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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마태복음 26장 수난 주간의 시작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22|조회수30 목록 댓글 2

마태복음 26장 수난 주간의 시작

 

(마 26:1-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마태복음 26장 1절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전체 구조 공식을 알고 읽을 때 이 구절을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서론적인 예수님의 탄생과 초기 사역 기록(1~4장) 이후, 총 다섯 번의 커다란 교훈(설교) 뭉치를 던집니다.

 

7장 28절: 첫 번째 교훈(산상보훈)을 마치심

11장 1절: 두 번째 교훈(제자 파송)을 마치심

13장 53절: 세 번째 교훈(천국 비유)을 마치심

19장 1절: 네 번째 교훈(교회 공동체 지침)을 마치심

26장 1절: 다섯 번째 교훈(종말과 재림)을 마치심

 

따라서 26장 1절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교훈 기록이 끝나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생애 끝부분, 즉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사건 기록이 시작된다는 일종의 표식입니다.

 

2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고 하십니다. 유월절은 영어의 '패스오버(Passover)', 즉 재앙이 넘어간다는 뜻이지요.

 

3절에 보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수난 주간 기록 중에는 대제사장의 이름이 두 명 나옵니다. 바로 가야바와 그의 장인인 안나스입니다. 유대 사회의 율법과 제도상 대제사장은 오직 한 명이어야 하며, 그가 죽어야만 다음 대제사장이 임명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시대에 장인과 사위가 동시에 대제사장으로 불렸다는 이 독특한 상황은, 당시 유대 사회의 복잡한 정치적, 종교적, 역사적 배경(로마 제국의 정치적 임명과 유대 전통의 충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자세한 배경은 나중에 안나스가 등장할 때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2장. 베다니 향유 옥합 사건: 외로우신 주님께 드린 위로

 

(마 26:6-13)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6절부터 13절에 나오는 향유 옥합 사건은 사복음서 전체에 모두 기록된 매우 드물고 중요한 사건입니다. 마태는 사건을 시간 순서가 아니라 주제별로 배치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 사건은 수난 주간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마태는 예수님의 장례(죽음)라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유월절 직전인 이곳에 배치했습니다.

 

6절에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라고 나옵니다. 현재 나병을 앓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으므로, 이 구절은 '전에 나병환자였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시몬의 집으로 읽어야 맞습니다.

 

7절에서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3절에서는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기록합니다. 누구의 기록이 맞을까요? 둘 다 맞습니다. 시편 133편 2절을 보면 머리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을 타고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대제사장의 안수식 장면이 나옵니다. 기름을 머리에 부으면 반드시 아래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고, 그 기름이 흘러 발끝까지 닿자 요한은 발에, 마태는 부은 곳인 머리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이 분개합니다(8절). 가룟 유다가 먼저 가난한 자들을 핑계 대며 공금을 훔쳐 갈 속셈으로 바람을 잡았고(요 12:4-6), 다른 제자들과 집주인 시몬까지 그 자극에 동조하여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속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절)고 하십니다. 여기서 '좋은 일'은 도덕적인 선행을 뜻하기보다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눈앞에 둔 예수님의 마음은 몹시 외로우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도 주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 자리 차지할 궁리만 하고 있을 때, 이 여인만이 주님의 속내를 헤아려 준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재산에만 관심 있을 때,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식 하나가 큰 위로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여인의 행동은 외로우신 주님의 마음에 깊은 위로를 주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늘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고 구하는 차원을 넘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가 되어 드리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12절에서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하시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 어디서나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라고 극찬하셨습니다(13절). 실제로 이 일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그분의 시신에 기름을 바른 유일하고도 마지막 기름 부음 사건이 되었습니다.

 

 

 

3장.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장담

 

(마 26:14-16)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4절에 유다를 소개할 때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동시에, 나머지 제자들도 언제든 유다처럼 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임을 경고하는 표현입니다.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30을 받고 예수를 넘겨주기로 약속합니다(15절). 은 30은 구약 시대에 황소 한 마리 값에 불과한 헐값입니다. 27장에서 유다가 예수님이 정죄당하심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돈을 성소에 던지고 자살한 것을 보면, 그는 단순히 돈이 탐나서 예수를 판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에 의해 자기가 변화된 사람인 반면, 유다는 자신의 계획과 생각대로 예수님을 변화시키려 했던 사람입니다. 유다는 머리가 좋고 영리한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진 엄청난 능력을 알았기에,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면 그분이 어쩔 수 없이 무력이나 권력을 행사하여 정치적인 메시아로 전면에 나서실 줄 알았습니다. 즉, 자기 계획대로 상황을 조종하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마치 내가 대단한 신앙인인 것처럼 포장하고 내 뜻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부족함을 빨리 알아차리고(Mindfulness) 베드로처럼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반면 유다는 16절 말씀처럼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지속해서 찾았습니다." 알아차리고 돌이키지 못한 채 완악함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17절부터는 목요일 저녁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유월절 음식을 어디서 준비할지 묻자, 주님은 성안 '아무에게나' 가서 준비하라고 하십니다(18절). 성경은 끝내 그 집주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추정하지만, 성경 본문 자체는 그저 '아무의 집'이라고만 기록하여 장소보다 만찬의 의미에 집중하게 합니다.

