 자신이 지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들은 다 자기 방주를 스스로 지었습니다. 노아가 지은 방주에 셈이 그냥 얹혀 들어간 게 아니고, 셈도 자기 방주를 함께 지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방주를 지은 사람만 방주에 들어갑니다. 자기 방주를 짓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언의 신에서는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방주를 짓는 데 바쳤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빨리 방주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지어야 합니까? 모든 것을 다 투자하고 거기에 올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방주를 짓고 있습니까? 또한 그 방주가 무엇이며 어떻게 지어야 합니까? 현대의 방주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예비하고 있으라." 깨어 있고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은 노아처럼 현대의 방주를 지으라는 소리입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내용이 쉬운 부분은 주제로 넘어가기 위해 조금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창세기 7장에는 홍수가 나오고 아라랏산에 방주를 지었습니다. 이것을 '노아 방주'라고 합니다. 똑같이 마태복음 7장에는 창수가 등장하고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이것을 '현대 방주'라고 합니다. 구약의 첫 책 창세기 7장, 신약의 첫 책 마태복음 7장, 이렇게 연관 지어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노아 방주 때와 현대 방주 때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홍수 때와 창수 때의 차이점을 우리가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 방주 때의 인류는 잘 짓는 자와 안 짓는 자,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흑백논리였죠. 신자와 비신자로 나뉘어 쉬웠습니다. 그러나 현대 방주 때는 세 부류가 등장합니다. 잘 짓는 자, 무허가로 짓는 자, 그리고 설계 도면을 잘못 이해하고 짓는 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현대 방주를 무엇으로, 어디에, 어떻게 지어야 할까요?
* **첫 번째는 무너지지 않는 방주**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며 마태복음 7장의 이야기입니다.
* **두 번째는 무너지는 방주**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우리가 여태까지는 이 두 가지만 알았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모르면 요것만 알게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알면 사단이 숨겨 놓은 아주 기가 막힌 함정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세 번째 모조 방주**입니다. 반석 같은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반석인 줄 알고 지었는데 알고 보니 모래였던 것입니다. 어느 때에 그것을 알게 됩니까? 창수가 나니까 압니다.
반석 방주는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며 이를 '복음주의'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달피 삼육수련원에 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표에 마달피라고 적어 보았습니다.
모래 방주는 '내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입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부류이며 이를 '자유주의'라고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율법을 다 지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거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거야"라며 굉장히 자유롭게 생각합니다. 안식일에 스포츠도 하고,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행복하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유주의입니다. 제가 30몇 년 동안 연구해 본 결과, 이런 부류는 도시에 많고 부유층에 많습니다.
세 번째 모조 방주는 '내 말을 듣지 않고 행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크게 오해한 부류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합니다. 행하긴 행하는데 불법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불법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도 자기 판단대로 해석합니다. 이를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제가 보니까 주로 시골에 많고 가난한 사람 중에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는 어차피 희망이 없으니 하늘나라를 꿈꾸며 열심히 품성을 변화시키고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에 어디에 속했을 것 같습니까? 예전에 저는 이 3번 율법주의에 속해 있었습니다. 물론 1번과 2번의 요소도 있었습니다만 말입니다.
내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자유주의)는 양심이 마비되어 무기력해졌습니다. 반면 내 말을 듣지 않고 행하는 자(율법주의)는 그릇된 열심을 내다가 미혹을 당한 것입니다. 원수에게 속은 것입니다. 이번 집회 참석자들은 2번과 3번 중 어디를 더 주목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다루는 것은 주로 3번 율법주의입니다.
세상은 두 번 멸망합니다. 노아 때의 홍수(물)는 노아 방주(잣나무)로 통과했습니다. 인자가 임할 때에는 창수가 납니다. 홍수 때는 물리적인 물이었지만, 그렇다면 현대 방주는 무엇으로 지어야 합니까? 노아 가족은 여덟 명이 남았고, 마지막의 남은 무리는 14만 4천 명입니다.
창수는 흔들림을 유발하는 멸망의 도구이며 '이설(거짓 교리)'을 의미합니다. 이 이설을 가지고 흔들다가 결국 짐승의 표를 받게 만들고, 야곱의 환난을 거쳐 마지막 불과 유황의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반면 방주는 구원의 도구이며 곧 '그리스도의 의'이자 '하나님의 인'입니다. 이것을 늦은비 성령으로 인치시고 재림을 맞아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재림도인들의 위기는 이미 창수가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거짓 이설을 가지고 흔드는 창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방주를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이 재림교회의 위기입니다. 창수는 이미 한참 진행되어 밀려오는데, 방주는 기초도 놓지 않은 현상입니다.
