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악과가 필요했나
https://youtu.be/ixCF1594Poo?list=PLxsM-i5OlyVh4iP7tYyX19cbDbaRGYc4Y
오늘은 ‘왜 선악과가 필요했나’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 창세기 2장 8절과 9절입니다.
>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안 다니는 사람이나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나'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질문도 하고 답도 들었지만 여전히 궁금해하는 이유는 그 대답들이 시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전지하신 분이라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걸 미리 아셨을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왜 알고도 이것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를 힘들게 하느냐는 것이지요. 차라리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죄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고생도 안 할 텐데 왜 그것을 만들어서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느냐는 의문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아예 선악과를 못 따먹게 막으시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하와가 따먹으려고 할 때 좀 가서 말리시지 왜 가만두셨느냐고도 합니다. 그래 놓고 우리한테는 왜 죄의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이렇게 고통하며 살게 하느냐는 여러 질문들이 있습니다.
먼저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인가 하는 본질부터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말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입니다.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나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선'은 무엇일까요? 히브리 원문에는 '토브(Tob)'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로는 '굿(Good)'이며 좋은 것, 선한 것, 즐거운 것, 이익, 번영, 복지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루하루 창조가 끝날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그 좋았더가가 바로 '토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것이 바로 선입니다. 이 사실을 잘 기억해 놓으십시오.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것이 선입니다.
'악'은 영어로 '이블(Evil)'이고 히브리어로는 '라(Ra)'라고 합니다. 나쁜 것, 악한 것, 해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역사서를 읽어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혹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는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 표현이 성경에 한 55번 정도 나오는데,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나쁜 것이 악입니다. 이것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나쁜 것이 악입니다. 성경에서 이 '토브'와 대조적으로 '라'를 직접 사용한 것은 일곱 번입니다. 그러니까 선과 악은 완전히 대조적인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선악에 대한 지식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선과 악에 대한 관념적 지식일 뿐만 아니라,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에 관한 지식입니다. 또한 무엇이 우리에게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지에 대한 실제적 지식을 알려주는 나무가 바로 선악을 알려주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선악을 알려준다', '악을 알게 한다'라는 표현을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은 성경이 '율법'에 관해 말씀하실 때 꼭 따라다니는 정의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보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하는 핵심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죄를 깨닫게 하는 것, 즉 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7절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나쁜 것, 해로운 것, 악한 것, 즉 죄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 율법을 모세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돌판과 책에 글로 써주셨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는 글로 써서 주신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나무의 형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것은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율법'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시 율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율법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선악과를 두고 하시는 말씀은 곧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율법을 단순한 '의무'나 '규제'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벌써 마음이 무거워지고 억압을 받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값비싼 가전제품이나 자동차를 사면 반드시 제품과 함께 무엇이 따라옵니까? 사용 설명서가 따로 옵니다. 만약 사용 설명서가 없다면, 우리가 그 정밀한 전자제품을 다루다가 조작을 잘못하여 크게 고장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용 설명서라는 것은 제품을 만든 제조사가 그 용도에 따라 고장 내지 말고 안전하게 잘 쓰라고 소비자에게 준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율법을 주신 것도 이와 똑같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인생 사용 설명서'입니다.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해야 온전히 생존할 수 있다. 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네가 이렇게 해야 영혼이 고장 나지 않고 병들지 않는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육이 병들고 고장 나서 결국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을 자상하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해주는 여러 유익한 이야기들을 단순한 잔소리로 알아듣고 싫어하지만, 나중에 성장해서 철이 들고 보면 그 부모님 말씀이 백번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해 우리가 자꾸 의무나 제약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영적으로 아직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정확하게 안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우주에서 안전하게 생존하고 영생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최고의 보호 장치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 인간의 생존과 건강과 행복의 원리입니다. 상생의 원리요, 건강의 원리요, 행복의 원리를 가르쳐 주는 지침서입니다.
이 원시 율법인 선악과 명령에는 두 가지 본질적인 원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입니다. 그냥 우리말 표현대로 풀면 마음대로 먹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아콜 토켈(Achol Tokel)'이라고 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먹고 또 먹되'라는 뜻입니다. 강조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임의로 먹되'라는 번역보다는 '반드시 먹되'라는 표현이 원어의 뉘앙스에 더 정확합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살려면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지금도 먹어야 살 수 있지, 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생존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먹어야 합니다.
