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모태 = 생명과학" - 신계훈 목사
https://youtu.be/2gjoiRL9yok?list=PLEys37Sq65LRXljyj5XHTQlxVdXPit8iX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 주간 정말 바쁘고 분주하셨지요? 정말 오늘은 그 모든 즐거웠던 며칠 동안의 성도들의 모임이 저녁으로 끝나는 시간입니다. 특별히 찬양을 통하여 우리 한 주일 동안의 기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사무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며칠 동안은 온 세계의 이목이 이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UN과 온 세계 매스컴들이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하여 초미의 관심, 최고의 관심을 기울인 며칠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시간에 이곳에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특별한 집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지금 평양에 있지 아니하고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 땅에 왜 평화가 더 계속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는 평양에 있지 않고 바로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우리 6·25 전쟁 때 온 우리나라가 전 공산군의 침략의 발길에 짓밟혀서 낙동강을 마지막 교두보로 정말 가물거리던 그 민족, 한 나라의 최후의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부산을 지켜주셨습니다. 부산이 만약에 짓밟혔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때 지켜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 민족의 운명을 지켜주시고, 이 부산 도성에 이토록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성도들을 주셨음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저는 이 땅에 왜 하나님이 평화를 더 주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바로 여러분에게서 분명히 찾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께서 그런 깊은 확신과 인상을 이번 기간 동안 분명히 보여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많은 분들은 처음 뵙는데도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요. 참 많이 깊은 정이 든, 이런 우리 하늘 백성인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오전 아주 급하지만 요한복음 공부를 마쳤습니다. 중앙교회를 가득 매운 우리 귀한 성도들과 함께 요한복음을 끝냈는데, 사실은 끝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끝내지 않기로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맨 마지막 장인 21장 25절에 보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 그분의 마음을 다 기록을 한다면 이 땅이라도 그 기록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 이야기는 끝이 안 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결코 끝날 수 없는 책이에요. 왜요?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음을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을 우리가 공부로 끝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그런 영원한 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콜리어 목사님은 그분의 식당 벽에 이런 귀절을 붙여놓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만큼' 하시고 그의 팔을 펴 보이시고 돌아가셨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그분에게 물을 때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팔을 벌린 채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그만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끝없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한국 전쟁이 터졌을 때 여기를 방문했던 외국의 한 종군 기자가 자기 눈에 띄었던 한국의 가장 인상 깊었던 진풍경이 무엇이었는가 기록한 글이 있습니다. 그는 그 전쟁통에 집은 다 부서지고 먹을 것도 없고 모든 것은 풍비박산 폐허가 된 그때, 그의 눈과 관심을 정말 끌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전쟁통에 한국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길거리에서나 아무 데서나 부끄러움 없이 열심히 젖을 빨리고 있는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그는 그 기록에서 "나는 젖을 빨리고 있는 한국 어머니의 모습에서 한국의 내일을 보았다" 그랬습니다. 이 나라는 희망이 있는 나라다, 저 젖을 먹는 아이가 마침내 한국을 폐허와 불행에서 건질 것이다, 저런 어머니가 있는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움 없이 아무 데서나 그 전쟁의 소요 속에서도 아이를 감싸고 젖을 먹이는 그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한국의 내일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 젖을 먹은 아이들이 자라서 오늘의 우리 조국을, 오늘의 교회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첫날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왜 태어났다고 했습니까? 사랑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왜 삽니까? 사랑받기 위하여 삽니다. 그래서 행복은 사랑을 받을 때 그것이 행복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때,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때 그것이 행복입니다.
장미꽃은 왜 피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아름다운 색깔과 향기와 빛깔을 드러내는 것입니까? 장미는 사랑 때문에 핍니다. 이 꽃들이 왜 피는가 하면 사랑 때문에 피는 것입니다. 사랑받기 위하여 피는 것입니다.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피는 것입니다. 호박꽃은 왜 핍니까? 거기다 꿀까지 감춰 놨어요. 사랑은 이렇게 달콤하다는 것입니다. 새는 또 왜 우는 것입니까? 사랑 때문에 울어요. 사실 새들이, 뻐꾸기가 울고 할 때 왜 우는지 아세요? 사랑을 찾느라고 우는 것입니다. 짝(Mate)을 찾는 거예요. 사랑을 찾기 위하여 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정로의 계단>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이 피어나는 꽃봉오리마다, 뾰족뾰족 돋아나는 풀잎마다 기록되었다. 공중을 즐거운 노래로 충만하게 하는 아름다운 새들, 향기를 풍기는 연연하고 고운 꽃들, 청청하게 무성한 수풀의 수목들, 이 모든 것은 우리 하나님의 인정 많고 자비가 넘치며 그들의 행복을 증거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게 참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온통 지구는, 우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스튜디오예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꽃잎 하나에다가, 이 모든 잎사귀 하나에다가 적어놓으셨으니, 적혀진 모든 글자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만들고 있는 세포가 수조 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 세포의 맨 핵에 핵산이 있고, DNA가 사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백질을 암호로 만든 두 가닥이 꼬여진 그런 나선형의 긴 사슬이 나옵니다. 거기에 무엇이 적혀 있는가 하면, 사람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단백질 암호로 적혀 있습니다. 이것을 쭉 줄을 풀면 얼마나 긴가 하면, 우리 세포에 쓰여진 많은 메시지들, 그 암호들을 다 이으면 태양을 한 바퀴 돌고 오는 길이입니다. 그 사슬, 그 긴 사슬에 쓰여진 모든 기별의 한마디 한마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메시지가 우리의 세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만 이상이 있어도 유전 형질에 이상이 생겨서 엄청난 질병이 생기고, 유전적인 병들이 생기고 큰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생명, 그것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면, 사람은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옆의 분을 신뢰가 안 되시면 이렇게 서로 보시면요, 눈이 뭐 하는 기구인 줄 아십니까? 이거 광학 기구인데, 빛에 대하여 반응하는 기구입니다. 빛을 비추면 여기에서 반응을 합니다. 그 결과로 보는 것입니다. 코는 뭐 하려고 이렇게 여기 있습니까? 코가 냄새에 대하여 반응하도록 된 것이 이겁니다. 화학적인 반응을 합니다. 꽃의 향기를 맡고 음식 냄새에 대해 반응하도록 된 것이 코입니다. 이 입은, 혀는 맛에 대하여 반응합니다. 전부 화학적 반응입니다. 귀는 뭐 하는 건가요? 소리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온몸이 전부 반응하는 기구예요. 전부 그런 기계들을 달고 있는 것입니다. 이 피부가 그냥 가죽이 아닙니다. 이 세포가 전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촉감이라 하는 모든 감촉을 다 느끼는데, 이게 전부 신경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지기만 해도 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온몸이, 인간의 오관과 육감이 온통 반응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반응하는 존재예요.
