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하루 아주 분주하고 피곤하게 사셨을 텐데, 저녁 시간에 이 긴 말씀을 들으시러 다시 오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더 힘들까요, 듣는 사람이 더 힘들까요? 듣는 사람이 훨씬 힘듭니다. 그래서 아주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도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함께하셔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영적 삶에 큰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저에게 전도회를 요청하는 교회는 대부분 예언 세미나를 요청합니다. 열 번이면 한두 번 정도만 복음 전도 설교를 해달라고 하는데, 이번에도 예언 중심으로 요청이 들어왔지만 제가 내용을 좀 바꿨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을 다루면 처음 오신 분들에게는 좀 어렵고, 기존 교인들에게는 자주 듣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존 교인들과 새로 오신 분들 모두에게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을 준비해서,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내용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에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어차피 세상의 끝은 옵니다. 모든 성경의 예언을 종합하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인간 역사는 끝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라를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내가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가셨기 때문에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아멘. 믿으십니까? 안 믿어도 오십니다.
노아 홍수 당시에 많은 사람이 홍수가 상식에 맞지 않고 과학적이 아니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홍수는 왔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재림은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식선에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재림을 믿든지 안 믿든지, 준비가 됐든지 안 됐든지 때가 되면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아멘. 그분이 오시면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 개개인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가 그날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 주간 동안 드리는 말씀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시간에 과연 누가 살아남아서 영생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깊이 다루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고 싶으십니까, 죽고 싶으십니까? 살고 싶으면 말씀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첫날 말씀드렸던 '성경에 예언된 인류의 역사'는 성경 전체를 가지고 설명해 드린 것이고, 어제 말씀드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신앙'도 성경 전체의 개념을 종합한 것입니다. 오늘 세 번째 날 주제는 원래 포스터에 나간 것과 순서를 좀 바꿨습니다. 원래 순서는 '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본질'로 말씀을 준비했는데, 내용상 넷째 날 주제를 오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바꿨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인간에게 영생이 어떻게 가능한가?'입니다. 이것도 성경 전체를 통해 요약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영생, 즉 영원히 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저희 아이가 한 대여섯 살쯤, 아직 학교에 가기 전이었을 때 갑자기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빠, 하늘나라에 가면 영원히 살아?"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아이가 "아, 지겹겠어"라고 하더군요. 유한하고 제한된 시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영생'이라는 단어는 알지만, 영생이 실제로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저 막연한 생각일 뿐입니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듯이, 인간은 영생이라는 말뜻은 알아도 실제 영생이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연구해 보면 분명히 영생이라는 것이 있고, 우리는 영생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 비밀을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살다 보면 결국 늙어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서 영생할 수 있고,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면 바로 영생으로 갈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 원리가 무엇일까요?
영생의 반대말은 영멸(永滅)입니다. 왜 사람이 죽게 되었을까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영원히 살도록 창조하셨는데 왜 죽게 되었는지, 그 죽음의 원인을 알아야 사는 방법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설명드렸던 선악과를 다시 꺼내야 합니다. 선악과 때문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들으신 설명이지만 잠시 다른 각도에서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9)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동산 중앙에 같이 가까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22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로 보아 영생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과를 계속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왜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까요? 그 죽음의 원인을 알아야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영생의 조건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생명과를 계속 먹고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선악과나무를 생명나무 옆에 두셔서 생명과를 먹으러 갈 때마다 선악과가 보이게 해놓으셨을까요? 이에 대해 『증언보감 3권』에 매우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나무는 하나님이 만물의 소유주이심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서 유보하셨다."
선악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아담과 하와가 누리고 살아가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 자기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즉, '리마인드(Remind)' 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으러 에덴동산 중앙에 가서 그 옆에 있는 선악과를 볼 때, 이 모든 것과 자신의 창조주이자 소유주가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와가 선악과를 먹게 되는 과정과 그 마음의 상태를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행위는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소유주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창조주요 소유주요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면, 선악과를 먹은 것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 과정을 창세기 3장 1절에서 6절의 사건을 통해 세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질문이 참 애매하고 묘합니다. 이렇게 물었기 때문에 하와의 대답이 길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다 마음대로 먹되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냐고 유도하니까 대답이 길어진 것입니다. 그냥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물었으면 "그렇다" 하고 끝났을 텐데 말입니다.
하와가 대답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말이 길어지다 보니 사탄과 조금 친해진 것입니다.
