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언약과 새언약
https://youtu.be/gW2NugWfwQs?list=PLxsM-i5OlyVh4iP7tYyX19cbDbaRGYc4Y
오늘은 주요 교리 강해 일곱 번째 시간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히브리서 8장 8절과 9절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제가 교리 강의를 시리즈로 하고 있는데, 교리는 건물로 말하면 건물의 뼈대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복음 설교들은 이 건물의 인테리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인테리어를 잘하면 건물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뼈대가 약하면 그 건물은 쉽게 무너집니다. 그래서 조금 딱딱하지만 교리를 잘 공부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를 든든하게 하고 뼈대를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화도 많이 넣고 하면 훨씬 부드럽겠지만 시간이 부족합니다. 제가 매주 설교를 하면 조금씩 잘라서 할 텐데, 한 달에 한 번씩 오다 보니 한 주제를 한 시간 내에 맞춰야 해서 조금 딱딱합니다. 공부하는 시간이라 생각하시고 말씀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원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에 보면 '강 저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곳을 강 저편이라 했는데, 그 말에서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유래했습니다. 즉 유브라데 강 저편에 살던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7장 2절에 보면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갈대아 우상의 숭배가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으로 가려고 출발을 했는데,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막을 질러가는 것입니다. 건장한 젊은 사람들이 낙타를 타고 물과 식량을 철저히 준비하면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큰 가족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여성들도 있었고 어린아이들도 있었으며, 더구나 가축을 많이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사막을 건너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브라데 강 북쪽을 따라서 하란으로 우회해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하란에서 멈춥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마 하란이 목초지가 풍성했기 때문에 양을 기르기가 좋았을 것입니다. 장소가 살기에 적절해서 머물렀을 수도 있고, 또 하란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습니다. 데라가 나이가 많고 병약했기 때문에 여행을 계속하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다가 데라가 죽으니까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는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아버지의 집'까지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란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벧엘'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벧엘로 내려갔다가 점점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다가 가뭄이 들었을 때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가뭄이 끝나자 다시 벧엘로 올라옵니다. 다시 벧엘로 돌아왔을 때는 재산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이나 롯의 집안이나 짐승들이 너무 많아지니까 목초지가 좁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서로 갈라섭니다.
롯은 소돔 근처에 살게 되는데, 북방 메소포타미아의 네 왕 연합군이 쳐들어와서 롯을 잡아갑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길러진 가신들을 거느리고 가서 롯을 다시 찾아 돌아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여기가 고향이 아닙니다. 고향은 아까 갈대아 우르라고 했지요. 타향살이를 하면서 전쟁까지 치렀으니 몹시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창세기 15장 2절과 3절입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출발할 때가 75세였습니다. 그때 분명히 떠나라고 하시면서 큰 민족을 이루고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계속 아들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도대체 무엇을 줄 거냐고, 지금까지도 자식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이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내 집에서 기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는 종밖에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은 절대로 네 상속자가 될 수 없으며,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더 주시기 위해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십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나 이때는 80세에 가까웠을 텐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출산할 가능성은 낮아집니다. 의학적으로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 창세기 15장 6절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세우는 모퉁잇돌로 삼습니다. 여기 '믿음'이라는 말이 히브리 원문 동사로는 '헤에민(Heemin)'입니다. 이 동사의 어근인 '아만(Aman)'에서 우리가 잘 아는 '아멘'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멘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하는 우리의 소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 '해민'은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제가 그 말씀을 100% 믿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 19절부터 22절에서 이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여기에 처음으로 믿음과 칭의가 함께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겼습니다. '믿음이 의롭다고 칭했다', '의로 여겼다'라는 신학적 표현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도 전에는 의롭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즉 아브라함도 죄인이었고, 우리와 똑같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죄인이었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믿음의 중요성이 완전하게 강조됩니다. 이 개념이 성경 전편을 통해서 흐르게 되고, 나중에 사도 바울이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합니다.
그다음에 창세기 15장 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묻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지금 아브라함에게 여기는 타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시니, 그것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는 질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 3년 된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짐승들의 중간을 쪼개어 마주 대하게 놓았습니다. 새는 너무 작으니까 쪼개지 않고 양쪽에 하나씩 두었습니다.