"흔들림을 당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오직 영원한 반석에 저들의 영혼을 고정시킨 자들만이 굳건히 설 수 있을 것입니다. 큰 흔들림이 이미 시작되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진리를 위하여 담대하고 확고부동하게 서기를 거절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사업을 위하여 즐겨 희생하지 않는 모든 자들은 흔들림을 당하게 되고 떨어져 나갈 것이다."
흔들림의 도구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설, 즉 거짓 이론이 소개됨으로 흔들림이 이를 때, 아무 데도 닻을 내리지 못한 피상적인 신자들은 이리저리 날리는 모래와 같을 것입니다. 원수의 속임수에 빠져들 것입니다. 그들은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을 것이며 믿음에서 떠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지금 여기 거짓 이론이 나옵니다. 거짓 이론이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이 다른 복음과 거짓 이론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사단이 만든 복음입니다. 사단은 다른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공격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질문이 나오면 대답은 뻔한 것 아닙니까?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전하면 저주를 받게 될 다른 복음과 진짜 그리스도의 복음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오늘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다른 복음인지 그리스도의 복음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있다면 제가 이렇게 설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복음의 정체를 밝힙시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것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복음은 어떤 복음인지 매우 디테일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을 진단해 보겠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의 이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여기서 제일 중요한 주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이거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고 재림교인 중에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제가 도표의 개념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타락 노선에는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던 의인이 뱀의 미혹을 당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게 되었고, 불신의 정신을 가지니 행동으로 불순종하여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되었고 사망이 왔습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럼 회복 노선을 보겠습니다. 죄인은 루스벨(마귀)의 형상을 가졌습니다. 죄인은 스스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믿음으로 순종을 하고 의인이 됩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게 됩니다. 도표의 논리가 맞는 것 같습니까? 제 유튜브를 시청하신 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대답을 잘 안 하시네요. 이 회복 노선에 하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의 개념 속에는 하자가 없어 보이지만, 제가 "여기에 예수가 어디 있느냐, 예수가 빠졌다"라고 하니까 하자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시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십자가 없이도 구원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말로는 그렇게 안 하지만, 우리의 잠재적 관념 속에는 항상 예수 없이 구원을 얻으려는 논리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어디에 삽입시켜야 할까요? 이 도표의 논리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디에 예수를 넣어야 합니까? 여러분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만약 이 회복의 과정에 예수가 없다면 여러분이 지금 믿고 있는 예수는 어떤 예수일까요? 제 기별을 잘 따라오셔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의 관념 속에 있는 예수는 허상이거나 아니면 성경이 말하지 않는 '다른 예수'일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미련한 처녀는 진리를 존중히 여기고 옹호하며 진리를 믿는 자에게 매혹당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미련한 처녀를 모르는 게 아니라, 미련한 처녀가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는 있지만 진짜 예수를 모르는 현상, 이것이 바로 다른 복음 안에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미련한 처녀 계급은 굉장히 표준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믿고 있던 예수는 다른 예수, 즉 제 표현으로 하자면 '들락날락하는 예수'입니다.
저는 과거에 이 들락날락하는 예수님 때문에 아주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왜 이렇게 들락날락하십니까? 한번 들어오셨으면 끝나야지 왜 이러십니까?" 여러분, 우리 속에서 예수님이 들락날락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100% 다른 예수입니다. 저는 여기에 완전히 속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은 절대 들락날락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여기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나옵니다. 이것은 분리할 수 없는 삼종 세트입니다. 예수가 바뀌면 영도 바뀌고, 영이 바뀌면 다른 복음이 됩니다. 다른 예수나 다른 영을 구분하는 방법은 다른 복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예수와 영을 영적으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복음은 구분하기가 좀 더 쉽습니다.