그러자 뱀이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 말을 듣고 나서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함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탄이 뱀을 통해 유혹하고 나니 이제는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먹어도 안 죽을 것 같고, 먹음직하고 보함직하며 먹고 나면 지혜가 생길 것만 같습니다. 최초의 시작은 '불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불신한 것입니다.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은 '불순종'을 가져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남편도 먹은지라"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립니다. 남편 아담은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 흥분한 상태로 다가오는 순간 죽음을 직감했습니다. '아, 이제 죽었구나.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안 먹으면 하와 혼자 죽을 것이고, 내가 먹으면 같이 죽겠구나'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정확하게 상황적으로 쓰면 "여자는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 주매 그도 먹어 준지라" 해야 맞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 먹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분들은 남편분들에게 잘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부조와 선지자』에 설명이 나옵니다. 이제 둘 다 죄인이 되었습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남녀가 평등했습니다.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든 그 위치가 평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함으로 인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굴복해야만 가정이 평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먼저 먹었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에게 굴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셨다고 나옵니다. 신약 성경에도 다 나오는 이야기이니 그냥 참고만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결국 불신은 불순종을 가져왔고,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다시 창세기 3장 14절에서 21절의 내용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숨어 있느냐? 선악과를 먹었느냐?" 하시니 "하와가 줘서 먹었습니다"라고 합니다. "하와 너는 왜 먹었느냐?" 하니 "뱀이 줘서 먹었습니다"라고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께서는 14절에 여자를 미혹한 사탄의 매체가 된 뱀을 저주하십니다.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이에 대해서는 뱀이 진짜 흙을 먹고 사느냐는 신학적 논란이 있지만, 그 뜻이 아니라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는 표현은 그 당시 히브리 사상에서 가장 극심한 저주를 의미합니다.
그다음에 16절에 여자가 저주를 받습니다. 잉태와 해산의 고통이 더해지고,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뱀을 저주한 다음 사람을 저주하기 전, 그 사이에 15절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복음입니다. 사람에게 벌을 내리기 전에, 사람이 죄를 해결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위해 대신 발꿈치를 상하게 될 것인데, 그 발꿈치가 상한다는 것은 십자가 죽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창세기 3장 15절을 통해 인간에 대한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다음에 여자를 징계하신 것입니다.
그다음에 남자가 징계(저주)를 받습니다. 땅이 저주를 받고 종신토록 수고해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하십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결국 죽게 된 것입니다. 불신, 불순종, 그리고 사망으로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하나님이 넌 죽을 것이라며 사형 선고를 하셨지만, 미리 살 수 있는 길을 준비해 놓으시고 선고를 하신 것입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것은 무슨 가죽이었을까요? 100% 양가죽입니다. 이 가죽옷은 아담과 하와에게 죄 때문에 발생한 수치심을 가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춥고 더운 기후 변화가 생겼고 뭔가를 걸쳐야 했기에, 하나님께서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그 당시 에덴동산에 그냥 굴러다니는 가죽이 있을 리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 가죽을 내어준 몇 마리의 짐승이 살가죽이 찢기고 피 흘려 죽어야 했습니다. 이 양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단지 인간의 죄를 가려주기 위해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즉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사건입니다. 이 말씀 전체 속에 죄로 인한 사망과 구원의 계획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 가죽옷은 바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창세기 3장 15절과 21절은 인류를 향한 가장 희망적인 메시지입니다. 죽었는데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것이 바로 양의 죽음이 예표하던 바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먹고 죽게 된 이유를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해 보겠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만물의 소유주이심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해 주는 장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은 행위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만물의 주권자이심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은 행위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는 순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고, 마치 나무 줄기에서 잘려 나간 나뭇가지처럼 된 것입니다.
잘려 나간 나뭇가지는 당장은 싱싱해 보일지 몰라도 뿌리에서 잘려 나왔기 때문에 산 것처럼 보이는 '죽은 잎사귀'입니다. 이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말라 비틀어지기 전에 다시 원줄기에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 구원의 원리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목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믿어 다시 하나님께 연결되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깨달아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무 줄기에서 잘려 나온 가지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원줄기에 접붙임을 받으면 살 수 있듯이, 우리의 생명이 끝나기 전에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접붙여지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아멘.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된 사람이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로마서 11장 17절에 나옵니다.