원고에는 생략되었지만,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언약을 맺는 방식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짐승을 반으로 쪼개어 놓고 두 계약 당사자가 그 사이를 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짐승 사이를 다니지 않고 하나님만 지나가십니다. 창세기 15장 17절에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대 근동 지역의 언약 방식을 채택하셔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8절에 보면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맺었다(made a covenant)'라고 하지만, 히브리 원문으로는 '카라트 베리트(Karat Berit)'라고 되어 있습니다. '카라트'는 자른다는 뜻이고 '베리트'는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즉 히브리인들은 언약을 '자른다'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짐승을 잘라놓고 그 사이를 오가며 축복과 저주의 말을 암송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언약을 맺을 때 서로 등을 대고 선 상태에서 축복과 저주의 말을 하며 반쪽 원을 돌아 저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오늘 한 이 약속을 만약 어기면, 이 쪼개진 짐승처럼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저주의 맹세를 합니다. 그러므로 언약에는 굉장히 엄숙한 의미가 있습니다. 언약을 어겼을 때는 반드시 죽음이 따른다는 목숨을 건 의식입니다.
이 언약식을 바탕으로 만든 가사가 찬미가 484장에 있습니다. 1절에 "이 땅에 주님 나라 영원 전에 계획하사 제단 쌓고 짐승 쪼개 피의 언약 맺으셨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짐승을 쪼개서 맺는 이 언약은 '피의 언약'입니다. 다시 말해 이 언약을 어기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언약은 엄숙한 의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게 될 핵심은 바로 '새 언약과 옛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새 언약은 출애굽 때 맺은 언약과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 맺으시는 언약을 새 언약이라 한다면, 출애굽 때 먼저 맺었던 언약은 '옛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7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여기서 '미리 정하신 언약'이 바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먼저 정하신 언약이 '옛 언약'이 되어야 하고, 430년 후에 세운 것이 '새 언약'이 되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늦게 생겼으니까요. 그런데 반대로 미리 정한 언약이 '새 언약'이고, 사백삼십 년 후에 맺은 시내산 언약이 '옛 언약'입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미리 정한 언약에 대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17장 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동안 여러 번 반복하셨던 언약을 마침내 시행하기 위해, 즉 아들을 주시기 위해 나타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얼핏 보면 이 언약이 아들 이삭을 주겠다는 약속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는 이 약속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하신 표면적인 약속은 이삭에 대한 것이었지만, 사도 바울은 그것이 단순한 이삭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삭은 하나의 표상이었을 뿐이고, 그 약속의 실제 주인공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성경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자손'이라 했는데, 헬라어 원어로는 '스페르마(Sperma)', 즉 '씨'라는 뜻입니다. 이 '씨'라는 단어를 들으면 생각나는 성경 절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 히브리어로 '제라(Zera)', 즉 '씨'라는 뜻입니다. 여자의 씨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사탄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범죄하게 만든 사탄이 결국 멸망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동시에 인류의 구속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실 것(발꿈치를 상함)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대속적 희생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표상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했습니다. 가죽옷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했습니다. 문법적으로 '창세 이후로'라는 말을 '죽임을 당한 어린 양'에 연결시켜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번역해도 전혀 문제가 없으며, 성경 전체적인 맥락과도 일치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9절과 20절에서도 그리스도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라 하며,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부터 가죽옷의 표상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알려지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 죽은 그 짐승이 바로 예수님의 희생, 즉 발꿈치가 상할 것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속의 상징은 계속 이어집니다. 세월이 흐른 후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지낼 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제물로 드렸고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반면 피 흘림이 없는 땅의 소산을 드린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도 인류를 죄에서 대속하기 위해 희생되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고 세월이 흘러 이삭이 스무 살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평온하게 잘 살고 있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100세에 얻은 그 소중한 외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데리고 산을 올라갑니다. 가던 중에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때 아브라함이 영감을 받아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 구절은 킹제임스 버전(KJV)의 번역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 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다(God will provide himself a lamb for a burnt offering)."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재물이 되실 것을 예언한 아주 탁민한 번역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묶고 막 칼을 들어 죽이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나 그 손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니 한 숫양이 수풀에 뿔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는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벽한 상징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고 불렀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유명한 속담이 생겼습니다.
