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신앙 / 김대성 목사
신앙생활이 쉬워요, 어려워요? 신앙생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신앙생활을 어디에 비유하는가 하면, 흐르는 물을 역류해서 헤엄쳐 올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흐르는 물을 거슬러서 헤엄치는 거예요. 흐르는 물을 거슬러 헤엄칠 때 에너지가 들어가는데, 흐르는 물에는 속도와 힘이라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만약 흐르는 물의 힘과 똑같은 힘만 쓰며 수영을 하면 제자리에 있게 됩니다.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흐르는 물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동시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으면 그대로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을 하면서 부단히 영적인 투쟁과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냥 세상으로 휩쓸려 가게 됩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그냥 세상으로 가는 거예요. 적당히 믿으면 그냥 제자리에 머물 뿐, 절대로 변화나 성장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일반 전도회와는 좀 다르게 예언 세미나로 하지 않고, 실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에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결론은 흐르는 물을 역류해서 올라가는 사람이 살아남는 것입니다. 비유로 하자면 그렇습니다.
어제 보았던 성경 구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은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그저 예수 믿고 "믿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증거가 무엇이냐? 바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구원받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핵심입니다. 결국 이 세상 종말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후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을 데려가십니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종말에 살아남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번의 주제는 대체로 이 종말에 살아남는 자들의 특성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성경에 예언된 인류의 역사'라는 주제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 깊은 원리와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이 역사를 통해 어떤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진행되고 완성되느냐 하는 성경 전체의 흐름을 예언을 기초로 하여 역사 전체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하늘의 형상을 회복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는데, 이번에 이 제목에 그려진 그림들이 상당히 의미를 줄 수 있도록 구성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는 것이 무엇이냐? 원래 저 왼쪽에 있는 그림처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인해 저 오른쪽에 있는 그림처럼 죄 때문에 좀 불쌍하고 죄인스럽게 바뀌었습니다. 신앙의 목적은, 비록 꼭 예수님의 본래 모습이 저런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 방향을 잃어버리면 신앙은 분명히 다른 곳으로 빛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제 마지막 부분에 보셨던 이 공회전 역사를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인간이 창조된 이후로 인간은 영원히 살도록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이 영원이라는 시간 선상을 벗어나 이제 헛바퀴를 돌게 되었습니다. 이 영원이라는 시간을 벗어난 상태를 신학적으로는 '비존재', '비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존재하지만 존재가 없는 것이고,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생명이 없는 상태로 결국 죽은 자들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 역사에 홍수와 심판이 있었고 바벨탑 사건이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 여자의 혈통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다시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탄생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어 그 바닥에서 종교 암흑시대가 열렸습니다. 이후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종교 개혁을 통해서 개신교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개신교의 끄트머리에 '남은 교회'가 탄생합니다. 이 남은 교회를 박멸하기 위해서 마지막에 사탄이 다시 일으킨 세력은 종교 암흑시대를 지배하던 교황권을 다시 살려낸 것입니다. 남은 교회와 교황권 사이의 마지막 투쟁이 끝나면서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가 확정될 것입니다. 그들을 데리러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 후 천년기가 있고 지구는 재창조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새 하늘과 새 땅,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라고 표현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세상은 창세기에 창조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고, 이제 천년기 이후에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시는 그 땅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인류 역사의 전체 흐름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회복'입니다.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사람이 건강하다가 병이 들었을 때, 병에서 회복된다는 것은 병들기 전의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역사를 한마디로 하면 회복입니다. 처음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재림을 통해 영생이 시작되는 그 과정을 우리는 회복 혹은 성화라고 말합니다.