둘째는 창세기 2장 17절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입니다. 첫 번째가 '하라'였다면, 두 번째는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입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면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죽을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엄숙한 본질이며, 생존의 원리이자, 우주 만물이 존재하는 절대 법칙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가속 페달(액셀)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때 멈출 수 있도록 브레이크를 잘 밟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브레이크를 밟을 줄 모르면 차는 시원하게 달릴지 몰라도 결국 큰 사고를 내고 파멸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에는 달리는 '하라'가 있고, 멈추는 '하지 말라'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는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 저희 딸이 운전면허를 따고 나서 차를 운전하려니 겁이 난다고 저에게 도로 연수를 좀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사실 연수를 시작하기 전에 고민이 좀 많았습니다. 과거에 저희 집사람 운전 연수를 시켜주다가 하마터면 부부싸움을 크게 할 뻔했기 때문입니다. 딱 한 번 가르쳤는데 집사람이 "당신한테는 두 번 다시 연수 안 받겠다"고 선언하고는 돈을 내고 전문 학원 연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딸아이 주행 연습을 시킬 때는 조수석에 앉자마자 먼저 영적인 세뇌부터 시켰습니다. "아빠의 잔소리는 사고를 예방한다." 이 말을 마음속에 주입해 놓고 운전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운전할 때 가르쳐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차가 부드럽게 나아가야 하니 "밟아라" 하면 액셀을 밟는 것이고, 위험하니 "멈춰라" 하면 브레이크를 밟는 것입니다. 차선을 변경할 때는 먼저 백미러를 보고 따라오는 차가 없는지 확인한 뒤에 진입하라고 타이르고, 우회전하는 법, 좌회전하는 법, 신호등 보는 법 등 가르칠 게 산더미 같았습니다. 나중에는 초보인 딸을 위해 내비게이션을 켜주었는데도, 운전하느라 바빠서 정작 내비게이션 화면을 볼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수석에서 "아빠 말 들어라, 이제 우회전해야 한다, 몇 미터 남았다"라고 온 성의를 다해 끊임없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행히 딸아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잘 따라와 주었습니다.
나중에 딸아이가 엄마에게 제 험담을 하더랍니다. 엄마가 "아빠한테 운전 연습 받을 만하더냐" 하고 물으니, 딸이 그러더랍니다. "아빠가 옆에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잔소리를 떠들어대는데, 솔직히 나는 운전하느라 바빠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래서 인류의 조상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홀랑 먹었구나.'
아빠의 잔소리는 딸의 생명을 지키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와 똑같이 하나님의 세미한 잔소리는 우리 인생의 모든 불행을 막고 '영적인 죽음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귀찮은 잔소리로 들으면 안 됩니다. 아빠가 딸의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조수석에서 자상하게 온갖 잔소리를 해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의 위험에 빠져 파멸당하지 않도록 세밀하게 안내하시는 사랑의 이정표가 바로 율법입니다.
사탄은 하늘에서부터 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율법에 도전했고, 에덴동산에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이 율법을 어기도록 충동질했으며, 지금도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적인 불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18장 5절은 명확히 선포합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호와이니라." 율법은 우리를 온전히 살게 하려고 주신 것이지, 우리를 옥죄어 죽이려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에스겔 18장 9절에서도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0장 28절에서도 예수님께서 한 율법교사에게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신 생명의 법입니다. 우리를 고생시키거나 우리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여러분, 교통법규는 운전자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도로 위의 사고를 예방하고 내 생명과 가족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제정한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왜 중앙선도 못 넘어가게 하고, 과속도 못 하게 하느냐"라며 교통법규가 내 자유를 억압한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면 사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12절에서 명확히 결론을 내립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여기서 선하다는 말은 아까 말씀드린 히브리어 '토브', 즉 우리에게 참으로 '좋고 이로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율법에 대하여 심한 혐오감을 갖거나 싫어할까요? 여기에는 율법이 가진 '영적인 역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 10절과 11절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율법의 거대한 역설입니다.
본래 계명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어진 자비의 법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고백처럼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죄가 계명을 도구 삼아 나를 속이고 죽게 만들었습니다. 원래 교통법규는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고마운 법인데, 내가 범법하여 죄를 짓고 나니까 이제는 그 교통법규가 나를 처벌하고 감옥에 가두는 무서운 기능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하와가 에덴에서 뱀에게 속은 것처럼, 인류는 죄에게 속아 계명의 정죄를 받아 죽게 된 것입니다.