그런데 이게 어디에 대하여 반응하게 되어 있는가 하면, 음식을 보면 눈으로, 맛으로, 냄새로 반응을 해요. 그런데 사랑할 때는 이 모든 것이 총동원됩니다. 엄마가 아이를 사랑할 때 어떻게 해요? 만지면서, 입 맞추면서, 아이 냄새 맡으면서 뽀뽀하면서 사랑할 때 이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그것을 또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행복입니다.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반응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사랑할 때 어떻게 하나요? 젊은이들 사랑할 때 눈으로 해요. 사랑하는 사람은 벌써 눈을 보면 압니다. 그렇지요? 불꽃이 탁탁 튀기는 것 보이죠? 얼굴이 빨개지면서 사랑으로 반응해요. 손목을 잡고,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반응이란 말을 영어로 'Respond'라 하고, 'Responsible'은 책임이 있다는 뜻인데,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반응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Responsibility'가 책임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반응할 책임이 있는 존재를 사람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하여 반응하지 못하면 그것이 불행입니다.
행복은 무엇입니까? 사랑에 반응하는 것을 행복이라 그럽니다. 맞습니까? 행복이 뭐냐, 사랑에 대하여 바르게 반응할 때 그것을 행복이라 그럽니다. 여러분, 고양이를 보면 고양이가 가까이 와서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자꾸 와서 몸을 부빕니다. 왜요? 사랑해 달라는 거예요, 만져 달라는 거예요. 고양이도 사랑을 원해요, 사랑에 반응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반응하기 위하여 삽니다. 그것이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하여 반응할 대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엄청난 무한한 사랑, 이 사랑을 경험할 때 비로소 인간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 이 땅의 최고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남녀가 사랑으로 서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잖아요.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낳은 자식과 부모가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게 행복입니다. 저희 집사람이 지금도 어머니날만 되면 자꾸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일생 최고의 어머니날을 한번 보낸 게 언제인가 하면, 우리 앤드루스 대학교에 있을 때 우리 아이가 유치원을 다녔는데 그때까지 기저귀를 차고 있었어. 그런데 어머니날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나 봐요. 그래서 유치원에 갔다 오다가 집에 들어오더니 뭘 엉거주춤하게 숨기고 들어왔는데, 여기서 뭘 꺼내는가 하면 학교 화단에 있는 가시 돋친 장미를 꺾은 거야. 그걸 여기다 감춰가지고 와서, 들키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와가지고 '엄마, 해피 마더스 데이!' 하는데 우리 집사람 눈물이 돌았어요." 최고의 어머니날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리 아이들이 있는 미국에 제가 먼저 혼자 잠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딸아이가 혼자 있다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제가 시차가 있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깨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애가 벌써 학교를 가고 없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요만한 슬립 카드를 하나 내 옆에다가 놓고 갔어요. 여기다가 "굿모닝 아빠" 그랬어요. 영어하고 한국말을 같이 섞어서, "It's good to have you home. 아빠 집에 와서 정말 좋아요. Sleep long, 오케이?" 오래 잘 자라는 거예요. 내가 아침 8시 클래스에 가야 하기 때문에 떠난다고 하면서, 침대 옆에 아침으로 캐럿 주스(당근 주스)를 짜놨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당근 주스를 짜다가 침대 옆에 갖다 놓은 거예요. 그다음에는 "여기 수제비도 있어" 하더라고요. 지난번 여름에 할머니 집에 가서 수제비 만드는 것을 배워가지고 와서 수제비를 만들어 놓고 간 거예요. 그다음에는 솥에는 밥이 있다고 하면서 "아빠 갔다 올게" 하고서는 여기다가 하트 그림을 그려놓은 요런 카드를 써놓고 갔어요. 아, 이거 보니까 정말 살맛 나데요. 이게 사람 사는 맛입니다. 이런 거예요. 그 수제비 먹으면서 감개무량하더라고요, 정말로.
여러분, 사람은 사랑 때문에 삽니다. 주고받을 때, 그때가 자기 삶의 보람과 가치와 의미를 아는 때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 한 편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답답한 편지를 한 상담자에게 썼습니다.
"우리 부부는 65세이며 미국 사람입니다. 아들 둘은 의사이고 장남은 은행가입니다. 두 딸을 대학원까지 졸업시키고 모두 결혼을 잘해서 가정부를 둘 만큼 부유하게 살고 있습니다. 다섯 남매의 교육과 결혼비 때문에 우리는 상당한 빚을 졌고, 남편의 건강이 나빠져 살림이 어려워졌습니다. 아이들은 거의 우리를 방문하지 않으며, 한번 전화로 도와달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파산 신고를 하고 작은 아파트로 옮기라더군요. 이런 자식을 다스리는 법이 없습니까?"
