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손의 사명 1 - 신계훈 목사
https://youtu.be/Lx-iGBh6Q2w?list=PLEys37Sq65LRXljyj5XHTQlxVdXPit8iX
아멘. 우리 아침부터 사랑의 종소리를 들으신 행복하신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방금 우리의 귓전을 울려주는 사랑의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지금 들리는 사랑의 오케스트라, 이 매미들이 왜 저렇게 우는 줄 아세요? 서로서로 사랑을 구하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짝을 찾는, 사랑을 구하는 사랑의 종소리입니다.
여름 밤에 왜 반딧불이가 반짝반짝하는지 아세요? 저렇게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반딧불이는 그 빛으로 사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종류마다 전부 빛의 파장이 다릅니다. 길이가 다르고 광도가 달라요. 그래서 그 파장과 빛의 강도에 따라서 거기에 맞는 자기의 짝을 부르는 것입니다. 전부 다 다릅니다. 그래서 여름 밤에 이렇게 반짝이는 반딧불이도 사랑의 반딧불이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온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을 듣게 되고 보게 됩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는 다시 그런 사랑의 종소리를 듣고 말씀 앞에 서게 됐습니다.
목적 없이 사는 것은 방황입니다. 까닭 없이 사는 것은 방탕입니다. 돈 없이 사는 것은 곤란입니다. 믿음 없이 사는 것은 불안입니다. 희망 없이 사는 것은 절망입니다. 사랑 없이 사는 것은 불행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살아야 할 까닭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짧지만 이 대답을 찾기에는 분명한 이 3박 4일 동안, 참으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찾아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짧지만 아주 짧지만은 않은 이 며칠, 그러나 목적 있게 산 며칠, 뜻 있게 산 며칠, 가치 있게 산 며칠, 그리고 이렇게 살고 나서 후회하지 않을 며칠이었습니다.
저는 집회를 할 때마다 "우리가 이렇게 집회를 할 때 예수님이 오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말 이럴 때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가 참 잘 준비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곳에서 가장 후회할 것 없는 시간을 보냈음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저희는 이 시간을 짧지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먼저 우리가 이렇게 구태여 살아야 할 까닭이 무엇인지를 말씀과 경험 속에서 찾았습니다. 그다음에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지금'이라고 하면 이 시대이고, '해야 할 일'이라고 하면 그것은 사명입니다.
세상에 밥 먹고 나서 뚜렷하게 할 것 없는 사람, 할 일 없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직장에 나간다"고 하지만 직장에 나가는 건 결국 밥벌이입니다. 그래서 밥벌이 이상으로 할 일이 없는 사람, 밥벌이해서 또 먹고, 먹고 또 밥벌이하고, 밥벌이해서 또 먹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 외에는 아무 목적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 즉 진화론자들은 생명이 저절로 생겼다고 믿으며 인간이 우연히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히 존재했기 때문에 살아야 할 이유나 목적이 없습니다. 우연히 존재한 것에 무슨 목적이 있고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무목적입니다. 그저 되는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공허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는 기준이나 법칙도 없습니다. 우연히 존재했는데 무슨 법칙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럿이 하는 것,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부부로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많아지니까 이것도 맞다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때 이 동성애를 정신에 잘못된 문제로 간주했지만, 이제 그런 사람이 많아지니까 이것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창조하셨다는 걸 안 믿으면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세상이 얼마나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불행에 빠지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이 창조 신앙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존재하는 까닭과 사는 목적, 해야 할 사명,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법칙을 분명히 알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생명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다. 생명의 본질이자 원인이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사랑이라 그랬습니다, 사랑.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생명은 태어나지 않습니다. 태어난 생명도 사랑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가치가 없고 목적이 없으며 이유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에 사랑이 없으면 생명을 계속하여 창조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가는 데도 사랑이 필요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살아 있는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생산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 우리 삶의 모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요한일서 4장 7절과 8절에 있는 말씀처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는 이 놀라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마침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하며, 여기 지으신 다섯 권의 책을 아우르는 총서를 보게 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서 쓰신 것입니다. 그게 무슨 책이지요? 제일 첫 번째는 <부조와 선지자>, 둘째는 <선지자와 왕>, 셋째는 <시대의 소망>, 넷째는 <사도행적>, 다섯 번째는 <각 시대의 대쟁투>입니다. 이것을 '각 시대의 대쟁투 총서'라 부릅니다. 다른 책들이 많이 있지만 이 다섯 권은 창세기부터 계시록을 설명하고 해설한 놀라운 영감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대쟁투 총서의 첫 번째 책인 <부조와 선지자>의 제일 첫 번째 말씀이 뭔지 아십니까? 맨 1장 첫 번째 줄의 말씀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책의 시작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로 시작됩니다.