> "또한 가지 얼마가 꺾였는데 돌감남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로마서 11장 23절 말씀도 잘 새겨보겠습니다.
>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을 세 글자로 줄이면 무엇입니까? 바로 '믿으면'입니다. 복잡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결국 믿으면 접붙임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표현이 많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여러분이 다음의 사실들을 진심으로 믿으면 이미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창조주이심을 믿으면, 아멘.
하나님이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의 주권자이심을 믿으면, 아멘. (말로만 믿으면 안 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요 생명의 근원이심을 믿으면, 아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기 원하심을 믿으면, 아멘.
예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음을 믿으면, 아멘.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믿으면, 아멘.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될 것을 믿으면, 아멘.
다 믿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앞으로 얻을 것이 아니라, 이것을 믿으면 이미 얻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여러분이 잘 아시고 잘 외우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왜 중요하냐면, 방금 말씀드린 '믿으면'의 개념이 이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도 보겠습니다.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시집오시기 전, 6·25 사변 때 폭격이 하도 심하게 오니까 하나님을 안 믿으셨는데도 "하나님, 나 살려주시면 하나님 믿을게요"라고 결심하셨습니다. 이후 부산으로 피난 가셔서 처음에 믿게 된 교회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저와 제 아내는 모태신앙입니다. 저희 부부가 결혼해서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자동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까요? 아닙니다. 목사의 자식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영적으로 다시 나는 것이지, 육신의 혈통으로 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 11절에서도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을 보겠습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문법적 시제로 말하면 '현재 완료'된 것입니다. "영생을 얻을 것이고"가 아니라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이고"가 아니라 "옮겼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얻은 것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완료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접붙임의 원리입니다.
매마르고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가지가 산 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참포도나무의 산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에 의하여 맺어진 열매는 그분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 의해서도 맺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생애와 품성에 접붙여 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곧 믿음이며, 이 접붙임의 과정은 '양자(養子)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호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을 상속받으셨듯이,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형제가 되었기 때문에 상속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이 양자의 원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군대 갈 때가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 내 집총 거부 등의 문제로 갑자기 두 달 만에 영장이 나왔습니다. 제 인생 계획에서 군 생활은 6개월로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법으로는 '2대 독자'는 군대를 6개월만 다녀오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님도 독자이시고 저도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6개월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본적지인 영등포구청에 가서 독자 증명을 하려고 서류를 뗐습니다. 그런데 담당 직원이 보더니 "2대 독자가 아닙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딸을 셋 낳고 아들이 없다가 40세가 넘어서 아버지를 낳으셨으니 아버지는 독자가 맞고, 우리 집에서도 제가 장남이자 외아들이고 밑으로 여동생만 넷이니 당연히 독자인데 왜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보니 고향 친척들이 아들이 안 나오니까 호적상 양자를 하나 데려다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적상 아버님 대에 아들이 둘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걸 해결하려면 양자를 파양(罷養)해야 독자 증명이 되는데, 그러려면 재판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군 입대는 두 달 남았는데 재판을 언제 합니까? 결국 꼼짝없이 군대를 3년 다 다녀왔습니다.
이처럼 양자는 친아들과 똑같은 법적 권한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지만, 본 아들이신 예수님과 똑같은 권한을 누립니다. 아멘.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이 하늘을 상속받으셨듯이, 양자로 들어간 우리도 하늘을 유업으로 받을 상속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자 자격은 호적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가 죄 한 번 지었다고 바로 지워지고, 회개했다고 다시 올리는 식으로 호적이 복잡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집에 양자로 들어간 우리의 이름을 어떻게든 안 지우시려고 부단히 노력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조금 삐뚤어 나갔다고 해서 "아이고, 나는 희망이 없어" 하지 마시고 "아버지, 저 다시 왔어요" 하고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게 구원의 원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의 이러한 접붙임은 우리를 세상과 분리시킵니다. 더 이상 우리는 더럽고 오염된 자들과의 교제를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신앙과 구원은 '구원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에 행하는 의식이 바로 침례(세례)이며, 그것이 새로운 탄생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침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침례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가만히 연구해 보면 물과 피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생명은 물과 피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피)로 죄 사함을 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합니다.