다른 복음은 세례, 영혼멸절이 아닌 영혼불멸, 일요일 준수 등을 말하며 이는 멸망의 복음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침례, 조건적 불멸, 안식일 준수이며 이것이 구원의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세례 대신 침례를 믿고, 일요일 대신 안식일을 믿으면 무조건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진짜 참복음일까요? 물론 그것이 구별점이 될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본질은 아닙니다. 침례 안 받고도 구원받은 강도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안식일을 물리적으로 모르고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영혼불멸을 믿다가 돌아가셨어도 진심으로 주를 믿어 구원받을 수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 진리들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두 복음의 차이가 고작 교리 몇 개 차이뿐이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우리 재림교회는 진리 교회이므로 우리 안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는 선민사상에 젖어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과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언급한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적 차이는 이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즉, 죄인이 자신의 행함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상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의로워진다는 진리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여러분은 다 아래의 '믿음의 선'을 선택할 것입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믿지 않아"라고 머리로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여전히 '행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아서 확신이 들었다가도, 오늘 집에 돌아가서 부부 싸움을 한 바탕 크게 하고 나면 구원의 확신이 통째로 흔들립니다. 왜 흔들립니까? 내 구원의 기초를 내 행위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두 복음의 차이는 흑과 백처럼 쉬운 구분이 아닙니다. 진짜 지폐와 위조지폐의 차이와 같습니다. 위조지폐는 우리 실력으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사단이 파 놓은 함정은 쉽게 발견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와서 물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스스로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모든 기독교인이 다 동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합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셨는데, 그 '모든 것'에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도 포함됩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내 힘으로 율법 준수가 완벽해집니까? 이미 아까 광 목사님 설교 때 배우셨죠. 이번에 광 목사님 주제와 제 주제가 굉장히 많이 중첩됩니다. 그래서 제가 주제를 바꿀까 하다가, 광 목사님이 다루신 내용이 너무 중요해서 그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두 시간 들으면 지루하지만, 두 사람에게 나누어 들으면 복습이 되어 괜찮기 때문입니다. 용어가 많이 비슷하게 나오는데 보십시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내 힘으로 율법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아까 언급한 도표, "죄인이 성령의 도움으로 믿고 순종해서 의인이 되어 영생을 얻는다"는 논리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까? 이것은 사실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에 가깝습니다. "성령이 도와주시는데 왜 행함입니까?"라고 묻겠지만, 성령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사상에 젖어서 행하는 인간의 선행을 결코 돕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선행을 이루면 그 영광이 다 누구에게 가기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갑니다. 마귀의 형상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마귀의 형상으로 흘러가는 일을 성령께서는 결코 돕지 않으십니다.
이 기별을 가지고 야고보서와 로마서를 비교해 봅시다. 야고보서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동일한 아브라함의 사건을 놓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똑같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두고 야고보와 바울이 상충되는 논리를 펼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야고보의 말씀이 좋습니까, 로마서의 말씀이 좋습니까? 하나만 선택해 보십시오. 아무래도 행위가 들어가는 야고보서는 좀 부담이 되시죠? 아무 행위 없이 구원받았으면 좋겠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바울파입니다. "나는 바울파가 좋다"고 고백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계속 야고보파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며 '믿음+행함'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신 바 되었다며 '믿음-행함', 즉 행함은 믿음의 조건에 포함시킬 수 없다고 행위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로워지지 않았다는 바울의 논리와, 그 믿음이 행함으로 증명되어야 온전해진다는 야고보의 논리 사이에서 여러분은 혼란이 올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철저한 바울파였습니다. '오직 믿음(믿음-행함)'을 강조했기에 행함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 부르며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루터 자신도 과거에 행함으로 의를 얻으려고 고행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던 율법주의 신앙에 시달렸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깨닫고 보니 너무 기막히게 좋은데, 야고보서를 보니 또 행함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 성경 같지가 않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행함이 있는 믿음(믿음+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파에 심정적으로 많이 속해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해도, 내 행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구원이 흔들리니 여전히 믿음의 기초를 행함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한 것이고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한 것입니까? 야고보나 바울이나 모두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씀을 기록한 선지자들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는 인간의 행함이 전혀 없어야 합니까?
율법주의자들은 야고보서를 오해하여 행함을 강조합니다. 이를 '행위파'라고 하며 모양만 의로운 가짜 의, 즉 '자기 행위'를 추구합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로마서를 오해하여 믿음만을 강조합니다. 이를 '믿음파'라고 하며 역시 모양만 의로운 가짜 의, 즉 '자기 믿음'에 머무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자기 행위'나 '자기 믿음'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자기 믿음으로 구원받으려 하고, 율법주의는 자기 행위로 구원받으려 할 뿐입니다. 다를 게 없습니다.