그다음에 이 다섯 권의 맨 마지막 책인 <각 시대의 대쟁투>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의 말씀이 뭔 줄 아십니까? 제가 그것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대쟁투가 끝나면 어떻게 되는가? 6천여 년 동안 계속된 선과 악의 대쟁투가 끝나게 되면 그게 어떤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가 들어보세요. 이것이 <각 시대의 대쟁투> 우리 한글 성경으로 하면 마지막 장 마지막 절입니다.
> "대쟁투는 끝났다. 죄와 죄인들은 없어졌다. 온 우주는 깨끗해졌다. 오직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온 우주의 만물을 통하여 고동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 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나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선포한다."
이게 끝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리고는 끝이 납니다.
여러분, 생명은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의 흐름이라 그랬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흐름을 막은 것이 죄입니다. 사랑의 흐름이 막히면 죽음이 옵니다. 불행이 옵니다. 왜요? 사랑은 생명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이 사랑에 반응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생겨요? 행복합니다. 이 사랑의 흐름이 막히는 것이 곧 불행이요 죽음입니다. 그게 불신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에 의해서만 일깨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큰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베푸셨습니다. 배신하고 변질한 인간의 사랑에 자극을 주셨습니다. 거기서 인간의 사랑이 다시 되살아나서, 마침내 죄가 없어지는 날 온 우주는 원자로부터 무한한 세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사랑의 선포로 죄는 없어지고, 무궁한 행복과 무궁한 생명이 끝없이 흘러갈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영생하는 곳이지, 단순히 장수하는 곳이 아닙니다. 장수는 죽지 않고 질질 오래 사는 것을 뜻하고, 영생은 행복과 기쁨이 넘치면서 오래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히 흐르는데 이것을 막을 죄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의하여 모두 사라졌습니다. 죄인과 죄는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을 이 땅에서 배우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하늘에 가면 또 사랑의 흐름을 막아버릴 테니까요.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다릅니다. 석가는 그런 말을 했지요. "사랑하려고 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 왜냐하면 사랑하면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로우니,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다 괴로운 일이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고. 불교에서 말하는, 석가가 가르친 자비와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는 이 사랑 속에서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야 할 분명한 의미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남들이 말하는 잘난 사람만 사는 게 아닙니다. 가문이나 모습, 또 재주가 없고 때로는 몸이 연약하고 병들어서, 누가 보기에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내 자신을 살펴볼 때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 같은 게 살아서 뭐 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나 같은 게 살아서 뭐 하나' 이 대답을 찾지 못하면 죽습니다. 자기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가치를 나에게 묻지 마십시오. 가만히 살펴보면 내 안에는 가치가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가치가 없어요. 내 가치를 국회의원한테 가서 묻지 마세요. 대통령한테 가서는 아예 묻지도 마세요. "너는 한 표다"라고 할 겁니다. 선거할 때나 필요하다고 할 겁니다. 시장한테 가서 묻지 마세요. 세금이나 잘 내라고 할 겁니다. 여러분, 사람의 가치를 자신에게 묻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마십시오.
길에 지나다니는 많은 아이들, 어른들이 보기에 조그마한 아이들, 붙들고 가다 보면 귀찮은 아이들, 때때로 성가신 아이들. 예수님 당시도 그랬고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아이의 값이 얼마인지를 그 어머니한테 가서 물어보세요. "이 아이가 값이 얼마나 나가는 아이입니까?" 하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아이에게 '값'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조차 허락지 않을 것입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이 가장 귀한 것을 영어로 '프라이스리스(Priceless)'라고 합니다. 값을 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값이라는 말을 붙여도 안 됩니다. "이 아이는 천하 우주와도 못 바꾼다, 내 목숨과도 바꾼다"라고 부모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 아이의 값과 가치는 그 아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고 탄생하게 한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부모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값은 인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도에 천호동교회로 갔을 때였습니다. 그때도 홍수가 났었는데, 풍납동 일대가 아주 허허벌판이었고 물이 다 쓸고 지나가서 수재민들이 그리로 피난을 왔던 때입니다. 참, 지금은 거기가 별천지가 됐지만요. 그래서 정말 거기 있던 사람들은 다 가난한 사람들이고 진흙탕을 뒤집어쓴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거기에 천호동교회 1대 전도사로 갔습니다.
가서 방문을 가려고 정류장에 섰는데, 거기 수재민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등에 업고, 정말 수해를 치른 그 모습 그대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는 동안 포대기에 있던 아이를 앞으로 돌려가지고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있더라고요. 제가 거기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야, 저 어머니에게는 그 아이가 등에 있어도 보고 싶어서 못 견뎌 가지고 앞으로 돌려 입을 맞추는구나' 하고 그 아이가 다시 보였습니다.