타락하기 전 인간의 상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입니다.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잘 모릅니다. 교회에 관한 책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불어넣으신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령에 심으신, 즉 창조할 때 불어넣으신 사랑과 동정심은 저 천국에서 가장 참되게, 가장 아름답게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을 때, 사람은 마음속에 깊은 사랑과 모든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인간에게서 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랑과 동정을 훼손하고 거의 말살시켰습니다. 이 말은 부정적인 문장 같지만 이 속에 희망의 단어가 있습니다. '완전히' 말살된 게 아니라 '거의' 말살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속에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그 하나님의 형상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무엇으로 증거되느냐 하면, 여러분이 어디 가서 좋은 일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노인이 수레에 박스를 잔뜩 싣고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는데, 안쓰러워 보여서 뒤에서 밀어주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합시다. 자기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하고 나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기분이 좋습니다. 누가 기분 좋으라고 시키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흡족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세팅해 놓으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며, 이것을 개발하고 다시 살려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을 회복이라고 합니다.
인류를 위한 구원의 계획이 세워지고 유예된 생명이 허락되어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에 기초가 되는 인간의 목적,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인간이 처음 창조받을 그때의 완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목적을 모르고, 목적을 알아도 다른 방향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면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연장시켜 주시며 이 역사가 아직 남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찾아내시고, 그들을 데려가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이고 재림을 기다린다면, 처음 창조받을 때의 완전함으로 돌아가는 그 회복을 위해서 전심을 다해 전진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목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인간이 왜 존재하느냐 하면, 이것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생명을 유예시켜 주신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회복 사업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형성된 품성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내세로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보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획득한 것 중에 하늘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품성뿐입니다. 돈은 아무리 벌어놓아 봐야 예수님 오시면 한 푼도 못 가져갑니다. 집에 금이 아무리 많아도 가져가 봐야 소용없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닥 전체가 금인데 그걸 가져가서 무엇 하겠습니까? 아주 좋은 자동차를 샀는데 일주일도 안 돼서 예수님이 오셨다면 아깝겠지만 못 가져갑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형성된 품성, 즉 사랑과 동정심을 가득 채우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품성을 가진 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하늘에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동정심이 사랑과 자비와 섞이고 예수님의 영으로 성화되면, 그것은 많은 선을 산출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가 됩니다. 자비심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하고 선행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축복할 뿐만 아니라, 참된 자손의 자유로운 감화의 마음을 열므로 그들 스스로에게 유익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돕는 것은 100%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춘 모든 빛의 광선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 도로 반사될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한 모든 동정의 말, 압제받는 자에게 한 모든 행동, 동료 인간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준 모든 선물 등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주거나 행한 것은 모두 준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준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아멘.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이야기라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가 한번은 연합회에서 일할 때 청량리역에 가서 기차를 탈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사택이 있던 서울위생병원에서 택시를 타고 청량리역에 갔더니 택시비가 3,100원이 나왔습니다. 잔돈이 없어서 5,000원짜리를 주었더니 기사님이 1,900원을 거슬러 주어야 하는데 900원이 없으셨나 봅니다. 기사님이 "100원짜리 없습니까?" 하기에 죄송하지만 없다고 하니 2,000원을 거슬러 주셨습니다. 계산상으로 기사님이 100원 손해를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침부터 기사님이 손해를 보시면 되겠습니까" 하고 1,000원을 다시 돌려드렸습니다. 제가 결과적으로 900원을 더 드린 셈인데 기사님이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겨우 900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택시 문을 닫고 나오는데 제 기분이 너무 좋은 것이었습니다. 돈 900원을 더 주고 왜 기분이 좋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에게 베풀고 줄 때 쾌감을 느끼도록 세팅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되찾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아주 편안하고 행복해집니다. 자기 이득만 구하려고 하다가 그것이 안 생기면 불쾌해집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은 행복할 시간이 없습니다. 방금 드린 이야기는 오늘 설교의 굉장히 중요한 핵심입니다.
