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인 –구속사1 신계훈
안녕하십니까? 오늘 아침에는 지금까지 불렀던 찬양 중에서 가장 큰 찬양대가 정말 우리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는 귀한 찬양을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누가 우리를 그렇게 값지게 보살펴 주시겠습니까? 정말 이 세상에 우리 주님 같은 분이 다시없음을 느끼면서 감사드립니다. 아멘.
여기 어느 분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글을 쓰셨기 때문에, 모두 함께 읽으라는 뜻 같아서 제가 조금만 읽어봅니다.
"저희들은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관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밭에 채소가 없고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양과 소가 없고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다 해도, 우리는 예수님만으로 기뻐합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생명을 탄생시킨 위대한 사랑으로 저희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멘.
정말 아주 이름을 밝히지 않으셔서 우리가 다 나누어 읽을 수 있는 편지로 알고 읽었습니다. 정말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세상에 사람이 너무 많아요. 제가 중국에 가보니까 너무너무 사람이 많더라고요. 사람이 많다 보니까 가끔은 사람의 가치가 천해지기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너무너무 사람이 많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길에서나 차에서 볼 때 아무 가치도 두지 않고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냥 어떤 귀찮은 존재로, '내가 빨리 가야 하는데 길을 막네', 또는 '내가 좀 먼저 타야 하는데 앞자리를 차지했네' 하며 그렇게 느끼기가 참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관계'를 가지고 바라보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됩니다. 어제 저녁에도 지나가는 새마을호와 무궁화호 기차를 보면서 거기 탄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냥 얼핏 보면 그분들이 저에게는 당장 아무런 가치로도 느껴지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한 분 한 분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는 지난번 구포 열차 사고 같은 큰 비극이 났을 때 깨달았습니다. 그분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일단 다치고 상하고 죽는 사고가 나니까, 그분들과 관계를 맺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보니까 거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요? 아멘.
지난번 페리호가 침몰했을 때도 우리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시체라도 찾겠다고 그 여러 날을 정말 추위에 떨며 기다리던 가족들에게,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난 지 6개월밖에 안 된 아이, 아직 철도 안 들어서 제 어머니 아버지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 어린아이의 시체라도 찾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면서, '아, 생명이라는 것은 관계를 통하여 바라볼 때 비로소 중요해지는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아멘.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에 부임했던 교회 중 하나가 바로 천호동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굉장한 도시가 되었지만, 옛날에 거기는 홍수로 수해를 입고 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아주 살벌하고 황막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거기 수재민들이 모인 조그만 교회의 전도사로 갔었는데, 정말 사람들이 너무나 가난하고 아주 어렵게 살았습니다. 하루는 저도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나와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지가 막 날리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옆에서 쪽쪽 하는 소리가 나요.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이렇게 봤더니, 한 수재민 어머니가 수재민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빨래도 제때 못 해서 진흙이 묻어 있고, 목욕도 언제 했는지 모를 정도로 때가 묻은 아이였습니다. 빨래도, 목욕도 언제 했는지 모르는 수재민 어머니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뒤에 업었던 아이를 앞으로 돌려 안은 것이었습니다. 아이도 잘 못 먹어서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나고 정말 잘 씻지도 못한 상태였는데, 엄마는 그 아이를 들여다보면서 너무 귀여워서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아주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저 아이가 저 엄마에게는 저토록 사랑스러운 존재구나.' 아멘. 정말 목숨이라도 바꿀 만큼 귀한 것입니다. 그게 무엇 때문입니까? 생명을 주고받은 '관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제가 그 장면이 잊히지가 않아요.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아, 관계라는 게 저렇게 중요하구나! 관계를 통해 바라볼 때 비로소 인간이 꼭 세상에 존재해야 하고,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부부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형제 관계처럼 관계를 통해 보아야 인간의 진짜 가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관계를 떠나서 보면 인간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 가치가 없어요.
그러므로 인간인 나의 진정한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가보면 압니다. 아멘.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당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귀하게 여기는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정로의 계단>에 있는 말씀 기억하시지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너무나도 밀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치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아시고 그 관계를 유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그게 바로 생명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가 되는 신비입니다. 아무리 믿기지 않을 만큼 신비한 말씀이라도 생명의 관계를 통해서 보면 이해가 됩니다. 정말 우리가 이 관계를 이해할 때 비로소 살고 싶어집니다. 비로소 살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멘.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데 무척 사랑했어. 나를 죽도록 사랑했어. 아니,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나 대신 죽었어." 여러분, 이 사실을 알면 정말 살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예수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겁니다. 그때 비로소 살 의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가치요, 여러분의 가치입니다. 아멘. 비로소 십자가에서 우리는 살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멘. 십자가 밑에 가면 비로소 존재의 무거운 부담이 벗겨집니다. 거기서 참된 안식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가치가 있고 살아갈 의미가 있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일도 참 희한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 그 죽을 고생을 하며 기르는데, 어느 부모가 무슨 수지를 맞추려고 장사하는 속셈으로 자식을 기릅니까? 자식은 왜 있어야 합니까? 그저 있다는 존재 자체가 부모에게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거기서 아무런 이익을 남기지 않아도 좋아요. 그저 살아서 내 곁에 있어만 주면 좋은 것입니다.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 스바냐 3장 17절의 찬양도 불렀지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무럭무럭 잘 크고 착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 말은 다 못 해도 마음속으로 어떻게 합니까? 잠잠히 속으로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속으로 '저 녀석을 참 배 아프게 낳기를 잘했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좋은 거예요. 여기 성경 말씀대로 잠잠히 바라보며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큰 기쁨을 누릴 때가 언제입니까? 자식이 정말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렇게 성글성글 착하게 잘 자라줄 때, 부모는 잠잠히 사랑하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당신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살아갈 때, 정말 잠잠히 깊은 속으로 사랑하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당신의 영혼이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보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희가 공부하려는 '일곱 인'에 관한 말씀을 시작할 때, 이 '관계'라는 개념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관계 때문에 태어났고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이 관계를 통해 행복을 누립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돈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으면서도 불행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건강하다고 해서 다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몸은 튼튼하면서도 불행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지요? 반대로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고 몸이 튼튼하지 못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행복이란 '바르게 맺어진 관계 속에서 누리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비록 살림은 넉넉지 못해도 서로 끔찍이 사랑하는 부부는 행복합니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다 먹이고 입히지 못해도, 자식이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부모가 자식을 극진히 사랑하면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관계를 통해 누리는 것이며, 그 관계의 내용이 '사랑'일 때 비로소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이 소중한 관계가 자꾸 깨지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관계가 깨지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깨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죄는 바로 '깨어진 관계(Broken relationship)'입니다. 관계가 깨어지면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무엇 때문에 깨졌습니까? 불신 때문에 깨졌습니다. 깨어진 관계가 죄입니다. 다른 게 아니에요. 그리고 관계가 깨어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불행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바로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가 깨어지면 가장 행복해야 할 가정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합니다.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지옥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하면서 참 아슬아슬함을 느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신랑 신부에게 꼭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여자에게 남편처럼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남편처럼 한 여자의 일생을 그렇게 철저하게 불행하게 만들 존재도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꿈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남편에게도 아내처럼 소중한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 맺어지면 아내처럼 남편에게 인생의 가장 무거운 부담이 되는 존재도 없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깨어지면 행복해야 할 가정이 견디기 어려운 지옥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자식도 관계가 깨어지면 인생에 그렇게 큰 부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깨졌을 때처럼 부모의 가슴이 미어지는 때가 없습니다. 가슴이 터지는 거예요.