쥐가 얼마나 밉습니까? 저희 아이들이 미국에 머무는 곳 옆에 오두막 같은 작은 집을 마련해 놓고 제가 아이들을 두고 왔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제 아내와 가서 아이들이 비워둔 집을 가보니까, 쥐가 들어와서 살림을 차렸더라고요. 얼마나 미운지 쥐똥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옷들을 다 가져다가 빨고 일광욕을 시키다 보니 쥐에 대한 증오심이 여기까지 올랐습니다. 쥐 때문에, 쥐 때문에 하여튼 쥐만 나오면 그냥 안 두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쥐에 대한 미움이 가득 차 있었는데, 서랍을 열던 제 아내가 소리를 질렀어요. 가보니까 옷 서랍 속에 쥐가 새끼를 낳아가지고 젖을 먹이고 있는 거였습니다. 서랍을 딱 여니까 한 마리는 떨어지고 세 마리가 어미를 쫓아서 뛰어 나옵니다. 아내가 저를 불러서 제가 빗자루를 들고 뛰어갔어요. 그런데 이 쥐가 방에 딱 갇혔는데, 그 새끼를 젖에 물린 채로 딱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당당하게요. 제가 그 쥐 눈을 딱 마주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지고 엄숙해졌습니다. 새끼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빗자루를 들었다가 멈췄고, 제 아내도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문이 이쪽에 있어서 그 앞을 지나갈 때 때리면 때릴 수 있었는데, 그만 제가 이미 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쥐가 뛰어가다가 한 마리는 떨어지고 두 마리를 달고서 문지방을 넘어서 그대로 도망치는 모습을 봤습니다. 살아난 것이지요.
제가 그 순간 어미 쥐를 보면서, 새끼에게 젖을 물린 채로 안고 저를 바라보던 그 눈에서 생명의 엄숙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쥐새끼가 다시 보이더라고요. 쥐가 제가 생각하던 그런 쥐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죽게 되었는데도 새끼에게 젖을 물린 채 안고 뛰는 거였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가치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을 이 땅에 있게 한 모체, 부모, 그리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예언의 신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이 바로 이것입니다.
> "하나님 자신은 모든 자비의 근원이시다. 그분의 이름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다. 그분은 우리의 가치에 따라 우리를 취급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묻지 않으시고,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신다." (<산상보훈>, 52-53)
우리가 가치가 있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가치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가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랑할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으려면 아침마다 화장해야 되고 머리 빗어야 합니다. 좋은 데 시집가려면 공부 많이 해야 되고 이런저런 조건을 갖춰야 하며, 또 뭘 좀 가져가야 합니다. 사람이 가치 있어지려니까 그렇게 힘이 드는 겁니다. 왜 인생이 이렇게 고달프고 피곤합니까? 사랑을 받아야 행복한 건 누구나 알지만, 사랑을 받으려니 가치가 있어야 하니까요. 세상은 그러니까 세상 사는 게 힘이 드는 겁니다. 저를 무가치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무가치함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분이 계시는데, 바로 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머리를 빗었든 안 빗었든, 산발을 했든 안 했든 그것과 관계없습니다. 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세요. 왜냐하면 가치가 저한테 있는 게 아니라 어머니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 앞에서는 안식이 있습니다. 안식이 있습니다. 제가 오늘도 전화를 걸었더니 어머니의 첫 말씀이 "요새 살찌니?" 그거였습니다. "살찌니?" 저는 미국에 있을 때도 1년에 몇 차례씩 어머니를 뵈러 가면, 어머니는 언제나 두 마디 말씀을 하셨어요. 첫째는 보자마자 "먹어라"였고, 먹고 난 다음에는 "자라"였습니다. "먹고 자라." 정말 저희 어머니 앞에서는 자식으로서 안식이 있습니다. 자기 존재가 가져오는 무거운 부담을 다 내려놓는 겁니다.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식은 누구만 줄 수 있는가 하면 창조주만이, 나의 생명을 나에게 준 분만 나에게 안식을 줄 수가 있어요.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죠. 시집간 딸이 재미있게 살 때는 친정어머니 생각을 안 하다가, 아이를 낳을 때는 굳이 친정어머니 앞으로 가요. 왜 그렇다고요? 사람을 낳는 그 엄청난 인생의 부담을 내려놓을 곳이 친정어머니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그때, 시어머니 앞에서 너무 소리를 지르면 흉이 되고 남편도 "무슨 여자가 저래" 합니다. 그러나 그걸 다 그대로 받아줄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 존재와 인생의 무거운 부담을 내려놓고 쉴 때는 자기에게 생명을 준 그분 앞에만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칠일만이 안식일입니다. 창조주만이 안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바로 세 천사의 기별의 핵심입니다. 세 천사의 기별이 다른 것이 아니라 안식의 기별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하나님만, 인간을 사랑으로 만드신 하나님만 인간에게 안식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 누리는 안식이지요.
