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2기둥(1) 이주용
https://youtu.be/y6xuC6qL93M?list=PLhuKCEBVU7174dvnehSu7SKrwr0t7ZXXM
여러분,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이 귀한 시간을 허락해 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아침 제목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두 기둥'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이 파트 1이고, 내일은 파트 2를 진행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두 기둥, 여러분 집을 지을 때 기둥이 매우 중요하죠? 두 기둥 중에 한 기둥만 쓰러져도 집은 무너집니다. 반드시 두 기둥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여기서 자유가 무엇일까요? 이 자유는 '안식'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나의 어떠한 죄도—여러분, 내가 사망하고 멸망을 당하는 데 있어서 내 죄가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기에 넉넉한 죄인입니다. 죄가 차고 넘치는 죄인이에요. 내가 죄를 더 보태지 않아도 우리는 죄인입니다. 반면에 이와 같이 나의 어떠한 행위도 구원에 보탬이 되는 행위가 0%도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믿어지고 가슴에 와닿을 때, 그때 비로소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없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짐, 즉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게 됩니다. 진정한 자유를 주는 진리는 첫째로 예수님이시며, 둘째로는 구원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우리가 잘 이해할 필요가 있지요. '알지니'라는 것은 첫 번째로 경험을 뜻합니다. 경험으로 알아야 하는데, 이 경험이 오기 전에 먼저 이론을 알아야 합니다.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배우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수없이 많이 공격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공격하고 있지요. 어제 이 말씀을 제가 소개했습니다.
"거짓 이론이 소개됨으로 흔들림이 이르러올 때에, 아무 데도 닻을 내리지 못한 이 피상적인 신자들은 이리저리 날리는 모래와 같을 것이다. 원수의 속임수에 빠져들 것이다. 그들은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을 것이며 믿음에서 떠날 것이다."
거짓 이론, 이것이 곧 흔들림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이어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합니다.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이 다른 복음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이와 비슷한 유사품인 '다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사단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한 이유가 있겠지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바로 이 시대의 '현대 기별'이기 때문입니다. 왜 현대 기별이라고 할까요? 노아 시대에는 방주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현대 기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홍수가 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방주만이 유일한 구원책이었습니다. 마지막 때도 똑같습니다. 이 시대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현대 방주'이며, 이것이 '현대 기별'입니다.
용어를 조금 짚어보겠습니다. 신앙의 연조가 얕은 분도 계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좀 더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말이 좀 어렵지요? 로마서 10장 6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것을 조금 쉽게 풀이하면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 좀 쉬워졌죠? 그렇다면 이 의는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얻는 '생명'이며, 믿음으로 얻는 '예수'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합니다.
그 중요성의 복성을 보십시오. 영원한 복음을 내포한 세 천사의 기별이고, 늦은비 성령을 수반하는 기별이며,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기별이자, 모든 오류들을 일소시키는 기별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오류가 많지요? 진리가 하나라면 오류는 아흔아홉 개입니다. 그런데 이 오류들이 다 진리와 비슷합니다. 이 아흔아홉 개의 오류를 우리가 일일이 연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만 연구하면 됩니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만 우리가 잘 깨달으면, 모든 오류가 그냥 한눈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며 용을 분노케 하는 기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별이고, 사단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되는 기별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현대 기별인 이유, 이 시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곧 법령이 세워질 것입니다. 일요일 휴업령이라는 신상에게 절하면 살고,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들어가는 현실적인 위기가 닥칠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무리는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서 구속을 받을 14만 4천 명입니다. 그들에게 일요일 법령이라는 엄청난 창수가 올 것이고, 이어서 야곱의 환난이 닥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환난들을 스데반처럼 단순히 감정적으로 참아서 통과하는 게 아닙니다. 돌을 던지는 사람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가 하는 짓을 알지 못하니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진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를 죽이는 사람을 100% 사랑해서 그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상태, 이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경험하고 이것을 간직해야만 마지막 시대를 넉넉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살아서 구원받는 사람은 100%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경험한 사람뿐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현대 기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처럼 그리스도의 의가 가슴속에 있기 때문에 자기를 돌로 죽이는 자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참으면서 '미워하지 말아야지' 하고 견뎌서 하늘나라에 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마음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일요일 법령과 야곱의 환난을 살아서 통과할 사람들의 필수 경험입니다. 그래서 예언의 신에서도 이를 현대 기별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큰 흔들림이 이미 시작되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진리를 위하여 담대하고 확고부동하게 서기를 거절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사업을 위하여 즐겨 희생하지 않는 자들은 흔들림을 당하게 되고 떨어져 나갈 것이다"
흔들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사단은 오류와 거짓 기별을 가지고 우리를 흔듭니다. 이때 흔들려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있습니다. 물론 다시 돌아올 기회가 있겠지만, 한번 떨어져 나가면 돌아올 기회가 참 희박합니다. 왜냐하면 그 귀에는 이미 거짓 이론으로 중독되었기 때문에 어떤 바른 기별도 잘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 이론으로 흔들리는 두드러진 현상인 양극단을 좀 보겠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저는 요런 극단적인 현상만 한 32년을 나름대로 연구했습니다. 이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첫째는 율법주의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힘으로 율법 준수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을 '행함의 의'라고 합니다.