그래서 죄 때문에 깨어진 이 관계가 다시 연결되어야 행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관계를 어떻게 맺습니까? 개인과 개인이 서로 거래를 하거나 어떤 일을 하려면 반드시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약속으로 인간의 관계가 맺어집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맺는 약속을 무엇이라 합니까? '혼약(혼인 약속)'입니다. 약속을 하는 거예요. "이 남자만을 평생 사랑하겠느냐?", "이 여자만을 평생 사랑하겠느냐?" 하는 사랑의 약속이 바로 혼약입니다. "지금은 남편이 튼튼하고 밥벌이도 잘하지만, 이 남편이 나중에 병들거나 직장을 잃어도 변함없이 사랑하겠느냐?", "지금은 이 여자가 몸이 날씬하고 아름답지만 나중에 불구가 되어도 사랑하겠느냐?" 할 때 "네, 서약합니다" 해야 결혼이 성립됩니다. "지금은 그렇지만 이다음에 형편을 보고 생각해 보겠어요"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결혼할 수 없어요. 결혼도 부부 관계의 서약, 즉 약속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업가들 사이에는 무엇으로 관계가 맺어집니까? '계약'으로 맺어집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조약'으로 맺어집니다. 그렇다면 죄로 인하여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약속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그것을 바로 '언약(Covenant)'이라고 부릅니다.
개인 사이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신용 없는 사람이 되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혼인의 약속이 깨지면 이혼이라는 큰 불행이 닥칩니다. 이보다 더 큰 슬픔과 죽음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독은 없습니다. 사업상의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비즈니스를 할 수 없습니다. 나라 간의 조약이 깨지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지면 어떻게 됩니까? 영원한 불행과 죽음입니다. 약속이 깨지는 것은 이토록 무서운 일입니다. 조약이 깨지면 전쟁이 나고, 혼약이 깨지면 이혼하여 외로움과 눈물, 슬픔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결혼은 행복과 불행의 분수령에 서 있는 것입니다. 행복만으로 약속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약속이 잘 지켜지면 행복이고, 지켜지지 못하면 불행입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특별히 신부들이 그렇게 떨고 긴장하는 것입니다. 정말 떨 만한 자리이니까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에 깨어진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 연결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의 책입니다. 구약(옛 약속)과 신약(새 약속)의 이야기입니다. 죄 때문에 깨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피나는 노력과 계획, 그리고 지불하신 대가가 기록되어 있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모르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진정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성경의 구조가 명확히 보이시지요? 죄 때문에 깨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하여, 하나님이 먼저 솔선수범하셔서 약속을 맺자고 나선 기록이 바로 신구약 성경입니다. 이 언약을 이해해야 성경의 맥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깨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하여 세우신 이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십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연약해지고 사단의 꼬임을 받은 인간은 이 약속을 온전히 지킬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언약은 맺으나 마나 한 것이 되고 맙니다. 언약이란 양편이 다 지켜야 성립되는 것인데, 인간 편에서 지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우리가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을 때, 사회에서는 언제나 법적인 '보증인'을 세우라고 합니다. 은행에서도 담보가 부족하면 보증인을 세우게 하고,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하면 보증인이 대신 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이 계약을 어길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보증인이 되어 주시기로 자원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예수님이 새 언약의 중보자, 즉 보증인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7장 22절에도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아멘. 예수님이 우리의 보증인이십니다.
이 언약을 공식적으로 체결한 장면이 바로 출애굽기 19장에 나옵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도 하나님은 양을 잡아 피를 흘리시며 "내가 너의 죽음을 대신 죽을 테니 다시 화목하자"고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도 결국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부터 6절에 그들을 시내산 앞에 모아놓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아멘.
하나님이 "너희들 나랑 언약 맺겠느냐? 그러면 내가 너희를 내 소유로 삼아 온 세상을 나에게로 돌이키는 이 위대한 일에 너희를 언약의 백성으로 쓰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우리가 다 준행하리이다" 하고 좋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체결하는데, 그 체결하는 예식이 출애굽기 24장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6절부터 8절을 보면, 모세가 제물의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풍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립니다. 그리고 언약서를 가져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니,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합니다. 이에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며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했습니다.
