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7장 인맞은 144000인은?
여러분,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나라 부현이 지은 《태자소부잠》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귀인데요, 먹을 가까이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뜻으로 사람은 늘 가까이하는 사람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하고 좋은 환경 가운데서 지내야 좋은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탄식자흑(嘆息者黑)'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굳이 글자를 푼다면 탄식하는 자는 검게 된다는 의미의 문자일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이번 강의를 위해서 '근묵자흑'이라는 말에 빗대어 지어낸 말입니다. 먹을 가까이하면 당연히 검은 먹물이 묻기 쉬우니 검게 되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 탄식하는 자 곧 울며 슬퍼하는 자가 검게 된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여러분 궁금하시죠? 그럼 오늘의 공부를 함께 살펴보시면서 이 '탄식자흑'의 의미가 과연 영적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요한계시록 7장을 공부하게 될 텐데, 장을 보시면 인을 맞은 성도들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의 장면은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공부했던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지던 장면과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인이 개봉되는 그 사이에 삽입구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여섯째 인은 결론 부분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어지는 지상 역사 최후의 사건으로 이끌어 갔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심판으로 인해 반역한 군중들은 요한계시록 6장 17절에서 "이 진노의 큰 날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하며 공포 중에 울부짖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요한계시록 7장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 큰 날에 능히 설 수 있는 사람은 144,000인과 큰 무리들이라고 요한계시록 7장은 우리에게 답을 주고 있는데요, 따라서 요한계시록 7장은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인에 관한 첫 번째 부분과, 그리고 큰 환난을 통과하고 하나님 보좌 앞에 서 있는 큰 무리에 관한 두 번째 부분으로 나뉘어서 우리들에게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과연 그 큰 환난과 시련의 시기를 견디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하나님의 인을 받아 그 앞에 서게 된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오늘 요한계시록 7장을 함께 공부하시면서 과연 인 맞은 자들은 누구인가, 또 우리는 어떻게 인을 맞을 것인가에 대하여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요한계시록 7장 1절로 3절에 있는 말씀을 함께 보시죠.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여기 보면 '땅 네 모퉁이'가 나옵니다. 이것은 전 세계에 미치는 어떠한 사건을 묘사하기 위하여, 마치 나침반의 네 방위를 의미하는 것같이 땅 네 모퉁이는 온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으로부터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며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땅 사방에서 모으시리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에스겔은 종말이 땅 사방에서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에스겔 7장 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땅 네 모퉁이는 바로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온 세상 네 모퉁이에 천사들이 강한 바람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바람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파괴적인 세력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 4장 13절에 바람은 하나님의 병거와 같다고 말하고 있고, 이사야 66장 15절로 16전에는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해 회오리바람처럼 병거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4장 11절로 12절, 23장 19절로 20절, 51장 1절로 2전에는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 다가오는 심판을 뜨거운 바람이 광야 자산에서 불어온다고 표현하면서, 이제 곧 이 땅에 큰 바람이 불게 될 터인데 땅 네 모퉁이에서 바람의 사방을 잡고 있는 천사들에게 "아직은 바람을 불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됩니다. 곧 바람은 큰 전쟁과 난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제 온 세상이 큰 난리의 소용돌이로 들어가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이죠.
무엇을 기다리라고 지금 요한계시록 7장은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인을 치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이 세상의 마지막 큰 환난과 난리의 때가 올 것인데, 그전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들을 구분하는 인을 치는 사업이 먼저 진행될 것임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을 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침은 고대로부터 바로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하는 소유권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사람들이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되는 것으로서, 곧 그들의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령의 인침은 하나님께 속한 참 그리스도인의 표요, 구원의 보증을 의미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그 마지막 환난의 때가 이르기 전 하나님의 구원받을 백성으로서 인을 가져야 할 터인데, 우리는 어떻게 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7장의 인치는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구약성경 에스겔서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선지자 에스겔이 또한 요한이 바라보았던 똑같은 이상을 환상 가운데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와 요한은 이상 중에 똑같이 동일한 두 분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에스겔 8장 2절에 보면 "내가 보니 불 같은 형상이 있더라 그 허리 아래의 모양은 불 같고 허리 위에는 광채가 나서 단쇠 같으니"라고 하면서 이상 중에 만난 한 기이한 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매우 익숙하죠.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똑같은 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3절로 15절이죠.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계시를 주시는 분과 에스겔서에서 나타나신 분이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스겔과 요한이 똑같은 장면을 바라보았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죠. 아울러서 우리는 이 에스겔을 통하여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의 인을 받은 백성들이 어떠한 사람들일지를 함께 비교하여 연구할 때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서 어디에 이 인치는 장면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에스겔 9장 2절로 6절에 보면 바로 이 인치는 장면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함께 찾아보실까요? 에스겔 9장 2절로 6절입니다.
