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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소식들

왕대아 선교사의 역사 2부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08|조회수38 목록 댓글 0

"러셀 박사와 남편은 작은 관을 만들었다. 나는 아이의 시신을 그 안에 눕혔고, 우리는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산비탈의 작은 무덤에 우리의 귀한 아기를 묻었다." -- 왕대아(Theodora Wangerin) 선교사의 8부 회고담 제2부에서 가장 가슴 아픈 대목입니다. Youth's Instructor, 1965년 8월 24일, 7, 8, 20 쪽에 실렸습니다.(https://documents.adventistarchives.org/Periodicals/YI/YI19650824-V113-34.pdf).

* * *

“선교사들이 첫 개종자를 보기까지 여러 해 동안 일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그 일요일 오후 모임에서 마지(Margie)가 말했다. “휴가를 떠나기 전에 사역의 결과를 보셨나요?”

“예, 보았습니다. 우리는 많은 회심과 놀라운 삶의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우리가 언덕 비탈에 천막을 친 지 아홉 달 뒤, 스무 명의 침례 후보자들이 철길 건너편의 한 개울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남편 루퍼스(Rufus; 한국명: 왕아시)와 나는 종종 아이들을 등에 업고, 손에는 전도지를 들고, 물에 잠긴 논 사이로 난 좁은 길과 밭둑길을 조심스럽게 지나 주변 마을들을 찾아갔다. 병든 사람들을 방문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기 위해서였다.

선교지부를 연 지 1년 안에, ㄱ자 모양의 한국식 건물 안에 학교가 세워졌다. 그 건물은 한국인 교사들의 거처로도 쓰였고, 안식일에는 교회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여성들을 위한 수업이 열렸고, 그들은 건강과 위생, 보건에 관한 기초 초등 교육을 받았다. 남성들에게도 실제적인 교육이 주어졌고, 변소 짓는 법도 가르쳤다. 이 주제의 근거로 신명기 23장 12절에서 14절이 사용되었다.

[신 23:12-14: 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그리로 나가되. 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진흙벽으로 된 교회에서 전도 집회가 열렸다. 군중이 너무 많을 때에는 야외에서 집회를 열었다. 남자들과 여자들, 아이들은 화면에 비친 복음 찬미를 보며 노래를 배웠다. 벽에 시트를 못으로 박거나 나무에 매달아 스크린으로 사용했다.

남쪽에서 겪은 우리 모험의 두드러진 순간들을 돌아보면, 그중에서도 한 가지가 모든 것보다 뚜렷하게 떠오른다. 어느 날 아침, 성경 교사인 여성과 나는 몇 주 동안 안식일학교에 나오지 않은 한 노파를 방문하러 가고 있었다.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 소를 끌고 오는 한 남자를 만났다. 내 동행자는 무사히 지나갔고, 나 역시 그러지 못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내가 지나가려는 순간, 그 소는 내 검은 외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나를 길 밖으로 밀어 버렸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가파르고 바위투성이인 골짜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5분이나 10분쯤 뒤, 나는 약 20피트 아래 골짜기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는 상처와 멍이 나 있었다. 길가에서 몇 분 쉬고 난 뒤, 우리는 다시 길을 계속 갔다. 그날 분명 천사가 나를 지켜 주었다.

젊은 남성들이 선발되어 더 먼 곳까지 인쇄물을 전하도록 훈련받았다. 여러 해 동안 사역에 머물러 일할 강한 지도자들이 경산에서 길러졌다. 기별이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루퍼스는 한 번에 며칠씩 집을 떠나 있곤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이면 그는 나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무슨 일을 당해도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너를 돌보시리라.
그 사랑의 날개 아래 거하라,
하나님이 너를 돌보시리라.

하나님이 너를 돌보시리라,
날마다, 모든 길에서.
그분이 너를 돌보시리라,
하나님이 너를 돌보시리라.”

— C. D. 마틴

내가 노래를 부르면 남편은 그 곡조를 휘파람으로 불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런 때에 예수님은 특별히 더 귀하게 느껴졌다.

1915년 봄, 조선 북부 순안에서 총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대총회장 A. G. 다니엘스 목사, 원동지회장 R. C. 포터 목사, 지회 서기 J. E. 풀턴 목사, 그리고 한국 사업 책임자인 C. L. 버터필드 목사가 그 지역의 필요를 살펴보기 위해 경산에 들렀다.