내가 교통법규를 어겨서 벌금을 물거나 처벌을 받게 되었을 때, 나를 처벌하는 교통법규가 나쁜 것입니까, 아니면 법규를 어긴 내가 나쁜 것입니까? 당연히 법을 위반한 내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복음은 우리가 죄를 짓고 나서 우리를 처벌하는 율법의 기준을 우리 수준에 맞춰 낮추거나 변경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타락한 인간의 품성을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시켜 주는 것이 바로 진짜 복음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켜서, 마침내 거룩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의 수많은 가짜 복음은 "이제 예수를 믿으니 율법은 안 지켜도 된다"고 가르치거나, "율법의 기준이 너무 높으니 대충 지켜도 되도록 하나님이 법을 바꾸셨다"고 사람들을 속입니다. 이것은 전부 사탄이 고안해 낸 가짜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주 전체의 생명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최적의 '인생 사용 설명서'를 주셨는데, 피조물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설명서의 기준을 멋대로 바꾸는 것은 제품을 완전히 폐기하고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주신 원본의 설계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에서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착각하는 비극 중 하나는 율법을 자꾸 원수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나를 생명으로 인도할 고마운 율법인데, 내가 범죄하고 나니까 그 율법이 나를 죄인이라 정죄하며 사형 선고를 내리니 율법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한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그 율법이 죄이고 율법이 잘못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내가 타락하여 잘못된 것이지,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은 단 1밀리미터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법을 바꾸려 하지 말고 사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이제 율법의 더 깊은 영적 원리를 살펴봅시다. 제가 산상보훈을 강의할 때도 한번 설명을 드렸던 내용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율법의 원본 형태는 "무엇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라"입니다. 즉,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입니다.
진짜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살면, 다른 복잡한 가로 규칙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서로 진짜 사랑하면 집안 법조문이 없어도 모든 문제가 알아서 해결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면 "청소는 네가 하고, 빨래는 내가 하고, 설거지는 누가 한다" 이런 규칙을 구태여 정해놓지 않아도 서로 배려하며 알아서 다 해냅니다. 진정한 사랑 안에는 아무런 걸림돌이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자발적이며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성가 가사처럼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타락하면서 마음속에 무서운 '이기심'이 들어왔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아무런 대가 없이 다 내어주는 거룩한 사랑을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에덴의 원본 형태 그대로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의 무한한 사랑의 계명을 축소하여 소극적인 금지의 형태로 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래 참된 사랑을 하면 어떤 희생도 자발적으로 감당해 내지만, 이기심에 눈이 먼 타락한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실 때 인간이 타락하여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행동들을 지적하시며 "최소한 이것 이것만은 절대 하지 말라"는 방식으로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전반부 계명을 보면 첫째 계명도 "하지 말라", 둘째도 "하지 말라", 셋째도 "하지 말라"고 하셨고, 오직 넷째 계명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하라)"고 적극적으로 주셨습니다. 하지 말라는 금지 조항이 훨씬 많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후반부 계명에서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하라)" 하나만 긍정형으로 주셨고, 나머지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라며 온통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주셨습니다. 이처럼 타락한 인류를 위한 종교적 계율들은 대부분 하라는 방식보다는 하지 말라는 금지의 형태로 주어지게 됩니다.
불교의 계율을 보면 승려들이 지켜야 할 '구족계(具足戒)'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구(具)'는 갖출 구 자인데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즉 구족계라는 말은 승려로서 지켜야 할 모든 계율이 온전하게 다 구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보통 일반 재가 신자들에게는 다섯 가지 기본 계율인 '오계(五戒)'를 줍니다.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사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입니다. 이 중에 1번부터 4번까지를 '바라이법(波羅夷法)'이라고 부르는데, 한자어로 번역할 때 극악(極惡) 혹은 단두(斷頭)라고 부릅니다. 목이 잘리는 것처럼 무서운 법이라는 뜻입니다. 이 네 가지 핵심 법을 어기면 승려는 즉시 승복을 벗고 사찰에서 쫓겨나야 하며, 평생 다시는 승려로 복귀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엄한 법입니다.
남자 승려인 비구가 지켜야 할 구족계는 무려 250개나 됩니다. 내용을 보면 6번에 "여성의 몸을 만지지 말라", 24번에 "비구니에게 자기 속옷을 빨게 하지 말라", 34번에 "6년 안에는 새 옷을 새로 만들지 말라", 51번에 "남을 헐뜯거나 꾸짖지 말라", 심지어 102번에는 "남을 간지럽히지 말라"는 조항도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밥그릇 한복판을 파서 먹지 말라는 세세한 규칙까지 다 정해놓았습니다.