일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둘 다 강조하며 '행함이 있는 믿음'을 중용으로 제시합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짜 본질은 '믿음이냐 행함이냐'의 이분법적 논쟁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승산이 없습니다. 그 논쟁에 갇히면 끽해 봐야 '자기 믿음' 아니면 '자기 행위'에 머물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핵심 이슈는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의 믿음이며, 누구의 순종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좀 감이 오십니까? 내 믿음과 내 순종이냐, 아니면 예수의 믿음과 예수의 순종이냐의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정확한 현주소는 로마서 5장 18절과 19절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런 말씀은 외우셔야 합니다. 사상적으로 충분히 숙지해야 합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말씀이 아주 핵심입니다. 주목할 단어는 "같이"라는 접속사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두 번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를 사용하시며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셨듯이, 바울도 같은 의미를 반복하며 뒷문장을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모든 사람이 누구의 범죄로 죄인이 되었습니까? 아담의 범죄입니다. 내가 죄인이 되는 데 내 개인의 죄가 보탬이 되었습니까? 성경의 논리로는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담의 죄로 인해 이미 죄인이라는 신분으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은 죄가 없어도 아담의 피를 받아 죄인이라는 데에 하자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누구의 순종으로 의인이 됩니까? 죄인이 된 패턴과 의인이 되는 패턴이 똑같습니다. 내가 첫째 아담의 죄 때문에 죄인이 된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한 행동과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기에 보탤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인이 되는 데 보탠 것이 없듯이, 의인이 되는 데에도 우리가 보탤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가 무언가를 보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집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혀 깨닫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이 진리를 처음 깨닫고 나서 연약하여 실족하고 넘어졌을 때, 오히려 구원의 확신이 더 깊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에게만 장대 위의 놋뱀이 절실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뱀에 물리지 않았을 때에는 놋뱀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독이 퍼져 죽어갈 때에는 죽음 앞에서 놋뱀 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연약하여 실족했을 때 구원의 확신이 흔들린다는 것은, 아직 로마서 5장의 이 원리를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구원받는 데 내 행위가 보탤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순종하고 별 선행을 다 해도 그것이 구원의 조건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절대적 전제 속에 살아야, 봉사를 해도 자아를 자랑하며 뻐기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이 되는 데 우리의 불신과 불순종이 몇 퍼센트나 보탬이 되었습니까? 0%입니다. 100% 첫째 아담의 행위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도 100%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행위(믿음과 순종)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를 믿는 내 믿음'입니까, 아니면 '예수의 믿음' 자체입니까? 굉장히 깊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으려고 애쓰는 행위입니다. 내 믿음은 자꾸만 내 행위의 상태에 따라 흔들립니다. 행위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믿음은 '내 믿음'이며 가짜 모조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은 내가 지녀야 하고 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 착각하지만, 내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절대 받아낼 수 없습니다. 그것을 빨리 인정하셔야 합니다. 저는 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보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며, 본질적으로는 '예수의 믿음'입니다. 내가 예수를 잘 믿으려고 노력하는 그 주체적 믿음조차도 나의 의지적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청청한 영역에서는 인간의 그 어떤 행위나 요소도 0.01%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묻어 버리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을 위하여 대신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주체적으로 믿으려고 하지만 잘 믿어집니까? 안 믿어집니다. 여러분, 품성 변화에 목숨 걸고 도전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를 간절히 하고 삶의 현장에 가도, 어제 지었던 죄를 오늘 똑같이 반복해서 짓습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스트레스 주는 사람 앞에서 무너집니다. 이것을 한 달 동안 반복하고 나면 나중에는 기도할 힘과 믿음조차 바닥이 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진짜 믿어지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믿는 척하지 말고, 안 믿어지면 솔직하게 안 믿어진다고 토로해야 합니다. 저는 그 말씀을 붙들고 내 힘으로 성화되어 보려고 23년을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품성이 1%도 안 바뀌었습니다. 만약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을 성령이 내 행위를 도와주시는 것으로 오해하면 그 함정에서 평생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대행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입니다. 나는 순종할 수 없고 의로운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의 신의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율법은 의, 즉 의로운 생애와 완전한 품성을 요구하지만 인류는 그 요구에 미칠 수 없다 인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지상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개발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받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
율법이 요구하는 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완전한 품성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은 억지로 참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하면 하늘나라에 못 가니까 참아야지' 하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참은 게 아닙니다. 스데반은 원수들의 상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동정하셨던 그리스도의 의를 마음속에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품성입니다. 인류는 이 요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개발(완성)'하셨습니다. 왜 만드셨습니까? 그것을 원하는 자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할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해 예수께서 순종하셔서 의로운 생애를 만드시고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죄인이 의인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무엇입니까? 오직 '원하는 것'입니다. 원하는 자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십니다. 의는 성령께서 지금 내 안에서 새롭게 만드시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새로 이루시는 게 아닙니다. 2천 년 전에 이 땅에서 이미 완성해 놓으신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수를 받으라는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구원에 대해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한 차원 더 나가 볼까요? 우리는 심지어 참되게 원하는 마음조차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 내가 이것을 원하오니 주십시오"라고 내 의지를 자랑할 게 아니라, "하나님, 저는 이것을 원해야 마땅함에도 원할 마음조차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갈망하는 마음 자체를 저에게 선물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하는 마음이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참으로 필요로 하여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줘 봐야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나병을 치유받은 것이 그의 믿음 때문입니까, 선택 때문입니까? 나아만은 처음에 선지자의 말을 듣고 화를 냈습니다.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요단강에 몸을 씻기로 '선택'했습니다. 선택하여 순종했을 때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고, 그 구원의 경험 뒤에 비로소 참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감정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내 의지를 굴복시키는 '선택'의 방법을 터득하셔야 합니다.