자식 때문에 다 내놓고 병들었는데, 어떻게 방 좀 옮길 수 있게 도와달라 했더니 이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이것을 불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불행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오전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부모의 사랑은 짝사랑입니다. 죽어라 하고 아이들 키우고 먹이고 이렇게 해도 못 알아줘요.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계시는데, 엄마가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보살펴 준 것을 아이들은 몰라줘요. 이 짝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더디 깨닫는 것은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왜 사람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왜 남편 죽을까 봐, 아내 죽을까 봐, 아이들 병나면 죽을까 봐 왜 이렇게 애간장을 태웁니까? 왜 이렇게 소아과에 아이들이 많이 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왜 남편이 병들고 아프면 왜 겁이 나요? 죽으면, 남편이 죽으면 사랑에 반응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사랑에 반응할 수가 없어요. 왜 아이가 죽는 것이 겁이 나는 것입니까? 사랑에 반응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불행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사랑하려면 믿어야 사랑을 할 수가 있어요. 믿지 못하면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해야 사랑하는 결과로 생명이 발생합니다. 사랑, 그것은 믿음이 있어야, 믿음이 기초가 되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생명이 태어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사랑이 가져오는 위대한 공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첫날 말씀드린 대로 사람의 생명이 어디서 태어납니까? 어머니의 모태에서 태어납니다. 뜨거운 사랑이 만나서 그것이 응집되고 결집되는 장소, 생명이 태어나는 궁전인 어머니의 모태에서 생명이 탄생합니다, 사랑의 결과로.
요한복음 3장에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그런 사랑이, 영원한 생명이 어디서 태어나는지 모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요한복음 3장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보시고 말씀을 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물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거기서 우리가 탄생했습니다. 그 놀라운 어머니의 사랑이 결집되어 거기서 생명이 탄생했습니다.
사랑은 혼자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세기에 보면 단수가 아니라 "우리"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최고의 사랑의 관계가 하나님의 "우리"라는 말 속에 표현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도록 부부도 같은 인간을 둘로 쪼개신 것입니다. 왜요? 혼자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랑이 만날 때 완전한 또 다른 인간이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런데 이 생명이, 이 사랑이 죄 때문에 불순해졌습니다. 더 이상 그 사랑만 가지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이 만나 탄생된 생명은 70~80년 얼마를 넘기지 못하고 끊어지고 맙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이 존재하기 위하여는, 다시 만들어지기 위하여는 무슨 사랑이 와야 돼요? 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영원한 완전한 사랑이 다시 이 땅에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그것을 물었습니다. 이 땅에서 나지 아니한, 자연인이 아닌 영원한 생명은 어디서 태어나는 건가요? 40이 넘은 나이 많은 사람은 어디서 모태를 찾는 겁니까? 그것을 물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가 묻는 대답, 영원한 생명이 태어나는 자궁이 어디냐, 모태가 어디냐 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게 어디라 그랬어요? 십자가라고 얘기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무한한 사랑이 결집된 것입니다. 거기서 쏟아져 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발생한 거예요. 영원한 생명이 십자가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가 시간이 없어 다 하지는 못합니다마는 시편 103편에 나오는, 거기 "새벽의 자궁으로부터"라는 구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 모태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말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영생의 모태가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만 생명이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태어나는 엄청난 고통과 엄청난 사랑의 희생이 십자가에 모여서 거기에서 영원한 생명이 발생한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이 말을 당장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약 1년이 지난 후에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나도 들려야 하리니", 십자가입니다. "그때 네가 똑똑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네가 원하는 그 질문의 대답이 네게 경험될 것이다."
그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니고데모는 똑똑히 그 장면을 직시했습니다. 위에서 짓이겨진 입술과 고뇌를 겪으면서 손발에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하나님의 모습을 봤습니다. 드디어 운명하시고 옆구리가 터지는 것을 봤습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상한 바람이, 성령의 바람이 니고데모의 가슴에 세차게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놀라운 생명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그의 가슴에 탄생된, 십자가라는 모태로부터 자신이 태어나는 영원한 생명을 그날 경험한 것입니다.
그가 경험한 다음에야 그는 그날 예수님과 감람산 깊은 밤에 단둘이 속삭였던 이 이야기를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고, 내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음을 십자가에서 직시했노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내게 영원한 생명이 경험되었고, 그것을 요한이 받아서 요한복음에 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응집되고 폭발되어 주어진 바로 그곳이며, 여러분과 저의 새 생명이 발생한다는 사실, 이 놀라운 과학을 경험하시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요한일서 4장을 보십시오. 이게 그리스도교의, 아니 구원의 최고의 과학입니다. 십자가에서 발생하는 사랑 때문에 발생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한일서 4장, 꽃을 통해서도 사랑을 말씀하셨고 공중에 노래하는 새를 통해서도 이 사랑을 말씀하셨던, 보여주셨던 그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여기 9절입니다. 같이 한번 저와 읽어 주세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의 사랑이 꽃을 만드시고 새들에게 사랑의 노래를 가르치신 그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 표현된 곳, 사랑을 주신 곳이 어디라고요?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인하신 것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어야 무엇을 만들어 낸다고요? 생명을 만들어냅니다. 아가서 8장에 나온 대로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여기 <시대의 소망>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은 멸망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보았을 때, 찬탄과 존경의 마음이 충만하여 이 사랑의 위대함과 그 자상함을 표현할 적절한 언사를 찾지 못하여 세상을 향하여 '보라' 부르짖었다. '보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가.' 이것은 사람을 얼마나 가치 있게 보시는가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으심으로 인생을 고상하게 하셨다. 타락한 인류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갖기에 합당한 처지가 되게 하셨다. 이러한 사랑은 무엇에든지 비교할 수가 없다. 귀한 허락은 가장 깊이 명상할 제목이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을 십자가에 비추어서 연구할수록 그의 자비와 온유와 공평과 의로 섞인 용서를 깨닫게 되는 것이요, 마침내 우리는 거기서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어머니, 여자가 생명을 탄생시키려면 사랑에 반응을 해야 생명이 발생합니다. 이성이 사랑에 서로 반응을 해야 그 결과로 생명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원리입니다. 우리의 영생은 어떻게 발생합니까? 십자가에 우리가 반응할 때 그 결과로 영생이 발생합니다. 사랑에 반응해야 생명이 태어나는 것, 이것은 생물의 진리입니다. 그것은 법칙이요, 생명이 태어나는 법칙입니다. 이성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에 서로 반응할 때, 여자가 가진 사랑과 남자가 가진 사랑, 그게 하나님이 나눠 주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반응할 때 생명이 태어납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죄 없는 사랑, 완전한 사랑에 인간이 반응할 때 거기서 무엇이 발생합니까? 영원한 생명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영생의 비결입니다. 생명이, 영생이 존재하는 과학입니다.