여자 승려인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은 남자보다 훨씬 많아서 무려 348개나 됩니다. 5번에 "남자의 겨드랑이 아래와 무릎 위 사이는 절대 만지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릎 아래나 어깨 위는 만져도 괜찮지만 그 안쪽 은밀한 곳은 만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 9번에 "남녀 사이에 중매를 서지 말라", 25번에 "서로 다투거나 마음에 꽁하고 앙금을 품지 말라" 등 여성들의 성향에 맞춘 세세한 규정들이 가득합니다. 또한 205번에는 "향수를 몸에 바르지 말라"는 조항도 있습니다. 이 수백 가지 계율들 중에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라는 조항은 몇 개 되지 않고, 거의 대부분이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입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저명한 성경 주석학자인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 박사는 "오직 하지 말라로만 구성된 종교는 결국 비참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안 하는 것만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는 종교는, 결국 사람의 깊은 내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외식하는 형식적인 신앙인으로 만들거나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자로 만들 뿐입니다. 지정된 몇 가지만 안 하면 나는 계명을 다 지켰다고 스스로 의롭다 여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과거 유대 바리새인들의 치명적인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원본 율법을 바라보는 대신, 하지 말라고 규정된 소극적인 자잘한 조항들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습니다. 왜냐하면 계명의 한계선만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것이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이 소극적인 율법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율법의 거룩한 사랑의 본질을 가르쳐 주고자 애쓰셨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한 젊은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계명을 몇 가지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하시고 마지막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습니다.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계명 네 가지와 하라는 계명 하나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이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청년이 갇혀 있던 소극적인 율법의 껍질을 깨뜨리시고 본질적인 무제한의 율법을 제시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여러분, 영생을 얻기 위해 지금 내가 가진 막대한 재물의 10%만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다면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생이 걸린 엄숙한 문제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냅니다. 심지어 암 환자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내놓으면 암을 깨끗이 고쳐준다고 하면 내놓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내놓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충 적당히 내놓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네 재산의 100%를 다 팔아서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본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제한이 없습니다. 하라는 명령에는 한계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부자 청년은 큰 재물 때문에 마음의 깊은 근심에 휩싸여 예수님을 떠나갔고, 그의 이름은 생명책과 성경 역사 속에서 영원히 잊혀진 바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당시 유대 장로들은 아모스 1장 3절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라"는 구절을 억지로 해석해서, 사람은 딱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고 네 번째부터는 절대로 용서해 주지 말라고 랍비 법으로 정해두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대인배답게 그 세 번에다가 곱하기 2를 하고 플러스 알파까지 더해서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겠다"고 호기롭게 말한 것입니다. 스스로 넉넉하게 사랑을 베풀었다고 자부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이 질문을 던진 속뜻은 "내가 이웃을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합니까?"가 아니라, "제가 이웃을 몇 번까지 용서해 주는 의무를 채우고, 그다음부터는 정당하게 용서하지 않고 상대방을 미워해도 됩니까?" 하고 사랑의 '합법적인 종착역'을 물어본 것입니다. 이만큼 선을 행했으니 이제 내 본래의 이기적인 자아로 돌아가도 되지 않느냐는 한계선을 가르쳐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청년의 한계를 깨뜨리시며 대답하십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 명령은 딱 490번만 용서하고 491번째에는 복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끝까지 무제한으로 조건 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의 원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에는 한계선이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율법을 자꾸만 이런 소극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의 의무 분량을 간신히 채운 후에, 다시 내 본래의 편안하고 이기적인 자아로 돌아갈 수 있는 그 한계 지점이 어디인지를 자꾸만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내주신 최소한의 영적 숙제만 얼른 끝내놓고 내 마음대로 놀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화를 몇 번까지 내면 구원을 받습니까?", "이 사람을 어디까지 미워하면 구원에 지장이 없습니까?" 자꾸만 자잘한 한계선을 물어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에 지장이 없는 아슬아슬한 선까지는 내 육신의 욕망대로 행하고, 구원이 걸려 있는 커트라인 선만 안 넘어가려고 머리를 굴리는 소극적인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인간들의 이 얕은 가짜 신앙을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참된 사랑은 무제한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함에는 경계선이 없습니다. 이 높은 표준을 우리의 타락한 육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습니까?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구세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전심으로 영접하면, 오늘 우리가 배운 대로 '새 언약'의 역사가 심령 속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외적인 돌판이나 성경책 속에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직접 써주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내 새로운 거룩한 품성이 되게 하셔서, 구원받기 위해 억지로 의무감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우러나와 내가 진심으로 원해서 즐겁게 순종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위대한 보증입니다.