둘째는 자유주의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율법 준수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대속주이실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것은 '추상적인 의'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율법 준수가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대답하기 힘드시죠? 가능하다 하면 율법주의로 흐르고, 불가능하다 하면 자유주의로 흐르기 쉽습니다. 틀림없이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율법 준수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만 하늘에 가게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 준수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아멘!',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로는 '가능하다, 아멘!' 요렇게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주의'입니다. 현재 재림교인들의 최대 위기는 이 양극단 현상에 휘말려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 노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은 안 해도, 마음의 심리를 들여다보면 다 이 양극단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율법주의는 '모본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시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모본을 강조합니다. 반면 자유주의는 '대속파'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으니 예수가 필요하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는 대속만 강조합니다. 복음주의는 이 둘을 아우르는 '중용파'입니다. 지금 도로에 3차선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피차에 넘어갈 수 있는 점선(분리선)이 있어서 모본파에서 대속파로 갔다가 중용파로 올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 고착되면 자유주의 노선이나 율법주의 노선으로 완전히 빠져버려 복음주의의 길이 없어져 버립니다. 여러분, 이런 현상이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대속주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모본이십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과 모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두 기둥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대속이 무엇이고 모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를 위한 완전한 모본입니까, 아니면 대속입니까? 대부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대속입니까, 모본입니까?
다음 두 보기 중 바르게 표기된 것을 고르는 시험을 보겠습니다. 어제 한 시간 동안 강의를 들으셨으니 이 시험에 합격하셔야 합니다. 20초 동안 시간을 드릴 테니 어떤 게 맞는지 보십시오.
1. 생애 = 모본 / 십자가 = 대속
2. 생애 = 대속 / 십자가 = 모본
1번이 맞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 들어 보세요. 2번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손 들어 보세요. 2번을 선택하신 분은 소수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진리에는 소수가 중요합니다. 대다수는 1번에 휩쓸려 갑니다. 여러분, 2번이 맞습니다. 우리는 다 1번 사상에 젖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대속이고 예수님의 생애가 모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2번이 맞습니다. 오늘 제가 이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잘못된 인식 때문입니다. 이게 가장 치명적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경험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이 두 기둥인 모본과 대속의 위치가 바뀌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왼발 신발과 오른발 신발이 있지요? 신발을 거꾸로 신으면 어떻습니까? 일단 발이 불편하고 남들이 보기에 이상합니다. 신발을 거꾸로 신는 것은 어린아이들입니다. 어른들은 거꾸로 신지 않지요. 그런데 영적으로 우리가 다 신발을 거꾸로 신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모본이고, 예수님의 생애가 대속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우리를 위한 완전한 모본으로만 보고 '모본은 따라 하는 것'이라며 내 힘으로 성령의 능력을 빌려 따라 하려 하는 사상을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하며, 이것이 율법주의이고 '극좌'의 노선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를 위한 완전한 대속으로만 치부하고 내 삶의 변화를 무시하는 사상을 모조 믿음의 의라고 하며, 이것이 자유주의이고 '극우'의 노선입니다.
참된 복음주의(중도)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의 생애가 우리를 위한 완전한 대속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완전한 모본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주의적인 믿음의 의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평생의 생애가 바로 '대속'이고, 십자가가 '모본'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완벽한 생애 자체가 단순히 우리가 따라 해야 할 모본이라면, 우리 힘으로 예수님처럼 살 수 있습니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 똑같이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철저한 절망을 깨달아야만, 비로소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재창조될 수 있다는 원리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답이 있기 때문에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이 두 기둥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대야겠지요. 왜 생애가 대속이고 십자가가 모본입니까? 예수님의 생애가 우리를 위한 완전한 대속(대신함)이 되는 성경적 근거는 로마서 5장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이 의의 한 행동과 순종하심을 왜 하셨습니까? 어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그렇게 순종하며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대신 그렇게 사셔서 완성된 품성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를 어디서 이루셨습니까? 평생의 생애 속에서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순결한 생애는 우리의 완전한 대속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아, 예수님이 그렇게 거룩하게 사신 것은 단순히 나보고 똑같이 흉내 내며 따라오라고 하신 게 아니라, 너희는 죄로 망가져서 그렇게 살 수 없으니 내가 대신 살아서 완벽한 품성의 옷을 완성해 주겠다. 너희는 이 완성된 품성을 선물로 받아야만 살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완전한 모본이 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맞습니까? 이것이 모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모본이라 하고, 그분의 생애는 우리를 위한 대속입니다. 오늘 주제는 예수의 생애가 우리를 위한 완전한 대속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첫째 아담의 불순종과 범죄로 인하여 내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맞죠? 그렇다면 아담은 나의 모범자입니까, 아니면 '대범자(대신 범죄한 자)'입니까? 대범자는 내 대신 범죄를 저질러서 나를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 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만든 용어입니다. 아담이 대범자입니까, 모범자입니까? 우리가 아담이 선악과 먹은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해야만 죄인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담이 내 대신 이미 죄를 지어서 인류의 영적 유전자를 다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대범자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죄를 짓기 전에도 이미 아담 덕분에 넉넉한 죄인의 신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순종과 의의 한 행동으로 인하여 내가 의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가 나의 모본주입니까, 대속주입니까? 대속주이십니다. 맞습니까? 아담의 범죄한 생애가 나를 죄인 되게 한 것처럼, 예수님의 의로운 생애가 나를 의인 되게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우리를 위한 완전한 대속이라는 이 개념을 명확히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율법주의적 사고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스스로 의를 짜내어 따라 할 수 없기에 그분이 나 대신 생애를 사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율법주의가 깨집니다.