천지 창조 때를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지구가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물(수면)'이 있었고, 그 위에 '성령'이 운행하셨습니다. 즉, 지구는 물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나온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이 죄악 세상이 물에 완전히 잠겼다가 다시 나왔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 홍해를 건넌 사건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물을 통과하면서 집단적으로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출생할 때에도 어머니의 양수(물)에서 나옵니다. 이처럼 우리가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의식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침례의 의미에 대해서 로마서 6장 3절에서 5절에 아주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침례의 의미를 이 말씀처럼 정확하게 설명한 구절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죽으심', '장사', '부활'이라는 세 단어가 나옵니다. 침례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음을 믿는 순간 나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을 믿는 순간 나는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십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처럼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무덤 속에 장사되셨듯이, 우리도 십자가 앞에서 죽었으니 장례식을 치러야 합니다. 그 장례식이 바로 물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 숨을 멈추는 그 순간이 바로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듯이, 물속에서 다시 올라와 숨을 쉬는 그 순간이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정확한 의식입니다. 물을 조금 뿌리는 세례(약식 세례)는 변질된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온전히 상징할 수 없습니다. 혹시 세례만 받으신 분이 계신다면 반드시 이 의미를 깊이 깨닫고 온몸이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성경적인 침례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기에 물 무덤에 장사를 지내고, 다시 올라오면서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구원의 표시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성령으로 나셨기에 거듭날 필요가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에게 모본을 보이시기 위해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침례와 거듭남의 원리를 그림으로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아직 침례를 받지 않으신 분이 계신다면 이 시간에 잘 배우셔서 새 출발을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많은 분을 가르치고 침례를 베풀어 오면서 느낀 점은, 많은 사람이 어떤 영적 수준에 올라가서 자격이 되어야만 침례를 받는 것으로 오해한다는 사실입니다. 침례는 입학식이지 졸업식(수료식)이 아닙니다.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고,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시며 구주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심을 진심으로 믿으면, 그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상태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침례를 자꾸 뒤로 미루는 사람은 반드시 사탄이 시험합니다. 다 깨닫고 나서도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다음에 받겠다고 미루면, 그 다음이 오기 전에 사탄이 가만두지 않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결심이 서면 침례를 받고, 이후에 넘어졌다 일어났다 싸우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침례입니다.
여기 한 사람이 출생했습니다. 태어날 때 우리는 생명이 아니라 결국 사망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렇게 사망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예"라고 대답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이미 여러분 안에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순간 가던 길을 돌이키는 '유턴(Uturn)'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구원이 시작됩니다. 구원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상태에서 생명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하기를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유턴할 때 일어나는 단계들이 구체적인 단어로 나옵니다. '회개'의 원뜻은 가던 방향에서 180도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사망을 향해 가다가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다음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렇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제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성령을 자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의 모든 인생은 성령께서 지도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아멘.
그런데 아무나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깨우쳐 주시고 지도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간절히 원하고 구하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왜 꼭 구해야 주실까요? 저도 이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성령이 그렇게 필수적이라면 그냥 알아서 주시지 왜 꼭 구하라고 하실까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않고 간절함도 없는데 성령이 임하면 큰일 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영혼 구원의 능력이 생기고 품성이 변화되며 사람이 달라지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구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갑자기 전도가 잘되고 품성이 좋아지면 사람이 얼마나 교만해지겠습니까? "나는 올해 네 사람이나 전도했는데, 저 장로님은 선교회장이 되어서 한 사람도 인도 못 하네" 하며 교만해질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을 구하는 기도 없이 능력이 임하면 심각한 부작용이 생깁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고 역사하실 때는 뚜렷한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도의 능력을 더해 주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품성의 변화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간절히 구할 때 성령께서 임하셔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어나실 때 아무리 바빠도, 기도할 시간이 아주 짧더라도 가장 먼저 드려야 할 기도 제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온종일 성령께서 저를 깨우쳐 주시고 가르쳐 주셔서 오늘 나의 삶이 성령의 지도를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된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깨우침을 주시고 그것을 극복할 능력을 주셔서, 오늘 하루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하루가 되게 성령을 내려주십시오." 이 기도가 아침마다 드려야 할 최고의 기도입니다.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4:5)