자, 전반부 내용을 정리를 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원시 율법'이며, 우주 전체의 '생존 원리'입니다. 가전제품을 사면 따라오는 사용 설명서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최고의 유익과 안전을 위해 주신 고마운 법이기에 율법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 선악과가 에덴동산에 존재해야 했던 영적 이유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선악과를 굳지 동산 한복판에 두셔서 인간이 시험에 빠지게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살려면 이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반드시) 먹어라" 하셨습니다. 인간은 부지런히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루 세끼 음식을 아무리 열심히 먹은들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부지런히 먹어도 몸은 점점 늙어가고 결국에는 세포가 죽어 공동묘지로 가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부터 스스로 영생할 수 있는 독립적인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늙지 않고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산 중앙에 있던 '생명나무의 열매(생명과)'를 먹어야만 했습니다. 이 신성한 생명과를 정기적으로 받아먹어야만 세포의 노화가 방지되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일상적인 음식도 먹어야 하지만, 반드시 생명과를 먹어야 영생하는 조건적 불멸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고귀한 생명과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자격 조건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온 우주가 고장 나지 않고 안전하게 돌아가게 하는 행복의 절대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율법에 순종해야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만물이 다 조화롭고 행복해집니다. 창조의 원리가 순리대로 돌아갈 때 비로소 온 우주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거룩한 우주적 조화 속에 있을 때만 영생이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지상에서 수많은 사람을 가혹하게 죽인 잔인한 독재자나 연쇄 살인마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비극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온 만물이 다 함께 기뻐하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선)'에 머무는 존재에게만 영생을 허락하시는 것이 가장 공의롭고 선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또 질문합니다.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애초에 인간을 만드실 때 조건 없이 그냥 그 자체로 영생하는 존재로 만드시지, 왜 굳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해야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도록 복잡하게 만드셨습니까?"
과거 모세가 시내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존성(Self-existence)'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외부의 에너지나 원천으로부터 파생된 분이 아니며, 그분 스스로가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자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홀로 자존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히브리어 시제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미완료형이라는 것은 과거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히 스스로 영생하신다는 뜻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도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라고 증언합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스스로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존재가 우주에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다 시작이 있고 본질적으로 유한합니다. 현대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저 하늘의 태양조차도 영원하지 않고 수명이 유한하다고 합니다. 태양의 총 수명을 약 100억 년으로 추정하는데, 이미 46억 년이 지나갔고 앞으로 50억 년 정도 남았다고 말합니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다 유한합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반드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생명과를 정기적으로 받아먹어야만 영생을 유지할 수 있는 의존적 존재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아무런 공급원 없이 그 자체로 영원히 사는 불멸의 존재로 만드셨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또 다른 '신(God)'을 만드신 셈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또 다른 독립된 신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매일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고, 동시에 생명과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만 노화되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철저히 의존적인 피조물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생명 법칙에 즐겨 순종하며 동행할 때 영생의 축복이 영원히 유지되도록 하셨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 인간과 로봇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요즘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고도의 '지능형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했습니다. 이 지능형 로봇들의 특징은 스스로 주변 상황을 정밀하게 판단하고 자율적으로 동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로봇이라 할지라도, 무엇이 도덕적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의지(Free will)'는 없습니다. 로봇은 인간 개발자가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해 주지 않는 한, 스스로 도덕적 발전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고도의 자유의지를 가진 고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강요된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의지적 선택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영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품성을 거룩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셨고, 하나님의 율법 속에 '하라'는 생명의 법과 '하지 말라'는 보호의 법을 두신 것입니다. 피조물이 매 순간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한 뜻에 기쁘게 순종하는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결하게 키워나가고 창조주와의 관계를 더욱 신성하고 밀접하게 발전시켜 나가도록 설계하셨습니다.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피조물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배신할 수 있는 위험성도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안타깝게도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그 고귀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을 배신하는 타락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창세기 3장 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이 말씀은, 인간이 진짜 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탄의 속임수에 빠져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인간의 상태를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풍자적이고 슬픈 표현'입니다.