그때 우리가 누리는 두 번째 특권은 무엇이냐 하면, 비로소 '온전한 율법 준수'가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요? "우리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예수님처럼 해보자!"라고 출발하는 사람은 100년, 1000년, 만년을 노력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나는 내 힘으로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라는 절대적 무능력을 인정하고 출발해야, 비로소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전적인 의가 필요 없고, 그저 성령의 보조적인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핵심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은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가 효과적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수술하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바다 모래는 온 세상의 세력을 뜻합니다. 용이 분노하여 마지막 남은 무리를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지막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온전히 드러나면, 여기저기서 이 진리를 경험한 진짜 백성들이 일어납니다. 이들이 남은 무리입니다. 교회라는 조직도 중요하지만, 진짜 남은 무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용이 특별히 남은 무리를 공격하는 이유는, 이 남은 무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안식일을 토요일로 지키는 외식적 차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즉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용이 분노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게 만드는 진짜 기별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우리 모두 계명을 지키고 싶고 이웃을 사랑하고 싶지요? 하지만 아무리 모본으로 삼고 흉내 내려고 해도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선 대속, 후 모본'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생애가 내 대속임을 경험해야, 비로소 그분을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사단이 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그토록 싫어할까요? 선악의 대쟁투의 근본 원인이 바로 '율법'에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 때문에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죄를 짓기 전, 피조물 천사들이나 우리 시조에게 과연 율법 준수가 가능했습니까? 예언의 신에 증명되어 있습니다.
"영생을 얻는 조건은 지금도 옛날 낙원에서 우리의 시조가 타락하기 전과 똑같으니 곧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는 완전한 의가 요구된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품성을 이룰 수가 있었다"
아담은 타락 전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인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타락한 본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단의 근본적인 공격 내용은 '율법 폐기론' 또는 '율법 수정론'입니다. 사단은 자신이 율법을 범한 핑계를 하나님께 댑니다. 루스벨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나를 만든 분이 누구인가? 하나님이시다. 율법을 만든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저 내 본성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인데 나보고 율법을 범했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율법을 너무 까다롭게 잘못 제정하셨든지, 아니면 나를 애초에 잘못 만드셨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사단은 온 우주 앞에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나는 너무 억울하다. 인간이나 피조물은 하나님의 율법을 결코 지킬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율법을 고치거나 폐기해야 한다." 이것이 대쟁투의 시작입니다.
법정에서는 증인이 매우 중요하지지요? 사단의 이 교묘한 말에 동조하여 하늘 천사의 3분의 1이 사단의 증인석에 앉았습니다. 이어서 아담과 하와까지 범죄함으로 사단의 증인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엄청나게 힘을 받았겠지요? "봐라, 하늘 천사들도, 에덴의 아담과 하와도 율법을 못 지키지 않느냐? 그러므로 율법은 지킬 수 없는 것이니 폐기해야 한다." 온 우주는 엄청난 의혹의 소용돌이 속으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이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이 지구가 대쟁투의 무대가 된 것입니다. 원래 아담과 하와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우주에 보여주어야 했는데 실패하여 사단의 증인석에 앉아버렸으니, 하나님 편에서는 굉장히 불리한 재판이 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재판을 해결할 유일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피조물의 처지로 오셔서, 과연 피조물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를 온 우주 앞에 증명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온전히 지켜내시면 사단의 말이 거짓말임이 판명되는 것이고, 만약 예수님마저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공의에 문제가 생기는 중대한 우주적 재판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지구 주민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 온 우주 거민들을 위한 우주적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과연 어느 정도의 불리한 처지로 오셔야 루스벨의 주장을 완벽하게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입장이 명확하지 않으면 사단은 또 핑계를 댈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신성을 가진 창조주이시니 지키신 것이지, 나 같은 피조물이 어떻게 똑같이 지킵니까?"라고 말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예수님이 어떤 입장으로 오셔서 율법을 지키셨는지를 사단이 아주 예리하게 주시했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 이 부분이 신학적으로 늘 논란의 중심이 됩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올바르게 깨닫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한쪽은 율법주의로 빠지고, 다른 한쪽은 자유주의로 빠지는 양극단으로 가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은 우리보다 훨씬 탁월하고 죄의 영향이 전혀 없는 아담의 타락 전 상태로 오셨다"라고만 주장하면, 우리 죄인들은 "그러니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라며 자유주의로 빠집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우리 죄인과 완전히 똑같은 조건으로 오셨다"라고 주장하면, "그러니 내 힘으로도 똑같이 노력해서 따라 할 수 있다"라며 율법주의로 빠집니다.