의(義)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므로 죄인은 율법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하지만 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가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십니다. 이 말이 조금 어렵지만 굉장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어도 여전히 연약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고 애를 써도 잘 안 되고, 하다가 또 넘어지고 실수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늘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히 순종하신 그 의를 우리의 계정에 넣어주십니다.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고 힘쓰면, 예수님이 순종하신 것을 우리가 순종한 것으로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님의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의는 인간의 실패를 대신하여 받아들여지며,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자를 받아 주시고 용서하시며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를 의로운 자로 대접해 주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 사람을 사랑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원리입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사상과 목적의 변화입니다. 세상을 향해 가다가 180도 유턴하여 하나님을 향할 때 목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회개의 참된 증거를 나타내는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도록 고무됩니다. 제가 어제 이 문제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제가 참 목청을 높여 안식일 오후까지 일곱 번 설교를 합니다. 제가 하나 예언을 하자면, 이 집회가 마치고 나도 대부분의 사람은 집회 전과 거의 똑같이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이 예언이 보기 좋게 빗나가기를 바랍니다. 다른 생각 많이 하지 마시고, 여기 나온 딱 한 가지만 달라지면 인생 전체가 바뀝니다. 회개의 참된 증거를 나타내는 사람은 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다른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거듭난 증거이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참된 회개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귀중한 진리를 동일하게 가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거짓이 없는 깊은 사랑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으로 '성화의 즐거움'이라는 소제목과 함께 결론을 맺겠습니다. '성화(聖化)'라는 것은 침례를 받은 후에 영적으로 변화되고 성장해 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죄악 중에서 육으로 태어났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죄 중에 잉태되어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 1절에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의롭게 된 것은 아직 하나도 없는데,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즉 우리가 아직 의로운 일을 한 적이 없음에도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쳐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믿음이 생김으로 이루어지며, 이를 신학적 용어로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며, 이를 거듭남, 중생, 구원받음, 위로부터 남, 하나님의 자녀가 됨이라고 부릅니다.
그다음에 우리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재림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여행자이자 나그네들입니다. 여러분,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지금 재림을 향해 가고 있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많은 교인이 재림을 믿고 예수님이 오실 것을 확실히 압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실제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재림을 정말 믿는다면 다른 사람과 불화한 상태로 여러 날을 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목적지가 그리스도의 재림임을 의식하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는 홀연히 변화되어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을 '영화(榮化)'라고 합니다. 칭의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고 영화도 순간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기간,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과정이 바로 '성화(聖化)'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출발도 물과 성령으로 했고, 영광스러운 변화로 가는 모든 과정의 순간순간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자라나고 성화되는 것입니다.
그 원리가 무엇일까요? 구원의 영역에 들어간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하는 정신입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네 자신을 연단하라."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 합니다. 조금씩 자라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닮아가야 할 모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성화입니다. 당장 예수님과 똑같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마음에 있어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가 실수할 수 있습니다. 넘어집니다. 잠언 24장 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의인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받은 상태에서도 늘 넘어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다시 일어나며, 넘어지는 횟수가 자꾸 줄어드는 것입니다.
칭의를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조금 자라났다가도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시험에 들면 조금 밑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다시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예수님 쪽으로 더 올라갑니다. 그러다 또 누군가 속을 썩여서 한바탕 하고 나면 마음이 침침해지고 우울해져서 밑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아예 밑바닥으로 완전히 돌아가 버리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고 경고합니다. 이러지 말고, 조금 내려왔다가도 다시 주님을 붙들고 일어나서 전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화의 길을 가다가 조금 약해진 지점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거나, 혹은 아직 예수님처럼 완벽하게 되지 못했는데 주님이 재림하셨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까요, 못 받을까요? 구원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문제로 고민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이미 '구원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단계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라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자라남의 과정 속에서 나의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방향이 그쪽으로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이타심이 계속해서 자라나야 합니다. 교만하던 마음이 자꾸 겸손해져야 합니다. 이 교만과 이기심이 가장 뿌리 깊은 죄악입니다. 엘렌 화잇의 『초기문집』에 보면 "우리의 생활에서 이기심과 교만이 사라지면 모든 분쟁은 5분 내에 끝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교회나 가정에서 싸울 때 보면 결국 이기심 아니면 교만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영역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기심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고, 남을 위해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노력하며 교만을 낮추어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고린도전서 15장 51절과 52절 말씀처럼, 마지막 나팔 소리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게 됩니다.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다 미치지 못했더라도 이미 구원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 오실 때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고 살아있던 우리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홀연한 변화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과정입니다.