제가 이제 이 집회가 끝나면 이 집회를 녹음한 테이프를 하나 구해서 저희 어머니한테 보내 드립니다. 어머니가 그걸 들으세요. 미국에 있을 때도 집회가 끝난 다음에 테이프를 보내 드리면 들으시다가 전화가 옵니다. "얘야, 네가 보낸 테이프를 듣다가 네가 너무 애쓰는 것 같고 애처로워서 껐다" 하십니다. 그런 어머니 앞에 제게 안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세 천사의 기별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조건 없는 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제 말씀드린 짐승의 표는 무엇입니까? 거래가 있어야만 유지되는 관계, 즉 가치가 있어야만 거래가 성립되는 관계가 바로 바벨론의 질서라는 사실입니다. 그게 짐승의 표입니다. 사고파는 매매를 못 하게 하는 것, 즉 거래를 끊으면 무너지는 게 바벨론 기별이고 바벨론의 질서입니다. 그게 짐승의 표입니다.
그러나 거래가 끊어져도 끊어지지 않는 것, 생명을 주고받은 사이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 천사의 기별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 마지막을 읽어보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은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은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안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벨론의 질서는 거래로 유지됩니다. 가치가 있어야만 관계가 유지되는 게 바벨론의 질서입니다. 장사꾼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 즉 하나님과의 이런 사랑의 관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사람은 밤낮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세 천사의 기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가져오는 기별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안식일교인'이라는 이름이 정말 좋은 이름입니까? 세상에 이것은 정말 좋은 기별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입니다. 안식은 창조주만 줄 수 있기 때문에 창조의 기념일인 제칠일만이 안식일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이치가 맞습니까? 창조주만이 안식을 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존재의 부담을 맡아주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가 여러분에게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안식이 없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안절부절못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음으로, 진정으로 영원한 쉼을 얻는 안식일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게 세 천사의 기별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강조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드높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깊은 뜻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오늘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여러분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들이십니다.
자, 그러므로 오늘 지금까지 드린 이 말씀을 정리하면서, 이 말씀을 한번 우리 따라 읽으시면서 정리를 해 보시죠.
*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태어났다.
* 나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 내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요, 사랑을 받기 때문에 영원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다.
*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무한한 가치가 주어진 나를 누구도, 아무것도 무가치하게 만들 수 없다.
*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지니고 굳세게 살 것이다.
굳세게 살 만합니까? 아멘. 내가 가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가치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가서 내 가치를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못났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못나면 못날수록 더욱 사랑하시는 사랑을 이제 아십니까? 자식이 못나고 병들면 병들수록 부모는 더 마음을 씁니다. 여러분 자식들 중에 어느 자식은 공부 많이 시키고 어느 자식은 공부 못 시킨 자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누구한테 더 가는 줄 아세요? 못 가르친 자식에게 더 갑니다. 사실입니까? 내가 못 배웠기 때문에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못 배울수록 더욱 가련하게 여겨서 사랑하는 부모처럼, 내가 육신으로 병들고 불구가 되고 못났으면 더욱 사랑하십니다.
딸들을 다 시집보냈는데 시집가서 잘 사는 자식이 있고 못 사는 자식이 있으면, 누구를 더 사랑하십니까? 못 사는 자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지만 여섯 번째 사는 남편도 행복을 주지 못하는 그 딸자식을 찾아서, 이른 새벽 아침도 굶고 먼 길을 달려가 그 자식을 찾아가셨던 주님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 생애를 가만히 읽어 보시면, 예수님이 주로 누구를 찾아다니셨는가 하면 못 사는 자식, 고생하는 자식들, 불행한 자식들을 찾아다니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자기가 무가치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조건인 것을 기억하시고, 이제는 결코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의식에서 벗어나서, 정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지니고 주님 오실 때까지 굳세게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 이제 이런 말씀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이러한 생명의 가치와 자존심과 존엄성을 지니고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오늘 오전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제는 이 귀한 생명 가지고 지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받으신 자료를 펼쳐 보십시오.
'마지막 때와 마지막 교회와 마지막 기별과 사명'. 대격변의 20세기 말, 엄청난 도전의 21세기를 조명하는 이 놀라운 기별을 저희가 제한된 짧은 시간이지만 신속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늘어나는 인구, 썩어가는 물과 공기, 회생이 불가능한 환경 오염, 고삐 풀린 사회 도덕, 거세지는 천재지변, 심각해지는 식량 위기, 여전한 전쟁의 위협과 핵전쟁의 공포. 어디로 향하여 달음질하고 있는 세상입니까? 나갈 문이 없는 위기입니다. 참으로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미래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대답을 성경에서 찾습니다. 요즘 우리는 과학 문명의 놀라운 발달로 엄청나게 달라진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생활은 편리해졌어도 마음은 평안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빠르게는 다녀도 마음은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볼거리는 홍수처럼 많은데도 마음은 여전히 답답할 뿐입니다. 열린 시대라고 떠들썩한데도 미래는 여전히 닫힌 채로 불안할 뿐입니다. 지금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가 어떤 희망을 가지고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 놀라운 대답을 말씀에서 찾습니다.