성경 주석에 따르면, 이 속담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 산에서 그분이 친히 구원의 수단을 준비하실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확고한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속담을 인용하는 자들이 그 깊은 의미를 알든 모르든, 그 안에는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훗날 이 신성한 장소, 곧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인 셰키나가 그 거처를 정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려 제단을 쌓았던 바로 그 바위 위에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가 세워진 것입니다. 가보면 크지 않은 낙타 모양의 바위가 있습니다. 현재는 그 자리에 이슬람 성전이 지어져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의 희생이 준비된 것입니다.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실 예수님이라는 거룩한 제물이 준비된 장소입니다.
창세기 22장 18절에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 역시 단순히 이삭 한 사람에 대한 약속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장 8절과 9절은 말씀합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겠다는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선포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가 여기에 상징적으로 선포되어 있습니다.
성경 주석에 명시되기를, 영원한 언약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입니다. 이 언약은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맺어졌고, 그 후에 아브라함에게 반복되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타락으로 잃어버린 신성한 위치를 회복할 수 있는 구원의 계획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옛날에는 이를 '구속의 경륜'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핵심 요소가 있습니다.첫째는 사람은 그가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십자가에는 온전한 죄 용서가 있습니다.둘째는 사람의 품성이 하나님의 형상과 조화를 이루도록 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일반 개신교에서 잘 가르치지 않는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죄의 용서만 주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완전한 회복을 이루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너는 이제 죄를 지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 하고 면죄부를 주는 허가증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타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우리가, 다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거룩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던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 개신교회는 이를 거꾸로 해석해서 자꾸 하나님의 계명이 폐지되었거나 변경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변경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변화시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430년 후에 생긴 옛 언약은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24장 7절과 8절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온 모세가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언약서는 성경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문서입니다. 그전에는 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다가 처음으로 책에 기록되어 백성들에게 읽혀진 것입니다. 백성들이 지키겠다고 확언하자,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선포했습니다. 피로써 언약을 비준한 것입니다.
이 시내산 언약을 우리는 '옛 언약' 혹은 '첫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영원한 언약이 시간적으로 훨씬 먼저인데, 왜 430년 후에 생긴 시내산 언약을 첫 언약이라 부를까요? 우리가 계약서를 아무리 잘 써도 마지막에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지 않으면 법적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유산을 상속하기 위해 첫째에게 얼마, 둘째에게 얼마 유언장을 작성했더라도 사인을 안 하면 무효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구원의 언약은 이미 가동되었지만, 그것은 실제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직접 피를 흘리셔야만 법적으로 완전히 비준되는 언약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최종 비준이 미루어진 상태였습니다. 반면 시내산 언약은 모세가 짐승의 피를 곧바로 뿌려 그 자리에서 즉시 언약을 맺고 비준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비준 시점이 시내산 언약이 훨씬 빨랐기에 이를 '첫 언약' 혹은 '옛 언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이 옛 언약의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레위기 18장 5절에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언약의 특징입니다. 계명을 지키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27장 26절에는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아까 고대 근동의 언약 방식처럼, 언약을 잘 지키면 평화롭게 살고 어기면 쪼개진 짐승처럼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서약입니다. "행하면 살리라, 어기면 죽으리라." 이것이 옛 언약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스스로 다 지킬 수 있습니까? 해보면 안 됩니다. 잠깐은 흉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지속적으로 마음 깊이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차피 지키지 못할 것을 뻔히 다 아시면서 왜 이 시내산 옛 언약을 맺으셨을까요? 《부조와 선지자》 371페이지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언약에 구원의 약속이 포함되었다면 왜 시내산에서 다른 언약을 세우셨을까?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의 원칙을 대부분 잊어버렸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부패 가운데 살았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들의 마음속에 가득 찬 죄악,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기에 전혀 무능함, 구세주의 필요성에 대하여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그들은 배워야 하였다.”