'언약'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말로 하는 약속 정도로 생각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로는 '베리트(Berith)'라고 합니다. 이 '베리트'라는 말의 본래 뜻은 '쪼갠다, 자른다'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을 때 고기를 반으로 쪼개어 마주 놓았고, 그 사이로 횃불이 지나갔습니다. 이것은 "이 약속을 어기는 자는 이 짐승처럼 쪼개져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엄숙한 생명의 서약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자는 뜻이 바로 '베리트'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맺을 때 제물의 '피'를 뿌린 것입니다. 언약의 피입니다. 이 언약이 지켜지지 않으면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 하고, 생명이 대신 대가로 지불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뿌려진 언약의 피의 실체가 누구의 보혈이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짐승의 피로 맺은 구약의 언약이 '옛 언약'이라면, 예수님의 보혈로 확증하신 언약이 '새 언약'입니다. 마태복음 26장,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에서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27절과 28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십자가에서 뿌려진 피가 바로 우주적인 '언약의 피'입니다. 구약에서 짐승의 피로 모형 삼았던 것을 진짜 예수님의 보혈로 바꾸어 확증하신 것입니다. 구약이 약혼식이었다면, 신약의 십자가는 결혼식의 최종 서명과도 같은 비준이었습니다. 똑같은 은혜의 원리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맺을 때 구체적인 계약 조건, 즉 언약의 내용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 언약의 내용을 두 돌판에 친히 써주신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이 곧 '언약서'입니다. 그래서 이 십계명을 담은 법궤를 성경은 '언약궤(증거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약의 첫 번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결혼 언약을 맺을 때도 서약하잖아요. "평생 이 여자만을, 이 남자만을 사랑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아니, 왜 꼭 단 한 사람만 사랑하라고 강요합니까? 어떤 남자가 결혼하기 전 신부에게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 날 사랑한다면 지금까지 만나던 다른 남자친구들 다 정리할 수 있지?" 당연한 요구입니다. 사랑은 전적인 독점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독점 계약이에요. 그래서 결혼할 때 여자가 남자에게 딱 한 마디 간절히 부탁하는 심정이 무엇입니까? "오직 나만 사랑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만 사랑해 달라는 거예요. 그게 지나친 이기심인가요?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면 부부 관계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당신 나 얼마나 사랑해?" 물었을 때 "어, 한 95%쯤 사랑해" 하면 큰일 납니다. 나머지 5%는 어디 가고 누구에게 준 것입니까? 사랑은 100% 전부를 요구합니다. 독점 계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약도 그렇습니다.
둘째 계명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하고 결혼한 게 당신 인간 됨됨이가 좋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부잣집 아들이니까 한 거지" 하면 그 자리에서 신랑의 마음은 상처를 입고 관계가 끝납니다. 사랑하는 대상 대신에 다른 조건이나 물질이 그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최선의 존중과 인격적인 존경이 있을 때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아멘. 깔보면 사랑이 안 됩니다. 인격이 온전히 존중되어야 해요. "당신이 뭔데 나를 이렇게 구속하고 꼼짝 못 하게 하는 거야?" 하면 "내가 당신 남편이잖아, 내가 당신 아내잖아" 하는 관계의 권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넷째 계명은 안식일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피조물인 나에게 이런 경배와 시간을 요구하십니까?" 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창조한 여호와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너에게 이런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마땅한 요구 아닙니까? 아멘. 이게 바로 언약 이야기입니다. 이게 사랑을 지키는 방법이에요. 이 계명들이 유지되어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습니다. 다섯째부터 열째 계명은 무엇입니까? 인간 사회에서 시집 식구들, 처갓집 식구들, 이웃들과 서로 화목하게 잘 지내라는 인간관계의 법칙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십계명은 완전히 무슨 법입니까? 바로 '관계법'입니다. 그렇지요? 알고 보니 온통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표현하는 행위가 바로 '예배(경배)'입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양심, 순수한 존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심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창조주께 합당한 사랑과 존경, 충성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인간이 자꾸 죄로 인하여 십계명이라는 언약을 지킬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언약을 맺을 때 중보자, 즉 보증인을 세우신 것입니다. 인간이 언약을 어길 때마다 성막 뜰에서는 누가 대신 죽었습니까? 죄 없는 양이 대신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원래는 인간이 언약을 범했으므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끊어져서 영원히 죽어야 합니다. 관계가 끊어지면 죽는 거예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깨질 때마다 인간 대신 누구를 끌고 온 것입니까? 보증인 역할을 하는 양을 끌고 온 것입니다. 양을 끌고 와서 "나의 죄의 책임을 이 보증인에게 넘깁니다" 하고 양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대속죄일에 어디에다 뿌렸습니까? 바로 십계명 언약서가 들어있는 법궤 뚜껑인 속죄소 위에 뿌렸습니다. 언약을 깨뜨린 책임을 보증인에게 물려, 그 피를 언약서 위에 뿌림으로써 언약의 요구를 충족시킨 것입니다. 책임을 대신 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인간이 져야 할 모든 범법의 책임을 보증인이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 보증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그러고 보니까 성경 신학을 연구해 보면 성경은 완벽한 '언약의 책'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지요? 아멘. 죄 때문에 깨어진 관계를 다시 연결하려는 하나님의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표현된 책이 바로 신구약 성경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온통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피를 흘리며 제사 드리는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이 언약을 수행하고 집행하는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바로 '성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 제도가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성소를 부수어 버리면 언약 체결의 장소가 없어지고, 죄를 해결할 방법이 사라지잖아요. 죄인과 하나님이 연결될 통로가 끊어져 버리면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그토록 성소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원리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언약이 잘 지켜지는 상태를 성경에서는 무엇이라 부릅니까? 그것을 '축복(복)'이라 합니다. 반대로 이 언약이 깨어진 상태를 무엇이라 합니까? '저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쓰인 복과 저주라는 개념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언약을 바탕으로 선포되는 이야기입니다. 언약이 잘 지켜지면 축복이요 생명이며, 언약이 깨어지면 저주요 불행입니다. 성경에 복이나 저주가 나올 때는 항상 언약의 관점에서 보셔야 합니다. 아멘. 복은 행복이요 기쁨이며 만족입니다. 저주는 슬픔이요 외로움이며 불행이고 죽음입니다.
성경 신명기에 보면 이 언약을 다 맺어 놓으신 후, 하나님께서 "너희가 만약 이 언약을 잘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다" 하시는 내용이 신명기 28장 1절부터 14절까지 나옵니다. "들에서도 복을 받고 성읍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며 많은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희가 만약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가 임할 것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무슨 악한 마음을 품고 벌을 내리시는 게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그 상태 자체가 바로 불행이요 저주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부부 관계가 깨어지면 그 상태 자체가 바로 불행이요 고독이며 눈물이고 슬픔인 것과 같습니다.
자, 그런데 이 언약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언약의 '보증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지키지 못할 것을 미리 아시고 대신 책임을 맡으신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애초에 관계가 맺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티 하나 없이 완벽하게 지키셨습니다. 아멘. 죄를 하나도 짓지 않으셨어요. 그러므로 예수님 당신은 언약의 요구에 따라 마땅히 무엇을 받으셔야 합니까? 축복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빚보증을 서주려면 자기에게는 빚이 없어야 하니까요. 자기 빚도 못 갚아서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재정 보증을 서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의 보증인이 되시려고 인간으로 태어나셨는데 죄를 아주 조금이라도 지으셨다면, 그분 자신도 죄인이 되어 보증인의 자격을 잃어버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는 흠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아멘. 하나님과의 완전한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온 인류를 대표하는 참 인간으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약을 완벽히 지키신 대가로 최고의 축복을 누리셔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놀라운 환치(바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왜 죄가 없으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보겠습니다. 뜻이 명확해집니다.
