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울수록 우리는 따뜻한 곳을 찾게 된다.
따뜻한 난로
따뜻한 안방
따뜻한 안방에 가면 금방 손이 녹고
얼어죽을 것 같은 몸이
새로운 활기를 얻는다.
이 모두가 다 태양에너지의 덕분이다.
우리가 매일 쓰는 전기에너지는 사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전기라는 편리한 형태로 ‘변신’시키는 과정이다.
화력발전은 석탄, LNG 등을 태우는 것인데, 태양에너지를 저장한 것들에서 에너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수력발전은 높은 곳에 가둬둔 물을 아래로 떨어뜨릴 때 발생하는 위치 에너지가 수차(터빈)를 돌려 전기를 얻는다.
그것은 태양에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대기와 해수의 순환, 풍화, 침식, 물의 증발, 식물의 광합성 등 지구상 거의 모든 자연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풍력발전 역시 태양에 의해 대기의 순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태양의 그 엄청난 에너지는 태양의 중심부에서는 수소 원자핵들이 엄청난 압력과 15,000,000°C에 달하는 고온 속에서 서로 충돌하여 헬륨으로 변하는 **'양성자-양성자 연쇄 반응(Proton-Proton Chain)'**이 일어난다.
태양은 매초 수억 톤의 수소를 태우고 있지만, 한꺼번에 터져버리거나 중력에 의해 찌그러지지 않는다. 안에서 밀어내는 핵융합의 팽창력과 밖에서 누르는 중력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 '정역학적 평형(Hydrostatic Equilibrium)'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균형이 아주 조금만 어긋났다면 지구는 불바다가 되거나 얼음 행성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거대한 불덩어리를 '정교한 저울' 위에 올려두신 것처럼 다스리고 계시다.
그 따스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상한 돌보심이 우리의 가정으로 전기에너지로 변화하여
빛이 되고, 따스한 난로가 되는 것이다.
빛은 에너지입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빛은 밝음입니다.
빛은 따스함입니다.
빛은 오색찬란한 색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런데 인간이
참 빛으로 나아가면
자신의 실상을 더 또렷하게 알게 됩니다.
빛으로 나아가면
어둠을 버리는 시간이 더 많아지며
회개의 깊이가 더해진다.
그래서 죄를 버리게 되며
더욱 순결해지고
더욱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왜 많은 사람들은
생명의 길인 좁은 문을 거부하고
넓은 길, 사망의 길을 가기를 좋아할까?
자신의 욕심
자신의 죄를 버리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처음 경험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그의 사역중기에 그는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그는 더 나아가 그의 사역말기에 하나님앞에 단독자로 서는 깊은 은혜를 경험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가 갈수록 더 많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더욱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주님의 품성과 너무나 대조되는
자신의 죗됨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자기자랑을 할 여유가 없다.
주님의 사랑을 참으로 아는 자는
주님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자이다.
모두가 은혜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며, 자비이기 때문이다.
찬송가의 아버지로 유명한 아이작 와츠 (Isaac Watts; 1674~1748)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젊은 신학자 아이작은 조용히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가 읽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사야 53:5)”
그 말씀을 읽던 순간, 그는 심장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까지 고통을 당하셔야 했을까?”
그리고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고통은 바로 내 죄 때문이구나.”
그는 성경을 덮고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나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하고 선한 것 하나없는 죄많은 죄인인데… 주님이 왜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죽으셨을까?”
그 순간 마음속에서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Alas! and did my Savior bleed, And did my Sovereign die?)
아이작 와츠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가 더 이상 신학 지식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사랑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찢듯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Would He devote that sacred head For such a worm as I?)
그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가 크게 보였기 때문에 자신을 벌레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마음 속에는 말할 수 없는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웬일인가 웬 은혜인가
그 사랑 크셔라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남겨진 찬송이 바로 <웬 말인가 날 위하여 (Alas! And Did My Savior Bleed> 입니다.
아이작은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가장 아름답게 보입니다.” 🌱
[누가복음 18:14]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신앙에는 비례의 법칙이 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죄성이 더 깊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죄성을 깨닫는 만큼 우리는 죄에서 더 멀어집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 십자가는 은혜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있는 사람에게 은혜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즉 은혜의 유통기한이 길어집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멀어질수록 자신의 죄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이 단지 조금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면 복음은 단지 좋은 이야기로 남지만,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복음은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뒤 주님을 위해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도바울, 노예 상인이었다가 회심한 존 뉴턴, 폭력적인 삶을 살다가 복음을 만나 변화된 김일도 목사.
그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았고 그래서 은혜를 더 깊이 붙잡았습니다.
인간의 전적 부패를 해결할 길은 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뿐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이 고백이 살아 있기를 소망하며,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 의지하며 겸손히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의 자기 의와 교만을 무너뜨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 붙드는 믿음을 주옵소서.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제 죄를 더 깊이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음 속에서 더 큰 은혜와 감사가 흘러나오게 하옵소서.
남을 판단하기보다 거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겸손히 살아가게 하시고
은혜의 감격이 식지 않게 하셔서 제 삶 속에 은혜의 유통기한이 길어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