사람을 다시 하나님과 화합하게 하고 그로 인해 그의 도덕적 품성이 성장하고 고상하게 되어 창조주의 형상을 다시 반영하게 하는 것이 생애의 모든 교육과 훈련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교육의 근본 사상은 창조주의 형상을 반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그토록 중요했기 때문에 구주께서는 하늘 궁전을 떠나 친히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에게 보다 고상한 생애를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시는 것만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고 실제로 본인의 삶을 통해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바로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창조되었을 때의 모습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땅에 사는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그 사역을 세 단어로 표현한 것이 마태복음 4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가르치시며(Teaching)', '전파하시며(Preaching)', '고치셨다(Healing)'의 세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르치신 사역의 예를 들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누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심리를 같이 가라" 같은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전파하신 사역은 요한복음 3장 3절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와 같이 하늘에서 온 메시지입니다. 고치신 사역은 누가복음 5장 13절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처럼 치유하시는 사역입니다.
이 세 단어는 각각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가르치셨다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양심을 깨우는 것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역이었습니다. 깨어지고 갈라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전파하신 것은 인간의 영성과 신앙심을 회복하시기 위함이며,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연결하는 사역이었습니다. 고치신 것은 육체적 회복이며,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전인 회복'이자 '관계 회복'입니다. 이 세 가지 관계를 각각 한 시간씩 말씀드려야 하지만, 오늘은 압축해서 한 번에 정리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러려면 관계가 왜 깨어졌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원인을 알아야 회복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선악과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선악과 때문에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여호와 하나님이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는데,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동산 가장 중요한 중심 자리에 두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악과나무이고 하나는 생명나무입니다.
여기서 잠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가 먹으면 안 되는 과일이라면 잘 안 보이는 구석에 만들어 두시지, 왜 하필 동산 중앙에 갖다 놓으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동산에서 선악과는 먹지 말아야 했지만, 생명과는 먹어야 했습니다. 인간은 자동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과를 먹으면서 영생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실 때 "그들이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주기적으로 계속해서 생명과를 먹음으로 영생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의 조건은 선악과는 먹지 말고, 생명과는 먹으라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시는 모든 말씀의 법칙은 두 가지입니다.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고 하라는 것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생명과일을 먹으러 가면 자동으로 선악과를 보게 됩니다. 왜 생명과를 먹으러 갈 때마다 선악과를 볼 수 있도록 해놓으셨을까요? 그 목적에 대해 증언보감에는 이렇게 답이 나와 있습니다.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유보하셨는데, 이 나무는 하나님이 만물의 소유주이심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생명과일을 먹으러 가서 선악과를 볼 때마다 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상기(리마인드)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망각의 본능이 있어서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셨고 아담과 하와는 지구에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지구의 소유권을 주신 것이 아니라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소유주는 하나님이시고 아담과 하와는 관리자이자 청지기였습니다. 그런데 지구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살다 보면 자기들이 주인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과를 먹으러 갈 때마다 선악과를 보며 창조주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나의 주권자이심을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주권자이자 창조주요 주인이라는 사실을 버린 행위입니다. 그래서 죽은 것입니다. 선악과 자체에 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는 행위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과 분리되는 순간 아담과 하와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다 죽은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주권자이자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순간, 생명과 딱 연결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객관적인 표시는 무엇일까요? 이사야 43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겁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 그러므로 '너는 내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타락하고 버려졌을 때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이중적 소유권을 주장하십니다. 창조를 통해 우리를 만드셨으니 주님의 것이고, 죄 때문에 죽게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살려내셨으니 이중으로 주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이자 내 생명의 주인이심을 양심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생명을 가진 자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가진 모든 시간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내 모든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증거가 바로 '일곱째 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만 하나님의 시간이 아니라 생명과 시간 전체가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인정한다는 증거로 일곱째 날을 구별하여 사사롭게 쓰지 않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한다는 신앙의 고백이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바로 그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여러 곳에 안식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5장 15절에 보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는 앞 문장과 연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죄 된 세상인 애굽 땅에서 구출해 내고 구원했으니, 즉 홍해를 건너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이제 내 백성으로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확한 말씀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그분의 백성이 되었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에스겔 20장 20절에도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알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많은 사람은 이 안식일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창조 