"크리스토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율법이 곧 언약이잖아요. 언약(율법)을 파기한 인간이 마땅히 당해야 할 영원한 저주와 죽음을, 보증인이신 예수님이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율법 자체가 저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면 축복이고 생명인데, 인간이 그것을 깨뜨렸기 때문에 저주와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는 율법을 완벽히 지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인간의 보증인이 되셨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보증인이신 당신이 온몸으로 받으신 바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약 신명기 21장 23절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하셨고, 율법을 범한 흉악범은 나무에 달아 처형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하필 십자가라는 나무틀에 달리셨습니까? 율법을 범한 인간을 매달아야 하는 그 저주의 나무틀에, 인간을 대신하여 보증인이신 주님이 매달리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인간 대신 저주를 당하신 거예요. 십자가에 달리셨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되셨습니까? 옷이 처절하게 벗겨지셨고, 가시에 찔리셨으며, 극심한 목마름을 겪으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때 비로소 '저주'라는 단어가 역사에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시니 땅에서 무엇이 돋아났습니까?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났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이마를 사정없이 찔렀던 가시 면류관은, 원래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로 돋아난 저주의 가시였습니다. 그 가시가 보증인의 머리를 찌른 것입니다. 또한 범죄한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살리라" 하셨는데,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가 섞인 땀방울을 흘리신 것도 인간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직후에 옷이 벗겨져 수치를 느꼈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수치와 부끄러움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옷이 다 벗겨진 채로 우주적인 망신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자식을 낳아 기르는 책임이 여간 크지 않습니다. 자식이 밖에 나가서 큰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가 대신 고개를 숙이고 망신을 당합니다. 자식이 속을 썩이면 부모는 골머리가 아프고 머리가 깨질 듯이 쑤십니다. 예수님의 이마가 가시 면류관으로 콕콕 찔려 깨질 듯이 아프셨던 것이 바로 자식의 죄 때문에 겪으신 고통이었습니다. 자식이 속을 썩이면 부모는 애가 타고 속이 새까맣게 탑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속이 다 타들어 가셨습니다. 자식이 정말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는 가슴이 미어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단순히 외적인 상처 때문이 아니라, 죄의 무거운 짐으로 인해 영적인 심장이 파열되어 가슴이 터져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지은 자식에 대한 부모로서의 책임을 온전히 지신 장형입니다. 자식이 지은 죄의 책임을 부모이신 하나님이 몽땅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가 하면, 범죄하여 죽게 된 자식의 잘못을 대신 책임지러 오셔서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인간이 받을 저주를 당신이 다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맞바뀌었습니다. 원래 언약을 지킴으로 누려야 할 예수님의 완벽한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 있었고, 반대로 언약을 깨뜨려 '저주'와 죽음을 당해야 할 죄인인 우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증인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의 저주를 당신 편으로 가져가시고, 당신이 이루어 놓으신 완벽한 축복과 의(Righteousness)는 당신을 믿고 나오는 자식들에게 거저 넘겨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처절한 운명이라도 십자가 안에서는 바뀔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운명의 분수령이 십자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래로, 죄의 참혹한 결과인 '진짜 죽음'을 맛보고 죽은 존재는 우주 역사상 딱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죽음은 잠시 잠자는 첫 번째 사망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지는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이었습니다. 관계가 영원히 단절되면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영원히 이별하여, 존재에서 비존재의 영원한 멸망으로 돌아갑니다. 그냥 몸이 아프다가 심장이 멈추는 생물학적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에요. 진짜 무서운 죽음은 둘째 사망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절규하셨던 구절이, 바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질 때 죄인이 부르짖는 마지막 절망의 소리입니다.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시는 겁니까?" 하는 그 고통이 바로 둘째 사망의 무서운 본질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이 범죄함으로 당해야 할 그 영원한 분리의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끝없는 어둠, 빛 한 점 없는 영원한 절망의 심연 속으로 인류를 대신해 빠져 들어가신 것입니다. 죽음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나중에 이 세상 끝에 천년기가 차고 악인들이 부활하여 둘째 사망의 선고를 받을 때, 예수님을 끝내 거절한 죄인들은 그때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무서운 고통 때문에 그렇게 처절하게 부르짖고 돌아가셨구나!' 하고 그때야 둘째 사망의 참혹한 의미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끊어지는 것은 영혼이 찢어지는 무서운 죽음입니다. 단순히 육체가 죽는 정도가 아니에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장 무서운 형벌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하나님과 무엇 하자고 하십니까? '화목(Reconciliation)'하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Justification by faith)입니다. "모든 죄의 책임은 보증인인 나 예수 가 다 지고 청산했으니, 너희는 이제 마음 편히 나와 화목하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대사(사신)가 되어 세상에 간곡히 전해야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어떤 청년이 운전을 하다가 실수로 아주 값비싼 최고급 사장님의 세단을 들이받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청년의 중고차는 다 망가지고, 사장님의 새 차도 흠집이 났습니다. 청년이 벌벌 떨며 내리는데, 기가 막히게도 그 인자한 사장님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청년의 얼굴을 살피고는 손을 내밀며 따뜻하게 묻습니다. "아이고, 보아하니 운전을 처음 배우는 청년 같구만. 놀라지 말게. 우리 차 사고 지엽적인 것 가지고 옥신각신하지 말고 좋게 지나갑시다. 내 차 수리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물어주지 않아도 좋네. 그리고 청년의 차가 보아하니 완전히 망가졌는데 이걸 어쩌나. 내가 자동차 공장 사장이니 아주 안전하고 튼튼한 새 차로 한 대 선물해 주겠네. 차가 너무 낡고 고장이 잦아서 사고가 난 모양이야. 그러니 내 진심을 받아주고 나와 좋은 친구로 화목하게 지내세."