의사가 이 사람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려면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의사들 손에 무엇을 가지고 다녀요? 조그만 플래시를 가지고 다닙니다. 그래서 이 사람 죽었나 살았나 보려면 어떻게 해요? 눈을 열고 거기다 플래시를 비추어 봅니다. 눈의 동공이 빛에 반사하여 수축하면 산 사람이고, 뻣뻣이 굳어서 그대로 있으면 그건 죽은 사람이거나 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반응해야 산 사람입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은 반응하지 못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죽음보다 강한 사랑인 십자가의 사랑에 사람이 반응해야 그 사람이 산 사람입니다. 반응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십자가에 보이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 실연)입니다. 거기서 이 사랑을 인간에게 발산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믿음'이라 그럽니다. 여기에 믿음으로 반응하면 무엇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영원히 사는 생명입니다. 십자가에 반응하지 않으면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본래 만들 때 무엇으로 만들었어요? 흙으로, 무기물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은 어디로 가야 돼요? 흙으로 가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나 여러분이나 지금 화장하고 가꾸고 목욕하고 이렇게 옷 입히고 하지만, 참 이 살았다는 게 별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지금 숨 떨어지면 요새같이 더운 날 냉동 안 시키면 말이에요, 3~4일이면 썩어요. 냄새납니다. 부인도 남편도 아이도 오지도 않아요, 냄새난다고요. 그러면 실려 나가서 흙에 묻혀버리면 금방 썩어요. 그게 우리 인간입니다. 흙덩이들이고 한 줌의 흙입니다. 사실입니까? 여기에 다 앉아 있는 우리가 지금 다 살아서 이렇게 놀라운, 참 놀라운 이야기인 사랑의 이야기를 하지만은, 우리가 다 죽으면 한 트럭 흙으로 끝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흙덩이 같은 인간이 사랑에 반응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과학입니까?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태어나는지, 아니면 흙으로 돌아가는지 이것을 결정하는 놀라운 분수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십자가에서 들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땅에서 들리면 사람들을 내게로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끌리는 것입니까? 사람이 어디에 이끌려요? 사랑에는 이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엄청난 사랑의 활화산이 폭발된 다음에 엄청난 인력이 생긴 것입니다. 인간이 거기에 이끌려오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거기에 이끌려온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그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참으로 이 사랑에는 누구나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사람이라도 반응할 수 있습니다. 지난 1994년 1월 26일 자 신문을 보니까 "멍든 가슴에서 토해내는 애절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뇌성마비 고아 10명이 쓴 시집을 소개했는데 읽으면서 가슴이 참 뭉클했습니다. 이들은 가슴속 깊이 새겨진 소외의 상처와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신나게 뛰어놀던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비틀어지는 병을 얻자, 하늘과 같았던 부모들이 몰래 떠나가는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시집에는 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절망과 고통, 혹은 외로움에 대한 원망에서부터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 이런 것들이 오히려 삶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담겨 있습니다.
여기 시 중에 23살 된 김소영 군이 쓴 시가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병원에 옮겨져서 부모도 기억하지 못하고 고향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 아이가 쓴 <그리운 아버지를 찾아서>라는 시입니다.
"그리운 아버지를 찾아서 떠나보는 발길은 타오르다 사라지는 불꽃과 같고, 구름처럼 떠돌다 물결치는 나의 마음은 갈 바를 모르네. 그리운 아버지를 찾아서 사랑을 전하면 나도 가슴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며 뜬구름에 작은 꿈을 싣는다, 나의 정성을 다하여."
이 아이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또 한 아이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사랑을 할 수 있으니까."
사랑만 할 수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뇌성마비라 할지라도, 몸이 뒤틀어지고 의식이 있어서 사랑만 할 수 있으면 행복하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행복하다, 언제나 꿈을 갖고 살아가니까. 나는 행복하다, 나에게는 내일이 있으니까."