사실 우리가 선과 악을 구별하기 위해, 굳이 그 악을 직접 행동으로 저질러 보아야만 악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음주운전을 하면 패가망신하고 나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내가 진짜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아 남의 차를 들이받고 사람을 죽여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학자나 교통 전문가들이 알코올이 뇌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에 대해 쓴 보고서를 읽고 교육을 받으면, "아, 음주운전은 나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몹시 위험한 악이구나" 하고 이성적으로 명확히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굳이 대형 사고를 내지 않아도 충분히 지식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역시 에덴동산에서 굳이 창조주의 명령을 거역하는 악을 직접 저지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자 자상한 가르침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얼마든지 안전하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건강을 위해서 육식을 멀리하고, 충분히 휴식하며, 뉴스타트(Newstart) 생활을 철저히 하는 것이 몸에 참 좋다는 사실을 지식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은 머리로는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음주운전을 하고 몸에 해로운 방종을 일삼습니다. 알고도 행하는 것이 인간의 타락한 죄성입니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이 무한하시다면서, 자식들이 선악과 딱 한 번 따먹은 걸 가지고 속상하게 굳지 에덴동산에서 가혹하게 내쫓으셔야 했나? 한 번만 그냥 눈감고 용서해 주시지."
어제 신문 기사를 보니 과거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도(大盜) 조세형 씨에 대한 뉴스가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올해 나이가 무려 84세인데, 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또다시 남의 집 도둑질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이 사람의 범죄 이력을 보니 16살 때부터 도둑질을 시작해서 44살에 이미 전과 11범이었습니다. 1982년도에 부잣집을 털다가 붙잡혀서 청송교도소에서 무려 15년 동안 장기 복역을 했습니다. 한 평짜리 차가운 독방에서 15년 동안 무릎을 꿇고 수형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98년에 만기 출소한 뒤에는 새사람이 되었다며 청소년 선도 강사도 하고, 교회마다 다니며 영적 신앙 간증도 했으며, 나중에는 개신교 목사 안수까지 받고 선교회를 조직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좋은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00년에 또다시 일본에 건너가 빈집을 털다 붙잡혀 3년 6개월을 살았고, 돌아와서 2005년에 또 절도죄로 3년을 살았으며, 2010년에는 72세의 고령의 나이에 장물 알선 죄로 2년을 살았고, 2013년 75세에는 강남의 고급 빌라를 털다 또 3년을 살았고, 2015년 77세에 또 3년, 2019년 12월에는 81세의 나이에 또 도둑질로 6개월을 살다 나왔는데 이번에 84세의 나이로 또다시 붙잡힌 것입니다. 참으로 구제불능이라는 탄식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조세형 씨의 뉴스를 보며 혀를 차고 한숨을 쉬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뼛속 깊이 박혀 있는 고질적인 악습들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그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의 물건을 직접 훔치지 않아서 죄수로 잡혀가지 않았을 뿐이지, 평생 똑같은 일로 쉽게 성질내고, 사사건건 신경질 부리고, 형제를 미워하고, 날마다 가정과 교회에서 싸워대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역시 조세형 씨와 다를 바 없는 구제불능의 반복적인 죄인들입니다.
인간이 한 번 죄를 짓고 그 죄의 짜릿한 악의 맛을 마음에 들이고 나면,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끊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 부족하셔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쫓으신 것이 아닙니다. 죄의 유전자를 지닌 이 타락한 품성 상태 그대로 에덴에 그냥 놔두면, 동산의 거룩한 환경 전체가 죄로 오염되어 도저히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의 확산을 막기 위해 부득이하게 그들을 동산 밖으로 내보내신 것입니다.
창세기 3장 22절 후반부에 하나님은 염려하십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원히 살까 하노라." 인간이 범죄 하였을지라도 신성한 생명과를 계속 받아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과에는 세포의 노화를 완벽하게 방지해 주는 하늘의 신성한 효소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이 지상의 음식들은 우리에게 움직일 에너지는 공급해 주지만, 세포가 늙어가고 사멸하는 것은 막지 못합니다. 오직 생명과만이 노화를 완벽하게 막아줍니다.