 

떡과 잔을 나누시며 예수님은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십니다(21절). 제자들이 근심하며 "주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묻습니다(22절). 예전 개역한글 성경에는 "주여 내니이까?"라고 번역되어 오해를 샀지만, 원어상으로는 개역개정의 "나는 아니지요?"가 정확합니다. 자신이 배신자가 아님을 부인하며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11제자와 유다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여(Lord)"라고 부르며 종의 신분을 고백하지만, 유다는 25절에서 끝까지 "랍비여(Teacher)"라고 부릅니다. 유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지 않고, 그저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스승의 수준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과 잔을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26-28절). 가톨릭에서는 신부가 축사하는 순간 떡과 포도주가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믿지만, 프로테스탄트(개신교)는 십자가의 단번의 희생을 기념하는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주님은 29절에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않겠다고 하심으로써, 모형적인 유월절 제사 제도가 십자가로 인해 완전히 종료되고 원형이 성취될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만찬 후 감남산으로 가시면서 예수님은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실족하리라)"고 예언하십니다(31절). 그러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장담합니다(33절).

 

우리가 부르는 찬미가 중에 "모두 주를 버리어도 나는 따르오리다"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 가사를 부를 때마다 참 부담스럽습니다. 배신하기 직전 베드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노래하게 하니까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시 공언했습니다(34-35절).

 

이때 베드로의 다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다만, 상황이 바뀌면 뒤도 안 돌아보고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만큼 자기 내면에 거대한 연약함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만 몰랐을 뿐입니다. 나중에 닭 소리를 듣고 통곡한 이유도(75절), 예수님이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정확하게 알고 계셨음을 깊이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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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겟세마네의 통곡과 체포: 감정의 공유를 원하신 예수님

 

(마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36절부터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처절한 감정을 명시적인 언어로 드러내십니다.

 

>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38절)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과 '감정의 공유', 즉 '공감(Sympathy/Empathy)'을 원하셨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힘든 감정이 타인에게 공감될 때 깊은 위로와 치유를 얻습니다. 저 역시 아내에게 힘든 감정을 토로할 때, 아내가 상황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당신 참 힘들었겠구나" 하고 내 감정을 그대로 받아주고 공감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인성을 쓰신 주님도 십자가라는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 제자들에게 공감받고 위로받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시다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니 그들은 모두 퍼질러 자고 있었습니다(40절). 주님은 무척 섭섭하셨겠지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며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십니다(41절). 세 번의 기도가 끝난 후 주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45-46절). 이제는 더 이상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해 줄 기회가 지나갔으니, 다 끝났으니 십자가의 길을 가자는 초연한 선언입니다.

 

그때 유다가 군인들을 이끌고 와서 예수를 잡으며 또다시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춥니다(49절). 유다는 끝까지 주님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다를 향해 "친구여(Heetairos)"라고 부르십니다(50절).

 

여기서 '친구'는 헬라어로 따뜻한 우정을 나눈 친구(Philos)가 아니라, '계약 관계나 거래적 관계로 맺어진 동료'를 뜻하는 '헤타이로스'입니다. 주님은 유다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그 거리를 유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떨어뜨리자, 예수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책망하십니다(52절). 주님은 얼마든지 천군 천사를 동원해 자기를 구원하실 수 있지만,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체포되셨습니다(53-54절).

 

마지막으로 58절을 보면, 체포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베드로의 모습을 마태는 아주 의미심장한 단어로 묘사합니다.

 

>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관정에까지 가서..."

 

가까이 가자니 나도 잡힐까 봐 두렵고, 안 따라가자니 양심에 걸려서 선택한 거리가 바로 '멀찍이'입니다. 이 물리적인 거리는 당시 위기 상황 앞에서 베드로가 가졌던 '예수님과의 영적, 관계적 거리'를 그대로 대변해 줍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손해 보거나 위험해지기 싫을 때,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후 예수님의 불법적인 심판이 시작되고, 이 십자가의 수난 장면은 27장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요구하기만 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넘어, 십자가 앞의 외로우셨던 주님의 심정을 공감하고 그분의 마음에 위로와 힘이 되는 성숙한 제자의 삶, 베드로처럼 나를 깨뜨려 주님께 맞추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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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연 핵심 요약 정리

 

1. 마태복음 구조의 마침표 (마 26:1)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라는 구절은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5개의 거대한 설교 뭉치 중 마지막 교훈(종말론)이 끝났음을 알리는 공식적인 표식입니다. 이제부터는 최고의 교사이신 왕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전개됩니다.

 

 

2. 안나스와 가야바의 공존

제도상 대제사장은 단 한 명이어야 하지만, 장인(안나스)과 사위(가야바)가 동시에 대제사장으로 불린 기형적 구조는 당시 유대 사회의 타락한 정치적, 종교적 배경을 폭로합니다.

 

 

3. 향유 옥합과 좋은 일(위로)

여인이 머리에 부은 기름은 발끝까지 흘러내렸으며, 이는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마지막 기름 부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좋은 일'은 십자가를 앞두고 극도로 외로우셨던 주님의 마음에 드린 '깊은 감정적 위로'였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주님의 마음을 위로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

유다는 예수를 끝까지 '주(Lord)'라 부르지 않고 '랍비'라 부르며, 자기 계획대로 예수를 조종하려다 파멸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과 실수를 주님의 말씀 앞에서 철저히 자각하고 자신을 변화시켰습니다.

 

 

5. 겟세마네의 공감과 '멀찍이'의 영성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공유(공감)받기를 원하셨으나 제자들은 잠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체포된 예수를 '멀찍이' 따른 것은 위기 앞에서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인간의 유약함과 주님과의 영적 거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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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변영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2 new 성경의 역사적 배경에 따르면, 본래 대제사장은 율법에 따라 종신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은 유대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대제사장 안나스를 강제로 해임하고, 이후 그의 사위인 가야바를 공식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로마의 정치적 임명권에 의해 공식적인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으나,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임명된 '안나스'를 여전히 실질적이고 합법적인 대제사장으로 존중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 사회 내에 두 명의 대제사장이 공존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 작성자김종승 | 작성시간 03:54 new 아멘 ㅡ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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