여러분, 몸이 뒤틀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뇌성마비 고아들도 사랑에 반응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여기 아마 여러분도 이것을 보셨을 겁니다. <주님과 주고 가는 십자가>를 쓴 송명희 양 이야기입니다. 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태어나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녀는 정말 사는 것을 원망하며 저주했습니다. 여러 번 죽으려고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죽을 수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택시 운전하시다가 폐병에 걸려서 피를 토하고, 집은 전세 싼 집을 찾아다니느라 전전긍긍 이사 다니며 정말 죽고 싶어서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지만 죽을 방법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날, 그녀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녀는 이 사랑에 세차게 반응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만히 앉아서 읽지 못하고 발로 꼬고 달팽이처럼 몸을 쉰 다음에, 발로 성경을 짚어가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송명희 양이 십자가의 사랑을 가슴에 깨달은 다음부터 막 입에서 시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감사와 노래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래서 시를 쓴 게 무려 380편이 넘습니다. 손으로 쓴 게 아니라 손을 쓰지 못하니까 불러서 쓰고, 발가락으로 연필을 꽂아 쓰고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동안 구약을 6번 읽었고 신약을 22번을 읽었습니다. 그녀가 쓴 십자가의 시를 보면, 비참했던 그녀의 삶이 십자가의 사랑에 반응함으로 아름다운 찬송의 시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시를 썼어요. 정말 아주 힘겹게 쓴 글씨입니다.
> "주 예수의 고통을 생각하면 내가 당하는 아픔을 참을 수가 있고, 주 예수의 하신 일을 생각할 때 나에게 있는 모든 일이 피곤하지 않으며, 주 예수님의 낮아지신 모습을 기억하니 높은 데 있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주 예수님의 맛보신 고난을 느껴볼 때 내게 있는 고난이 자랑스럽게 보이며, 주 예수의 찔리심을 기억하면 나는 나를 괴롭게 하는 가시가 괜찮아진다. 주 예수께서 하신 기도를 들으면 나의 기도 부족함이 발견되고, 주 예수님 흘리시던 보배로운 피는 나의 무익함을 깨닫게 하시며,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니 주를 향한 나의 짐이 가벼워진다.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을 때에 나의 소망이 넘쳐서 견고해지고, 주 예수님이 나와 함께 다니시니 나에게 있던 두려움이 모두 사라진다."
여러분, 사람이 십자가에 반응하면 생명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로 진짜 삶을 시작하는 겁니다. 어떠한 삶도 십자가에 반응하면 감사와 존재의 기쁨과 가치로 넘친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이 사랑은 표현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됩니다. 사랑은 표현을 전제로 합니다.
저는 지난번 우리 신학과 학생들 연수회에 아주 특별한 강사 장로님을 모셨습니다. 저 안면도에 계시는 최용한 장로님입니다. 거기는 우리 교단 학교는 아니지만, 안면도 고남에 있는 교회를 장로님이 세우셔서 안식일을 지키는 선교 학교입니다. 거기 교장이신 장로님이 오셔서 하신 당신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 안면도가 아주 한 3만 명의 주민이 사는데, 옛날에 밀가루나 옥수수가루 배급이 많을 때는 온 안면도가 전부 신자가 되는 것 같았지만, 그 구호물자가 끊어진 다음에 교회가 싹 주저앉았어요. 그래서 여러 해 동안 교회가 70~80명, 100명도 못 되는 교인들로 자라지 못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 교회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반응들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이 교회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채우자는 결정을 한 후에, 1988년에 교회를 새로 짓기로 작정을 했어요.
그래서 참 2억, 3억이 넘는 목표를 세우고 모금을 했는데, 한 수입도 없는 65세 된 할머니 한 분이 50만 원을 서약하셨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집을 짓기 위하여 50만 원을 드리고 싶으니까, 하나님이 50만 원을 제게 꼭 주세요" 하고 기간을 정하고 기도를 드렸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에게 이 50만 원이라는 큰돈이 갑자기 생길 리가 없습니다. 한 달 기도가 마치는 그날 아침에 아들과 식사를 같이 하는데 아들이 말하기를, "어머니,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소가 새끼를 가졌어요. 그런데 이게 수컷을 낳아야 돈이 되는데 알아보니까 암컷이래요. 수컷을 낳으면 100만 원이고 암컷을 낳으면 50만 원이래요" 그랬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머리에 번뜩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얘야, 그 소가 만약에 네가 알아본 대로 암컷이 아니고 수컷이 태어나서 100만 원을 받게 되면, 너 나한테 50만 원 줄래? 그거 내가 사랑하는 우리 하나님 성전 짓는 데 바치고 싶다" 그랬더니 아들이 막 웃으면서 "어머니, 암컷으로 판명이 됐는데 그게 어떻게 수컷이 되겠습니까?" 했습니다. 할머니는 "그건 나한테 맡겨라" 하시고는 그때부터 더 열심히 기도를 드렸어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제가 정말 주님을 위하여 바치고 싶은데, 저 소가 수컷으로 바뀌어 태어나게 해주십시오."