주님께서는 타락하고 고통당하는 인간의 본성, 즉 죄로 인해 연약해진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짊으신 그분은 거룩한 공의의 진노를 견디시고 그대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이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완전히 똑같은 인성을 취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신의 핵심적인 균형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된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해진 인성'을 취하셨다고 강조합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체를 지닌 형제이시지만, 우리와 '같은 성향'을 가지지는 않으셨습니다. 흠 없는 분으로서 그분의 본성은 악과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본성과 우리 죄인의 본성은 다릅니다. 우리 죄인은 악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문자 그대로 똑같이 흉내 내어 따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못 따라 하는 것은 우리의 유전적 한계이므로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진짜 모본이 되려면 예수님이 역사상의 모든 악인들의 유전자, 즉 알코올 중독, 니코틴 중독, 잔인한 성향의 유전자를 다 지니고 태어나셔야만 모든 인류의 완벽한 모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 경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동거하기 전이라는 것은 요셉의 정자와 마리아의 난자의 결합에 의한 인간의 유전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처녀가 잉태했다는 것은 남자의 유전자가 개입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인간의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법적인 계보는 취하셨지만, 생물학적으로 아담의 악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들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자궁이라는 방만 빌리셨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침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지만, 그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생물학적 유전자를 받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모든 인류는 마귀의 영적 종자(죄된 본성)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주님은 인성을 쓰셨으며 인성이 시험당하는 모든 점에 시험을 당하셨다 주님은 죄를 범하실 수도 있으셨고 타락하실 수도 있었지만, 한 순간도 주님 속에는 악의 성향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담이 에덴에서 유혹자에게 공격을 당하였던 것처럼 주님도 광야에서 공격을 당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오해할 여지가 있는 모든 질문들은 피하도록 하라 그리스도에게 부패의 흔적이나 성향이 존재했다든지 혹은 그분이 어떤 면으로 부패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남겨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죄의 성향이나 부패의 흔적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와 완전히 똑같은 조건의 모본으로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은 죄의 정의를 바꾸어 버립니다. "죄는 선택이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자기가 선택하여 행동으로 옮겨야 죄다. 그러므로 갓난아이는 죄인이 아니다." 이렇게 죄의 개념을 변질시킵니다. 예수님을 모본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분들의 동기는 순수합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닮고 싶은데 예수님이 나랑 조건이 다르다 해버리면 닮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출발은 좋았으나 방법의 선택이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변화되는 데 있어서, 내가 예수님과 똑같은 생물학적 모본의 위치에 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 길은 가능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떤 인성으로 오셨는지를 신학적 논쟁으로 구분하려 하면 끝없는 전쟁이 됩니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 싸움은 승부가 나지 않습니다. 한쪽은 자기 주장만 연구하고 다른 쪽은 자기 노선만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평신도인 제가 보기에, 어떤 인성으로 오셨는지를 논쟁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라는 목적을 통해 역산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고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정확히 이해하면 어떤 인성으로 오셨어야 했는지 답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인성을 쓰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히브리서 2장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1. 마귀를 멸하는 것 (우주적 회복)
2. 죄인을 구원하는 것 (지구적 회복)
마귀를 멸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이 왜 굳지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 했을까요? 그냥 신성의 능력으로 멸하시면 안 됩니까? 사형수를 처형할 때도 법적인 심사와 절차를 거쳐 본인의 죄를 온 천하에 드러낸 후 집행해야 공의롭습니다. 마귀가 스스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온 우주가 그 처형에 동의하게 만들려면, 예수님이 연약한 인성의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히 지켜 승리하는 생애를 우주 앞에 보여주셔야만 했습니다. 사단이 "피조물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우주에 제기한 소송을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 사단은 인류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선언하며, 이 신념을 온 우주에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단의 말은 겉보기에 사실처럼 들렸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기만자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사단의 증인 노릇을 하는 바람에 사단이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대주제이신 주님께서는 인간의 사건을 책임지셨으며,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동일한 연약한 조건들을 지니시고 사단의 시험들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이기적인 조항으로 왜곡하고 순종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시조의 타락과 모든 재난의 책임을 조물주에게 지우고, 하나님을 죄와 고통과 사망의 창시자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만을 폭로하러 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사단의 거짓말을 반박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단의 거짓말을 반박하는 목적 하나만 충족시키려면 예수님은 아담의 타락 전 본성을 가지고 오셨어도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루스벨은 아담보다 훨씬 탁월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담의 타락 전 본성이 아니라, 4천 년간 죄로 인해 연약해진 죄인의 육신의 모양을 빌려 오셨다는 점에 바로 우리 죄인들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단이 말한 '지킬 수 없다'는 주장을 완벽히 반증하여 성취하셨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 사단의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났고, 죄의 책임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에게 있음이 폭로되었습니다. 이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에 대한 사형 언도이자 심판 판결문입니다.