"내가 보니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부터 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죽이는 무기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가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차분히 머릿속으로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에스겔이 보는 가운데 먹 그릇을 찬 한 사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그 뒤를 이어 살육하는 무기를 가진 자들이 나타나서 예루살렘 성읍을 순행하여 다니는데, 그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증한 일로 인하여 울며 탄식하는 자에게는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그 이마에 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마에 표를 받지 못한 사람은 늙은이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누구든지 가차 없이 죽이라고 하는 명령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을 에스겔은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 인을 받는 자들은 무엇 때문에 인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그 인을 받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에스겔은 말하기를 예루살렘 성읍 중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에게 인을 치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루살렘 성 안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길래, 어떠한 가증한 일이 있었길래 그것으로 말미암아 울며 탄식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가증한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에스겔서 8장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8장 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니 제단 문 어귀 북쪽에 그 질투의 우상이 있더라." 에스겔 8장 10절에서는 이와 같이 또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라고 이야기해요. 자, 지금 어떠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의 그 성소 안에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들어가 보니, 온 사방 벽에 그들의 성소 안에 투기의 우상, 질투의 우상, 온갖 각양 곤충과 짐승의 모양의 우상들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소는 누구를 모시는 곳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을 모셔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집, 성소 안에 온갖 각양 곤충과 우상과 짐승들과 투기와 질투의 우상들이 가득한 모습을 지금 에스겔은 바라보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터인데, 이와 같은 일을 보면서 어떻게 하라고요? 울며 탄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머리에 인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구약 시대의 성소는 신약 시대에 와서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디를 의미합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는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몸이,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이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속에 온갖 질투와 이 세상의 것들로 마음이 우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말하기를, 너희들의 마음이 이렇게 온갖 우상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것을 보면서 울며 탄식하라고 합니다. 울며 탄식하라는 말은 다시 말해서 그 마음을 찢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세상의 우상이 가득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찢는 회개의 심령이 있는 자들에게 이마에 인이 채워질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에스겔 8장에 보면 계속해서 그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증한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에스겔 8장 12절이죠.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 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장로들이 하나님의 성소에서 우상의 어두운 방안 가운데서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어찌 보겠느냐,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라고 말하면서 장로들, 이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으로 그들의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인치는 사업이 진행되기 직전, 이 마지막 시대에 그와 같은 정말 가증스러운 일, 울며 통탄할 일들이 벌어질 것을 에스겔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에스겔 8장 14절에 보면 거기에 수많은 백성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 보면 아주 특별히 담무스라고 하는 우상에 대해서 에스겔이 콕 집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담무스 숭배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올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 사탄의 오염은 창세기 11장 1절부터 9절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인류의 문명 가운데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태초에 에덴동산 매우 가까운 기름진 이 시날 평지에서, 마귀를 경배할 목적으로 바벨탑을 짓는 첫 삽을 떴던 것으로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죠. 이 사탄의 첫 번째 전임 사역자를 바로 노아의 사악하고 배교적인 손자였던 니므롯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이 세속 역사는 니므롯이 자신만큼 사악하고 악마 같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녀의 이름은 세미라미스(Semiramis)라는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미라미스라는 여자는 장차 올 구세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곧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뻔뻔스럽게도 자신이 낳은 장자인 담무스, 즉 그녀의 아들이 그 예언을 성취한 메시아라고 선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담무스 숭배 사상이 바로 바벨론의 종교에서 시작되게 되는데,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남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담무스입니다. 