사장이 이렇게 제안하는데 청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음, 사장님 제안은 고맙지만 제가 서점에 가서 책 좀 읽어보고 며칠 동안 신중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면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말이 안 되는 얘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화목의 본질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의 모든 책임을 당신이 십자가에서 다 지시고 청산하셨으며, 하나도 잘못이 없으신 창조주께서 먼저 "너희가 죄로 인해 연약한 몸을 입어 실수했구나. 내가 너희를 죄짓지 않는 완전한 새 몸으로 바꾸어 줄 테니 나와 다시 사랑의 언약을 맺고 화목하자" 하고 손을 내미시는데, 인간들은 자꾸 뒤로 물러서며 "글쎄요, 교회에 나갈지 말지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고 버티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일입니까?
그리하여 참으로 비로소 십자가에서 인류의 비극이 뒤바뀌었습니다. 인간이 받아야 할 영원한 저주가 십자가에서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영원한 축복으로, 행복으로, 하늘의 생명으로 바뀐 위대한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이토록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아멘. 십자가를 노래하고 십자가의 기별을 들으면 우리 마음에서 무엇이 사라집니까? 마음에 짓눌려 있던 모든 고통과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하는 찬송가 가사처럼 위안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으로 가슴이 답답할지라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가슴이 시원해집니다. 죄책감이 떠나가고 저주가 굴러가는 것을 영혼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희한해요, 십자가는 정말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무기력했던 영혼에 용기가 생기고, 아무리 불행했던 사람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듭니다. 죄에 눌렸던 마음이 사유함을 입고, 여기에서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아멘.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해 심장이 터져 돌아가신 그 절정의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영혼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바라보는 사람은 도저히 그 인력에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언약의 이야기가 바로 성경 전체의 거대한 주제입니다. 성경의 앞부분을 구성하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핵심 내용이 전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관한 법조문들입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위대한 언약서예요. 그래서 이 언약을 잘 지키면 무엇이 임하고? 축복(복)이 임하고, 지키지 못하면 무엇이 임합니까? 저주가 임합니다. 모세오경 이후에 등장하는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대선지자, 소선지자)들이 평생 백성들에게 외쳤던 메시지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했으므로 지금 저주와 불행이 닥친 것이다. 그러니 어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다시 복귀하여 축복을 회복하라!" 하고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고 반복한 것이 선지자들의 기별이었습니다. 언약을 잘 지키면 축복이고,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입니다.
한번 성경 신명기 28장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이 원리를 온전히 이해하시면 성경 전체를 꿰뚫어 보는 완전히 새로운 영적 시야를 갖게 되실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부터 14절에는 언약을 신실히 지켰을 때 임할 찬란한 축복들이 열거되어 있고, 15절부터 마지막 68절까지는 언약을 배신했을 때 닥칠 끔찍한 저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3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만약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을 숭배하면, 결국 이방 대제국의 침략을 받아 비참하게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또 64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곳에서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온 세계 만민 중에 뿔뿔이 흩어져 우상 숭배하는 나라의 비참한 노예가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방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로 처참하게 잡혀갔지요? 그 역사적 비극들이 알고 보니까 무엇을 범한 직접적인 결과였습니까? 바로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맺었던 신성한 '언약'을 파기한 직접적인 대가이자 결과였습니다. 성경에 경고된 예언 그대로 역사 속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오경 이후의 모든 역사서와 선지서에 나오는 파란만장한 기록들은, 언약을 지키지 않은 결과로 이스라엘이 겪어야 했던 눈물의 역사입니다. 언약을 신실히 지켰을 때는 전무후무한 평화와 축복이 오고, 언약을 깨뜨렸을 때는 어김없이 이방의 압제라는 저주가 임했습니다. 그런 역사의 교훈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아까 읽었던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처럼 언약을 파기한 자는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어야 마땅한데, 이 인류가 당해야 할 모든 저주와 처벌을 누가 대신 종합해서 짊어지시겠다고 자원하셨습니까? 바로 보증인이신 예수님께서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너희는 내가 마련한 축복과 생명으로 교환해 가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 전체를 흐르는 핵심 복음입니다.
북방 이스라엘 왕 아합이 이방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데려다가 온갖 못된 악을 다 저지르고 바알 숭배를 온 나라에 퍼뜨렸을 때, 불의 선지자 엘리야가 혜성처럼 나타났습니다. 그 이야기가 열왕기상 16장과 17장에 나옵니다. 이 열왕기상의 대쟁투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성경 전체의 원리가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16장 마지막 34절을 보겠습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옛날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방의 첫 성이었던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엄숙한 어조로 경고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여리고성을 다시 재건하려 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짝을 달 때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온 이래로 수백 년 동안, 그 지리적으로 좋고 기름진 여리고성터를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죽여가면서 거기를 재건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한번 영원히 멸망시킨 죄악의 세상은 다시는 인간의 힘으로 재건될 수 없다는 엄숙한 본보기로 삼으셨기 때문에 아무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 시대에 겁 상실한 '벧엘 사람 히엘'이라는 자가 나타나 여리고성을 재건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왜 수백 년 동안 아무도 안 하던 짓을 이 시대에 감히 행했을까요? 아합 왕이 이세벨을 데려와서 온 나라에 바알 주상을 세우고 온갖 우상 숭배를 성대하게 해도 땅에 아무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어도 당장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지 않으니 이 히엘이라는 자가 생각하기를, '아하, 하나님이 이제 너무 나이가 많으셔서 옛날에 하신 말씀을 깜빡 잊으셨거나 건망증이 생기셨나 보다. 아니면 이제 이 세상에서 은퇴하셨나 보다' 하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깔보는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무감각으로 담이 커지고 간이 부어서 수백 년 동안 금기시되던 여리고성에 손을 댄 것입니다. 아합 왕의 통치를 보니까 '어라? 우상 숭배 해도 아무 일 없네? 나도 내 마음대로 해봐야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당장 징벌이 내려져야 할 텐데 아무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여리고성 건축을 시작했는데, 기초를 쌓을 때 갑자기 맏아들이 사고로 죽었습니다. 히엘은 "에이, 공사하다 보면 인명 사고가 날 수도 있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공사를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벽을 다 쌓고 마지막 문짝을 다는데 막내아들이 또 죽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수백 년 전 여호수아를 통해 선포하셨던 하나님의 언약의 경고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 속에 그대로 집행된 것입니다.
이 여리고성 재건 현장에 누가 와서 보았는가 하면 아합 왕도 와서 보았고, 딛셉 사람 엘리야도 와서 보았습니다. 와서 보니까 하나님이 한번 말씀하신 언약의 경고가 문자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깨달았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결코 잊으시는 분이 아니다. 아합 왕이 지금 우상을 숭배하며 온 나라를 더럽히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만히 계실 리가 없다.'