그때 사단은 하늘 총회에 참석하던 우주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지구라는 감옥에 딱 갇히게 되었습니다. 교도소에 죄수들을 가두는 것처럼, 이 지구는 우주의 사형수들이 갇혀 사는 감옥인데 주님께서 사단을 이 감옥에 가두신 것입니다. 원래는 첫째 아담이 지구의 대표자였는데 사단에게 사기를 당해 대표권을 뺏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둘째 아담으로서 그 자격을 다시 뺏어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의 우주적 의미입니다. 지구라는 영토의 대표권은 찾으셨지만, 여전히 지구 거민들의 마음속에는 사단의 본성이라는 보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 확정 단계가 필요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선언 이후 사단은 더 이상 하늘 공정에 올라가 천사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형제들을 고소할 수 없게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단 자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단은 이미 실패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사단의 본성'입니다.
사단을 감옥에 가두는 우주적 해결(1번)을 하신 후, 우리 안에 있는 사단의 본성을 추방하는 죄인 구원(2번)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다면 그대로 바로 승천하셔야지, 왜 굳이 비참한 십자가로 가셨을까요? 이게 핵심 키워드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키신 후 사단에게 "네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라고 입증하셨습니다. 우주적 문제를 끝내셨다면 바로 하늘로 가셔도 되는데, 사단의 영향을 받아 마귀 형상으로 죽어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이 땅에 놔두고 가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셨는데, 십자가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너희도 나 봤지? 나처럼 똑같이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지킨 거니까 너희도 똑같이 흉내 내며 따라 해라. 내가 하늘에 가서 성령 보내줄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너희는 죄로 타락해서 내가 산 것처럼 결코 따라 할 수 없다. 결코 흉내 낼 수 없다. 내가 생애를 통해 보여준 거룩한 삶은 너희보고 똑같이 따라 하라고 보여준 게 아니라, 사단 보라고 보여준 것이다. 너희는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평생 거룩하게 살아서 완성해 놓은 나의 '의의 품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완성된 의의 옷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생명과 의를 우리에게 쏟아 주신 것입니다. 이 원리를 깨닫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문자적 모본주가 아니라 전적인 '대속주'이십니다. 우리가 결코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의의 완성품을 선물로 주시려고 십자가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생애는 우리를 위한 행함의 모본이 아니라 완벽한 '대속'입니다.
"율법은 의, 즉 의로운 생애와 완전한 품성을 요구하지만 인류는 그 요구에 미칠 수 없다 인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지상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개발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받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
예수님의 생애를 그저 우리가 힘써 따라 해야 할 모본으로만 여겨서 내 힘으로 예수님을 흉내 내려고 하는 율법주의적인 정신은, 예수님이 완성하신 십자가의 대속을 가장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따라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고생하며 의를 완성하실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며, 십자가는 헛된 것이 되어 버립니다.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최대의 적이며 바울이 그토록 경고한 '다른 복음'입니다. 구원에 무언가 내 행위를 보태려고 하는 시도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과 행위는 의를 스스로 제조해 내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이 완성하신 의를 '믿음으로 선물 받는 행위'일 뿐입니다.
내가 빚이 1조 원이 있는데 부자 삼촌이 그 빚을 다 갚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100만 원을 삼촌에게 내밀면서 "삼촌, 내 힘도 보태서 빚 갚았어요"라고 한다면 삼촌 기분이 좋겠습니까? 예수님은 구원의 의를 80%, 90%만 이루신 게 아니라 100%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아멘. 예수님을 내 힘으로 따라 하려고 애쓰는 율법주의적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진짜 따라 해야 할 영역은 내일 다룰 '자복하기', 즉 '마귀의 본성을 사용하지 않고 굴복하는 영역'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의 완전한 대속이고, 십자가가 자아를 죽이는 우리의 완전한 모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의를 선물로 받으면, 우리는 그 의를 밑천 삼아 또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 의 자체가 이미 율법을 완벽히 지켜 놓은 '완성품 품성'입니다. 십자가의 강도가 무슨 율법을 지켰습니까? 아무것도 못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를 전가받는 순간, 평생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완벽한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목적은 내가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의를 받은 상태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율법과 완벽히 일치되어 하나님과 조화되는 상태입니다. 로마서 10장 4절의 말씀을 복음적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주시기 위하여 완전한 품성을 개발하여 마침이 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 머리를 숙이셨을 때 그분은 자신의 인간의 팔로 인류를 감싸시고 한편 그분의 신령한 팔로는 무한하신 분의 보좌를 붙잡으셨다."