이 풍요를 상징하는 담무스는 시리아의 아도니스와 애굽의 오시리스 숭배 사상과 연결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온 문명 가운데 이 담무스의 숭배 사상이 전파가 되는 것이죠. 사람들은 봄이면 담무스가 식물을 소생케 하지만, 하천이 마르고 식물도 시드는 여름이 되면 지하로 내려갔다가 그 이듬해 봄에 다시 올라온다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름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곡하는 의식을 가졌다가, 봄이면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기뻐하는 축제 의식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에스겔서에 보면 그 담무스를 위해서 애곡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다시 말해서 이 담무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것을 애곡하는 종교 예식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여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미라미스는 그 즉시 자신과 자기 아들을 거룩한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종교 체계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녀는 스스로 최초의 대제사장이 되었고 이와 같은 종교적 의식, 다시 말해서 그 어머니와 아들을 동시에 섬기는 이 '모자(母子) 숭배 사상'이 온 세계의 문명과 문화, 종교 가운데 퍼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디까지요? 모자 숭배 사상이 교회 안으로까지 유입되게 됩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 시절에 수많은 이방 관습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 이 모자 숭배 사상이 함께 들어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모습, 그것을 숭배하는 사상이 곧 이 담무스를 위해서 애곡하는 사상 가운데서 영향을 받았음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성소에서 담무스를 위해서 애곡하듯이, 지금 이 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이교의 사상과 숭배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 하는 것을 에스겔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자, 여기서 한 가지 우리는 더 살펴봐야 합니다. 정말 더 놀라운 사실입니다. 에스겔 8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 안, 약 25명이 하나님의 성소 의문과 제단 사이에서 동방 태양을 향하여 경배하고 있는 모습을 에스겔은 보게 됩니다. 여러분, 성소의 문은 동쪽에 있었습니다. 왜 동쪽에 있었는가 하면, 당시 고대 종교의 대부분은 태양 숭배 사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성소의 구조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를 서편에 배치하여, 백성들이 성소 안으로 들어올 때는 동쪽을 등지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서편을 향하여 들어오도록 설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방 태양 숭배 사상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 중의 하나였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보니, 성전 안에 모인 약 25명이 성소 안에서 동방을 향하여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방 태양을 숭배하는 사상, 어떻게 성소 안에서 태양을 숭배하는 일을 벌일 수 있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날 이 기독교의 안에 동방 태양을 숭배하는 이 태양신 숭배 사상의 유물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우리 함께 보시죠. 그게 바로 '일요일 준수 사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AD 321년에 일요일 휴업령을 내리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실 점성관인 율리우스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와 그리고 가이사랴 교회의 감독이었던 유세비우스를 어전에 불러들여서, 이 태양신과 기독교를 합하여 제3의 종교를 탄생시키도록 하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유세비우스 감독은 안식일 축제가 일요일로 변경됨을 선언하게 되는데, 당시 그들은 기독교에서 신봉하는 예수는 '의의 태양'이시요, 로마인들이 숭배하는 태양신인 그 불패의 태양 미트라(Mitra)와 동의어라고 주장하기 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태양이시요, 미트라도 불패의 태양이니 이 신은 이름만 다를 뿐 하나의 신이라고 주장을 했다는 것이죠.
이러한 논리가 교회의 일요일 예배를 합리화 혹은 정당화하는 그런 신학적 근거로 사용이 되었어요. 이들로부터 소위 일요일의 신성론, 그 후에 영혼멸멸설 등이 발생되었고, 나중에 크리스마스 축제와 마리아 숭배 사상들이 교회로 도입되게 된 것이죠. 이교의 사상들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학자 유세비우스도 고대의 일요일 신성론 학자들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 또는 의의 태양과 관련시켜 자주 언급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 태양의 날을 상징학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했습니다. 선데이(Sunday), 바로 태양의 날, 이 날에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죠. 자, 유세비우스의 저술 《시편 주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고스는 안식일 축제를 새로운 언약으로 인하여 빛의 부활일로 옮겼다. 그는 우리에게 그 빛의 첫날을 주님의 구원의 날에 있을 참된 쉼의 모형으로 주셨다. 이 빛의 날 곧 첫째 날이 참 태양의 날에 우리가 6일을 지내온 후 모이는데, 이 날 우리가 성스럽고 영적인 안식일로서 축제하는 바이다. 우리는 안식일에 수행해야 했던 모든 의무를 다 주의 날로 옮겼는데, 이는 이같이 하는 것이 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또 이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보다 뛰어난 높은 위치에 있고 더욱 영광스러운 날이기 때문인데, 사실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세상을 창조하셨던 날이 바로 이 날이라. 또 우리 영혼을 위하여 의의 태양이 떠오르던 날도 역시 바로 이 날이라."