그러나 죄에 오염된 죄인이 죽지 않고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주적인 대재앙이자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잔인한 독재자나 연쇄 살인마들이 죽지 않고 영생하며 영원토록 악을 행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지옥이겠습니까? 그래서 아담은 처음에는 에덴에서 쫓겨나 죽음이라는 운명을 마주했을 때 몹시 두려워 떨었으나, 세월이 흐르며 지상에 인류의 잔인한 악행과 불행이 무섭게 번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 죄인에게 죽음을 허락하신 것이야말로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자비와 축복이구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부조와 선지자》에 그 영적인 진리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은 죄의 타락한 원리와 '죄성(Sinful nature)'이 인간의 유전자 속에 생겼다는 뜻입니다. 이 부패한 죄성 때문에 인류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를 안 지을 수 없게 되었고, 그 죄의 결과로 결국 공의로운 사망이 오게 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핵심 주제는 바로 '선악(Good and Evil)'의 문제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부터 시작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철학자들은 한결같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라는 주제를 깊이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철학이 말하는 선과 악을 판별하는 최고 주체는 언제나 '에고(Ego)', 즉 '나 자신'입니다. 내가 중심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 선이고, 나에게 해가 되고 고통을 주는 것이 악이라는 기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Humanism)'입니다.
과거에 제가 저희 아이에게 몸에 해로운 시중 음식을 먹이지 않으려고, 집에서 직접 몸에 좋은 천연 꿀을 얼려서 부지런히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였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네 살 때, 교회의 어떤 집사님이 기특하다고 아이 손을 잡고 동네 가게에 데려가서 시중에서 파는 알록달록한 화학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셨습니다. 그 달콤한 맛을 한 번 본 그날 이후로 아빠가 정성껏 만든 꿀 아이스크림은 단번에 끊어졌고, 무조건 가게 아이스크림만 찾으며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쓰디쓴 감기약을 안 먹으려고 떼를 쓸 때도 "약 먹으면 아이스크림 사주겠다"고 하면 얼른 약을 받아먹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감기에 심하게 걸렸는데도 그 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기에, 제가 건강에 해로우니 뺏어 먹으려고 "아빠 한 입만 달라"고 손을 내밀어도 아까워서 절대 안 주려고 숨겼습니다. 이 철없는 어린아이의 기준에서는 지금 내 입을 달콤하고 즐겁게 해주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행위가 최고의 '선(Good)'입니다. 그러나 영양을 아는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그 차갑고 유해한 아이스크림은 아이의 감기를 악화시키고 건강을 해치며 부모의 속을 썩이는 명백한 '악(Evil)'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진짜 선입니다. 참된 선은 나 혼자만 일시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온 우주 만물이 다 함께 영원히 좋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우주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주체가 피조물인 '나'가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라는 영적 사실을 인간에게 영원히 깨우쳐 주기 위해 동산 중앙에 굳건히 서 있던 나무입니다.
"네 개인의 이기심과 정욕에 따라 선악을 멋대로 판단하며 살면 너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이 불행하고, 우리가 속한 사회와 교회가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도 전부 무엇 때문입니까? 선악의 기준이 '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이기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자아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좋고, 이롭고, 선한 것이 됩니다. 이 우주적인 축복의 원리를 매일 시각적으로 가르쳐 주던 교육적 도구가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비밀을 깨닫고 시편 119편 127절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심지어 131절에서는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더 많이 알고 닮아가고 싶어서 영혼이 갈급하여 헐떡였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거룩한 법을 더 깊이 배우기 위해 날마다 애써야 합니다.
### 영원한 생명나무의 회복
시간이 많이 지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는 이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에 대한 영광스러운 약속이 다시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여기서 "이기는 그에게는" 주시겠다는 말씀은, 생명나무 열매를 받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탄의 격렬한 유혹과 방해가 마지막 때에도 여전히 존재할 것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과거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못 먹게 만든 사탄의 기만적인 방해는 도대체 무엇과 관련되어 있었습니까? 바로 '선악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 "율법의 기준을 변경해도 된다"라며 율법을 무시하고 정죄하게 만드는 사탄의 현대적 유혹을 믿음으로 넉넉히 이기는 자들만이, 마침내 회복된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과 2절을 보면, 하늘 예루살렘 성에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고, 그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열두 가지 열매'라는 표현은 헬라어 원어로 '도데카 카르포스(Dodeka Karpous)'인데, 직역하면 그냥 '열두 열매'라는 뜻입니다. 나무에 열매 종류가 12가지가 주렁주렁 열린다는 뜻이라기보다는, 1년이 12달이므로 매달 끊임없이 풍성하게 열두 번 열매가 열린다는 뜻으로 문자 그대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성경 예언에서 '12'라는 숫자는 완전함과 풍성함을 나타내는 신성한 상징수입니다. 