이 말씀의 의미를 시각적인 비유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초과되지만 오늘 안식일이고 귀한 기별이니 조금만 더 집중해 주십시오. 원래 같으면 저는 식사 시간도 미루고 계속 말씀하셨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과거 율법주의 속에서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에 이 믿음의 의의 진리가 너무나 갈급했기 때문입니다.
이 도표의 그림을 보십시오. 전신주에 고압선이 흐르고 '변압기'가 달려 있습니다. 전신주의 전기 전압은 22,900V의 엄청난 고압입니다. 이 고압선이 변압기를 거쳐 가정집으로 들어올 때는 우리가 사용하는 220V로 전압이 낮추어집니다(다운됩니다). 만약 22,900V의 고압 전류가 변압기 없이 바로 가정집으로 들어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안의 모든 가전제품은 순식간에 다 타버리고 집도 불타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기가 막힌 복음의 예화입니다. 여기서 22,900V의 고압 전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와 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변압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가정집은 '우리 죄인들'입니다. 타락한 죄인이 하나님의 불꽃 같은 절대적 의의 전류를 직접 받으면 그 거룩한 공의 앞에 살아남지 못하고 다 타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의 고압 전류를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대신 받아내셔서 전압을 낮추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안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220V로 다운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팔로는 하나님의 보좌(22,900V 고압선)를 잡으시고, 다른 한 팔로는 인류(220V 가정집)를 감싸 안으신 변압기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무한 발전소는 하나님이시고, 변전소와 변압기는 예수님이시며, 계량기와 트랜스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의는 고압선이고, 예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맞게 전가해 주시는 변압기이십니다. 이것이 삶 속에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예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저에게 아주 잘생긴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는데, 제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잘생겨 보였습니다. 이 아이를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키우고 싶어서 날마다 새벽마다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물을 마시는 좋은 건강 습관을 길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침에 미지근한 물을 주면 자극성이 없어서 잘 안 먹으려고 합니다. 억지로 먹이려고 하면 싸움이 됩니다. 그래서 새벽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이 아침에 따뜻한 물을 기쁘게 마실 수 있도록 그 마음에 선한 감동을 주십시오." 기도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는데 세 살쯤 된 아들이 눈을 비비며 나오더군요. 그날 아침에 예수님의 의가 변압기처럼 제 안에 임했습니다. 220V의 부드러운 사랑의 전류가 흐르는 마음으로 아들을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아들아, 너무 사랑한다. 태어나 주어서 고마워." 진심 어린 사랑으로 안아주었더니, 이 품에 안긴 아들이 잠시 후 제 얼굴을 보며 먼저 말했습니다. "아빠, 물 주새요." 그 전에는 물 먹으라고 소리 지르고 싸웠는데, 아이가 먼저 물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따뜻한 물을 주었더니 단숨에 벌컥벌컥 다 마셔버렸습니다.
