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장: 말세와 세말, 그리고 일상의 재림 준비
마태복음 24장 1절부터 28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 중에는 '뜻이 두 가지'라고 말씀드렸지요. 24장 3절에서 제자들이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물었던 질문과, 6절의 "끝은 아직 아니니라", 그리고 13절의 "끝까지 견디는 자", 14절의 "그제야 끝이 오리라"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끝'이라는 단어가 네 번 나오는데, 24장 3절에서 제자들이 물었던 '세상 끝'의 끝은 **'텔레야(Teleia)'**, 즉 긴 과정을 포함한 끝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6절, 13절, 14절에서 말씀하신 끝은 '텔로스(Telos)'입니다. 제자들이 질문할 때의 끝과 예수님께서 대답하실 때의 끝이 다른 것입니다.
제자들이 물었을 때의 끝은 제가 '말세'라고 표현했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실 때의 끝은 '세말'이라고 했습니다. 말세가 긴 과정이라면, 세말은 그 말세가 끝나는 최종 지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전쟁, 지진, 기근, 질병, 도덕적 부패 등을 재림의 징조라고 부르지만, 그런 사건들은 재림의 징조가 아니라 '재난의 시작'입니다. 24장 8절에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분명히 나옵니다. 전쟁, 지진, 기근은 말세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텔로스(최종 끝)'의 징조는 무엇밖에 없을까요? 그것이 바로 24장 14절입니다.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것이 바로 텔로스의 징조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말세는 재난과 함께 시작됩니다. 전쟁과 지진이 일어나면 이미 말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세를 끝내려면 천국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할 때마다 성도님들께 호소합니다. 지진이나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서 "예수님 오실 때가 가까워졌다"며 좋아하거나 기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저 재난의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니 하늘 갈 때가 되었다며 좋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재난을 끝내야 할 영적,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속히 복음을 전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저는 신앙 초기에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처음 교회에 나갔을 무렵, 태풍으로 인해 약 300명이 바다에 빠져 숨지는 참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 사건을 이야기하며 많은 분이 밝은 표정으로 "정말 세상 끝날이 다 왔어. 주님 나라 갈 때가 가까웠나 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선민의식과 자부심만 보였습니다. "저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품고 있다가, 나중에 성경을 깊이 읽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 말씀의 참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살펴보았지요. 24장 후반부에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끝을 동일 선상에서 이해했던 제자들의 질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기에 대해 예루살렘 멸망은 이 세대 안에 다 이루어질 것이나, 재림의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고 답하셨다는 점을 지난주에 설명드렸습니다. 그 내용을 전부 반복할 수는 없으니, 40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 구절을 두고 이른바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달라스 신학대학원을 중심으로 발전한 세대주의 해석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휴거 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데려감을 당하는 자가 구원받은 자입니까, 버려둠을 당하는 자가 구원받은 자입니까? 당연히 데려감을 당하는 자가 구원받은 자이지요.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의 독특한 이론에 따르면,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이방인으로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비밀리에 조용히 오실 때(비밀공중재림), 한국 사람 같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싹 데려감을 당하고(휴거), 육적 유대인들은 이 땅에 남아 환난을 통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세상이 새롭게 되면 유대인들을 다시 하늘로 데려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비밀스럽게 사라지는 것을 '휴거(Rapture)'라고 부르는데, 이는 성경 전체의 맥락과 맞지 않는 그들만의 독특한 이론입니다. 유대인들이 환난을 통과한 후 다 함께 구원받는다는 식의 이론은 성경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런 오해 때문에 1992년 한국에서 이장림 목사를 중심으로 한 '다미선교회'가 나타나 시한부 종말론 소동을 일으켰고, 전국이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재림교회(안식교회)는 이 종말론의 근원이라는 누명을 쓰기도 해서, 신문에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해명 광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휴거 이론이 기독교계에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구원받은 자요, 버려둠을 당하는 자는 멸망 당하는 자를 뜻할 뿐입니다. 여기에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는 개념은 전혀 없습니다.
40절과 41절에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데려감을 받는 자와 버려둠을 당하는 자가 운명이 결정되기 직전까지 '똑같이 밭에 있었고', '똑같이 맷돌질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운명이 결정되는 현장은 특별한 곳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데려감을 당한 사람이 교회에서 하얀 옷을 입고 기도하다가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은 일상이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운명이 갈라졌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재림 준비는 일상과 구별된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42절을 보겠습니다.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 문장과 뒤 문장을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강조합니다. 우리는 흔히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면 '경건 생활'만 떠올립니다. 그리고 경건 생활을 일상을 제쳐두고 교회에만 모여 사는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만약 일주일 내내 교회에 와서 살기만 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목회자 입장에서 믿음이 좋다고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삶이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맷돌을 돌리고 밭을 가는 일상의 자리에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늘 강조합니다. 학생이 재림을 준비해야 하는 장소는 학교이고, 전업주부가 재림을 준비해야 하는 자리는 가정이며, 직장인이 준비해야 할 자리는 직장 터입니다. 일상이 진행되는 바로 그 현장이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