그러면서 창조의 첫째 날 곧 일요일, 선데이, 태양의 날, 빛이 있으라 했던 그날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서 일요일 숭배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명백히 이것은 바로 이교의 사상이 우리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안에 바로 이 일요일 숭배 사상, 이교의 사상이 들어왔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기록들은 많이 있습니다. 여기 함께 보실까요? 《우리 기독교 안에 있는 이교 사상》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교회는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선별했다. 전승에 따라 대중으로부터 추앙받던 우상 숭배자들의 축제일들을 기독교가 물려받고, 그 우상 숭배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준 것은 명백히 교회의 모략이었다."
아울러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였던 스탠리 교수님은 그의 강의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고대 태양신에게 부단한 충성심을 바친 자들이 그들의 종교 의식 자취를 오늘날까지 남겨 놓았다. 지극히 거룩하며 우주적인 이 그리스도 교단에까지 그 흔적을 남겼다. 이 고대 우상 숭배자들이 명명한 '태양의 날'이라는 칭호의 존속은 대개 우상 숭배교와 그리스도교의 그 정조가 서로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이 법령은 제국 내에 불일치한 종교들을 공통의 제도 안에서 하나의 통일을 이루어 보려는 그의 의도였다."
여러분, 이 일요일 예배, 주일 숭배 사상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부활 이후 안식일이 폐지되고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기 시작했다고 하는 단순한 논리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요일 예배가 뿌리내리고 자리를 잡아 교회의 예배일로 확립되기까지는 수많은 이교도들과 로마의 황제들, 그리고 타협적인 신앙인들의 영향과 태양신과의 관계, 그리고 엄청난 투쟁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비성서적인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제사장 약 25명이 동방 태양을 향하여 경배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 내에 여전히 이교의 숭배 사상, 태양을 향하여 숭배하던 그 태양 숭배 사상 곧 주일 사상이 들어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소위 주일이라고 불리는 일요일이 하나님께서 엄중히 금지한 태양신을 숭배하는 날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그 우상을 숭배하는 날에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것은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울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 지금 에스겔은 그와 같은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는 어느 날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에스겔 20장 12절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31장 13절에도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내가 그분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에스겔이 인치는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 동방 태양을 향하여 경배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은 '울며 탄식하며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자들에게 인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자, 다시 요한계시록으로 넘어와서 요한계시록 7장의 나머지 부분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보니까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4만 4천 명은 우리는 상징적인 수로 생각합니다. 이 숫자는 분명히 $12 \times 12 \times 1,000$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2는 구약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수이며 또한 열두 사도의 터 위에 건축된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12라는 숫자는 구약과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 곧 구원받을 백성들의 상징적인 수로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보면 큰 무리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고 기록합니다.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여기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큰 무리와 방금 이야기했던 14만 4천 명을 같은 그룹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같은 패턴으로 요한은 이상을 바라봅니다. 어떤 패턴인가 하면, 처음에 요한은 이상을 볼 때마다 먼저 그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그는 그의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가 돌아서서 보니 일곱 촛대 사이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가 돌이켜 사자를 보았을 때 죽임당한 어린양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그는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에 대해서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보니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는 여자가 바로 바벨론이라는 이름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도 똑같은 패턴이 적용되고 있어요. 요한계시록 7장에서 그가 먼저 소리를 들으니 '십사만 사천'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돌이켜서 보니 그 무리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14만 4천 명이라고 들었고, 돌이켜 보니 큰 무리인 것으로 보아서 이 큰 무리와 십사만 사천은 같은 무리인 것을 우리는 확인해 보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요한계시록 7장 15절에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막을 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임재 장막을 그분의 백성 위에 펼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나게 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 백성들을 둘러 진 치셨던 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에스겔 역시 이 모습을 우리들에게 말하는데, 에스겔 37장 27절에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 에스겔 역시 이 장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둘러 진 치시는 그 모습 가운데서 이제 그 백성들에게 어떤 축복이 들리는가 하면, 요한계시록 7장 16절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 둘러 진 치셔서 친히 돌보시고 그리고 보호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바로 이와 같은 이상을 몇 세기 전에 똑같이 바라보았습니다. 