자, 여기 다 같이 보시면서, '마지막 때'의 사람은 마지막이 좋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에 대하여 최고의 관심이 있습니다. 운동 경기를 할 때 요새 올림픽이 열렸지요. 사람들이 막 손에 땀을 쥐고 어떤 사람은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잠을 안 자고 끝까지 경기를 지켜보는 까닭이 무엇 때문인가요? 끝에 대한 관심입니다. 끝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고 그러는 거예요. 철야 기도회를 하면 그렇게 잠이 오는데, 이 운동 경기 보는 사람들은 잠 한 숨 안 자고도 밤을 거뜬히 새웁니다. 뭐 때문에 그래요? 끝에 대한 관심입니다. "저게 어떻게 되나 보자, 끝이 어떻게 되나 보자" 이것입니다. 신문에 보니까 우리나라의 이봉주 선수가 마라톤을 뛰었는데 3초가 늦는 바람에 2등을 했어요. 2시간 12분인가 얼마를 뛰는데 그 긴 시간 중 겨우 3초 부족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간 동안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조인 거예요. 끝이 어떻게 되나 보자고요. 끝에서 이긴 사람이 이긴 겁니다. 도중에 아무리 빨리 뛰어도 끝에 가서 지면 지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끝이 좋아야 좋은 겁니다. 모든 것은 끝에 달렸습니다.
저는 아침에 오다가 신문을 봤습니다. 저는 이분들의 모습을 잠시 살펴봤습니다. 만약에 이분들이, 물론 역사가 만들어 놓은 소용돌이 때문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한두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역사적인 공동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을 한두 사람에게 넘기는 것은 떳떳하지 못합니다. 역사가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본인들을 위해서도 나라를 위해서도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사형을 구형받고, 또 한 사람은 무기를 구형받은 것은 우리 민족과 국가의 비운이자 수치입니다. 이분들이 끝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런 과거의 일들이 그렇게 결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형 언도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남긴 말 가운데 "죄를 짓더라도 죽을 죄는 짓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고 사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고달프고 힘겨우니 죄를 짓더라도 죽을 죄는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형수들이 자기의 끝이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더라면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이 자기가 지은 죄가 그런 불행을 가져오는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거짓말을 할 때는 언제나 끝에다가 거짓말을 합니다. 하와를 거짓말할 때 어떻게 했죠? "죽지 않는다"라고 끝에다 거짓말을 했어요. 이 종말에 대한 거짓말, 끝을 속이는 거짓말입니다. "너 그렇게 안 죽어, 절대로 안 잡혀, 안 죽어, 괜찮아." 끝을 속이면 전체가 속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할 때 다른 신자들이나 사람들에게 믿게 하기 가장 어려운 게 무엇인가 하면 영혼 문제입니다. 종말에 관한 건 아무리 가르쳐도 에덴동산에서부터 한 번 속아 넘었기 때문에, 사단이 그걸 첫 거짓말로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만 세뇌가 되어 가지고 아무리 영혼 문제를 가르쳐도 계속 혼란을 일으킵니다. 사단이 그것으로 재미를 보았고 그것으로 속였습니다. 지금도 무엇으로 속이는가 하면, 개인의 끝은 사망이요 세상의 종말은 재림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개인에게는 죽지 않는다고 속였고, 재림은 없다고 속이거나 휴거라는 말로 또 속입니다.
끝이 좋아야 좋은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이나 저의 끝은 어디서 어떻게 맺어질까요? 끝이 분명히 있습니다. 어느 휴즈 감독이라는 분이 설교를 하고 났는데, 큰 농장을 가진 분이 그분에게 "감독님, 저 끝없는 농장과 땅이 다 제 땅입니다" 하더랍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의 재산, 동산, 부동산,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50년 후에도 그렇습니다. 그때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무엇을 하며 있을 것인가, 그때 내 운명은 무엇일까. 이것을 생각하면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 줄 모릅니다. 지금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는가가 그때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지막에 관한 관심, 최고의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면 예수님께서도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 하신 설교가 감람산 설교인데, 그 마지막 설교의 주제도 마지막에 관한 것, 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 주제도 예루살렘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끝에 모든 것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며 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너희가 정말 세상의 끝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면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를 읽고 깨달으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연구가 바로 끝에 관한 연구이며, 끝에 관하여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니엘서를 연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라는 말이 성경 신구약 전체에서 딱 다섯 번 나옵니다. 원어로 '에트 케츠'라는 말인데 딱 다섯 번 나옵니다. 이 다섯 번 나오는 것이 전부 다니엘서에 나옵니다. 다니엘서 중에서도 8장부터 12장까지 마지막 부분에 꼭 다섯 번 나옵니다. 다른 데는 안 나옵니다. 