이 아이가 물을 기쁘게 마실 수 있었던 마음의 힘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영적 노선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빠의 사랑의 품에서 왔고, 아빠의 마음은 변압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서 공급받았으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고압선에서 받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실제적인 역사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순종과 의로운 행위는 스스로 의를 제조해 내는 독립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 완성하신 의의 전류를 내 인생에 받아들이는 연결 행위일 뿐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구원의 의를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는 순간, 예수님의 대속과 십자가는 나에게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내 힘으로 의로워지겠다고 착각하며 행하는 '율법주의적인 착한 일'입니다. 내 힘으로 착한 일을 아무리 많이 해봐야 '착한 죄인'밖에 안 됩니다. 여러분은 '착한 죄인'이 좋습니까, 아니면 '악한 의인'이 좋습니까? 비유가 조금 극단적이지만, 십자가의 강도는 세상 기준으로는 악인이었으나 예수의 의를 받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니고데모는 세상 기준으로 가장 훌륭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나 거듭나지 못했을 때는 그저 '착한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우리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내 인내심을 쥐어짜고 예수님의 생애를 흉내 내어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히 지킬 수 있습니까? 지킬 수 없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저는 과거에 이 말씀에 완전히 속았었습니다. 말씀이 저를 속인 게 아니라 제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여기서 '능력 주시는 자'를 그저 내 수고를 도와주시는 성령의 힘으로만 오해했었습니다. 성령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능력 주시는 자는 구원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 지성소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여 내놓으신 그 신성한 생명과 의의 능력을 우리에게 통째로 주신다는 뜻입니다. 능력(다이너마이트)의 주체는 예수님이 완성하신 의입니다. 그 의를 물려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 당신이 완성하신 그 완벽한 의를 저에게 선물로 주시옵소서"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지성소에서 그 의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려고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스스로 무언가 선한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동형 죄인'으로 훈련시키지 않으십니다. 자꾸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빌려 내가 주체가 되어 무언가를 해내려고 합니다. 성령의 진짜 사역은,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철저한 '수동체의 죄인'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제발 폼 잡지 말고 굴복해라. 너의 무능력을 깨닫고 오직 예수의 의만 붙들어라" 하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통해 내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철저한 절망을 깨달아야 비로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무릎 꿇은 죄인의 상태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최고의 장소에 이른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그저 우리가 힘써 도달해야 할 모본주로 간주하라는 뜻이 아니라,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완벽한 '대속주'로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신의 성품을 나눠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의의 표준 곧 그분의 거룩한 율법에 일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려면 '신의 성품(그리스도의 의)'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신의 성품을 제조해 내는 게 아니라 나눠 받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되니까 성령의 능력을 빌려서라도 내가 직접 신의 성품을 만들어 보겠다고 덤비는 신앙이, 가장 고단수의 무서운 율법주의입니다. 인성이 신성과 결합된다는 것은 내 노력에 능력이 더해지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완벽한 신성과 내가 믿음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인성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품성을 이루셨고 이 품성을 우리에게 통째로 나누어 주십니다.
이 말씀들을 늘 명심하여 마음에 간직해야 율법주의적인 모본 기별이 우리 마음에 침투할 틈이 사라집니다. 틈만 나면 우리는 내 힘으로 예수님을 따라 하려고 거꾸로 신발을 신습니다. "성령 하나님, 저에게 역사하셔서 저도 예수님처럼 착하게 살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주님, 저는 제 힘으로 결코 거룩하게 살 수 없는 영적 시체입니다. 그러므로 저에게는 오직 지성소에 있는 예수의 완벽한 의가 필요합니다. 그 의를 갈망하는 마음을 주시고, 내 죄된 자아의 현주소를 깨닫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올바른 역사입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신앙의 기초가 되는 원칙을 잘 배워야 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들의 생애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들의 품성이 되게 하라"
이 아름다운 말씀도 모본주의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면 "아, 나도 예수님처럼 거룩한 생애를 열심히 살아서 품성을 만들어야겠구나"라고 인간의 행위로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인 '대속의 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완벽한 생애와 품성을 선물로 받아 내 계정에 두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타락한 품성을 조금씩 수리하고 개선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이기적인 자아 품성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아 죽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의 생명을 주입하시고 이식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과거에 23년 동안 기도를 거꾸로 했습니다. "나는 내 친구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으니,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신 성령이시여, 제발 제 안에 들어오셔서 친구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좀 주십시오"라고 밤마다 새벽마다 매달렸습니다. 12살 때부터 새벽 4시에 제단 앞에 나가 23년을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를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에는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하고 신앙적인 반항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설프게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제가 친구를 사랑하는 행위를 해냈다면, 저는 "너희들 봤지? 나처럼 새벽 4시에 기도하고 금식해라" 하고 남들을 정죄하는 세상에서 가장 거만하고 고단수인 루스벨(마귀)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 완전히 안 되게 막으신 것입니다. 철저히 바닥을 치고 절망하게 하신 후에야 비로소 진짜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전적인 의가 무엇인지를 가슴 깊이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23년의 세월이 긴 것 같았지만 진짜 복음을 깨닫고 나니 한순간이었습니다.
그 경험 이후 저의 기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성령이시여, 내 비참한 자아의 현주소를 날마다 깨닫게 해 주십시오. 마귀 형상을 조금씩 고쳐서 개선해 보겠다는 종교적 진화론 사상에서 나를 부수어 주시고, 나는 철저히 죽고 내 안에 오직 예수의 완벽한 생명과 의가 이식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갈망입니다. 이 갈망조차 성령이 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우리가 힘써 도달해야 할 문자적 모본으로 삼는 것은 율법주의(행함의 의)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생애가 우리를 위한 완벽한 '대속'임을 믿는 것이 진짜 복음주의(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나를 위한 완벽한 대속임을 처절하게 경험한 자라야,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아를 죽이는 참된 모본으로 삼아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 대속, 후 모본의 원리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굳건한 두 기둥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변경할 필요가 없을 만큼 완전하므로 죄악적인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표준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구속주로 오신 이유였다 예수님의 사명은 사람들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만들어 하늘의 율법의 원칙과 조화되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순히 추상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누군가 저에게 "장로님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대한민국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맞지만 명확하지 않은 추상적인 대답인 것과 같습니다. 적어도 "청송군 진보면 신량리에서 왔습니다"라고 구체적으로 대답해야 정확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땅에 인성으로 오신 이유: 우리가 지을 수 없는 완벽한 의의 품성을 친히 '만드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비참한 십자가로 가신 이유: 그 완성된 의의 옷을 우리 죄인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시기 위해' 가셨습니다.