즉, 구원받은 수많은 하늘 백성이 다 함께 마음껏 먹고도 남을 만큼 무한하고 풍성한 생명과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예수 안에서 생명과를 먹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에 최종 구원을 받아 하늘에 들어갔을 때 이 찬란한 생명과를 다시 먹게 되겠지만, 사실 이 생명나무는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 하늘로 거두어가셨을지라도, 오늘날 그 구원의 가지가 이 지상 성도들에게까지 길게 드리워져서 우리 영혼 위에 신성한 생명의 즙을 끊임없이 떨어뜨려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영적으로 생명과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 51절과 53절에서 예수님은 선포하십니다.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당시 율법에 따라 피를 먹는 것을 엄격히 금기시하던 유대인들은 이 영적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 오해하여 그날 이후로 수많은 제자가 실망하여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대중적 인기는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고, 주님의 발걸음은 십자가의 길로 직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늘 생명나무에서 떨어지는 가장 귀한 생명의 수액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신학적 의미에 대해 《시대의 소망》 389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그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믿고 영접하는 자마다 결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지상에서 예수님을 내 개인의 구주로 확고히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생애는, 훗날 하늘 낙원에서 눈부신 생명과를 직접 손으로 따먹을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영적 '보증수표'입니다. 내가 지금 신실하게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우리는 마지막 날에 틀림없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생 사용 설명서인 거룩한 율법을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원리로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그 아름다운 율법을 가슴 깊이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영원한 생명과의 주인공이 되시는 진리횃불교회 온 성도들과 부족한 제 자신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핵심 요약 정리
본 강연은 "인류가 오랫동안 궁금해해 온 선악과의 본질을 성경적인 율법의 정의와 비교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생명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실 수밖에 없었던 자비로운 생명의 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악과의 본질 (최초의 원시 율법):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과 악, 즉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이롭고 해로운지를 알려주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입니다. 성경에서 율법의 기능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인 것처럼, 선악과는 모세의 문자 율법 이전에 에덴동산에 시각적 형태로 주어진 인류 최초의 '원시 율법'이자 고장 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가도록 주신 '인생 사용 설명서'입니다.
선과 악의 성경적 정의:
선 (토브, Tob): 창조 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것, 즉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온 우주 만물이 다 함께 행복한 전체적인 조화와 복지를 의미합니다.
악 (라, Ra):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는 표현처럼, 하나님이 보실 때 나쁜 것, 즉 우주의 생명 질서를 깨뜨리는 해롭고 나쁜 것입니다.
율법의 두 가지 본질과 역설: 율법에는 "임의로(반드시) 먹으라"는 적극적 명령(하라)과 "먹지 말라"는 소극적 명령(하지 말라)이 공존하며, 이 두 가지가 자동차의 액셀과 브레이크처럼 조화를 이룰 때 생명이 보존됩니다. 율법은 본래 살리기 위해 준 선한 법이지만, 인간이 죄에게 속아 범죄하고 나면(교통법규 위반처럼) 율법의 역할이 나를 보호하는 기능에서 나를 사형에 처하는 정죄의 기능으로 바뀌는 '율법의 역설'이 발생합니다. 복음은 법을 바꾸는 가짜가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켜 법을 지키게 만드는 진짜 능력입니다.
선악과가 필요했던 영적 이유 (의존성과 자유의지):
조건적 불멸과 생명과: 인간은 스스로 영생하는 신(God)이 아니라 매 끼 음식을 먹어야 하고 정기적으로 '생명과'를 공급받아야만 노화되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의존적 피조물'로 창조되었습니다. 생명과를 먹는 유일한 자격 조건은 우주의 행복 원리인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유의지와 품성 발전: 하나님은 인간을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이는 기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지닌 고결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자유의지를 통한 자발적인 선택과 순종을 통해서만 사랑이 깊어지고 품성의 거룩한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선택의 시금석인 선악과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죄인의 죽음과 하나님의 자비: 죄에 오염된 죄인(대도 조세형의 반복적 악습처럼 스스로 죄를 끊지 못하는 인간)이 죽지 않고 생명과를 계속 먹어 영생하는 것은 우주적 재앙이기에 하나님은 생명과를 차단하고 인간을 내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찾아오는 '죽음'은 악의 영원한 확산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자비와 보호책'입니다.
결론: 세상 철학은 '내 에고(나)'를 중심으로 선악을 판단하지만(휴머니즘), 선악과는 선악을 판단하는 절대적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사탄은 마지막 날에도 율법을 훼방하여 생명과를 못 먹게 방해할 것입니다. 비록 에덴의 생명나무는 거두어가셨을지라도,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곧 영적인 생명과를 먹는 것이며, 오늘 예수를 믿는 삶 자체가 훗날 하늘 낙원에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할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