그래서 저희는 지금 마지막 때,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말세에 관해 이야기할 때 다니엘서에 가장 분명히 나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제가 그래서 도대체 다니엘서가 말하는 이 마지막, '마지막 때'라는 말이 막연한 말인지 아니면 특정 시기를 가리키는지 집중적으로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성경을 보면서 작은 논문을 써봤습니다. 아주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하면, 마지막 때란 말을 다섯 번 썼는데 이 다섯 번이 전부 '한 때 두 때 반 때'의 끝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때부터 세상의 마지막이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시작, 즉 1,260년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죠? 1,260년이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납니까? 중세 교황권이 시작된 538년, 6세기부터 프랑스 혁명으로 중세 로마 교황권이 꺾이는 때까지입니다. 혁명이 10년 동안 계속됐는데 그것이 끝나는 1798년까지입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끝나는 때부터 세계 역사에서는 근세사, 즉 말세의 시작이라고 적절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때가 정말 마지막 때라고 하는 사실을 저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정말 한 때 두 때 반 때의 끝이 그렇게 중요한가? 여기 보십시오. 이 1780년대를 전후해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계사적인 대지진과 근세사의 시작인 프랑스 혁명이 터졌습니다. 둘째는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중세기의 실력자였던 교황권이 꺾였습니다. 셋째는 바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1789년에 저 신대륙 미국에서는 조지 워싱턴이 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같은 해 미국이 등장했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바로 그 세대인 1781년,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함으로써 동력을 얻고 산업 혁명이 시작됐습니다. 다섯 번째로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이 땅에는 공산주의, 공산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1780년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이 시대에 세 가지 혁명, 즉 산업 혁명, 공산 혁명,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미국이 등장했으며 중세 가톨릭이 몰락했습니다.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한 때 두 때 반 때 끝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성경 다니엘서가 이 한 때 두 때 반 때의 끝을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라고 말한 것이 아주 당연하고 분명함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에 무슨 일이 있겠다고 말씀했는지, 제가 이거 전체를 다 공부하지는 않지만 잠깐 말씀드리면서 바로 이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사명을 찾기 위하여 아주 간단한 배경을 한두 마디로 요약한 다음에, 우리 쉬셨다가 뒷부분에서 핵심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다니엘서 11장을 보십시오. 다니엘서 11장은 다니엘 10장부터 시작됩니다. 다니엘 10장 14절을 보면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이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환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지막 때 당할 일을 쭉 설명해 오는 과정에서, 11장 40절에 보면 "마지막 때에"라고 나옵니다. 이 마지막 때가 어느 때인가 하면 아까 말한 다섯 번 중에 한 번입니다. 이것이 어느 때라 그랬습니까? 한 때 두 때 반 때가 끝나는 1798년경입니다. 이때 "남방왕이 그를 찌르리니 북방왕이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회오리바람처럼 그에게로 마주 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이미 공부를 해서 압니다.
이곳의 남방왕, 이집트를 이어서 영적으로 말하면 굽인데, 마지막 때 영적인 남방은 애굽이고 북방은 본래 유대 민족을 정복한 시리아였습니다. 바벨론에서 계통을 이은 시리아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시리아는 로마에 멸망당하고, 로마는 로마 교황권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신약 시대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의 북방은 중세 교황권입니다. 그다음에 본래 남방은 다니엘 11장에서 이집트(애굽)이지만, 그것을 이어서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중세기 1,260년 기간이 지나간 다음에 두 증인인 신구약 성경이 베옷을 입고 예언할 그 끝이 되는 때가 나옵니다. 계시록 11장 7절에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라며 영적인 남방왕 애굽이 등장합니다.
즉, 1798년의 10년 전인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프랑스 혁명 세력이 다니엘 11장 40절의 남방왕 역할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북방왕인 중세 교황권을 누가 찌른다고 요한계시록 11장이 예언했는가 하면, 1,260년이 끝날 무렵 바로 영적인 애굽인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교황권이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세력이 곧 공산주의 혁명으로 바뀌어 나갑니다. 그것은 역사의 해석이며 그 재료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남방은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된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입니다.