백성들이 "우리가 다 준행하리이다" 하니 하나님께서 "그래, 그럼 너희 힘으로 한번 지켜보아라" 하시고 피를 뿌려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어차피 못 지킨다"라고 말로만 설득하셨다면 백성들은 "하나님, 왜 우리를 무시하십니까? 우리는 다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반발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직접 부딪쳐보기 전에는 절대 깨닫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이런 내용의 비유가 나옵니다. 흐름을 살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릴 때 후지산을 구경하러 간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천재형 사람은 밑에서 몇 가지 각도로 쓱 둘러보고는 "아, 후지산이란 이런 곳이구나" 하고 곧바로 돌아갔습니다. 반면 머리가 좋지 않은 노력형 사람은 자기 발로 직접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까지 힘겹게 올라갔습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몸도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정상에 서서 "아, 후지산이 진짜 이런 곳이구나" 하고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세상에 굳이 안 올라가 봐도 딱 보면 아는 천재형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인류의 99%는 직접 겪어봐야 아는 노력형입니다. 우리 속담에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쓱 보고 분별해야 하는데, 색깔이 비슷하니까 직접 찍어서 맛을 보는 수고를 겪어야만 비로소 깨닫는 인간의 미련함을 꼬집는 말입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지금은 내가 믿음이 아주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로 거센 시험을 당해봐야 내 믿음의 진짜 바닥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스로의 무력함을 깨닫게 하려고 직접 찍어 먹어보는 경험, 즉 옛 언약의 시험 과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 네 힘으로 한번 해보아라. 그리고 도저히 안 되거든 나를 의지하라." 이것이 옛 언약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가 얼마나 무력한지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자세한 계명을 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셨고 모세는 거기서 40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산 위에는 빽빽한 구름이 끼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번개가 쳤습니다. 백성들은 처음에는 두려워 떨었으나,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 익숙해지자 마음이 해이해졌습니다. 더구나 모세가 40일 동안이나 내려오지 않으니 불안해졌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죽었거나 도망쳤나 보다. 지도자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겠냐." 하며 아론을 압박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고는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우리의 신이 바로 이 금송아지다"라고 외치며 술을 마시고 광란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40일 만에 돌판을 들고 내려오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노하여, 하나님이 친히 써주신 그 증거의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십계명 돌판은 바로 언약의 핵심 문서였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넣어둔 궤를 '언약궤'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돌판을 깨뜨렸다는 것은 "너희가 먼저 계약을 파기했으므로 이 언약은 무효다"라는 선포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피로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는 것은 곧 비참한 죽음을 의미하는 무서운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준비하며 신실하게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거기서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대화의 내용이 누가복음 9장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즉,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인류 구원의 핵심인 '십자가 죽음'에 대해 깊은 의논을 하러 가신 것입니다. 우주의 구속을 위한 엄숙하고 중요한 회의가 산 위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 산 아래에서는 제자들로 인해 엄청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한 아버지가 무리 중에서 달려 나와 울부짖습니다. "선생님, 제 아들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고통받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데려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제자들은 이전에 예수님께 파송받았을 때는 분명히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날은 아무리 외쳐도 귀신이 나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 파탄을 보시고 깊이 탄식하시며 그 아이를 즉시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9절과 20절을 보면,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제자들에게 실질적인 믿음이 전혀 없었다는 지적입니다. 마태는 제자들의 '믿음이 적었음'을 기록했고, 마가복음 9장 29절에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며 제자들에게 '기도가 없었음'을 지적했습니다. 아홉 제자들에게 왜 믿음도 없고 기도도 없었을까요? 《시대의 소망》 431페이지에 그 원인이 밝혀져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가리킨 그리스도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슬픔과 의혹을 일으켰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 제자만을 선택하여 산으로 동행하게 하신 일은 남아있던 아홉 제자들의 마음속에 은밀한 시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명심함으로써 믿음을 굳게 하는 대신에, 그들은 낙담과 사사로운 불평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이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서 그들은 사탄의 강력한 세력과 대항해 싸우려 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가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우선해야 할 중요한 본질은 내 신앙의 인격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초보의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품성이 예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온 전심을 매진해야 하고, 내 품성이 변화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애통해하며 잠을 설치며 기도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아주 사소한 일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사사롭게 다투고 삐지며 갈등하느라 소중한 은혜의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립니다. 