그들은 주변 마을들을 내려다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작은 흰색 목조 주택과 교회 및 학교로 쓰이던 ㄱ자 모양의 한국식 건물은, 선교지부 바로 뒤편에 솟아 있는 산에 비해 아주 작아 보였다. 산꼭대기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120개가 넘는 마을들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조선 남부의 사역을 위해 기도했다.

일꾼 부족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다니엘스 목사가 물었다. “자, 형제들이여, 만일 웽거린 형제가 병들어 죽거나, 다른 이유로 이 지역을 떠나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구를 보내 그의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버터필드 목사가 대답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사람을 빼내어 이곳으로 보내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조정을 하든 그곳에는 빈자리가 생길 것입니다.”

이 말은 예언처럼 드러났다.

우리는 곧 선교 생활이 끊임없는 승리와 햇살만으로 이어지는 연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밤중의 노래”를 주시는 때가 있다. 우리의 길 위에 그림자가 드리울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설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분이 돌보신다는 것을 안다.”

순안에서 열린 총회가 끝난 뒤, 선교사들은 상하이에서 열릴 원동지회 회의에 참석하도록 초청받았다. 여섯 가족, 독신 여성 두 명, 어린아이 아홉 명, 그리고 한국인 대표 두 명이 기차를 타고 육로로 상하이까지 여행했다. 그들은 만주의 묵덴(Mukden)과 중국의 베이징에서 중간 체류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의 놀라운 열흘은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갔다. 우리는 회의와 동료 선교사들과의 교제를 즐겼다. 루퍼스는 이 회의에서 복음 사역자로 안수받은 세 명의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상하이에서 일본 나가사키까지 배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차로 모지(Moji)까지 갔고, 거기서 연락선을 타고 해협을 건너 한국 부산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경산에서 또 한 해를 분주히 보냈다. 사역은 확장되고 있었고, 여러 곳에서 빛의 줄기들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기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기쁨을 경험한 문서전도자들, 곧 전도지와 잡지 묶음, 책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여행 판매원들”이 먼 곳들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남편은 몇몇 한국인 일꾼들과 함께 외딴 산간 지역으로 순회 방문을 떠났다. 그곳에는 침례를 기다리는 여러 후보자가 있었다. 방문이 이루어졌고, 침례 후보자들에 대한 문답이 진행되었다.

안식일 오후, 신자들은 침례식을 위해 작은 개울가에 모였다. 침례가 끝난 뒤 남편이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을 때, 침례를 받으리라 기대하고 먼 곳에서 온 한 남자가 도착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 무리의 지도자가 말했다. “예식은 끝났고, 우리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실망한 남자는 외쳤다. “하지만 저는 침례를 받고 싶습니다! 먼 길을 왔습니다. 발은 아프고 물집이 잡혔습니다. 하루 종일 길을 걸었습니다. 이곳까지 오는 데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걸렸습니다.”

그는 루퍼스를 향해 물었다. “목사님, 저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언제 제 마을에 오셔서 저에게 침례를 주시겠습니까?”

외딴 지역에서 온 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남편은 다시 젖은 옷을 입고 그 형제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새 교인은 기쁨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전도자들은 경산에 있는 집을 향해 떠났다. 밤사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육로 여행은 걸어서, 또 말을 타고 이루어졌다. 각 일꾼의 개인 물품 중 하나였던 이부자리 꾸러미는 밤이면 바닥에 펼쳐졌다.

일꾼들은 거센 비를 만났다. 진흙탕에 빠지고, 온몸이 흠뻑 젖고, 뼛속까지 차가워진 채 그들은 더디게 나아갔다.

“이런 날씨에 계속 갈 수는 없습니다!” 설교자가 다른 일꾼들에게 외쳤다.

“이러다가는 죽을 만큼 심한 감기에 걸릴 겁니다.” 교사가 맞장구쳤다. “길도 물에 잠길 테고, 우리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겁니다.” 그가 덧붙였다.

경험 많은 여성 성경 교사가 말했다. “계속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처음 만나는 주막에 들러 하늘이 개기를 기다립시다.”

쏟아지는 비 속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한국식 주막, 곧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에 머무는 것이었다. 지치고 춥고 기진맥진한 그들은 비가 그치고 홍수가 빠지기를 기다렸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도 없었기에, 젖은 옷을 입은 채 다리를 접고 바닥에 둘러앉아 몸을 웅크렸다.