사탄의 통치는 재림으로 끝납니다. 그때까지 우리에게는 복종시켜야 할 자아가 있고, 극복해야 할 얽매이기 쉬운 죄악이 있습니다. 즉, 재림 때까지는 계속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계속되는 한 성화의 과정은 멈추는 법이 없으며, 이 세상에서 우리가 "내가 완전히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없습니다. 성화는 평생 동안 순종해 가는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 정도면 하늘에 갈 만하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지점은 재림 때까지 오지 않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거룩한 육체를 부여받을 때는 이 세상에 남아 있을 때가 아니라 하늘로 데려감을 입을 때, 즉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우리의 낮은 몸을 당신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때입니다. 명확하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다고 하나님께서 쳐 주셨습니다(칭의). 그러므로 성화라는 것은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완전하다고 인정받은 성도가 그 단계마다 조금씩 자라나는 과정'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자랄 때,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인간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린아이라는 완전한 존재가 더 큰 성인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까? 완전한 존재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순간 우리를 완전하다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그 바탕 위에서 자라가는 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구원을 얻어내기 위해 율법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 과정에는 넘어짐도 있고 용서도 있으며 변화와 성장이 있습니다.
성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죄의 속성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적응하느라 영적인 통증(금단 증상)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체질과 잘 안 맞는 것 같아 힘들지만, 이 단계를 지나고 나면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교만이 겸손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원통함이 용서로, 근심이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되면서 인생에 참된 자유와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화의 과정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하루하루의 삶이 즐겁고 행복해져야 정상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연(鳶)은 실에 매달려 있을 때 비로소 안전하고 자유롭게 날 수 있습니다. 연이 완전히 자유롭고 싶다고 해서 연결된 실을 끊어버리는 순간 자유를 잃고 추락합니다. 기차는 레일 위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롭게 달릴 수 있으며, 레일을 벗어나는 순간 모든 자유를 잃고 파멸합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궤도 위에 올려져 있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살 때 거기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이 죄악 세상에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불행과 근심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법도를 이탈해서 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 안으로 들어와 순종하며 살면, 그 울타리 안에서 진정으로 평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초기 단계에서 조금 힘들더라도 끝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3-14)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물을 마시며 생명력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 그 속에서 계속해서 영생하는 샘물이 솟아날 것입니다.
>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0-23)
앞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찾아올 것이며,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나서 다른 사람들을 진리의 빛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예수를 알자, 예수를 닮자, 예수를 증거하자' 이 세 가지가 우리 인생의 목표입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를 깊이 알고, 깨닫게 된 예수를 삶 속에서 닮아가며, 그 과정 속에서 예수를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많은 사람이 여러분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여 옳은 길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저희는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살도록 창조하셨는데 왜 생명을 잃어버렸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그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을 수 있는지 말씀을 통해 깊은 원리와 깨우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저희가 앞으로는 세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게 하시고,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주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오시는 그 영광스러운 날에 우리가 늘 바라보고 닮아가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인생을 지도하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저녁에 말씀을 들은 사랑하는 주님의 자녀들, 한 분도 빠짐없이 그날에 홀연히 변화되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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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요약 정리
강연의 핵심 내용을 요약한 세 가지 포인트입니다.
1. 영생의 회복 원리 (하나님과의 접접붙임)
인간은 원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으나,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불신하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잘려 나간 나뭇가지가 마르기 전 원줄기에 접붙임을 받아야 살 수 있듯이,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의 끝나기 전 믿음을 통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다시 접붙임을 받는 것(양자 됨)입니다. 이 연합의 공식적인 표식과 출발점이 바로 '침례'입니다.
2. 칭의와 영화, 그리고 그 사이의 '성화'
칭의(稱義):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순간, 아직 의로운 행위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구원의 영역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는 단회적 사건입니다.
영화(榮化): 예수님 재림하실 때 성도가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홀연히 변화되는 최종 단계입니다.
성화(聖化): 칭의와 영화 사이의 평생의 과정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성도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예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성장 과정입니다. 과정 중에 넘어짐과 실수가 있을지라도 주님의 완전한 순종(의)이 우리의 실패를 대신하므로 낙담하지 말고 전진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인생 목표 (알고, 닮고, 증거하자)
성화가 이루어지면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인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교만'이 '겸손'으로 변화되며 말씀의 궤도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아침마다 성령의 지도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며, 인생의 최종 목표를 "예수를 알자, 예수를 닮자, 예수를 증거하자"라는 세 가지 방향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