시내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작 40일을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든 것처럼 말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 유예의 시간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의 여러 대외적인 활동보다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내가 신앙적으로 성숙해지고, 품성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시점의 영적 상태에 대해 베드로후서 3장 3절과 4절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말세가 가까울수록 세상에는 재림에 대한 회의주의가 팽배해질 것입니다. "무슨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냐"라며 비웃는 자들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깨어 준비하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처럼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는 세속적인 일에만 함몰되어 주님의 오심에 완전히 무관심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깨어 있으라'는 명령은, 늘 재림을 염두에 두고 내 삶의 우선순위를 오직 하늘에 두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내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말씀으로 쳐서 복종시키고, 품성이 성숙해지고 변화되는 본질적인 일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사사로운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속상해하고 갈등하느라 영원한 구원을 놓치지 말라는 자비로운 권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옛 언약을 맺었으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말씀대로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했고, 남방 유다 역시 바벨론에 처참하게 망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이 시드기야였는데, 그가 통치하던 비극적인 시절에 예레미야 34장 18절에서 20절을 통해 하나님은 엄히 선포하셨습니다.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피로 결속된 언약을 어긴 대가는 이토록 참혹합니다.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끝까지 친애굽 정책을 펼치며 바벨론에 대적했던 시드기야 왕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함락당할 때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유다 나라는 지상에서 완전히 멸망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언약을 어긴 백성들의 비참한 운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에 기초한 옛 언약 대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히브리서 8장 7절입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첫 언약인 시내산 옛 언약에 결함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흠이 없으나, 그것을 지키겠다고 장담했던 '인간의 연약한 육신'에 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언약인 '새 언약'이 요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포도주 잔을 건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의 보혈은 바로 이 새 언약을 비준하는 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크게 소리지르시고 운명하시는 순간, 마가복음 15장 38절에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소 제도와 옛 언약의 표상이 완전히 폐지되고, 마침내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효력 있는 '새 언약'이 최종적으로 비준되고 가동되었음을 우주 앞에 선포한 사건입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비준되었으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비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 언약의 구체적인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8장 10절입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옛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외부의 단단한 '돌비(돌판)'에 써주셨습니다. 반면 새 언약은 그 똑같은 율법을 우리의 '생각과 마음판'에 직접 새겨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갓 태어난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엄마를 찾고, 엄마와 잠시만 떨어져도 불안을 느낍니다. 안 가르쳐주어도 젖을 빠는 법을 압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DNA 속에 생존을 위한 본능이 이미 깊이 새겨져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류가 처음에 하나님께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본성으로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호흡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본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는 순간 우리 영혼의 디스켓에서 그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프로그램이 완전히 지워져 버렸습니다. 빈 디스켓을 복사하면 계속 빈 디스켓이 나오듯이, 율법이 지워진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역시 율법이 텅 비어버린 죄된 본성을 가지고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원래부터 율법이 없으니, 내 힘으로 계명을 지키려고 하면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의지적 노력을 짜내야 겨우 흉내만 낼 뿐입니다. 아기가 엄마를 찾는 것은 노력이 아니라 본능이듯, 예수님이 십자가 보혈을 통해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새 언약의 축복은 외부에 있던 하나님의 율법을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마음에 다시 새겨주셔서,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본능과 본성'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거룩한 약속입니다. 의무감으로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여 저절로 즐겁게 지키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은혜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은, 쉽게 표현하면 "너는 나고 나는 너다.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다"라는 가장 깊은 사랑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철저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그분의 계명은 억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의 열매로 저절로 지켜집니다. 십자가의 무한한 사랑에 완전히 매료된 사람은 계명을 지키는 일이 결코 무겁거나 어렵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밤새 고생해도 하나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행복한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능력입니다.
예언의 신에 이르기를, 시내산 돌판에 새겨졌던 똑같은 율법이 새 언약 하에서는 성령에 의해 성도들의 마음 판에 기록된다고 합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움을 세우려 율법주의적으로 노력하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에 즐겨 순종하는 성화의 생애를 살게 됩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를 힘입어, 우리는 비로소 그분께서 행하신 거룩한 생애 그대로 우리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주님이 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본질입니다.