시에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자마자 선언되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언약이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안식일을 주셨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었고, 이후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기에 다시 안식일을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이 안식일은 과거 선악과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지금은 선악과가 없으니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8~11절 안식일 계명에 대한 엘렌 화잇의 주석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시험을 당한 것처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시험을 받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선악과가 에덴동산 중앙에 위치해 있었던 것과 꼭 같이, 안식일 계명은 십계명의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선악과 열매에 대하여 "그것을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던 것처럼, 안식일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나무가 아담의 충성을 시험하는 시금석이었던 것과 꼭 같이, 넷째 계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백성의 충성을 증명하도록 하시기 위해 주신 시금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보며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심을 리마인드한 것처럼, 우리는 매 안식일을 맞이할 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나의 생명과 시간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주일을 살면서 안 쉬고 계속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십니다" 하고 다니지는 못합니다. 정신없이 먹고살고 노는 데 시간을 다 써버리며 잊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여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딱 정해 두시고, 일곱째 날이 되면 나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이 세상으로부터 하늘까지 연결되어 있는 징검다리 같은 것입니다. 한 안식일을 딛고 그다음 안식일을 디디며 마침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징검다리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인간이 살아가는 데 두 가지 필수 요소는 생명과 물질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물질을 가지고 생존하며 삽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고 내 소유의 주인이십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일을 해서 돈을 법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수가 나무로 의자를 만들어서 돈을 벌었다고 합시다. 의자를 만든 재료는 나무이고, 나무는 산에서 나옵니다. 산에 있는 나무의 원주인은 누구입니까? 산을 소유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 나무는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산과 땅 모두 원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땅에 선을 긋고 측량하여 네 것, 내 것 하며 사고팔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지구의 땅을 처음 차지한 사람은 하나님께 그것을 훔친 셈입니다. 산을 처음 차지한 사람도 하나님께 훔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훔친 땅을 대대로 사 온 사람들은 작물 취득죄에 해당합니다. 원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물건은 만들 수 있어도 물질 자체는 못 만듭니다. 철로 무언가를 만들었을 때, 그 철이라는 물질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물질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벌어 모은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인정하는 표시가 바로 십일조입니다. 10분의 1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인정한다는 신앙 고백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내실 때 절대로 손을 떨지 마시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 이 물질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인데 저에게 10분의 9나 쓰라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한국의 어떤 개신교 교인들 중에는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구조'를 내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사업에 돈이 모자라거나 가난해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인정하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주시겠다는 것이 그분의 약속입니다.
말라기 3장에 우리가 흔히 십일조 이야기만 하지만 그 앞뒤에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너희가 조상들의 날로부터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았다고 하시며,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돌아오라는 것은 규례를 지키라는 뜻이며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은 끊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자는 하나님의 간곡한 호소입니다. 백성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에게 돌아오는 방법으로 제시하신 것이 바로 십일조와 헌물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내가 만물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나와 관계를 맺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신앙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도 선악과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리서에는 모든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을 종합하여 십일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타락 후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선악과를 통해 시험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온전한 선물의 근원이시며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는 분이심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줄 요소가 여전히 필요했습니다. 당신께서 모든 축복의 근원이심을 상기시켜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헌금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꽤 오래전에 강원도에 사시던 한 신실한 장로님의 실제 경험담입니다. 이 장로님은 비닐하우스를 몇 동 하셨고 씨앗 가게를 주업으로 하셨습니다. 아주 경건한 분이셨는데, 씨앗 가게에서 현금을 주고받으며 장사를 할 때 통을 하나 만들어 두고 씨앗이 매매될 때마다 즉시 십일조를 그 통에 넣으셨습니다. 얼마나 번거로운 일입니까? 하지만 이분은 돈을 만질 때마다, 금전을 다룰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십일조를 넣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면 금요일 일찍 문을 닫고 안식일을 준비하여, 안식일 아침에 그 십일조 통을 들고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안식일에 십일조를 들고 성전으로 향하는 성도의 모습,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분이 그 십일조를 통째로 갖다 내시니 재무 장로님이 "장로님, 이것 좀 세어서 봉투에 담아오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은 "이게 내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셉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속초 지역에 1m가 넘는 폭설이 쏟아졌습니다. 그 지역의 모든 비닐하우스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다 무너졌는데, 오직 이 장로님의 비닐하우스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우연일까요?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겠다" 하신 약속대로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도 평소 그분이 워낙 경건하고 신실하게 살았음을 알았기에, 모두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안식일과 십일조 이 두 가지는 선악과처럼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에 충실할 리가 없습니다.