어느 안식일 날 밤에 소가 새끼를 낳는다고 소동이 났는데, 할머니가 다리가 떨려서 일어나지 못하셨답니다. 그래서 외양간에 가봤더니 암소가 새끼를 낳는데 발부터 나오는 겁니다. 발이 나오면서 보니 수컷인 거예요. 수컷이 나온 겁니다. 할머니가 외양간에 엎드려서 눈물 흘리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금 있더니 또 한 마리가 나온다는 겁니다. 이번에도 수컷이 또 나왔어요. 쌍둥이 수컷이 나온 겁니다. 이번에는 아들이 더 놀랐습니다. 아들의 얼굴이 엄숙해졌어요. "어머니,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머니 기도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저도 100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아멘. 아들은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이었고 며느리도 안 나오는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해서 150만 원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1992년에 이 놀라운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들과 며느리가 전부 침례를 받았습니다. 자녀들도 유학을 보냈습니다. 이리하여 그 농어촌에 돈 없는 곳에서 이런 이적이 생기면서, 3억 건축 헌금이 기한이 되기 전에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전부 걷혔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 장로님은 이 교회를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직원회에 내놨지만, 이 교회는 절대 자라지 않는 교회로 이미 소문이 난 교회였어요. 여러 해 동안 전도했는데 결코 전도가 안 되었고, 벌써 수십 년째 그렇게 굳어 버렸습니다. 장로님이 1992년 6월 소그룹 복음전도 세미나에 다녀오신 다음에, 9월 1일부터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30명에게 침례를 베풀기로 목표를 세우고 7개 구역반을 나누어 4~5명씩 구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도록요. 그랬더니 1992년 연말에 30명 목표가 넘는 35명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1993년도에는 40명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기도하며 6개 구역반을 만들었습니다. 그해 1993년에 46명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교인이 81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해 연말에 기존 신자들과 새 신자들이 모여 단체 사진을 찍으려고 침례 받은 사람을 세어보니, 1년 반 동안 침례 받은 81명 중에 딱 두 사람이 모자라더랍니다. 알아보니 다 교회에 잘 나오고 있고 한 사람은 돌아가셨고 한 사람은 이사를 가신 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100%가 다 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분들은 1994년 올해 안식일이 52번 있기 때문에, 매 안식일 한 사람 꼴로 침례를 주기로 결정을 하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벌써 1월 첫 안식일에 5명, 2월에 6명, 3월에 8명 벌써 이렇게 나가니 올해 안에 70명 이상의 침례를 베풀 수 있는 완전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가 그분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참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거기 집사님 중에 한 분이 교회를 나오시는데, 7년 이상 교회를 나오시는 분인데 남편이 알코올 중독자였어요. 교회를 반대하는 정도가 아니고 얼마나 아내를 때리는지, 그래서 이 집사님이 여러 번 성경책도 다 찢기고 어떤 때는 온몸에 멍이 들어서 약을 붙치고 나오시고, 너무 멍이 많이 들면 교회를 못 나오시고 참 안타까운 날들이 7년 이상 계속됐습니다. 이제 교회를 새로 짓고 위에 예배를 드리는데, 어느 안식일 날 현관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요. 집사님들이 뛰어나가 보니까 이 남편이 와가지고 현관 통유리를 손으로 때려 부순 거였습니다. 문이 부서진 건 문제가 아닌데, 남편의 손목 동맥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거예요. 그래서 참 예배를 드리다 말고 차를 4대를 동원해서 막 1시간 거리에 있는 저 서산읍 병원까지 달려갔습니다.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는지 벌써 의식을 잃었고, 10분만 늦었어도 목숨을 건지기 힘든 그 지경까지 갔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엎드려 기도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수혈을 하고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남편이 의식을 되찾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니, 유리 하나 깬 거 돈 받으려면 한 사람만 오지 이렇게 여러 사람이 올 게 뭐 있느냐"고 하더랍니다. 부인이 울면서 "여보, 이 분들이 유리값 받으러 온 게 아니야" 했습니다.
그 남편이 입원해 있는 동안에 이 교회가 팀을 짜가지고 구역반별로 매일 방문을 간 것입니다. 그때가 10월 달이기 때문에 한창 바쁜 추수 때라 형제도 바쁘고 가족도 돌보지 못하는 때인데, 이 구역반들이 매일 먹을 것과 과일을 싸가지고 매일 방문을 간 것입니다. 드디어 여러 주일 만에 이분이 퇴원하는 날, 교회에서는 "혼자 퇴원하지 마시라, 우리가 모시러 가겠다" 해서 교회 차가 여러 대 갔습니다. 가가지고 짐을 다 싣고 그분을 가운데 모시고 에스코트를 해서 돌아왔습니다. 다음 안식일 날, 그분이 부인과 함께 교회를 나왔습니다.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의 인도로 1993년에 5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지금 4명의 구도자를 또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저 사람이 교회를 나가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하던 사람이래요. 온 동네가 지금 놀라움에 가득 찬 것입니다. 그러면서 집사님 말씀이 "요새 우리 집은 진짜 신혼 생활이에요" 그러더랍니다. 너무너무 사는 게 재미있대요.
여기 또 한 집사님은 "나도 이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느꼈으니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되겠는데, 나는 방법이 없어" 하다가 남편을 졸라가지고 집에 여유 공간에다가 조그만 목욕탕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시골이기 때문에 목욕탕이 없어서 목욕을 하려면 1시간 밖에 있는 공중목욕탕을 가야 해서, 적어도 1년에 6개월은 목욕을 못 하시는 동네 노인분들이 계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목욕탕을 만든 다음에 평소에 꼭 주님께로 인도하고 싶었던 동네 분들을 모셔다가, 여자분들을 한 분씩 두 분씩 모셔다가 물을 따뜻하게 데우고 목욕을 시켜 드리면서 직접 때를 밀어 드리는 거예요. 정성껏 때를 밀어드리고, 그다음에 벗어놓은 옷에 고의로 물을 조금씩 뿌려가지고 "아이고, 옷이 젖었네요" 하고서는 미리 준비해 둔 새 속옷을 꺼내서 입혀드리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점심때 오신 분이면 점심을 대접하고, 오후에 오신 분은 저녁을 대접했습니다. 이분들이 동네로 돌아가서 그가 받은 사랑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 여덟 사람이 전부 침례를 받았습니다.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가 다른 게 아닙니다.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을 사람에게 보내면, 살아 있는 사람은 그 사랑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장로님이 말씀하시면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오늘 시간이 너무 많이 되어서 다 하진 못하지만, 이 장로님이 한번은 밤늦게까지 전도를 다니시다가 어느 집에 갔더니 남편이 지금 고단해서 쉬어야 하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회갑이 넘은 이 장로님이 참 자존심도 상하고 하셨지만, 그 집 마당 앞 밭머리에서 "우리 여기서 기도 하나 드리고 갑시다" 했습니다. 그래서 밭에다가 무릎을 꿇고 집사님들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열심히 드린 이 기도의 소리가 꼭 닫힌 집 문틈으로 들어갔어요. 가만히 들어보니 들어오지 말라고 내쫓았는데, 이 가정을 위해 눈물로 열심히 기도를 드리시는 거예요. 조금 있다가 문이 열리더니 들어오시라고 하더랍니다. 들어가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내가 다리가 좀 짧은데 내 평생소원은 다리 좀 한번 길어지는 것"이라 하더군요. 장로님이 "그러면 내가 저 여수에 아는 유명한 정형외과 의사가 있으니 같이 한번 가자"고 했습니다. 그다음 날 차로 6~7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를 직접 운전을 하고 가서, 수술 약속을 하고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동안 이 바쁜 교장 장로님이 여수를 일곱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퇴원했습니다. 그다음 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 두 분이 교회에 나와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사랑에 반응하게 되어 있어요. 전도가 다른 것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받은 사랑을 매아리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사람은 사랑에 꼭 이끌립니다.