위조지폐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 결론을 맺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차이는 진짜 지폐와 위조지폐처럼 아주 미세하고 정교한 부분에서 갈립니다.
1. **첫 번째 위조지폐(일반 기독교인용):**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준수하여 의로워지겠다는 사상입니다. 우리 재림 교인 중에는 대놓고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해 봐야 안 된다는 것을 다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본격적으로 율법을 끝까지 지키려고 처절하게 시도해 보지도 않았기에,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기력함을 100% 인식하지도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위조지폐(재림 교인용):**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율법을 준수해 의로워지겠다는 사상입니다. 여기에 속는 재림 교인들이 정말 많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속지 마십시오. 이것도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제 말에 반론을 제기할 분들이 많겠지만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3. **세 번째 위조지폐(가장 기만적인 형태):**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안에서 내 대신 의롭게 행해 주신다는 사상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성화의 게임은 끝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내가 주체가 되어 예수를 내 안에 가두고 통제하려 하면 그 예수는 자꾸만 들락날락하게 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나 예수님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어떤 행위로 내가 의로워지려고 기대하는 것 역시, 본질은 '내 안의 상태'를 의지하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변형일 뿐입니다.
참된 진리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에 내 밖에서, 나와 상관없이, 나를 위하여 홀로 이루신 완전한 의가 있습니다. 오직 이 의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듭니다. 아멘.
성령과 예수님이 지금 내 안에서 죄된 본성을 조금씩 수리하여 의를 창조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이미 의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고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내 대신 이 땅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개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자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십니다. 이것이 "다 이루었다"의 진짜 의미입니다. 2천 년 전에 완성된 완전한 생애와 완전한 품성의 의를 가지고, 지금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 바로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님의 대상이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지성소에 인성을 백성들의 담보로 보존하신 채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지성소에 계신 예수님이 당신이 이 땅에서 이루신 그 완벽한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시는 분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의를 전가해 주시는 예수를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 의를 받으면 내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성령의 도움으로 스스로 믿고 순종하여 의인이 된다는 기존의 구원론적 도표는 하자가 있습니다. 진짜 구원의 노선인 '대속 노선'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대신 들어가셨습니다. 죄인 대신 예수가 연약한 인성으로 오셔서 성령에 완벽히 굴복하여 믿고 순종하심으로 의를 개발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맨 밑의 '선택 노선'입니다. 마귀의 형상을 가진 죄인인 내가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여 자복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마귀 형상인 나 자신을 포기할 때,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내 안에 이식해 주시는 것입니다.
의를 우리 안에서 점진적으로 수리해 나가는 것은 사단의 본성이 변화되어 의롭게 된다는 진화론적 사상입니다. 성령은 나를 고쳐 쓰시는 분이 아니라 나를 십자가에 죽이시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를 이식하시는 분입니다. 심장이 완전히 망가져서 고칠 수 없을 때 다른 사람의 건강한 심장을 이식받는 수술과 같습니다. 마귀 형상은 수리해서 쓰는 게 아니라 죽여서 떼어내고, 예수의 형상과 의를 통째로 이식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완성하신 그 완벽한 의는 지금 하늘 지성소에 우리의 이름표가 붙은 채 보관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수술하셔서 마귀의 형상을 떼어내고 지성소의 그 완벽한 예수의 품성을 우리에게 이식하십니다. 외적인 수리가 아니라 '재창조'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말은 지성소에 계신 인성의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내 몸속에 들어오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지성소에 계십니다. 그분이 내어놓으신 의,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품성과 생명이 성령을 통하여 내 안에 주입되어 역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의는 거룩하고 하나님같이 되는 것이며, 의는 사랑이고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며 곧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우리가 의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안에서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지성소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성령의 수술을 통해 이식받는 것입니다. 의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얻는 것'입니다. 현대의 방주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앞으로 일요일 휴업령이라는 '창수 1'이 올 것이며, 야겁의 환난이라는 '창수 2'가 올 것입니다. 창수 1은 우리의 '믿음의 품성'을 시험할 것이고, 창수 2는 우리의 '사랑의 품성'을 시험할 것입니다. 일요일 휴업령이 내릴 때 '예수의 믿음'이 없이는 결코 그 창수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야곱의 환난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테스트하는 창수입니다.