이제 사람과의 관계 회복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을 진지하게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내 안에는 아직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보여도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제가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70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교회를 다니며 참 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사람들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 심리가 곧 사람의 심리이기에 제 자신을 연구하고 실험하며 살아보니,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자신과 싸우고 투쟁해야 하느냐 하면, 모든 사람을 좋게 생각하고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며, 혹시 불화가 생겼을 때는 즉시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끼리 서로 싸우면 속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그보다 더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자녀로서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번 집회를 지나면서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 모든 사람을 좋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화목하게 지내겠다는 결단을 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계명을 우리는 잘 압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시고,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율법과 선지자'라는 표현은 구약성경 전체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의 원저자이신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전체를 간추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약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의 세부 내용을 다 몰라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면 구약 전체를 아는 것입니다. 반대로 구약성경을 줄줄 외워도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성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가르침입니다.
거룩한 은혜로 새롭게 된 마음속에서 사랑은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입니다. 저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합니다. 사랑은 충동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이라는 점입니다. 사랑한다면 이 원칙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사랑은 속으로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사랑이 있을 때 나타나는 행동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품성을 수정하고 충동을 지배하며 감정을 억제하고 애정을 고상하게 합니다. 마음속에 간직된 이 사랑은 생활을 유쾌하게 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품위 있는 감화를 끼칩니다. 이 원칙을 가지고 살면 아주 멋지고 고상한 사람이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감화를 끼치게 됩니다.
이 사랑의 원칙을 가지고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기서도 똑같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 전체는 '사랑하라' 혹은 '대접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는 원칙을 실천하며 삽니다. 산상보훈에도 이 표현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대접하라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항상 지녀야 할 법칙은 '대접하는 법칙'입니다. 대접을 받고자 바라는 법칙이 아니라 내가 먼저 대접하는 법칙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원칙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사랑으로 대접하는 것은 하늘의 법칙이므로, 하늘의 거룩한 교제에 합당한 모든 사람에게서 개발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로 인해 죽게 되자마자 즉시 인간을 대접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며 고민하신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즉각적으로 나온 본능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개발해야 할 성품은, 주변에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일 때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돕고 대접하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개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개발해야 이것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쌓여 품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베풀고 나누어 주는 실천이 쌓여 품성을 이룹니다.