지금까지 길게 설명해 드린 내용을 한눈에 보기 쉽게 이 도표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 구분 | 옛 언약 (첫 언약) | 새 언약 (둘째 언약) |
| 기원 및 배경 |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체결 (출 24장) | 에덴동산에서 최초 선포, 아브라함에게 반복된 영원한 언약 (창 3장, 15장) |
| 비준 시점 | 출애굽 시기, 짐승의 피로 먼저 비준됨 | 서기 31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나중에 비준됨 |
| 율법의 위치 | 외부의 **돌판(돌비)**과 언약서에 기록됨 | 성도의 생각과 마음판에 성령으로 기록됨 |
| 순종의 동기 | 인간의 의지와 결심에 기초한 의무적 순종 |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어 우러나는 자발적 순종 |
| 결과 및 특징 | 인간의 무력함으로 인해 실패와 저주에 이름 |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을 성취하는 구원과 생명 |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통해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것은 법을 어기면 사망이라는 공의의 선포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마자 여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구원의 계획, 즉 '영원한 언약(은혜의 언약)'이 즉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상으로는 이 은혜의 언약이 옛 언약보다 훨씬 먼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옛 언약이라 부르지 않고 '새 언약' 혹은 '둘째 언약'이라 부를까요? 앞서 도표에서 보셨듯이 피로 맺는 최종 비준이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시내산 언약이 짐승의 피로 먼저 비준되었기에 '옛 언약(첫 언약)'이 되었고, 아브라함과 맺은 은혜의 언약은 훗날 Calvary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보혈로 나중에 비준되었기에 '새 언약(둘째 언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을 통해 전해진 이 은혜의 새 언약을 다 알고 있었으나, 애굽에서 오랜 세월 종살이를 하는 동안 완전히 망각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자고해 있었습니다. 앞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비유처럼, 인간은 말로만 해서는 절대 깨닫지 못하고 직접 찍어 먹어봐야 아는 미련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우리가 다 준행하겠나이다"라고 장담할 때,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게 하시려고 옛 언약의 시험 무대에 그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결과는 비참한 실패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피로 새 언약을 완전하게 비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면 산다는 원칙은 똑같지만, 새 언약 안에서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네 힘으로 짜내어 순종하라"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네가 능히 순종하여 살 수 있도록 내가 친히 성취해 주겠다"라는 은혜의 보증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온전히 새길 수 있을까요? 계명을 성경책 속에만 놓아두지 말고 내 마음에 실제적인 능력으로 가져오는 유일한 열쇠는 바로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3절에서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사실 우리의 죄된 본성으로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몹시 무겁고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 계명을 온전히 다 지키신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보라 하면, 죄의 깊이를 아는 진실한 성도는 감히 한 사람도 손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왜 계명이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라고 단언했을까요?
사랑의 관계 안에서는 모든 행동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내리사랑을 보십시오. 자식을 위해 좋은 것을 만들어 주고 베푸는 것은 의무나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안 해주면 병이 나는 행복한 특권입니다. 저희 딸네 집에 가보면 시댁이나 저희 집사람이 정성껏 싸다 준 김치와 반찬들이 먹지 못해 냉장고 안에서 다 썩어 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집에 가보니 잔뜩 쌓여 있기에 제가 설거지를 하고 집사람이 냉장고를 다 정리했습니다. 제가 집사람에게 "애들 바빠서 잘 안 먹으니 이제 다시는 만들어 주지 말라"고 타일러도, 엄마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가 봅니다.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자식을 위해 무언가를 자꾸 만들어 쟁여 주어야 비로소 마음이 편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본능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새 언약은 철저한 사랑의 언약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 안에 내가 있는 완전한 사랑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 발버둥 치지 않아도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계명을 지키는 일이 호흡처럼 가볍고 당연해집니다. 새 언약은 우리 보고 무조건 계명을 지키라고 다그치는 법조문이 아니라, "나와 함께 뜨겁게 사랑하자"고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프러포즈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이 은혜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내 곁의 형제자매를 내 몸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면 계명을 완벽하게 지킬까" 율법주의적으로 고민하며 노력하지 마시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까"에 여러분의 온 영적 노력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개인적으로 더 깊이 만나고 사랑하기 위해 애쓰십시오.