지성소에 계신 예수님의 사명은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조건은 지금도 옛날 낙원에서 아담이 타락하기 전과 똑같습니다. 곧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는 '완전한 의'가 요구됩니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품성을 이룰 수 있었으나 실패했고, 그 범죄로 인해 우리의 본성은 타락하여 스스로 의로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가 많고 거룩하지 못하므로 거룩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으며,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응할 만한 자신의 의는 조금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과 시험 가운데서 죄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지금 지성소에서 우리의 죄(마귀 형상)를 벗기시고 당신의 완벽한 의를 우리에게 주려고 하십니다.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과거에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완전히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 바 됩니다.
망가진 심장을 통째로 적출하고 한 번도 질병을 앓지 않은 젊고 건강한 새 심장을 이식받는 것처럼, 마귀 형상의 자아를 떼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식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었으나 못 본 척해 주시는 게 아니라,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예수의 완벽한 품성 수술이 끝났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한 의인으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내 안에서 성령이나 내가 의를 새로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2천 년 전에 내 밖에서 이미 완성해 놓으신 그리스도의 의와 신성과 생명을 성령의 수술을 통해 내 안으로 선물로 받아들이는 재창조의 경험을 모두 하시기 바라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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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요약 정리]
1. **성경의 중심 주제와 절대 법칙**
* 품성 변화와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개인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의 중심 주제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공식을 모르기 때문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마귀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꾸는 유일한 절대 법칙임.
2. **노아의 때와 현대 방주의 영적 의미**
* 예수님의 재림 직전의 상황은 노아의 때와 정확히 일치함. 노아 때 멸망의 원인은 홍수 자체가 아니라 '방주를 짓지 않아서'였으며, 현대 방주는 '그리스도의 의(하나님의 인)'를 의미함.
* 현대 방주를 짓는 신앙의 부류에는 세 가지가 있음:
* **반석 방주(복음주의):** 말씀을 듣고 행함.
* **모래 방주(자유주의):** 말씀을 무시하고 행치 않음.
* **모조 방주(율법주의):** 말씀을 오해하여 불법(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행함.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반석인 줄 착각하기 쉬운 '모조 방주(율법주의)'의 함정을 가장 경계해야 함.
3. **로마서 5장의 대속 원리와 '누구의 순종인가'**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핵심 이슈는 '믿음이냐 행함이냐'의 말장난이 아니라, "누구의 믿음이며 누구의 순종인가"의 문제임.
* 로마서 5장 18~19절의 원리에 따라, 인간이 죄인이 되는 데 개인의 죄가 보탬이 되지 않고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죄인이 된 것처럼, 의인이 되는 과정 역시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이 0.01%도 보탬이 되지 않으며 오직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과 '완전한 순종'으로만 의인이 됨.
4. **내 안의 수리가 아닌 '내 밖에서 이룬 의의 이식(재창조)'**
* 사단이 파놓은 가장 기만적인 위조 복음은 성령이나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도와 점진적으로 율법을 지키게 하신다'는 사상임. 이는 죄된 자아를 조금씩 고쳐 쓰겠다는 '진화론적 종교'이자 변형된 율법주의에 불과함.
* 참된 복음은 2천 년 전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내 밖에서 나와 상관없이 홀로 33년 반 동안 완벽하게 개발하여 지성소에 보관해 두신 '완전한 품성의 의(그리스도의 신성)'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임.
* 성령의 진짜 역할은 인간의 선행을 돕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마귀 형상인 자아를 철저히 포기(자복)하도록 이끄시고, 지성소에 계신 인성 예수님이 완성하신 완벽한 의의 심장을 우리 안에 통째로 이식하시는 '재창조(수술)'를 행하시는 것임. 이 그리스도의 품성이 전가될 때 하나님 앞에서는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존재로 온전히 수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