엘리야는 모세오경 중 신명기 11장 16절과 17절의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하신 언약의 조항을 기억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 언약의 말씀에 기초하여 아합 왕에게 당당히 나아가 선포했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에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있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 온 나라에 무서운 가뭄의 저주가 올 것이라는 대담한 선포였습니다. 엘리야가 무슨 개인적인 신통력으로 비를 멈춘 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언약의 법조문'을 보고 그대로 선포한 것입니다. 아멘.
그러자 과연 온 나라에 3년 반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언약의 저주가 집행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주적인 언약의 법을 가지고 계시는데, 누군가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그것을 선포할 때 비로소 역사 속에 집행하시는 원리를 쓰십니다. 그동안 그 진리를 대담하게 선포할 신실한 사람을 찾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선포하자 언약의 법이 그대로 역사 속에 집행되었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신실히 지켰을 때는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처럼 찬란한 축복이 임했고, 언약을 파기했을 때는 나라가 포로로 잡혀가고 하늘이 닫혀 비가 오지 않는 참혹한 저주가 임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인류가 지은 죄의 저주를 결단코 누가 다 책임지시겠다고요?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책임지시고, 인간에게는 오직 구원의 축복만을 넘겨주시기로 확증하신 위대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아멘.
자, 이제 이러한 성경 전체의 거대한 언약적 배경을 머리에 인지하시고, 드디어 요한계시록의 '일곱 인' 기별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일곱 인에 관한 예언 연구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렇게 깊이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어쩌면 여러분이 우리 신학교 학생들의 강의를 이어서 가장 깊은 수준으로 공부하는 분들일지 모릅니다. 귀를 기울여 잘 들어보십시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약속하셨고, 20장에서 위대한 언약의 법정인 십계명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엄숙한 언약의 공식을 마음에 기억하시고, 이제 요한계시록 1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과 6절을 다 함께 성경을 열어 소리 내어 읽어 보겠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크리스토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예수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구원하셨습니까? 바로 '자기 피(보혈)'로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무엇으로 삼으셨다고 합니까?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찬양합니다. 이 구절이 어디 나오는 이야기입니까? 바로 구약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뿌려 시내산에서 "너희를 제사장 나라로 삼겠다" 하셨던 그 영원한 언약의 약속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고리 아닙니까? 아멘.
신약과 구약의 원리는 이처럼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셔서 피로 맺은 택하신 족속을 만들어 온 세상에 당신의 뜻을 성취하려 하셨던 것처럼,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의 공포에서 당신의 보혈로 건져내셔서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가 신약의 교회 역사 속에서 영적으로 확대 성취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이에요. 우리는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입니다. 구약의 교회가 이스라엘이었던 것과 똑같은 양식이고, 똑같은 방법이며, 똑같은 은혜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의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하나님의 '언약' 덕분입니다. 아멘.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구원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공부하게 될 '일곱 교회'의 본질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일곱 교회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예수님과의 언약을 성실히 지켰을 때는 찬란한 영적 축복을 누렸고, 반대로 언약을 저버리고 타협했을 때는 이방 대제국에게 짓밟혔던 이스라엘처럼 혹독한 영적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교회 역사의 파노라마입니다. 과거에는 이스라엘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보여주셨고, 신약 시대에는 2천 년 교회 역사의 흐름을 통해 일곱 교회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약을 맺을 때, 이 언약이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류는 죄의 종이 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지구 땅의 통치권은 누구에게 빼앗겼습니까? 강도인 사단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노예로 종살이하다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종된 상태에 빠진 사람을 몸값을 치르고 대신 해방해 주고, 빼앗긴 토지를 돈을 내고 다시 찾아와서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자유인으로 행복하게 살게 해주는 구약의 제도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하면, 바로 '구속(Redemption, 기업 무르기)'이라고 합니다. 값을 내서 풀어주는 고대의 법적 제도입니다. 이렇게 값을 치르고 노예를 해방해 주는 사람을 '구속주(Goel, 기업 무를 자)'라고 부릅니다.
구약 룻기에 나오는 거대한 주제가 바로 이 '기업 무르기(구속)'의 이야기입니다. 나오미 가정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베들레헴 고향 땅을 다 팔아치우고 이방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거기서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다 죽은 채, 두 과부 며느리(룻 포함)와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만 남았습니다. 나중에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는데 가보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은 다 빚더미로 남의 손에 넘어가 버렸고, 가문을 이어갈 자손은 하나도 없으니 정말 캄캄한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효성이 지극하고 충성스러운 이방 여인 며느리 룻이 밭에 나가 보리 이삭을 주우며 지극정성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섭리로 누구의 밭에 가게 됩니까? 바로 거부인 '보아스'의 밭에 가게 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가만히 전후 사정을 보면서 지혜를 발휘합니다. "얘야, 내가 언제까지 너를 고생시키며 그 이삭이나 줍게 해서 그 젊은 나이의 인생을 그렇게 불쌍하게 보내게 하겠느냐. 보아스라는 사람은 마침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있느니라. 게다가 저 사람은 우리 가문의 넘어진 땅과 가문을 대신 물어줄 가장 가까운 친척인 '기업 무를 자'란다."
'기업 무를 자(구속주)'란, 이렇게 빚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친족의 땅값을 대신 갚아주고, 노예로 팔려 간 친척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여 그를 완전히 해방해 주는 고마운 은혜의 대리인입니다. 나오미가 말하기를 "보아스가 바로 우리의 유력한 친척이니,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하여 기업을 물러야 우리 가문의 비참한 팔자가 펴지겠다" 한 것입니다. 그래서 노련한 나오미가 전략을 가르쳐 줍니다. 그분이 머리가 그냥 흰 게 아닙니다. 일생 남자의 심리를 잘 아는 어머니로서 어떻게 해야 남자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너는 목욕을 깨끗이 하고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타작마당 밤바람이 불어 어두울 때 보아스 장로가 누워 자는 그의 발치 이불을 들추고 들어가 누워라. 그리고 네가 이 가문을 구속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해라" 했습니다. 룻이 순종하여 그 계획을 성공시키고 돌아왔습니다.