더불어 내 동료 인간과 이웃을 바라볼 때도, 그 사람의 사사로운 단점이나 말이 많고 거친 모습들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지 마시고 그 사람 존재 자체를 존귀하게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저 연약한 영혼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려 피를 흘리셨지"라고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영혼을 바라보십시오. 간혹 교회를 다니면서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주거나 속을 썩이는 사람을 만날 때도, "예수님이 저 사람을 위해서도 당신의 고귀한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셨지"라고 깊이 명상하십시오. 그 사랑의 마음이 내 안에 성령으로 충만히 부어질 때, 십계명의 나머지 모든 조항은 내 삶 속에서 저절로 완벽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을 다 함께 읽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여기 '이루실 줄'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에피텔레오(Epiteleo)'인데, '완전하게 완성하다, 끝마치다'라는 강력한 뜻입니다. 내 안에서 구원의 착한 일을 처음 시작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마침내 재림의 그 영광스러운 날까지 내 품성을 흠 없이 완벽하게 완성해 주실 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연약함 때문에 더 이상 절망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심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을 온 뜻을 다해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소중히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사랑의 언약이 바로 우리를 온전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복된 새 언약입니다. 이 거룩한 새 언약의 테두리 안에서 날마다 구원의 참된 감격과 기쁨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는 진리횃불교회 온 성도들과 부족한 제 자신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핵심 요약 정리
본 강연은 "아브라함의 역사적 배경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원을 살펴보고, 피로 비준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신학적 메커니즘을 비교하여, 성도가 어떻게 사랑으로 율법을 성취하는 새 언약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리 공부의 중요성:교리는 건물의 뼈대와 같아서, 감정적이고 위로 위주의 복음 설교(인테리어)도 중요하지만 딱딱한 교리를 바르게 공부해야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서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원:아브라함이 자신의 노쇠함과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도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자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100% 신뢰(히브리어 '해민')했을 때,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 창세기 15장 6절은 성경 역사상 최초로 '믿음과 칭의'의 개념이 선포된 장소이며 구원의 기본 토대입니다.
언약(Covenant)의 엄숙한 본질:히브리어로 언약을 맺는다는 표현은 '언약을 자른다(카라트 베리트)'입니다. 이는 고대 근동에서 짐승을 반으로 쪼개어 놓고 그 사이를 지나며 "약속을 어길 시 이 짐승처럼 죽음을 당할 것"이라 맹세한 엄숙한 '피의 언약'에서 유래했습니다.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신학적 비교:
새 언약 (둘째 언약):에덴동산에서 최초 선포되고 아브라함에게 반복된 '은혜의 언약'입니다. 율법을 돌판이 아닌 성도의 '생각과 마음판'에 새겨주어, 순종이 인간의 새로운 거룩한 본성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시간상으로는 먼저 주어졌으나, 서기 31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나중에 최종 비준되었기에 '새 언약(둘째 언약)'이라 부릅니다.
옛 언약 (첫 언약):출애굽 시기 시내산에서 백성들의 "우리가 다 준행하리이다"라는 다짐에 따라 짐승의 피로 먼저 즉시 비준된 언약입니다. 우상숭배로 영적 무능과 구세주의 필요성을 잊어버린 인간들에게 "너희 힘으로는 절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찍어 먹어보며 깨닫게 하려고 허락하신 임시적 시험 무대였으며, 인간의 배신으로 결국 실패했습니다.
기다림의 태도와 신앙의 성숙: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40일 공백을 참지 못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처럼, 아홉 제자들이 시기와 분평으로 기도와 믿음을 잃어 귀신을 쫓지 못한 것처럼,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사사로운 갈등과 시기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오직 품성의 변화와 신앙의 성숙(하나님의 형상 회복)에 온전히 깨어 집중해야 합니다.
결론:십자가는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는 면죄부가 아니라, 사탄을 멸하고 죄인인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율법에 즐겨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은혜의 도구입니다. 성경책이나 돌판에 있던 율법을 내 마음에 새기는 유일한 열쇠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이웃을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사랑할 때 율법은 저절로 성취되며, 우리 안에서 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의 날까지 우리의 구원과 품성을 완벽하게 완성(에피텔레오)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