장차 재림하시는 이유: 그 의를 전가받아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알곡 백성들을 '추수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이렇게 구체적인 의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신앙의 경험이 빗나가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묻어 버리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을 위해 대신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분은 2천 년 전에 이미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고난을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 밖에서 완전한 의를 완성해 놓으셨습니다. 그분의 완벽한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도 또 모본주의 본성이 발동하여 "아, 예수님이 승리하셨으니 나도 내 힘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승리해야지!"라고 거꾸로 읽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평생 땀 흘려 100조 원의 자산을 모아 놓았다면, 자녀가 해야 할 일은 그 돈을 버는 기술을 새로 연마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상속해 주시는 자산을 감사함으로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라는 영적 대자산을 상속받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유일한 세금(취득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비참한 '마귀의 형상'과 '죄'입니다. 자아의 죄를 슬퍼하며 주님 앞에 고스란히 내어놓는 자에게, 주님은 당신이 완성하신 거룩한 의를 통째로 교환해 주십니다. 이 놀라운 교환과 상속의 원리를 깊이 명상하시고, 내 안의 행위를 의지하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채 오직 지성소 예수님의 완벽한 의만 붙드시는 복된 경험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바라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내일 이어서 구체적인 자복의 영역을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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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요약 정리]
1. 진정한 안식과 복음의 진리
참된 자유와 안식은 인간이 멸망하는 데 내 개인의 죄가 보탤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충분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반대로 구원을 얻는 데 내 개인의 행위나 노력이 0%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절대적 사실을 가슴으로 깨달을 때 찾아옴. 이 완전한 구원의 법칙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함.
2. 사단의 함정과 현대 교회의 양극단 위기
사단은 마지막 시대의 현대 방주이자 필수 경험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변질시키기 위해 유사한 거짓 이설(다른 복음)로 교회를 흔듦. 이로 인해 교회가 직면한 양극단의 위기는 다음과 같음:
율법주의 (모본파): 인간의 힘으로 율법 준수가 가능하다고 믿으며 예수님을 오직 '모본'으로만 강조함 (행함의 의 / 자기 행위).
자유주의 (대속파): 율법 준수는 불가능하니 예수님의 용서만 믿으면 된다고 안주함 (추상적 의 / 가짜 믿음).
참된 복음주의는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나 그리스도의 의로는 완벽히 가능하다"고 고백하는 중용의 신앙임.
3.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두 기둥: 생애(대속)와 십자가(모본)
예수님의 생애 = 우리의 완전한 대속: 예수님이 33년 반 동안 이 땅에서 온전한 순종으로 거룩한 생애를 사신 본질적 목적은, 우리가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대신 순종하셔서 '완전한 품성의 의의 옷'을 완성(개발)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전가해 주시기 위함임. 예수님의 생애를 내가 노력해서 흉내 내야 할 모본으로 삼는 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최대의 율법주의적 오류임.
예수님의 십자가 = 우리의 완전한 모본: 우리가 주체적으로 자아를 부인하고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영역이 바로 참된 모본의 영역임. '선 대속, 후 모본'의 순서가 올바르게 서야 비로소 참된 성화의 행위가 나타남.
4. 성육신의 목적과 변압기 비유 (재창조의 복음)
예수님이 아담의 타락 전 상태가 아니라 4천 년간 죄로 인해 연약해진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목적은, "피조물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단의 우주적 소송을 완벽히 반박하여 사단을 법적으로 심판(지구 감옥에 구금)하기 위함이었음. 동시에 우리 죄인들에게 '의의 완성품'을 상속해 주시기 위함이었음.
변압기 비유: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는 22,900V의 고압선과 같아서 죄인이 직접 받으면 타 죽음. 예수님은 한 팔로 하나님의 보좌를 잡고 다른 팔로 인류를 안으시어, 그 고압의 의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220V의 부드러운 사랑의 의로 전압을 낮추어(다운시켜) 전가해 주시는 영적 변압기이심.
성령의 진짜 사역은 우리를 무언가 해낼 수 있는 능동형 죄인으로 고쳐 쓰시는(종교적 진화론)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체임을 깨닫게 하여 자아를 죽이시고, 지성소에 보관된 예수의 완벽한 신성과 품성의 심장을 우리 안에 통째로 이식하시는 '재창조(수술)'를 행하시는 것임.
그리스도의 의를 상속받기 위해 인간이 지불해야 할 유일한 세금은 내 안에 있는 '마귀의 형상(죄)'을 십자가 앞에 온전히 내어놓고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선물로 취하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