룻의 진심을 알게 된 보아스가 감동하여 말합니다. "네 효성과 순결함이 지극하구나. 네가 그 젊은 나이에 정욕을 따라 시골의 젊은 남자들을 쫓아다니지 않고, 가문의 대를 잇고 토지를 회복하려는 이 엄숙한 구속의 경륜을 기억하여 나 같은 늙은이를 남편으로 택해 주었으니 내 마음이 정말 기쁘다. 내가 기꺼이 너의 가문을 위하여 막대한 값을 지불하고 모든 기업을 무르는 구속주가 되어 주겠다" 서약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기업을 물렀고, 거기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계보에서 위대한 다윗 왕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 이야기는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거대한 '구속(Redemption)'의 복음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베들레헴 룻과 보아스의 계보에서 훗날 육신으로 태어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의 영원한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죄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어 지구의 통치권도 다 빼앗기고 종살이하다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고귀한 생명이라는 막대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의 비참한 운명을 완전히 고쳐 주신 우주 유일의 구속주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아멘.
그래서 베들레헴 이야기는 구속의 이야기입니다. 이 룻기 한 편의 이야기 속에 인류 구원의 위대한 공식이 다 들어 있는 거예요. 다 들어 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베트 레헴', 즉 '떡집(빵집)'이라는 뜻입니다. 인류를 살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이 바로 그 떡집(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주님으로서 말입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 이처럼 빼앗긴 땅을 돈을 주고 다시 사거나 노예를 풀어줄 때는, 반드시 법적인 장로들 앞에서 정식 계약을 맺어야 했습니다. 보아스도 성문 어귀에 장로 10명을 청하여 증인으로 세우고 정식으로 기업 무르기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왜냐하면 합법적으로 돈을 치르고 몸값을 물어주어야 법적으로 노예 상태가 풀리고 땅의 소유권이 이전되기 때문입니다.
이 고대 이스라엘의 계약 관습이 예레미야서에도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서를 이해해야 요한계시록의 일곱 인의 비밀을 비로소 풀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2장을 찾아보겠습니다. 이걸 이해해야 이제 우리가 진짜 예언의 정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2장 6절부터 보면 흥미로운 토지 매매 문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금 바벨론 군대에 의해 유다 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기 직전,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나라가 망해서 바벨론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인데, 사촌 동생이 와서 빚 때문에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된 가문의 땅을 네가 친척이니까 대신 돈을 치르고 인계받아 달라고 청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와서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물을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고, 나라가 망해가는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은 17세겔을 달아주고 정식으로 그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토지를 거래하는 계약 문서를 작성하는데, 10절부터 보면 "증서를 써서 인봉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법과 규례대로 인봉한 매매 증서와 인봉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취하여"라고 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빚진 땅을 물어주거나 토지 계약을 맺을 때는 똑같은 계약 문서를 두 부 작성했습니다.
하나는 '개방된 문서'로 누구나 필요할 때 펼쳐서 계약 조건을 확인할 수 있게 놔두었고, 똑같은 내용이 적힌 핵심 문서는 파피루스나 가죽 두루마리를 똘똘 말아서 실로 묶은 다음에, 그 묶은 실 위에 뜨거운 진흙이나 밀랍을 치고 계약 당사자와 장로(증인)들의 도장을 꾹 찍어 단단히 고정했습니다. 이것을 '인봉한 매매 증서(Sealed deed)'라고 부릅니다. 이 인봉된 두루마리 속에는 진짜 토지의 소유권과 빚을 갚아야 할 법적 조건들이 봉인되어 들어있습니다. 이 인봉된 문서는 소유권을 빼앗긴 주인이 나중에 돈을 다 갚거나, 혹은 능력이 안 될 때 가까운 친척(구속주)이 나타나 대신 희생정신으로 막대한 땅값을 물어주고 주인을 노예살이에서 풀어줄 때, 정식으로 장로들과 증인들 앞에서 이 '인을 깨뜨리고(떼고)' 문서를 펼쳐서 확인한 것입니다. 인을 떼고 계약서 대로 돈을 치르면 비로소 땅이 원래 주인에게 합법적으로 돌아오고, 노예로 살던 사람은 자기 고향 땅으로 당당히 복귀하여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 장엄한 구속의 배경을 머리에 넣고 요한계시록 5장을 보겠습니다. 이제 비로소 일곱 인의 놀라운 구원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는 하늘 성소의 웅장한 하나님의 보좌 광경이 펼쳐지고, 이어지는 5장 1절에 사도 요한이 영광의 장면을 목격합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그 두루마리 책이 바로 앞서 예레미야서에서 공부했던, 끈으로 칭칭 감아 밀랍을 치고 도장을 꾹 찍어놓은 '인봉된 매매 증서'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이 무려 몇 개나 찍혀 있습니까? 일곱 개나 찍혀서 아주 단단히 봉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절부터 보면 한 힘찬 천사가 큰 외침으로 묻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의로운 자가 보이지 않으니까, 사도 요한이 그것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미어져서 크게 울었습니다.
요한이 단순히 내용이 궁금해서 호기심 때문에 울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문서의 법적 성격을 영적으로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는, 바로 아담이 죄를 지어 마귀에게 빼앗겨 버린 '지구 땅의 소유권 문서이자 인류의 생명 매매 증서'였습니다! 사단에게 저당 잡힌 문서였어요. 요한이 보니까 인류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마귀의 손에서 지구와 인간을 구속해 줄 자격 있는 '구속주(보증인)'가 온 우주에 아무도 안 보이니까, '아, 이제 인류는 영원히 마귀의 노예로 종살이하다가 파멸하겠구나' 하는 절망감 때문에 가슴이 터져라 울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막 울고 있을 때, 장로 중 한 사람이 다가와 위로하며 말합니다. 5절에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합니다. 고대 토지 거래 법대로 인을 뗄 때 증인인 장로가 나타난 것입니다. 요한이 눈물을 닦고 보니까,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보좌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 책을 취하십니다. 인류의 소유권 문서를 자기가 합법적으로 인계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이제 보증인으로서 책임을 지고 인을 떼어 인류의 모든 죄의 빚을 갚아주시는 대구속의 법적 수속을 하늘 성소에서 정식으로 개시하시는 것입니다.
이 장엄한 수속이 시작되자 온 하늘의 천만 천사들과 장로들이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들고 엎드려, 우주적인 대찬송의 새 노래를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과 10절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완벽한 구속의 선포 아닙니까? 마귀의 종이 되어 신음하던 우리를 당신의 보혈(피)로 값을 치르고 사서 자유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장차 우리를 우주의 제사장과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구속주의 선언입니다! 노예 시장에서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서 해방하는 것을 '구속'이라 합니다. 이 문서는 바로 인류의 구속 문서였습니다.