그리하여 여기 보면 마지막 때인 프랑스 혁명 시기, 그때 프랑스 혁명으로 증거된 무신론 세력이 교황권을 쓰러뜨립니다. 그러나 북방왕 교황권이 거기서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니라 회오리바람처럼 다시 일어나서 공산 무신론 세력을 향하여 반격을 가해 모든 나라들이 거기에 휩쓸려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중세 교황권의 머리 중 하나가 "칼에 상하여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11장에는 남방왕이 북방왕을 찌른다고 되어 있고, 계시록 13장에는 칼에 상하였다고 되어 있으니 같은 예언입니다. 참으로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마지막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세상을 주도할 세력은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칼에 상하였다가 다시 치료되어 온 땅이 이상히 여겨 따르게 되는 교황권입니다. 그다음에 곧이어서 누가 등장하는가 하면, 바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이 때를 전후하여 땅에서 새끼양 같은 짐승이 올라옵니다. 이게 누구였지요? 미국의 출현입니다. 바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그 해에 미국에서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등장합니다. 딱 맞는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남아서 세상을 주도할 세력은 종교적으로는 교황권이고 정치적으로는 미국입니다. 이게 계시록 13장의 예언입니다. 이 세력이 세상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한동안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어요. 세상에는 이것 외에 다른 세력이 있었습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점령했던 공산권이 있었습니다. 소련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계시록 13장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가 건재하는 동안은 미국과 교황권이 세상을 다 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산 세력은 퇴장을 해야 13장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소련이 살아 있는 동안, 공산주의가 있는 동안은 13장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각 시대의 대쟁투>나 성경은 공산주의 세력이 끝까지 남아서 버틸 것이라는 예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소련이 온 세계에 그토록 강대국으로 남아 있는 동안에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한 번도 계시록을 해석할 때 소련을 최종 세력으로 넣지 않았습니다.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공부하다가 온 세상을 공산주의가 뒤덮을 것만 같은 때라도, 목사님들이 성경을 가르치거나 사경회를 하면서 붉은 용이나 붉은 세력들을 공산주의 세력이라고 가르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계시록 13장에 보니까 프랑스 혁명 무렵 올라온 새끼양 같은 미국이,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교황권을 도와준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드디어 개신교의 나라이자, 중세기를 장악했던 교황권과 인연을 끊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라를 세웠던 순례자들의 나라 미국이, 그 나라의 성격을 계시록 예언대로 바꾸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역사 최초로 백악관에서 현 교황과 카터 대통령이 악수하는 일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교황은 미국에 개선입성하듯 들어갔고, 타임지에서 세계 최고의 인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정말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진 현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11장에 보니까 죽게 되었다가 남방왕, 즉 프랑스 혁명으로 일어난 무신론적인 공산 세력에 의하여 찔림을 당했던 북방왕이 홍수에 넘침 같이 반격을 가하여 남방을 넘어뜨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공산 세력을 넘어뜨린다는 예언이 다니엘 11장 40절로 45절 사이에 나옵니다. "아, 저 이야기는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 저렇게 뒤늦게 얘기하는구나"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기 전인 1979년에,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회기동교회에서 다니엘서 단기 신학을 했습니다. 그때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써놓고 가라고 단기 신학 반에서 결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책을 써놓고 갔는데, 그게 바로 <다니엘서 새 연구>입니다. 이 책의 전신입니다. 그때 저는 예언의 신과 우리 교회가 다니엘 11장에 대하여 쓴 모든 해석을 연구해 보면서, 놀랍게도 다니엘 11장 40절에서 45절의 내용에 대해 화이트 부인께서 "이 예언이 곧 이루어진다"고 하신 심각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걸 자세히 연구해서 1999년, 지금부터 약 17년 전(강연 시점 기준)에 책을 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사 놓으신 그 빨간색 큰 책, <다니엘서 새 연구>를 가보시면 나옵니다. 17년 전에 쓴 책입니다. 그 해석을 어떻게 해놨느냐 하면, 제가 임의로 한 해석이 아닙니다. 예언의 신과 성경의 모든 자료를 확인해서 장차 공산 세력이, 즉 영적인 애굽인 프랑스 혁명을 이어받은 공산 세력이 죽게 되었다가 살아난 북방왕에 의하여 정복당하고 압박당하리라는 이야기를 거기에 써놓았습니다. 최근에 와서 다시 내린 해석이 아닙니다. 예언의 신에 기초를 둔 해석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책에 써놓고도 한동안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소련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해석은 그렇게 해놓고 말하려니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해석은 분명히 그렇게 내렸는데, 제가 1988년도에 한국에 나와서 어느 집회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가 "괜히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다"라며 혼이 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틀릴 수가 없어서, 3년 뒤인 1991년 12월 말 공식적으로 공산주의의 종말이 왔습니다. 공산주의가 끝이 났습니다.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사임하면서 공산주의의 끝이 왔다고 타임지 표지에도 대대적으로 실렸습니다. 이것은 성경 다니엘 11장 40절에서 45절의 예언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누구도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총 한 방 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소련은 핵탄두가 2만 개나 있었습니다. 버튼 하나 누르면 세상이 불바다가 되는 그런 소련을 힘으로 무너뜨릴 세력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무너뜨렸는지 아세요? 