이분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을 이루실 수 있었을까요? 이분 목사님 아닙니다. 바쁜 장로님입니다. 중학교 교장 선생님입니다. 할 일 많은 분입니다. 시간이 남아서 한 것이 아닙니다. 이분이 누구신 줄 압니까?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까지 떠들썩하게 했던, 그 비참한 죽음을 당한 여섯 살짜리 서연이 할아버지예요. 저 춘천 가다가 유괴범을 만나가지고 차에서 죽임을 당해 생매장당한 서연이 할아버지입니다. 그 비참하고 끔찍한 일을 가족의 가슴에 당한 그 할아버지예요.
어느 날 사모님이 "여보, 성경을 아무리 읽어봐도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셨어. 여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그 사람을 용서해야 되지 않겠어?" 했습니다. 장로님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당신 말이 맞소" 하고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얘들아,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도 용서하셨는데 우리도 그 사람을 용서해야 되지 않겠니?" 하니 온 가족이 흐느끼기 시작해요. 어떻게 그 귀여운 딸을, 손녀를 생매장한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울다가 "어머니 아버지가 그렇게 막 작정하셨으면 저희도 용서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용서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용서했으니 우리가 그걸 행동으로 보이자" 하고 성경책을 사가지고 안양교도소로 갔습니다. 정말 보기 싫은 그 범인을 면회실 창 너머로 대면했습니다. 장로님은 그를 바라보며 용서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당신을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겠다" 하니 그 범인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경을 줬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당신을 용서한다는 그 장로님의 말씀에, 그 범인의 회개가 진실되다면 그는 틀림없이 주님이 오시는 날 구원받을 것이라는 마음에 확신을 장로님은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그리고 거기 도왔던 공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사형은 면했지만 그 후 장로님에게 성경을 받아들고 회개하는 가운데 지금 편지로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놀라운 일이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 장로님 가정이 십자가의 죽음보다 강한 사랑, 그 사랑에 반응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신 이 놀라운 사랑이 경험될 때, 그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주님께 끌려 나와서 새 생명을 얻는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델을 우리 가운데 보이신 겁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시간을 끝내면서 우리 마지막 장면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옛날처럼 제자들과 늘 같이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남은 제자들이 어떻게 했어요?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가자" 하고 디베랴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아무 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날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고기도 안 잡히고 주님은 옆에 계시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흐느적거렸습니다. 그날 빈 배로 밤을 새운 베드로와 그 동료들이 호숫가를 향하여 가까이 오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서서 물었습니다. "고기 많이 잡았느냐?"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내려 보시오." 그들은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그물을 내렸습니다. 당기는 그물이 무섭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옆에 있던 요한이 얘기했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고기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대로 물에 뛰어들어서 호숫가에서 기다리시는 주님께로 갔습니다. 제자들도 잇따라 배를 타고 갔습니다. 거기 갔더니 그 추운 스산한 아침에 호숫가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물고기와 빵이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춥지? 고생했다. 자, 둘러앉아서 조반 먹자." 그게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실 때 마지막 보이신 사랑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아무 말 없이 둘러앉아서 다시 한번 사랑의 모닥불에 둘러앉아 빵과 주님이 구워주신 물고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기와 빵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먹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조반 먹자", 꼭 어머니가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조반이 끝난 다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을 자꾸 피합니다. 조반이 끝난 다음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셨습니다. 3년 반 동안 사랑을 가르쳤지만 베드로는 이 사랑에 아름다운 메아리를 보내지 못하고 배신과 저주로 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랑의 메아리를 보내기 시작하시는 겁니다. 산에 가서 산울림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고 그래요? "나도 너를 사랑한다" 그럽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시 메아리를 보내십니다. "베드로야, 나를 사랑하니?" "주님 사랑해요." 세 번이나 메아리를 보내셨고, 마침내 메아리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너도 부모님이 그러시지요, "너도 자식을 낳아보면 내 마음을 알 거다" 하듯, "너도 양을,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전도해 보면 내 심정을 알 거다" 하시는 것입니다.