그들이 경산에 도착한 날 밤, 남편은 심한 감기와 마른기침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몇 주 뒤, 아버지의 크고 갈색인 눈을 닮은 우리의 셋째 딸 메이블(Mabel)이 가족의 품에 들어왔다. 러셀 의사는 남편의 건강을 상당히 염려했다. “일본식 목욕통을 구하십시오.” 그가 말했다. “뜨거운 목욕을 하며 감기를 떨쳐 보십시오.”

우리는 그의 제안을 따랐다. 겨울 동안 그 마른기침은 사라졌다. 이른 봄, 버터필드 목사와 루퍼스는 제주도로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제주도는 훗날 한국전쟁 때 피난처가 된 섬이다. 문서전도자의 사역으로 맺힌 첫 열매인 여러 안식일 준수자들이 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례가 끝난 뒤 선교사들은 관심을 가진 신자들의 다른 세 무리도 방문했다.

거센 태풍과 폭우 때문에 그들은 예정대로 본토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고 얼굴을 후려치는 가운데, 그들은 닷새 동안 그 섬에 갇혀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가난과 무지와 미신 속에 사는 섬 주민들을 보았다.

그들은 사방 8피트 크기의 작은 방 하나가 딸린 조그마한 주막에서 몸을 피했다. 충분한 난방도, 제대로 된 음식도 없이 그들은 폭풍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제주도에서 바람과 파도를 몰아치게 한 그 태풍은 경산에도 그 분노를 쏟아부었다. 밤에 아이들과 함께 나 혼자 있을 때, 폭풍은 우리 집 양철 지붕 일부를 뜯어냈다. 폭풍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남편을 생각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 주시기를 기도했다.

바다에서 배들이 침몰했다는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남편에게서 아무 소식도 없었고, 예정된 때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안전을 몹시 걱정했다.

마침내 그가 우리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다시 함께하게 된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또 한 번 심한 감기를 안고 돌아와 몹시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이 났고 날이 갈수록 기침은 점점 심해졌다.

일주일 뒤, 서울에서 위원회 모임에 참석하던 중, 우리 선교부 의사인 러셀 박사가 남편에게 말했다.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브란스의 의사와의 면담은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진단은 결핵이었다. 권고는 즉시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남편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고,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루어진 일은 아직 너무 적었고,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너무 많았다.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고치실 수 있는 위대한 의사이신 주님을 믿으며, 그는 야고보서에 나오는 교훈에 따라 특별 기도를 요청했다.

믿음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확신한 그는, 선교지를 떠날 뜻 없이 경산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몇 주 뒤, 루퍼스는 심한 늑막염에 걸렸다.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그림자 속에 서 계시며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 뒤, 아기 메이블이 병들었을 때 우리의 믿음은 심하게 시험받았다. 증상을 진단할 수 없었던 나는 아기를 데리고 대구의 선교병원으로 갔다. 급히 진찰을 마친 의사는 말했다. “아이에게 심각한 이상은 찾을 수 없습니다. 아이가 영양 부족인 듯하니 수유를 보충해 보시기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의사의 지시를 따랐다. 아기가 새로 먹인 조제유를 받자마자 곧바로 토해 내더니 경련을 일으켰다. 우리는 그날 밤 내내 아이 곁에서 뜬눈으로 보냈다. 아침이 되자 아이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는 아이를 담요로 감싸 안고 몇 분 뒤 도착할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달려갔다. 대구에 도착하자 나는 인력거에 올라 병원으로 달렸다. 그 사이 아이의 작은 몸은 계속되는 경련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더 자세히 진찰한 뒤, 의사가 말했다. “아기는 정말 몹시 아픕니다. 경산으로 다시 데리고 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집에 방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이 작은 환자를 제가 지켜보고 싶습니다.”

증상이 소아마비나 척수막염과 비슷했기 때문에, 우리는 격리되었다.

러셀 박사는 밤기차를 타고 내려와 곧장 병원으로 왔다. 그는 한눈에 생명이 빠르게 꺼져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후에 우리는 경산으로 돌아왔고, 다음 날인 6월 첫 안식일에 메이블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우리는 욥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러셀 박사와 남편은 작은 관을 만들었다. 나는 아이의 시신을 그 안에 눕혔고, 우리는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산비탈의 작은 무덤에 우리의 귀한 아기를 묻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 안에서 잠든 자들을 부활의 아침에 일으키실 것이라는 약속은 그 시간에 우리에게 참으로 귀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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