계시록 13장에 보니까 땅에서 올라온 새끼양 같은 짐승인 미국과, 프랑스 혁명으로 죽게 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교황권이 결탁하여 세상을 완전히 장악하고,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선과 악의 대쟁투를 주도하리라는 분명한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소련이 무너진 다음 해인 2월 달에 나온 타임지에는, 여러분이 이미 소개받으신 대로 레이건 대통령과 교황이 1981년 바티칸 도서관에 모여서 둘이 신성 동맹을 맺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폴란드에서 일어난 노조 활동을 통하여 어떻게 동유럽의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고, 결과적으로 소련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에 대하여 의논하고 일을 진행했던 것입니다. 10년 동안 그 일이 비밀리에 계속됐고, 10년 후에 소련이 넘어가 버렸습니다. 미국과 교황권이 신성 동맹을 맺은 그 둘의 힘으로 공산주의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게 어디의 예언입니까? 2,500년 전에 기록된 다니엘서 11장 40절~45절의 예언이자 계시록 13장의 예언이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게 역사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어떻게 소련과 공산주의를 무너뜨릴 것인가 하는 이 아이디어를 교황이 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에 나온 타임지에는 성모 마리아 기사가 나오는데, 어떻게 공산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마리아가 가르쳐줬다고 가톨릭에서 공공연히 말을 합니다. 마리아가 현 교황에게 1917년 파티마의 발현 기록을 통하여 가르쳐 줬다고 전해집니다. 희한한 일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다니엘서에서 말한 마지막 때의 놀라운 역사적 사건과 증거가 우리 눈앞에서 똑똑히 벌어지는 시대입니다. 공산주의와 소련이 저렇게 무너질 줄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것이 이미 기록되어 있었고, 마침내 이 사실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미리 안 사람은 영감의 기별을 통하여 이 빛을 받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뿐입니다. 영감을 통하여 이 놀라운 기별을 이미 전달받고 있었다는 엄청난 사실입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이게 보통 일입니까?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은 미국은 세상 끝날까지 건재할 것이며, 절대로 그냥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강대국으로 끝까지 남아 있겠다는 성경의 예언이 똑똑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황권의 세력은 더욱 확대될 것입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입니까? 우리는 그다음에 일어날 사건과 지금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며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한 10분만 쉬신 다음에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다 같이 잠깐 기도드리시고 첫 번째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놀라운 일입니다. 이 엄청난 예언을 2,500여 년 전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가르쳐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거의 2,000년 전에 사도 요한을 통하여 또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 이 빛을 깨달은 저희들의 사명과 특권이 얼마나 큰지 깨달을 때 놀라울 뿐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이런 기별과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까닭은 우리가 이때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시여, 그것을 지금 깨닫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저희가 세상 역사의 참으로 마지막 때에 살고 있음을 정직하게 깨닫고 확실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끝에 대하여 사단에게 속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저희들과 이 시간 계속하여 함께하여 주시옵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 10분만 쉬고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자리에서 다 일어나셔서 물도 마시시고 속히 제자리에 돌아오시면 좋겠습니다.
---
## 📌 핵심 요약 정리
이 강연은 우주와 인간 존재의 본질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여, **성경(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 예언을 통해 입증된 역사의 종말과 성도의 사명**으로 이어지는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 1. 존재의 본질과 가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사랑이 곧 생명과 안식의 원인:** 온 세상(매미, 반딧불이 등)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며, 생명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흐름입니다. 이 흐름을 막는 것이 죄이며, 죄의 결과는 불행과 죽음입니다.
* **조건 없는 가치 부여:** 인간의 가치는 스스로에게나 타인의 평가에 있지 않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부모가 못나고 아픈 자식을 더 사랑하듯, 하나님은 우리의 조건이나 가치를 묻지 않고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십니다.
* **진정한 안식:** 존재의 부담을 다 받아주는 분은 창조주뿐이기에 제칠일 안식일만이 진정한 안식을 주며, 이것이 '새 천사의 기별'의 핵심입니다.
### 2. 예언으로 증명된 '마지막 때'의 역사적 성취
* **마지막 때의 시작(1798년):** 다니엘서가 말하는 '마지막 때'는 중세 교황권의 1,260년 통치(한 때 두 때 반 때)가 끝나는 1798년(프랑스 혁명기)부터 근세사가 시작됨을 뜻합니다.
* **세상을 주도하는 두 세력:** 요한계시록 13장에 따라 종말의 시기에는 종교적 세력인 교황권(북방왕)과 정치·경제적 세력인 미국(새끼양 같은 짐승)이 연합하여 세상을 주도하게 됩니다.
### 3. 소련(공산권) 몰락의 비밀과 성경 예언의 정확성
* **예언 성취를 위한 공산권의 퇴장:** 과거 세계의 절반을 장악했던 무신론 공산 세력(소련)이 버티고 있는 한 성경 예언(미국과 교황권의 세상 장악)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성경과 재림교회는 소련을 종말의 최종 세력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 **미국과 교황권의 신성 동맹:** 1991년 12월, 강력한 핵보유국이었던 소련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이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교황이 맺은 비밀 '신성 동맹'의 결과였으며, 다니엘서 11장(북방왕이 남방왕을 침)의 예언이 역사 속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 결론:**
역사의 종말과 끝에 대해 사단은 늘 "죽지 않는다", "재림은 없다"라며 '끝'을 속이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 예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되어 왔습니다. 이 놀라운 예언적 빛을 깨달은 성도들은 생명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지니고, 사단에게 속지 않으며, 마지막 때에 남은 자로서 해야 할 사명을 깊이 깨닫고 굳세게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