마침내 이 티베리아 바닷가에서는 작은 사랑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사랑해요." 제자들의 가슴속에는 이 사랑을 안고 온 세상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메아리가 퍼지기 시작한 겁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죽음을 무릅쓰고 이 사랑의 메아리가 퍼지고 퍼져서, 마침내 온 세상이 주님의 사랑의 메아리로 가득 찬 것입니다. 바로 그 메아리가 오늘 여러분의 가슴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메아리에 반응할 때 거기에 생명과 행복과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옛이야기가 있죠. 나이 많은 부모를 옛날에 고려장 하려 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한 아들이 어머니를 지게에 매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자꾸 나뭇가지를 꺾어서 땅에 던져요. 그래서 아들이 "어머니, 왜 자꾸 그런 걸 하세요?" 그랬더니, "얘야, 산이 깊은데 네가 돌아갈 때 길을 잃어버릴까 봐 그런다" 했습니다. 그게 어머니 마음이에요.
그런 유사한 이야기가 서양에도 이렇게 있습니다. 한 프랑스 청년이 어느 고급 창녀와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창녀는 그의 사랑을 믿지를 않아요. "당신은 결국 나를 떠날 거야." 청년은 "내가 정말 그렇지 않다"고 하니, "정말 그렇지 않으면 그 증거를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증거가 무엇이냐 묻자,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하거든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떼다가 나에게 갖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신 나간 젊은이는 그길로 집에 가서 어머니의 심장을 찌르고, 그 심장을 보자기치에 담아서 창녀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서둘렀던지 길에서 넘어졌습니다. 보자기를 떨어뜨렸습니다. 그가 급히 일어서려고 하는데, 이 보자기 속에서 그의 마음에 소리가 들렸습니다.
"얘야, 다치지 않았니? 얘야, 다치지 않았니?"
여러분, 그것이 십자가에서 들리는 사랑의 메아리입니다. 저는 한 존속살해범이 어머니 아버지를 그렇게 찌르고 그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다가 화상을 입었을 때, 그 어머니가 그때 의식이 있었더라면 "얘야, 손 데지 않았니?" 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울려 퍼지는 영원한 사랑의 메아리입니다.
이 사랑에 반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야 삽니다. 반응해야 영원한 생명이, 행복이, 사람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경험될 것입니다. 다 같이 잠시 기도드리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이 십자가의 사랑에 우리는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반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시여, 십자가의 이 놀라운 사랑에 반응하며 영원히 영원히 주님의 사랑 찬양하며 그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받은 이 사랑을 세상에 나가 메아리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나가서 이 사랑을 알지 못하여 불행한 중에, 외로운 중에, 목마른 중에 살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 사랑하는 이웃들, 우리 가족들, 그들의 가슴에 이 사랑이 메아리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시작되었던 이 놀라운 십자가의 영원한 사랑의 메아리가 우리 가슴을 울리게 하시고, 우리 가정을 채우게 하시고, 주님 부산 이 도성을 이 사랑의 메아리로 가득 채워서, 주여 이 도성에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 오시는 날 무수히 일어나도록 주님, 사랑의 메아리를 우리의 가슴에 채워 주시옵니까. 주님, 십자가의 사랑에 반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그냥 흙으로 돌아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영원한 자녀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놀라운 사랑의 메아리가 이제 우리의 가슴을 채우고, 돌아가 우리 교회를 채우며, 세상과 이 도성을 채우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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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요약 정리
이 강연은 인간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것'에 있음을 선포하고, 십자가가 영원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모태이자 구원의 분수령임을 감동적인 예화들을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1. 존재와 행복의 과학: 사랑과 반응
반응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의 모든 감각(오관)은 반응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고차원적인 존재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며, 이 사랑에 바르게 반응하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합니다.
사랑과 생명의 인과관계: 우주 만물(꽃, 새의 노래 등)과 인간 세포의 DNA 암호는 온통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랑이 원인이 되어 생명이라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2. 십자가: 영원한 생명의 모태 (니고데모의 거듭남)
육신의 모태와 영의 모태: 인간의 육신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태어나지만, 죄로 더러워진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물었던 "영원한 생명의 모태"에 대해 예수님은 '십자가'라고 답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인력: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폭발한 곳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들리실 때 강력한 사랑의 인력이 발생하여 인간을 주님께로 이끌며, 이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할 때 영생이 시작됩니다. 반면, 반응하지 않는 자는 본래의 무기물인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3. 사랑의 메아리가 가져온 기적들 (주요 예화)
뇌성마비 시인들의 고백: 신체적 절망 속에서도 "사랑할 수 있으므로 행복하다"고 고백한 고아들과, 발가락으로 성경을 넘기며 380편의 찬송 시를 쓴 송명희 양의 삶은 십자가 사랑에 반응할 때 생명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증명합니다.
안면도 최용한 장로의 선교 간증: 수입 없는 할머니의 기도로 소 쌍둥이 수컷이 태어난 이적, 알코올 중독자 남편의 폭력 속에서도 구역반의 극진한 사랑으로 온 가족이 회복된 사건, 시골 노인들을 위해 목욕탕을 만들어 때를 밀어주며 베푼 사랑을 통해 농어촌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는 기적(전도)이 일어났습니다.
원수를 용서한 서연이 할아버지: 손녀를 생매장한 잔혹한 유괴범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교도소로 찾아가 성경을 전하며 회개시킨 사건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실천이 어떤 기적을 낳는지 보여줍니다.
4. 사명: 디베랴 바닷가의 조반과 메아리
부활하신 주님의 질문: 배신했던 베드로에게 모닥불을 피워 조반을 먹이시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속에 사랑의 메아리를 회복시키셨고 "내 양을 먹이라(전도)"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 결론:
자식을 끝까지 책임지고 자식이 자기를 찔러도 "얘야, 다치지 않았니?"라고 묻는 어머니의 심장처럼, 십자가는 인간의 배신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흘러나오는 영원한 사랑의 메아리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이 사랑에 반응하여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제 이 뜨거운 사랑의 메아리를 우리의 가슴과 가정, 그리고 온 도성에 채워 다른 이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전도와 사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