이사야 49장 10절이에요. "그들이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뜨거운 열기와 굶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눈물과 이 큰 환난의 재앙의 시대가 다가올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을 맞은 백성들은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는 분명한 약속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7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큰 무리들의 모습을 함께 보았습니다. 우리 또한 그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둘러 진 치시는 장막 안에서 보호함과 인도하심을 누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쳐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시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공부한 것처럼, 에스겔은 우리들에게 권면하기를 울며 탄식하는 자에게 인을 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상들이 가득하고 세상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성전에서도 태양신을 숭배하는 가증한 일들이 오늘날 이 세계의 기독교 안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울며 탄식하라는 말은, 진정으로 마음을 찢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 울며 탄식하여 마음을 찢는 회개의 심령이 있는 자들에게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통하여 인이 채워질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벽성서학교 형제 자매 여러분, 요한이 바라보았던 하늘 보좌 앞에 있었던 십사만 사천의 무리에 들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진정한 회개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마음속 우상을 제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옴으로써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울며 탄식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자, 그렇게 울며 탄식하는 자에게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으로 하여금 인을 치시게 하겠다는 그 말씀을 여러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근묵자흑', 먹을 가까이할 때 검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탄식자흑', 탄식하며 회개하는 자에게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이 인을 쳐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심으로써,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이 하루의 삶이 진정으로 나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진리 앞으로 나오는 진정한 회개와 울며 탄식하는 경험이 함께하시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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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연 핵심 요약 정리
이 설교는 요한계시록 7장에 묘사된 '하나님의 인(In)을 맞는 백성'의 조건과 영적 의미를 다루며, 구약 에스겔 8~9장의 평행 환상을 통해 말세에 구원받을 무리의 특징과 교회의 세속화(태양신 숭배 유물)를 엄중히 경고합니다.
구조적 위치: 요한계시록 7장은 여섯째 인(재림의 징조)과 일곱째 인(재림) 사이에 삽입된 장으로, "진노의 큰 날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에 대해 '인을 맞은 십사만 사천(셀 수 없는 큰 무리)'이 능히 설 수 있다고 답합니다.
사방의 바람과 인침: 사방의 바람은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갈 전쟁과 재앙(심판)을 뜻하며, 네 천사가 이를 붙잡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구별된 소유권을 상징하는 '성령의 인침' 사업이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1. 인침을 받는 자의 조건: "울며 탄식하는 자 (탄식자흑)"
에스겔 9장의 환상에서 '먹 그릇을 찬 사람'은 예루살렘 성읍 중에서 벌어지는 가증한 일로 인해 '울며 탄식하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렸고, 표가 없는 자들은 심판을 면치 못했습니다.
성소의 오염: 구약의 성전 벽에 가득했던 우상들과 지도자들의 배교는 신약 시대 '하나님의 성전인 인간의 마음'이 온갖 세상 정욕과 투기,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영적으로 상징합니다.
참된 회개: 인을 맞는 자들은 단순히 먹을 가까이해 검어지는 자(근묵자흑)가 아니라, 교회의 타락과 자신의 죄악을 보며 '마음을 찢고 울며 탄식하며 철저히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2. 기독교 내 유입된 이교의 유물 (태양신 및 모자 숭배)
에스겔 8장에 묘사된 가증한 우상 숭배 행위들은 현대 기독교 역사 속 비성서적 제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자(母子) 숭배 사상 (담무스 애곡): 바벨론의 니므롯과 세미라미스, 아들 '담무스'의 메시아 사칭에서 기원한 모자 숭배가 중세 로마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숭배'로 변형 유입되었습니다.
일요일 준수 사상 (동방 태양 경배): 성전 안에서 동방 태양을 경배하던 가증한 행위는 AD 32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일요일 휴업령을 기점으로 기독교 안의 '일요일(Sunday, 태양의 날) 준수'로 고착화되었습니다. 이는 가톨릭교회 및 유세비우스 등이 미트라 교(태양신 숭배)와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대타협하여 정당화한 성경 외적 유물입니다.
3.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큰 무리
동일한 무리의 다른 표현: 요한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로 '십사만 사천(12x12x1,000)'이라는 상징적 수를 들었고, 돌이켜 보았을 때는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였습니다(요한계시록의 전형적인 청각-시각 전환 패턴).
구원의 약속: 환난을 통과한 이 무리 위에 하나님께서 친히 장막을 치시어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두르실 것이며, 다시는 주리거나 목마르거나 뜨거운 재앙의 기운에 상하지 않도록 영원한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 최종 결론: 하나님의 인을 맞고 재림의 날에 넉넉히 서는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외적인 옷을 찢는 형태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내 마음의 성전에서 우상을 제하고, 교회의 세속화를 보며 '마음을 찢고 자복하는 철저한 회개(울며 탄식하는 경험)'를 통하여 영적 안식일의 진리를 회복하고 다가오는 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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