형제를 대접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들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대접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형제에 대해 마음속으로 시기, 질투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자기를 낮추고 형제를 존중하며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대접이자 진짜 대접입니다. 남이 나를 좋게 생각해 주기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남을 좋게 생각해야 합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말이 바로 이 뜻입니다. 사람은 묘한 영물이라 내가 저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면 말을 안 해도 귀신같이 다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속으로는 싫어하면서 아침에 안식일 교회가 만났을 때 "집사님, 안녕하세요. 보고 싶었습니다" 하고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아무리 친절하게 말하고 많은 구제를 하더라도 마음속 동기가 옳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그 외형적인 행동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것이 되려면, 마음속에 사람을 좋게 생각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야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에도 가치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말'입니다. 형제에 대해 불평하거나 험담하거나 모함하지 않고, 언제나 친절하고 좋은 말로 희망과 용기를 주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재림을 향해 가고 있는 재림교인이라면 재림교인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에 늘 불만이 있고 입으로 불평하며 남의 흉을 잘 보는 사람은 사탄이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은 사탄이 절대로 방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탄의 편에서 일해 주니 "가서 열심히 일하라"고 부추깁니다. 교회 안에는 인간이기에 서로 다르고 틀린 사람도 있고 이상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볼 때는 나 역시 이상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참 형편없는 죄인들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느낀 것은 모든 인간은 속절없는 죄인이라는 점입니다. 눈에 보이는 죄인이 있고, 과거에 심하게 타락해 본 죄인이 있으며, 별로 타락해 보지 않은 죄인이 있을 뿐 다 죄인입니다.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되는 순간 우리는 그저 속절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고 위하며 동정하고 친절하게 살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바로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형제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나누며 사는 것이 대접하는 삶입니다.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을 종합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남을 위하여 사욕이 없는 노력에 몸을 바치는 자들은 확실히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즉 시간, 건강, 재물, 능력, 그리고 여러 은사들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청지기 자산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그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나 또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증거입니다.
인도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모델, 작가였던 크리스다 로드리게스(Chrisda Rodriguez)라는 분이 인생 말년에 남긴 글이 있습니다. 작가답게 잘 쓴 글인데 제목은 '나눔이 인생의 길이다'입니다.
"나는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병원 휠체어에 앉아 있다. 나의 집에는 디자인이 다양한 옷과 신발, 장신구 등 비싼 물건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는 병원의 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다. 나는 은행에 거액의 돈을 모아놓았다. 그러나 지금 내 병은 그 많은 돈으로도 고칠 수 없다. 나의 집은 왕궁처럼 크고 화려하다. 그러나 나는 병원 침대 하나에 의지해 누워 있다. 나는 5성급 호텔들을 바꿔가며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은 병원의 검사실을 옮겨 다니며 머물고 있다. 나는 유명한 의류 디자이너였으며 계약을 체결할 때 나의 이름으로 사인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병원의 진단 검사지에 사인하고 있다. 나는 보석으로 장식된 머리 장식품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비싼 보석을 장식할 머리카락이 없다. 나는 자가용 비행기가 있어서 어디든 갈 때 타고 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간호사가 두 팔로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있다. 나에겐 비싸고 좋은 식품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병원에서 약 먹을 물만 곁에 있다. 비행기, 보석, 비싼 옷, 많은 돈, 좋은 차가 다 있지만 지금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람이 살아갈 때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게 기여하고 타인을 돕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다. 이 한 생애에서 비싼 물건들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귀중한 마태복음 7장 12절의 황금률을 그녀는 너무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법칙,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이 말씀이 우리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를 잘 압니다.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 세 비유는 다 선량한 사람들이 재림을 기다리다가, 막상 재림이 임했을 때 둘로 나누어지는 불행한 이야기입니다.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렸지만 신랑이 왔을 때 둘로 나누어졌고, 달란트 받은 종들이 주인을 기다렸지만 주인이 온 다음에 또 두 부류로 나누어졌으며, 임금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양과 염소로 나누어졌습니다. 아주 슬픈 이야기이며, 이는 재림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외형이 비슷한 짐승인 양과 염소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얀색의 비슷한 짐승, 즉 재림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 한쪽은 천국이고 한쪽은 지옥입니다. 양들에게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시고, 염소들에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왜 이렇게 나누어졌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양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대접하라는 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에 따라 나오는 판결입니다. 염소는 그 반대라는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여기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 중에 한 글자를 꽤 오랫동안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라는 구절을, 오랜 세월 동안 '너의 형제 중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보니 '내 형제'였습니다. 