하늘 법정에서 이 합법적인 구속 수속을 시작하려면 마땅히 대가를 내놓아야 하는데, 마귀의 요구와 죄의 삯을 청산할 대가는 세상의 금이나 은 같은 물질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대로 오직 흠 없고 순결한 '구속주의 피(보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생명)'밖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대가를 치르신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보좌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인을 떼시고, 우리의 죄의 빚을 도말하여 우리를 해방하시는 대구속의 집행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우주적인 구속의 수속이 시작되니 12절과 13절에 수많은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찬양하기를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며 온 우주의 피조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고 확 노래의 물결이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한계시록 6장 1절에 보면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때에"라고 나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무엇이 집행되기 시작합니까? 하늘 성소에서 인류를 완전히 구원하시기 위한 법적 수속과 역사의 집행이 인을 하나씩 뗄 때마다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 인은 총 일곱 개입니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인이 딱 다 떨어지면 마침내 무엇이 끝나는 것입니까? 죄로 인하여 고달팠던 인류의 눈물과 종살이 역사가 완전히 종결되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자유인이 되어 잃어버렸던 에덴 땅(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당당하게 복귀하여 영원한 왕과 제사장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이 거대한 대서사시의 이야기가 바로 '일곱 인'의 예언입니다. 일곱 인의 성경적 배경이 이토록 장엄하게 짜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곱 인의 본질은 완벽한 '언약과 구속'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언약의 보증인이 되셔서 이 땅에 구주로 오셨고, 그 삯을 당신의 보혈로 치르셨으며, 죄의 책임을 당신이 다 지시고 마귀에게 빼앗겼던 지구 땅을 합법적으로 다시 찾아주시는 과정입니다. 죄의 노예로 시달리다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질 가련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딸로 신분을 바꾸어 주셔서, 마침내 하늘의 제사장과 왕으로 만드시는 엄청난 수속이 바로 이 일곱 인 속에 숨어 있는 구속의 이야기입니다. 아멘. 우리 다 함께 이 일곱 인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소망 없던 룻기의 과부 나오미와 이방 여인 룻의 가정에, 유력한 구속주 보아스가 나타남으로 절망이 찬란한 기쁨과 소망으로 바뀐 것과 똑같은 우주적인 해방의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 떡집에서 생명의 빵으로 태어나신 구주께서, 당신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의 빚을 도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삼아주신 아름다운 스토리입니다. 이 위대한 복음이 신약 시대의 '일곱 인'이라고 하는 거룩한 예언적 기별로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속의 기별을 마음에 확신하시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신실한 언약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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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핵심 요약 정리
이 강연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중요성을 서두로 시작하여, 성경 전체를 흐르는 '언약(Covenant)'과 '구속(Redemption)'의 원리, 그리고 이것이 요한계시록 5장의 '일곱 인' 예언을 통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거대하고 일관된 신학적 체계로 명쾌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 1. 존재와 가치의 기준: 관계 (Relationship)
관계를 통한 생명의 가치: 수많은 인파 속에서 인간은 무가치해 보이기 쉽지만, '부모와 자식' 같은 생명의 관계를 통해 바라볼 때 비로소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가치가 드러납니다.
십자가와 인간의 가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너무나 밀접하여, 마치 우주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십니다. 단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도 기꺼이 십자가를 지실 만큼, 우리의 가치는 십자가에서 입증된 구속주의 목숨 값입니다. 이 관계를 깨달을 때 비로소 안식과 살 의욕(살맛)이 생깁니다.
죄와 불행의 본질: 죄는 다름 아닌 '깨어진 관계(Broken relationship)'입니다.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부부·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깨어질 때 가정이 지옥으로 변하듯 인생의 모든 불행과 저주가 시작됩니다.
### 2. 깨어진 관계를 복구하는 공식: 언약(Covenant)과 보증인
언약의 법적 성격: 관계를 맺기 위해 혼약(결혼), 계약(사업), 조약(국가)이 필요하듯,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을 다시 잇는 신성한 약속이 '언약'이며 성경은 곧 이 언약의 책(신약·구약)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및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규정하는 '관계법(언약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보증인: 언약은 양편이 지켜야 하나 연약한 인간은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이에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의 법적 '보증인(중보자)'이 되셔서 율법의 요구를 완벽히 성취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저주와 축복의 환치(바꿈): 보증인이신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저주(수치, 가시, 피땀, 심장 파열의 고통)를 십자가라는 나무틀에서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인 '둘째 사망'을 인류 대신 맛보셨고, 당신이 이루신 '축복과 생명'을 우리에게 거저 넘겨주시는 위대한 운명의 교환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 3. 요한계시록 5장의 '일곱 인'과 구속(기업 무르기)의 성취
룻기와 예레미야의 배경: 구약의 기업 무르기(룻기)와 토지 매매 증서(예레미야 32장) 관습에 따라, 고대에는 빚 때문에 넘겨준 토지의 소유권 문서를 두루마리로 말아 실로 묶고 도장을 찍어 '인봉'했습니다. 합법적인 친척(구속주)이 나타나 대가를 치르고 '인을 뗄 때' 비로소 노예가 해방되고 토지가 복귀되었습니다.
오른손의 두루마리와 어린양의 자격: 요한계시록 5장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은 아담이 마귀에게 저당 잡힌 '지구 통치권 문서이자 인류 생명 매매 증서'입니다. 인류의 빚을 갚아줄 구속주가 없어 요한이 울 때,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격을 갖추고 나아와 그 문서를 취하셨습니다.
일곱 인의 집행과 최종 해방: 어린양이 인을 하나씩 떼기 시작하는 것(계시록 6장)은 하늘 성소에서 인류의 죄의 빚을 도말하고 지구를 다시 찾아주시는 합법적인 구속 수속의 집행을 뜻합니다. 일곱 인이 모두 떨어질 때, 고달픈 죄의 역사는 종결되고 성도들은 영원한 자유인이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과 제사장으로 영원히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 최종 결론:
성경은 죄로 깨어진 인간의 팔자를 고쳐주기 위해 하나님이 지불하신 대가의 기록입니다. 인류의 구속주이신 예수님이 하늘 성소에서 일곱 인을 떼시며 빼앗긴 에덴의 복귀 수속을 진행하고 계시므로, 성도들은 무거운 존재의 부담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하여, 확신과 소망 중에 다가올 영원한 해방의 그날을 예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