여러분의 형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형제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의 형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옆에 있는 형제에게 잘못한 것은 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에게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대접한 것은 예수님의 형제를 대접한 것이고, 내 이웃을 무시한 것은 예수님의 형제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라는 계명을 안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대접하라는 뜻입니다. 그 대접하라는 계명은 하늘의 원칙인데, 하늘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하늘나라에 데려다 놓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늘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면, 하늘의 법칙을 이 땅에서 실천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너희 모두는 내 형제들입니다. 너희가 함께 살아가는 동료 인간을 미워하면 그것은 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고, 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나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네가 주변에 힘들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면 그것은 바로 내 형제를 도와주는 것이고, 내 형제를 도와주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함께 형제라는 사실을 늘 생각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살다 보면, 나중에 하늘에서 우리 모두 같이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자신과의 관계 회복은 시간 관계상 생략하고, 나중에 다른 방송으로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이 구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선행은 친절를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유익을 주므로 이중의 축복이 됩니다.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병든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는 가장 좋은 약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고 돕는 마음으로 계속 베풀고 사는 것은 자신의 병든 몸을 치료하는 길입니다. 의무를 잘 감당했다는 생각과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제공해 준 것에 대한 만족감으로 인해 마음이 가볍고 기뻐질 때, 그 즐겁고 향상시키는 힘이 온몸에 새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베풀고 나누고 도와줄 때 느껴지는 그 행복감이 우리의 온몸에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칙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신경을 통해 행복감을 전달해 주고 혈액 순환을 촉진하며 정신과 신체 건강을 증진시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성품을 개발시키는 일은 고통당하고 괴로워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봉사함으로 그리스도의 사업을 행할 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신앙이고 그러한 생활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속에서 항상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늘 성령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품성이 나에게서 개발되고 성숙하며 성장하기를 늘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우리의 교만이 겸손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이 저녁에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말씀이었지만 다시 한번 그 말씀의 빛을 우리의 심령에 비추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다시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용서하여 주시고, 이 시간에 새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라, 대접하라" 하신 하늘의 법칙을 이 땅에서 실천하며 살다가,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해 오시는 재림의 날에 다 함께 하늘에 가서 살 수 있는 귀한 상급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주님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 핵심 요약 정리 ──
1. 신앙생활의 본질: '역류하는 헤엄'과 '회복'
신앙의 역류성: 신앙생활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헤엄과 같습니다. 세상의 흐름(이기심, 죄악)과 같은 힘만 쓰면 제자리에 머물고, 노력을 멈추면 떠내려갑니다. 부단한 영적 투쟁과 에너지를 쏟아야만 영적으로 성장하고 종말에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핵심, 회복: 구속사(인류 구원의 역사)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회복'입니다. 이는 타락 이전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완전한 상태, 즉 마음속에 깊은 사랑과 동정심이 세팅되어 있던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관계 회복을 위한 3대 사역 (마 4:23)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전인적 회복 사역은 세 가지 국면으로 요약됩니다.
가르치심 (Teaching): 도덕성과 양심을 깨워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함.
전파하심 (Preaching): 영성과 신앙을 깨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
고치심 (Healing): 육체적 치유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함.
3. 구체적인 회복의 지표와 실천 법칙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안식일과 십일조):
안식일: 과거 에덴동산 중앙의 '선악과'가 하나님의 주권을 상기시키는 시금석이었듯, 십계명 중앙의 '안식일'은 하나님이 내 생명과 시간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객관적 신앙 고백입니다.
십일조: 내가 가진 모든 물질의 원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표시입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만물의 주권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토지 소산(삶의 기반)을 지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회복 (황금률과 대접):
행동의 원칙인 사랑: 사랑은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충동과 감정을 억제하는 고상한 행동 원칙입니다.
황금률 (마 7:12): 구약 성경(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타적인 마음으로 형제를 존중하고 먼저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삶입니다.
4. 최종 결론: 마태복음 25장의 심판 기준
마지막 때에 재림 성도들이 양과 염소로 나누어지는 결정적 기준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베풀었는가(대접했는가)"입니다.
주변의 이웃들은 모두 '예수님의 형제'이므로, 이웃을 대접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대접하거나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